50화
“방금까지 다 외운 것 같더니 왜 또 이래?”
반복되는 스텝 덕에 난이도가 대폭 내려가긴 했지만 움직임은 훨씬 요란스러웠다. 그만큼 체력이 많이 소모돼서 편한 길로 가려는 몸뚱어리가 저도 모르게 디테일을 생략하기 일쑤였다. 채일은 그럴 때마다 이를 깐깐하게 짚어 댔다.
천천히 하면 되는데 노래랑 같이하면 자꾸 마음이 급해지는 바람에 동작이 단순해졌다.
“아니, 그게 아니고! 이렇게 전진, 옆, 후진, 전진, 옆, 후진! 이걸 못 해? 오른발 백, 왼발 백, 그다음 사이드스텝!”
처음엔 지적이었지만 두 번째부턴 점점 짜증이 섞였다. 도대체 이 쉬운 동작을 왜 틀리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일은 왜 외워 놓고도 틀리냐는 말만 반복했다. 찬우는 확실히 인내심이 깊은 편이었다. 이진은 새삼 그가 그리워졌다.
“완벽히 외운 게 아니라서 그래. 몸이 외운 게 아니잖아. 연습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외운 거면 외운 거고 못 외운 거면 못 외운 거지. 형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채일은 점점 퉁명스러워지는 말투를 숨기려고 노력했지만, 이미 이진은 그가 자신을 진심으로 답답해하는 걸 느끼고 풀이 죽었다. 그 어두운 표정을 본 채일도 힘이 빠지는지 한숨을 푹 쉬었다.
“채일아, 다 좋은데 이따 다른 애들 가르칠 땐…….”
“말조심할게.”
상황은 그렇게 일단락되었으나 연습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 안무의 디테일한 부분을 손보는 과정에서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자 몸도 지치고 기운도 안 났다. 결국 이진은 피곤한 상태로는 아무것도 못한다고 설득해 채일을 연습실에서 쫓아냈다.
“방에 가 있다가 주헌이 깨면 같이 내려와. 너도 쉬어야지.”
채일은 이 정도로는 지치지도 않는다며 항의했지만 어제 잠을 못자긴 했는지 끝내 눈을 비비며 방으로 돌아갔다. 연습실에 홀로 남은 이진은 바닥에 드러누워 조금 쉬다가 일어나 몇 번 더 천천히 동작을 연습했다. 대체 골반은 왜 이렇게 많이 씰룩대는지 존재도 느껴 본 적 없는 근육이 뻐근했다.
그렇게 두어 번 혼자 춤 연습을 하다 불현듯 막상 노래는 불러 보지도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파트를 맡고 있는 터라 부랴부랴 연습실 구석에 있던 가사지를 주워 들고 첫 소절을 불러 보는데 짜증 나게도 음역대가 묘하게 안 맞았다. 노래가 개운하지가 않았다.
“사랑을 갈망해. craving your love…….”
불만스레 같은 소절을 몇 번 더 부르던 이진은 결국 가사지를 허공으로 던지고 제자리에 철퍼덕 쓰러졌다.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지.’
과거로 돌아오기 전의 이진은 정해진 규칙대로 살았기 때문에 기분이 좋으나 나쁘나 다음에 할 일이 정해져 있었다. 아무도 없어 적막한 집이 끔찍해지면 TV를 켰고, 알바 도중 만난 진상 손님 때문에 일을 때려치우고 싶더라도 다음 날 일어나면 늘 그렇듯 정해진 시간에 출근을 했다. 누군가 자신을 귀찮고 성가시게 하면 무시해 버렸다.
