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29화 (29/173)

29화

승현은 생각지 못한 이미지로 소개가 되었다. 포지션별 연습실에서 하품을 하다 누군가 던진 과자를 입으로 받아먹고, 자판기에서 일곱 개의 음료수를 받고는 지친 듯 지나가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모습. 남들 다 연습할 때 놀다가 빈 연습실에 혼자 앉아 있는데 때마침 들어온 멘토가 오해를 하고 혼자서도 열심히 연습한다며 칭찬을 해 주는 엉뚱하고 재밌는 장면이 연달아 나왔다.

-안녕하세요. 선승현입니다.

이후 편집된 영상도 전체적인 맥락은 같았다. 승현이 게으름 피우는 모습과 그럼에도 좋은 평가를 받는 모습을 번갈아 보여 주며 그가 타고난 천재인지, 혹은 단지 운이 좋아 과대평가됐는지 고민하게 만드는 자막을 달았다. 이미 승현이 음악 방송에 출연했음을 알면서도 그런 식으로 편집했다.

“야, 유이진. 저게 뭐야. 한국의 춤선? 애국가만 불러도 한국의 음악?”

“백미열 같은 친구 있는 게 승현이 장점이야?”

이진의 개인 인터뷰는 승현을 소개하며 핵심 단어만 부분부분 편집되어 나왔다. 그런데 하필 완성된 문장과 편집의 의도가 승현의 과대평가를 조장하듯 연출되었다.

-승현이는 애가, 음……. 잘생겼죠. 보고 있으면 막, 사이다? 탄산음료 마신 것 같이 시원하고. 모난 데 하나 없이 잘나서 개다리 춤만 춰도 ‘아, 이게 바로 한국의 춤선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것 같아요. 미열이 같은 친구도 있고 참…… 좋은 애예요.

편집해 준다더니 고스란히 방송된 자신의 주접에 이진은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게다가 아까부터 깔깔대던 사장과 사모를 포함한 사람들이 이 테이블을 힐끔대며 주시하는 것 같았다.

”와. 근데 진짜 민망하고 재밌다.”

“분량이 불공평하긴 한데…….”

아예 묻힌 다른 참가자들에 비해 나은 편이지만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윌리엄은 오늘 모임 내에서 상대적으로 분량이 적은 편이었다.

“1화에선 다들 궁금해하는 사람을 보여 주는 게 최선이니까 그렇겠지.”

“그지? 아, 우리 슬슬 나갈까?”

방송이 끝나자마자 일행은 쫓겨나듯 가게를 떠났다. 그들이 방송에 출연했다는 사실을 눈치챈 손님들이 그들의 언행을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장과 사모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그들은 뜻밖에도 이진의 미래를 축복해 주었다.

‘네가 이렇게 평범하게 살 애가 아니란 건 알고 있었어. 지금이라도 네 꿈을 찾아서 다행이다.’

그 다정한 말에 이진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연신 꾸벅거리기만 했다.

“잘 가, 얘들아.”

시간은 어느새 10시를 넘겼고 경기도에 사는 하늘이 지하철 막차가 위험하다고 해 이만 해산하기로 했다. 하늘은 지하철을 탔고 진영과 윌리엄, 찬우는 택시를 태워 보낸 뒤 대학가에 자취하는 이진과 본가가 근처인 미열만이 남았다.

“수고했어.”

“너도.”

“이제 집에 가는 거야?”

미열은 이번 주 최다 분량을 획득했다. 미열 개인에 대한 집중도는 낮은 편이었지만 평소에 중얼거리던 소리들은 깔끔하게 녹음되어 리액션처럼 필요할 때마다 틀어져 나왔고 개인 인터뷰도 자주 나왔다. 아는 사람이 이곳저곳에 있다 보니 여기 끼고 저기 끼고 한 영상이 많아 정말 여러 번 얼굴을 비췄다. 게다가 동영상 업로드 사이트에는 미열의 버스킹 영상이 수두룩해 자료 화면도 아주 풍부했다. 이진은 미열이 누구와 기쁨을 나눌지 궁금했다.

“아니. 승현이네 가 보려고. 걔 또 동생이랑 쎄쎄쎄나 하고 놀고 있을 텐데 형님이 가서 재방송이라도 보여 줘야지.”

말을 마치고 이진의 기분을 살피던 미열이 그가 큰 반응이 없자 뒷말을 이었다.

“막내 유치원 다니면서부터 걔네 집 TV 같은 거 금지거든. 나 가면 손님 왔다고 틀어 주긴 하지만.”

