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15화 (15/173)

15화

“아, 죄송해요. 나쁜 뜻이 아니라…….”

“야! 너는…….”

굳어진 이진의 표정을 본 승현이 한 박자 늦게 다시 한번 사과했지만, 이번엔 미열이 타박을 하기도 전에 촬영이 시작되어 버리는 바람에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이건 진짜 무례한 거 아니야?’

이진은 좀처럼 평정을 되찾지 못하고 바닥에 긁힌 자국을 노려보며 흔들리는 동공을 애써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백미열 손버릇이 나쁜 이유가 있었다. 이렇게 틈을 주니 바로 함부로 말하다니.

“Welcome to Winner Takes All. Let’s start a survival show!”

낮게 깐 남자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며 촬영장 사방의 조명이 일제히 꺼졌다. 곧 은은한 한 줄기 빛만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고 박진감 넘치는 음악이 깔렸다. 자연스레 참가자들 사이의 분위기가 긴장으로 팽배해졌지만 이진은 도통 집중할 수가 없었다.

‘사람을 동물에다 대고 비교하다니. 내가 그렇게 잘해 줬는데 돌아오는 게 이거야?’

이진의 머릿속은 자신이 내지른 내적 비명으로 가득 찼다. 대화 상대가 몹시 한정적이던 이진은, 다소 짓궂긴 해도 반려견을 키우는 이들이 자신의 강아지를 데리고 한 비유가 나름 애정이 있는 상대에게나 사용된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번 게임의 룰을 설명하겠습니다. 잠시 후 재생될 노래의 첫 소절을 듣고 앞으로 나와 다음 소절을 따라 불러 주세요. 여러분의 노래는 기계에 의해 실시간으로 평가되며 획득한 점수만큼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스튜디오의 중앙에 일곱 개의 작은 무대가 놓였다. 스탠딩 마이크와 점수 표기용 모니터가 설치된 무대는 프로그램의 메인 컬러로 예쁘게 장식되어 있었다. 백여 명에게 주어진 무대가 일곱 개뿐이라니. 아는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게 전부가 아니라 남들보다 빨리 달려가 선착순으로 마이크를 쟁취하는 몸싸움도 포함된 게임인 듯했다. 결국 또다시 노골적인 경쟁이었다.

“여러분은 이 포인트를 통해 경매로 원하는 멤버를 낙찰받으실 수 있습니다.”

다음 이어진 말에 장내가 술렁였다. 경매라니. 아무리 자극을 중시하는 방송이라고 해도 이렇게 질 낮은 콘텐츠를 거리낌 없이 내보낼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특히 오늘은 처음으로 제대로 된 유니폼을 착용하고 하는 촬영이었다. 저번 포지션 변경 게임이 본 방송에선 대부분 편집되고 잠깐 스쳐 지나갈 분량이라면 오늘 촬영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할 터였다.

“경매라니……. 좀 심하네.”

“너는 내가 사 줄게. 걱정 마.”

“내기할래? 점수 낮은 사람이 하루 종일 노예하기. 콜?”

미열과 승현은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는지 저들끼리 내기를 시작했다. 내내 멍하던 이진의 정신이 내기 소리를 듣고 조금씩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선승현이 이진을 고작 한낱 개 취급한다면 제 분수를 알게 해 주면 그만이었다. 마침 이진은 승현의 기를 꺾어 주기 딱 좋은 환경에 있었다.

“나도 낄래.”

“응? 뭐를?”

“점수 내기. 나도 할래.”

“와. 형, 감당할 수 있어? 내가 뭘 시킬 줄 알고.”

미열이 능글맞은 아저씨 같은 미소를 띠우며 물었지만 승부욕에 불이 붙은 이진은 도리어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너야말로 긴장하는 게 좋을걸?”

열의에 불타오르는 이진의 목소리는 한 겨울처럼 찬 기운을 뿜었다.

“야, 너 때문에 형 화났잖아!”

이진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본 미열이 미소를 싹 지우고 승현을 구박했다. 크게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이진은 구태여 부정하지 않았다. 그 태도에 승현의 표정이 살짝 창백해졌다.

“형, 우리 붕붕이는…….”

