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오랫동안 저녁을 먹고 나서도 촬영까지 시간이 남았다. 방으로 돌아간 미열과 찬우는 캐릭터 분석이라는 핑계로 이진을 앉혀 두고 본인들이 좋아하는 예능을 틀었다. ‘악녀들의 빌리지‘라는 눈에 익은 타이틀이 뜨고 이번 회차 방송을 짧게 요약한 예고편이 빠르게 지나갔다.
-헉, 뭐야! 미친 거 아니야?
-뭔데? 뭔 일이야?
-꺅! 우리 대박 났어. 대박 났다고!
미열의 태블릿에서 난 요란한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이진은 깜짝 놀라 승현의 침대를 확인했다.
“승현이 안 왔나?”
“짐은 있는 것 같은데.”
이진이 승현을 신경 쓰는 걸 확인한 미열이 침대 위로 불룩하게 올라온 이불을 퍽 하고 내리쳤다. 잔뜩 부풀어 오른 슈를 내리친 것처럼 이불이 미열의 주먹 모양대로 푹 꺼졌다. 이불 속은 텅 비어 있었다.
“나갔나 보네?”
“우리가 좀 오래 떠들긴 했지.”
아무도 없는 방 안에 들어왔을 때의 허전함을, 승현도 느꼈으리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도 소외감을 견디지 못하고 나간 걸까? 잠깐 울적함이 찾아왔으나 이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애써 잡생각을 떨쳐 냈다. 지금은 자신의 캐릭터를 공고히 하기 위한 공부에 집중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화면에 눈을 고정시킨 지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이진은 으악,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악! 유이진, 이거 안 봤을 줄 알았어.”
미열이 신나 하며 이진을 잡아끌어 다시 앉혔다. 화면 속에는 이진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나오고 네 모서리에 한 글자씩 자체 발광이라 적혀 있었다. 음산한 효과음과 함께 ‘다섯 악녀들을 당황하게 한 마성의 미남은 누구?’라는 자막이 떠올랐다.
-이렇게 또 화제성에서 업혀 가 보고자 제작진이 특별히…….
-아. 언니, 왜 그래애. 저 친구가 먼저 우리 노래 불러 준 거잖아!
-그래도 개그맨 20년 차로써 염치가 있지. 아직 데뷔도 안 한 애한테 업혀 보겠다고.
미열이 이 사람은 메인 MC라 진행을 도맡아 하고 이 사람들은 시청자를 대변해서 태클을 거는 역할이라며 설명했다. 그 정도쯤은 이진도 알았으나 미열이 계속 공부를 위해 보는 척하길래 그냥 넘어가 줬다.
그들은 이진이 빌리빌런즈의 노래를 오디션에서 부른 것을 핑계 삼아 방송을 진행했다. 이진은 개연성을 위해 소모당한 정도의 분량이었지만 그래도 다른 프로그램에서 자신을 공개적으로 언급하니 볼이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힘들어 죽겠는데 좀 업혀 가면 안 됩니까? 그런고로 오늘은 위너 테이크 올! 윈올의 안무를 배워 보는 시간을 가질 건데요.
-발음 봐.
-……인원수가 두 명 부족해서 특별 게스트를 모셔 봤습니다!
유명한 여자 아이돌 가수 두 명이 문을 열고 등장했다. 하늘과 같은 소속사의 아이돌이었다. 이진 이후로는 특정 멤버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꾸준히 음악 방송 무대 영상이 동작별로 편집되어 나왔다. 찬우가 실수한 장면이 나왔을 땐 옆에서 끄응, 하고 앓는 소리가 들렸다. 찬우는 고개를 침대에 처박고 괴로워했다.
-갑자기 센터 하는 애 얼굴이 바뀌었는데?
누군가 지적했지만 이번 방송의 게스트이자 멘토인 두 아이돌은 미소를 지으며 적당히 넘겼다. 동료의 잘못을 굳이 들춰 내지 않는 모습에서 동지애가 느껴졌다.
