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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27화 (27/173)

27화

승현과 이진은 마치 서로의 속내를 전혀 모르는 것처럼 행동했다. 다른 사람들은 둘이 화해한 줄 알고 좋아했다. 특히 찬우는 그동안 그들 사이에 갈등을 제대로 눈치채지 못했다는 자책이 심했던지 하루에도 몇 번이고 다행이라며 혼잣말을 했다가 미열에게 구박을 받았다. 미열은 평화 밑에 숨겨진 진실을 눈치챈 것 같았으나 이진이 더 묻지 않기를 원하는 눈치라 모르는 척 넘어가 주었다.

다음 날, 티저에 들어갈 단체 무대를 비롯한 모든 촬영 일정이 끝나고, 음악 방송에 진출한 참가자들과 대화의 장이 마련됐다.

같은 포지션이나 같은 팀이 아닌 참가자들과는 교류할 방도나 시간이 마땅찮아 사실상 이름 외에는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사이였다. 그럼에도 공통 대화 주제가 있기 때문인지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쪽 팀은 사이가 좋은 것 같아서 부러웠어.”

리드 보컬 포지션의 재규는 사실 팀원들이랑 성격이 잘 맞지 않아서 힘들었다며, 이진의 팀이 줄곧 부러웠다 말했다.

“실제로 같이 연습하니까 모난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마음도 편하고……. 그리고 왠지 이진 형이랑 승현 형이 같이 있으니까 막 다 잘될 것 같은 그 기분 알아?”

재규가 이진과 승현에게 친한 척 들러붙었다. 이진은 미열의 자리를 차지한 강재규에게 도통 마음이 가지 않았으나 재규와 미열이 친한 사이라 그의 넉살을 적당히 받아 주었다.

“멘토 분들이 좋게 봐 주신 만큼 열심히 해야지.”

“이진이 형 멘탈 짱이다.”

이진의 대답에 재규가 활짝 웃었다. 이진은 입에 발린 소리에도 후한 점수를 주는 그가 조금 부담스러웠다.

그가 말한 ‘다 잘될 것 같은 기분’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확실히 개인 점수를 왕창 받은 참가자와 함께 공연을 한다고 하면 든든해질 거라 짐작했다. 선승현은 무려 모든 심사 위원에게 만점을 받기까지 했다. 그런 면에서 생각해 보자면 승현은 참 좋은 멤버였다. 포지션 욕심도 없고 맡은 바는 열심히 한다고들 하고, 결과까지 잘 뽑아낸다.

이진은 무의식중에 하늘과 찬우의 표정을 살폈다. 아직 재규에게 들키지 않았을 뿐 이진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모난 사람’의 대표 격이었다. 인성 검사 기계 앞에 백여 명을 전부 줄지어 세워 놓고 한 명씩 기계를 통과하게 시킨다면, 이진은 자신이 제일 낮은 점수를 받을 거라 확신했다.

어제 일도 그랬다. 자고 일어나 생각해 보니 승현에게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진과 잘 풀어 보겠다고 주절주절 뭐라 말하던 선승현. 이진의 말에 상처받은 그의 표정이 계속 생각났다.

이진은 다시금 감정이란 이성과 논리로는 제어할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사실은 그렇게 나쁜 애가 아닐지도 모르는데.’

자신이 상처받았기에 승현에게 모질게 말해도 논리적으론 괜찮을 것 같았으나 수많은 영화의 주제처럼 복수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를 대하는 심정만 복잡해졌다.

‘내가 싫어한다고 한 말에 상처를 받았다면……. 내가 정말 쓰레기네.’

승현은 이진이 우승 후보라서 다가온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선한 인간이라 생각하고 친해지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 밑에 깔린 진심이 실제론 어떨지 확신할 수 없지만, 이진은 승현이 미열처럼 머리를 굴리고 줄을 타는 성격은 못 될 거란 걸 알았다. 그리고 아마 그런 잔머리를 굴릴 줄 알았더라면 그와 이 정도로 갈등을 빚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진이 어느새 또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 있는 동안 대화는 산으로 향해 있었다.

“요즘은 이진이 같은 왕방울 눈에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한 타입이 먹힌다니까? 만찢남 몰라?”

“고전은 영원하다고. 승현이 형은 약간 성스러운 매력이 있잖아.”

“맞아. 그림체 차이는 좀 있지만 승현이도 충분히 순정 만화에 나올 법하게 생겼지.”

