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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21화 (21/173)

21화

리허설이 시작되고 리허설 팀과 다음 대기 팀을 제외한 모두가 커다란 스크린이 달린 방으로 이동했다. 정면에 고정된 카메라로 무대를 한눈에 담은 화면이 스크린에 띄워져 있었다. 대 인원을 한 방으로 안내한 스태프가 나가기 전 리액션 좀 크게 많이 해 달라고 주문했다.

일렬로 앉을 수가 없어 미열, 이진, 승현, 하늘 순으로 앞에 앉고 윌리엄과 진영, 찬우가 뒤에 앉았다. 수련회라도 온 것처럼 스크린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람들 때문에 미열과 승현, 둘 사이에 바싹 붙어 앉아야 했다.

“헉, 어떡해!”

리허설이 시작되자마자 도저히 큰 반응을 하지 않고선 넘어갈 수 없는 일이 생겼다. 첫 번째 팀 센터가 아주 세게 무릎을 박으며 넘어진 것이다. 사고를 목격한 참가자들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거나 흥분해 커다래진 목소리로 걱정의 말을 내뱉었다.

“저거, 우진이 아니야?”

찬우의 말에 다친 사람의 얼굴을 잘 보니 안면이 있는 참가자였다. 음악이 꺼지고 스태프와 멤버들이 센터 주변으로 몰려들었는데 걷는 폼을 보아하니 애초에 무대가 미끄러워 보였다. 센터는 덩치 커다란 스태프에게 업혀 무대 밑으로 내려갔고 대걸레 부대가 올라와 무대를 빡빡 닦았다.

카메라가 평면적으로 고정되어 있다 보니 무슨 연극 무대를 보는 것 같았다.

“봄이네 팀인데 어떡하지…….”

하늘이 승현에게 소곤거렸다. 이진은 찬우가 무대 위에서 크게 넘어지는 상상을 했다가 그런 상상을 했다는 사실에 괜히 미안해졌다.

이진 팀의 리허설 차례는 마지막에서 세 번째니 무대사고를 염려하지는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데 곧바로 그 생각을 부인하듯 갑자기 무대가 못 견디고 무너져 내리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솟아났다. 머리위에 멀쩡히 달려 있던 조명이 떨어지는 바람에 사망하는 사고도 있다던데, 이진은 그 사례 속에 자신이나 주변인이 추가될까 불안해졌다.

“왜 그래?”

“아니, 놀라서.”

“아픈 거 아니야? 왜 이렇게 떨어?”

하늘이 승현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진은 첫날, 귀신 분장을 본 승현이 대뜸 손을 잡아 달라 부탁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도 한 번 놀라고 나면 진정하기 어려운 것 같던데. 이번에도 사고에 가깝게 넘어지는 모습을 보고 동요가 심한 모양이었다.

이진은 힐끔, 승현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겉으로 보기엔 티가 잘 나지 않는데, 아까는 나른한 듯 졸린 듯 멍해 보였던 눈에 바짝 힘이 들어간 걸 보면 확실히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리허설 전에 긴장하면 안 되지. 이진은 미열에게 소곤소곤 귓속말을 했다.

“저기, 아무래도 승현이가 조금 놀란 것 같은데…….”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자.”

그런데 미열이 뜬금없는 말을 했다. 미열이 승현과 이진의 관계에서 손을 떼기로 결심한 건 알고 있었으나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그러나 미열이 스크린만 노려보며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아서 이진은 민망함을 무릅쓰고 팔꿈치로 승현의 팔을 툭툭 쳤다. 승현이 고개만 살짝 돌려 이진을 바라봤다. 그 표정에서 당황을 읽을 수 있었다.

이진은 말은 하지 않고 제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을 활짝 펼쳤다. 승현은 조금 망설이다가 그 손을 잡았다. 승현의 단단한 손이 조금 떨리는 게 느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승현의 손을 잡으니 이진의 긴장도 조금 흐려졌다.

그 뒤로도 동선 이동을 하다 부딪히거나 계단에서 삐끗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애초에 사이즈가 작았던 건지 아니면 그 사이에 살이 찐 건지 단추가 터져 버린 참가자도 있었다. 이진은 제 셔츠의 품이 넉넉한지 확인하고 안심했다.

어쩌다보니 타이밍을 놓쳐 리허설을 위해 이동할 때까지 승현의 손을 잡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연스럽게 손을 놨는데, 갑자기 뒤에서 찬우가 이진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빠르게 앞으로 걸어갔다.

