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먼저 정신을 차린 이진이 살짝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했다.
“……어디까지 했지?”
“제가 형을 왜 좋아하는지 얘기했었어요.”
“얼굴, 이었나?”
“아니에요.”
이진은 살짝 짜증이 섞인 승현의 목소리에 조금 놀랐다가 이내 화가 났다.
‘지가 갑자기 여기서 화를 왜 내?’
이진의 눈초리가 매서워지는 걸 느꼈는지 승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는 형이 다정한 사람이라서 좋아요. 성실하고, 떳떳하고, 배려가 자연스러운 사람이라서요.”
“……그런 얘기를 갑자기 왜 하는 건지 모르겠어.”
“형이랑 잘 지내고 싶어서요. 비록 형이 저를 싫어한다고 해도…… 혹시 서로 오해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서로 원하는 바를 얘기하고 상대를 이해한 뒤에 관계를 조율하자는 뜻이라면 이진도 환영이었다. 승현은 제법 이 관계를 복구하기 위해 필사적인 것 같고 이진은 망가트리지 않는 데엔 동의했으니 적당한 타협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좋아. 그럼 나도 내 생각을 말할게. 우선 나는…… 너뿐만 아니라 다른 애들이랑도 그렇게 가까이 지낼 생각 없었어.”
승현은 의외의 말을 들은 사람처럼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이진은 멈추지 않고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했다. 적당히 상대해 주려고 했으나 그래서는 승현과 무난한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할 듯했다.
“필요한 만큼만 가까워지는 게 뭐가 나빠.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지. 하지만 난 그럴 여유가 없어.”
“……알았어요.”
“그리고 솔직히 너랑은 별로 잘 맞는 것 같지도 않고. 여태까지 내가 널 좋게 볼 이유도 딱히 없지 않았니?”
이진이 말을 이을수록 승현은 침울해졌다. 이진의 시점에서 본 승현은 게으르고, 귀찮게 굴고, 딱히 팀에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험담을 하다가 들키기까지 했다. 승현은 뭐라도 반박하고 싶은 듯했으나 이진은 한 손을 들어 아직 말이 끝나지 않음을 알렸다.
“미안하지만 처음부터 너랑 같이 있는 매 순간이 스트레스였어.”
이진은 문득 어쩌면 승현이 이렇게 깊은 대화를 바랐던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까지 있었던 그와의 갈등 중 수면 위로 도드라진 건 휴게실에서 언성이 높아진 일이 전부였고 그조차도 리허설 때문에 예민했다는 말로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 외엔 전부 이진의 내면세계에서 벌어진 일이다.
승현은 아무것도 몰랐다. 이진이 승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째서 거부하고자 하는지.
“하지만 너랑 아예 안 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까, 적당히 이 정도 거리만 유지하고 살았으면 좋겠어.”
말하고 보니 참 깔끔하고 좋았다. 이진이 스스로 찾아낸 모순점. 예를 들면 인간관계가 그렇게 무 자르듯이 깔끔히 잘려 나가는 게 아니라던가 하는…… 근본적인 고찰을 토대로 파고든다면 대화가 길어지겠지만, 보통 이 정도쯤 말하면 상대는 두 손 털고 포기한다.
실제로 그렇게 되느냐 안 되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면 마는 거고, 혹시라도 그런 관계를 유지하고자 쌍방에서 노력한다면 좋은 거였다. 그의 입장에선 아주 이기적이고도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한 결론이었다.
“너, 내가 널 싫어해도 괜찮다며.”
승현의 몸이 살짝 움찔거렸다. 순간 그를 상처 입혔다는 생각에 쾌감이 머리를 짜릿하게 울렸다.
‘미친 건가……?’
인간으로써 마땅히 경계해야 할 가학심은 상대가 선승현이 되니 고삐가 풀려 마구 날뛰었다. 이진은 맹세코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고 할 계획도 없었다. 이 모든 일은 다분히 충동적이었고, 이진 본인도 그 사실을 알았다.
스스로에게 당황한 이진이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점을 전부 고친다고 한 거 말이야. 가족이나 10년 지기 친구도 아니고 굳이 우리가 그정 도 모험을 감수해 가며 친해질 노력을 할 필요가 있을까? 나에게도 너에게도 좋지 않은 방법 같은데.”
