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이진은 승현이 벗어 둔 롱 패딩을 주섬주섬 몸 위로 덮은 뒤 그대로 자리에 드러누웠다. 딱딱한 나무 바닥에 닿은 어깨뼈와 척추가 욱신거렸다. 조금 더 기력이 있었더라면 승현의 멍청한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고 기억해 줬겠지만 그럴 힘까지는 없었다. 이진은 그저 그의 곁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형 안 가요?”
“응…….”
“왜요? 이러고 자면 목이랑 어깨 결릴 텐데.”
“괜찮아.”
이진은 자꾸 말을 거는 승현이 귀찮아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어둠 속에서 승현의 허탈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내가 외로울까 봐 그래요?”
대답하지 않고 목소리를 피해 돌아누웠다. 속으로 뭐든지 참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는 놈이라고 욕을 했다.
“승현아, 네가 하는 짓은 선행을 향한 강박적 사고 같아.”
성숙한 척하지만 승현은 이진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앞가림만으로도 벅찬 미숙한 어른이다. 노련한 어른은 자기 마음 좀 편하겠다고 외워 봤자 무의미한 이름들을 밤까지 새 가며 줄줄 읽어 대지 않는다.
승현이 낮게 웃다가 다시 하품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죽여 바람만 오고 가는 하품에도 잠기운이 가득 묻어 있었다.
그러고 승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무어라 대답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때, 그는 다시 잠에 들어 있었으니까. 다만 다음 날 나란히 연습실에 누워 자다 깬 승현의 얼굴은 밤 동안 쌓인 피로와는 별개로 그에게 얹혀 있던 시름 한 조각이 훌훌 털어 버린 것처럼 개운해 보였다.
잠든 이진을 상대로 하고 싶은 말을 전부 털어 낸 걸까, 아니면 이진이 곁을 지켜 줬기에 조금은 용기가 생긴 걸까.
이진은 그와 자신은 데뷔를 걸고 내기를 했으며, 친구가 될 생각은 전혀 없다고 스스로에게 주지시키고 나서야 옆에서 기웃거리는 승현을 태연한 얼굴로 대할 수 있었다.
***
미열과 찬우는 미적지근한 화해를 나눴다. 피차 스트레스 때문에 반응이 과했다고 인정했다. 화해는 했으나 이미 상한 감정이 하루 만에 원상태로 돌아오지는 않아 불편한 공기는 여전했다. 그나마 두 사람이 잘못을 깔끔히 인정하는 성격이라 다행이었다.
다음 촬영은 오랜만에 유니폼에서 벗어나 트레이닝복을 입었다. 몸에 꼭 들어맞는 정장이 불편하기도 했지만 이진은 아무래도 흰 옷보다는 검은 옷을 입는 편이 마음이 편했다.
유니폼을 입은 채로 뭐라도 먹으러 가면 행여나 옷에 뭐라도 묻을까 노심초사하게 되는데 검은 트레이닝복은 뭘 흘려도 카메라에 잘 잡히지 않으니 참 좋았다. 미열은 어깨 위에 비듬이 떨어질까 신경 쓰인다고 했지만 이진은 흰 옷에 튀었을지도 모를 김칫국물이 백배는 신경 쓰였다.
새로운 팀을 정하기에 앞서 새 노래를 감상하는 시간이 먼저였다. 스태프가 자리를 지정해 주지 않았기에 전 이진 팀은 다시 와글와글 모여 앉을 수 있었다.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동그랗게 자리를 잡으니 크고 위협적이던 스튜디오가 금세 안락해졌다. 진영은 여전히 제이슨과 함께였지만 이진은 굳이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제이슨은 컨셉을 아예 힙합으로 잡을 거라더라. 다 랩으로 편곡할 거래. 노래도 안 들어 보고.”
“노래 안 듣고 섹시 외치는 사람들 여기도 있지.”
