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살아남으신 걸 축하드립니다.”
얼굴 없는 남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어두운 스튜디오를 여러 대의 스포트라이트가 이곳저곳 훑으며 비장한 분위기를 연출했고 언제나처럼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2라운드에 도달한 77명의 참가자들은 다시 7명씩 팀을 이뤄 공연을 한다. 앞선 라운드와 마찬가지로 열한 개의 팀에 같은 노래가 주어지며 그중 1등을 한 팀만이 음악 방송에 설 기회를 얻는다. 게다가 이번에는 새로운 룰이 하나 추가되었다.
“각 팀의 리더가 컨셉을 정할 수 있습니다.”
리더가 정한 컨셉에 맞춰 각 팀은 자율적으로, 혹은 멘토들의 도움을 받아 퍼포먼스의 연출 및 안무 수정, 편곡과 개사 등이 가능하다. 의상과 무대 미술은 전문 인력과 협의할 수 있다고 한다.
저번 투표 결과 1등부터 11등까지. 리더의 자격을 부여받은 멤버를 스포트라이트가 일제히 비췄다.
영상을 찍었을 때 빛이 한군데에 몰리지 않도록 손을 써 배정된 자리에 앉아 있던 이진은, 주문받은 대로 침착한 표정으로 정면의 카메라를 응시했다. 저번 라운드에서 고득점을 한 이진 팀은 조각조각 찢어지게 되었다.
“각 팀 멤버들은 ‘어필 타임’을 통해 리더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리더들은 마음에 드는 멤버를 우선 선택할 수 있는 선점권을 획득하기 위해 게임에 참여합니다.”
이진은 미열을 바라봤다. 만약 멤버 개개인이 팀을 고를 수 있었다면 친한 사람이 많은 미열은 어느 팀에든 갈 수 있었겠지만 막상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작은 크기의 최종 라운드나 마찬가지였다.
웅장한 인트로 촬영이 끝나고 팀 선정을 위한 세트가 준비되기까지 다시 자유 시간이 생겼다. 방송 촬영은 그야말로 대기와 대기의 연속이었다.
“이진아, 컨셉은 무조건 섹시야.”
열한 개의 컨셉을 예상해 보던 미열이 대뜸 말했다.
“난 그런 거 못 해.”
“못 해도 해야 해.”
이진과 미열이 힘 빠지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 찬우도 끼어들었다.
“이진아, 대세는 섹시다.”
“그것도 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지. 그리고 다들 노리는 컨셉일 텐데…….”
“하긴 작정하고 벗으려는 팀도 있긴 하겠다.”
미열이 배를 매만지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진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그쪽으로 향하자 미열이 양팔로 배를 가리며 변명했다.
“……근육이 빈약해서 부끄러운 거지 살쪄서 부끄러운 건 아니야.”
매일 같은 방에서 옷을 갈아입는 걸 훤히 봐 놓고 새삼스럽게 부끄러워하는 꼴이 우스웠다. 이진은 미열을 따라 제 배를 문질렀다. 나이를 좀 더 먹었을 땐 책상 앞에 앉아만 있느라고 조금 더 말랑했던 것 같은데. 스물네 살의 이진은 다년의 육체 노동 아르바이트 직후 바로 고난이도 안무 연습에 돌입해 제법 탄탄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미열아. 술살이 잘 안 빠지더라.”
저녁마다 맥주 한 캔씩 마셨을 적의 경험을 되살려 충고했다. 미열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학교 술자리가 얼마나 본인에게만 무자비했는지를 종알거렸다. 이진은 영화 속에서나 본 풍경을 생생히 읊는 목소리를 들으며 컨셉에 대해 고민했다.
이진이 생각하기에 본인은 리더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무거운 사명감을 감당할 마음이 없거니와 시야가 좁아 타인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리더감은 정말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 주어진 일은 또 최선을 다해야만 하는 것이 이진이었다.
전 라운드에서 겪었듯이 수많은 예비 팬클럽 회원 여러분 앞에서 펼치는 라이브 공연은 시청자 투표수와 직결된다. 소속사는커녕 아무런 팬 기반이 없던 이진과 승현이 이렇게 관심을 받고 TOP11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건 단연코 첫 음악 방송이 지대한 역할을 했다.
