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2화 방송 이후 참가자들 사이의 분위기는 더 위태로워졌다. 3화의 본방송이 끝나자마자 투표가 종료되기 때문에 시청자 투표를 뒤집을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진은 자신의 연약한 멘탈을 알아 홈페이지에 들어가 직접 등수를 확인하지는 않았으나, 옆에서 끊임없이 검열된 정보를 갱신해 주는 미열이 있어 대강의 판도는 알고 있었다.
1화 방영 직후, 대형 기획사 소속 연습생들이 상위권을 죄다 점령했다. 이미 음악 방송에 출연할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으니 미리부터 성공할 주식을 마련하는 사람도 꽤 됐다. 인지도순으로 정렬된 이름들은 2화가 방영되면서까지 큰 변화가 없었다. 인기 멤버가 속한 그룹의 팀원들 등수가 소폭 상승한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현재 상위권은 대형 기획사 출신인 하늘, 재규, 동규 등과 짧은 회차에도 불구하고 외모와 개성이 돋보였던 이진, 승현, 찬우 등이 차지했고, 그 밑으로 미열과 같이 꾸준히 분량이 많은 참가자들이 늘어섰다. 미열이 말하길 이진은 7등에서 10등 사이를 넘나들고 있다고 한다. 당분간은 탈락 걱정에서 벗어난 셈이다.
사실, 탈락 걱정에서 벗어난 수준이 아니었다. 이진은 실질적 도움이 되는 경력이나 배경 없이 홀몸으로 참가한 참가자들 중에서는 가장 선방 중이었다. 소속사가 발목을 잡는다던 찬우조차 백댄서로 활동하던 시절의 인지도가 있었기 때문에 이진은 그야말로 새로 나타난 혜성이었다.
미열은 제 예상대로 이진이 선두를 달리는 걸 몹시 자랑스럽게 여겼다. 처음부터 서로 끌어 주고 당겨 주길 바랐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진은 미열과 투표 순위 얘기를 할 때면 마음이 불편했다. 자기 순위만큼이나 궁금한 승현의 순위를 묻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그나저나 제이슨이 너한테 시비 건다며.”
미열이 스무디를 쪽쪽 빨며 물었다. 지금 이들은 스폰서의 협찬을 받아 ‘신제품 시식하고 이름 지어 보기’ 촬영을 하는 중이었다. 이진은 재빠르게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방송이 꽤 안정적인 시청률을 유지하면서 참가자들은 약 2주간 매일같이 촬영을 했다. 1화 단체 관람, 오락실 탐방하기, 만원으로 피시방에서 버티기, 새로 나온 콘솔 게임 체험기, 히트곡 따라 추기 등. 그리고 당연하게도 대부분의 촬영에는 제이슨이 함께였다. 1라운드 방영 중에는 한 팀인 것처럼 묶여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날 이후로 이진을 괴롭히기로 단단히 결심이라도 한 건지 사소한 일로 성가시게 굴었다. 덕분에 이진은 가뜩이나 익숙지 않는 온라인 게임과 어색한 컨트롤러를 익히느라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인데 원치 않는 신경전까지 벌이느라 멀미가 났다.
바닥이던 게임 실력도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해졌다. 물론 제작진은 모든 게임에 서투른 이진을 캐릭터가 확고하다며 좋아했다.
그나마 이 방송에서 인복이 좀 생긴 건지 이진이 반응하지 않고 있으면 하늘이나 재규가 나서서 제이슨에게 면박을 줬다. 하늘과 재규는 어디서 훈련이라도 받은 것처럼 능숙하게 상황을 우스꽝스럽게 몰아갔다.
“그게…….”
아직까지 크게 문제가 될 만한 소지는 없기에 다들 쉬쉬하고 있지만, 상위권끼리의 영역 싸움이라는 말까지 퍼졌다며 하늘이 지나가듯 전했다.
“별거 아니야. 그냥 재규한테 들었어.”
대답을 않고 곰곰이 생각만 하고 있자 미열이 이진의 머릿속을 넘겨짚어 대답했다. 그에 이진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조심스럽게 골랐다.
“사실…… 내가 잘못한 것 같기도 해서.”
“네가? 갑자기 왜?”
앞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제이슨과 뒷줄에서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묻혀 있던 미열의 입장은 분명히 달랐기에, 이진은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 설명할 말을 찾기가 힘들었다.
“자기 밥그릇 자기가 챙겨 먹는 거지. 너한테 떠먹여 달라는 게 더 웃기지 않냐?”
“내가 다른 쪽으로 화제를 유도한 건 맞으니까.”
미열이 잠깐 말을 멈췄다. 어쩐지 당황스러운 기색이었다.
“너 설마…… 정말 나나 윌리엄, 이런 애들이 신경 쓰여서 그렇게 말한 거야? 머리 잘 굴렸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네.”
“무슨 생각을 했길래?”
