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승현이 어깨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더니 이진의 몸을 단단히 붙든 팔을 풀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어정쩡하게 팔을 들고 선 이진이 승현을 올려다봤다. 그가 한껏 후련해진 표정으로 픽 웃었다.
“별거 아니었네. 이제 됐어요.”
그리고 그대로 이진을 스쳐 지나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이진이 아무것도 못하고 멈춰 버린 사이에 물을 틀고 양치질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뒷목이 뻐근해지며 머리통으로 열이 몰렸다. 머릿속이 온통 ‘뭐지?’라는 물음으로 가득 차 제대로 사고할 수가 없었다.
‘뭐야, 저 자식…….’
방금 전까지 귀엽게 이진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을 질투하니 뭐니 난리를 치던 녀석이 한번 안아 줬더니 볼 장 다 봤다는 듯 태연히 화장실로 씻으러 들어갔다. 감히 씻지도 않은 얼굴을 어깨에 문댄 건 그렇다 치고 이렇게 태도를 싹 바꾸는 건 대체 뭐란 말인가?
‘왜 짜증이 나지?’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문제될 게 없었다. 승현은 이진 때문에 소외감을 느꼈고, 이진은 이를 해소해 주기 위해 한번 안아 줬으며 승현은 그 대처에 만족해 돌아간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진은 그의 태도가 서운했다.
고맙다고 말해 주기라도 했으면 이런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그도 분명하진 않았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진이 이렇게 혼란스러운 건 전부 승현의 탓이라는 것이다.
이진은 화장실 문에 분노의 발길질을 한번 날렸다. 커다란 쾅 소리와 승현이 놀라 쿨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꼴좋다고 생각하며 아랑곳 않고 방을 나가 식당으로 향했다.
분명 승현의 행동이 이진을 거슬리게 했다. 그러나 대체 왜 짜증이 나는지 명확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대게 녀석과 관련된 감정들은 늘 모순적이고 불명확한 것들 투성이였다. 승현을 흠씬 두들겨 패면 이 분노가 풀릴 것 같기도 했다.
“아…….”
씩씩대며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가던 걸음이 점차 느려지고 이진은 곧 복도 한복판에 멈춰 섰다. 그러고 보니 결국 하려던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하여간에 전부 선승현 탓이었다.
친구를 공유하다 보니 승현과는 필연적으로 식당에서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이진이 막 수저를 들 무렵 나타난 승현이 의자를 드르륵 빼며 옆자리에 앉았다.
“이진이랑 승현이도 찬우 쌤의 특강을 받아 볼 테야?”
승현이 자리에 앉자마자 찬우가 웃긴 목소리를 내며 물었다. 웃기긴 한데 어디가 웃긴지 확실히 꼬집어 내기 어려워 이진은 고개만 갸웃했다.
“밥 먹고 우리 팀에 노답 몸치들 모아서 강습할 건데 너희도 와. 다른 팀이지만 특별히 공짜로 해 줄게.”
“나는 받기로 했어.”
미열이 엄숙하게 한 손을 들며 말했다. 확실히 미열에겐 수업이 필요할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승현은 대답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밥을 받으러 갔다. 찬우는 확실히 좋은 선생님이었다. 이진은 채일에게 가기 전 잠깐 정도는 들어도 좋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귀가 솔깃했다.
“이진이도 올래? 우진이도 온대.”
그 말을 듣자 갑자기 흥미가 뚝 떨어졌다. 이진은 괜히 젓가락으로 멸치조림을 뒤적였다.
“음…… 괜찮아.”
“왜에? 이진이 춤 다 외웠어?”
“그건 아닌데 우리 안무 수정 들어갈 것 같아서.”
이진이 제 자연스러운 변명에 스스로 감탄할 때 식탁 위로 된장국 한 그릇만 담긴 식판이 탁 소리를 내며 올라왔다. 찬우가 흥미가 생겼는지 반짝이는 눈으로 물었다.
“오. 누가 수정해? 엄채일인가 걔?”
“임채일이야. 아마도 걔가 할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 내가 뭐라도 알면 돕기라도 할 텐데.”
“글쎄다. 편곡은 어떻게 할 건데?”