“뭔일? 화해했어?”

“……싸운 적 없는데.”

“아님 너네도 그거 미냐? 브로맨스?”

“무슨 소리야.”

“뭐 아님 말고.”

비밀 얘기가 끝났는데도 찬우는 어깨에 올린 손을 내리지 않았다. 찬우의 사소한 특성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바로 그가 타인과 닿는 것을 즐긴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익숙한 간격을 훌쩍 넘어와 몸을 만져 대는 찬우가 부담스러웠지만 얼마 뒤 이진은 사람의 따끈따끈한 체온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소에는 만져진다는 느낌에 불쾌했지만 친밀한 이와 몸을 기대는 것은 마치 마음을 기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선승현도 그렇게 지 필요할 때면 남한테 들러붙는 건가?’

앞 팀의 공연을 무대 뒤에서 지켜보는 동안 가슴에 스티커를 붙였다. 메인 보컬이 아니라 멘보라고 적힌 게 웃겼다. 서브 보컬은 섭1, 섭2 식으로 적혀 있었다.

첫 리허설은 마이크 착용 없이 진행될 예정이라 준비는 금방 끝났다. 잠깐 대기했다가 차례가 되어 계단을 오르려고 보니 생각보다 높은 게, 사고가 자주 날만 했다. 키가 큰 편인 이진도 유독 높은 계단을 오르다가 살짝 비틀거릴 정도였다.

애초에 연습실에 비해 무대가 엄청 커다랬다. 무대 바닥에 붙은 흰 테이프로 시작 위치를 찾아가는데 연습 때보다 간격이 넓어 자리 이동이 있을 때면 거의 뛰어다녀야 할 판이었다. 웅성대는 소음을 뚫고 윌리엄이 “화이팅을 했어야 했는데!” 하며 탄식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확신하진 못했다.

계단에 오르는 순간부터 심장이 크게 요동치더니 이제는 바로 옆에서 북이라도 두드리는 것처럼 귓가에 심장이 두근대는 소리만 들려왔다.

‘아, 너무 긴장했나.’

본격적인 무대가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가, 이진은 평온했던 방금과는 달리 극도로 예민해져버렸다. 팔다리가 뻣뻣하게 굳어 삐거덕거리고 목소리도 어딘가 꽉 막힌 것처럼 잘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불현듯 겁이 났다.

무대 위로 조명이 떨어질지 모른다는 상상속의 겁이 아닌, 막연한 미래가 거대한 몸집을 드러내고 이진을 깔아뭉개기 위해 찾아온 듯, 아득한 공포가 이진을 집어삼켰다.

“7조 리허설 시작하겠습니다.”

음악이 시작되고부터는 기억이 드문드문 끊겼다. 훈련된 몸은 막힘없이 움직였지만 뻣뻣하게 굳은 몸이 제대로 된 흐름을 만들어 냈는지 확인할 틈이 없었다. 강한 조명 때문에 시야가 잘 확보되지도 않아 몇 번이고 울렁이는 멀미를 느꼈다.

‘망했다…….’

음악이 끝나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고작 리허설이고 이번에는 노래도 부르지 않았으니 사실 큰 동선을 확인하는 수준이었지만, 무대가 완벽하지 않았단 사실이 머릿속에 박혀 도저히 떠나지 않았다.

실력만이 이진이 가진 무기였다. 그런데 아무리 무기를 잘 다듬어 놓았다고 한들 전쟁에 나가 휘두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무대에서 얼어붙은 경험에 이진은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누구보다 멋있는 무대를 선보여 위로, 더 위로 올라가 마지막에 우승을 차지하리란 원대한 야망이 더없이 멀게 느껴졌다. 고작 이정도 압박에 무너질 거면서, 네 주제에 감히…….

“자괴감 든다.”

대기실로 돌아가는 길에 찬우가 한마디 했다. 이진만이 무대를 망친 건 아닌지 리허설을 마치고 내려가는 표정들이 좋지 않았다.

“계속 버벅대는 거 느껴지는데 몸이 맘대로 안 움직이는 거야.”

“맞아. 눈치챘을 땐 이미 다른 파트로 넘어가 있고.”

“아, 진짜. 다음번에는 잘해야지.”

이진은 다들 한숨을 푹푹 쉬다가도 공감되는 얘기가 있으면 웃으며 대화에 자연스럽게 끼어드는 게 신기했다.

