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이후로도 차례로 순위가 발표되었다. 29위에 이우진, 26위에 최강희, 25등에 고은준, 18등에 백미열, 17등에 강지흔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바비 엔터에 윤기현은 16위, 나봄은 12위에 이름을 올렸다. 진영은 14위로 제이슨을 제외한 래퍼들 중 가장 높은 순위였다.
“다음에 호명될 참가자 분들은 2라운드에서 ‘리더’의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11위를 발표하기 전, 홍서가 새로운 규칙을 설명했다. 스크린에 왕관 모양의 고급스런 브로치가 떠올랐다.
“1라운드 11위 이상의 참가자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해당 브로치를 착용합니다. 리더는 시청자와 멘토단, 양쪽에게 실력을 인정받은 참가자들이며 해당 라운드 동안 참가자들을 대표하여 의사 결정을 할 권한을 가집니다.”
새로운 규칙에 대해서는 참가자들도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웅성이는 참가자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홍서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오르게 된 참가자를 차례대로 호명했다. 스크린에도 차례로 이름이 떠올랐다.
11위 박준현(바비 엔터)
10위 민서호(루키 엔터)
9위 박희영(피치 엔터)
8위 허동규(피치 엔터)
7위 두주형(루키 엔터)
6위 제이슨 리(비터리 엔터)
5위 유이진(무소속)
4위 선승현(무소속)
5위, 유이진……. 이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유이진!”
미열이 이진의 등을 쓸며 눈에 띄게 기뻐했다. 10위 이내일 거란 예상은 했지만 마지막에 확인한 시청자 투표보다 두 계단이나 오른 순위였다. 초반 라운드의 순위는 심사 위원 점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뒤이어 발표된 4위의 주인공은 승현이었다. 미열은 또 반대편에 가서 승현의 어깨를 팡팡 쳤다. 승현도 이진과 비슷하게 심사 위원 점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순위권 내에선 두 사람만이 일반인 출신이라 명단 중에서도 유달리 특별해 보였다.
이진은 박수를 치며 승현을 바라보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스치듯 마주쳤다고 하기에는 눈 맞춤은 꽤나 길게 이어졌다. 하지만 승현은 이진이 어떠한 눈짓도 하기 전에 먼저 시선을 피했다.
“이제 1위 후보를 만나 보겠습니다. 이미 입증된 실력을 기반으로 시청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참가자들입니다.”
세 명의 1위 후보의 얼굴이 스크린에 잡혔다. 한찬우, 정하늘, 강재규. 다들 어느 정도 예상한 듯 반응이 거세지 않았다. 투표가 시작되자마자 무서운 기세로 2위와의 표차를 벌렸던 하늘이었다. 센터 포지션이 일반 시청자들에게 존재감을 어필하기 좋은 덕분에 찬우가 바짝 따라붙었고, 재규도 리드 보컬이라는 포지션적인 이점과 피치 엔터 팬 층을 등에 업고 최상위권 다툼을 벌였다.
“내기하자. 나는 하늘이.”
홍서가 방송의 스릴을 위해 계속해서 뜸을 들이는 동안, 마이크가 꺼져 입이 자유로워진 미열이 말했다.
“아, 형! 왜 그래.”
“나는 찬우한테 걸게.”
“나도 나한테 걸래.”
하늘의 만류에도 미열이 이진에게 내기를 종용했다. 내기에 안 좋은 기억이 있는 이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지만 용케 한두 자리 떨어진 곳에서 하는 대화를 들었는지 윌리엄과 찬우가 끼어들었다.
“그럼 나는 하늘이.”
승현이 하늘을 지지하자 하늘의 얼굴이 밝게 펴졌다. 이미 최상위권에 오른 이상 누가 1위가 되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은 몹시 중요했다. ‘첫 순위 발표 1위’라는 타이틀이 만들어 내는 이미지는 쉽게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성격이 단순한 찬우는 몰라도, 영리하고 계산적인 하늘은 아마 지금 이 순간이 두렵고 긴장될 터였다. 그는 미열이 하늘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제안을 한 건지는 몰랐지만 하늘이 그들의 관계 속에서 편안함을 느낌은 알 수 있었다.
이진은 무의식적으로 진영의 모습을 찾았다. 진영은 맨 앞줄 오른쪽 끝에 래퍼 포지션이던 사람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제이슨을 포함한 다른 몇 명과 함께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사뭇 활기찬 표정이었다.
이진을 싫어하는 사람을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싫어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나같이 재미없는 사람보다 관심사도 맞고 할 말도 많은 사람이랑 지내는 게 더 낫긴 하겠다.’
어쩐지 입이 썼다. 이진은 진영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기 위해 몸을 살짝 돌려 앉았다. 그래도 한 번 든 소외감은 쉽게 가시지 않고 더 깊어지기만 했다.
“3위는 개구지다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참가자입니다.”
뜸을 들일만큼 들였는지, 드디어 순위 발표가 재개되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3위는 강재규였다. 다시 1등을 발표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 같았는데, 곧바로 1위에 대한 묘사가 시작됐다.
