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35화 (35/173)

35화

익숙한 합숙소 건물, 익숙한 방 안으로 들어서자 휴가가 통째로 사라진 것 같았다. 꽤 많은 사람이 빠져 방 위치나 룸메이트가 바뀐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진은 다행인지 아닌지 같은 방에 같은 멤버와 2라운드를 함께 지내게 되었다.

“어? 유이진 씨다. 안녕하세요!”

“와! 일찍 오셨네요!”

방으로 올라오며 만난 사람들이 이진에게 반갑게 인사하기도 했다. 이진은 1라운드 초반부터 불도저 같은 가창력으로 유명했던 데다가 메인 보컬 포지션 1위였고, 음악 방송에선 대형 사고를 막은 영웅이었으며 소속사도 없는 일반인 출신 주제에 무려 1라운드 최종 순위 5위를 기록했다. 무엇보다 방송에서도 분량이 많아 실제로는 말 한번 안 해 봤어도 괜히 익숙한 사람, 그게 바로 다른 참가자들이 바라보는 이진이었다.

그러나 이진은 여전히 참가자들의 얼굴과 이름을 아직 기억하지 못했다. 작은 학교의 한 학년 전체 인원쯤 될 만큼 참가자가 많은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고 원래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편이기도 했지만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헤어스타일을 한,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 우글우글 몰려다니니 도통 개인을 개별 인식 할 단서를 찾기가 힘들었다.

“오. 찐찐, 왔네! 어? 아냐. 나 지금 룸메이트 와서.”

이층 침대 위에 누워서 전화를 하던 찬우가 이진에게 인사했다.

“응. 이진이라고 엄청 착해. 엄마도 검색해 봐!”

가족과의 통화인 것 같아 자리에 있기 거북해진 이진은 우선 방 안에 짐을 풀고 연습실로 내려갔다. 복도에 붙은 연습실 개방 스케줄과 배정표를 확인해 보니 1라운드에서 큰 변화가 없었다. 아직 2라운드 촬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일 터다.

이진은 익숙한 연습실에 들어가 구비된 노트북으로 ‘기본기 연습1_한 시간’을 재생했다. 성능 좋은 스피커에서 몸을 저릿하게 울리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이진은 보통 스트레칭과 발성 연습만 했는데, 춤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춤 기본기 동작 루틴이란 것을 우선적으로 연습하게 되었다.

동작 자체는 쉬웠다. 박자에 맞춰 상체를 숙였다 올리고, 무릎을 굽혔다 펴고, 팔을 올렸다 내리는, 모든 춤의 기본이 되는 동작이었다. 그러나 발성 연습이 단순히 웃긴 표정으로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니듯 춤 기본기 연습도 꽤 난이도가 있었다.

찬우쯤 되는 실력자는 그런 까딱임 정도로도 훌륭한 퍼포먼스를 만들어 냈으나 미열의 경우엔 이다음으로 한쪽 무릎만 번갈아 가며 올리는 동작이 나오면 어김없이 박자가 꼬여, 정신을 차려 보면 국민 체조를 하고 있었다. 다행히 이진은 한 루틴을 별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었다.

이해만 되면 뭐든 금방 해내는 이진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몸을 쓰는 것뿐 아니라 남에게 선보여야 하기 때문에 단순한 동작의 소화 그 이상을 추구해야만 했다.

하늘은 이진에게 ‘메인 보컬은 동작만 소화해 줘도 다행이라는 팬들 많아요.’라고 했지만 찬우는 ‘근데 요즘은 퍼포먼스가 더 중요하지 않냐?’고 말해 이진은 괜히 제 실력을 과신하는 대신 더 노력하는 쪽을 택했다.

혹시라도 최종 우승자가 퍼포먼스형 그룹을 만들고 싶어서 보컬 라인을 아예 배제할지도 모르는 게 아닌가. 이진은 그런 만약의 경우에도 살아남고 싶었다. 안주가 아니라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면 적어도 누군가는 알아줄 테니까.

“이진이 일찍 왔네?”

방에 돌아가서 샤워를 하고 나오자 미열이 도착해 있었다. 마침 저녁식사 시간이라 셋이서 식사를 하러 내려갔다. 자리를 잡고 앉아 밥을 가져오는데 마침 내려온 윌리엄이 용케 알아보고 합류했다.

“새로운 방 배정 받았는데 애들이 나랑 안 놀아 주네.”

윌리엄이 우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진은 잘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촬영장에는 본격적으로 파벌이 형성되고 있었다. 1라운드에서 파벌이라 함은 크게는 소속사의 유무나 소속사의 규모 정도로, 큰 강당에 커튼 한두 개로 방을 나눠 놓은 느낌이었지만, 이젠 순위와 실력이라는 또다른 벽이 세워졌다.