이제 곧 실전이었다. 이진이 준비해 온 모든 것이 단 한순간에 평가당하고 노력의 급이 결정지어진다. 무대를 내려오며 살짝 풀렸던 긴장이 다시 이진의 온몸을 뻣뻣하게 타고 올라왔다. 아직도 모든 게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았다.

의견이 모여 다 같이 휴게실로 향했다. 방금 격렬히 몸을 움직이고 와 목이 탔던지 다들 옹기종기 자판기 앞으로 모였다. 승현이 제일 먼저 동전을 넣고 자주 마시던 탄산음료를 눌렀다.

그런데 갑자기 자판기에서 게임에서나 날 법한 삐용삐용, 소리가 나더니 무언가를 연속적으로 떨어뜨렸다.

“아, 또…….”

승현이 조금 짜증을 내며 음료들을 꺼냈다. 승현의 손에는 일곱 개의 같은 캔이 들려 있었다.

“뭐야?”

“가끔 일곱 개씩 나오는데 완전 귀찮아.”

하늘의 질문에 승현이 투덜거렸다.

“가끔? 난 한 번도 나온 적 없는데?”

“아, 자판기 뒤에 카메라 돌아가고 있으면 가끔 일곱 개씩 나온다더라.”

어쨌든 음료수를 얻게 되었으니 팀원들은 휴게실에 놓인 원형 테이블에 동그랗게 모여 앉았다. 승현은 팀원들에게 하나씩 음료를 나눠 주고 마지막으로 이진에게 건넸다. 스튜디오에 도착했을 무렵부터 굳어 있던 손 끝 때문에 캔 뚜껑이 잘 열리지 않았다. 틱, 틱. 평소 같으면 한 번에 열렸을 텐데,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으니 신경질이 났다.

“형, 제가 열어 드릴게요.”

승현이 이진의 음료수를 가져가려 손을 뻗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이진은 순간적으로 손을 뒤로 빼며 승현을 피했다. 노골적인 거부를 표한 것에 이진 본인도 당황했다.

“아냐. 괜찮아. 내가 할게.”

애써 무마해 보려고 말을 덧붙였지만 어색하기만 했다. 도움의 손길이 거절당한 게 민망하지도 않은지, 승현은 이진의 앞을 떠나지 않고 머뭇거렸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이진은 승현을 받아 줄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그가 제 자리로 돌아가기만을 바라고 있었는데…….

“형 많이 긴장했어요?”

대화하기 싫은 티를 풀풀 풍기는 그에게 기어이 말을 걸었다. 캔 뚜껑을 손톱으로 긁던 이진의 시선이 승현에게 향했다. 승현의 말을 들은 순간 이진은 팽팽히 잡아당긴 고무줄 끝에 칼날을 가져다 댄 것같이, 머릿속에서 무언가 툭 끊어지는 걸 느꼈다.

초점이 잘 맞지 않아 시야가 흐려지고 눈 점막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까 무대에서 보니까 많이 안 좋아 보여서요. 손도 차가웠고.”

“승현아, 괜히 이진이한테 시비 걸지 마라.”

“그게 아니라 힘들어 보여서 그렇지.”

미열이 승현을 타박했다. 이진은 승현이 대수롭지 않게 건넨 말에 과민 반응 하고 있음을 스스로 알아차렸다. 그러나 이성적인 판단에 앞서, 그에게 쌓였던 감정들이 먼저 울컥 올라왔다.

“그래서?”

“네?”

“조언이라도 하려던 거 아니었어? 나 기다리고 있는데.”

딱딱하게 굳었던 팔다리에 이어 어깨와 목까지 경직이 올라왔다. 그래서 그 얘기는 왜 꺼낸 건지, 이진의 치부를 들추면서 무슨 반응을 바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이진이 승현을 밀어내려 했다고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하는 걸까? 그래 봤자 같은 팀인데 이진이 본 무대에 앞서서 동요하면 승현에게도 좋은 일이 없을 텐데. 아니, 원래 그는 오만하고 성격이 더럽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지금까지는 이진과 친해지기 위해 착한 척하고 있었을 뿐, 거리를 두기로 작정한 지금에서야 본 성격을 드러낸 걸지도 몰랐다.

승현은 이진의 의도를 짐작하듯 잠깐 말을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차분한 목소리였다.

“아뇨. 힘들겠다고 한 말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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