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굳은 이진의 어깨 위로 익숙한 손이 닿았다. 잠깐 승현이라고 생각했으나 살짝 눈을 돌려 확인한 얼굴은 다른 이였다.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한 찬우가 이진의 어깨를 단단히 붙들고 스튜디오의 조명 밑으로 걸어 들어갔다. 찬우의 뒤를 따라 문 앞에 멈춰 서 있던 다른 사람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짧은 순간이 시간이 멈춘 듯 길게 느껴졌다. 찬우는 익숙한 이들의 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찬우와 이진이 다가가자 미열의 팔 안에 안겨 있던 참가자가 몸을 비틀어 빼내고 그들을 피해 다른 곳으로 향했다. 살짝 마주친 눈에서 강렬한 분노와 배신감이 전해졌다.
“멤버 선점권 못 땄어. 이진이랑 승현이도 게임 엄청 못 하더라.”
“그래. 그런 것 같더라. 그러게 평소에 친구 좀 사귀랬잖아.”
찬우가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걸자 미열도 자연스럽게 말을 받아 평소와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러나 이진은 아직도 등골이 오싹했다. 이진은 은밀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공유하는 이들이, 얼마나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시선을 보냈는지 기억했다.
가장 두려운 것은 이번 일이 잠깐의 소란일 뿐, 제대로 된 사건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다는 직감이었다.
***
굳이 참가자들을 다시 한 자리에 불러 모아 진행된 촬영은 리더들의 각오를 보여 주는 시간이었다. 이것만 봐도 제작진이 얼마나 노골적으로 참가자들 간의 분열을 기획했는지 고스란히 드러났다. 단상 위에 높게 올라선 11명의 앞으로 나머지 참가자들이 줄을 맞춰 나란히 섰다.
이제는 익숙해진 형체 없는 음성이 리더들의 이름을 차례대로 부르면 호명된 사람은 앞으로 한 발자국 걸어가 이번 라운드에서의 포부를 밝혀야 했다.
“시청자 분들이 즐거워하실 수 있도록…….”
“아직 보여 주지 못한 끼와 재능을 마음껏 펼치는 무대를…….”
리더로 뽑힌 지 하루도 지나지 않은 것치고 다들 준비된 대사를 읊는 듯이 말이 능수능란했다. 체면치레에 약할 것 같던 찬우도 제법 의젓한 자세로 “누구도 후회를 남기지 않아야 하기에 제가 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는 멋진 대사를 해냈다.
이진은 할 말이 없어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겠다고만 말했다. 준비해 둔 말이 없기도 했지만 그 짧은 문장이 이진의 진심이기도 했다.
승현의 ‘모두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자’는 말을 마지막으로 모두의 연설이 끝났다. 목소리는 리더들이 지금 이 순간 본인의 말을 오래도록 기억하여 지키길 바란다며 음산한 목소리로 괜한 소리를 했다.
드디어 길고 고된 촬영이 끝났다. 제작진은 개인 인터뷰를 위해 남아야 할 사람들을 차례로 불렀다. 이전엔 조용히 찾아와 남아 달라고 부탁했다면 이번엔 상당히 소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인터뷰를 위해 스태프를 따라가는 이들은 예상대로 평소에 별 주목을 받지 못하던 참가자들로 이번에 이름을 불리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명단의 끝 무렵에 미열의 이름도 불렸으나 미열은 듣지 못한 척 찬우와 이진을 끌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승현을 두고 와서 세 사람뿐이었다. 그리고 10층에 도착할 때까지 입을 연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다들 표정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방문을 닫자마자 바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미친 거 아니야? 도대체 그걸 왜 중계하는데?”
찬우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가 제 목소리에 자기가 놀라서 심호흡하며 감정을 가라앉히려 했다. 이진은 미열의 표정을 살폈다.
“대화 한번 안 해 본 사람 이름을 대체 어떻게 아냐고!”
“……결과적으로 시청자들이 뽑는 건 팀의 리더라는 뜻이지.”
