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이름이 백 윌리엄이야? 아버지가 백씨이셔?”
“아니. 미국 성이 화이트라서 한국 오면서 내가 지었어. 아빠는 김씨인데 김 윌리엄 싫어서.”
찬우는 이진과 동갑이고 윌리엄이 그들보다 한 살 많았다. 하늘은 이제 막 스무 살이 되었고 진영이 이진보다 두 살 위인 스물여섯 살로 나이가 제일 많았다.
“어차피 백미열이 수시로 반말하니까 그냥 너네도 편하게 불러.”
그러나 하늘은 여섯 살이나 차이나는 그를 결코 편하지 않은 눈으로 바라봤다.
“승현이는 몇 살이야? 미열이랑 동갑?”
진영이 승현에게 묻고 나서야 이진은 자신이 승현의 나이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걔 유급했는데, 저는 빠른이라서 두 살 어려요.”
“아, 그럼 스물둘?”
찬우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진과 미열을 번갈아 바라봤다.
“스물둘에서 두 살 더하면…….”
“나 스물넷이야.”
미열의 대답에 찬우가 더욱 혼란스러워하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진도 아차 싶었다. 서로의 이해관계에 맞춰 잘 지내보자 했으나 막상 서로의 사적인 정보나 면모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이진이 너 몇 살이랬지?”
“스물넷…….”
“아……. 네 그럼 서로 나이도 모르고 있었어? 아니면 백미열 뭐 약점 잡혀서 존댓말 하던 거야?”
이진의 나이를 들은 미열도 아뿔싸, 하는 표정이었다.
“아, 내가 유급을 했잖아. 그래서 나이가 조금 헷갈렸달까? 대학 졸업했대서 당연히 형인 줄 알았지!”
“그래도 무슨……. 서로 나이를 안 물어보냐.”
“그러게. 이진이 동안이라 긴가민가했을 텐데.”
찬우는 두 사람이 똑똑한 것 같다가도 멍청하다며 하하 웃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미열과 이진의 어설픈 동맹을 눈치챈 것 같았다.
“뭐 지금부터라도 잘 알아 가면 되지. 그치?”
윌리엄이 양팔을 뻗어 제 옆에 앉은 미열과 하늘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하늘은 다소 낯을 가리는지 어색하게 웃었고 미열도 억지 미소를 지었다.
멤버 구성이 완료되고 단체 샷 촬영을 했다. 열여섯 개의 팀에 번호가 붙었다. 이 번호는 방송에 노출되지 않을 예정이지만 팀별로 정렬하라는 지시가 있을 시에는 지금 알려 준 번호에 맞는 자리를 찾아가면 된다는 안내가 있었다. 이진은 7팀이라 정 가운데로 자리를 옮겼다.
“여러분은 남은 기간 동안 현재의 멤버들과 무대를 준비하게 됩니다. 서로의 장점을 더 이끌어주고 단점을 보완해 주며 동료이자 경쟁자로써 하나의 목표를 향해 더욱 더 정진하는 모습을 기대하겠습니다.”
해산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늦은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는 내내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미열과 이진은 서로의 속내가 까발려진 것 같아서였고 승현은 무언가 불편한 구석이 있는 눈치였다.
연습실 야간 개방 시스템 변화에 대한 공지 사항 전달을 위해 각 방에서 한 명씩 프론트로 내려와 달라는 안내 방송이 울렸다.
“내가 다녀올게.”
미열이 자진해서 방을 나섰다. 아마 조금 머리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생각했다. 이진은 침대에 앉아 작업 노트를 끄적거렸다. 복도를 걷는 미열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자 침대에 얌전히 앉아 있던 승현이 몸을 일으켜 이진에게 다가왔다.
“형, 아까 일 사과드릴게요.”
눈이 마주치자 승현이 말을 시작했다.
”무슨 일?”
”제가 형한테 개 닮았다고 한 거 기분 나쁘셨던 것 같아서요.”
승현이 이진과 시선을 맞추기 위해 다리를 굽혀 앉자 마치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것 같은 모양이 됐다.
”아냐, 괜찮아. 별것도 아닌데.”
“제가 욕을 하려던 게 아니라……. 차라리 우리 개 사진 좀 보실래요?”
이진의 여전히 화가 났다고 생각한 건지 승현은 조금 조바심을 냈다.
“붕붕이 보고 화 풀어 주세요. 그래도 화 안 풀리면 제가 시키는 거 다 할게요. 아, 어차피 나 노예하기로 했지…….”
