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이진 씨는 굉장히 어른스러운 것 같아요. 음악 하는 애들은 좀 다들 어린애 같은 면이 있는데.”
어느 날, 협찬받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쉬는 시간에 조엘이 한 말이었다. 이진은 대화할 힘이 없어 무리에 끼지 않고 벽면 거울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겉도는 이진을 챙기듯 조엘이 먼저 다가와 곁에 앉았다.
“일부러 어린애처럼 굴기도 할 만큼 이쪽 업계에서 요구하는 캐릭터가 확고한 편이잖아요. 세상에 대한 관심도, 자기만의 신념도 없어야 하는. 영원히 어린애의 모습으로 가둬 두고 싶어 하죠. 사실 그건 불가능한 건데.”
처음의 마냥 밝아 보이던 이미지와는 달리 조엘와 대화를 하면 할수록 생각이 깊고 신중한 진짜 성격이 겉으로 드러났다.
“그래도 팬들이 그걸 원하니까. 그 사람들이 우리한테 원하는 건 일상에서 도피할 수 있을 만큼 짧고 강렬한 한순간의 자극이니까, 그런 사람이 되고자 연기하죠. 가끔은 스스로를 속이기도 하고요.”
이진은 피스타치오 맛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면에서 이진 씨는 타고난 연예인 체질이랄까?”
“제가요?”
“뭐 대부분 연예인 체질이라 하면 저처럼 관심 받고 싶어서 안 달난 사람들을 주로 일컫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라요. 스스로를 속이면서 우상을 연기하는 건 언젠간 속에서부터 곪아 들기 마련이잖아요. 반면, 이진 씨는 자신을 숨기지 않죠. 아마 숨기려고 해도 다 티 나는 타입인 것 같고.”
조엘은 하하, 웃으며 이진을 놀리듯 말꼬리를 늘였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지는 몰라도 그는 제법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분명 사랑받을 거예요. 이진 씨한테는 그런 기운이 느껴져요.”
남들이 원하는 모습을 연기하지 않아도 사랑받을 수 있다. 참 감사한 축복이었다. 다만 아직 대중과 만나 보지 못한 이진에겐 와닿지 않는 말이었다. 이진이 어리둥절한 기색이자 조엘이 민망해하며 고개를 푹 떨궜다.
“아, 내가 너무 꼰대 같은 말을 했나?”
“아니요.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하죠. 그런데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아서요.”
“내가 헛 다리 짚은 걸 수도 있으니까 대충 넘어가 주세요. 그냥 내가 이진 씨 팬이란 것만 알아 줘.”
그의 부드러운 응원에 이진도 미소를 지었다. 유명한 사람이 보이는 관심이 기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말로 기쁘지는 않았다. 조엘의 순수한 호의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진은 그들이 보내는 무책임하고 달콤한 말에 홀랑 넘어가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잡을 뿐이었다.
이진은 솔직히 자신이 남들과 함께 살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이진은 아주 어릴 적부터 혼자인 게 자연스러웠다. 자신의 예민한 성격을 잘 알기에 타인과 한 공간을 공유할 때 받을 스트레스를 생각해 일부러 그럴 자리를 피하기도 했다.
“승현아, 잘 잤어?”
“…….”
그래서 이진은 요즘 자신에게 놀라고 있었다. 예상 외로 단체 생활이 체질인 건지, 아니면 적당히 친하면서도 사생활을 침범하지 않는 두 사람과 상성이 잘 맞는 건지. 이들과 함께하는 합숙 생활이 크게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야, 빨리 일어나! 배고파 돌아가시겠다.”
“…….”
“물이라도 가져다줄까?”
아니, 오히려 즐거웠다. 오로지 연습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 자신을 신뢰하는 멘토와 열정적인 동료들. 그리고 무엇보다 방에 돌아왔을 때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좋았다. 불이 꺼져 어두운 방에 들어가더라도 타인을 기다리는 설렘을 알게 되었다.
“……백미열.”
“왜 임마.”
“나가.”