아직 팀 멤버가 정해지진 않았지만 이진이 이번 라운드를 어떻게 이끌어 가느냐에 따라 여섯 멤버의 운명이 좌지우지 된다. 이진이 잘 소화할 수 있으면서도 대중들의 시선을 끌고 평가 점수도 잘 받을 만한, 또 다른 멤버들의 숨겨진 매력까지 발산할 수 있는 컨셉이 필요했다.
‘근데 그러려면 내 캐릭터부터 찾아야 하는 거 아니야?’
갑자기 도돌이표처럼 생각이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얼추 준비가 되자 리더들은 따로 분리되어 게임을 하기 위한 세트장으로 옮겨 갔다. 찬우가 쪼르르 달려와 다른 애들에게 섹시 컨셉은 자기가 침 발랐다고 통보했다.
“섹시에 관심 없대도.”
“나도 그런 건 소속사에서 꺼려서.”
이진이 대꾸하자 하늘도 한손에 승현을 끌고 다가왔다.
“난 무조건 청춘이야. 교복 입어야 해.”
스무 살이지만 아직 고등학생이란 점을 어필해야 한다며 하늘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결연한 눈빛에서 어린 참가자를 죄다 골라 가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승현은 늘 그렇듯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진은 승현이 과연 아이돌 컨셉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사전처럼 쿡 찌르면 정보를 줄줄 뱉는 미열이 옆에 있으니 꽤 많은 지식을 가졌을 것 같다가도 ‘그런 게 뭐가 중요해. 중요한 건 실력이야.’ 같은 정론을 늘어놓을 것 같기도 했다.
“재규는 섹시 노리는 것 같던데.”
“맞아. 영계 섹시 맛 좀 볼래?”
찬우는 재규의 언행에 충격을 받아 입을 적 버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재규는 한 손은 머리 뒤, 한 손은 허리에 올려 둔 뒤 엉덩이를 이리저리 튕겼다. 한번 튕길 때마다 찬우의 비명이 한 번씩 울렸다. 제법 소리가 커 고개를 돌리던 승현과 잠깐 눈이 마주쳤으나 상대 쪽에서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려 버려 이진도 아무렇지 않은 척 바닥을 바라봤다.
그사이 촬영 준비를 마친 스태프들이 11명을 일렬로 세웠다. 저 멀리, 머리 꼭대기에 달린 조명이 켜지자 방금과는 차원이 다른 빛이 스튜디오 중앙을 비췄다.
“여러분의 미션은 간단합니다. 언제나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여러분의 동료들 이름을 가장 많이 맞추시는 분에게 멤버 선점권이 돌아갑니다.”
카메라 감독이 간단히 설명했다. 스크린에 그들을 제외한 66명의 프로필 사진이 정렬되고 이내 일정한 간격으로 한 명씩 큰 화면에 꽉 차도록 확대된 영상이 지나갔다.
‘흠…….’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설명에 이진은 곧바로 이 게임을 포기했다. 이진이 아는 사람은 극단적으로 적었고 그나마도 저번 순위 발표 때 대거 탈락하고 말았다. 게다가 스태프들이 스튜디오 중앙에 반짝이는 무선 마이크를 배치한 걸로 보아 이번에도 저 마이크를 쟁취한 사람에게만 정답을 맞출 기회가 주어지는 듯했다. 굳이 몸싸움까지 해 가며 모험을 하기엔 이진에게 너무도 불리한 게임이었다.
문제는 동료들의 이름을 모르는 게 참가자들은 물론이고 시청자들에게도 재수 없게 느껴질지도 모른다는 거다. 제작진이야 스타성에 주목하라고 했다지만 방송은 꾸준히 팀워크에 대해 강조를 하고 있으니, 시청자들이 보기에 남에게 무신경하단 점은 상당히 큰 감점 요소일지도 몰랐다.
이 자리에 미열이 있었어야 했는데. 이진은 어떻게 하면 안타깝게 선착순을 놓쳐 대답을 하지 못한 시늉을 해낼 수 있을까 고민했다.
“지금부터 게임을 시작합니다.”
