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41화 (41/173)

41화

“이번 2라운드에 여러분이 공연하게 될 곡은 ‘Craving juice’로, 승리를 향한 갈망을 주제로 한 곡입니다.”

‘Craving juice’는 승리를 향한 갈망이라는 소재를 아주 끈적하게 표현한 곡으로, 1라운드 경연곡과는 달리 멜로디와 비트가 어둡고 묵직했다. 컨셉에 따른 편곡을 염두에 둬서 그런지 구성 자체는 단순한 편이었으나 멜로디와 가사를 살리면서도 컨셉에 어울리는 편곡을 짜내기가 쉽지 않은 난이도였다. 안무도 메인 동선과 포인트 동작만 잡힌 수준이라 퍼포먼스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부분이 많이 보였다.

“주어진 기간은 단 일주일. 여러분은 일주일 후 컨셉 무대를 선보이게 됩니다.”

특히 2라운드는 1라운드와 다르게 짧은 시간 안에 퍼포먼스를 완성시켜야 했기 때문에 아직 팀과 컨셉도 정해지지 않은 지금, 참가자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꽤 촉박했다. 물론 컨셉 무대 준비 기간만 7일이고, 멘토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공개 방송을 위한 무대 준비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시간은 따로 있었다.

“컨셉 무대에서의 심사 위원 점수, 공개 방송에서의 관객 점수, 마지막으로 시청자 투표의 점수를 집계하여 2라운드 음악 방송 출연 팀이 결정됩니다.”

1라운드에선 팀 점수가 좋게 나오지 않아도 개인 점수를 받을 수 있었으나 2라운드는 100% 팀 대항전으로 서로 의견을 나누고 힘을 모으는 과정이 몇 배는 더 중요했다. 리더의 역할이 막중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미열이 참가자들을 분석하여 누구를 뽑으라고 일러 줄 수 없었고 이진의 노력으로 원하는 사람을 달랑 데려올 수 있는 구조도 아니었다. 여러모로 난관이었다.

“혼자 잘해서 되는 게 아니네.”

“한 팀이니까 그게 맞긴 하지.”

미열의 중얼거림에 승현이 대답했다. 이진은 과연 그가 함께하기 괴로운 팀원들을 만난다 하더라도 저 태도를 고수할지 궁금해졌다. 그라면 왠지 답답한 팀원들까지 포용할 것 같으니 한번 고생을 시켜 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이진은 남의 고생을 바라는 못된 마음이 자신에게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경연곡의 소개가 끝나고, 리더들은 컨셉을 정하는 미니 게임을 하게 되었다. 미니 게임의 이름은 ‘스펀지 검 진검 승부’였는데, 11명 모두 안대를 착용한 뒤 상대방을 찾아 스펀지 검을 휘두르는 게임이었다.

“스펀지 검이면 스펀지 검이지 왜 게임 이름이 진검 승부인 거야.”

미열이 딴지를 걸었으나 이진은 답하지 못하고 중앙으로 끌려가 안대를 착용당했다.

이진은 어둠 속에서 스펀지 검을 쥔 양손에 힘을 꽉 쥐었다. 돌아다니다가 검에 세 방을 맞으면 탈락이다. 신중해야 했다. 오래 살아남은 순서대로 먼저 컨셉을 선택할 수 있는 만큼 게임은 제법 중요했다.

“앞으로 열 걸음 이동해 주세요.”

등을 맞대고 동그랗게 선 11명의 리더들이 지시에 따라 한 발자국씩 조심조심 앞으로 이동했다. 이진이 간신히 열 걸음을 떼고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는 순간 게임이 시작됐다.

“게임 시작!”

“우아아아아!”

그런데 시작하자마자 누군가 소리를 빽 질렀다. 이진은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시야가 막혔으니 당연히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으랴압!”

이내 찬우의 목소리도 들렸다. 휘익, 스펀지 검이 바람을 매섭게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뒤로 비명이 들려오지 않는 걸 보니 적당히 허공을 향해 멋있게 검을 휘두르는 모양이었다.

“죽어라, 어머니의 원수!”

“가자! 적룡 마도검!”

“더러운 마교 놈. 허동 검법 제25장으로 무찔러 주마!”

온갖 기상천외한 기합 소리와 함께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아야!”

“여기 있구나. 사파의 개!”

“그 말 한 거 나 아닌데? 얍! 악, 악!”

허동규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사파의 개를 찾으며 누군가를 두들겨 팼다. 노린 것 같지는 않고 무작정 돌아다니며 검을 휘두르다 보니 누군가 얻어걸린 모양이었다. 나름 상대방도 반격을 한 것 같은데 허동규가 더 빨리 세 대를 채운 듯했다. 탈락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왔다.