승현의 이불 속에 들어가 있던 미열이 쿵, 하고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아침을 버거워하는 승현을 깨우는 요령도 생겼다. 내심 아침 먹으러 갈 때 승현을 두고 가는 게 걸렸던 이진은 문득 어디선가 ‘사람의 체온이 기분 좋은 아침에 도움이 된다’는 정보를 읽은 게 생각나 미열을 승현의 이불 속으로 집어넣어 봤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효과가 있었다. 그때까지 아무리 건드려도 깨지 않던 승현이 번쩍 눈을 뜨고 일어난 것이다. 승현의 표정을 보면 어쩐지 기분 좋은 아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지만…….
승현을 놀리기 좋아하는 미열이 자진해서 그를 깨워 댔기에 결국 세 사람은 일주일째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오늘이 팀 정하는 날인가?”
식빵에 든 건포도를 골라내며 미열이 물었다. 이진이 사진첩에서 일정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열과 대화를 나눈 밤 이후로 열흘이 흘렀다. 계절은 완전히 봄을 맞았고 그사이 고등학생 컨셉으로 프로필 사진을 촬영했다. 교복처럼 생긴 단체복의 디자인 컨펌이 안 나는 바람에 촬영이 예정보다 늦어졌다고 했다. 그 말이 사실임을 보여 주듯 촬영한 바로 다음 날 홈페이지에 참가자들의 프로필이 올라갔다.
셔츠와 재킷이 순백색이고 베스트와 리본이 옅은 회색빛인 유니폼은 언뜻 몹시 고급스러워 보였지만 막상 소화하기는 참 어려운 옷이었다. 핏이 일자로 떨어져 조금이라도 군살이 있으면 티가 났고, 색이 밝다 보니 옷에 묻혀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아직 투표 폼이 열리지 않아 정확한 반응을 집계할 순 없었지만 미열의 말로는 잘생긴 사람 위주로 조금씩 팬덤이 형성되고 있다고 했다. 아직 실력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게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미열이 미묘한 표정으로 이진을 쳐다봤다.
“가끔 형은, 너무 순진하다고 해야 하나…….”
“무슨 소리야?”
“아이돌은 실력순이 아니잖아. 실력은 차근차근 발전하는 거지 지금 데뷔하는 아이돌들 중에 수준급인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이진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으나 여전히 찝찝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얼굴만으로 평가받는 건 그가 평생토록 질색해 왔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진은 실제로 자신이 외모 덕을 많이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 전까진 누릴 수 있는 혜택을 일부러 외면한 채 살아왔지만 이 프로그램에 나온 이상 더 이상 회피할 수는 없었다.
열흘간은 그렇게 연습과 가벼운 촬영만이 예정되어 있었다. 음악 방송 출연권을 두고 본격적인 팀별 경쟁을 시작하기 전 워밍업 타임이었다.
홀로 뛰어난 사람이 아닌 팀에 어우러지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미명하에 그동안 진행되던 개별 연습은 오늘부로 막을 내린다. 각 파트에서 한 명씩 일곱 명이 모이면 총 열여섯 개의 팀이 결성되는데, 각각의 팀이 공연을 한 뒤 매겨진 순위를 통해 얻게 되는 팀별 점수와 개인 점수를 합계하여 음악 방송 출연 멤버가 결정된다.
모든 조별 과제가 그렇듯 좋은 팀원을 만나는 것이 좋은 결과를 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무엇보다 처음으로 대중들에게 자기소개를 하는 자리이니만큼 오늘 정해진 팀원은 향후 인기도와 입지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미열은 이미 이진에게 가급적 같은 조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어필한 바가 있고, 미열에 의하자면 승현은 미열이 하자는 대로 따를 것이라고 한다. 그때 이진은 센터에 찬우를, 미열은 래퍼에 진영을 추천했다.
“팀원 잘못 만나면 완전 망하는데 큰일 났다. 이상한 애 걸리면 어떡하지?”
오늘 촬영은 점심부터 시작됐다. 스튜디오로 가는 길에 미열이 징징댔다. 이진도 그의 말에 어느 정도 동감했다. 그런데 별나게도 언제나 잠자코 있던 승현이 미열에게 떨떠름한 소리를 했다.
“무슨 헛소리야. 다 같이 열심히 하는 거지 좋고 나쁘고가 어디 있어.”
“야, 인마. 실력 좋은 팀원 만나서 업혀 가고 싶을 수도 있지. 왜 트집이야.”
