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28화 (28/173)

28화

1절이 끝나며 일곱 명이 동시에 무릎을 꿇고 앉은 뒤 센터부터 차례로 일어나 솔로를 추는 구간이 있다. 솔로가 끝난 사람은 포즈를 취한 채 마네킹처럼 멈추고 그다음 사람이 일어나 또 다른 춤을 추고. 그걸 모두가 일어날 때까지 반복하는데, 센터는 가운데에서 쉬지 않고 모든 안무를 소화해야 했다. 화려한 구성인 만큼 트레이너도 안무의 꽃이라 강조하고 센터 파트에서도 핵심인 안무라 가장 오래 연습하는 구간이었다.

그런데, 간주가 시작돼도 찬우가 일어나지 않았다. 찬우가 공황 상태에 빠졌단 건 다들 알았지만 막상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이진 외에는…….

다행히 이진은 센터 포지션에 몸담았던 경험으로 센터 파트의 안무를 모두 익혀 뒀다. 신이 안배한 것 같은 타이밍이었다. 이진은 순발력을 발휘해, 정확하게는 거의 아무런 고심 없이 제일 먼저 일어나 센터 안무를 수행했다. 대형상 이진이 왼쪽 제일 끝이었기에 그다지 이상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진이 무대를 수습하는 동안, 보컬 파트가 거의 없는 승현이 손으로 마이크의 전원을 내리고 찬우의 이름을 불렀다.

“한찬우!”

겨우 승현의 목소리를 들은 찬우가 일어났을 땐 막 2절이 시작되는 구간이었다. 간주 구간, 본의 아니게 열렬하게 춤을 춘 이진이 다소 가쁜 목소리로 2절의 첫 마디를 뗐다.

다행히 다들 큰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채 무대가 끝났고, 무대 밑으로 내려온 찬우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 다들 입을 다물었다. 제이슨은 한마디 하고 싶은 것 같았으나 재규와 승현이 눈치껏 막았다. 어차피 가장 괴로울 사람은 찬우였고, 그의 실수는 시청자들이 평가할 문제였다. 무대 자체는 나쁘지 않게 끝났으니 다들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넘어갔다.

이제 보니 찬우는 자신이 대체 어디에서 실수했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찬우가 다시 이진에게 달라붙으며 우는 소리를 했다. 이진은 어제의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지만, 오늘은 표정이 좋아 보여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진아……. 나 정말 방 얻으면 안 되나 보다 하고 다음 주에 짐 싸 들고 집 갈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정말 너뿐이야. 사랑해.”

“지금 사는 집 주인은 난데 나를 사랑해야지!”

윌리엄이 찬우의 옆구리를 파고드는 동안 핸드폰을 확인한 미열이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 승현이 오늘 못 올 것 같대.”

“네? 왜요?”

하늘이 눈을 똥그랗게 뜨며 충격받은 심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승현이 없으면 하늘은 네다섯 살은 많은 형들이랑만 놀아야 했다. 그냥 이 멤버로도 잘 지내길래 몰랐지만 지난 음악 방송 무대를 준비하며, 팀에 있을 때와 자신과 동갑이거나 한두 살 많은 이들과 지낼 때 하늘의 모습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진은 그제야 하늘이 아직도 다른 멤버들을 어렵게 생각함을 알아차렸다.

하기야 하늘은 아직도 이진을 향해 존댓말을 쓸지 반말을 쓸지 결정하지 못해서 둘을 섞어서 사용했다. 다들 말을 놓고 있으니 친한 티를 내긴 해야겠는데, 마음의 거리가 아직 한참은 멀기 때문일 거라 짐작했다.

또래와 어울린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뭐랄까. 비슷한 나이라는 건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웃음이 날 만큼 말없이 공유하는 무언가가 있는 듯했다. 물론 이진은 찬우의 텔레파시도 읽지 못하고 무시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얘가 좀 시간 빼기가 힘든 놈이라 오늘 된다고 했을 때도 긴가민가하긴 했는데…….”

“왜? 무슨 일 있대?”

