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휴게실을 재잘재잘 메우던 수다가 점차 사그라들고 다들 흘끔거리며 이진의 눈치를 봤다.
이진 본인은 잘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진은 그야말로 폭발 직전이었다. 그는 평생을 목표 하나만 바라보고 달려왔다. 어려서는 꿈을, 나이를 먹어서는 돈을 생각했고 그 외엔 취미 하나 가지지 않는 단순한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 이진은 고려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노력 하나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들이 스트레스였다. 설상가상 이진은 건강하게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법도 몰랐다. 이진의 목표이자 도피처는 언제나 음악이었는데, 이제는 그곳에 발을 딛고 서 있기 때문에 도망칠 장소가 없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그 말을 듣고 내가 어떻게 반응했으면 하던 거였어? 내가 잘 모르겠어서 그래.”
“이진아…….”
미열이 이진을 불렀지만 그도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다들 신경이 날카로웠다. 이진도 지금 자신의 행동이 남들에겐 충분히 민폐라고 생각했고, 할 수 있다면 멈추고 싶었다.
“아니야. 그만하자. 미안해.”
“알고 있다고 말한 거예요. 형이…….”
승현은 이진의 고요한 분노를 정통으로 맞으면서도 흔들림이 없었다.
“형이 괜찮은 척해도, 사실은 어떤 기분인지 알고 있다고.”
이진은 자신을 이해하는 척하는 승현의 말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승현이 다급하게 일어나 이진의 앞을 막았다.
“그래서 형이 조금이라도 편해졌으면 했는데……. 보니까 제가 또 뭘 잘못 건드렸나 보네요.”
“아. 그럼 내가 정신 놓고 무대 하던 거 옆에서 춤추던 네가 알아줬으니까, 이제 날 지켜봐 줘서 고맙다고 하면 되는 거니? 눈치챘더라도 덮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을 굳이 들춰서 들쑤시는 이유가 뭐야? 네가 알아주면 뭐가 달라지는데? 내가 언제 너랑 고민 상담하고 싶대?”
이진은 승현이 자신의 치부를 들추자 참을 수 없었다. 한번 약점을 잡히면 그것들은 언제나 끝에 가선 이진의 숨통을 졸랐다. 이진을 깎아내리는 구실이자 이진을 공격할…….
이진의 목소리가 커지자 승현도 인상을 찌푸렸다.
“적어도 혼자 앓지는 않겠죠. 형도 마찬가지잖아요. 아까 내가 형한테 손잡아 달라고 부탁했어요? 형이 자의적으로 판단해서 한 일이잖아요.”
“그거랑 이게 같아?”
“고집 좀 그만 부려요! 나는 뭐 내 일어나는 시간 가지고 귀찮게 구는 게 좋았겠어요? 나한텐 의견 한번 물어보지도 않고 마음대로 팀 짜는데 그게 즐거워서 그냥 넘어갔겠냐고요. 나는 그래도 형이 나한테 나쁘게 굴려는 게 아니니까 받아들이려고 하는데, 형은 내가 뭘 해도 받을 생각이 없잖아요!”
승현의 외침에 뇌에 얼음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할 말이 없어졌다. 이진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호의가 승현에게도 부담스럽고 무거울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쌓여 버린 감정은 쉽게 흘러 내려가지 않았다.
“아니면 그날 때문에 그래요? 백미열이랑 내가 창고에서 했던 대화 들었잖아요.”
이진이 숨을 삼키며 눈을 크게 떴다.
“뭐? 야, 선승현! 너 그거 무슨 소리야.”
미열이 승현의 어깨를 잡아 돌리며 물었다.
“그럼 넌 지갑 들고 건물 한 바퀴 돌았단 말을 믿었냐?”
“이진아,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차라리 다 설명할게.”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진영이 끼어들었다. 적극적으로 개입할 의지는 없어 보이지만 슬슬 마무리 짓길 바라는 말투였다.
“그냥 서로 날서 있던 거니까 화해하면 안 돼?”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찬우와 윌리엄도 한마디씩 얹었다. 당사자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 분위기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이진과 승현, 미열 세 사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혼란했다.
