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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24화 (24/173)

24화

무대에서 내려와 인터뷰 룸으로 향하던 이진이 팀원들을 돌아보는데, 다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진은 팀원들이 혹평에 약한 건지 실제로 무대가 별로였던 건지 갑자기 헷갈리기 시작했다.

“얘들아 미안하다……. 다들 너무 잘해 줬는데, 내가 너무 욕심만 앞섰나 봐.”

“나도. 그냥 잘해야겠다고 열심히 한 건데 내가 다 망쳐 버렸어.”

진영과 찬우가 울상을 짓고 사과했다. 다들 말은 안 하지만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 와중에 선승현은 혼자만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어 괜히 얄미웠다.

“왜? 우리 잘하지 않았어?”

“이진아 괜찮은 척 안 해도 되니까 그냥 화내.”

“아니, 내가 왜 화내? 우리 잘한 거 아니야?”

“방금 우리 욕 엄청 먹고 왔거든? 또 딴생각했어?”

“방송 조미료 같은 거 아니었어?”

“얜 또 뭐래.”

여태껏 이진을 어색하게 대하던 미열이 예전처럼 그의 사차원적인 눈치를 구박했다.

“팀워크를 보는 경연이었는데 조화가 안 좋았단 거만큼 안 좋은 소리가 어디 있어?”

“왜. 어차피 팀워크 같은 거 전부 허울이라고 이미…….”

진심으로 당황한 이진이 변명을 하다가 여태껏 비밀로 해 오다 본인도 반쯤 잊고 있던 정보 하나를 발설해 버렸다.

“뭐?”

“아니, 전에…….”

더는 감출 필요도 느끼지 못해 당시 상황을 설명하려고 했으나 때마침 카메라맨이 렌즈를 들이밀며 인터뷰 룸으로 들어오는 팀을 찍었다.

“기분이 어떠세요?”

“애들한테 미안하고, 제가 너무 욕심 부려서…….”

“아니, 진짜 왜 그래. 우리 정말 잘했다니까?”

진영이 다시 우울한 표정으로 카메라에다 대고 고개를 푹 숙이자 이진이 황급히 말을 막으며 위로했다. 어차피 결과가 나오기 전까진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으니 평소 습관대로 그냥 우울해하게 둬도 괜찮을 텐데, 왠지 그들이 혹평에 굴복하는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완벽한 무대는 아니었지만 후회할 만한 무대도 아니었습니다. 온 힘을 쏟은 만큼 어떤 결과가 나와도 납득할 수 있어요.”

승현이 깔끔하게 말했다. 이진의 심정을 훔쳐 듣고 베껴 적은 것처럼 속 시원한 말이었다. 이진은 저도 모르게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팀 정하는 날로 돌아가라고 해도 저는 이 멤버들 다시 그대로 데려올 거예요.”

이진은 드물게 여러 번 생각하지 않고 속내를 그대로 꺼냈다. 열정적인 무대 후에 찾아온 정신적 쾌감과 뇌 어딘가에서 분비된 아드레날린이 불러온 흥분에 근래 어느 때보다도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이진 님……!”

한마디도 없이 풀이 죽어 있던 윌리엄이 이진의 몸통을 덥석 끌어안았다. 그를 본 찬우가 대뜸 달려 들더니 이진의 뒤에서 팔을 뻗어 윌리엄까지 한 번에 안았다. 진영도 징징대는 소리를 내며 옆구리에 찰싹 붙었다. 의외로 눈물샘이 약한 하늘이 훌쩍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윌리엄의 어깨에 눌린 얼굴을 간신히 빼내자 어깨너머로 머뭇거리는 미열의 모습이 보였다. 이진은 멋쩍게 웃으며 양팔을 벌려 줬다. 그래서 미열도 조금 울먹거리는 얼굴로 윌리엄의 뒤에 고개를 폭 묻었다.

승현은 부르지도 않았는데 훌쩍이는 하늘을 데리고 와 윌리엄과 이진 사이에 억지로 끼워 넣더니 이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미열의 옆에 찰싹 붙었다.

마치 ‘이 정도는 뭐라고 안 할 거지?’ 하고 묻는 듯한 건방진 시선이었다.

“우승 팀은, 선남 말고 성남 팀입니다!”

촬영은 저녁을 훌쩍 넘어 밤 늦게까지 이어졌다. 대부분이 대기 시간이긴 했지만 다들 체력을 전부 소모해 지쳐 있었다. 그럼에도 카메라만 돌아가면 괜찮은 척 밝은 표정을 지어 대는 걸 보면 마음가짐만큼은 이미 프로라 할 수 있겠다.

