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다들 내일이 없는 사람들 같았다. 어떻게 그만큼이나 한순간의 감정에 충실해서 살 수 있는 걸까. 모두 무릎 꿇려 앞에다 앉혀 두고 한 대씩 쥐어박으며 ‘맞는 말이라고 다 뱉어도 되는 말인 줄 아냐!’, ‘실력이 없으면 입이라도 가만히 있을 것이지 뭘 잘했다고 방정이냐!’,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데 왜 괜히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냐!’ 하고 혼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해졌다. 이 팀은 답이 없었다.
여태까지 이진이 직면해 온 위기 상황은 이진의 노력으로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으나 이 경우는 달랐다. 모든 사건은 이진을 배제한 채 벌어지고 있었다. 자기들끼리 치고 박으니 끼어들 틈이 없었다.
“하나, 둘! 영차!”
이진이 한참 상념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찬우와 승현이 그를 질질 끌어다 침대 위에 앉혔고 미열은 후다닥 내려가 달고 짠 먹을거리를 잔뜩 사 왔다.
“이진아, 정신이 좀 들어?”
미열이 설산에서 구조되었다 3일 만에 깨어난 사람을 대하듯 이진에게 물었다. 그의 앞에는 승현이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입에 투입하려고 대기 중이었고 뒤에는 찬우가 등받이 의자처럼 버티고 있었다.
룸메이트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정신을 차린 이진은 몇 시간 새에 벌어진 일을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채일이 강압적이고 무자비하긴 하지만 지호와 주헌의 연습량이 많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부터 수원은 기가 너무 약하고 태원은 반대로 기가 너무 세며, 우진은 본인 능력보다 버거운 역할을 맡았다는 이야기까지. 하나하나 풀어 놓다 보니 어느새 이진이 평소에 잠들던 시간을 훌쩍 지나 있었다.
“남주헌은 원래 노는 게 제일 좋은 새끼야. 걔랑 같은 에이전시에서 온 애가 그러는데 슬럼프 한 번 겪고 그렇게 됐다더라. 이번에도 참가할 때는 슬럼프 극복 겸 새로운 출발이라고 다짐하고 왔다는데, 뭐……. 중간에 흐지부지 된 거겠지.”
“채일이는 무섭긴 한데 예고인지 학원에서인지 그렇게 배운 것 같더라. 그렇게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치는 거 말고는 방법을 아예 몰라. 내가 애들 도와줄 때도 엄청 맘에 안 들어 했어. 우진이는 착한 애니까 너무 미워하지 말고…….”
“김지호는 서브 보컬 쪽에선 보컬 부심 있었는데 거기가선 형 때문에 찍소리도 못 하는 것 같은데요? 형 말고는 실력 좋아 보이는 애 없으니까 춤으로 부심 부려 보려고 했다가 임채일 때문에 망한 것 같고요.”
미열과 찬우, 승현이 차례로 말했다. 그들의 말을 들을수록 이진은 이 팀의 앞날이 더욱 더 보이지 않았다. 미열과 찬우가 앓는 소리를 내며 함께 고민했다. 그러나 애초에 실력보다 자존심이 더 중요한 사람들에게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많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잠자코 생각하던 승현이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엔 정하늘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렇게 귀여운 곰돌이 잠옷을 입은 하늘이 승현의 손에 이끌려 이진의 방에 불려 왔다. 하늘의 뒤로 같은 모양, 다른 색 잠옷을 입은 나봄이 같이 따라왔다.
“참고로 이거 회사에서 맞춰 준 거니까, 더 묻지 마.”
하늘이 질문을 원천 차단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대충 들었어.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냥 임채일 기선 제압부터 하라고 하고 싶은데…… 이미 걔가 나대기 시작했으니까 넘어가자.”
하늘의 말투에서 묘한 분노가 묻어 나왔다. 봄이 한숨을 쉬며 부연 설명을 했다.
“걔랑 저희랑 같은 고등학교 출신인데요. 저희 선후배 군기가 빡세서 하늘이가 임채일한테 좀 쌓인 게 있어요.”
“실력주의니 뭐니 말은 잘해도 결국 지가 휘두를 수 있는 게 그 방향이니까 그러는 거야.”
하늘은 과연 오랫동안 대형 기획사와 명문 예고에서 구르고 구른 경험을 살려 굉장히 실질적인 충고를 해 줬다.
