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17화 (17/173)

17화

이진은 괜히 하지도 않는 핸드폰 게임을 다운받았다. 마침 최근에 넣어 둔 신곡들이 전부 재생되었는지 노래가 플레이리스트 맨 처음으로 돌아갔다. 손가락을 무의식적으로 놀리며 컬러 타일들을 지워 나가는데 갑자기 다음 곡의 가사가 귀에 확 와서 박혔다.

-넌 대단해질 수 있어.

과거로 돌아온 이후로는 노트북을 사용하거나 계속 신곡을 추가하며 순서대로 들었기 때문에 잊고 있었으나, 이진의 핸드폰 플레이 리스트 초반은 대학생 이진이 힘들 때마다 즐겨 듣던 노래들로 가득했다.

-넌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를 사랑해 줄 수도 있어.

그 시절 이진은 노골적으로 위안을 주는 노래들에 기대었는지, 플레이리스트를 훑어보니 죄다 제목에서부터 ‘넌 뭐든지 될 수 있어! 용기를 내! 할 수 있어!’ 하고 힘을 붇돋아 주는 노래가 가득했다.

그중에는 실제 맥락상 그런 의미는 아니지만, 4분의 노래 중 고작 10초 남짓 나오는 단어나 문장에만 꽂혀 저장해 둔 노래도 있었다. 과거의 자의식을 들여다보는 일은 꽤나 거부감이 들었다. 지금은 희석된 감정들에 도대체 뭐가 그렇게 힘들었냐고 되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말들은 널 해치지 않을 거야.

그런데 이상하게도, 차가워지는 머리와는 반대로 눈가에 열이 몰렸다. 공기와 맞닿는 눈 표면이 따끔거리며 반사적으로 액체를 분비하기 시작했다. 방금보다는 조금 촉촉해진 눈을 깜빡이며 이진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요상한 현상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깊은 곳에서 올라온 숨을 내쉬었다.

-Say what you wanna say And let the words fall out.

이진은 항상 공연을 준비하며 들였던 습관대로 감정을 억눌렀다. 눈을 감았다가 뜨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한 자신을 상상하고, 얼굴의 근육들에서 힘을 빼고. 다시 눈을 한번 꼭 감았다가 뜨면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평온을 가장할 수 있었다.

-Honestly I wanna see you be brave.

화면을 움직여 재생 목록의 처음부터 노래를 선택했다. 나중에 다시 찾게 될지라도 지금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었다. 만족할 만큼 노래들을 선택한 뒤 삭제 버튼을 눌렀다. 짧은 알림과 함께 재생 목록이 깔끔하게 변했다. 이진은 노래와 함께 그 노래들 속에 들어 있던 자신의 작은 파편들까지 지워 버렸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다시 한참을 멍하니 컬러타일을 지우고 있으려니 드디어 이진의 차례가 돌아왔다. 미열은 제 차례가 끝나자마자 돌아갔고 하늘은 승현의 인터뷰가 끝나길 기다렸다.

“형 끝나고 같이 갈까요?”

“아냐. 먼저 올라가서 쉬어.”

이진은 하늘이 싹싹하게 구는 게 나쁘지 않았지만 괜히 잡아 두고 싶지도 않았다. 승현이 고개를 돌려 뭐라 인사를 했지만 이진은 한 귀로 흘려들었다.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앉을 때까지만 해도 별로 떨리지 않았는데, 거대한 렌즈와 더운 열기가 느껴지는 두 개의 조명을 마주하고 나니 갑자기 현실감이 확 몰아쳤다. ‘진짜 방송’을 촬영하고 있다는 현실감이.

“개인 인터뷰 처음이시죠? 원래 말수가 없으시면 굳이 리액션을 안 따서 그래요.”

스태프의 말에 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111명의 리액션을 모두 딸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것들은 미열처럼 열심히 돌아다니는 애들이 도맡는 게 나았다.

“그냥 편하게 답해 주시면 되는데, 거짓말하거나 꾸며 말하려고만 하지 마세요. 어차피 다 들키고 우리도 편집하기 애매해서 곤란하니까요. 너무 솔직하게 말해도 안 되는 거 아시죠? 당사자 앞에서 얼굴 보고 할 수 있는 말만 하시고요. 질문이 좀 노골적이거나 짓궂을 수 있어요. 그냥 무난하게 민망해하거나 당황하는 영상 뽑으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니까 괜히 오버하지 마시고요.”