“저건 무슨 개그냐?”

“약간 이해하기 어려운…….”

미열과 찬우가 박수를 치며 복화술로 속닥거렸다. 아쉽게도 이진의 팀은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 이진은 조화니 뭐니 하는 평가들을 납득하지 못했으나, 어느새 편집되어 무대 뒤 커다란 화면에서 재생 중인 그 팀 무대 영상을 보고 그들도 열심히 잘했다는 걸 인정했다.

“선남 팀은 멤버가 한 명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 공백을 서로 간의 신뢰와 우정으로 메워 더 파워풀한 무대를 선보였습니다.”

듣기 좋은 공치사가 늘어졌다. 제 칭찬은 몰라도 남의 칭찬에는 관심이 없는 이진은 밀려오는 졸음을 참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비록 분위기가 다시 화기애애해졌지만, 왠지 지금 같은 기분이라면 선승현한테 속 시원히 욕하고 프로그램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고 싶은 욕은 ‘그렇게 살지 마!’였다.

‘그러면 어떡해야 하나. 다시 작곡으로 취직자리를 알아봐야 하나?’

약 3년간의 작곡가 생활을 하며 느낀 점이 있다면 이진은 작곡에 조금의 흥미도 없다는 것이다. 성취욕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한때는 엄청나게 유명한 작곡가가 되어 모두를 놀라게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열심히 공부했지만, 실력이 늘어도 칭찬을 받아도 시큰둥하기만 했다.

하고 싶은 말이 생겨 구구절절 가사를 적다가도 이걸 말해 봤자 뭐 하냐는 생각이 들어 펜을 놓기 일쑤였다. 이진의 작업 대부분은 스튜디오에서 요구한 컨셉과 트렌드, 장르 등에 맞춰 기계적으로 코드를 나열하고 멜로디를 입력했을 뿐이라 애착이 생기지 않았다.

대부분의 곡 프로듀싱을 외부에 맡기기도 하다 보니 자기가 작곡한 곡을 못 알아들을 때도 종종 있었다. 특히 아이돌의 앨범 컨셉은 준비 과정에도 시시각각 변하는 유행 때문에 자주 뒤집혀, 수록곡이었을 땐 분명 발라드였던 곡이 타이틀곡으로 격상되며 갑자기 댄스곡으로 변하는 경우도 있었다.

선승현을 한 대 때리고 프로그램을 때려치운 뒤에, 미래의 히트곡을 베껴 스타 작곡가가 된 자신이 그를 빌빌거리게 만드는 상상을 하던 이진은 이어지는 목소리에 곧장 현실로 돌아왔다.

“그러면 다음으로, 포지션별 개별 점수를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심사 위원들이 번갈아 가며 진행했다. 평소의 얼굴 없는 남자 목소리만 들어오다가 말하는 사람이 보이니 참 반가웠다. 이진은 남자 목소리가 재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메인 보컬 포지션의 개별 점수입니다.”

스크린에 현란한 영상이 재생됐다. 하필 메인 보컬이 1번인 탓에 다른 생각에 한참 골몰하던 이진은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하고 주르륵 나열된 이름들을 마주해야만 했다. 뾰로롱 효과음과 함께 최하위 순위부터 이름이 공개됐다. 벌써 이름이 공개된 누군가는 침울해하고 다른 이들은 제발 자신의 이름이 제일 늦게 나오기를 바랐다. 이진도 자존심 때문에라도 1등을 하고 싶었다.

순위의 절반이 공개되었을 때도, 그리고 그 절반의 반이 공개되었을 때도, 심지어는 이름이 고작 두 개밖에 남지 않았을 때도 이진은 태연함을 유지했다.

마지막 이름이 공개되었다. 당연하게도 이진의 이름은 그들 중 가장 위에 있었다.

“악! 유이진!”

미열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팀 점수를 합계한 점수입니다.”

띡, 소리와 함께 화면에 집계된 점수가 단번에 변하더니 이름들이 위아래로 빠르게 이동하며 등수가 재배치됐다. 그럼에도 이진의 이름은 가장 윗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1등 유이진. 개별 점수 685점, 팀 점수 500점.]

팀 점수는 1등부터 순차적으로 700점씩 주어졌다. 사실상 1등을 한 팀 멤버가 가장 좋은 순위를 차지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으나 만점에 가까운 개별 점수를 받은 이진이 근소한 차이로 2등을 앞섰다.

