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여기 귀신 나올 것 같아요…….’
‘뭐?’
긴 복도를 걷다 보니 미열과 승현과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두 사람 다 겁이 많아 귀신 소리에 벌벌 떨었는데. 이 늦은 밤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건지 귀신이 있다면 얼른 잡아다 이진의 앞에다 대령해 줬으면 했다.
‘야, 미친. 귀신같은 소리 하지 마! 진짜 귀신 나오면 어떡할 거야? 귀신도 관종이라서 누가 귀신 얘기하면 귀신같이 알고 좋다고 따라온단 말이야!’
‘……걔네가 진짜 나타난다면 내가 부른 게 아니라 네가 부른 거야.’
그러면 미열은 대체 누가 귀신을 부른 거냐며 한참을 이곳저곳에 따지고 자기가 얼마나 놀랐는지 속사포로 떠들어야 만족할 것이다. 찬우가 미열의 말을 참 잘 들어 줬다.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는 경우가 적은 만큼 찬우는 주장이 확고한 미열과 대화의 죽이 잘 맞았다.
가만히 떠올려 보면 찬우는 미열뿐만 아니라 진영과도 참 잘 지냈다. 처음에는 미열과 진영이 어울려 다녔는데, 이젠 예전만큼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 어쩌면 두 사람이 서로가 아닌 찬우를 찾게 되는 건 가까이 지내면 지낼수록 서로 부딪치게 되는 성격을 가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의외로 잘 지내고 있는 승현과 하늘이 가까워진 이유가 궁금했다. 하늘은 미열만큼 노골적이진 않아도 약삭빠른 면이 있었다. 승현은 그런 행동들을 싫어하는 게 분명한데 이상하게 하늘만큼은 꼬박꼬박 챙겼다.
‘나랑은 이상한 내기나 했으면서.’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1층 복도를 돌아다니다가 건물 정문이 잠겨 있는 것을 확인한 이진은, 마지막으로 지하만 돌아보고 다시 꿈나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지하에도 연습실에서 새어 나온 불빛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몰라 잠기지 않고 열린 연습실을 하나씩 열어 봤다. 몇 번쯤 반복하자 복도 끝에 다다랐다. 이게 마지막이라 다짐하며 이진은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끼이익, 하고 묵직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불이 온통 꺼져 어두운 가운데 핸드폰의 푸른빛이 누군가의 얼굴을 비췄다.
“선승현?”
이진이 이름을 부르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승현은 귀신이라도 본 표정으로 더듬더듬 이진의 이름을 불렀다.
“……유이진?”
승현에게서 듣는 제 이름은 굉장히 낯설었다. 그러고 보면 승현은 미열을 핑계로 이진을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 형이란 호칭을 잘 사용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내킬 때만 사용하는 듯했다. 보통은 문장 내에서 호명 자체를 잘 하지 않았고, 카메라 앞이 아니라면 찬우쯤 되는 사이에는 서슴없이 이름만 부르곤 했다.
승현이 속으로는 이진을 반말로 부르고 있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진은 승현이 위아래에 대한 개념이 희박한 놈이라 나중에 성공하고 나서 재수 없고 싸가지 없단 소문이 끊이질 않았나 보다는 생각을 했다.
이진이 문틈으로 고개만 내밀며 물었다.
“왜 여기 있어?”
“그러는 형이야말로 잠 안 자고 뭐 하는 거예요?”
말투 때문인지 잠 안 자고 돌아다니는 어린애가 되어 그에게 혼나는 기분이 들었다. 이진은 대답을 안 하고 반쯤 연 문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승현이 주섬주섬 일어서는 찰나에 연습실안까지 들어온 이진이 등 뒤로 문을 쿵 닫았다. 우연의 일치였지만 왠지 나가려던 그를 방에 가둬 둔 것 같아 우스웠다.
“너는 왜 안 자고?”
“저는 원래 밤에 잘 못 자요.”
“나도 실수로 너무 일찍 자서 일찍 깼어.”
이진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승현과 나누는 대화라기엔 지나치게 평온하고 일상적이라 어색했다. 이진은 언제나 승현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노심초사했고 승현은 그런 이진을 보며 신경을 못 긁어 안달이었다. 지금은 어쩐지 콩트를 하는 것처럼 대화가 탁구공같이 통통 잘도 튀겼다.