“네.”

카메라를 등지고 앉은 남자가 친절한 어조로 말했지만 결코 그렇게 들리지 않는 내용이었다. 이진이 마른침을 삼키자 스태프가 바닥에서 생수병을 들어 건네줬다. 따지 않은 새것이었고 남자의 발밑에 몇 모금 마신 듯한 병이 두 개정 도 있는 것으로 보아 인원수대로 준비된 것 같았다.

물을 마시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카메라 말고 이쪽을 보라고 말하며 자신의 어깨 위에 조그만 토끼 인형을 올려놨다. 무뚝뚝한 표정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으나 밝게 웃고 있는 점 눈의 토끼를 보고 있으려니 긴장했던 표정이 자연스럽게 풀렸다.

“룸메이트들과 사이가 좋은 듯한데 두 룸메의 어떤 점이 좋아서 함께 다니나요? 장점이나 단점을 말해 주세요.”

“네? 아, 그런 걸 말해도 될지…….”

“이미 앞에 사람들도 다 했으니까 걱정 말고 그냥 편하게 말하세요.”

물론 이 정도 수위의 질문은 예상했으나 이진은 그래도 한 번쯤은 망설이는 모습을 카메라 앞에서 남겨두는 게 좋을 거라 생각했다. 분량부터 나오고 나서의 문제겠지만, TV에 비춰지는 이진의 캐릭터는 순전히 이들의 손에서 탄생한다. 스태프들도 신은 아니라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으니 그들이 가지고 놀기 좋은 소재들을 가급적 본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던져 주는 것이 이진의 목표였다.

개인 인터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막상 인터뷰가 시작되니 뭘 말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에 놓인 새까맣고 커다란 원형의 물체가 계속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새하얘지고 좀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우선 심호흡을 하고, 미열처럼 허리를 곧게 폈다. 그리고 스태프 어깨에 달린 토끼 인형을 바라봤다. 토끼의 눈에 쓰인 실은 고작해야 5mm도 안 될 것 같았다.

“걔네는 어, 귀여워요. 은근히 하는 짓들이 허당 같을 때도 많고.”

“백미열씨부터 한 명씩 말씀해 주시겠어요?”

“미열이는, 음……. 항상 의욕이 넘쳐서 보는 사람도 힘이 나게 해요. 그건, 정말 좋은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노래도 정말 잘해요. 실력이 있으니까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 것 같아요.”

“이진 씨는 조용한 성격 같은데 피곤하진 않으세요?”

“아니요. 미열이 덕분에 항상 기운이 나죠.”

이진은 최대한 말을 아꼈다. 그럼에도 머릿속에선 방금 뱉은 말들이 조각조각 잘려 나가 전혀 다른 문장을 완성시키는 상상이 끊이질 않았다. 어깨 위의 토끼, 토끼 눈. 토끼 점 눈, 털실 한 가닥. 계속 세뇌를 해야 그나마 표정이 좀 풀어졌다.

“선승현 씨는요?”

“승현이는, 애가 음…….”

10초전의 이진이 간과한 점이 있다면, 말은 많아도 안 됐지만 적어서도 안 됐다. 이진은 도저히 승현에 대한 감상을 쥐어 짜낼 수가 없었다.

걔가 저한테 지네 집 개가 사고 쳤을 때 표정 닮았다고 했는데, 그게 나름 애정 있는 표현이래요. 그런 거 보면 눈치가 좀 없는 것 같아요. 걔도 저처럼 친구가 없던 걸까요? 하긴 미열이 같이 시끄러운 애 하나 옆에 있으면 다른 친구 사귈 생각은 안 날 것 같긴 하네요.

“잘생겼죠. 훤칠하고……. 보고 있으면 막, 사이다? 탄산음료 마신 것 같이 시원하고. 모난 데 하나 없이 잘나서 ‘이야, 이게 바로 흔히들 말하는 눈 호강이구나.’ 싶고. 이거, 이럴 때 쓰는 용어 맞죠?”

이진이 슬쩍 스태프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그는 입가에 적당한 미소만 걸치고 도와주지 않았다.

“그, 그렇지 않나요? 아직 제대로 연습하는 건 못 봤지만…… 그 몸으로는 개다리 춤만 춰도 ‘아, 이게 바로 한국의 춤선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것 같아요. 또 목소리도 좋아서 애국가만 불러도 ‘아, 이게 바로 한국의 음악이구나.’ 하는…….”