“맏형처럼 듬직한, 때로는 친구같이 편안한, 또 어떨 땐 동생처럼 장난스러운, 그리고 무대 위에선 누구보다도 ‘아이돌’에 걸 맞는 참가자입니다.”
거창한 수식이 가리키는 사람은 하나였다. 이진은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영광의 1위는, 한찬우 참가자입니다. 축하합니다!”
펑! 진행에 맞춰 무대 위로 찬우가 올라섰다. 하늘은 자동으로 2위가 되었다. 1위부터 3위까지의 세 사람은 무대 앞으로 나가 각자의 수상 소감을 말하고, 각 순위가 적힌 배지를 받았다. 그 뒤로 바로 11위까지 무대 위로 불러져 리더들에게 수여되는 브로치를 가슴께에 달았다.
“열한 명의 리더들, 여러분을 믿고 지지해 주신 시청자 여러분과 앞으로 함께할 동료들을 향해 새로운 마음으로 인사하겠습니다.”
진행에 맞춰 허리를 푹 숙여 인사했다. 우스운 연극 같은 몸짓이지만 분위기만큼은 더없이 진지했다. 무대에 오르지 못한 참가자들은 속이 질투로 타들어 가든 체념의 늪으로 가라앉아 가든 겉으로는 누구보다 기쁘게 박수를 쳤다.
그들을 향한 열성적인 박수 세례가 멎고, 다시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뒤이어 77위, 마지막 생존자 발표가 이어졌다. 방금까지 서 있던 열한 명과 교대하듯 서른여 명의 참가자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이 중 단 한 명만이 2라운드에서 우리와 함께할 수 있습니다.”
무대 위 탈락자들이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사실상 111이라는 숫자를 채우기 위해 이용당한, 버려진 카드였다. 이진에게도 익숙한 얼굴이 몇 보였다. 처음 센터 포지션에 배정되었을 때 만났던 그와 비슷한 인상의 참가자들이었다.
캐스팅 담당자가 이름도, 나이도, 실력도 모르는 이진에게 명함을 건넨 이유는 이진이 저 자리를 채워 주길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각 팀에서 얼굴 마담 노릇을 좀 하며 관심을 끌다가 정작 팬들을 끌어모을 만한 실력이 부족해 안타깝게 떨어지고 마는, 방송의 스릴을 위한 소모품.
하지만 제작진들이 간과한 것이 있다면 참가자들은 얌전한 인형이 아니라는 것이다. 누군가에겐 숨겨 왔던 끼와 실력이, 또 다른 이에겐 뒤늦게 발휘되는 재능과 열정이. 참가자 모두가 언제든지 개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누구도 부여된 목적대로 사용되다가 버려지길 원하지 않는다.
적어도 이진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77위, 성수원 씨! 축하드립니다.”
마지막 생존자는 성수원이라는 참가자로 그는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마자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터뜨렸다. 탈락자들이 곁으로 다가가 그를 격려하고 위로했다.
마무리 멘트와 함께 장장 세 시간에 걸친 촬영이 끝났다. 카메라가 꺼지고, 잔뜩 지친 기색의 홍서에게 매니저를 비롯한 여러 제작진이 붙었다. 시티 로열이 피치 엔터 소속이라 거기에 속한 연습생들이 그에게 인사를 하러 다가갔다.
“이진아, 뭐 해.”
멍하니 홍서를 바라보던 이진을 툭 치며 미열이 말을 걸었다.
“아니…….”
온통 맥이 빠졌다. 찬우의 1등을 축하하고 싶어도 탈락자들이 너무 많아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찬우도 줄곧 함께 연습해 온 친구들에게 축하 인사를 받으며 작별의 시간을 갖느라 바빴다.
“진영이는 먼저 갔네. 인사도 안 하고 섭섭하게.”
제이슨과 진영의 패거리는 촬영이 끝나자마자 촬영장을 나섰다. 윌리엄이 섭섭해 하고서야 알았다. 이진은 예민하게 뾰족뾰족 날이 선 신경을 누르며 집에 갈 채비를 했다.
“나도 먼저 갈게. 택시 타야겠다.”
“형, 잠깐만요.”
답답한 재킷을 벗어 던지고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푸는데, 승현이 다가와 그를 불렀다. 승현은 이진의 곁에 다가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속삭였다.
“지쳤어요?”
“아…… 아무래도 좀.”
“하긴. 형은 일찍 자죠.”
대체 무슨 속셈으로 말을 걸었나, 의아해진 이진이 얼떨떨하게 답했다. 승현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다가가 은밀하게 말했다.
“형. 우리 내기 기억해요?”
퍼뜩, 졸음과 피로에 눅눅해진 이진의 신경 줄이 팽팽하게 잡아당겨졌다. 최종 순위가 낮은 사람이 데뷔를 포기하는 내기. 당연히 잊지 않았다. 승현과 이진의 눈이 마주쳤다. 늘 무기력하게만 보였던 그가 지금은 이진을 압도할 만큼 강한 활기를 띄고 있었다.
오늘 발표한 순위에서 이진은 5위, 승현은 4위였다. 문득 앞으로 4라운드가 남아 있음을 아는데도 절벽 끝으로 몰린 듯한 위기감이 찾아왔다.