“가족이 엄격해서. 합숙하면서 자유를 좀 즐겼던 거지.”

“아. 방송도 거짓말 치고 참가한 거라 했지?”

승현의 의외의 사정에 애도하는 시간을 잠깐 가진 뒤, 승현을 제외한 여섯 명끼리 윌리엄 삼촌의 가게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윌리엄을 따라 가는 길목이 익숙하기만 했다. 이 거리엔 유흥업소가 많은 편이고, 그나마 식당이라고 할 만한 가게는 아주 적었는데…….

“어? 이진이 네가 웬일이냐?”

“어…… 안녕하세요.”

어쩐지 가는 길이 익숙하다 했더니 도착한 곳은 이진이 대학 시절 내리 생활비를 조달했던 고깃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진의 얼굴을 확인한 사장이 반가움을 숨기지 못하고 활짝 웃었다. 이진은 무뚝뚝하던 사장의 변화에 조금 놀라고 말았다.

“삼촌, 이진이 알아?”

“그럼. 우리 알바 이진이. 가게 매출 반은 쟤가 했는데 당연히 알지! 너야말로 뭐야. 친구야?”

“나 방송 나가서 만난 친구!”

윌리엄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단순히 시급이 높아 오래 일했던 가게지만, 노골적으로 이진 자신이 매출을 담당했다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요상했다. 게다가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과 다른 상황, 다른 관계로 만나게 되니 멀미를 하듯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진이 친구들한테 주는 서비스예요.”

“숙모, 나는?”

“너는 친구들을 데려온다 했을 때 몇 명인지 미리 말을 해야지. 고작해야 하나둘 올 줄 알았더니 왜 이렇게 많아?”

이진에게는 사모님이었던 윌리엄의 숙모는 평소에 어지간해선 내놓지 않는 서비스를 한 상 가득 내주었다. 친절한 미소에 어색한 미소로 마주 답하며 이진은 이유 모를 죄책감을 느꼈다. 이렇게 반가워해 줄 줄 알았다면 한번 찾아라도 와 볼걸. 이진은 오히려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3년간 이 거리를 피해 다니기만 했다.

“사모님, 여기 축구 봅시다.”

“오늘 우리 조카들 방송 나오는 날이라 안 돼요!”

단골 아저씨들의 불만에도 사모는 리모컨을 넘기지 않았다. 몇 년간 축구 방송에 고정되어 있던 TV에 SSTV 음악 방송이 나오는 모습이 아주 어색했다. 사모는 행여라도 윈올의 광고가 스쳐 지나갈까 TV에서 도통 눈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좋은 관계를 형성했던 기억은 없는데도 사모는 흔쾌히 이진을 ‘조카’라고 칭해 주었다. 사실 이진은 친 이모와 장례식 이후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술 마실까?”

“우리 이제 방송 나가는 순간 공인이야. 실수하면 안 된다고.”

미열이 소주를 탐냈으나 윌리엄이 적당히 막았다. 내심 진영도 아쉬운 눈치였지만 하늘은 안심한 듯 사이다를 더 주문했다. 배부르게 고기를 먹고 후식으로 냉면도 시켰다. 후루룩 냉면을 깡그리 비운 뒤 매실차를 마실 무렵, 윈올 1화가 시작됐다.

시작은 가벼운 오프닝과 함께였다. 1라운드의 경연곡이자 메인 테마송을 오프닝에 맞춰 편집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남자의 실루엣이 왕관을 쓰고 망토를 두르는 모션 그래픽이 짧게 보였다. 뒤이어 남자가 망토를 펄럭여 화면을 가득 덮자 1화의 하이라이트 장면 편집 본으로 넘어갔다.

제일 먼저 오디션을 보지 않은 참가자들은 사전 인터뷰에서, 오디션을 본 참가자들은 오디션 무대에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는 장면이 교차 편집됐다.

“어머. 여보! 이진이네, 이진이!”

당연히 이진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인사하는 모습도 들어가 있었다. 함께 방송을 보던 사모가 남편을 부르며 호들갑을 떨었다.