“갑자기 선승현이랑 딱 붙어 있는 것도 그렇고, 다 이미지 메이킹인 줄 알았지. 오해했나 보네. 미안하게.”
이진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겠구나 싶었다. 차라리 이진은 그런 술수를 쓸 만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오랜만에 선 무대와 수많은 관객들, 그리고 외면해도 되는 죄책감에 짓눌려 평정을 잃어버리는 것보다야 그게 훨씬 나았다.
“이진이 형. 이거 이름 정했어요?”
슬슬 각자가 시식한 제품의 이름을 적어 내야 할 시간이 오자 저쪽에서 친구들과 놀던 하늘이 종종 다가와 물었다. 이진과 하늘이 시식한 제품은 보랏빛의 포도 맛 아이스크림인데, 예쁜 색에 비해 맛이 다소 밍밍했다.
“음…… 백한 마리의 보라돌이?”
“그거 저작권 안 걸려요?”
저작권이 걱정되면 적당히 걸러서 쓸 테고, 지금은 아이스크림 이름 따위에 뇌 용량을 할애하고 싶지 않았던 이진은 스폰서 브랜드가 인쇄된 종이에 막힘없이 ‘101마리의 보라돌이’라고 적었다. 미열은 바나나 맛 쉐이크를 시식하고는 ‘바나나지 마’라고 적었다. 아마 ‘반항하지 마’로 말장난을 한 듯 했다.
“나는 어떡하지…….”
하늘은 아이스크림 스푼을 입에 물고 승현에게로 갔다. 승현과 찬우는 헤이즐넛이 든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하늘이 무어라 얘기를 하자 두 사람이 동시에 자신의 종이를 펼쳐 보여줬다. 찬우는 ‘헤이! 초코!’였고 승현은 ‘헤이즐넛이 오독거리는 초코 아이스크림’이었다. 하늘은 한숨을 푹 쉬고 다른 곳으로 가서 자문을 구했다.
파인애플과 망고가 섞인 아이스크림을 받은 윌리엄과 진영은 각자 ‘파인애플인지 망고인지 먹어 봐야 안다’, ‘아임 파인 망고?’라고 적었다. 결국 하늘은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다시 친구들에게로 돌아갔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고, 각자 카메라가 설치된 부스 안으로 들어가 개인에게 배정된 신제품의 소개와 자신이 지은 이름을 설명하는 차례가 왔다. 개인적인 공간으로 보이지만 밖에 설치된 스크린으로 내부에서 하는 말이 모두 중계됐다.
-안녕하세요. 제가 먹은 건 포도와 우유가 섞인 예쁜 보라색 아이스크림인데요. 저는 이 아이스크림에 ‘샤이닝 퍼플’이라는 이름을 지어 줬습니다.
한참을 고심하던 하늘은 결국 개그를 포기했다. 나봄은 미열과 같은 맛의 쉐이크에 ‘첫사랑은 바나나 맛’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야……. 어린애들이 감성적이네.”
“저런 것도 훈련받나?”
‘바나나지 마’와 ‘헤이! 초코!’의 주인공이 주거니 받거니 했다. ‘101마리의 보라돌이’를 적어 낸 전직 작곡가 이진은 역시 글 쓰는 재주는 타고나는 거라 생각했다.
-이건 스트로베리랑 체리의 스무디인데요. 이름은 ‘체리 베리 믹스’입니다. 각자 다른 맛이 뮤직 믹스처럼 조화롭게 섞이는 걸 표현하고 싶었어요.
-안녕하세요! 이건 복숭아 아이스티 맛이 나는 아이스크림이에요. 저는 ‘피치 티 한 스푼’, 이라고 이름을 지어 봤어요.
다행히 제이슨과 재규는 굉장히 무난했다. 참가자들 중에는 일부로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적어 낸 사람도 많았지만 웃기지 않거나 과한 개그 욕심 때문에 안쓰러운 마음부터 들었다.
-이건 체리랑 딸기 스무디예요. 색이 핑크핑크한 게 너무 귀엽죠? 그래서 전 ‘키스 미 모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쪽!
“으아아아! 쟤 지금 뭐라는 거야?”
허동규의 목소리가 울리자 스튜디오 안이 난장판이 됐다. 바깥 상황은 전혀 모른 채 설명을 마치고 나온 동규는 나오자마자 쏟아지는 아우성에 어리둥절해졌다. 그에게 플라스틱 스푼을 던지는 참가자도 있었다.
“되게, 다들 키스 안 해 본 것 같은 반응이다.”
찬우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 말에 당연히 누구와도 입을 맞춰 본 적 없는 이진을 포함해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
1라운드의 투표가 종료되는 날, 2라운드의 촬영이 시작됐다.
급박한 일정 탓에 늦은 밤, 서울에서 순위 발표식을 갖고 다음 날 바로 합숙소에 입소하게 되었다. 앞서 촬영된 분량이 전부 소진됐기 때문에 1라운드에 비해 일정이 훨씬 빡빡할 수밖에 없었다.