미열이 건포도를 골라 낸 식빵을 질겅였다. 시큰둥한 말투를 보아하니 미열은 이진을 괴롭히는 존재인 채일이 꽤 맘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이진은 이를 의리로 받아들여야 할지 편견이라 불러야 할지 고민하다 그냥 미열이 바꿔 버린 화제를 따라가기로 했다.
“누가 해 주는 거 아니었어?”
“말도 마. 전문가라고 해 놓고 대학생 알바 데려다가 시키는 것 같아. 적어다 주면 작업이야 얼추 해 주겠지만, 그래도 할 줄 아는 사람 있으면 작업실 빌려다 직접 하는 게 낫겠더라.”
알아들었다는 듯 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싼 멘토들을 불러 놓더니 그런 데에서 인건비를 아끼는 모양이었다.
미열은 자기네 팀은 우선 의견을 모아 본 뒤 직접 작업할 거라며 시간이 되면 같이 작업하자고 말했다. 이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팀원들을 떠올려 봤다. 자신 외에는 바탕 화면에서 프로그램 아이콘도 못 찾을 사람들뿐이었다. 아직 의논 전이었지만 내심 식사가 끝나면 작업실을 빌리는 방법을 알아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모두가 식사를 마치자 승현은 하늘과 만나기로 했다며 먼저 올라갔다. 미열과 찬우는 바로 ‘찬우 쌤의 포인트 안무 특강’이 열린다는 연습실로 직행했고 둘과 찢어진 이진은 휴게실에 들러 자판기 앞에 섰다. 지갑을 열자 천 원짜리 지폐 세 장이 빼꼼 보였다.
‘마지막 현금…….’
이번 달 내로 출연료가 들어오긴 할 테지만 그 전까지 이진이 사용할 수 있는 돈은 지갑 속 현금과 통장에 든 아슬아슬한 생활비가 전부였다. 출연료도 형식상 지급되는 수준이라 이번 합숙이 끝나면 반드시 은행에 들러 적금을 해지해야 했다.
‘선승현같이 돈 많은 자식한테는 음료수를 일곱 캔씩이나 펑펑 뽑아 주면서.’
휴, 하고 한숨을 내뱉은 이진은 큰맘 먹고 세 장의 지폐 중 두 장을 뽑아 차례로 투입구에 넣었다. 덜커덩 묵직한 소리가 두 번 들리고 이진에게는 과하게 비싼 설탕물 350ml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진은 차가운 캔 두개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휴게실을 나와 연습실로 향했다. 아침에 채일이 맘고생을 하던 모습을 보니 이런 거라도 하나 들고 가야 속이 편할 것 같았다. 지금도 분명 도움 안 되는 동료들을 탓하며 홀로 작업에 열중하고 있을 테니 이런 식으로라도 노고를 치하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진이 오지랖을 부리는 순간이면 언제나 그렇듯 칠색찬란 팀의 연습실은 채일 혼자가 아니었다.
“형!”
문을 열자마자 밝은 목소리가 그를 반겼다. 그 답답하게 밝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이진은 연습실 문을 닫고 방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벌써부터 기가 쭉쭉 빨려 심신이 피로했다.
분명 찬우의 어쩌고 특강에 간다고 했던 우진이 채일의 옆에서 손을 붕붕 흔들었다. 촬영 중도 아닌데 기합이 바짝 들어간 몸짓이었다. 어제 우진이 채일에게 찾아가 한소리 했다는 것 치고 제법 화기애애한 분위기인 것이 신기했다.
결국 이진은 뽑아 온 음료 두 캔 모두를 건네줘야만 했다.
“지금 안무 수정하고 있었는데 형도 한번 볼래?”
음료수를 냉큼 받아 든 우진이 싱글벙글 웃으며 이진에게 물었다. 기다렸다는 듯 아직 대답하지도 않았는데 채일이 벌떡 일어나 자세를 잡았다. 우진도 후다닥 달려가 그 옆에 섰다.
“노래 좀 틀어 줘.”
채일이 턱짓으로 이진의 발치에 있는 리모컨을 가리켰다. ‘먼저 노래를 틀고 자세를 잡든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너무 쪼잔한 것 같아서 이진은 잠자코 시키는 대로 했다.