이진은 승현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일방적으로 이진에게 친한 척 굴다가 지쳤으니 그만두겠다고 선언해 놓고. 그걸 이진이 들었단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여태까지 모른 체하다가 이제 와서 언급하는 이유가 뭐야.
미열이 승현 대신 해명하고자 죄인처럼 구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진이 모르는 더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제 발이 저리는 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진은 그를 손가락질 하고 싶지 않았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열등감을 느껴 심한 말을 한 뒤 홀로 남아 무거운 한숨을 쉬는 모습이 이진과 닮아서 그런가, 미열을 미워하느니 승현에게 죄를 돌리는 편이 쉬웠다.
“우리 오늘 밤에 털어놓을 거 다 털어놓기로 하고. 지금부턴 진짜 무대에만 집중하자, 응?”
하늘이 제안했다. 이진은 차마 하늘을 향해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래, 이진아. 우리 1등 하기로 했잖아. 그래서 하늘이 까 내리던 사람들한테 본때를 보여 줘야지.”
“내가 갑자기 왜 나와?”
“이진이가 기사 봤어. 너 물갈이 당할까 봐 완전 침통해져선.”
“아, 진짜?”
의연하던 하늘이 놀란 내색을 했다.
“뭐야…….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넌 왜 울어!”
그러더니 순식간에 눈시울을 붉히고 굵은 물방울을 후두둑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참아 왔던 설움이 깊은지 눈물이 마르지 않고 흘렀다. 곁에 있던 찬우가 화들짝 놀라 하늘의 머리통을 덥석 끌어안았다.
“형들한테 민폐일까 봐, 엄청 걱정했는데…….”
“네가 왜 민폐야, 하늘아. 울지 말고!”
“그런데 형들이, 나 이렇게 걱정해 줄 거라곤……. 괜찮다고 했는데도 신경 쓸 줄 몰랐는데, 크응…….”
목이 멘 소리로 하늘이 드문드문 말했다. 이진도 어른스럽던 하늘이 보이는 눈물에 조금 놀랐다. 이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미처 동생의 마음고생을 알아차리지 못한 게 미안한 눈치였다. 하늘은 코를 훌쩍이며 울음을 그치려 노력했다. 하늘을 끌어안은 찬우가 계속 그의 등을 토닥거렸다.
이진은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을 구깃구깃 접고 또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싶었다.
두 번째 리허설 순서가 돌아왔다. 이번에는 마이크를 착용하고 무대에 올랐다. 전과 마찬가지로 실수는 없었지만 만족스럽지도 않은 무대였다. 그와 별개로 승현이 이진보다 앞에 서기라도 하면 자신도 모르게 그 뒤통수를 노려보느라 시선 처리가 어려웠다. 본 공연 때는 무대 앞에 앉은 심사 위원들 중 하나를 골라 노려보기로 했다.
“음정 애매하게 안 맞는 거나 고음에서 목소리 커지는 거, 호흡 딸리는 거 다 티 나네.”
리허설 영상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 다 같이 모니터링했다. 노래는 둘째 치고 동작들에 묘하게 각자의 개성이 묻어 있었다. 그나마 칼 군무를 요하는 안무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음악 방송 나갈 땐 녹음한다니까, 뭐.”
“음원 발매도 되겠지? 다른 사람이 내 파트 부른 거 들으면 진짜 기분 이상하겠다.”
“이진이가 1등 시켜 준다잖아. 좀 믿어라. 우리 팀 이름도 이진 님과 노예들인데.”
영상을 다시 돌려 보고 싶어서 리모콘을 조작하던 이진은 방금 들려온 정보의 의미를 쉽게 해독하지 못하고 조금 버벅거렸다. 한 5초 정도가 더 흘렀을까. 이진이 더듬더듬 물었다.
“우리 팀 이름이 뭐라고?”
“이진 님과 노예들인데? 아까 들을 때 별말 안 한다 했더니 딴생각하고 있었구나?”
윌리엄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때 이진은 네 명에게 깔려 있었다. 이진이 웃거나 화내지 않고 심각해지는 걸 본 찬우가 다급하게 덧붙였다.