“와, 이거 눈 뜨고 보니까 대박 재밌네. 와아!”

탈락당한 누군가가 분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탈락자가 장외로 이동한 후 다시 게임이 재개됐다. 이진도 살금살금 움직이며 앞에 누군가 없는지 검을 앞으로 쭉 빼고 살짝살짝 휘둘렀다. 그때 누군가 이진의 레이더에 콕 걸렸다.

“어?”

“옆구리에 이거 뭐야?”

찬우의 목소리였다. 이진은 숨을 멈추고 후다닥 팔을 올렸다가 내렸다. 팡, 경쾌한 소리와 함께 비명이 들렸다.

“악! 누구야!”

그리고 곧장 찬우가 이진의 방향으로 팔을 휘두르는 게 느껴졌다. 한 번 치면 당연히 반격이 돌아올 걸 예상했기에 이진은 이미 저 뒤로 뒷걸음질을 한 상태였다. 그런데 찬우가 쿵쾅대면서 자신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이진은 마치 아빠 곰에게 쫓기는 사냥꾼처럼 더 열심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또다시 누군가와 부딪히고 말았다.

“크헉.”

“악!”

“거기 있구나, 이놈!”

휙, 검을 휘두르는 소리가 들리자 이진은 반사적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찬우의 검이 이진이 두 번째로 부딪힌 사람에게 가서 맞았다.

“뭐지?”

“선승현이였구나! 네놈……!”

예기치 못하게 한 대를 얻어맞은 승현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찬우가 다시 검을 휘둘렀다. 그런데 이번에 들려온 소리는 스펀지와 육체가 맞닿은 소리가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운이 좋았던 건지, 아니면 검의 궤도를 예측한 건지 승현은 찬우의 검을 막아 냈다.

“아니, 어떻게? 안대 없는 거 아냐?”

“여기 있구나.”

그 뒤로 여러 차례 빠른 타격음이 들렸다. 이진은 볼 수 없었지만, 찬우의 팔이 높이 뜬 사이 승현이 비어 있는 옆구리를 아주 빠르게 공격했다. 다들 멋있는 포즈를 취하며 검을 휘두를 때, 승현은 스펀지 검의 재질적 특성을 이용하여 정확히 세 번의 타격을 가했다.

“아니, 이 비겁한!”

“뭐야. 지금 사극 찍어?”

승현의 냉랭한 목소리와 함께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고 찬우가 장내에서 아웃당했다.

“뭐야! 유이진 뭐야? 유이진!”

안대를 벗은 찬우가 발밑에 쭈그리고 앉은 이진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거기에서 힌트를 얻은 건지 바로 머리 위에 있던 승현이 발을 움직여 이진의 등을 툭툭 걷어찼다.

“아, 설마 이게 이진이 형이에요?”

“……나 아니야.”

이진은 통하지 않을 변명을 하며 승현의 처분을 기다렸다. 다시 게임이 시작되면 곧장 탈락당하게 생겼다. 그러나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게임이 재개되었음에도 승현은 그를 공격하지 않았다. 신체 일부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머리 위에 퍼졌다.

“착하지.”

승현은 쭈그려 앉은 이진을 농락하듯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 뭐 해?”

“어허. 탈락당하고 싶어?”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발끈한 이진이 품 안에 꼭 안고 있던 검을 휘둘러 승현을 때리려고 했으나 머리가 눌린 채로는 팔을 아무리 휘둘러도 상대에게 검 끝이 닿지 않았다.

“뭐지, 이 소리? 지금 반항하는 건가?”

“차라리 날 죽여!”

이진이 원통하게 외쳤다. 구경꾼들이 깔깔대는 소리와 ‘나는 조선의 장군이다!’ 따위를 외치며 역할극을 즐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중에서도 승현의 웃음소리가 제일 크게 이진의 귓가를 울렸다.

“내가 형을 왜 죽여요.”

“안 죽이면 내 손에 죽게 될 거야.”

“알았어요, 그럼.”

승현이 검을 들어 이진의 머리를 통, 내리쳤다. 죽이라고는 했지만 정말 때릴 줄은 몰랐기에 잠시 정신이 멍했다.

“뭐, 뭐 해! 나머지 두 대도 얼른 때리라고!”

“아니, 진짜 치니까 서운해하는 것 같아서요.”

“아니거든……?”

이진은 승현이 자신을 놀리느라 방심한 틈을 타 머리를 손에서 비틀어 빼내고 몸을 반대로 돌려 팔을 휘둘렀다. 큰 호를 그리며 휘둘러진 검이 빠악, 하고 시원한 소리를 내며 승현의 몸 어딘가에 부딪혔다.