“잠깐만. 승현아, 진정 좀 해 봐.”
승현이 흐린 눈으로 강아지 사진을 찾기 시작했을 때 이진이 승현의 양 팔뚝을 붙잡았다. 그가 자신을 꽤 많이 신경 쓴다는 것은 알겠으나 이진은 그가 이러는 게 불편했다. 이진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살짝 침울함이 묻어 나오는 미소에 승현도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며 활짝 웃고 있는 말티즈 사진을 띄운 핸드폰을 스르륵 내렸다.
“……정말 오해에요.”
승현은 이런 사소한 오해조차 거대한 파탄의 시작이 될 수 있다고 믿는 듯 이진의 마음을 풀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애초에 상대가 잘못됐다. 이진은 그 말이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진심으로 마음을 터놓고 친해질 상대도 아닌걸.
“너 나한테 실례한 너네 집 강아지처럼 눈치 본다고 말한 거 사과하면서 날 정말 강아지 취급하면 어떡해. 내가 진짜 강아지 같아? 내 꼬리 밟은 것처럼 미안해서 안달 내지 마.”
이진은 제대로 못을 박기 위해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승현은 여전히 편치 않은 듯 사과를 말하려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 그만해도 된다니까. 나 그냥 조금 민망해서 그런 거니까……. 괜히 유난 떨지 말고.”
이진이 선수를 쳤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마무리하고 계속 승현을 잡고 있던 손을 풀었지만 이번에는 그가 그 손을 덥석 잡아왔다. 갑자기 손이 잡힌 이진은 순간 승현이 자길 힘으로 제압하려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
“저는…… 첫날부터 형한테 도움만 받는데 미운털만 박히는 것 같아서요. 저 그냥 계속 미워하거나 멀리해도 괜찮으니까, 제가 형 싫어하는 게 아니란 것만 알아주세요.”
그렇게 말하는 게 더 부담스럽단 걸 모르는 걸까. 이진은 놀라 두근거리는 심장을 다스리려 노력했다.
승현은 자신이 이진의 손을 붙잡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앗, 죄송…….’이라 중얼대며 잡고 있던 두 손을 이진의 무릎 위로 가지런히 올려 뒀다. 본인도 방금 행동이 몹시 부자연스러웠다는 걸 알고는 있는지 도로 일어서서 제 침대로 향하는 몸짓이 마치 로봇처럼 삐그덕거렸다.
이진은 승현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길 바랐다. 딱 미열과 자신처럼 서로에 대해 궁금해하지도,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는 거리감을 원했다.
이진은 아직 과거, 잘나가던 시절의 선승현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자신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대단해질 예정인 사람이, 그 선승현이 자신에게 신경 쓰고 잘 대해 준다는 이유만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싶지 않았다.
다 같이 모였을 때 연습보다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먼저 가졌다.
“난 초등학생 때 잠깐 외국에서 자랐는데, 중학생 때 한국 돌아오면서 수업 일수인가 진도인지가 안 맞아서 1년 유급했어.”
“사실 저도…… 예고 들어가느라 1년 재수했어요. 그래서 스무 살이긴 한데 아직 고등학생이에요.”
미열과 하늘이 차례대로 털어놨다. 이진은 이에 대해서 아마 개인 인터뷰를 따 가지 않을까 예상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제발 숫자이고 싶다. 중반 넘어가니까 몸 늙는 게 팍팍 느껴져.”
윌리엄의 밝은 말에 진영이 한탄했다. 하늘은 엄살 피우는 거 아니냐며 웃었지만 나머지는 애매한 미소만 띠었다. 하늘이 승현의 바탕화면을 보고는 그 붕붕이인지 봉봉이인지 하는 강아지 사진을 보여 달라 했고 승현은 답지 않게 밝게 웃으며 핸드폰을 건넸다.
돌이켜 보니 그날, 너무 과민 반응을 한 것 같다. 척 봐도 말을 뱉어 놓고 당황하는 꼴이었으니 그냥 실수했나 보다 하고 넘겼어도 될 일이었다. 그런데 굳이 난리를 쳐 가며 무리해서 게임에서 포인트를 얻고, 꾸며진 게임에서 조금 유리한 위치에 섰다고 권력이니 뭐니 오만한 생각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진심으로 마음이 풀리지 않은 걸 들키는 바람에 승현에게 사과를 받았다.