“대부분은 명분 싸움이야.”
이진의 목울대가 꿀꺽였다.
“임채일 말에 반박 못 하는 이유가 뭐야? 걔 말이 어느 정도는 맞아서 그래. 못하는 애들이 분량 욕심만 내면 다 같이 망하는 길이 맞긴 하잖아. 사실 걔가 총대 매고 그런 애들 정리해 준 건 고마운 일이지.”
맞는 말이었다. 이진은 그래서 채일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이진이 한 음절마다 고개를 끄덕이자 승현이 목 떨어지겠다고 이진의 턱을 잡아 고정시켰다.
“근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자기 말이 다 맞다고 독재자처럼 굴면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이 지쳐서 나가 떨어져. 사람들은 생각보다 그 정도의 정신적 피로와 육체적 강행군을 견뎌 낼 만큼 필사적이지 않아. 나나 봄이처럼 여기서 제대로 성적 못 내면 회사에서 잘릴 각오하라는 소리 들은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은 돌아갈 현실이 존재하잖아.”
“아니, 뭔 회사가 그런 말을 해! 애들한테!”
찬우가 돌연 분노했으나 미열에게 배를 얻어맞고 입을 다물었다.
“모두가 임채일처럼 절박하지 않고, 그나마도 하위권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희망이 너무 희미하니까 그걸 쫓으려는 엄두도 못 내지. 그러다 실패하면 자기만 바보 꼴 날 걸 아니까.”
너무도 현실적인 말이라 이진은 점점 더 이 팀을 소생시킬 가망이 없다고 느껴졌다.
“……그럼 어떡하지?”
“우선은 임채일한테 그걸 주지시켜 주는 게 먼저야. 결과만을 중심으로 두고 생각했을 때 간과하게 되는 게 얼마나 많은지 똑바로 알려 줘야 해. 그리고…… 힘들겠지만 그 역할을 수행할 사람은 당연히 리더인 이진이 형밖에 없고. 명분 싸움에서 리더라는 직위만큼 유리한 입지가 또 없거든.”
이진은 하늘의 말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채일이 한 일은 사실 이진이 리더로서 먼저 해야 하는 행동이었다. 채일이 리더인 그를 두고 멋대로 안무와 포지션을 바꾸고, 정신 똑바로 차리라며 멤버들을 다그치는 이유는 아마 이진이 믿음직스러운 리더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진은 리더직을 수행할 만큼의 그릇을 갖추지 못했고 갖출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애꿎은 사람이 독한 표정을 지으며 이진의 역할을 대신 수행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팀을 이끌어야 했으니까.
“고마워, 하늘아.”
“다른 팀이라고 상황이 좋지는 않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하늘은 끝까지 이진을 안심시키며 방으로 돌아갔다.
“하늘이 쟨 가끔 보면 무서워.”
“머리가 좋은 거지.”
이진은 친구들의 대화를 들으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런 시기가 있다. 눈앞에 목표 외에 다른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기가. 이진도 그런 시기를 겪었다. 아마 아주 최근까지도 그랬었던 것 같다.
그 시기에 이진은 자신에게 몹시 혹독했다. 성공에 만족하지 못하고 작은 실패에도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았다. 그럴 시기를 겪고 있을 때는 누군가 옆에서 똑똑 하고 방문을 두드려 줘야 한다. 지금 보고 있는 그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고 알려 줘야 했다.
이진은 자신이 그 임무를 수행할 준비가 되었는지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늘의 말대로 그 역할을 맡을 사람은 이진밖에 없었다. 우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다음 기회가 주어진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이진이가 고생이네.”
찬우가 지쳐 늘어져 이불 속에 들어간 이진을 토닥였다. 사실 미열을 제외하곤 이 방의 모두가 한 팀을 책임지고 있었다.
그들도 그들 나름의 고충이 있고 피곤한 일이 많았을 텐데…….
이진은 아직도 시야가 좁았다. 자신의 문제밖에 생각할 줄 모르고, 자신의 상처만이 아픔이었다. 그래도 조금씩 다른 세상을 향해 고개를 돌릴 용기를 내게 되는 것은 그를 ‘좋은 사람’이라 믿어 주는 이들의 존재 덕분이었다. 누군가 이진을 용기 있는 사람이라 믿어 주기에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고, 정 많은 사람이라 불러 주기에 망설이면서도 정을 베풀 수 있었다.