1화는 합숙 생활의 절반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시간 순서대로 편집되지 않아 조금 들쭉날쭉했지만, 마지막에 정해진 포지션을 처음부터 보여 준 뒤 합숙의 처음으로 돌아가 참가자들이 이 자리까지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차례대로 조명하는 형식이었다.

물론 사람이 너무 많아 개인별 분량이 많진 않았다. 그래도 화젯거리가 될 법한 참가자들의 모습은 길게 담겨 있었다. 이진의 팀은 모두 나름의 기준을 충족했는지 다른 사람들보다 분량이 두 배는 많았다.

-아. 모두 남다르다, 간절하다. 그런 게 분위기에서 확 느껴졌어요.

-내가 제일 못하면 어떡하지? 걱정이 됐죠.

-노력으로 극복할 수밖에 없는 걸로 징징대지는 않으려고요.

잔뜩 긴장하면서 본 방송은 생각보다 참가자들을 매도하거나 웃음거리로 만들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의 노력을 생생하게 담았다. 특히 그들이 꿈을 좇는 사람들임을 여러 번 강조했다.

-안녕하세요. 바비 엔터 정하늘입니다. 연습생 기간은…… 어, 5년? 6년?

-안녕하세요. 한찬우입니다. 연습생이 된 건 고등학생 땐데 그때부터 백댄서로 경험을 쌓기 시작했어요.

-엘엔디 엔터 김진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정말 열심히 했는데, 기회를 잡는 게 너무 힘들었죠.

화면을 통해 보이는 지인들의 모습은 어색하고 어딘지 낯부끄러웠다. 들어서는 안 될 사정을 들어 버린 기분이었다. 그래도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냥 ‘아, 얘네도 다 똑같은 사람이구나.’ 하고 느꼈다.

-안녕하세요. 유이진입니다.

이진은 특히 자신이 나왔을 때가 가장 낯설었다.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화면 속 이진은 침착하고 차분하며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아이돌 지망생은 아니지만 음악을 향한 열정이 뛰어났고, 방송 출연을 새로운 터닝 포인트쯤으로 생각하는 여유가 있었다.

-아이돌이 되어야겠다고 구체적으로 생각한 적은 없어요. 저는 늘 음악을 좋아했고 가수가 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했어요. 그러나 현실이 제 시도들을 가로막았고…… 이제는 준비된 것 같으니 제게 주어진 기회를 잡고자 출연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이진의 인터뷰 사운드 위에 그의 실력을 짐작할 만한 영상 클립들이 깔렸다. 이진은 과시할 만할 실력을 가지고도 항상 겸손했으며 칭찬을 받으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부끄러워했다. 그러면서도 감사함을 잊지 않아 결국은 빨간 볼을 하고도 눈을 접으며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는 모습이 훈훈한 미소를 자아냈다.

-대단하죠. 누가 뭐래도 실력은 톱이에요. 첫눈에 반했다? 뭐 그 정도?

-이진이 형은 조용히 불타오르는 에너지가 있어요.

나레이션처럼 흘러나오는 미열과 승현의 개인 인터뷰가 이진을 더 완벽한 사람으로 보이게 했다. 이 완벽한 남자가 오디션에서 빌리빌런즈의 노래를 부르는 엉뚱함도 겸비했다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오디션 영상이 재생됐다.

뒤늦게 이 방송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빌리빌런즈는 실제 아이돌이 아니고 ‘악녀들의 빌리지(village)’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프로젝트식으로 기획한 그룹이었다. 이진의 오디션 장면이 나올 때 이진은 민망함에 사이다 한 병을 전부 마셔 버렸다.

-와. 물건이다, 물건이야.

이진이 합격 딱지를 붙이고 방을 나가자마자 심사 위원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심사 위원들 틈에 이진을 예뻐하는 멘토 조엘이 섞여 있었다. 이진의 신경을 내내 긁어 댔던 ‘거울 볼 때마다 부모님께 감사하시겠어요.’라는 멘트도 방송에선 심사 위원이 진심으로 이진의 외모에 반한 듯한 모습으로 연출되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