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윌리엄과 진영은 각각 4등, 3등에 그쳤다. 시무룩해 있더니 각자 실수가 있긴 했던 모양인지 다른 팀원들에 비해 개인 점수가 낮았다. 서브 보컬3에서는 그 선남 팀의 허동규가, 메인 래퍼에서는 사형수들 팀의 제이슨 리가 1등을 거머쥐었다.
음악 방송 출연권을 얻은 멤버들이 가장 앞으로 나와 일렬로 정렬했다. 익숙한 얼굴이 많아 기쁜 마음, 아쉽게 기회를 놓친 멤버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 이제야 제대로 된 출발선에 섰다는 느낌. 이진의 마음속에서 다양한 심경이 어우러졌다. 당장 해결된 문제는 하나도 없었으나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본 촬영을 마치고 팀별 사진 촬영이 있었다. 오늘은 사실상 팀의 해체였다.
“소감이 어떠세요?”
“조금 아쉽긴 하지만 우리 팀이 1등 최다 배출 팀이니까 만족하고 있어요. 저를 믿고 선택해 준 이진이랑 미열이, 그리고 세대 차이 나는 형이랑 잘 놀아 준 승현이랑 하늘이. 같이 늙어 가는 처지인 윌리엄이랑 제 몸부림을 간신히 춤으로 바꿔 준 찬우……. 좋은 추억을 만들어 준 친구들한테 정말 고맙고, 갚진 경험이었습니다. 얘들아, 사랑한다!”
그래서 그런가. 진영이 낯부끄러운 소리를 해도 타박하는 이 하나 없었다. 윌리엄이 가운데로 손을 내밀자 하늘이 그 위로 손을 착 쌓았다. 찬우와 진영이 차례로 손을 모으고 미열도 민망하다고 소리 지르면서 손을 올렸다. 이진이 민망한 표정으로 머뭇거리자 승현이 막무가내로 손을 잡아다 위에 턱 올렸다.
낮에 있었던 일 이후로 선승현이 점점 막 나가는 게 느껴졌지만 지금의 이진은 한없이 너그러웠기에 그 무례를 눈감아 주었다.
“아자, 아자!”
“이진 님과!”
“아, 미쳤어! 그걸 구호로 쓰게?”
“지금 이진 님 무시해? 이진 님과!”
결국 이진을 제외한 모두가 노예들을 외치고 나서야 승현은 이진의 손을 놓아주었다. 자유의 몸이 된 이진은 새빨개진 얼굴을 사람들과 카메라에게서 숨기려 화장실이 급한 척 달려가려 했지만 하늘이 허리를 잡고 늘어져서 도망가는 데에 실패하고 말았다.
“형이 사실은 엄청 다정한 사람인걸 알고 있어요.”
“사실은, 이 뭐야! 이진이는 척 봐도 정이 흘러넘치는데.”
“그건 좀 아니다. 나 처음에 실수할 때마다 유이진이 카메라 없는 데에서 한 대 치는 거 아닌가 하고 엄청 졸았는데…….”
“난 선승현한테 진짜 맞았다고.”
잔뜩 풀어진 팀원들의 만담이 이어질수록 이진은 당장에라도 소멸하고 싶었다. 이진을 소재로 한 말장난이 우스운지 승현도 평소의 무뚝뚝한 모습은 어디론가 보내고 큰 소리로 웃어 댔다.
“그럼 진짜로 사진 찍을게요. 진지하게 갑시다.”
그러자 다들 준비라도 한 듯 멋있지만 자연스러운 포즈들을 잡았다. 그 속에서 이진 혼자 뻣뻣하게 굳었다. 준비할 시간도 없이 포즈를 잡으라고 하다니 역시 연예계는 혹독했다. 이진은 당장 내일부터 거울 보면서 멋있는 포즈 연습하기 특훈에 돌입해야 하나 진심으로 고민했다.
그때 누군가의 손이 이진의 뒤통수를 꾹 누르고 팔꿈치로 등을 밀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 셔터가 눌리며 플래시가 터졌다. 이진은 고개를 돌려 손의 주인공을 찾으려 했지만 전원이 팔만 뻗으면 그의 등에 손을 댈 수 있었던 터라 찾을 수 없었다. 다들 묘하게 시치미를 떼서 추궁할 수도 없었다.
“아, 첫방 진짜 기대된다.”