윌리엄이 어디서 들었는지 제이슨의 근황을 얘기하자 하늘이 찬우와 미열을 가리키며 말했다. 찬우는 민망한 표정으로 헤헤 웃었고 미열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이렇게 다양한 컨셉이 충돌하는 판에선 클래식하면서도 절로 눈길이 가는 섹시 컨셉이 제일 잘 먹힌다 변명했다.
“미열이는 어느 팀 갈 거야?”
“뽑아 주는 데 가야지.”
“에이. 승현이랑 찬우는 너 장기 자랑 보지도 않고 뽑아 줄 거 아니야.”
윌리엄의 물음에 잠깐 침묵이 찾아왔다. 아직 찬우와 미열이 싸운 걸 모르는 하늘과 윌리엄은 어떤 단어가 냉한 반응을 불러왔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이진은 어색함에 눈알을 굴리다가 승현과 눈이 마주쳤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승현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 눈엔 이진이 형이 백미열 안 뽑아 줄 것 같나 봐.”
“에이! 그런 게 아니라…….”
화제를 돌리기 위한 승현의 딴죽이 의외로 정곡을 찔렀는지 윌리엄이 크게 당황했다. 하늘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으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윌리엄이 말을 더듬으며 제대로 된 변명조차 못하자 더 당황한 건 이진이었다.
“나도 미열이 뽑아 줄 거야! 곰 세 마리만 불러도 뽑을 건데…….”
“이진아, 감동이다. 근데 곰 세 마리는 어디서 나온 선곡이냐.”
미열이 기세를 이어 그를 놀렸다. 이진은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려 양 손으로 뺨을 눌러 식혔다. 아직 카메라가 돌고 있지 않아 찍히진 않았겠지만, 윌리엄을 비롯한 동료들이 보는 이진이 TV속 모습과 닮았다면 시청자들에게 이진은 조금 냉정한 인물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동안 미뤄 뒀던 방송을 챙겨 볼 용기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PD가 메가폰으로 촬영을 시작한다고 알렸다. 슬레이트 탁, 마주치자 웅장한 음악과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나레이션처럼 흘러나왔다.
“Welcome to the Winner Takes All! We are going to start the round2.”
에코 효과를 잔뜩 받은 낮게 깐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이진은 평소처럼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제작진들 사이에서 마이크를 든 남자를 발견했다. A4 용지 뭉치를 한 손에 쥔 남자는 마이크에다 대고 무어라 말하고 있었는데 거리가 멀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각자 촬영 중인 영상을 확인하거나 대본대로의 진행을 위해 소품을 준비하거나 하며 촬영 자체에 집중하는 다른 스태프들과 달리, 홀로 흰 종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모습이 이질적이면서도 눈길을 끌었다.
“여러분들이 이번 라운드에 공연하게 될 곡의 제목은 ‘Craving Juice’ 입니다. 승리를 향한 갈망을 액체로 표현한 이 곡은…….”
남자가 뭐라 중얼거리는 입 모양이 신기하게도 귀에 들리는 나레이션과 거의 비슷하게 보였다. 약간의 딜레이가 있긴 하지만 마치 기계에게 스피커에게 출력할 내용을 일러 주기라도 하는 듯 남자는 쉼 없이 입을 움직였다.
그게 묘하게 재미있어 이진은 계속 그 남자를 바라보며 그가 하는 일이 무엇일지 추측했다. 다른 스튜디오에 있는 스태프들에게 무전으로 지시를 전달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진은 그게 꽤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순간, 잠깐 종이에서 눈을 들어 힐끔 촬영장을 확인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불현듯 뒤통수를 땡, 하고 울리며 깨달음이 찾아왔다.
‘저 사람이 성우였구나!’
이진은 저도 모르게 ‘아!’ 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간간히 속삭이는 사람들이 있어 촬영을 방해할 만큼 큰 소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까진 줄곧 종이를 보고 있던 남자가 갑자기 아예 고개를 들더니 이진과 눈을 정면으로 마주쳤다. 이진은 혹시 제 목소리가 들려서 신경을 거스른 걸까 안절부절못했다. 남자는 이진과 눈을 마주친 채 계속 마이크에 대고 대사를 이어 가고 있었다.