말을 마친 이진이 승현을 힐끔 바라봤다. 그는 이제 책상 위에 올린 채 서로 맞붙인 제 두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상처받은 표정이지만, 끝내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던 승현이 조용히 답했다.
“……맞는 말이네요.”
이렇게 말을 빨리, 그리고 많이 한 것은 오랜만이었다. 보통은 흥분해도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차분한 말투를 구사하려 노력하는 편이었는데, 선승현은 이렇게 다소 강압적으로 말해야 더 잘 알아듣는 것 같았다. 이진은 좋은 신호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좋게 넘어간 일을 왜 자꾸 끄집어내서 불편하게 하는지 모르겠어. 내가 너랑 미열이 대화를 실수로 듣고 굳이 언급하지 않은 건 두 사람에 대한 배려였지 추궁당할 만한 일이 아니잖아.”
승현은 작은 미소를 지었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표정에 이진의 심장이 순간 철렁였다.
“그건 배려가 아니라 회피에 가깝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식으로 내 행동을 넘겨짚어서 단정 짓지도 말아 줘. 불편해.”
“알겠어요.”
승현이 얌전히 대답했다. 그리고 이진은 승현을 이겼다는 희열을 느꼈다. 이성적인 성인으로써 느끼고 싶지 않은 저열한 감정이었지만, 가슴을 부풀게 만드는 건 사실이었다. 의도한 게 아니더라도 싫어하던 사람을 말로 상처 입히고 발밑에 꿇어앉히는 쾌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두 손을 겹친 채 엄지손가락으로 손등을 문지르던 승현이 시선을 다시 이진에게로 돌렸다.
“그래도 나는 형이 먼저 말해 줬으면 했어요. 그래야 내가 변명을 할 기회라도…….”
무언가 또 말이 이어지려다 멈췄다. 그가 다시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이렇게 끝이에요?”
“뭐가?”
“형이 바라는 것처럼 더 친해지지도 않고, 형은 계속 날 싫어하는 채로 끝이냐고요.”
결론이 그렇게 나던가? 이 대화를 통해 자신이 바라던 결말은 무엇이었나. 이진은 그게 무엇이었는지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 목적이 없었던 건가. 그저 감정을 쏟아 내는 데에 급급했을 뿐이었나.
“그렇게 말하니까 이상하다. 그냥 서로 무리해서 노력하지 말자는 거지. 친구 사귀기 말고도 우린 해야 할 일이 많잖아.”
“그렇네요.”
이진은 짐짓 어른스럽게 깔끔한 결말을 바란다는 듯 지어 내어 얘기했다. 그러자 승현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살짝 아래로 내리깐 눈은 침울해 보였고 손끝은 간간히 테이블 표면을 긁으며 심란함을 드러냈다.
방 어디에 달려 있는지 모를 시계가 똑딱거렸다. 이진은 슬슬 자리를 털고 일어나 샤워실로 향하고 싶었다. 벽면에 붙어 있을 시계를 보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확인한 다음, 화들짝 놀라며 별말 안 했는데 이렇게 시간이 금방 간다고 태연한 척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진은 고민하는 승현을 뒤로하고, 최후 변론 아직 멀었니? 나 우선 씻고 나올 테니 그전까지 준비해 둬, 하고 너스레를 떨 만큼 강심장이 아니었다.
마침내 승현이 초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면 하나 내기해요.”
“내기?”
언제나 그랬 듯이 승현의 말은 이진의 예상을 빗겨 나갔다. 상상을 초월한다고 해야 하나 서로의 핀트가 잘 맞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의식하고 나니 그와 이진은 참 다른 사람이었다.
“제가 분명 형이 나를 싫어해도 괜찮다고 말하긴 했지만, 막상 바로 앞에서 싫어한다는 말을 들으니 생각보다 상처라서요.”
“그건…… 미안.”
“형도 내가 싫다고 하고, 나도 날 싫어하는 형을 보는 건 상처일 뿐이니까. 그러니까 내기해요.”
그렇게 말하는 승현은 이미 머릿속으로 모든 계산을 끝낸 것 같았다. 무표정한 얼굴만 보아서는 의도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그는 이진을 시험하려는 듯 보이다가도 한편으로는 모든 걸 포기한 사람 같아 보였다.
“만약 우리가 마지막 라운드까지 살아남아서 같이 데뷔를 하게 된다면…… 둘 중 하나는 팀을 떠나는 걸로.”