승현이 뭐라 변명을 하려 입을 열었으나 스피커에서 큰 소리로 노래의 첫마디가 흘러나왔다. 노래가 멈춤과 동시에 휘슬이 울리고 곧장 이진과 미열이 벌떡 일어서 달려 나갔다. 몇 참가자들도 달려가 마이크를 잡고 섰다.

첫 곡은 애국가였다.

이진은 본인도 놀랄 만큼 선방했다. 제목과 가수, 노래를 매치시키긴 어려웠지만 의외로 귀에 익은 음악들이 꽤 많았고 앞에 노래방처럼 가사를 띄워 줘서 마이크만 쟁취하면 그 뒤론 일사천리였다.

“잔인한 여자라! 나를 욕하지는 마! 잠시, 너를 위해 이별을 택한 거야!”

이진은 한 곡도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100점씩을 얻어 갔다. 인간 주크박스가 된 것 같았다. 처음 몸싸움을 하러 이진에게 달려들던 사람들도 완전히 기세에 눌려 그에게만은 얌전히 마이크를 양보했다. 달그락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노래를 재생하는 기계처럼 이진은 쿡 찌르면 다음 소절을 뱉어 냈다.

“Lady, can you forgive me? For all I’ve done to you. Lady, oh, lady!”

처음에는 이진처럼 열의에 불탄 사람들이, 다음에는 얌전해 보이던 이진의 선방에 당황한 이들이. 그리고 그다음에는 이진의 독주를 막기 위해서 수많은 참가자들이 아무 노래에나 막 뛰어나왔지만 누구도 이진처럼 꾸준하진 못했다.

“그대 기억이, 지난 사랑이 내 안을, 파고드는 가시가 되어─”

처음에야 미열도 열심히 뛰어나갔지만 이진이 저렇게 포인트를 모아 대니 멤버 영입에도 문제가 없어 보이고, 제 옆에서 미동도 않고 방청객처럼 신기한 눈으로 이진의 독무대를 구경하는 승현이 자신 대신 충실한 노예가 되어 줄 테니 안심이었다.

미열은 점점 요령을 부려 간간히 사람이 없어 보일 때만 잠깐 뛰어갔다 돌아왔다. 승현은 애초에 미열을 사 준다는 말이 의미 없는 농담이었는지, 참가할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한 번 더 나에게 질풍 같은 용기를! 거친 파도에도 굴하지 않게─!”

“굴하지 않게!”

결국 마지막에는 점수 얻기를 포기한 사람들과 이진의 단독 콘서트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이진의 노래 실력이 독보적이라 같이 무대에 오르는 굴욕을 피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었다.

기어이 스무 곡 전부 100점을 받고 2000점을 얻은 이진은 뿌듯한 미소를 띠고 자리로 돌아왔다. 열기가 가시고 뒤늦게 부끄러움이 밀려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뭔 수를 썼길래 전부 백점이야?”

“그냥 소리 크게 내면 점수 잘 주는 거 아니었어?”

“아니, 그게 언제적 기계야.”

미열이 할아버지냐고 타박을 해도 이진은 빨간 얼굴을 하고 싱글벙글했다. 제 손으로 거머쥔 1등이라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센터랑 래퍼는 한찬우랑 김진영으로 하기로 했고, 서브 보컬2 말인데. 잘만 하면 정하늘도 섭외할 수 있을 것 같아. 얘 오늘 완전 죽 쒀서. 전에 말한 바비 출신 기억해?”

”응. 기억나. 어리고 잘한다면서.”

”서브 보컬3은 다른 오디션 프로에서 3등인가? 5등, 7등? 아무튼 거기까지 갔던 박희영이랑 윌리엄이라고 혼혈 모델 있는데, 얘네가 그나마 화제성 좀 있는 애들일 거야. 피치의 허동규는 포인트 좀 긁어 갔으니까 경매에는 안 나올 것 같고.”

이진은 미열이 추천하는 후보들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포인트도 두둑이 모아 뒀겠다, 이제야 제대로 한 배에 탄 기분이 들었다. 경매에 참가할 수 있는 사람은 최고 득점자 열여섯 명이었다. 그 외에 포인트가 있는 참가자를 낙찰받았을 시 그의 포인트를 사용할 수 있었다.