“윽!”

“얕봤겠다……!”

이진은 승현이 허둥대는 사이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있을 법한 곳에 검을 겨누고 섰다. 선승현은 이미 한 차례 한찬우의 검을 튕겨 냈다. 섣불리 공격했다가는 찬우처럼 반격만 당할 것이다. 이진은 살금살금, 소리가 나지 않도록 발을 움직여 약 45도쯤 옆으로 이동했다. 옆을 노릴 속셈이었다.

휘익, 이진이 검을 휘둘렀다. 너무 큰 궤도를 그리지 않도록 팔꿈치를 몸통에 붙이고 작게 휘둘렀다. 톡. 뭔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승현의 몸일 거라 추측됐다. 이진은 바로 팔을 빼고 마지막 일격을 날리려 했다.

“어?”

그러나 팔을 움직일 수 없었다. 검이 어딘가에 박히기라도 한 듯 빠지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 있었구나.”

승현이 스펀지 검의 검신을 꽉 잡고 천천히 이진 쪽으로 걸어왔다.

“바, 반칙!”

“이게 반칙이에요? 혈투라고 해야죠.”

승현이 가볍게 휘두른 검이 이진의 정수리에 직격했다. 퍼엉, 소리와 함께 이진의 멘탈도 함께 깨졌다. 승현의 검이 다시 내려오기 전, 누군가 넘어지는 소리와 함께 다른 참가자들이 탈락했다.

“결투에서 발목 잡아도 돼?”

“형도 몸통으로 박치기했잖아!”

제이슨과 하늘이 분한 듯 씩씩거리더니 돌연 말을 멈췄다.

“……결투에서 검 잡아도 돼?”

“아, 나 이거 사진 찍을래.”

찰칵! 몸을 움직이면서도 핸드폰을 품에서 떼 놓지 못했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하늘이 다각도로 사진을 찍어 댔다.

“그만해!”

이진이 애달픈 목소리로 외쳤다. 승현의 검이 바로 머리 위에 있는 상태로 농락당하는 모습을 박제당하다니, 너무 수치스러웠다. 하늘이 만족할 만큼 사진을 찍고 관객석로 나가자 다시 게임이 시작되었다. 이진은 곧 자신의 머리로 떨어질 검을 기다리며 안대 밑으로 눈을 꼭 감았다.

“형. 이거 놔줄까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알았어요.”

승현이 더는 자비를 베풀지 않고 머리를 통 때렸다. 이진은 부들부들 분노하며 호루라기가 울리자마자 안대를 거칠게 벗었다. 평소엔 잘 웃지도 않는 놈이 지금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얼굴 가득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야. 이진아, 수고했어.”

깔깔 웃다가 눈물까지 쏙 뺀 미열이 터덜터덜 걸어오는 이진을 환영했다.

“선승현 저거 미친 거 아니냐? 칼싸움 왜 저렇게 잘해?”

찬우가 멍하니 게임을 지켜보며 말했다. 승현은 지금 재규와 맞붙고 있었는데 액션 영화라도 찍듯 놀라운 솜씨로 재규의 검을 막아 냈다. 짧은 새에 재규를 두 번 맞췄음에도 마지막 반격은 안 하고 공격을 막기만 하는 게 마치 상대방을 농락하는 고수 같았다.

그러나 승현도 쪽수에는 어쩔 수 없었는지, 뒤에서 공격해 오는 박희영에게 나머지 한 대를 맞고 탈락하고 말았다.

우승자는 머리를 써서 벽에 찰싹 붙어 있던 박준현으로, 오래 살아남은 순서대로 우드락으로 급조된 임시 벽 뒤로 들어가 마음에 드는 컨셉 종이를 들고 나오면 됐다. 지금 정해진 컨셉은 팀이 모두 정해질 때까지 공개할 수 없었다.

이진은 뒤에서 다섯 번째 순서라 가벽 뒤로 들어갔을 때 남은 컨셉이 많지 않았다. 벽에 붙은 종이에는 각자 동양풍, 복고, 동물 귀, 경호원, 풋풋한이라고 적혀 있었다. 커다랗게 적힌 컨셉 밑으로 대략적인 설명이 적혀 있었는데 의상과 안무 내용이 주를 이뤘다.

‘동양풍은 뭐지? 설마 창을 해야 하는 건 아니겠고…… 상모라도 돌리나?’

예쁜 개량 한복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 이진은 동물 귀와 함께 동양풍을 탈락시켰다. 경호원과 풋풋한은 뒤에 남은 찬우와 하늘에게 필요할 것 같아 이진은 복고라 적힌 용지를 벽에서 떼어 내 두 번 접어 주머니에 넣은 뒤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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