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이진은 인정해야만 했다. 승현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바꾸지 않는다면 인간 대 인간으로써 만난 이 관계에서 이기는 건 언제나 승현일 것이다.
먼저 친절을 베풀었던 것도 이진이고, 이진이 다가온 만큼 다가오려는 승현을 밀어낸 것도 이진이다. 세상의 그 어떤 관계도 감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하물며 매일 얼굴을 맞대고 24시간 같은 장소에서 생활하며 여럿의 공통 지인을 두기까지 했는데, 승현이 이진을 아무런 사감 없이 대해 주길 바라는 건 너무 큰 욕심인 것이다.
싫어할 거면 완벽히 선을 긋고. 그도 아니라면 상대방에게 맞추려는 노력이 필요한데…… 이진은 아직 자신의 입장조차 정하지 못했다. 이진은 승현에게 미안했다. 동시에 이런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그가 싫었다.
‘선승현이 살아서 감정을 느끼는 인간이라 싫다.’
그게 이기적이고 상처받은 이진이 내린 결론이었다.
***
드디어 본 무대에 오를 차례가 왔다. 대기실에서 의상과 헤어를 점검받고 약간의 메이크업도 얹었다. 눈매가 멍한 편인 진영만 아이라인을 그렸고 대부분은 갈색 아이섀도로 얼굴 윤곽을 다듬고 명암을 뚜렷하게 넣었다.
“지금은 명암만 넣지만 앞으로 화장이 점점 더 화려해질 테니 기대하세요.”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이진의 눈 밑에 컨실러를 발라 다크 서클을 지워 주며 말했다. 거울 너머 이진은 평소에 비하면 지금도 아주 화려해졌다. 워낙 튀는 외모를 가져 조금만 손을 대도 다른 차원에서 온 듯 이질감이 들었다. 만화책을 찢고 나온 것 같다는 묘사가 착 들어 맞았다.
“7조 올라가실게요.”
“네! 가자, 얘들아.”
입술에 묻은 틴트 때문에 괴로워 입을 벌리고 있던 찬우가 제일 먼저 벌떡 일어나 대기실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그 뒤로 윌리엄과 미열, 하늘과 승현이 따라 나갔다.
“이진아, 가야지?”
“응.”
진영이 나가다 말고 이진을 바라봤다. 이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동료들의 뒤를 따라 걸으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벌써 리허설 두 번의 기회를 헛되이 낭비했다. 더는 실패할 수 없다.
이진이 과거로 돌아온 것은 인생에 딱 한번 찾아올 기적이었다. 그동안의 불운을 보상하듯 쥐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이번엔 반드시 완벽한 무대를 보여야 했다.
무대 뒤에서 마이크를 착용하고 마지막으로 다 같이 공연 내용에 대해 복기했다. 사소하게 어긋났던 타이밍을 하나로 통일하고 유독 새는 발음에 강세를 주었다. 각 파트마다 바라봐야 하는 카메라 위치 역시 확인했다. 그리고 당연히 모든 대화는 카메라에 의해 녹화되고 있었다.
“얘들아. 다들 큰 기대를 안고 참가한 만큼 이 무대가 많이 긴장되겠지만, 우리 적어도 무대를 마음껏 즐기고 내려오자.”
윌리엄이 박수를 짝짝 치며 말했다. 그는 자란 문화권의 영향인지 종종 팀의 사기를 올리기 위한 연설을 했는데, 이진과 그다지 상성이 맞는 내용은 아니었다. 매일을 치열하게 살아온 이진에게, 마냥 낙천적이기만 한 윌리엄의 말은 큰 감동을 주지 못했다. 아마 윌리엄도 그를 알 것이다. 하지만 그는 좋은 말을 멈추지 않고 쏟아 냈다.
“나도 너희가 얼마나 이 무대에 많은 걸 걸었는지 이해해. 각자 털어놓기 힘든 사정이나 부담감이 있겠지. 그러니까 당연히 진지해질 수밖에 없고, 이 무대가 마지막인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거야.”
스태프이 슬슬 스탠바이를 하라고 손짓했다. 그러나 윌리엄은 자리를 피하려는 멤버들을 붙잡고 마지막 말을 이어 갔다.
