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30화 (30/173)

30화

그날의 이야기

첫방을 같이 보기 위해 만나기로 한 날. 약속 시간을 5시로 착각한 하늘을 위해 진영과 윌리엄, 찬우와 미열이 먼저 모였다. 혹시라도 후에 올라올지도 모르는 목격담을 의식하며 룸 카페에 자리를 잡은 그들은 음료가 나오자마자 입을 간지럽히던 화제를 도마 위에 올렸다.

“유이진이랑 선승현 화해한 거 맞냐?”

“아닌 듯.”

“둘 다 나쁜 애들은 아닌데……. 어지간히 안 맞는다.”

“그래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던 건데?”

하늘이 찬우와 미열을 향해 물었다.

“난 정말 몰라. 승현이가 이진이한테 거의 고백하는 것까진 들었는데.”

“뭐? 고백?”

찬우가 손을 설레설레 내저으며 한 말에 윌리엄이 크게 반응했다.

“승현이 혹시…….”

“아니, 그게 아니라…….”

은밀한 시선을 교환하던 윌리엄과 찬우가 떨떠름하게 말을 끝맺었다.

“그 얘기는 그만하고.”

“그래서 형은 아는 게 없다고?”

“응. 뭔가 분위기가 무서워서 그냥 나왔어.”

하늘이 재차 묻자 찬우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한숨을 푹 내쉬며 시무룩하게 답했다.

“난 사실 싸운 이유도 잘 이해가 안  가.”

그는 진심으로 승현과 이진이 친한 줄 알았다. 이진이 승현에게 화를 냈을 때도 화해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때 단편적으로 엿들은 내용으로 조합해 보면 애초에 이진은 승현뿐 아니라 다른 팀원들도 친구라 생각한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다 내 잘못이다…….”

미열이 테이블에 엎어졌다.

“이진이가 승현이한테 벽 치길래……. 선승현이 안 그래 보이지만 벽 치는 애들한테 잘 못 다가가거든. 그래서 그냥 적극적으로 잘해 주면 이진이도 좋아할 거라고 그랬는데, 이진이는 그것 때문에 승현이 완전 비호감 된 것 같고.”

알 만하다는 끄덕임이 오고 갔다.

“근데…… 이진이가 엿들었단 건 뭐야?”

“승현이가 이진이랑 못 친해지겠다고 징징대길래 비즈니스적으로라도 친해져야 한다고 했거든. 이진이가 그걸 들은 것 같은데…… 나랑은 그 얘기 안 하려고 해서 정확치는 모르겠어.”

미열이 자책하며 오렌지에이드를 쭉 빨아 마셨다. 폐활량이 좋아서 그런지 한 모금만에 에이드는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근데 내 생각에 근본은 그게 아니야.”

잠자코 있던 진영이 말했다.

“이진이 걔 은근히 별것도 아닌 일로 조잔하게 굴잖아. 사실 평소에 보이는 게 가식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겠지.”

“가식은 너무 갔다.”

“각자 기준이 다른 거죠.”

찬우와 하늘이 반박했다. 진영도 딱히 이진을 욕하고자 한 건 아니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가식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게 솔직한 모습은 아니란 거야.”

“에이. 그렇게 따지면 누가 방송에서 솔직한 모습을 보여 줘요?”

빨대를 씹던 윌리엄은 하늘이 하루에 세 번이나 울었다는 점을 지적하려다 말았다.

“나는, 이진이도 속에 쌓아 둔 게 많을 거라고 생각해.”

“그래? 나는 그냥 좀 애가 차분한 성격 같던데.”

미열이 말했다. 찬우는 이진을 떠올려 봤다. 아침 먹으러 가는 이진. 점심 먹으러 가는 이진. 저녁 먹으러 가는 이진. 이불 덮고 누운 이진.

뭘 쌓아 둘 만한 틈이 없지 않나?

“그런 거 말고. 노래 들어 보면 티가 나잖아.”

“랩처럼 가사를 직접 적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아?”

“감수성이 얼마나 예민한지는 느낄 수 있어!”

