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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48화 (48/173)

48화

“아냐. 채일이 네가 나설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해서 미안해. 나도 이런 역할은 처음이라 좀 헤맸어. 주헌이랑 수원이…… 애들이랑은 다시 잘 얘기해 보자. 걔네도 네가 다 잘되자는 마음에서 쓴소리한 걸 모르진 않을 거야.”

채일이 고개를 떨궜다. 이진은 없는 용기를 쥐어짜 손을 채일의 어깨에 올렸다. 마네킹 손을 들고 같은 행동을 해도 이보다는 자연스러울 만큼 어색하고 뻣뻣한 동작이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외면하지 않고 용기를 냈다.

“동선 복잡하게 꼬인 것만 간단하게 정리하자. 그러면 사실 안무 난이도는 포지션별로 크게 차이나는 것도 아니잖아. 디테일한 건 우선 안무부터 확실히 숙지시키고 난 다음에 차차 추가해도 되는 거니까. 안무도 복고 컨셉을 살려서 당시 유행하던 스텝 좀 넣고 바꾸면 컨셉도 잘 살고 다른 애들도 더 금방 외울 수 있을 것 같아. 동작 완성도가 올라가는 편이 어려운 동작 어설프게 따라 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고. 또 채일이 네가 잘 수정해 줄 거잖아, 그지?”

이진은 아마 열 살짜리를 앉혀 놓고 말을 걸어도 이렇게 상냥한 목소리가 나오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도 한번 남을 달래 주기로 마음먹으니 제법 그럴싸하게 흉내 낼 수 있었다. 채일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에 깊은 한숨이 오고 갔다.

“난 잠깐 올라갔다 올게. 이따 보자.”

이진은 어색한 공기를 더 버티지 못하고 연습실을 나왔다. 쿵, 문이 닫히자마자 다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한숨이라는 건 답답한 속내를 타인에게 드러내기 위한 비언어적 표현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내쉴 때마다 숨결이 가슴속에 응어리진 답답함을 어루만지듯 속이 좀 풀렸다.

어떻게 터진 상처를 얼기설기 어설프게라도 봉합해 두긴 했는데, 정말 미숙한 솜씨라 언제든 감당 못 할 비상사태들이 이진의 응급조치를 비집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래도 전혀 손을 대지 않은 것보다는 나을 거라 스스로를 위안했다. 상황을 해결해 주는 것만이 위로가 되는 건 아니었으니까.

아침부터 심력을 소모해 무겁게만 느껴지는 몸뚱어리를 이끌고 방으로 돌아가자 간만에 승현이 깨우기도 전에 먼저 일어나 있었다. 게다가 항상 이층 침대 위에서 뒹굴던 미열과 찬우가 보이지 않았다.

[이지낭 찬우랑 먼저 식당 자리 맡아 놓을게! 오늘 존맛탱인 거 나온대^3^]

한창 채일과 이야기를 나눌 때 보낸 건지 핸드폰에 미열의 문자가 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이제 단둘이 다녀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감정이 풀린 걸까. 이진은 그들에게 너무 무신경했다고 자책했다.

“승현이 너는 아침 안 먹어? 오랜만에 일찍 일어났는데.”

이진은 아까 채일을 대할 때의 여파인지 제법 살갑게 나오는 제 목소리에 내심 놀라며 승현의 반응을 살폈다. 승현은 아침에 늘 그렇듯 멍한 표정으로 이진을 바라봤다. 자는 사이에 눌린 머리가 약간 부스스했다.

“일은 잘 해결된 거예요?”

“어?”

“표정이…….”

승현은 말을 하다 말고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하품했다. 이어서 눈꼬리에 살짝 맺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쓱 닦아 내는데, 그 행동에서 조금 전 채일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응……. 조금은.”

“잘됐네요. 이제 신경 좀 덜 써도 되겠어요.”

“아냐. 이제 시작이지, 뭐.”

힘없이 대답하자 승현이 고개를 휙 돌려 이진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승현은 아예 눈을 갸름하게 뜨더니 몹시 못마땅한 얼굴로 무언가 불만이 있음을 어필했다. 그러고 보면 어제부터 뭔가 말하고 싶어서 안달을 냈었다. 우진을 향해 묘한 불쾌감을 드러낸 것도 그렇고…… 뭐 할 말이 있는 걸까?

이진은 승현을 살짝 경계하며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 건지 짚이는 게 없어 마음이 불안했다.

