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그럼 채일이가 센터고, 우진이가 메인 보컬, 내가 리드 보컬. 태원이가 서브 보컬1 하고 싶다고 했는데 다들 괜찮아?”
“나는 서브 보컬3 하고 싶어.”
서브 보컬3에는 센터 포지션에 버금가는 포인트 안무가 배정되어 있었다. 의도하고 넣은 포인트는 아닌 것 같았지만 실제 안무 가이드 영상을 봤을 때 눈에 탁 들어오는 부분이었다.
“그럼, 지호가 서브 보컬3으로?”
“……나도 거기 생각하고 있었는데.”
수원이 손을 들며 말했다. 불안함 틈에서 간신히 쥐어짜 낸 듯한 목소리가 살짝 애처롭게 들렸다. 이진은 수원이 계속 말을 꺼낼 타이밍을 찾았던 걸 눈치채고 아차, 싶었지만 일찍이 알았다고 한들 지금보다 나은 방식으로 회의를 진행할 능력은 없었다.
“어? 나도 거기 섭보3 하고 싶어.”
“아니, 그럼 랩은 누가 해?”
거기에 주헌까지 가세했다. 채일이 주헌에게 원래 포지션은 어쩌고 그리로 가냐고 물었지만 그는 애초에 랩에 큰 뜻이 없었다며 어깨만 으쓱했다.
“나도 억지로 한 건데 다른 애들도 시키면 잘 하겠지, 뭐.”
그렇게 말하니 이진도 할 말이 없었다. 애초에 포지션별로 멤버를 고른 것도 아니고, 편곡과 안무 수정이 자유롭기에 1라운드의 포지션은 거의 의미가 퇴색되기도 했다.
래퍼 포지션은 펑크에 서브 보컬3 지원자는 셋이었다. 고음까지 힘 있게 올라가는 사람이 없어서 이진 혼자 메인 보컬과 리드 보컬을 맡아야 했고 그나마도 더 쉬운 메인 보컬 안무를 우진에게 양보했다.
태원은 춤과 노래를 금방 배우는 편이지만 욕심이 없었고 수원은 쉽게 나서지 못하는 성격이지만 분량을 향한 욕심이 있었다. 지호와 주헌도 지금은 웃으며 회의에 참여하고 있지만 원하는 포지션에 들어가지 못 했을 때 어떻게 변모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팀별 경연은 모두가 한 방향으로 힘을 모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잃을 게 없는 참가자가 악한 마음을 먹고 아예 손을 놓기로 하면 다른 멤버들의 노력만으로는 수습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이진의 팀은 유독 그럴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 많았다.
수원은 하위권 중에 하위권이었고, 사실 이번 경연에서 높은 점수를 받더라도 지금처럼 시청자 투표수가 낮으면 다음 라운드 탈락자 명단에 이름을 올릴 것이 확실했다. 태원은 언제든 일반인의 삶으로 돌아갈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었다. 지호도 아이돌이 되고 싶다고 말은 하지만 너튜브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상태이니 프로그램을 통해 인지도를 얻은 데에 만족하고 손을 털지도 몰랐다.
“그, 그러면…….”
“더 잘 추는 사람이 하면 되잖아. 거기 중요한 파튼데 가위바위보 같은 걸로 정할 수도 없고.”
채일이 의견을 냈다. 합리적이었지만 자존심을 긁는 의견이었다. 언제나 상위권의 실력을 유지했기에 무신경한 건지,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는 몰라도 방금 그 말 한마디로 회의 분위기가 단숨에 무거워졌다.
“……춤을 잘 추는지 아닌지는 누가 가리는데?”
“내가? 다들 눈 달렸으니까 대충 알겠지.”
수원이 용기를 내어 한 말을 채일은 쉽게 넘겼다. 이진이 보기에 수원은 지호나 주헌이 수원에 비해 인기가 좋고 인지도가 높기 때문에 편파적인 판정을 내릴 거란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인기와 인지도는 참가자들 사이에선 입 밖으로 꺼내지 않기로 되어 있는 불문율이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카메라 렌즈가 모든 언행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언급해선 안 됐다.
결국 본인들의 실력에 자신감이 넘치는 주헌과 지호가 벌떡 일어나 노래를 틀라고 하는 바람에 같은 팀 멤버들끼리 우열을 가리는 상황이 오고야 말았다. 채일이 태블릿을 조작해 연습실 한 면에 놓인 TV형 모니터에 영상을 띄웠고 나란히 선 셋이 노래에 맞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그런데 가리라는 우열은 가려지지 않고, 이진이 얼굴을 가리게 되었다. 셋 다 춤을 너무 못 췄다. 안무 숙지가 덜 되었다는 걸 감안해도 이건 아니었다. 채일도 그를 느꼈는지 이진의 옆에서 연신 ‘미친’을 연발해 댔다.