……그래서 이진은 폭주해 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방향으로.

말을 하는 내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과열된 머리는 팽팽 돌아가기만 하고 제대로 기능을 하진 못했다. 스태프의 미소는 어느새 폭소가 되었다. 그는 어깨 위의 토끼 인형이 발발 떨릴 만큼 웃고 있었다.

“잠깐만 끊고 갈게요.”

“저, 여기 좀 편집해 주시면 안 될까요?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아요.”

“제가 그걸 장담은 못 하겠는데 어차피 사운드 섞였으니까 한번 다시 가긴 할게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가 크흠흠 하며 목을 풀었고 이진도 그 틈을 타 생수를 들이키며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그래서, 승현이는 착하고, 솔직하고, 미열이 같은 친구도 있고. 참…… 좋은 애예요. 아침에도 이제 벌떡벌떡 일어나니까 부족한 게 없네요.”

이진은 당황을 감추고 부러 딱딱한 미소를 짓곤 한 마디씩 끊어 가며 또박또박 말했지만 결국 뒷말에는 진심도 아닌 주책이 섞이고 말았다. 똑같이 알고 지냈는데도 미열에 비해서 해 줄 말이 없는 데다가 얼마 전에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했던 기억 때문에 자꾸 본래의 페이스를 잃어버렸다.

이기적이고 내 밥그릇만 챙기고 선 안쪽을 허락하지 않는, 그런 냉철한 이진이 되어야 하는데……. 언제나 하이 텐션인 미열에게 옮은 건지 항상 로우 텐션인 승현 때문에 자극받은 건지, 이도 저도 아니 게 되어 버렸다.

그다음 질문들은 냉정, 침착 모드를 풀가동시키고 대답했으나 스태프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렇게 썩 잘된 것 같지는 않았다.

“무슨 생각으로 모든 노래에 뛰어 나오셨어요?”

“어……. 승현이와 미열이 만큼은 제 손으로 사 오고 싶어서 열심히 했습니다.”

“노래방 기계에서 백 점을 뽑아내는 비결이라도 있는 건가요?”

“목소리가 크면 점수를 많이 주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경매에서 전략을 참 잘 세웠던데 평소에 그런 게임을 즐기시나요?”

“저는 사행성 게임에 일절 관심을 두지 않으며, 모든 건 스태프 분들과 시청자 여러분과 제 동료들이 도운 덕분입니다.”

어쩐지 기가 쭉 빨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바로 벽에 푹 기댔다. 그런데 걸어온 방향에서 한 손에는 카메라, 한 손에는 조명을 든 스태프가 뒤뚱뒤뚱 걸어왔다.

“도와드릴까요?”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아주 비싸다는 카메라를 품 안에 고이 모셔다가 비품실까지 옮겨 주었다. 스태프가 비품 사용 기록-대여 반납 장부인지 뭔지를 적으며 커피라도 사 줄 테니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이 밤중에 무슨 커피냐고 퇴짜를 놓곤 방으로 돌아가 버릴 수 없는 이진은 얌전히 기다렸다.

“그 편집 같은 거 신경 많이 쓰는 것 같아서.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아니면 뭐 카메라 공포증이라도 있나?”

“긴장해서 그래요“

“하긴 그때 빌리빌런즈 노래 불렀지? 난 참 거기서 그런 노래 부르는 사람 처음 봤어.”

“하하…….”

스태프는 커피를 사양하는 이진에게 아이스크림을 들려줬다. 아이스크림을 건네며 혹시 다이어트라도 하고 있냐며 물어 왔다. 이진은 이렇게까지 했는데 거절하면 이상한 것 같아 이번에는 얌전히 아이스크림을 받아먹었다.

“우리 프로 참가자가 일반인 비중이 꽤 높아요. 연습생 애들은 다 어린애들이라 커트했고, 대신 소속사 없이 음악 활동하는 친구들을 많이 모았지. 일종의 가성비 같은 거지. 사실 꾸며 놓으면 일반인이나 아이돌이나 그게 그거거든.”

“하하, 네…….”

“그런데 우리가 운이 너무 좋은 게, 그쪽 방 사람들이 실력도 있고 외모도 되고 스타성이 좀 있어 보이는 거야. 그래서 우리가 굳이 악의적으로는 편집할 생각이 없다는 거지. 이런 방송이 잘되려면 스타가 딱 나와 줘야 사람들이 꼬이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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