처음엔 잊을 만하면 미열이 예능 포맷에 대한 설명을 해 와서 이게 ‘공부’라는 걸 상기했지만 세 사람은 점점 히히 웃기에 바빠졌다. 이미 안무를 배우며 한번 겪었던 고충을 그대로 겪는 모습이나 약간 이해하기 힘든 동작에 대한 웃긴 코멘트들이 공감대를 형성해 몰입이 쉽게 되었다. 게다가 틈만 나면 참가자들의 영상을 삽입해 아는 사람이 나오니 더 재미있었다.
게스트들이 출연진들의 춤을 평가하며 ‘만점’이라는 단어를 언급할 때마다 승현의 얼굴이 ‘700점 만점의 사나이’라는 자막이 달려서 삽입됐다. 매번 사진도 바뀌어 삽입되는 바람에 세 사람은 그때마다 자지러지게 웃었다.
이진은 승현이 이 방송을 봤을지 궁금해졌다. 승현도 이렇게 신나게 웃었을까. 문득 자신이 이렇게 아무 고민 없이 웃고 있다는 게 신기해졌다.
“이진아, 너 2, 3화 모니터링 했냐?”
미열이 태블릿을 조작하며 물었다. 이진은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아니. 보고 나면 집중 못 할 것 같아서.”
“에휴, 우리 예진이…….”
“예진이가 뭐야?”
찬우가 이진 대신 물었다. 이진은 오늘 찬우가 참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미열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민한 이진이.”
“재미없다.”
미열은 자매품으로 섬진이, 소진이─각각 섬세한 이진이, 소심한 이진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등을 언급했지만 이진이 듣기에도 별 재미가 없어 미열 대신 태블릿을 눌러 다음 화를 재생했다.
찬우와 미열은 더 늦기 전에 방송을 챙겨 보라고 했다. 이진의 순위가 상위권인 이유가 단순히 음악 방송에 출연했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이유를 달았다.
“카메라가 꽤 많은 걸 담더라고.”
묘하게 의미심장한 말에 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
승현과는 저녁 느지막이 지하 스튜디오에 가서야 만났다. 미열, 찬우와 함께 내리 예능을 시청하며 하도 웃었더니 얼굴 근육이 욱신거렸다. 소속사에서 보내 준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손길을 받는 사람들 틈으로 들어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승현은 하늘의 친구들과 마주 보고 앉아 노닥거리다가 스튜디오로 들어오는 이진을 보고 눈인사를 했다. 불쑥, 어제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진에게 내기를 기억하느냐 묻던 매서운 눈빛과 커다란 강아지 인형을 안겨 주며 즐겁게 웃던 얼굴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이진은 생각보다 선승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나마 알던 정보들도 이진이 개입하고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선승현은 본래 1화부터 엄청난 말실수를 해 논란의 중심에 섰는데, 3화까지 방영된 지금에도 승현은 화제가 됐으면 됐지 논란이 되지는 않았다.
게으르고 무기력해 보이던 태도도 그렇다. 무심하게 남을 관찰하는 듯한 시선이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 이진은 확인했다. 그때 이진을 도발하던 눈빛은……
“저기. 혹시 승현이는 어떤 애야?”
“엥? 갑자기 왜?”
질문이 불쑥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깊은 사고를 거치지 않은 날것의 생각은 복잡함을 걷어 내 훨씬 단순하고 근본적이었다.
“계속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해서.”
“글쎄……. 승현이 착한 애지.”
미열이 인상을 찡그리고 말을 고르는 사이 윌리엄이 답했다. ‘착하다’는 누구에게나 붙일 수 있는 수식어였다. 찬우도 착했고, 미열도 착했고, 윌리엄도 착했다. 이진은 그런 뭉뚱그려진 표현이 아닌 승현과 가깝게 지내는 이들이 그를 어떤 사람으로 인식하는지가 궁금했다.