“내가 이기고 있는데 형이 별로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아서요.”
이진은 승현의 거침없는 눈빛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았다. 이진의 자존심이 피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데뷔할 생각이 없는 건 아니죠?”
“설마.”
머리에서 불이 난 것 같았다. 승현은 감히 이진을 도발하고 있었다. 그를 인지한 순간 분노가 온몸의 신경을 깨웠다. 1라운드 촬영 이후 내내 이진의 몸을 짓누르고 있던 무력함과 자기혐오가 순식간에 불에 타올라 흔적도 남지 않고 날아갔다.
“고작 그 말 하려고 잡은 거야?”
이진이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승현은 한 발자국 물러나서 어깨를 으쓱 하더니 말했다. 입꼬리를 살짝 올린 표정이 개운해 보여, 이진은 자신의 꽉 쥔 주먹과 올라간 입꼬리를 만나게 해 주고 싶었다.
“아니요. 가기 전에 대기실에서 기다려 주실래요? 형한테 줘야 하는 게 있어서.”
“뭔데?”
“알려 주면 안 받을 것 같아요.”
“……그럼 안 받을래.”
이진이 몸을 뒤로 물렸다. 보는 눈이 많으니 아무리 표정 관리를 하려고 해도 눈썹이 찌푸려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승현은 조금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형, 팬한테 선물 받은 적 있어요?”
“뭐?”
“제가 오는 길에 형 팬을 만났어요. 그래서 전해 달라고 부탁을 받았는데…… 정말 안 받을 거예요?”
팬. 짧은 울림에 이진의 심장이 콩닥, 크게 뛰었다. 팬에게서 온 선물이라니. 진즉에 그렇게 말해야지. 승현은 이진을 도발한 것도 모자라 놀리고 있었다. 괘씸함과 부끄러움에 이진이 아무 말도 못하자 승현이 조금 더 입꼬리를 높게 올렸다.
“저 가져요?”
“아니? 아니!”
능청맞게 구는 승현은 어색했다. 그는 보통 장난을 당해 주는 캐릭터였지 남을 골리는 타입이 아니었다. 이진은 결국 그의 뒤를 졸졸 따라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이라고 해 봤자 고작 밝은 조명을 단 화장대 몇 개와 열 명쯤 앉을 수 있는 소파가 전부인 방으로, 평범한 아이돌 그룹이 사용한다면 쾌적한 장소였겠지만 이진과 승현에게는 방송 전 간단한 메이크업을 받거나 짐을 보관하는 게 고작인 장소였다.
승현은 방구석에서 ‘선승현’이라 적힌 주황색 포스트잇을 붙인 커다란 가방을 가져왔다. 고작 잠깐의 촬영인데 뭘 그렇게 바리바리 싸 왔는지 가방이 아주 빵빵했다. 이진도 소파 밑에서 ‘유이진’이라 적힌 분홍색 포스트잇이 달린 크로스백을 찾았다.
승현이 이진을 툭툭 치더니 제 가방을 소파 위에 올려놓았다. 짐을 찾는 사람들 틈에서 그러고 있으려니 굉장히 정신이 사나웠지만 승현은 태연하게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뿅, 가방 안에서 귀여운 강아지 인형이 얼굴을 내밀었다.
“어? 이거…….”
승현이 멋쩍은 얼굴로 가방에서 인형을 마저 꺼내 이진에게 건넸다. 얼마 전, 인형 뽑기 촬영을 했을 때 승현이 뽑은 거대한 강아지 인형이었다. 인형 뽑기를 그렇게 잘하는 사람도 처음 봤지만, 품 안에 가득 들어오는 인형은 드라마에서나 봤지 실물로는 처음 본지라 감탄을 하며 눈을 빛냈었다.
눈을 빛내기만 했지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승현은 동생을 줘야 한다며 이진이 묻지도 않은 말을 칼같이 거절했었다.
“동생 줘야 한다며?”
“줬는데, 형한테 선물하고 싶대요. 내가 준 건데. 어이없어서…….”
“팬한테 선물 전해 달라고 부탁받았단 건?”
“제 동생이 형 팬이에요.”
받지 않고 질문만 하자 승현이 인형을 들고 있던 양손을 쭉 뻗어 푹신하고 말랑한 덩어리를 이진의 품 안으로 쏙 넣어 버렸다. 이진이 품 안에 넘치듯 들어오는 커다란 인형을 반사적으로 끌어안았다. 승현은 몹시 만족한 얼굴로 손을 떼고 가방의 지퍼를 지익 닫았다.
“그럼 내일 봬요.”
그러곤 볼일이 끝났다는 듯 상쾌히 웃으며 대기실을 나갔다.
머릿속이 백지가 된 듯 이진의 뇌에 진득이 달라붙어 있던 지긋지긋한 생각들이 순식간에 깨끗이 표백되어 날아갔다. 커다란 인형을 들고 어버버대는 이진을, 대기실을 지나다니던 몇 명이 유심히 지켜봤지만, 이진은 품 안의 솜뭉치와 다리를 얼어붙게 만든 이상한 기분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