미래를 아는 이진에게는 충격적이고도 무거운 제안이었다. 내기를 제안한 승현 본인은 모르겠지만, 그는 별다른 이변이 없다면 이대로 상위권을 유지하다 가장 마지막에 2등과 압도적인 표 차이를 벌리며 1등을 거머쥘 예정이었다. 물론 이진은 그의 크나큰 이변이 되어 줄 작정이었지만, 그를 감안하더라도 상당히 대가가 큰 내기였다.
‘데뷔를 고작 내기의 대가로 써먹을 만큼 우습게 아는구나. 역시…… 함께 경쟁하는 동료들도, 응원하고 믿어 주는 팬들도 전혀 생각하지 않는 거야.’
데뷔는, 무대를 오르는 것은, 이진에게는 살아온 생을 돌이킬 만큼 간절한 꿈이었다. 이렇게 자존심 싸움을 하며 쉽게 걸어도 좋을 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데뷔 후에도, 그렇게 쉽게 무대를 내려올 수 있는 거겠지.’
이진은 차가운 이성으로 승현을 평가했다. 요새 그가 얌전해서 잊고 있었지만, 사실 승현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냉정하게 상황을 바라보자면 사실 이건 이진에게 좋은 기회였다. 고지식하고 직선적인 승현의 성격을 보아, 그는 결코 허세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게 아닐 것이다. 자기가 뱉은 말은 분명히 지킬 테니, 애초에 승현과 함께 데뷔 할 마음이 없던 이진으로써는 제 손을 더럽히지 않고 가장 쟁쟁한 경쟁자를 하나 제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떠나는 사람은 어떻게 정할 건데?”
“공평하게 순위가 낮은 쪽이 떠나면 되겠죠.”
그리고 만약 이진이 내기에서 패배한다면 그냥 입을 닦고 말아 버리면 그만이니까 손해 볼 것도 없었다. 계산을 마친 이진은 저도 모르게 후련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이진이 쉽게 답하자 승현은 입꼬리를 올려 웃으면서도 씁쓸한 속내를 숨기지 못했다. 이진은 뒤늦게 아차 했지만 이미 튀어 나간 경쾌한 대답을 도로 주워 담을 방법은 없었다.
“방송하는 동안엔 계속 친한 척해도 되죠? 그게 서로한테 윈윈일 테니까.”
“물론이지. 적당한 거리만 지켜 준다면…… 나도 널 굳이 밀어내고 싶지 않아.”
“전 이제 형한테 잘 보이려는 노력은 하지 않을 거예요. 제 맘대로 굴 거고요.”
“어, 그래…….”
“형은, 정말 한결같네요.”
그러는 승현은 너무 들쭉날쭉했다. 방 안에서와 바깥에서의 모습이 다르고, 미열이 있을 때와 없을 때, 그리고 이진과 단둘이 남았을 때도 각각 태도가 달랐다. 사람이 지조가 없었다.
‘그러니 사람들이 하는 말이 다 다르지.’
이진은 세간의 평이 들쭉날쭉하던 승현을 떠올렸다. 그사이 승현이 먼저 씻어도 되냐 양해를 구하고 일어났다. 이진도 씻고 싶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이 대화의 승자는 이진이었기에 패자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었다.
수건과 옷가지를 챙겨 들어가는 승현을 보다가 이진은 불현듯 질문이 떠올랐다.
“승현아. 근데 아까 다른 사람은 다 되고 너만 안 된다고 한 게 뭐야?”
이진은 다른 사람들을 아직 이진의 선 안으로 들여놓지 않았다. 때문에 대하는 태도도 다들 비슷했고, 그들도 이진의 그 점을 눈치채고 몇 번 언급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승현이 본인만 안 된다며 억울해하기까지 한 부분이 뭔지 이진은 알지 못했다.
승현이 욕실 문을 붙잡고 말을 골랐다. 작게 짜증이 섞인 숨을 내쉰 그가 이진을 살짝 흘겨보며 대답했다.
“……형의 이해를 받는 일이요.”
그러고는 욕실 문을 쾅 닫았다. 잘 보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거라더니 설마 작은 예의들조차 전부 어디다 팔아먹고 올 거란 뜻이었나 싶어 잠깐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래도 이진은 모처럼 되찾은 평화를 만끽하며 의도적으로 승현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기억 속에서 지워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