“이진 씨는 솔직히 너무 잘하셔서 더 드릴 말씀이 없어요. 부족한 점이 있다면 그건 아이돌 준비를 너무 늦게 시작하셨단 것뿐이고, 지금은 멘토 대 멘티로 만났지만 만약 일대일로 이진 씨와 경쟁 프로그램에서 만났다면 저는 솔직히 제가 이길 거라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

평소에 이진을 예뻐하다 못해 찬양하던 멘토 조엘이 마이크를 쥐고 말했다. 모든 참가자가 모인 앞에서 듣는 최고의 찬사는 많이 민망하고, 심장이 당장 밖으로 뛰쳐나갈 것같이 설레고, 눈물이 찔끔 삐져나올 정도로 감동적이었으나 이진은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누르며 짧게 “감사합니다.” 하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만약 이진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1등이 되었다고 가정했을 때, 여기서 그 누군가가 제 감정을 주체 못 하고 신나서 날뛰었다면 이진은 정말 어두운 밤 뒷골목에서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싶을 만큼 그가 미웠을 것 같았다. 저와 같은 참가자가 분명히 있을 것을 알았기에 이진은 입술을 꼭 물었다.

다음 리드 보컬 순위에서 미열은 안타깝게 2위에 그쳤다. 조금은 아쉬워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미련이 그득하게 남지는 않은 듯했다. 팀 점수 600점을 받은 ‘잘난 게 죄라면 우리는 사형’, 줄여서 사형수들 팀의 강재규가 1위를 차지했는데, 개별 점수는 미열이 높아 더 아쉬웠다.

팀 센터를 맡은 찬우 역시 1등이었는데, 이상하게 센터조는 개별 점수가 하나같이 낮게 나왔다. 500점을 턱걸이로 넘은 찬우의 점수가 2등보다 무려 200점을 앞서 있었다.

“메인 댄서, 센터 포지션은 퍼포먼스의 중심을 잡는 역할이지 혼자서 주목을 받는 역이 아니에요.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간과하고 있어 아쉬웠습니다. 찬우 씨는 중심을 잡는다는 부분에선 조금 부족했으나 하이라이트를 다른 팀원들과 함께했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드렸습니다. 물론 실력도 더할 나위 없이 좋으시지만 컨셉과 퍼포먼스에 대한 고찰이 더 있다면 완벽한 센터가 될 것 같습니다.”

찬우는 이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깨달음을 얻었는지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연이어 승현도 1등을 차지했다. 승현은 무려 개인 점수 700점이라는 기염을 토했는데, 점수가 공개되자마자 이곳저곳에서 뇌물을 먹인 거 아니냐, 잘못 입력된 거 아니냐 하는 웅성임이 들려왔다.

솔직히 이진 또한 뭘 어떻게 했길래 만점을 받았는지 궁금해서 미칠 노릇이었으나 우선 웃음을 만들어 내며 열심히 박수를 쳤다.

“승현 씨는 흔히 말하는 스스로 빛을 내는 타입이에요. 자신의 역할과 위치가 어디인지 완벽히 숙지하고 있고, 힘을 분배하는 센스가 뛰어나요. 무엇보다 승현 씨는 이번 1라운드를 진행하며 엄청난 발전을 거뒀습니다. 타고난 걸로 오해할 수 있는데, 승현 씨의 노력을 옆에서 고스란히 지켜본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누구보다 큰 찬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평가의 말도 아주 호화로웠다. 이진은 속으로 이럴 거면 아까 팀 평가 때 왜 분위기를 조져 놓은 거냐고 투덜댔다. 그리고 저 멘토가 지켜봤다던 승현의 노력이 뭔지도 직접 보고 싶었다. 이진은 승현이 방에선 맨날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는 모습만 봐 왔고, 팀 연습에서 그다지 열정적으로 임하지도 않았기에 어디서 저런 고평가를 받아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하늘도 1등을 했다. 이쯤 되니 팀 점수가 의미 없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앞서 1등을 한 팀 멤버들의 개별 점수는 너무 형편없었다. 하늘은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제 이름을 보고 왈칵 눈물을 터트렸다. 하루에 몇 번을 우는 거냐고 찬우가 놀려 대며 달래 줬다.

“하늘 씨는 항상 잘 하고 계시는 거 알아요. 자신을 믿으세요.”

짧은 평가였으나 하늘에 대한 신뢰가 가득 느껴지는 코멘트였다. 하늘은 누구보다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멘토가 아닌 방송을 볼 시청자들에게 전하는 감사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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