누가 시작한 주제인지는 몰라도 그들은 이진과 승현의 외모를 객관성과 대중성이라는 지표 아래 분석하고 있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두 사람이 나름 좀 생겼다 하는 연습생을 사이에서도 유독 눈에 띠는 외모인 데다 지금처럼 대놓고 얼굴 이야기를 해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승현만이 그러든 말든 무관심했고 이진은 마침 딴생각 중이었던 것뿐이지만.

“요즘은 아무래도 주변 남자들을 대입하기 쉬운 타입이 인기니까.”

“이진이야말로 주변에서 찾아보기 드문 타입 아니냐? 혼자 있으면 잘 안 느껴지는데 옆에 다른 사람 오면…….”

“안 그래도 쟤 평소에 얼평 엄청 당했다고 외모 언급하는 거 싫어하잖아.”

“헉, 진짜? 그럼 이런 얘기도 싫어하겠네. 딴생각하고 있는 틈에 빨리 다른 얘기하자.”

다행히 이진은 못돼 먹은 자신을 반성하느라 다른 세상을 헤매던 중이었기에 그들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슬슬 마무리해 주세요.”

한참 삼천포로 빠지던 수다는 제작진의 개입으로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팀원 중 찬우만이 지방 출신이라 음악 방송 준비는 서울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그간 몸에 익혀 둔 감각이 사라지지 않도록 연습을 쉬지 않아야 했고 무엇보다 새로운 팀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1라운드는 다음 주 토요일부터 총 3화에 걸쳐 방송된다. 다음 촬영이 시작되기 전까지 남는 한 달간 중 참가자들에겐 첫 2주간 휴식 기간이 주어진다. 나머지 2주 동안은 스폰서 행사에 참가하거나 편집 중 필요한 인터뷰 영상, 그리고 홈페이지에 실시간으로 풀릴 서비스 컷의 촬영 스케줄이 예정되어 있었다. 음악 방송에 출연하는 멤버들은 휴식 기간 중 첫 주를 연습에 할애하는 것이다.

빠듯한 일정이지만 시청자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투표 시스템을 고려한다면 이것도 아주 감지덕지인 수준으로, 다음 라운드의 촬영이 순위 발표식 이후여야만 한다는 방송의 특성 상 앞으로의 일정은 더욱 더 숨 가쁘게 진행될 터였다.

“이진아, 너 혹시 남는 방 없냐.”

“나 손바닥만 한 원룸 살아.”

“승현아…… 남는 방 없어?”

“난 여행 갔다고 거짓말하고 참가한 거라. 혹시 돈 부족하면 빌려 줄 수는 있어.”

“아니다, 됐다. 미열이는 남는 방 없으려나…….”

서울로 가는 버스 안에서 찬우가 초조하게 말했다. 숙소야 잡으면 그만이지만 아무래도 타지에서 혼자 생활하는 게 불안한 모양이었다.

“걘 누나랑 같이 살아서. 정 안되면 우리 집에 와. 식구가 많아서 불편하긴 하겠지만.”

승현이 찬우를 초대했지만 앞선 대화에서 이미 그가 손님을 꺼려한단 걸 알아챈 찬우가 정중히 거절했다. 찬우는 마찬가지로 지방에서 올라온 진영에게 연락을 해 보겠다며 한참 핸드폰을 붙잡고 말이 없었다. 자연히 승현과 이진 사이에도 침묵이 오갔다.

“형, 혼자 살아요?”

침묵을 깨고 승현이 물었다. 이진은 찬우를 의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럽네요. 저도 독립하는 게 꿈이에요.”

“가족이랑 사는 게 좋은 거지.”

“그런가요?”

대수롭지 않은 말이었지만 오랫동안 외로움에 저며진 이진은 아물지 않은 상처를 찔린 것처럼 가슴이 시큰거렸다. 혼자 사는 게 좋지, 가족이랑 사는 게 뭐가 좋냐며 더 캐물어 올 것 같던 승현은 짧은 대답 이후 별다른 말이 없었다.

***

“이진아!”

저녁, 번화가 한복판에서 단연코 시선을 끄는 길쭉한 청년들이 이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진은 자신을 향해 몰리는 시선에 고개를 푹 숙이고 느릿느릿 걸어갔다. 어쩌다 보니 죄다 까만 옷 투성이라 멀리서 보면 목탄들이 종종대며 자기들끼리 뭉쳐 있는 것 같았다.