“아…… 엄격하네.”

이진은 ‘재벌가도 유난이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렇지, 뭐. 그래도 수현이가 진짜 귀여워. 좀 실례인 말이긴 한데 정말 너 많이 닮았어. 다음에 한번 보면 좋겠다.”

“그러게.”

아예 수현이 사진까지 꺼내서 보여 줄 기세길래 이진은 더 늦게 가면 승현의 가족들에게 민폐일 테니 얼른 가 보라며 미열의 등을 떠밀었다.

미열까지 떠나고 이진은 번화가 뒤편 어둑하고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골목을 홀로 걸어 자취방으로 돌아갔다. 가로수에는 파릇한 새싹이 돋아나고 아스팔트에 하얗게 끼어 있던 눈들도 죄다 녹아 사라졌지만, 밤공기는 아직도 겨울인 것처럼 차가워 옷 틈을 단단히 여몄다.

전등을 끄지 않고 나가 방이 환했다. 그럼에도 구석에는 어둠이 가시지 않았다. 이진은 빠르게 옷만 갈아입고 이불 속에 들어가 아직 치우지 않은 전기장판을 켰다. 바닥에 머리를 대고 눕자 뇌가 순식간에 바닥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 밝은 분위기에 어울려 하하, 호호 웃어 대던 기운은 완전히 가셨다. 집에 들어서고부터 이진은 가식적인 겉모습을 벗고 외롭고 우울한 이진으로 돌아왔다. 가만히 누워만 있는데도 금세 숨이 가빠졌다. 눈구멍 안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느껴지고 턱에도 힘이 들어가 바들바들 떨렸다. 잔 떨림은 어느새 온몸으로 퍼져 이진은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떨림을 참아 냈다.

기어이 눈물이 비집고 나왔다. 이진은 한참을 울었다. 왜 눈물이 나는지, 어떻게 멈춰야 하는지,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건지. 그런 생각들은 잠깐 떠올랐다가 이내 눈물에 녹아 사라졌다. 지금 이진은 그저 서러웠다.

타인의 눈에 비춰지는 이진은 외로움에 속이 썩어 문드러지지도 않았고 열등감에 죄 없는 사람을 미워하지도 않았다.

‘형이 다정한 사람이라서 좋아요. 성실하고, 떳떳하고, 배려가 자연스러운 사람이라서요.’

이진은 아주 평범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힘들 때 힘들어하고 즐거울 때 웃는 사람이었다. 당연한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여태까지 그에게 먼저 다가오는 사람들은 전부 이상한 꿍꿍이가 있거나 결코 진심이 아닐 거라 생각하고 밀어냈었다. 고작 자신에게 좋은 소리를 해 주며 친해지려고 하면 의심부터 들었다. 종래에 외모를 칭찬하는 사람들에겐 불쾌함까지 느끼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언젠간 이진에게 무언가 바랐고, 이진은 그들이 바라는 걸 줄 수 없었다. 그래서 이진은 그들에게 선을 긋고 그 뒤로 숨었다. 자신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사람이란 사실을 들키게 되면 그들은 이진을 싫어하고, 욕하고, 분노하며 결국은 외면하고 떠나 버릴 테니까.

‘형이랑 잘 지내고 싶어서요. 비록 형이 저를 싫어한다고 해도…… 혹시라도 서로 오해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때로는 아무런 욕심 없이 다가오는 사람도 있었을 거다. 혹은 그가 바라는 게 이진의 사소한 관심이 전부였을 수도 있다. 아니면 오히려 이진에게 무언가를 선물하고 싶어 다가온 사람도 있었을 거다.

왜냐하면 이진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으니까. TV로 본 그는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그걸 너무 늦게 알았다.

“아, 흐, 흐윽…….”

꽉 막힌 목에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작은 흐느낌은 곧 커다란 울음소리가 되었다. 장례식에서도 통곡하지 못한 이진의 설움은 하룻밤 눈물로 채 가시지 않을 만큼 깊었다.

야망만 큰 열등감 덩어리에 사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밀어내기만 하는 이진을 만들고,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여기며 가장 미워하던 건 바로 이진 자신이었다.

한참을 울던 이진은 눈물을 닦으며 자신이 안정된 직장을 갖길 바랐던 부모님이 오늘의 방송을 보면 어떻게 생각하실까 생각했다. 부질없는 상상이었지만 부디 그들이 천국이든 어디든 간에 이진을 지켜보고 응원해 줬으면 했다. 자고 일어나니 과거로 돌아온 믿기지 않는 상황을, 전 국민이 보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출연한 일을, 오랫동안 참아 온 눈물을 흘리는 모습도 부디 누군가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기를 바랐다.