많은 이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32위에 그쳤던 윌리엄은, 그의 새 룸메이트들에게 굳이 불편함을 무릅쓰고 친하게 지낼 만한 메리트가 없는 참가자였던 것이다. 이진은 무심코 윌리엄이 바로 ‘스타성’이 부족한 사람인가 생각했다.

“사실 걔네들끼리도 안 친해.”

“됐어. 우리랑 놀아.”

찬우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진은 다시금 찬우의 무쇠 같은 신경 줄에 감탄했다.

“그런데 진영이는 아예…….”

윌리엄이 모닝 빵에 버터를 바르며 화제를 바꾸는데 윌리엄의 뒤로 바뀐 화제의 주인공이 지나갔다. 미열이 황급히 손을 뻗어 진영을 불렀다.

“여기!”

“오. 왜 이렇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지?”

식판을 들고 어슬렁대던 진영이 윌리엄의 옆에 앉았다. 진영도 평소에 같이 밥을 먹던 룸메이트들과 찢어져 밥 먹을 친구를 찾던 중이라고 했다.

“근데 너희 아침도 이렇게 먹어? 왠지 너넨 먹을 것 같아.”

“이진이가 아침형 인간이라 맨날 깨워.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뭐더라. 하여간에 밥 달라는 아기 새 같아.”

“밥 주는 어미 새가 아니라?”

“엄마 새는 무섭지. 이진이는 얌전한데.”

찬우가 엄마 새에 대한 의견을 피력했다.

“아니. 나 요새 제이슨이랑 자주 노는데 걘 아침을 안 먹는대.”

“그냥 혼자 먹지? 그러다 친구도 사귀고 좋잖아.”

“난 누가 기다리는 게 아니면 아침을 굶게 되더라고.”

확실한 동기가 없으면 자기 관리에 소홀해지는 게 사람이다. 악으로 깡으로 자기 관리를 하는 이진과 달리 진영은 타인에게서 동기를 찾는 부류였다. 그리고 미열은 자기 관리는 제쳐 두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길 좋아했다.

“아, 방송을 하도 돌려 봐서 그런가. 우리 이렇게 모여 있으면 밑에 자막으로 평균 연령 24.6세의 형님들 뜰 거 같아.”

“형, 그런 거 혼자 계산해 본 거야?”

“뭔 소리야. 이 정도는 암산으로 거뜬하지.”

진영과 찬우는 의외로 대화의 죽이 잘 맞았다. 처음엔 미열과 진영이 친했는데 이제는 둘이 더 즐겁게 떠드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함께 살았던 게 좋은 계기가 된 모양이었다. 미열은 리액션이 생동적인 타입과 대화하는 걸 선호했는데 의외로 진영보다 승현이나 이진같이 조용한 타입과 더 잘 지내는 게 신기했다.

“진영, 너 그래서 제이슨네랑 아예 다닐 거야?”

“좀 보고. 걔네는 오히려 내가 이쪽이랑 다니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더라고? 합숙 초에야 같은 포지션이니까 같이 다니는 게 당연하지만 이제는 포지션도 사라졌고 좀 찢어져도 괜찮을 것 같은데……. 뭐, 근데 제이슨이 나를 좋아하더라. 거기 있으면 나도 형님 캐릭터 얻어서 좋고.”

윌리엄의 질문에 진영이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이진은 ‘형님 캐릭터’라는 말을 듣고, 참가자들이 같이 다니는 사람을 선정하는 데에 정말 많은 것을 고려하는구나 다시금 깨달았다. 그러다가 불쑥 궁금해졌다. 그럼 방송에서 이진의 캐릭터는 뭘까? 시청자들은 이진을 어떻게 바라보고 규정하고 있을까.

사실 이진은 1화를 보고 난 후유증이 너무 커 아직 2, 3화를 보지 않고 미뤄 두고 있었다. 미열에게 별말이 나오지 않아 괜찮을 거라 생각하고 방치해 뒀는데, 확실히 남의 시선을 의식하기 위해선 지속적인 모니터링도 중요했다.

“이진이 또 딴생각한대요.”

“뭐 해?”

“얘 딴생각하면 이래도 몰라.”

짧은 상념을 마친 이진이 다시 현실로 돌아온 찰나, 마주앉은 찬우가 웃긴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놀란 이진의 눈과 마주한 찬우는 정색을 하더니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식사를 이어 갔다.

“……나 불렀어?”

“아니야. 찬우가 놀린 거야. 다른 생각 하고 있었어?”

미열이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다.

“아니, 진영이 형이 캐릭터라고 하길래 신기해서. TV를 안 봐서 그게 뭔지 잘 모르거든.”