전주가 나오자 두 사람이 척하고 포즈를 잡았다. 마치 어렸을 적 TV에 서 본 무지개 색 쫄쫄이 영웅들이 등장할 때 대열에 맞춰 의미 없이 멋진 자세를 취하던 것처럼 뭘 뜻하는지 알기 힘든 동작이었다.
“우리는 지금 70년대 클럽에 온 거임.”
“뭐? 그땐 태어나지도 않았잖아. 우리 클럽 안 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그래서 막 몸을 흔들어. 신나게.”
스무 살 채일은 이진의 지적에도 아랑곳 않고 설명을 이어 갔다. 아직 곡에 손을 대지 않았더니 춤이 음악과 썩 어울리지는 않았다. 자세히 보니 안무에도 많은 변형을 준 건 아닌 듯했다. 하도 요란스럽게 춰서 그렇지 원본 안무에 다이아몬드 스텝을 추가한 정도였다. 어쨌든 두 사람은 정말 클럽에라도 온 양 열심히 몸을 흔들었다.
“여기서 형이 딱 튀어나오면서 등장함.”
“나?”
둘이 갑자기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으며 하늘로 손을 뻗었다. 이진이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자 채일이 다시 턱짓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바닥에 웬 낙서 가득한 종이들이 널브러져 있다 했더니 나름대로 고심해서 고안한 콘티가 빼곡히 그려져 있었다.
이진은 종이를 하나씩 집어 들었다. 그중 미리 뒤에 들어가 숨어 있던 이진이 팍 튀어나오는 듯한 그림 옆에 구불대는 글씨로 가사가 적혀 있었다.
“근데 여기 내 첫 소절 아니야? 점프하면서 어떻게 노래를 해.”
“할 수 있어!”
우진이 대책 없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채일은 이진에게서 리모컨을 빼앗아 들고 노래를 몇 초 전으로 돌리고 자리로 돌아가 춤을 이어 갔다.
이진은 가만히 그들의 움직임을 보다가 자리에 앉아 종이 뒷면에 끼적끼적 메모를 했다. 2절이 시작될 즈음 준비된 안무가 끝났다. 중간에 빈 부분도 있었지만 컨셉에 맞춰 전체적인 흐름을 맞췄다는 게 중요했다.
“다들 정말 고생했어.”
이진은 짝짝짝 박수를 치며 말했다. 그랬더니 채일은 어깨를 으쓱하고 우진이 눈에 띄게 좋아했다.
“어젯밤에 생각나는 대로 그려 본 건데 채일이가 많이 다듬어 준 거야.”
아침에는 없었던 종이의 출처는 다름 아닌 우진이었다. 그가 안무를 짰다는 건 꽤 의외였다. 이진의 시선을 읽은 건지 우진이 손사래를 치며 정말 채일이 다 했다는 말을 반복했다.
“디테일은 내가 다 하긴 했지.”
“그럼!”
“그래도 형이 이만큼 해 온 게 있으니까 헤매지 않고 금방 짤 수 있었어.”
채일이 코를 긁적이며 말하자 우진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으아아, 소리를 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들 나름대로 감동적인 순간을 지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때, 이진은 누가 더 도움이 되었느냐보다는 아이돌스러움을 잃지 않으면서도 그들이 말하는 80년대 느낌을 살릴 방법을 찾는 것에 더 정신이 팔려 있었다.
“헉! 나 찬우 형이 안무 가르쳐 준대서……. 금방 배우고 올게!”
“뭐야! 춤을 왜 거기에서 배워!”
“미안, 이미 약속을 해 버려서……. 다녀올게!”
단순히 악기를 바꾸는 정도로만 끝내도 되겠지만, 제대로 작업을 한다면 애드리브 라인도 넣어야 하고 비트도 새로 만들거나 찾아와야 했다. 방송국에서 준비해 둔 설비가 얼마나 잘되어 있는지도 모르니 얼른 확인해 보고 싶었다.
“안 되겠다. 이진이 형이라도 가르쳐야지.”
“뭐?”
그러나 우진이 찬우와 약속이 있었다며 후다닥 뛰쳐나간 뒤 이진은 채일에게 수정된 안무를 전수받아야 했다.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사람이 없는 지금이 아니면 따로 봐 줄 시간이 없을 테고, 여차하면 이진도 어설픈 실력으로나마 팀원들을 가르쳐야 할지 몰랐다. 어쩔 수 없이 이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