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그날의 이야기
“다른 친구들은 어디서 대기하는데요?”
“음……. 글쎄요. 아마 버스?”
스태프는 무책임하게 말하고 대기실의 위치를 가리키며 이진을 재촉했다. 차별 대우는 곧 이진이 남들보다 대접받아 마땅하다는 의미다. 남에게 인정받는 것에 목마른 이진에게 이와 같은 구별은 분명 기쁘고 의욕을 불태울 만한 자극제여야 했다.
그러나 특별히 준비되었다는 대기실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자신이 정말 저들보다 나은 사람이기에 이런 대우를 받는다는 생각보다는 자신도 제작진에게 언제든지 버려질 수 있다는 생각만 들었다.
문 앞에 서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문고리로 손을 뻗는데 문이 이진의 손을 피해 저 뒤로 달아났다. 안쪽에서 누군가 문을 열었다. 승현이었다. 승현은 이진을 본체만체하고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이진이 왜 이렇게 늦었어?”
이미 옷을 갈아입은 찬우가 손을 흔들며 아는 척을 했다. 이진은 미열과 있었다는 말을 흘리며 천 가림막으로 된 탈의실 안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한 시간여의 대기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짧지도 않았다.
행사는 SSTV에서 주최한 무슨 축제의 오프닝이었는데 나름의 두터운 마니아층이 있어서인지 관객이 꽤 많았다. 이진을 비롯한 몇몇은 이미 음악 방송에서 데뷔를 치렀지만,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실질적인 데뷔 무대인 것이다.
그러나 폭이 좁고 그나마도 계단식으로 층이 난 무대에서 연습한 그대로 안무를 선보일 수 있는 건 유니폼을 입은 7명뿐이었고, 나머지는 마치 합창단처럼 계단 위에 나열해 제자리에서 들러리를 서야 했다. 심지어 맨 앞의 7명에게조차 핀 마이크가 주어지지 않아 립싱크를 할 필요도 없었다. 너무도 처량한 무대였다.
큰 환호 소리와 플래시 세례가 이진의 오감을 강타했다. 이번에는 실수 없이 무사히 무대를 마친 찬우는 쌓아 둔 응어리를 드디어 풀어 낸 건지 기쁜 표정이었지만, 이진은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들을 외면하기 힘들어 밝은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뻐근하다.”
“한 시간 동안 차에 처박혀 있었더니…….”
“잠깐 나가려고 해도 사진 찍힌다고 못 가게 하고.”
저들끼리의 푸념이었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이진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힘든 게 마치 그의 잘못인 것 같았다. 찬우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그 말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이진은 자신이 또 혼자 예민해져서 이러는 건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도 그 말들을 신경 쓰고 있지만 내색하지 않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 특히 이진은 자존심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인지라 스스로가 판단력을 상실했을지 모른다는 데서 오는 타격이 컸다. 머리뼈와 꼬리뼈가 맞닿을 것 같았다. 몸이 오그라들고 동그랗게 말려 바닥으로 추락하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형. 무슨 일 있어요?”
그때 이진의 왼쪽 어깨에서 강한 힘이 느껴졌다. 승현이 이진의 어깨를 끌어당긴 것이다. 무대 밑에 내려가 있던 사회자가 마이크에 대고 형식적인 호응을 하며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아니…….”
괜찮다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문장이 가슴 한가운데에 탁 걸려 올라오지 않았다. 호흡이 거칠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진의 얼굴에 귓가를 가져다 댄 승현이 자신의 이상을 알아차릴 거라 생각하자 더 괴로워졌다.
“이야. 이분들이 바로 장안의 화제죠. 어렵게 모셨습니다.”
사회자는 일렬로 나열한 7명 중 누구에게 마이크를 건넬지 가늠하듯 이곳저곳에 눈을 두었다. 다행히 이진에게 잠깐 닿았던 시선은 곧 옮겨 갔다. 가장 중앙에 있는 찬우에게 마이크를 건네는 게 가장 이상적인 그림일 거라 생각했는지 사회자의 걸음이 그리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한찬우입니다!”
찬우는 마이크를 건네받은 게 벅찬 듯 평소보다 목소리가 한 톤 커져 있었다.
“어휴, 군대 온 줄 알았어요!”
“아, 그런가요? 여기 너무 넓어서 크게 말해야 뒤에까지 잘 들릴 것 같아서…….”
“스피커가 저 뒤에까지 있으니까 우리가 이렇게 속삭여도 아주 잘 들리실 겁니다.”
사회자가 과장되게 속닥댔다.
“몸이 안 좋아요?”