하지만 그런 사적인 생각을 알려 달라 요구하는 것도 날강도 심보였다. 이진은 자신의 고민을 타인에게까지 얹어 주고 싶지는 않았다.
윌리엄이 이진의 등에 손을 올리고 토닥였다. 아마 이진이 아직도 승현과 다퉜던 일을 염두에 두고 있다 지레짐작한 것 같았다. 윌리엄의 추측은 반쯤 맞았다. 이진이 계속 승현과의 다툼,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벌어진 내기와 기 싸움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너희 둘 다 근본적으로 선하지. 늘 옳은 길을 향하고자 노력하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언젠가 한 지점에서 만나. 그때가 되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이진아.”
윌리엄의 위로는 추상적이고 과하게 비유적이라 바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언젠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문장만큼은 이진의 마음을 달래 주었다.
여태까지 승현은 비록 이진의 반대편에 서 있더라도 항상 적절한 위치를 고수했다. 이진이 밀어내거나 화를 내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인지, 이진은 점점 더 그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야가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는 이진이 네가 보는 승현이는 어떤데?”
한참을 침묵하던 미열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물었다.
“……잘 모르겠어.”
이진은 승현의 오랜 친구인 미열을 의식하며 말을 골랐다. 그리고 입 밖으로 내뱉고 나서야 ‘잘 모르겠다’가 미열의 질문에 대한 가장 순수한 답이었음을 인식했다.
“잘 모르겠는데, 아마 걔가 이 세상에서 나한테 제일 관심 많은 애인 것 같아.”
“승현이가 좀 그렇지. 남한테 관심 많고 아닌 척 참견하기 좋아하고.”
찬우가 씨익 웃었다. 타인의 진심에 의심 한 점 없는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웃음이었다. 이진은 문득 가슴 한구석이 서글퍼졌다.
인간관계란 언제나 어려웠다. 가난이 이진의 발목을 감은 족쇄였다면 인간관계는 이진의 앞에 늘어선 장애물이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졌고, 몸이 자라고 나이를 먹어 갈수록 생각도 함께 굳어져 첫 만남부터 맞지 않는 사람은 끝까지 맞지 않는 경우들이 많았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유년을 보내 방어벽이 높고 견고한 이진은 타인과의 유대가 어떤 식으로 쌓이고, 우정이 어떤 식으로 완성되어 가는지 알지 못했다. 이진과 함께한 사람들은 그 이유가 분명했고 그만큼 끝도 뚜렷했다.
필요가 다하면 떠나는 관계.
그러나 이진이 이 방송에 출연하며 만난 이들은 맺고 끊음이 명확하지 않았다. 관심이 가면 다가가고 가끔 소원해지기도 했으며 기분에 따라 싸우며 부딪혔다. 또 서로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앞에서는 하하, 호호 친한 척하기도 했다.
미열은 대화할 때 선호하는 청중도 아닌 승현과 이진에게 마음을 열었고 찬우는 맨날 눈치없다 구박해 대는 친구들을 진정으로 위했으며 또래들과 떠드는 걸 좋아하는 하늘은 나이차도 많이 나는 형들 틈에서 나름대로의 안정을 찾았다.
이진은 이런 것들에 서툴렀다. 서투르기 때문에 더 예민했고 불안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서투르다는 핑계로 남의 호의에 의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급격한 환경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이진은 평생 이렇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속마음을 끌어안은 채 뒤에 남겨지는 처지가 될 게 분명했다.
이진이 되찾은 기회는 단순히 꿈을 좇을 지름길이 아니었다. 편협하고 외롭던 세계를 벗어나 더 큰 곳으로 나아가는 통로였다.
‘함께 걸어가야 할 사람을 장애물로 여기고 있던 건 나였구나.’
마침내 얻은 작은 깨달음이 이진의 마음을 어지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