“그래도 우리가 결국에 되고 싶은 건 아이돌이란 걸 잊지 말았으면 해. 궁극적으로, 우리는 보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싶은 거잖아. 우리가 무대 위에서 고통스러워하면 관객들은 절대 그 순간을 즐길 수 없어.”
너무도 이상적이고 나태해 조금도 공감 가지 않았다. 무대를 즐기니 뭐니 말은 번지르르했지만 우선은 다음을 기약할 수 있어야 무엇이든 가능했다. 오늘 무대의 관객이라곤 그들을 매의 눈으로 바라보고 평가할 심사 위원뿐이었다. 기쁨은 훌륭한 결과를 낸 뒤에 취해도 늦지 않다.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한 주제에 즐거움을 누릴 틈은 없었다.
분명 그렇게 생각하는데……. 평소처럼 그의 안일한 생각을 비웃고 이번엔 반드시 완벽한 무대를 선보이겠노라 다짐해야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속 깊은 곳에 메아리쳐 울리는 것만 같았다.
윌리엄이 이진의 팔뚝을 붙잡았다. 그리고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우리는 무대 위에서만큼은 누구보다 즐거워야 하는 거야. 그걸 잊지 말자.”
그는 말을 마치고 방긋 웃으며 동료들의 등을 한 번씩 두들기며 무대 위로 올라갔다. 이진은 뒤늦게 줄곧 참고 있었던 숨을 토해 냈다. 승현이 계단을 올라가기 직전, 그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요.”
하얀 손이 앞으로 뻗어졌다. 이진이 높은 층계 때문에 비틀거린 걸 기억한 것이다. 이진은 그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랐다.
각자의 자리로 가 고개를 숙이고 뒷짐을 지고 서자 조명이 꺼졌다. 음악이 나오기 전 고요한 순간, 귓가에 자신의 심장 소리와 숨소리만이 들렸다. 머릿속에서 반드시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사라지진 않았지만, 리허설처럼 팔다리가 굳고 숨이 막히진 않았다.
노이즈가 깔리며 음악이 시작되고 조명도 천천히 밝아졌다. 인트로 비트에 맞춰 일곱 명의 멤버가 몸을 흔들자 이진이 뒷짐을 진 채로 오른손을 하늘로 쭉 뻗었다.
“Five, Four, Three, Two, One.”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카운트다운을 셌다. 검지만 남았을 때, 바로 후렴이 시작됐다. 본격적인 무대의 시작을 알리듯 이진의 목소리가 MR을 뚫고 막힘없이 뻗어 나왔다. 천장을 바라보는 그의 속눈썹이 조명에 의해 붉게 물들었다.
“You should choose one.”
빠른 비트에 맞춰 깔끔하고 유연한 동작들이 이어졌다. 카메라 너머 시청자들에게 닿을 듯 손을 뻗다가도 한 발자국 물러서서 먼저 자신을 선택하라는 듯 손가락을 양옆으로 흔들었다. 강렬한 사운드와 함께 모두가 일제히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오직 승현만이 고개를 바로하며 카메라를 주시했다.
“언제나 바랐어. 너만의 것이 되길.”
“더 이상 바라만 볼 수는 없으니까.”
승현과 하늘이 앞으로 나서면서 동선이 바뀐다.
“이제 나를 알겠니?”
“나를 불러 보겠니.”
“너만을 기다리는 날.”
미열과 이진이 번갈아 부르며 섬세함을 더한 첫 번째 후렴과는 달리, 두 번째 후렴은 모두와 함께 부르면서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찬우를 중심으로 원형의 대형을 만든 일곱 명이 한 소절마다 자리를 바꿔 가며 유혹하는 듯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했다.
“선택의 때가 왔어─”
“Can I be your only one!”
“날 선택해 줄래─”
미열이 무대 중앙에 서자 이진은 자연스럽게 왼쪽으로 빠졌다. 남은 사람들은 대열을 유지하며 안무를 이어 갔다. 이진은 고음 파트를 위해 카메라를 피해 뒷걸음질 치며 자리를 이동하는 중 무대를 보는 심사 위원으로 자리한 멘토 조엘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표정에서 흐뭇함을 읽은 이진은 밝게 미소 지으며 마음껏 소리를 높였다.
“We could go higher─!”
진성에서 가성으로 부드럽게 이어지는 이진의 목소리에 진영의 랩이 섞여 들어갔다. 허스키한 목소리에서 살짝 쇳소리가 들렸지만 누구도 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음 파트를 준비했다. 이진이 다시 대열에 합류하면서 찬우를 중심으로 대형이 삼각형으로 바뀌었다.