미열이 침착하게 말했다. 흥분한 찬우와 대조되는 목소리였다. 찬우도 미열의 말에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봤다.
“그렇잖아. 이 프로그램은 인기투표로 줄 세워서 상위권 7명을 가려내는 게 아니라 단 한 명을 뽑아 우승자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는 거야. 그냥 실력이 좋은 참가자로는 우승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거지.”
찬우는 “그게 무슨……!” 하며 반박하려 했지만 미열은 그저 의도를 분석한 것일 뿐 제작진의 계략에 가담한 것이 아니기에 뒷말을 삼켰다.
하지만 이진은 그 분석 속에 미열의 감정이 섞여 있단 걸 알았다. 만약 미열이 이진과 찬우의 입장이었어도 같은 방향으로 분석할 수 있었을까? 만약 미열의 친구가 이름을 불리지 못한 사람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면, 단순히 시청률을 위한 제작진의 악랄한 속셈이라고 말하며 찬우와 이진을 달래 주려 하지 않았을까?
“나도 알아. 너희도 당황스럽고 이미지 타격이 클 거란 거. 그런데 걔네는 아예 낙인이 찍힌 거야. 줄타기 안 하면 어떤 꼴이 나는지. 물론 너희 잘못이 아니긴 한데, 그래도 걔네 입장에선…….”
그렇게 말하는 미열도 혼란스러워 보였다. 사람의 도덕적 기준은 자신이 속한 집단이 어디냐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미열은 지금 자신이 이입하고 변호해야 하는 집단이 어디인지 헷갈릴 터였다.
그래도 억울한 것은 여전했다. 이진은 차라리 정신이 망가지더라도 2화, 3화를 끊임없이 돌려보고 참가자들의 이름을 모조리 외워 버리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애써 떨쳐 버렸다.
그런데 평소처럼 좋게 웃으며 넘어갈 줄 알았던 찬우가 돌연 날카로운 목소리로 미열을 쏘아붙였다.
“야. 줄타기 잘못하면 망한다는 건 네가 평소에 하던 말이잖아. 네 말대로하면 걔네가 그런 꼴 난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질문의 형태를 했지만 추궁에 가까웠다. 이진은 순하기만 하던 찬우가 이렇게 공격적으로 나올 거란 생각은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어서 깜짝 놀랐다. 미열도 놀란 듯했지만 곧 잔뜩 가라앉은 얼굴로 대답했다.
“결과적으로 망하는 거랑 방송에서 대놓고 조롱당하는 건 다르지.”
“그럼 걔네가 공개 조롱당하지 않도록 하나하나 챙겨 줘야 했다는 거야?”
“그런 말이 아니잖아. 논리적으로는 그렇더라도 감정적으로는…….”
“뭐. 결국은 어쩔 수 없이 악역 노릇하게 됐으니 미안해하기라도 하라고?”
찬우와 미열 사이의 언쟁이 점점 과열됐다. 그들을 능숙하게 진정시킬 만한 능력이 없는 이진은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바짝 졸아 있었다. 항상 분위기를 밝게 풀어 주던 두 사람이었는데, 언성을 높인 모습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이진은 그들을 무시하지도, 끼어들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간신히 차분한 톤을 유지하던 미열이 기어이 소리를 지르려고 할 때, 끼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승현이 돌아왔다. 이진은 지금만큼 승현의 존재가 반가웠던 적이 없었다. 승현은 문을 열자마자 들리는 큰 소리에 눈을 똥그랗게 떴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로 현관 앞에 굳어 버렸다.
“음…….”
승현의 등장이 찬물을 끼얹은 듯 방 안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 승현은 무어라 말을 하는가 싶더니 눈알을 굴리며 현관 바로 옆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소리가 너무 작아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곧이어 화장실에서 샤워기 소리가 들리고 이진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뭔ㄴㅇ일이에요? -선승현-]
다급함이 느껴지는 문자였다. 이진은 엄지손가락을 바지런히 움직여 상황을 전달했다.