혼자 있어도 한 번쯤은 뒤돌아볼 외모인데 다 같이 몰려다니자 아이돌이나 이 근처 모델 기획사 사람들인지 궁금해하는 시선들이 뒤따랐다. ‘촬영 중인가? 카메라 보여?’ 하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첫 방송을 함께 보기로 한 그들이 잡은 약속 장소는 미열이 버스킹을 하던 ‘예술 길목’이었다. 서울 한복판이라 적당히 공평한 장소이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윌리엄의 삼촌이 하는 가게가 이 골목에 있어 대형 TV로 방송을 함께 볼 수 있었다.

“오랜만이다.”

“일주일 만인 걸, 뭐.”

“맨날 얼굴 보던 사이에 일주일이면 아주 오랜만이지.”

미열과 눈을 맞추고 대화를 하는데 찬우가 대뜸 다가와 이진을 껴안았다. 찬우는 평소 남을 안을 때면 상대편의 뒤통수를 잡고 제 가슴팍에다가 대는 버릇이 있는데 이번에는 숨도 못 쉴 정도로 강하게 껴안았다. 이진은 목 졸린 소리만 내다가 찬우의 정강이를 발로 차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이진이 얼굴이 새빨개져서 씩씩대는데도 찬우는 당장에라도 뽀뽀를 퍼부을 것처럼 사랑스런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무언가 들은 게 있는지 옆에서 윌리엄과 진영이 찬우를 손가락질하며 웃었다.

“방금 방송 봐서 그래.”

지방에서 올라온 찬우와 진영은 잠깐 윌리엄네에 얹혀 살게 되었다. 오랜만에 본 세 사람은 방송 때보다도 더 허물없이 친해 보였다.

“얘 어제 음방 다녀와서 지가 실수한 게 분명한데 다들 아무 말도 안 한다고. 언급할 수도 없는 실수였니, 뭐니 하면서 거의 울다 잤거든. 그런데 오늘 VOD 찾아서 보니까 네가…….”

진영이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제야 이진은 찬우가 이러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어제, 이진과 찬우를 비롯한 일곱 명의 멤버들은 드디어 음악 방송 무대에 올랐다. 이진은 흔히 말하는 ‘출근길’을 지키는 행렬도, 카메라 뒤 수많은 아이돌들의 민낯도 이날 처음 보았다.

아직 데뷔는 하지 않았지만, 방송국 마크가 붙은 벤에서 우르르 내린 일곱 명의 훤칠한 청년들은 멀리서 봐도 아이돌이었다.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스태프가 건네준 모자와 마스크를 꾹꾹 눌러쓰고 고개를 푹 숙인 채 후다닥 걸었지만, 아이돌을 하루 이틀 보는 게 아닌 팬들의 매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뒤통수에 카메라를 하나 달고 이동 중이었다.

“뭐야. 신인인가? 예능?”

“그 SSTV에서 새로 한다는 오디션 프로 아니에요?”

“헐, 맞는 것 같은데요? 맨 앞에 센터 닮았어.”

신기하게도 떠드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내 얘기는 귀에 쏙쏙 들어왔다. 이진은 새삼 자신이 출연한 방송이 첫방 이전부터 얼마나 큰 화제를 불러 모았는지 실감했다. 공식 티저로 단체 무대 영상이 공개 된 첫날, 방송국 홈페이지가 다운됐다고 한다.

“센터, 걔 이름 뭐더라? 찬…….”

“찬우요. 한찬우.”

이름이 불린 찬우가 몸을 움찔 떨었다.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느끼지 못할 정도였지만, 그날 생각보다 태평한 다른 사람들에 비해 아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서울에 올라와 있던 찬우는 많이 불안해 보였다.

“괜찮아?”

아무리 데뷔 무대 당일이라 해도 찬우가 이렇게까지 동요하니 이진마저 이상함을 느꼈다. 찬우는 흔히 말하는 무대 체질이었다. 무대의 압박감과 스릴을 즐기고 뭐 하나라도 더 보여 주지 못해 안달인, 알게 모르게 이진과 동류였다.

“찬우 형. 바람 좀 쐬고 올까?”

평소 눈치 없는 찬우를 그다지 반기지 않던 승현이 그를 따로 데리고 나가서 달래 주고 오기까지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찬우는 그나마 안정을 찾은 듯 보였으나 여전히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무대에서 엄청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리허설을 아슬아슬하게 넘긴다 싶더니, 1절과 2절 사이 간주 구간 독무를 완전히 놓쳐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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