“팀 짜는 거 완전 노예 경매 같았잖아. 우리 팀 말고 다른 팀에서도 그런 식으로 농담하고 그랬던 거니까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
“……어떤 식으로 농담을 했길래?”
이진은 애써 웃으며 조금이라도 촬영장 트랜드에 합류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려 했다. 휴게실에서 언성을 높인 뒤로 팀원들이 자신을 대하기 어려워할까 봐 당황한 티를 내기 껄끄러웠다. 그래서 굳이 궁금하지 않고 알고 싶지도 않은 정보를 물었다.
“쿨럭, 쿨럭!”
“흠…….”
갑자기 찬우가 기침을 하고 윌리엄이 의미심장한 신음을 흘렸다. 하늘과 미열도 갑자기 저들끼리 딴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결국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답을 구하는 이진의 눈을 피하지 못한 진영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우리 팀더러 노예 왕과 하렘 팀이라고 부르긴 하던데……. 아, 어린애들은 자기 구매한 주인님 시중드는 놀이도 하고 그런다더라.”
“아. 승현이처럼?”
“눈치 좀…….”
“내 입이 방정입니다. 죄송합니다.”
찬우가 하늘에게 욕을 먹고 사과했다. 이진은 곧 터질 폭탄처럼 취급당하고 싶지 않았지만 찬우의 가벼운 태도에 굳이 열을 올리지 않기로 했다. 그것보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자신을 노예 왕이라고 부른다는 게 어이없었다.
웃기도 애매해 리모컨만 만지작거리는데 불쑥 길쭉한 손이 등 뒤에서 뻗어 나와 리모컨을 가져갔다.
“다시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뒤를 돌아본 이진과 눈이 마주쳤지만 승현은 재생 버튼을 누르고 다시 제자리에 가서 앉았다. 이쯤 되니 이진은 자신이 예민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실망스런 무대의 흥분과 우울이 채 가라앉지 않아, 평소라면 참고 넘어갈 수 있었던 말에 그만 발끈하고 말았다. 들키고 싶지 않았던 동요를 헤집어 오니 침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완전히 자신의 탓으로 돌리기엔 억울한 면도 있어 승현이 괜히 더 미워졌다. 그러게 왜 한창 예민할 때 짜증 날 만한 소리를 하는지, 도대체 뒤에서 남 말하다 걸린 게 누군데 적반하장인지, 왜 쟤는 태평한데 나만 이렇게 눈치 보고 있어야 하는지 등 별 잡생각이 다 났다.
승현이 이진에게 그렇게까지 과한 유대를 강요하는 게 아님을 알았다. 머리론 알겠는데, 문제는 감정적으로 그를 받아들이는 게 쉽지가 않았다.
이름과 얼굴밖에 모르던 승현을 거의 3년간 질투해 왔다. 차라리 미열이나 찬우 같이 기억이 흐릿한 사람이면 모르겠는데, 승현은 외면하래야 외면할 수 없는 위치였던지라 당시 이진의 안 좋은 감정을 온전히 쏟아 낸 대상이었다.
지금에 와서 잘 지내려고 노력한들 혼자서 쌓아 둔 감정의 골이 너무 깊고, 또 과거의 이진이 그토록 외면하고자 했던 대상이 자신에게 친절하기까지 하니 알게 모르게 죄책감도 쌓였다.
‘그룹 활동에만 지장 없으면 되잖아.’
이진은 자신의 그릇이 거기까지라 생각했다. 그러나 승현은 자꾸 그 이상을 강요했다. 이진이 뚜렷이 그려 둔 선을 넘어서 불쾌하게 하고, 싫은 티를 내면 사과를 했다가도 왜 자신을 더 받아 주지 않냐며 따지기도 했다.
버스 정류장 광고판 속의 승현은 그러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그 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이진의 감정을 받아 내는 존재였는데, 지금 같은 방을 쓰는 승현은 은근히 말도 많고 가끔 방에도 안 들어오며 무엇보다 신경을 긁어 댔다.
한 장의 인쇄물이 아닌, 바로 곁에서 숨 쉬는 선승현은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