마무리 촬영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대기실 복도를 걷다가 하늘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내일이면 공식적인 합숙 일정이 끝이 나고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바깥에는 벌써 프로그램의 예고편이 돌고 있다.
Winner Takes All, 당신의 선택할 승리자.
아직 촬영이 마무리된 게 아니라 제대로 된 티저가 나온 건 아니지만 타이포그래피만으로 제작된 티저도 꽤나 화제를 모았다고 한다.
“우리 첫방 같이 보자. 언제지?”
“음방 다음 날일걸?”
“토요일 8시!”
저마다의 아쉬움이 남았지만, 한 달 동안 준비했던 무대가 끝났단 해방감에 다들 들떠 있었다. 멤버들은 저들끼리 왁자직껄 떠들다가 갑자기 약속이라도 한 듯 다 같이 이진을 돌아봤다.
“이진이도 같이 볼 거지?”
“유이진 지금 기분 좋아서 무조건 오케이야.”
솔직히 첫 방송을 보면서 기분이 그렇게 좋을 것 같지 않아 거절하고 싶었다. 마음에 준비가 될 때까지 보고 싶지도 않았고 가능하다면 소식을 전부 차단하고 마지막 방송까지 고립되고 싶었다.
그런데 이진의 머뭇거림을 읽은 승현이 멋대로 입을 열었다.
“가위바위보해. 안 내면 진 거 가위바위보!”
구령에 맞춰 모두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어린 시절을 홀로 보낸 이진만 순발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어?”
“와, 승현이 진짜 천재다. 유이진 다루기 천재.”
“토요일 7시에 만나기!”
“뭐야? 잠깐! 이러는 게…….”
“약속 끝! 끝!”
찬우가 신나서 “끝!”을 외쳤다. 다짜고짜 원치 않는 약속이 잡혀 버린 이진이 허둥대며 상황을 수습하려 들었지만, 승현이 적절하게 끼어들어 말을 막았다.
“형. 붕붕이…… 그, 저희 집 강아지 닮았다고 한 거 취소할게요. 죄송해요.”
“너 그런 말도 했냐? 이진이가 속상할 만했네.”
또 뜬금없는 소리였다. 이미 일단락된 사건이 아니었던가? 왜 또 끄집어내는 거지? 의문이 일어 눈썹을 찌푸렸더니 승현이 마저 말을 이었다.
“붕붕이 말고 우리 막내 수현이 닮았어요.”
“수현이?”
미열이 갑자기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자기들만 아는 대화를 하길래 아랫입술을 깨물고 기분 나쁜 티를 냈더니 미열이 다시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푸학, 하고 웃어 댔다. 이진은 그들의 허물없는 태도가 당황스러웠다.
“아, 좀 닮긴 했는데…….”
“무슨 뜻인데?”
찬우가 이진 대신 물었다.
“수현이 승현이네 막내. 이제 일곱 살이야.”
미열과 승현은 웃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차마 웃지 못하고 이진의 눈치를 살폈다. 이진은 분노보다는 황당함이 커 화도 못 내고 눈만 커다랗게 떴다.
“내가 유치하단 뜻이야?”
“아니요. 형 귀엽다고요.”
칭찬인지 우롱인지 모를 말에 얼굴에 열이 몰렸다. 웃어야 할지 화내야 할지 갈팡질팡하다 보니 숙소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기숙사에 도착한 팀원들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오늘 촬영이 길어져 참가자 전원의 합동 무대 촬영은 내일로 미뤄졌고 그 외에도 방송엔 나오지 않지만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될 클립 영상의 촬영이 예정되어 있었다. 내일의 일정이 끝나면 참가자들은 공식적으로 귀가를 허락받는다.
음악 방송 출연자들은 남은 시간 동안 모여서 연습을 해야 했는데, 이곳이나 서울 방송국 내 연습실을 대여해 준다고 했다. 자세한 건 모든 일정이 끝난 후 모여 의논할 예정이라고 전해 들었다.
방에 들어오자 여태까지 어떻게 버텼는지 잔뜩 지친 몸이 축 늘어졌다. 찬우가 가장 먼저 씻으러 들어갔고 미열은 가족과 전화를 하러 갔다. 단둘이 남은 방 안에서 승현과 이진이 서로를 바라봤다. 방금까지 이진에게 장난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승현은 진지하고 또 조심스러워 보였다.
“……형은 나랑 할 말이 남았죠?”