수원은 모든 동작이 너무 소극적이었고 지호는 춤의 기본이 전혀 없었다. 주헌은 몸을 크게 움직이고 동작에 각이 살아 있긴 하나 박자가 아주 제멋대로였다.
“잠깐만. 내가 해 볼게.”
결국 태원이 일어나 그들 틈으로 들어갔다. 채일이 다시 태블릿을 조작해 영상을 처음으로 돌렸다.
“정해졌네.”
춤을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다는 태원은 무려 전공자인 주헌보다 훨씬 잘 췄다. 동작을 조금 버벅거리긴 해도 센스가 좋은 것 같았다. 이진은 적어도 아이돌의 단체 안무용으로 두 스타일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태원을 택하고 싶었다.
춤에 대한 지식이 적은 이진으로서는 어디가 어떻게 나은지 설명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채일이 단칼에 정해졌다고 말하는 걸 보면 평균 정도의 안목으로도 구별할 수 있을 만큼 태원의 춤이 나은 듯했다.
“그럼 내가 한다?”
태원이 종이를 가져가 서브 보컬1 옆에 적힌 제 이름을 지우고 서브 보컬3에 옮겨 적었다.
이진이 힐끔 보니까 세 사람의 자존심은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주헌은 애써 쿨한 척 잘하는 사람이 해야지 하고 말을 얹었지만 하도 많이 말해 오히려 미련이 철철 남은 티를 냈고, 지호는 방금 전까지 곧잘 웃으며 농담을 했으면서 지금은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장 걱정인 건 수원이었다. 수원은 한 조각 남은 자존심마저 완전히 구겨졌는지 입술을 꾹 물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이진은 도대체 채일과 태원이 얼마나 튼튼한 정신을 가졌기에 주변에서 이렇게 우울한 기운을 풍기는데 태연하게 제 할 일을 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아, 그럼 나 서브 보컬1로 옮겨 가도 되나?”
“아냐, 아냐. 내가 봤을 때 우리 이거 실력순으로 포지션 정해야 된다. 안 그러면 망해.”
채일이 손을 설레설레 내저으며 우진을 말렸다. 서브 보컬1은 동선 이동이 제일 적고 대형상 자주 구석에 서기 때문에 제일 춤을 못 추는 사람이 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채일아, 그렇게 실력으로 줄을 세우면…….”
“형,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이게 개인전이면 모르겠는데 이번 평가는 완전 팀전이잖아. 나 조금 튀고 싶다고 팀 평가 망해서 다른 사람한테 피해 주면 시청자들한테도 욕 엄청 먹고 매장당하는 거야. 분수에 맞는 역할을 주는 게 다른 사람들한테도 나은 거라고.”
이진이 채일을 말려 봤지만 멤버들의 실력을 보고 불이 붙은 채일은 꼼짝도 안 했다. 이진은 새삼 이전 팀 멤버들이 성격이 참 유했구나 생각했다. 벌써부터 그들이 그리웠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서로에게 너그러울 수 있었던 이유는 각자가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서로 특기 분야가 달라 겹치지 않았기 때문임을 깨달았다. 이곳은 서바이벌의 현장이니까,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혹독해질 수밖에 없었다.
깊은 밤이 되어서야 방에 돌아온 이진은 좀비 그 자체였다. 비틀대며 신발을 벗자마자 현관문 앞에 털썩 드러누운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도저히 침대까지 움직일 힘이 없었다. 춤 한 번 안 추고 정신력 소모만으로 이렇게 지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세수를 하고 나오던 찬우가 현관 앞에 드러누운 이진을 보고 깜짝 놀라 으아악, 소리를 질렀다.
“행진이 무슨 일 있었어?”
찬우의 농담에 대꾸할 기력도 없었다. 그냥 이불 속에 들어가서 잠든 뒤 다시는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이에요?”
냉장고에 넣어 둘 생수를 떠 온 승현이 바닥에 널브러진 이진을 보고 굳어 현관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따라 들어오던 미열도 얼른 들어가라고 승현의 등을 퍽퍽 치다가 어깨너머로 보이는 이진의 참상에 ‘끼약!’ 하고 이상한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이진아! 누가 이랬어, 누가!”
미열이 호들갑스럽게 달려가 이진을 일으키려 했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방금 있었던 일을 구구절절 토로하면서 미쳐 버린 팀원들을 욕하고 싶었지만 턱을 움직이기도 벅찼다.
이진의 눈에 채일은 악마 그 자체였다. 자기 주관이 어찌나 뚜렷한지 도무지 의견을 굽히질 않았다. 반박을 하려고 해도 입에 칼을 물었는지 매서운 독설을 날려 대는 통해 다들 입을 떼기도 전에 기가 죽어 버렸다. 초반에는 주헌이나 지호가 나서서 왜 이렇게 멋대로 구냐고 화를 냈기도 했는데 종래에는 채일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기가 좀 강할 것 같았던 우진은 오히려 바짝 졸아 이진의 뒤에 숨어 버렸다.