선승현은 먼저 입을 여는 일이 드물긴 하나 말을 걸면 곧잘 대답했다. 대답할 말이 여의치 않아도 성가셔 하지 않았고 뭐라도 할 말을 찾으려 노력했다. 여태까지 두 사람 사이에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한 이유는 이진이 굳이 승현과 교류하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진은 승현도 말수가 적고 낯을 가리는 편이니 그것이 편하리라 자신을 합리화했다. 그러나 정작 선승현은 생각보다 타인을 진심으로 대하는 편이었으며 이진이 자신을 피하고 눈치 보는 걸 순전히 제 탓이라 여기고 있었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혼자만 고립된 기분이었을 텐데…… 그는 자신을 따돌리는 이진을 원망하지 않았다.
타인에게 무신경하면서 사소한 일에도 자격지심을 느끼는, 콤플렉스 덩어리인 유이진을 좋아해 줄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런 자신의 본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늘 타인을 밀어냈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그런 방어 기제가 과잉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고쳐야 하는데.’
지나고 나서 후회하는 걸로 고칠 수 있는 문제였다면 이진은 이미 평범한 수준으로 고민하고, 적당한 수준으로 괴로웠을 것이다.
“윌리엄이 진짜 미식축구를 해 봤다고?”
“하이스쿨에서 해 봤지. 좋은 선수는 아니었고 쿨해 보이고 싶어서 억지로 한 거지만…… 좋은 경험이었어.”
“케이 팝은 어쩌다가 하게 된 거야?”
“대학 다닐 무렵에 갑자기 케이 팝 붐이 오면서 관심을 가졌지. 당시 소속됐던 에이전시에서 살을 더 빼라고 난리를 쳐서 홧김에 엄마랑 같이 한국으로 들어왔어.”
귀를 기울이면 참 다양한 사연들이 들린다. 이진과는 다른 세상에서 겪는 아픔, 공감은커녕 이해도 어려운 고통들. 선택과 선택 사이에 어떤 사유를 했을지 타인은 결코 알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지금은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이지만, 너희들과 알게 되어서 좋아.”
“입에 버터 바른 말 진짜 잘한다.”
“버터 바른 말로 누군가 위안을 받을 수도 있잖아. 그게 중요한 거야.”
윌리엄이 손등이 위로 가도록 팔을 뻗으며 말했다.
“손 모으고 파이팅 한번 할까?”
민망하게도 윌리엄의 손 위로 포개지는 손은 없었다.
***
본격적으로 팀원들끼리 어울리기 시작하자 개인 인터뷰 요청이 잦아졌다.
“개인 인터뷰 하고 가실게요.”
미열이 두 번쯤 개인 인터뷰에 불려가는 걸 목격한 바 있지만 이진에게도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는 건 처음이었다. 지금은 미열과 이진, 승현과 하늘이 부름을 받았다.
개인 인터뷰는 자주 사용하지 않는 복도에서 이뤄졌다. 복도 끝에 세워진 패널과 조명 두 개, 의자 하나면 쉽게 인터뷰 룸이 완성됐다. 설마 이렇게 다 들리는 곳에서 촬영을 하는 건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자 스튜디오 쪽에서 카메라와 조명을 이고지고 걸어오는 스태프들이 보였다. 그들 뒤로도 참가자들이 한 무더기로 걸어오는 걸 보니 한 카메라에 최소 서너 명씩은 촬영할 모양이었다.
인터뷰에 익숙한 미열이 제일 먼저 의자에 앉았다. 미열은 평소보다 허리를 곧게 펴고 자세를 바르게 했는데 이진은 그 모습을 눈여겨보았다.
“형, 형.”
하늘이 돌돌 말린 이어폰을 건넸다. 받아들지 않고 바라보고만 있자 하늘이 이진의 핸드폰에 플러그를 멋대로 쿡 꽂고는 말했다.
“이런 거 옆에서 들으면 괜히 신경 쓰여요.”
그리고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하나 더 꺼내 승현에게 건넸다. 승현도 자기 것을 꺼내 보여 주더니 말없이 노래를 재생했다. 하늘까지 이어폰을 착용하고 나서야 이진은 황급히 노래를 틀었다. “룸메이트들과 사이가 좋은 듯한데…….” 하고 미열을 향해 묻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속마음을 털어놓으라고 하지만, 누군가 마음먹으면 충분히 들을 수 있는 거리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미열은 일반인이라곤 믿기지 않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대답을 이어 나갔다. 굳이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입 모양에서 ‘이진’이나 ‘승현’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