무심코 승현이 입으로 탁구공을 퐁 뱉는 상상을 해 버린 이진은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이성이 제어하지 못한 웃음소리가 히히, 하고 목에서 새어 나올 때야 그는 자신이 푹 자고 일어나 기분이 다소 고조된 상태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보아하니 승현도 그걸 알아차린 것 같았다.
어쩐지 오지랖을 부리고 싶더라니…….
승현은 먼저 선수를 치지 않으면 또 이진을 동생 대하듯 어르고 달래 침대 속으로 보내 버릴 것 같았다. 이진은 승현의 오른손에서 반짝이며 빛을 내고 있는 핸드폰을 바라보며 물었다.
“뭐 하고 있었어?”
승현은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긁적이다가 피식 웃더니 대답했다.
“형 생각 하고 있었어요.”
이진은 그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가늠해 보기 위에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주위가 너무 어두워서 승현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진짜에요. 형 생각 하고 있는데 눈앞에 나타나서 얼마나 놀랐는데요.
“내 생각을 왜 해?”
“욕실에 들어간 김에 씻고 나왔는데 형이 너무 태평하게 자고 있어서 완전 어이없었거든요.”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놀리는 기색이 숨어 있었다. 이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삐쭉였다. 말수도 적으면서 도저히 말로는 이기기 어려운 상대다. 승현은 언제나 이진이 대꾸하기 어려운 지점으로만 공을 날렸다.
이진도 홀라당 골아 떨어져 버린 점에 대해서는 조금 민망하게 느끼고 있었다. 예전부터 정신적으로 피곤한 일이 있을 때마다 잠으로의 도피를 택했더니 이제는 조금만 신경 쓸 일이 생겨도 잠부터 왔다.
숙소 내 생활 반경이 연습실, 스튜디오, 침대뿐인 것도 꽤 영향을 미쳤다. 실내에 갇힌 몸은 침대 속에 파묻히자마자 꿈나라로 여행을 떠나기 바빴다. 그러지 않으면 답답해서 견디지 못하는 무의식의 노력일지도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새벽 세 시에 내 생각 한다는 거 너무 징그럽다.”
“음…… 그러게요.”
승현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도 어째 평소보다 말이 많고 고분고분했다. 평소에는 별말 없이 듣기만 하다가 ‘뭐 어쩔 수 없으니 따라 준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이는 게 전부였는데, 약간 말장난을 치거나 괜히 배배 늘어지는 말투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진은 그게 또 우스웠다. 고분고분한 선승현. 반년 전의 이진에게 들려 줬다면 제발 소설은 일기장에다 쓰라며 경멸 섞인 일침을 남겼을 거다. 이진이 히히 웃었다.
이진이 뭔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따라 웃던 승현이 곧 눈을 비비며 하품을 했다. 하품을 끝내고도 몇 초 동안 멍하니 눈을 꿈뻑거리는 걸 보니 그가 맑은 정신에 기분이 좋은 것과 반대로 승현은 졸음에 취해 늘어져 보였다.
“빨리 말해. 졸음도 참고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이진은 승현의 앞으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엉덩이에 딱딱한 바닥이 느껴지자마자 갑자기 내가 왜 여기 앉아 있는 거지? 하고 의문이 들었지만 몸이 너무 자연스럽게 움직여서 막을 도리가 없었다. 승현은 “음…….” 하고 기운 빠지는 소리를 내더니 ‘에라, 모르겠다.’ 하는 기색으로 아까부터 들여다보던 핸드폰 화면을 보여 줬다.
핸드폰 화면엔 윈올의 공식 사이트 프로필 페이지가 열려 있었다. 이름순, 인기순, 1라운드 포지션 순서 등 여러 방법으로 명단을 정렬할 수 있는 페이지는 랜덤 정렬로 선택되어 77명을 무작위로 나열해 두었다.
이진이 승현과 핸드폰을 번갈아 봤다. 이번엔 아까와는 반대로 밝은 불빛에 눈이 부셔 승현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명확하지 않아 속이 답답했다.
“복습하고 있었어요.”
승현의 목소리는 방과 후 보충 수업을 듣는 사실을 친구에게 들킨 초등학생처럼 민망함이 가득 묻어 났다. 보충 수업으로 같은 학교 친구들 이름 외우기라니. 곧바로 낮의 일을 떠올린 이진은 평소라면 넘겨 버릴 질문을 굳이 할 수밖에 없었다.