[둘이 싸웟어. 누구 탓인진 모르겟어 오늘 촬영때문애 싸웟어]
오타를 고칠 새도 없이 보낸 문자엔 한참이나 답이 없었다.
[형은 신경 쓰지마요 –선승현-]
5분이나 기다린 뒤에 도착한 건 알아서 하겠다는 건지 그냥 놔두라는 건지 모를 답장이었다. 그사이 침묵을 지키던 미열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밖으로 나갔고 찬우는 침대 위에 올라가 드러누워 버렸다. 평소엔 쓸데없는 일로 이진에게 말을 걸던 그였는데 지금은 씩씩대는 숨소리만 들렸다.
이진은 찬우에게 뭐라도 말을 걸어야 하나 싶었지만 미열과 찬우 둘 중 하나의 편을 들어야 할까 봐 말을 붙이기가 힘들었다. 애초에 대부분의 대화는 상대방이 주도했기에 이런 식으로 먼저 말을 걸어야 하는 상황 자체가 낯설었다.
그때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걍 아무것도 하지 말고 신경스지 말아요 –선승현-]
욕실에 있으면서도 이진이 어쩌고 있을지 뻔히 알고 있는 듯했다. 이진은 마음이 불편했지만 애써 다른 곳에 신경을 돌리기 위해 침대 머리맡 선반에서 작곡 노트를 꺼내 들었다. 편곡이라도 해 볼까 싶어서였는데 생각해 보니까 아직 2라운드 메인곡이 뭔지 들어보지도 못했다.-
결국 이진은 ‘컨셉? 캐릭터성.’ 등의 의미 없는 낙서만 해 대다 씻지도 못하고 까무룩 잠들고 말았다.
너무 일찍 잠든 탓인지 이진은 빛 한 점 들지 않아 캄캄한 새벽에 눈을 떴다. 하늘이 푸르스름한 빛깔을 띠는 이른 새벽과는 다른 낯선 광경에 이진이 주변을 두리번대며 상황을 살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시야가 조금 확보되자 잠들기 전 벌어졌던 상황이 다시금 떠오르기 시작했다. 승현의 문자를 보고도 왜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냐고 화를 내지 않은 걸 보니 어지간히 갈등 상황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대각선에 놓인 침대는 위아래 모두 주인을 잃고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둘이 함께 어디로 간건 지 아님 각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아직 새벽 세 시라 다시 잠들기 위해 눈을 감아 봤지만, 빈 머리맡이 신경 쓰여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이진은 조심스럽게 외투를 걸쳐 입고 핸드폰만 챙겨 방을 나섰다. 미열이나 승현 둘 중 하나는 찾아와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이진은 미열이나 찬우가 그렇게 날카롭고 사납게 굴 수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화를 낼 수 있고 궁지에 몰리면 가시를 세우는 게 당연하지만,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 월등히 능숙했다. 그래서 대체로 참가자들 간에 소란이 일면 나서서 말리는 쪽에 속했다.
‘난 대체 아는 게 뭐지…….’
이진은 그들이 서로에게 언성을 높일 만큼 심적으로 부담스러운 상황이란 걸 전혀 몰랐단 게 새삼 충격이었다. 본인의 문제에 골몰하느라 주변인들을 챙기지 못했다는 사실에 미안함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그는 늘 주변의 도움만 받아 왔다.
‘그래도 싸우지는 말지. 이 곰탱이들.’
이진은 자신의 세 룸메이트들이 미련 곰탱이로 보였다. 미련함으로 따지자면 이진이 제일이겠지만, 적어도 이진은 제작진의 농간에 그리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바보 멍청이들. 이렇게 어두운데 어딜 가 있는 거야…….’
숙소로 사용되는 복도는 불이 켜져 있었지만 연습실이 있는 1층과 지하는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뿐이었다. 미열이나 승현이 친구 방에서 신세를 지는 게 아니라면 아직 열려 있는 연습실에 가 있을 터였다. 사실 이진이 찾아볼 수 있는 곳도 그곳이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