“든든하다, 든든해!”

미열이 이진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경매는 포지션별로 진행됐다. 이진은 메인 보컬을 넘기고 리드 보컬에서 미열을 데려온 뒤 센터에서 조금 망설였다. 찬우의 실력이 소문이 났는지 그를 향한 경쟁이 심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멀뚱히 서 있어야 했다. 이진은 충동적으로 아무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마지막 멤버를 데려갈 뻔했으나 다행히 이미 찬우를 낙찰받은 뒤였다.

“이진이가 날 이렇게 고액에 데려와 주다니……. 나 좀 감동 받았어.”

며칠 얼굴을 맞댔다고 이진을 친하게 대하던 찬우였으나 그가 자신을 데려가리라곤 생각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더 대화를 하고 싶어 보였지만 이진은 마저 경매에 참가해야 했다. 대신 찬우는 먼저 낙찰되어 이진의 뒤에 앉아 있던 미열과 인사를 했다.

센터의 다음은 서브 보컬1, 바로 승현의 차례였다. 승현이 같은 포지션 사람들과 함께 단상 위로 올라와 나란히 섰다.

“선승현 참가자에게 10포인트요.”

“김보원 참가자에게 10포인트 쓰겠습니다.”

“리웨이 참가자에게 10포인트!”

“선승현 참가자에게 20포인트입니다!”

이진은 10포인트 단위로 올라가는 점수에 괜한 기력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시청자들과 선승현에게 이진이 얼마나 주목할 만한 인물인지 각인시킬 생각이었다. 어차피 포인트도 남아도니 이걸 그냥 버리기도 아깝지 않은가.

“선승현 참가자에게 500포인트요.”

모두의 시선이 이진에게로 쏠렸다. 대부분 반응이 시큰둥한 승현도 깜짝 놀라 표정이었다. 이진은 가진 자의 여유라는 걸 처음으로 부려 보며 승현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승현이 단상 위에서 내려와 이진을 향해 걸어왔다. 순간 오싹한 쾌감이 등골을 싹 타고 올라왔다.

이게 권력의 맛이구나.

“형.”

“응?”

“……아니에요.”

승현이 이진에게 뭐라 말하려다 말고 미열과 함께 앉았다. 이진이 승현을 돌아봤으나 승현은 이진을 등지고 돌아앉아 있었다.

‘뭐지?’

승현에게 더 신경을 쓰기 전, 서브 보컬2의 경매가 시작되었다. 서브 보컬은 누가 들어와도 상관없다는 분위기라 다른 포지션에 비해 경매가 신속히 끝났다.

서브 보컬2의 정하늘이 팀에 합류했을 때 미열은 서브 보컬3에 굳이 다른 대형 출신을 끼워 넣지 말자고 제안했다. 대형끼리 기 싸움이 붙으면 피곤해진다는 이유였다. 박희영은 k-pop 뉴비즈라는 오디션 프로에서 9위를 하고 이후 피치 엔터로 스카우트되었다. 같은 소속사에 허동규가 남은 포인트를 탈탈 털어 그를 데려가고 싶어 했으나 둘은 포지션이 겹쳐서 불가능했다. 이진은 미열의 조언을 듣고 윌리엄을 낙찰받았다.

미열이 꼭 데려와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던 래퍼 진영의 차례가 가장 불꽃 튀었다. 아이돌 사이에서 래퍼는 노래나 춤 실력이 부족한 멤버가 맡는 포지션이란 인식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탓인지, 청소년 힙합 대회에서도 수상한 경력이 있고 이후로도 언더에서라도 꾸준히 활동을 해 왔던 진영은 많은 팀에서 섭외 1순위로 생각하는 듯했다.

이러나저러나 결국 진영은 포인트를 제일 많이 획득한 이진의 손아귀로 떨어졌다. 백미열, 한찬우, 선승현, 정하늘, 백 윌리엄, 김진영 과거 데뷔 멤버가 넷, 긴가민가하지만 마지막 라운드까지 갔던 멤버가 하나. 이진은 제가 일궈 낸 소득에 크게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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