“그…….”

“형.”

그런데 말을 떼는 동시에 승현이 이진을 불렀다. 그는 평소처럼 먼저 말을 하라거나 이진이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제 말부터 했다.

“형이 한찬우나 백미열한테 너그럽고 약한 건 이해하려고 노력하겠는데요.”

“응?”

“그런데…… 생판 처음 보는 놈이 나타나서 형한테 달라붙는 꼴은 못 보겠어요.”

“뭐?”

이진은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무의식중에 계속 말꼬리를 올렸다. 대체 이진이 찬우와 미열을 어떻게 대했길래 너그럽고 약하다는 말을 붙이는지는 둘째 치고 생판 처음 보는 놈이 달라붙는 꼴을 못 보겠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형, 그 자식이랑 친해요?”

“누구?”

“걔요. 이우진.”

승현은 우진의 이름을 발음하며 상당히 짜증스러운 낯을 했다. 어제 짐 싸 들고 가출한 이성에 이어 오늘은 어이가 가출한다고 백팩에 짐을 주섬주섬 싸고 있었다.

“초반에 조금 같이 다니긴 했는데…… 그게 왜?”

“걔랑 친해요?”

“아니, 그걸 네가 왜 신경 쓰냐고.”

이제는 인상까지 팍 썼다. 이 화제를 입에 올린 것부터가 그랬지만 자신의 감정을 숨길 생각이 아예 없는 것 같았다. 이진도 따라서 인상을 썼다. 화가 나는 건 아니고 승현에게 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였다.

“짜증 나니까 그렇죠. 형은 그렇게 들러붙는 놈들한테 약하잖아요. 백미열도 그렇고 한찬우도 그렇고.”

“야, 선승현. 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알아듣게 똑바로 말해.”

이진이 박수를 짝 치며 말하자 승현이 잠깐 입을 다물고 말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는 언제나 그랬다. 하고 싶은 말이 생기면 두서가 없었다. 미리 대사를 준비해 오면 청산유수가 따로 없는데, 말을 하다가 준비한 레퍼토리가 끝나면 입을 다물고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정리부터 시작했다. 승현과 무난한 대화를 하기 위해 그 답답한 침묵을 기다려야 하는 건 오로지 이진의 몫이었다.

“그니까. 형이 이우진이랑 잘 지낼 것 같아서 저는 짜증이 나요.”

몇 분이나 흘렀을까 승현이 겨우겨우 입을 뗐다. 이진은 점점 이상한 길로 빠지는 대화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직 밥을 못 먹어서 배 속도 허하고, 아침부터 우는 사람을 봐서 신경에 조금 날이 섰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말이 조금 날카롭게 나갔다.

“네가 왜?”

“왜냐면 형이 저랑은 친하게 안 지내니까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나는 형이랑 친해지려고 별 이상한 내기까지 했는데 여전히 미움받고 있잖아요. 방송하는 동안에는 친하게 지내기로 약속해 놓고 눈만 마주쳤다 하면 정색하고.”

승현은 어느새 어린애가 칭얼거리는 듯한 말투를 쓰고 있었다. 왜 자기가 이렇게 억울하고 짜증 나는 걸 알아주지 못하냐고 항의하는 어린애 같았다.

“그때 이후로 친해지는 거에 미련 갖지 않으려고 했는데…… 형이 자꾸 다른 사람들한테 무방비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짜증이 난다고요.”

“그러니까…….”

“이우진이랑 저보다 친하게 지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같은 팀인데?”

“나랑은 같은 팀 아니었어요? 웃기는 형이네.”

이진을 웃기는 건 선승현이었다. 갑자기 맥이 탁 풀리고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승현아, 그러니까 너…… 질투 난다고? 내가 우진이랑 친하게 지내면?”

이진은 일부러 ‘질투’라는 유치한 단어를 선택했다. 그러면 승현이 내가 어린애로 보이냐고 발끈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런데 승현은 그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게 맞는 것 같아요. 한찬우랑 백미열한테도 그래요. 이왕이면 걔네랑도 친하게 지내지 말아요.”

“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진은 아무래도 승현이 요 근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조금 돌아 버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승현은 질색하는 이진의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재차 요구했다.

“이게 못된 심보인 건 알겠는데, 별로 참는다고 참아질 것 같지도 않아서 그냥 말하는 거예요. 한찬우가 형 껴안을 때마다 진짜 때리고 싶어요.”