승현이 입 모양을 가리기 위해 이진의 머리통에다 대고 속삭였다. 이진은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명치부터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와 전신에 퍼져 나갔다. 긴장 때문에 관절 마디마디마다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지만 그나마 승현이 어깨를 강하게 붙들고 있어 좀 나았다.
찬우에게서 만족스런 답을 들은 사회자가 다시 다음 먹잇감을 물색했다. 사회자는 하늘에게 가려다가 유난히 딱 달라붙어 있는 승현과 이진을 발견하고 신난 표정을 지으며 둘에게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이 둘은 왜 이렇게 사이가 좋으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선승현이고, 이쪽은 유이진입니다. 이렇게 시청자 분들과 만나 뵙게 될 날만을 상상해 왔는데, 현실로 이뤄지게 되어서 정말 기쁩니다.”
승현은 왜 찰싹 달라붙어 있냐는 질문을 가볍게 무시하며 딴 얘기를 시작했다. 사회자도 더 캐묻지 않고 말을 받았다.
“정말 인생 그 어느 순간보다 감격스러운 심경일 거라고 감히 짐작해 봅니다. 이진 씨도 한마디 하시겠어요?”
사회자가 이번엔 이진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이진은 혀끝에서 맴도는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막상 입을 열고 나니 고민이 무색하게도 매끄러운 어조로 말이 나왔다.
“이렇게, 많이 좋아해 주시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많은 호응 감사드립니다. 여건상…… 저희가 가장 앞에 섰지만 뒤에서 함께한 친구들에게도 많은 관심 부탁드릴게요.”
“그럼요. 다들 재능 많고 열정적인 친구들이죠. 여기 계신 모든 분들도 그 열정을 느끼셨을 겁니다.”
가까이에서 본 사회자는 잠시 뒷줄에 나열한 군단의 존재를 잊은 듯한 눈치였다. 그러나 이진이 던진 말을 유연하게 받아 마치 예정된 걸음이었던 양 뒷줄에게로 향했다.
“아, 안녕, 안녕하세요!”
익숙하지만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주어진 마이크에서 삑사리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승현의 손이 이진을 아예 선 채로 기대도록 끌어당겼다. 이진은 그 손에 순응하며 가까스로 그 자리를 버텼다.
안타깝게도 오늘의 일정은 이걸로 끝나지 않았다. 상위권 내정자인 서른 몇 명은 스튜디오로 돌아가 추가 영상을 촬영해야 했다. 돌아가는 버스에서 승현은 미열을 쫓아내고 이진의 옆에 앉았다.
“아까부터 붙어 있더니 뭔 일이야?”
미열과 윌리엄이 수상쩍은 시선을 보냈다. 하늘과 찬우는 같은 선상에 서 있느라 잘 보지 못했지만, 바로 뒤에서 본 두 사람의 모습은 그들의 관계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상하게 여길 만큼 친근했다.
하지만 둘 중 미열의 물음에 답한 이는 없었다. 이진은 잠든 척 눈을 감았고 승현은 침묵했다. 승현의 비언어적 표현에 익숙한 미열이 다른 사람들에게 손짓으로 무어라 의사 전달을 했다. 고요를 되찾은 이진은 마음속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좀처럼 쉽지 않았다.
진심으로 유명해지고 싶은 거라면 주어진 기회를 잡아 스포트라이트를 자신에게만 집중시켰어야 하는 게 아니었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아직은 방송 초반이었고 지금 받는 관심이 후반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미래의 경쟁자에게 주목을 넘겨주다니 너무도 멍청한 행동이었다.
이진은 너무 물렀다. 처음의 거창한 각오에 비해 실제로는 승자의 자리로 올라설수록 발목을 잡아 오는 부채감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런다고 그들이 이진을 사랑해 주는 것도 아닌데.
버스에서 내려 귀가조와 촬영조의 명단이 불리는 순간에도 사람들의 희비가 교차했다. ‘피곤한데 무슨 촬영이 더 있다는 거야.’라는 불평은 실제로는 과시였고, ‘저런. 나는 그럼 먼저 간다. 수고해.’라는 위로는 사실상 허세였다.
미열과 윌리엄, 진영도 촬영을 위해 남았지만 별개의 그룹으로 묶였다. 오늘은 마룻바닥에 앉아 보드 게임을 했다. 구비된 보드 게임을 한 번씩은 전부 플레이해 달라는 요청 때문에라도 의욕적으로 게임에 임해야 했다.
“어디 보자. 할리갈리, 부루마블, 젠가, 트럼프…… 이건 뭐지? 우노?”
“이거 인생 게임만 해도 시간 다 가겠다.”
“왜 화투는 없지? 화투 주세요오.”