“내게 기회를 줘─”
“I can be the only one for you.”
왼손은 뒷짐 지고 오른손 검지만을 세워 입가에 가져가며 무대가 끝난다.
노래가 완벽히 페이드아웃 되고 나자, 엔딩 신에 맞춰 어두워졌던 조명이 다시 멤버들을 비추었다. 환한 스포트라이트 아래 가쁜 호흡으로 인해 들썩이는 상체와 상기된 뺨이 그대로 드러났다.
만약 오늘의 무대를 완벽한 무대였냐고 묻는다면 이진은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직도 춤을 추면서 동시에 노래를 부르는 게 능숙하지 않았다. 특히 이번 미션곡은 안무에 상체 움직임이 많은 편이어서 사실 노래를 어느 정도 포기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진은 끝까지 제 강점을 놓지 못했다. 그 바람에 중간중간 춤의 밸런스가 무너졌고 집중이 많이 필요한 후렴구에서도 대형 합류가 한 박자 늦었다.
‘그래도…… 나 방금 잘하지 않았나?’
하나씩 따져 보자면 결코 완벽하지 않았지만 이진은 오랜만에 상쾌함을 느꼈다. 그토록 돌아오고 싶었던 무대 위에서 관객과 눈과 피부로 소통하는 그 짜릿한 감각을 느꼈다. 관객이라고 해도 고작 심사 위원 몇이 전부였지만.
“잘했어, 얘들아.”
“수고했어. 진짜 멋졌다, 우리. 그지?”
먼저 정신이 돌아온 찬우와 진영이 다른 멤버들을 끌어안거나 등에 손을 올리며 마무리 인사를 했다.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사람도 있고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남는 사람도 있었지만, 모두들 큰 고비를 넘긴 서로를 응원하고 격려했다.
‘모두와 함께 서는 무대니까, 나 혼자 잘할 필요가 없었던 거구나. 혼자 애쓸 필요가 없었어…….’
이진은 찬우에게 안기며 그런 생각을 했다. 맞은편에서 미열에게 붙들린 승현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본 무대를 마치고 심사 위원의 평가를 들었다. 심사 위원들은 각 포지션의 멘토 일곱 명이었는데, 연습 시간에는 호평 일색이더니 막상 본 무대에서는 그렇게 칭찬에 박할 수가 없었다.
“개개인의 역량은 뛰어나지만 결정적으로 무대가 조화롭지 못해요. 너무 개인의 욕심만 부린 게 아닐지……. 팀으로써 서로 조율하고 맞춰 나가야 할 부분이 어디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네요. 그런 면에서 아쉬웠습니다.”
기준 자체가 정규 음악 방송 무대에 오르는 신인 아이돌 급에 맞춰졌는지, 이전에 좋다고 칭찬을 했던 부분도 아직은 한참 부족하다며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꿨다.
“유이진 참가자는 노래를 너무 잘해요. 한찬우 참가자도 춤을 너무 잘 추고요. 김진영 참가자도 랩을 잘하는데…… 이게 아이돌 무대인 것 같냐고 묻는다면 난 아니라는 거죠.”
“잘하는 사람은 욕심이 많고, 나머지는 욕심이 너무 없고. 딱 내가 할 만큼만 해야지 생각하면 안 돼요. 더, 더, 더 욕심을 내야지.”
그런데 아무래도 멘토들의 연령대가 타 프로그램에 비해 어린 편이다 보니 평가 내에서도 모순되는 내용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이게 그들의 진실된 의견이라기보다는 제작진이 요구한 대본이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다. 역경이 없으면 재미가 없다. 욕을 먹으며 간신히 오른 무대가 더 감동적일 것이다.
조금 오만한 생각일지는 몰라도 이진은 그들이 결코 나쁘지 않은 공연을 보였다 확신했다. 만족스럽지 않은 것과는 별개로 무난하게 성공적인 무대였다. 조화가 부족하다는 혹평은 그냥 각자 열심히 했다는 뜻으로 적당히 걸러 들었다. 무리 생활에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이진에게 그런 평가들은 별 흠이 아니었다. 이진의 발성이 아이돌 발성과 달라 조금 튄다는 말만 새겨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