태원은 채일의 말에 적극 동의하는 입장이었고 수원은 그나마 서브 보컬1보다는 비중이 높은 파트에 배정을 받자 더 이상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거기까지만 했으면 이진도 제작진의 손에 그가 어떻게 요리당할지 두렵기만 하고 말았을 텐데, 채일은 기어이 이진의 영역에까지 손을 뻗었다.
‘형이 래퍼 안무해야 된다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채일은 이진의 안무를 보고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낫다며 센터와 서브 보컬3 다음으로 동선 이동이 많은 래퍼 안무에 끼워 넣으려고 했다. 이진이 드물게 질색을 하며 거절해도 막무가내였다.
‘나는 그럼 노래를 언제 불러!’
‘형은 할 수 있어. 나는 알아!’
‘아니라니까!’
아이돌의 무대를 보면 메인 보컬과 리드 보컬이 센터 자리에 설 때 복잡한 동작 없이 심플한 손동작 정도로만 떼우거나 남들이 군무를 출 때 혼자 옆으로 빠지는 동작이 여럿 있었는데, 이런 편의는 라이브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배려였다.
특히 윈올은 모든 곡을 무대에서 처음 선보이고 있어 정식 앨범을 발매해 적당히 힘든 부분은 음원으로 처리하며 페이스 조절을 할 수 있는 아이돌과는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안무를 더 전략적으로 짜 효율을 올려야 하는데 채일은 이진에게 무리를 강요하고 있었다.
‘차라리 안무랑 동선을 좀 수정하자. 응?’
“남들은 여기서 난이도를 더 높이는 판국인데 우리는 지금 이 쉬운 걸 더 낮춘다고? 말도 안 돼!”
‘어차피 내 보컬 파트 수정하려면 동선 한번 바꾸긴 해야 되잖아……. 내가 래퍼 포지션에 들어가면 오히려 다른 걸 다 수정해야 된다니까?’
이진이 설득하고 또 설득한 끝에 채일은 겨우 수긍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제작진에게 화이트보드를 빌려와 즉석에서 동선을 짜 내려가기 시작했다.
‘자. 이렇게 하면 적당히 비중이 맞을 것 같아.’
새로 바뀐 동선에서 이진은 메인 보컬과 리드 보컬을 오가며 1인 2역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통 왼쪽에 짱 박혀 있던 서브 보컬1 파트가 좌우 대칭으로 변해 오른쪽 구석에도 1명이 짱 박히게 되었다. 게다가 채일은 상의 한마디 없이 우진을 래퍼 포지션에 집어넣더니 “괜찮지?” 하고 물었다. 우진은 창백해진 이진을 한 번 바라보더니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부터 무조건 맹연습이야. 방에 가서 눈으로 안무 전부 다 외워 와. 못 외우면 내일은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그냥 방에 못 들어가는 거야!’
독기가 철철 넘치는 마지막 말을 끝으로 채일이 연습실을 나갔다. 주헌이 그 즉시 욕이 되다 만 단어들을 마구 내뱉었다.
‘저거 진짜 또라이 아니야!’
‘너 쟤랑 같은 방 아니었어?’
‘아! 돌겠다, 진짜.’
주헌이 열불을 내니 지호가 말리는 척 은근 동조했다. 그런데 나가려던 태원이 문을 열다 말고 뒤돌아섰다.
‘근데 형들이 좀 심각하긴 하잖아? 방송 시작한 지 한 달이 넘었는데 그동안 연습 안 했어? 난 그래도 민폐는 끼치지 말자고 꾸준히 연습했는데……. 아이돌 되고 싶다는 사람들치고는 좀 부족하더라.’
그 말을 들은 주헌이 거기 서라며 태원을 쫓았지만 이미 후다닥 달려 나간 뒤였다. 주헌도 진짜로 어떻게 해 보려는 건 아니었는지 연습실 문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허공에다 대고 욕을 하는 주헌의 목소리 사이로 흑흑, 하고 훌쩍이는 소리가 섞였다. 설상가상 수원이 웅크리고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울고 있었다.
이진은 그때 어떻게든 붙잡고 있던 이성이 가출하며 외치는 작별 인사 소리를 들었다.
‘굿바이! 힘내, 이진! 나는 잠깐 자아를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날 거야. 돌아왔을 때…… 네가 한층 강한 이진이 되어 있길 바랄게!’
그리고 이진은 우는 수원을 달래거나 화내는 주헌을 말릴 생각도 못 하고 비틀비틀 걸어 방으로 돌아왔다. 분명히 이진이 모두를 외면하고 방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카메라에 찍혔겠지만 한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