이진의 작은 변화 하나하나는 모두 주변 사람들의 덕분이었다. 여태까지 이진이 외로움에 치를 떨면서도 뿌리치려 애를 썼던 그들의 존재가 그를 변화시켰다.
이진은 이제 자신을 믿어 준 그들에게 자신의 변화를 증명해 보일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아직 개화할 시기가 멀게만 느껴졌지만, 지금부터 차근히 준비하지 않으면 또다시 혼자 뒤쳐지고 말 것이다.
아침 일찍 내려가 아침 연습을 마친 이진은 스트레칭을 하다가 가방을 싸 들고 내려온 채일과 마주쳤다.
“어, 잘 잤어?”
“하이.”
이진은 아침에 연습을 하고 식사를 마친 뒤 다시 내려오는 편이었는데 채일은 식사부터 하고 짐을 챙겨 내려오는 모양이었다. 채일은 이진에게 인사를 하더니 구석에 가방을 팽개치고 바로 거울 앞에 서서 몸을 풀었다. 긴팔에 긴 바지인 트레이닝복을 입고도 유연하게 늘어나는 근육이 눈에 보였다.
이진은 채일의 유연한 몸에서 눈을 돌리고 어젯밤 자기 직전까지 오랫동안 고민했던 말의 운을 띄웠다.
“채일아, 생각해 봤는데 역시 난이도를 수정하는 게 맞을 것 같아. 눈에 덜 보이는 곳에 숨겨 둔다고 정말로 숨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넓은 무대에서 관객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어디 있겠어. 안무는 그대로 가되 동선을 조금 덜 혼잡하게…….”
“형…….”
그런데 갑자기 채일이 말을 끊으며 물어 왔다.
“형 생각에도 내가 그렇게 잘못한 것 같아?”
이진은 예상외의 전개에 당황해 “어?” 하고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잠을 설친 건지 채일의 눈 밑에 붉은기가 돌았다.
“내가 그렇게 이기적이고 독단적으로…….”
채일의 목소리에 점점 물기가 섞이기 시작했다. 호흡은 점점 가빠지고 눅눅하던 목소리에는 잘은 떨림까지 느껴졌다. 바닥에 주저앉아 스트레칭을 하던 자세 그대로 굳어 있던 채일이 기어이 마룻바닥에 눈물을 뚝 흘렸다. 이진의 심장도 쿵하고 떨어졌다.
“왜, 왜 그래.”
물론 어렴풋이 이유는 알 것 같았다. 누가 채일에게 험한 소리를 했을 게 뻔했다. 그리고 아마 그 누구는 같은 방을 쓴다던 주헌이 아닐까, 이진은 지레짐작했다.
“울지 말고…….”
이진은 찬우처럼 다가가 채일을 안아 주기라도 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역시 그렇게까지 할 만큼 친한 사이도 아니거니와 자존심이 강한 상대를 애처럼 다루는 건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 같았다.
한동안 채일의 거친 숨소리만이 연습실을 메웠다. 이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가 스스로 감정을 이겨 내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깊은 호흡과 함께 간신히 진정한 채일이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
“어제 우진이 형이 찾아와서 그러더라. 수원이 형이 나 때문에 울었다고. 팀을 위해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뒤에 남겨진 사람들 생각도 해 달래. 남주헌은…… 내가 이기적이고 독단적이라서 팀이 파탄 날 거라고 했어. 근데 난, 다 잘됐으면 해서 그런 건데…….”
차분히 말하던 중에 또 감정이 북받쳤는지 눈에 눈물이 고였다. 채일의 손등이 재빠르게 눈물을 훔쳤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얼굴 위에 머물렀던 울음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진은 아까 떨어졌던 심장을 도로 주워서 제자리에 끼우는 상상을 하며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우선, 나는 수원이가 울 때, 그 자리에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형은 대체 리더로서 하는 게 뭐야?”
채일이 벌컥 이진에게 화를 냈다. 이진은 어디에라도 화풀이 하고 싶은 그의 기분을 잘 알았기에 마주 화내지 않고 참았다.
“……미안해.”
이진이 순순히 사과하자 채일이 이를 악 물었다.
“……형이 뭐가 미안해. 또 내가 성격이 더러워서 그런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