“승리를 향한 이진……. 아니, 행진……. 아이고, 죄송합니다.”
스피커에서 출력되던 낮고 묵직하던 음성이 한순간에 휙 높아지더니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했다. 강제로 조성된 숨죽인 긴장감이 흐르던 스튜디오 분위기가 와장창 깨지며 그 틈으로 밝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진은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고 동그란 눈으로 이곳저곳을 두리번댔다. 이런 일이 있으면 앞장서서 설명해 주던 미열도 뭔지 모르는 눈치였다. 감독이 승리를 향한 이진이 대체 뭐냐고 껄껄 웃었다. 남자는 다시 마이크에 대고 입을 열었다.
“이진 씨가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보니까 내가 긴장을 해가지고…….”
너무 잘생겨서 그만 홀려 버리고 말았냐는 농담과 함께 순식간에 백여 명의 시선이 이진에게로 모였다.
“뭔데? 나 뭐 놓친 건데?”
무슨 일이 있는지 파악을 못한 참가자들의 어리둥절한 얼굴과 이진을 보고 웃으며 가끔 엉뚱해서 재밌다고 저들끼리 낄낄대는 제작진들.
“이진이 또 별나라 구경하고 왔니?”
“진정한 자유로운 영혼이네.”
그리고 또 촬영 중에 혼자 딴 나라 다녀왔다고 장난스런 타박을 주는 친구들이 동시에 눈과 귀로 들어와 뇌 속에 입력됐다. 화악, 과도한 관심에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 버린 이진이 말을 더듬으며 사과했다. 이유는 몰라도 자신이 그의 집중을 깨고 만 것은 분명한 것 같아 제작진들에게 밉보일까 걱정스러웠다.
“아, 죄송해요. 여태까지 전부 녹음인 줄 알았는데 너무 신기해서…….”
이진이 얼굴이 빨개져서 두서없는 사과를 웅얼거리자 별 뜻 없이 농담을 던졌던 남자와 제작진들이 오히려 이진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마시고 좀 진정하세요.”
이진보다 어려 보이는 스태프가 다가와 얼음물을 건넸다. 참가자 모두가 모인 것치고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촬영이라 작은 해프닝을 웃으며 넘겨주는 것 같았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얼음물을 받아 들어 벌컥벌컥 마시자 골이 띵 울리며 잡생각들이 강제로 마비됐다.
무엇보다 물을 건네주러 온 그녀의 표정에 짜증이 아닌 웃음이 서려 있다는 점이 이진을 안심시켰다. 갑작스럽게 쏠린 관심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적어도 당장 쓰러져 토할 것 같다거나 빠진 눈알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듯한 메스꺼움은 없었다.
“에구, 우리 승리를 향한 이진이.”
찬우가 이진의 뒤통수를 잡아다 제 가슴팍에 누르며 꼭 껴안았다. 막무가내인 포옹이었지만 평소처럼 뼈를 으스러뜨릴 기세로 껴안는 우악스러움은 많이 사라져 있었다. 오히려 이진의 뒤통수를 누른 손을 뒤늦게 인식했는지 슬그머니 떼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재정비할 필요도 없는 가벼운 사건이라 곧 촬영이 다시 시작되었다. 찬우를 슬쩍 밀어 품속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누군가 뒤에서 손을 뻗어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 줬다. 이진은 미열인 줄 알고 가만히 있었는데, 뒤에서 들리는 헛웃음 소리가 미열이 아니라 승현이었다. 깜짝 놀란 이진이 어깨를 움찔거리며 손을 피해 머리를 움직였다.
“형…….”
“집중해!”
승현이 뭐라고 말을 하려는 찰나 찰싹 소리와 함께 미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덕분에 이진은 무사히 설명에 집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