“그거 때문에 내가 너보다 걔네랑 더 친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물론, 그거 하나뿐은 아니지만 요즘은 그래요.”

승현은 전에 없이 진지했다. 그러나 이진은 이 웃기는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여 진지하게 대꾸해 줘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웃어넘겨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본인 기분이 나쁘다고 남의 인간관계에 말을 얹고, 나아가 통제하려 드는 것에 화가 나야 하는데…… 그가 느낀 소외감이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면 해결 역시 직접 해야 될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다 됐고 빨리 밥이나 먹으러 가고 싶었다. 예전이라면 승현이 이렇게 나오는 게 굉장히 싫고 스트레스 받았을 텐데 지금은 더 큰 사건이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익숙해지고 만 건지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진은 새삼 사람의 적응력에 감탄하게 되었다. 그 선승현이랑 같이 사는 데에 익숙해지다니.

이진은 싱긋 웃으며 입을 뗐다.

“그게 그렇게 불만이면 한 번 안아 줄게. 그럼 됐지?”

이진 스스로도 핀트가 엇나간 걸 알았지만, 우선은 적당히 무마하고 잘 달래서 승현을 데리고 식당이나 내려가기로 정했다. 승현은 이상한 부분에서 집요하고 진지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 꽁한 시선을 받더라도 적당히 어울려 줄 생각이었다.

이진이 양팔을 뻗고 가만히 섰다. 분명 장난하냐고 짜증을 내거나 픽 웃으며 됐다고 하고 지나쳐 가겠지. 이제까지 이진이 관찰해 온 승현은 그랬다.

“……형, 진짜 장난해요?”

아니나 다를까 승현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렇게 말했다. 이진은 자신의 예상이 얼추 맞은 것에 작은 즐거움을 느꼈다. 그런데 어째 녀석은 짜증을 내고 화장실로 들어가거나 이불속에 푹 파묻히는 게 아니라 점점 이진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와선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진을 끌어안았다. 몸이 완전히 맞물리고 이진의 얼굴이 승현의 어깨에 반쯤 파묻혔다.

찬우가 우악스럽게 뒤통수를 끌어당겨 안거나 시시때때로 미열이 어깨에 매달리는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승현은 고개를 숙여 이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따뜻한 온기와 체취가 일순 저릿하게 감각을 마비시켰다.

어질한 정신이 간신히 제 기능을 하기 시작했을 때, 이진이 가장 먼저 인식한 것은 여전히 어색하게 굳은 두 팔이었다. 완전히 감싸 안긴 이진은 뻣뻣하게 굳은 관절을 종이 인형처럼 꼬깃꼬깃하게 접어 승현의 등 위에 슬쩍 올려놨다.

‘뭐지……. 얘가 많이 외로운가?’

승현은 어쩌면 가장 친한 친구인 미열을 이진에게 빼앗긴 상실감을 잘못된 방향으로 착각해, 괜히 우진을 걸고넘어지는 걸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면 정신적으로 위태로운 상태가 됐을 때에도 타인의 체온을 느끼고는 안정되는 성격이기도 했다.

‘체질적으로 외로움을 많이 타는 걸지도.’

그렇게 생각하자 어째 덩치만 큰 어린애를 달래는 기분이 되어 이진은 조심조심 승현의 등을 토닥였다. 키는 훌쩍 큰 놈이 아침에 일어나서 인상 팍 쓰고 고민이랍시고 하는 말이 참 아기자기하고 귀여웠다.

이진은 속으로 킥킥 웃었다. 승현이 이진에게 관심을 보이는 게 당황스럽고 어쩔 땐 화도 났지만, 근본적으로 ‘대단한’ 사람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데에서 비롯된 기쁨과 뿌듯함이 존재했다. 마치 재수 없지만 잘나가는 남자의 애정 공세에 결국은 함락당하고 마는 흔한 소설 속 주인공처럼.

물론 승현의 본모습, 엄청난 부자임에도 유년기의 불우를 이용해 좋은 이미지를 쌓고, 팬들과 동료에 대한 의리를 저버린 채 최악의 방법으로 그룹을 탈퇴하고, 또 어쩌면 자신의 과거 루머를 유포한 사람을 비밀리에 묻어 버릴지도 모르는 그의 미래를 알기에 절대로 함락당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생각만큼 잘되지 않아서 문제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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