진영의 말에 미열이 조금 짜증을 냈다. 진영은 예리한 척하면서 감수성 면에서 은근히 둔감했다. 미열은 차라리 찬우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쪽이 상대하기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같은 생활을 하더라도 느끼는 감정의 깊이나 울림이 남들보다 깊고 크면 노래에 실리는 무게가 남다르거든요. 그게 기술적인 게 있고 타고난 게 있는데 이진이 형은 후자에 가깝죠.”

하늘이 진영에게 설명했다.

“그래서 감수성 예민한 애들은 아이돌 힘들어하기도 하고.”

“아, 그건 또 왜? 아티스트니까 그런 편이 낫지 않나?”

찬우가 진영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돌 앨범은 보통 들으면서 감동받으라고 만들지는 않지. 오히려 싹 배제해서 들으면서 감정 소모 없게끔 만들잖아.”

“그리고 그룹 활동이다 보니 혼자 튀면 안 되잖아요. 감성도 다 주파수가 달라서, 감수성 예민한 애들 열 명 모아 두잖아요? 그럼 걔네가 한 노래에 담는 감정이 다 달라요.”

미열과 하늘이 차근차근 설명하자 찬우와 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론적으론 승현이랑 이진이는 그 주파수가 다르단 거네.”

“그게 결론인가?”

“틀린 얘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진영이 얼렁뚱땅 결론을 내려 버렸다.

“승현이도 맨날 밤에 잠 못 자고 돌아다니잖아. 그런거 보면 걔도 한 감수성 하는 것 같은데 둘이 안 맞는다고 하니.”

“승현이가 돌아다닌다고?”

같은 방을 썼던 찬우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새벽에 몰래 담배 피울 때 몇 번 만났어. 그냥 잠 안와서 산책한다던데.”

“미열이 너는 알았어?”

“나는 실제로 집에 강도가 들었을 때도 자느라 몰랐던 사람이야…….”

“이진이도 잠 짧게 깊이 자는 타입 같던데. 아무도 몰랐나 보네.”

흠, 하고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멍하니 음료를 휘저으며 생각에 잠긴 하늘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엔 둘이 안 맞을 것 같지는 않거든.”

“사실 하는 짓만 보면 둘이 제일 잘 지내야지.”

윌리엄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둘 다 그다지 튀는 성격이 아니긴 하지만 하는 행동을 보면 제법 잘 맞아 보였다. 결과는 정반대였지만…….

“그지. 조용하고, 열심히 하고. 사람 많은 것도 싫어하고.”

“닮은 사람끼리 더 못 지낸다잖아.”

“역시 내가 괜히 참견해서…….”

빨대를 질겅질겅 씹으며 오랫동안 듣기만 하던 윌리엄이 박수를 짝 쳤다.

“둘 다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어른들인데 우리가 걱정해 봤자 뭐 하냐.”

“이진이는 왜…… 아무 말도 안 할까? 맨날 웃기만 하고.”

“승현이한테 화낼 때도 웃는 표정 그대로 굳어진 거 보고 나 진짜 너무 무서웠다고.”

여전히 시무룩한 얼굴로 미열이 푸념하듯 말하자 찬우가 양손으로 반대쪽 팔뚝을 문지르며 답했다. 과장하듯 몸까지 부르르 떨어 댔다.

“우리 재밌는 얘기하자. 아이돌 왜 되고 싶은지 자랑하기 하자.”

축 처진 분위기를 못 견디겠는지 윌리엄이 다시 박수를 짝 쳤다. 진영과 하늘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난 힙합 신에서 미래가 없다고 아이돌 하란 소리 들어서. 스물에 회사 들어가서 6년 버텼더니 이제 여기밖에 남은 곳이 없던데.”

“저는 중학생 때 오디션 합격해서 고등학교도 거의 못 다니고 연습했는데 갑자기 물갈이 당할 위기에 처해서 나왔어요.”

두 사람의 암울한 말에 윌리엄이 가짜로 딸꾹질하는 소리를 냈다.

“그런 거 말고 꿈! 꿈 같은 거 없어? 하늘이는 왜 오디션을 본거야? 진영이도 음악을 하고 싶은 이유가 있을 거 아냐!”

“개인 인터뷰 따냐고…….”

여전히 천진한 월리엄의 질문이 미열이 구시렁댔다.