“사람을 그런 식으로 구분 짓지 마.”
허를 찔린 미열이 발끈해서 대답했다.
“서바이벌 오디션인데 실력이 신경 안 쓰일 수 있냐?”
“너 설마…… 이진이 형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 아니지?”
승현도 지지 않고 맞섰다. 둘은 잠깐 서로를 노려보다가 말없이 다시 발걸음을 뗐다. 미열이 별난 놈이라며 다 들리게 욕을 했지만 승현은 듣지 못한 척 무시했다. 빙판 위를 걷는 것 같은 아슬아슬한 침묵이 이어졌다.
얼마 전 포지션 변경 게임을 진행했던 스튜디오에 도착해 구석에 쭈그리고 앉을 때까지도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진은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조금 움츠러들었다. 미열의 말에 동료를 향한 예의가 없긴 했지만, 승현이 거기에다 대고 날을 세울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두 사람의 싸움에 승현이 자신을 끌어들여 이진은 더욱 곤란해졌다.
굳이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한다면 그는 미열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비록 사람을 평가하는 듯한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나름대로 생존하기 위해 전략을 세운 것으로, 생각 없이 늦잠이나 자는 승현과 비교하면 차라리 나았다.
미열이 한 손으로 제 머리를 마구 헝클이더니 먼저 화해의 신호를 보냈다.
“아. 선승현 너 때문에 이진이 형이 불편해하잖아.”
“뭐.”
“눈치 없는 자식. 진짜 넌 카메라만 없었으면 쥐어 터졌어.”
말투는 몹시 시비조였지만 이진은 두 사람이 더 이상 싸우지 않았기에 화해의 신호라 추측했다. 미열이 계속 승현을 구박하고, 승현은 듣는 둥 마는 둥 뚱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사과하라고.”
“아!”
미열이 손을 뻗어 승현의 뒷목을 턱, 소리가 나게 때렸다. 미열의 손버릇이 나쁜 편이란 걸 알긴 했지만 이번엔 이진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승현은 화를 참는 듯 심호흡을 두어 번 하더니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이진에게 사과했다. 사과를 받는 당사자는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건지 조금도 이해 못 하고 있었지만.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해서, 신경 쓰이게 만들어서 죄송해요.”
“아냐. 아니, 뭘…… 그런 걸로. 자기 입 가지고 하고 싶은 말 하는 거지.”
“형, 은근 맥이는데?”
“아니, 정말…….”
이진은 승현이 가끔 저자세로 나오면 당황스러웠다. 미열이야 워낙 이리튀고 저리 튀는 성격이라 그렇다 치더라도 승현 같은 이가 스스럼없이 고개를 숙이면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무엇보다 승현과는 아직 그렇게까지 터놓고 대화를 한 적이 없어서 그런지, 겉으로는 고개를 숙였어도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른다는 사실이 불안했다.
잘못을 시인하길 달가워하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승현이 지금은 멀쩡한 척 참고 있지만 이진의 기억 속 그는 늘 논란의 중심에 있었으므로 조만간 악명에 걸 맞는 행동을 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었다. 승현의 화제성에는 편승하고 싶지만, 논란거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저 새끼는 친구가 없어서 해야 할 말,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 못 해. 옆에서 계속 잔소리를 해야지.”
“아냐.”
선승현에게 친구가 없다는 정보를 대충 흘려들으며 이진이 연신 손사래를 쳤다. 빨리 이 화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잠자코 듣고 있던 승현이 한 말이 세 배는 더 충격적이었다.
“어쨌든 저도 조심할게요. 형이 저 불편해하는 거 아니까, 노력해야죠.”
“뭐? 아, 아니야! 왜 그렇게 생각해.”
“형이 자꾸 제 눈치를 보니까요. 꼭 우리 집 개가 카펫에 실례한 것처럼 이러고.”
“……뭐?”
승현이 눈썹을 모으며 이진의 표정을 흉내 냈으나 이진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모든 프로세스가 정지해 버렸다. 시시때때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확인하긴 했지만, 승현이 그를 눈치채고 자신을 신경 쓰고 있을 줄 몰랐다. 무엇보다 그의 눈에 이진이 그런 식으로 비치고 있었을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