그런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24시간 카메라가 붉은빛을 깜빡이며 감시해 댔다.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되고, 도움이라곤 하나도 안 되는 놈들이 동료랍시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쩌면 지금 이진은 채일에게 ‘도움이라곤 하나도 안 되는 놈들’일지도 몰랐다. 누군가에게 짐이 된다는 생각은 이진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좀처럼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우진이 자꾸 이진을 밝게 맞아 주며 좋아하는 티를 숨기지 않는 것도 싫었다. 타인이 멋대로 만들어 놓은 환상에 미치지 못했을 때, 혼자 기대했다 실망한 사람들이 돌아서는 모습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매일 아침 몸을 움직이는데도 기초 체력이 부족한 건 어떻게 해야 할까. 별것도 아닌 지적에 상처를 받고 우울해지는 성격은 어떻게 고쳐야 할까. 이제 고작 2라운드였다. 분명 다음 라운드로 진출할 사람들은 한 명, 한 명 실력이 더 뛰어날 테고 그만큼 기준도 높아질 거다.
이진은 자신이 그들에게 쓸모없는 존재가 되면 어떡하지 하는 고민에 빠졌다. 혹은 그 전에 최종 라운드에도 올라가지 못한다면…….
“오, 연습 중이에요?”
한창 이진이 우울한 생각에 빠져 허우적대는데, 연습실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엎어져 누워 있던 몸을 벌떡 일으키며 문을 확인하자 안면이 있는 제작진 한 명이 보였다. 이진에게 스타성을 운운했던, 참가자들을 곤란에 빠트려 놓고 즐겁게 웃던 그 사람.
“안녕하세요.”
“연습 중에 방해해서 미안해요. 잠깐 할 얘기가 있어서.”
남자는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와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이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마주 보고 바로 섰다. 무슨 이야기든 반길 만한 소식은 아닐 듯했다. 멀뚱한 표정으로 남자를 응시하자 그가 과장된 미소를 지으며 양팔을 벌렸다.
“이진 씨는 순수해서 참 좋아.”
이진은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순수하다는 말이 좋은 뜻으로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순수하다거나 순진하다는 말은 잘 쳐줘 봐야 눈치가 없고 세상 물정 모른다는 의미였다.
그는 이진이 별 반응을 하지 않았음에도 아무렇지 않게 본론을 꺼냈다.
“별건 아니고 이번 주에 시청자에게 보내는 메시지 형식으로 프로그램 광고 들어갈 거예요. 전부는 못 하고 팀별로 두 명씩만 나갈 건데, 리더 한 명이랑 팀원 한두 명씩 한 샷. 그러니까 이진 씨가 내일까지 같이 나갈 한 명 골라 줘요.”
바짝 긴장한 것치고는 다행히 정말 별것 아닌 내용이었다. 스태프와 출연진 사이에 흔하게 오고 갈 수 있는 사무적인 대화. 그러나 촬영장에서 어느 정도 입지가 되어 보이는 그가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고 직접 이진을 찾아온 것은 조금 신경 쓰였다.
그러나 그는 정말 그 말을 전달하는 것만이 목적이었는지 바로 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 연습실에서 완전히 발을 빼기 직전에 몸을 돌리며 한 말이 아니었다면 이진은 괜한 오해를 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아, 참. 팀원들한테는 이런 뒷얘기 하면 안 되는 거 알지?”
남자가 갑자기 몸을 돌려 이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건 말해 봤자 괜히 분란만 생기니까 적당히 처신 잘 해요. 이진 씨는 여우인 것 같다가도 천상 곰이 따로 없다니까.”
“하하……. 적당히 얘기할게요.”
여우와 곰에 빗댄 표현은 은연중 이진과 그의 권력 관계를 암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진은 충분히 무례한 표현에도 그에게 항의 한마디 할 수 없었다. 그저 그의 거들먹거림을 전혀 읽지 못한 척 최대한 또렷한 목소리를 만들어 내 대답했다.
그가 뱉는 문장, 단어 하나하나가 귓구멍에 진득하게 달라붙어 이명을 만들었다. 이명과 심장의 요란한 고동 소리가 너무도 커서 이진은 자신의 호흡이 거칠어지지는 않았는지 똑바로 확인할 수 없었다. 강자 앞에서 불쾌한 기색조차 비칠 수 없는 스스로가 비겁하게 느껴졌다.
“그럼 수고하고. 무대 기대하고 있을게요.”