‘내 캐릭터가 뭔지 궁금해’라고 말하긴 민망해 조금 돌려서 말했는데 문장 그대로 받아들인 미열이 입가에 손을 대며 설명할 말을 찾아 나섰다.

“그…… 뭐냐. 예능에도 정해진 패턴이 있잖아. 사람들이 익숙하고 친숙하게 여기는 역할이 있는 거지. 구박하는 역할, 구박받는 역할…… 똑 부러지는 역할, 조금 멍청한 역할. 그런 걸 미리 고려해서 연기를 해야 사람들한테 쉽게 다가갈 수 있으니까. 우리 포지션 나눈 것처럼 어느 정도는 정해 두고 가는 거지.”

“아…… 그렇구나.”

“와. 그럼 나는 뭐야?”

찬우가 마침 궁금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질문을 했다.

“너는 눈치 없는 애.”

“뭐? 그게 뭐야!”

눈치 없음을 지적받은 찬우가 발끈했다. 본인도 잘 아는 사실이지만 그게 캐릭터라고 하니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크게 보면 넌 그냥 센터지, 뭘.”

“그건 그냥 포지션이잖아.”

“그것보다는 아예 방송 전체에서 센터라고.”

진영이 숟가락을 들고 논지를 펼쳤다.

“너네는 첫 음악 방송에서 명확한 포지션을 가지고 공연을 했잖아. 그러니까 시청자들은 이렇게 기억하는 거지. 아, 센터 걔? 메인 보컬 걔?”

그는 한번 대표성을 띄게 된 이상 사람들의 인식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을 거라 말했다. 특히 찬우 같이 ‘센터’라는 상징적인 포지션에 대표성까지 얹힌 케이스는 드물어서 아마 방송 마지막에 갈 때까지 이변이 없다면 포지션이 고정될 거라고 했다.

“그럼 난 뭐야?”

“넌 외국인. 뭘 물어.”

“진짜 심하다.”

혼혈로서의 서러움을 담아 윌리엄이 단일 민족 국가라는 환상에 사로잡힌 한국인들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자 진영이 윌리엄의 입을 막기 위해 묻지도 않은 의견까지 더해 줬다.

“미열이는 마당발, 하늘이는 바비 출신 엘리트, 승현이는 얄미운 천재.”

“이진이는?”

찬우가 다시 이진의 간지러운 등을 대신 긁어 줬다.

“이진이?”

그런데 진영의 말머리가 심상치 않았다. 이진은 왠지 모를 익숙한 상황이 곧 다가옴을 직감했다.

“글쎄. 이진이는 잘 모르겠네.”

소외감이 쪼르륵 고장 난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얇은 물줄기처럼 새어 나왔다. 혹시 진영이 이진에게 악감정이 있어 일부러 따돌리는 건가 싶었지만 진영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했다.

“악!”

이진이 시무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자 미열이 테이블 밑에서 진영의 정강이를 퍽 하고 까 버렸다. 미열은 손버릇도 발 버릇도 나빴다. 미열의 째림을 받은 진영은 그제야 주절주절 변명하기 시작했다.

“너는 뭐가 너무 많아서 그래. 메인 보컬답게 가창력도 좋고 춤도 못 추는 건 아니고. 처음에는 노예 왕…… 아니, 주인님 이미지가 생겼었는데 얘가 또 독한 편은 아니잖아? 그래서 그건 또 묻혔고. 시청자나 제작진한테 아부 떠는 스타일도 아니니까 ‘그냥…… 무난하게 이것저것 잘하는 애.’라는 인상이 있지.”

“그럼 나는 시청자들한테 어떻게 쉽게 다가가?”

이진이 미열의 말을 인용해서 물었다. 무난하게 이것저것 잘하는 애. 이 말은 즉, 존재감이 희미하단 뜻이었다. 사실 첫 투표부터 5등까지 오른 이진이 본인의 존재감을 염려할 필요는 없었으나 예능 캐릭터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다.

“찾자! 하나 찾으면 되는 거지! 아님 하나 만들어!”

“그래, 하나 만들어! 이번 촬영 기간 중에 컨셉만 확실히 잡히면 되는 거야!”

“아, 진짜……. 선승현도 난린데 김진영 너까지 왜 이러냐.”

이진이 한번 기분이 안 좋아지면 오래 간다는 걸 아는 동료들이 열심히 이진에게 힘을 불어 넣었다. 이진은 제 표정이 그렇게 시무룩해 보였나 싶어 볼을 문질러 봤다. 확실히 이 방송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실력과 인맥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진은 밤에 있을 촬영부터는 자신의 캐릭터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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