한참을 말없이 뜸을 들이던 승현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러게. 네가 뭔 말을 할지 좀 무섭다.”
이진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모든 걸 묻고 한 고비 넘겼다는 기쁨을 누리고 싶었다. 이진은 승현의 말에 적당히 고분고분 대답하고 아까는 내가 너무 긴장해서 예민해져 있었다고 시인할 생각이었다. 이번 일은 여기서 그만 끝내고 싶었다.
“저도 그래요.”
승현은 아까처럼 말을 술술 내뱉지 않았다. 오히려 맨 처음 만났던 무렵처럼 쓸데없는 말을 아끼고 단어마다 조심스럽게 골랐다. 이진은 점점 숨이 거칠어지는 듯해 최대한 고르게 호흡하려 노력했다. 그런데 한번 의식하고 났더니 들이쉬고 내시는 숨결마다 긴장이 서렸다.
“우선, 형 기분을 상하게 한 건 죄송해요. 그런데 진짜 고의는 아니었어요. 혹시 오해하실까 봐요.”
“알았어.”
“그보다 저는…… 제가 그 정도 말은 해도 되는 사이인 줄 알았어요.”
“……그럴 수도 있지.”
이진은 처음 계획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전부 이해한다는 투로 꼬박꼬박 대답했다. 승현이 그 정도 말은 해도 되는 사이인 줄 알았다고 했을 땐, ‘그런 사이가 어디 있어?’ 하고 삐뚜름한 생각이 들었지만, 뭐 본인이 그렇게 생각했다고 하니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무엇보다 오늘은 이진이 자신의 포지션에서 1등을 한 날이기도 하고, 모처럼 감동적인 상황을 여러 번 연출한 것 같으니 좋은 기분으로 잠들고 싶었다.
“사실 제가 무슨 노력을 해도 얻을 수 없는 자리였는데 말이죠.”
“알았…… 뭐?”
“형이 저에 대해 알 수 없는 편견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서 대체 어디부터 잘못했는지, 언제 제가 형 눈 밖에 난 걸지 차근히 거슬러 올라가 봤어요.”
간신히 고르게 유지되던 이진의 숨이 단번에 멎었다. 이진의 호흡이 잠깐 멎은 찰나를 귀신같이 잡아챈 승현은 작은 한숨과 함께 “역시나…….” 하고 중얼거렸다.
“이상하잖아요. 똑같이 만나서 똑같이 생활하는데, 백미열은 되고 나는 안 되는 부분이 있다는 게. 더 지켜보니까, 걔만 특별 취급을 받는 게 아니더라고요. 다른 사람은 전부 되고 나만 안 되는 거였어요.”
“지금 내가 아무런 이유 없이 널 미워하고 배척했다고 말하는 거야?”
“이유야 있을 수 있죠. 지금 당장 시작한대도 여태까지 찾지 못한 이유들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형은 내가 그 모든 이유들을 고쳐 와도 새로운 이유를 찾아낼 것 같아요. 아니에요?”
정곡을 찔러 오는 승현의 말에 이진은 입을 다물었다. 이진이 승현을 싫어하던 이유는 과거 인생을 바꿀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쳐 버린 자신을 자책하고 원망하다 그 부정적인 감정을 쏟을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기회를 잡은 지금에서도 그를 좋아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이진의 비참함을 떠오르게 해서였다.
승현이 말실수를 하지 않았더라면, 제 행동을 강요하지 않았더라면. 또 이진을 몰아세우지 않았더라면…… 이진이 과연 승현을 받아들이고 과거의 기억 위에 새로운 관계를 쌓을 수 있었을까?
아니었다. 애초에 이진은 승현과 친해지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 아예 친해질지도 모르는 상황 자체를 방지하고 싶었다.
“저는 처음부터 형한테 호감이 있었어요. 형은 잘생겼고 미열이한테 하는 거 보니까 성격도 좋아 보이고……. 그냥 누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때 덜커덕, 샤워실 문이 열리고 찬우가 머리를 털며 나왔다.
“아, 시원하다. 너네도 빨리 씻……어.”
찬우와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눈치가 없어도 지금의 대화가 아까 말다툼의 연장선임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나는 오늘 윌리엄네서 자야겠다. 잘 자!”
찬우는 욕실 슬리퍼를 신은 채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덜커덩, 쾅! 현관문이 닫히고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이진과 승현은 멍하니 찬우의 잔상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