그만큼 이진은 외로웠다.

***

약 일주일간의 휴식 시간이 끝나고, 첫 번째 투표가 마감되기까지의 빈 시간에 참가자들은 제작진의 부름에 따라 행사를 뛰거나 홈페이지 업로드용 영상을 찍었다.

휴식으로 주어진 일주일 내리 모든 연락을 무시하고 잠수를 탄 이진은 행사장으로 가는 50인승 버스에서 마주친 미열의 원망스런 눈빛을 애써 외면했다. 그러나 미열은 항상 승현의 자리였던 제 옆자리를 훤히 비워 둔 채 그에게 앉으라 손짓했다.

“정말 집 안에서 핸드폰 잃어버린 거라니까……. 원래 잘 안 써서 외출할 때마다 찾는 게 일상이야.”

미열의 걱정 섞인 잔소리에 이진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사실이라면 일주일간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단 뜻이고, 거짓이라면 의도적으로 연락을 회피한 것뿐만 아니라 회피했다는 사실조차 감추려는 변명이었다. 이러나저러나 미열의 걱정을 덜어 주진 못했으나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은 이진은 멀미를 핑계로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지난 일주일간, 이진은 자신의 영상을 계속해서 되돌려 보았다. 스스로도 이유를 찾지 못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영상을 멈추면 좁은 원룸 안을 가득히 메운 외로움에 질식할 것만 같았기에 두 시간이 조금 넘는 영상을 외울 지경으로 반복했다. 지금이 아날로그 시대라면 비디오테이프가 다 헐어 버렸겠지만 다행히 디지털 시대에 사는 이진은 전기세 정도만 걱정해도 되었다.

자기혐오를 직시한다는 게 곧 변화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 뿌리 깊은 혐오의 원인은 유년기의 가난이거나 충족되지 않은 관심 욕구, 원만하지 못했던 교우 관계,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 등 이진의 인생 모든 부분에 있었다.

어쩌면 애초에 타고난 성격적 기질이 이런 걸지도 몰랐다. 부유한 부모, 넘치는 친구, 뭐든지 바라는 대로 이뤄지는 꿈만 같은 인생을 살아왔더라도 스스로 이룬 것은 하나도 없다며 자신을 미워할지 몰랐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진의 자기혐오가 자신에게 향하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주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선승현. 그와 관련된 일에 이진은 과민 반응했다.

일주일간 영상을 거듭 돌려보며 무의미한 반복 속에 이진이 얻은 것이 있다면 승현은 고작 그의 삶에 악당이 되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승현이 이진에게 범한 무례를 하나하나 따져 물어봐도 결론적으로 이진이 승현의 행동 하나하나에 과도한 반응을 한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이진아. 유이진, 일어나.”

미열이 이진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정말 잘 생각은 없었는데 잠깐 선잠에 든 모양이었다. 멍한 정신을 간신히 추스르며 일어나니 미열의 등 뒤로 나갈 채비를 하는 승현이 보였다. 오랜만에 본 승현은 그간 밥을 잘 못 먹고 지냈는지 이전보다 수척해 보였다. 습관적으로 그를 관찰하다 눈이 마주쳤다.

승현은 이진에게 잠깐 시선을 두었다가 이내 하늘을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미열은 가방 속에서 꺼낸 물을 건네며 이진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내렸다.

“강재규 씨, 선승현 씨, 유이진 씨, 제이슨 씨, 정하늘 씨, 허동규 씨, 한찬우 씨. 이분들은 앞쪽 스태프를 따라가 주세요.”

“나머지 분들은 여기서 대기하실게요.”

아직까지 탈락자가 없어 백여 명에 달하는 인원을 수용할 대기실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에 제작진들은 적당한 대안을 마련했는데, 첫 번째는 모두에게 배급된 트레이닝복을 입고 오라고 지시한 것이고 두 번째는 음악 방송 공연 멤버들에게만 대기실을 지급하는 것이었다.

“이진 씨, 거기 아니고 이쪽이에요!”

미열과 함께 이동하던 이진은 누군가 자신을 급하게 찾는 소리에 후다닥 달려간 뒤에 그 대안에 대해 들었다. 이진을 부른 스태프는 종이봉투에 담긴 유니폼을 건네며 대기실에서 갈아입으라고 말했다. 멀찍이서 미열이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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