“그러고 보니 이진이는 왜 여기 나온 걸까? 성향이랑도 별로 안 맞아보 이던데.”

“그러게. 승현이는 미열이 따라서 나왔다고 했나?”

찬우가 아이돌이 아니라 마치 군인같이 각 잡힌 생활을 하는 이진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 말을 이어받아 진영이 미열에게 물었다.

“나간다 했더니 자기도 나갈 거라고 한 거긴 한데, 따라왔다기보다는 걔네 아버지가 엔터 쪽이랑도 연이 있어서 그쪽으로 서류 넣어서 온 걸 거야.”

“와……. 뭔가 신기하네.”

얼음을 오독오독 씹던 찬우가 그래도 동갑내기라고 이진이 신경 쓰이는지 테이블에 길게 엎어지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진이는 왜 온 걸까? 아이돌에 관심은 없어 보이던데. 이진아, 네 얘기가 듣고 싶어…….”

“앞에선 한마디도 못하면서 뒤에서만.”

“그렇지만 이진이는 사생활 물어보면 싫어할 것 같아서. 승현이 꼴 나기 싫어…….”

“선승현이 진짜…… 좋은 반면교사다.”

그리고 다들 한참 동안 침묵했다.

“사람이 사실…… 굉장히 다양한 면이 있다는 걸 잊고 사는 것 같아.”

미열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앞으로 더 조심해야지. 이진이한테도 미안하고 승현이한테도 미안하네.”

“됐어. 걔네가 못 친해지는 게 네 탓도 아니고.”

찬우가 위로했으나 미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말실수를 많이 한 것 같아서. 진짜 미안하다.”

미열이 그렇게 말하고 조금 풀이 죽자 사방에서 손이 날아와 미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좀. 30초만 진지하면 안 되냐고!”

은근 슬쩍 머리를 때리는 손길에 결국 미열이 웃고 말았다. 그러다 ‘아!’ 하고 탄성을 지르더니 가방을 주섬주섬 열어 커다란 태블릿을 꺼냈다.

“내가 레전드 뮬란 들려 줌.”

“너 때문에 이진이가 뮬란 레전드 싱어인 거 다 알아. 이진이만 몰라.”

미열이 갤러리에서 미리 다운받아 둔 영상을 찾아 재생했다. 미열의 공연을 주기적으로 찾는 팬이자 다섯 명이 엉덩이 대고 앉아 있는 카페 사장이 찍은 영상이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수많은 ‘레전드 뮬란’ 영상 중 이진과 미열의 얼굴이 아주 생생하게 보여 가장 인기가 많았다.

“우와. 야, 나 소름 돋았다. 감수성, 감성. 말로만 떠들 게 아니라 이런 걸 들려 줬어야지.”

진영이 턱을 길게 늘리며 말했다. 이미 미열에게 잡혀 영상을 서너 번씩 본 찬우는 시큰둥했지만 하늘과 윌리엄은 처음 보는 영상이라 다들 엄청나게 감탄했다.

“와, 진짜 아이돌 왜 한다는 거지.? 아이돌 비하가 아니라, 굳이……?”

“경연곡이랑 이진이랑 상성이 안 맞긴 하지. 그래도 나랑 같이 데뷔해 줘, 이진아!”

“음원에서는 이 느낌이 안 살아서 너무 아쉽네.”

하늘은 자기 공장에서 낭비되는 원료를 본 사업가처럼 답답해했다. 그러나 내심 이진이 본 실력을 드러내지 못해 자신의 인기를 뺏어 가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 이진이 슬슬 도착한대.”

미열이 핸드폰을 확인하며 말했다.

“나가자, 나가.”

“이진이랑 더 친해져야지. 꼭 승현이 꼴 안 나고.”

“승현이는 어디래?”

“연락 없네.”

“에휴. 오늘 둘이 방송 보면서 오해도 풀고 화해 좀 했으면!”

하지만 그날 승현은 약속에 오지 못했다. 또 다 같이 냉면을 먹을 때쯤, 이진은 노래에 감수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묻는 진영의 질문에 “그건 다 노래 못하는 애들이나 찾는 핑계”라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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