삐이이, 부저 소리가 들리고 잠깐 까매졌던 화면이 반짝 빛나며 누군가의 초상이 나타났다.
“…….‘
치열한 전투를 예상했으나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좌우를 둘러보니 다들 잘 모르는 참가자인지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남에게 무신경한 건 이진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수영이었나? 수연.”
그나마 동규가 더듬대며 이름을 추론했다. 그러나 곧 시간 초과로 사진이 폐기되고, 다음 사람의 사진이 떠올랐다. 이진과 닮은 인상의, 맨 처음 센터조에서 만났던 사람이었다. 찬우가 후다닥 달려가 이름을 말하자 딩동댕 소리가 들리더니 사진 오른쪽 아래 귀퉁이에 찬우의 얼굴이 작게 붙었다.
“야호!”
찬우는 양팔을 위로 뻗으며 승리의 포즈를 취했다.
그렇게 자기가 속했던 포지션이나 그룹의 멤버 이름만 간신히 맞추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포지션을 한번 옮겼던 사람들이 그나마 맞출 수 있는 폭이 넓었으나 이진과 찬우처럼 포지션이 겹치기도 해 생각보다 득점이 어려웠다. 미열이나 윌리엄같이 맞출 사람이 많은 얼굴이 나오면 다들 엉덩이를 들썩이며 서로의 눈치를 봤다.
“지, 지친다.”
“시간 너무 짧아요! 우리 엄마 얼굴 나와도 헷갈린다니까요!”
게임이 끝나고 잔뜩 지친 참가자들이 감독을 향해 항의를 했다. 감독은 웃으며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11명이 아무리 노력해도 이름을 맞추지 못하고 지나간 참가자가 여럿 있었다. 그들의 이름이 마지막에 자막으로 공개되며 게임이 끝났다. 멤버 선점권은 이 중에서는 그나마 붙임성이 좋던 재규가 차지했다. 유의미한 점수 차이가 있는 건 아니어서 본인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이진은 컷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뻐근한 목과 허리를 굽히며 스트레칭을 했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던 것 같은데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찬우가 등 뒤로 다가와 어깨를 주물러 줬다.
“찐찐, 수고했어. 세 명이나 맞추느라.”
“무슨 일 났나?”
찬우의 놀림 사이로 하늘이 중얼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옆 스튜디오를 오가던 말단 제작진들이 곤란한 표정으로 술렁이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상태로 대기하자 곧 촬영을 위해 이동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어쩐지 께름칙했다. 함께 이동하는 스태프들은 예기치 못한 상황 때문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 와중, 고참들의 얼굴엔 미처 숨기지 못한 기묘한 만족감이 드러났다.
‘저 사람들이 무언가 꾸민 것 같은데…….
가장 앞에 선 제작진이 스튜디오의 묵직한 철문을 열자 수십 명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앞에 선 사람들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얼굴들이 그리 밝지는 않았다. 오히려 익숙한 사람들이 보내는 책망의 시선이 느껴졌다.
미열과 눈이 마주쳤을 때 이진은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미열을 보며 이런 기분을 느낄 거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그만큼 미열이 낯설었다. 그는 한 팔로 누군가의 얼굴을 가리고 반대 손으로 연신 등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미친…….”
이진의 등 뒤에서 누군가 욕설을 내뱉었다. 이진은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그 시선이 닿은 곳으로 눈을 돌렸다.
스튜디오의 한 면을 가득 메운 거대한 스크린에 방금까지 11명의 리더들이 촬영을 하던 스튜디오에서 스태프들이 철수 작업을 하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었다. 그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됐다.
“뭐야? 다 보고 있던 거야?”
미열에게 안겨 울고 있는 이는 방금 전 게임에서 누구에게도 이름을 불리지 못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스튜디오 곳곳에 붉은 눈을 하고 주변인에게 위로받는 사람이 보였다. 달래 주는 사람들에게서도 피로감과 원망이 엿보였다.
이진의 우측 대각선에 선 남자가 비스듬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진에게 스타성이 없는 멤버는 버려야 하며 중요한 건 팀이 아니라 개인이라고 설교했던 이였다.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악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