투표 종료일이자 순위 발표식은 3화의 방영일로, 3화의 본방송이 10시가 넘어서 끝나기 때문에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 되어서야 카메라에 붉은 불이 들어왔다. 그제야 아무도 없이 텅 빈 스튜디오에, 밖에서 한참을 대기하던 참가자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찾아갈 수 있었다.
“지금부터 제 1라운드 순위 발표식이 시작됩니다.”
참가자들이 모두 무대를 바라보며 설치된 의자에 착석하자 화려한 조명과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서울 방송국에 마련된 스튜디오가 생각보다 화려하다 싶었는데, 요란한 효과와 함께 무대가 반으로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선배 아이돌이자 센터 포지션의 멘토인 홍서가 걸어 나왔다. 반가운 얼굴에 참가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안녕하세요, 오늘 진행을 맡은 홍서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홍서는 평소 촬영과는 달리 깔끔한 정장을 입고 머리도 반듯하게 넘겼다. 사소한 차이지만 현직 연예인이 신경 써 갖춰 입은 것을 보니 이 자리가 훨씬 격식 있게 느껴졌다.
“어휴, 다들 잘 쉬었는지 얼굴에 광택이 도네.”
홍서가 밝은 어투로 넉살 좋게 말을 붙였다. 습관화 된 리액션 덕분에 다 같이 하하하, 웃을 때 타이밍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어디선가 “멘토 님도요!”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홍서는 한 방 먹었다는 듯 능청스러운 몸짓을 했는데, 다분히 카메라를 의식한 티가 났다.
“오늘은 시청자 투표와 심사 위원 점수를 합산하여 여러분들의 1라운드 최종 순위가 결정됩니다.”
그의 말에 일부는 숙연해지고, 일부는 들뜬 티를 숨기지 못했다.
“안타깝지만 이름이 불리지 않은 참가자는 2라운드에선 함께하지 못하며, 오늘이 마지막 날이 됩니다.”
모두가 아는 규칙을 재차 설명하는 멘트가 이어졌다. 누군가의 승리를 추앙하고 패배를 전시하는, 참가자들이 아닌 시청자를 위한 시간. 꿈을 좇는 자들이라 포장되었지만 결국 도전의 실패조차도 유흥 거리가 되어 버리는 방송의 속성이 새삼 뼈저리게 와닿았다.
“76위부터 순위 발표 시작하겠습니다.”
최하위 합격자 77위를 남겨 둔 채, 그 위 등수부터 발표가 시작됐다. 홍서는 시청자 반응이나 방송 분량 중 눈에 띄었던 부분을 한 번씩 언급하며 참가자를 호명했다. 하위권 참가자들은 살아남은 것 자체에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간혹 눈물을 보이는 참가자도 있었다.
센터 포지션에서 서브 보컬로 강제 이동된 뒤 존재감이 급속도로 사라졌던 이진연이 68등으로 생존했다. 마침 찬우가 진연의 어깨를 두드리며 축하한다고 말하기에 이진도 옆에 끼어 축하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
진연은 살짝 붉어진 눈시울을 감추며 수줍게 웃었다. 처음엔 같은 출발선에 서 있던 동료였으나 이제는 ‘순위’라는 서열이 생겨 버렸다. 이진은 자신과 찬우가 진연을 기만하는 건 아닐지 걱정했다. 만약 이진이 68등을 받는다면 과연 축하한다는 말이 곧이곧대로 들릴까.
“다음은 꾸준한 애교로 누나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참가자입니다. 39위 장현기 참가자! 축하합니다.”
어느덧 순위 발표는 30위권대로 접어들었다. 전부 편집될지언정 모두에게 정성들여 소개하는 멘트를 한마디씩 꼭 달아 주다 보니 촬영 시작으로부터 한 시간이 넘게 흘렀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골반이 욱신거려 왔다.
그러나 무대 위에 홀로 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말을 제일 많이 하는 홍서는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진행을 이어 갔다.
“다음 32위는 동료들에게 늘 따뜻한 조언을 건네던 참가자입니다. 첫 실전 무대 때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차분함을 잃지 않고 같은 팀 멤버들의 기운을 북돋아 주었죠. ‘무대를 마음껏 즐기고 내려오자.’ 저도 보면서 정말 감동받았습니다. 윌리엄 화이트, 백 윌리엄 참가자! 축하합니다.”
예상보다 이르게 윌리엄의 이름이 불렸다. 이진은 윌리엄이 앉은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대 스크린에 그의 얼굴이 커다랗게 잡혔다.
“많은 분들이 절 기억해 주셔서 기뻤습니다. 앞으로도 무대를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윌리엄은 활짝 웃었지만 이진을 비롯한 동료들은 마음껏 웃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진 조의 최하위였다. 다음 무대에서 선방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지도 모르는 등수였다. 이진은 멤버들에게 그다지 정을 주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윌리엄을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