“왜?”
어차피 촬영은 끝이 났고, 이제 남은 건 편집 팀의 손에서 리더들이 자기밖에 모르는 매정한 놈으로 거듭나거나 이름을 불리지 못한 참가자들이 참가자들 사이에서도 소외받은 낙오자로 낙인찍히는 상황뿐이었다. 이미 촬영된 분량은 되돌릴 수도 없다. 이제 와서 그들의 이름을 외운다 한들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다. 이미 갈라진 틈을 어떻게 매울 수 있을까.
“굳이?”
어차피 그들 중 대다수는 일주일은 넘기지 못하고 탈락할게 분명했다. 이진은 그들의 자존심보다 승현의 숙면이 몇 배는 중요할 거라 확신했다. 일부러 냉정하게 생각하려는 게 아니라 사실이 그랬다. 불도 켜지 않은 채 차가운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조만간 이별할 사람들의 이름을 외우는 일은, 카메라에게 보일 것도 아닌 이상 아주 비싼 돈을 주고 사서하는 고생일 뿐이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마주친 승현의 눈은 그런 이진의 생각을 통째로 읽은 것 같이 온화하게 빛났다.
“그냥, 그게 도리인 것 같아서요. 여기 누구도 들러리가 되고 싶어서 방송에 참가한 건 아니잖아요. 동료이자 경쟁자로서 이름 정도는 외워 두는 게 예의일 것 같아서…….”
승현이 말끝을 흐렸다. 스스로도 이렇다 할 확신은 없지만 마음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듯했다.
‘근본적으로 선하지. 늘 옳은 길을 향하고자 노력하고.’
윌리엄이 승현을 평한 말이 문득 떠올랐다. 이진은 승현의 씀씀이가 쓸데없이 넓고 곱다고 생각했다. 소외되거나 힘들어 보이는 동료가 있으면 꼭 찾아가 챙기고 노골적으로 본인과 친해질 생각 없다고 말한 이진과도 잘 지내고자 노력할 때부터 그렇다고 생각은 했다. 그런데 오늘 보니 생각보다 더 미련하고, 답답할 만큼 바른 사람이었다.
자신이라면 가장 친한 친구와 친한 룸메이트 형이 싸운 날 밤, 과연 저 이름들이 눈에 들어올까. 촬영장에서 느낀 다수의 경멸하는 시선, 리더라는 자리에서 받는 중압감, 방에 돌아오자마자 만난 날선 분위기.
이진이라면 감당하기 벅차 펑 터져 버렸을 만큼 많은 정신적 피로에 노출되어 있을 텐데…….
“어차피 잠도 잘 안 오니까 남는 시간에, 으하암.”
승현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하품을 했다. 그런 상황에서 타인을 생각할 수 있다는 건 분명 대단한 일이었지만 어찌 보면 강박과도 닮아 있었다. 아마 이진이 같은 행동을 했다면 승현은 서슴없이 ‘형 그건 선행을 향한 강박적 사고 같아요.’ 하고 괜한 말을 했다가 이진의 미움을 샀을 게 뻔했다.
이진이 대답이 없자 승현은 다시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이름을 외우기 시작했다. 손으로 적는 것도 아니고, 작은 핸드폰 화면을 노려보고 있는다고 뭐가 머릿속에 들어오기나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뺨을 긁적이는데, 졸린 눈을 비비던 승현이 멍하니 앉은 이진을 보고 먼저 올라가라고 말했다.
“형은 자야죠.”
“그렇지.”
지금 자러 가지 않으면 내일 스케줄을 소화하기 힘들어질 거란 걸 알았다. 이진의 컨디션에 가장 중요한 요인은 규칙적인 생활이었다. 느닷없이 새벽 세 시에 일어난 것만으로 큰 리스크인데 지금이라도 얼른 올라가 잠들지 않으면 촬영을 하다 쿨쿨 졸아 버릴지도 몰랐다.
그런데 왠지 승현을 혼자 두고 돌아가기엔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얼마나 오래 이 어둠속에 홀로 앉아 있었는지는 몰라도 남은 새벽마저 외로이 지새우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승현이 하는 일은 선한 마음에서 기인한 미련하고 멍청한 행동이라 이진이 지켜봐 주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게 틀림없었다.
이진이 아니라면, 그의 선함은 물거품처럼 사라져 무가치로 돌아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