눈앞에서 문이 닫히고 히죽 웃는 얼굴이 두꺼운 벽 뒤로 사라졌다. 불쾌감의 원인은 더 이상 방 안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한번 뒤집힌 속은 좀처럼 잠잠해지지 않았다. 무슨 영문인지 남자의 얼굴은 똑바로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가 했던 말만은 뇌리에 박혀 환청처럼 들려왔다.
사실 그가 이진에게 해로운 행동을 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자칫 엇나갈지도 모르는 이진에게 경고를 해 주는가 하면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이런저런 말도 건넸다. 비록 이진이 바라진 않았지만, 공정하게 프로그램을 꾸려 가야 할 그의 입장에선 그럴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이진을 신경 쓰고 챙겨 주는 척 간섭하는 행동은 분명 호의에 가까웠다. 거기에서 억지로 악의를 읽을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불안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묘한 언행도 그렇고 남자의 의도가 투명하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그중 가장 꺼림칙한 것은 그가 자신의 위치를 충분히 알고 즐기고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윈올은 서바이벌 프로그램 중에서도 유난히 능력에 따른 차등 대우가 심했다. 또 그로 인해 싹트는 부정적인 감정에 많은 초점을 맞췄다. 편집으로 은근슬쩍 가리고는 있지만, 그래서 더 악질적이었다. 보는 사람이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고 비윤리적인 처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인간 내면의 저열한 본성을 간지럽힌다.
하지만 이진이 아무리 그런 감정놀음을 혐오할지라도 제작진을 막무가내로 비난할 수는 없었다. 이진은 성공을 위해 자신의 선택으로 이 진창에 걸어 들어왔다. 그 역시 피해자이자 공범인 셈이었다.
그럼 정말 성공만을 보고 달려야 하는데…… 여전히 어딘가에 발이 묶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진의 걸음을 묶은 것은 간단했다. 그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경계들이 이진을 약하게 만들었다.
이렇듯 몇 번이나 되풀이되는 고민 끝에, 그 둘의 균형을 맞추고 공존해야 함을 깨달았지만 막상 이렇게 감정적으로 궁지에 몰릴 때면 양쪽 모두를 버리고 달아나고만 싶었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 그때처럼, 차라리 외로움에 사무쳐 마음이 앙상해질지라도.
“하아…….”
더 이상 연습실에 있어 봤자 연습은커녕 기분만 나빠질 것 같았다. 이진은 연습실을 나가 제일 처음 마주친 스태프를 붙잡고 작업실의 위치를 물어본 뒤 한동안 그곳에 짱 박혔다. 우울할 때마다 작업을 했더니 이제는 관성처럼 컴퓨터 앞에 앉아야 진정이 됐다. 작업 공간은 이진에게 익숙했다. 적어도 사방에 거울이 있는 댄스 스튜디오보다는 훨씬 아늑했다.
이진은 편곡용 복사 파일을 만들어 실행시켰다. 부팅이 끝난 프로그램 화면이 모니터를 꽉 채우자 손에 익은 대로 윈도우 세팅부터 바꿨다. 시퀀스들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내장된 가상 악기 목록을 한번 훑자 머리가 차가워지고 얼추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도대체 누구를 옆에 세워 놔야 좋을까. 이진이 선택한 단 한 명만이 방송 외 시간에도 시청자들에게 얼굴을 비칠 수 있다. 방송을 챙겨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존재감을 어필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가뜩이나 출연진이 많은 이 프로그램에서 투 샷은 상당히 귀했고, 프로그램의 특성상 내가 좋아하는 멤버만을 응원할 수 없기에 시청자들은 관계성에 더 매달린다.
열심히 한 만큼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면 역시 채일이 받아 마땅했다. 하지만 방송 시기를 고려했을 때, 4화가 방영되면 리더들의 이미지가 썩 좋지만은 않을 것이 뻔하니 전략적으로 수원과 함께 나오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했다.
이전 팀이었다면 데리고 가고 싶은 사람이 너무 많아 고민이었겠지만, 지금 팀에선 데리고 가고 싶지 않은 사람만 수두룩해 곤란했다.
이진은 멍하니 그런 생각들을 하며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