그러나 인원이 홀수라 팀을 먹을 수도 없고, 개별전을 하기엔 머릿수가 너무 많았다. 스탭이 가급적 한 번에 한 게임만 플레이하라고 해 두 그룹으로 나뉘어서 다른 게임을 할 수도 없었다. 팀전이 필요한 게임엔 한 명씩 소외시키는 쪽으로 의견이 모여 갈 때쯤, 승현이 다른 의견을 냈다.
“한 팀에 인원수가 꼭 같을 필요는 없잖아. 재규랑 하늘이, 그리고 나랑 제이슨, 동규가 같은 팀 하고 형들은 형들끼리 하면 세 팀이니까, 다 같이 하지 뭐.”
“와, 제이랑 동규랑 승현이 진짜 안 친하다.”
찬우가 재미있는 조합이라 생각하는지 웃으며 말했다. 같이 웃어 주는 사람은 재규뿐이었다.
안타깝게도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끼리 하는 팀전은 그다지 결과가 좋지 못했다. 팀에 큰 소속감이 없는 만큼 다들 이겨도 그만, 져도 그만인 태도로 게임을 해서 승부욕을 불태울 수가 없었다. 그쯤 되니 게임을 즐기겠다는 의욕도 사라져서 결국 남은 촬영 시간 동안은 각자 맘에 드는 보드 게임을 가지고 손장난이나 쳤다.
“형, 근데 아까 왜 그런 거예요?”
젠가를 기하학적인 무늬로 쌓던 제이슨이 불쑥 물었다. 스물두 살인 제이슨에게 형은 찬우와 이진뿐이라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형 때문에 뒤쪽으로 마이크 넘어갔잖아요. 나한테 올 수도 있었는데.”
“마이크? 아까 행사장에서?”
“제이 형, 그건 좀 도끼병 아니냐?”
재규가 낄낄대며 트럼프 카드를 뒤적였다. 재규와 제이슨이 함께 있던 팀은 사이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더니. 이렇게 불쑥 자신의 편을 들 정도로 껄끄러운 관계였나 싶어 이진은 당황스러웠다.
제이슨은 평소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으나 하는 말마다 제법 직설적이었다. 승현도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했지만, 그게 고지식한 성격을 반영한 경우라면 제이슨은 제 화를 이기지 못해 폭력적으로 쏘아 대는 식이었다. 대부분의 시간, 핸드폰으로 채팅을 하는 걸 보면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꾹꾹 눌러 담고 참는 것 같았다.
“이미 지난 일에 뭘 그렇게…….”
“너한테 한 말 아니잖아. 왜 형은 말이 없어? 입이 없어?”
제이슨이 재규의 말을 끊었다. 그는 화를 잔뜩 쌓아 뒀는지 벌써 말투가 날카로웠다. 이진은 싸움이 날까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 그렇게 느껴졌으면…….”
“왜?”
미안. 이라고 말하려는 찰나 하늘과 원숭이들을 차곡차곡 쌓던 승현이 끼어들었다.
“형이 그렇게 말해 줘서 다행이지. 우리 이기적이라고 싸잡아서 욕먹을 뻔했는데.”
“맞아. 동정표가 은근히 무서운 거잖아.”
승현의 말을 하늘이 받았다. 재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는 말이라고 추임새를 넣었다.
“정말 다들 ……이네.”
제이슨은 이진이 알아듣지 못한 외국어 욕을 지껄이고는 스튜디오 문을 쾅 소리 나게 걷어차고 나갔다. 고등학교 때부터 해외에서 살다가 대학교를 중퇴한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덕에 한국말을 잘하는 윌리엄과 달리, 제이슨의 한국어 실력은 한인 커뮤니티에서 배운 수준이었다. k-pop 시장에선 나름의 매력 포인트로 어필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요 근래 함께 다니면서 정작 본인은 언어에 몹시 스트레스를 받는 걸 알 수 있었다.
“곧 돌아올 거야. 맨날 저래.”
재규가 허공에 대고 말했다.
“카메라 없을 때만 그러더라.”
“야, 무섭다.”
해적 머리가 달린 나무 통 모양의 플라스틱에 칼을 꽂아 대던 동규가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함께 과일 그림이 그려진 카드들을 칠 등분하던 찬우가 이진의 표정을 살폈다.
“왜 우리 이진 님한테 그런대.”
“형이 착해서 그렇지.”
하늘이 답했다. 이진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다시 묵묵히 카드를 정리했다. 승현이 잠깐 나갔다 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쿵, 승현이 나가고 문이 닫힐 때까지 이진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선승현 쟤도 참 사람 혼자 못 둔다.”
차곡차곡 정리되어 가는 카드들과 다르게 이진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그의 머릿속을 가장 크게 어지럽히는 것은 ‘또’ 승현에게 도움을 받았단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