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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13화 (13/173)

13화

“형. 여기 애들…… 진짜 데뷔할 만한 실력자는 드물단 거 알아?”

“무슨 소리야?”

미열이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그러니까, 이 방송이 성공한단 보장이 없잖아. 혹은 방송이 성공하더라도 참가자에겐 별 이득 없이 단물만 쏙 빨리고 버려질지도 모르고. 마지막에 데뷔라도 하게 되면 다 키워 놓은 연습생을 다른 소속사에 줘 버리는 형국이니까.”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음악 방송으로 유명한 SSTV에서 야심차게 기획한 오디션 프로에 연습생을 한 명도 내보내지 않고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 방송국의 횡포에 맞설 힘이 없는 중소형 기획사일수록 방송국의 체면을 세워 줘야 했다.

“그래서 여기 출연한 연습생 애들은 사실상 소속사에서는 데뷔시켜 줄 생각 없는, 2군이나 3군 애들인 거지. 나이가 너무 많거나 실력이 별로거나 아니면 뭐 얼굴이 부족하거나. 어차피 자기 소속사에선 데뷔 못 할 애들 방송 내보내 주면 생색도 낼 수 있고, 여기서 데뷔 못 하면 네 노력이 부족했다고 하면서 적당히 쫓아낼 구실도 되겠지.”

“혹시라도 데뷔하면?”

“그 정도 실력이 증명되면 도중에 하차시키려고 수작을 부리겠지. 전부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 친구는 데뷔고 뭐고 계약 끝나기 전에 소속사 나가면 위약금을 전부 물고 나가라고 했다던데? 남은 계약 기간 동안 활동 수익 몇 퍼센트 떼어 준다던가 하는 계약서 작성하고 온 데도 있다고 하고.”

억지로 등 떠밀린 곳이 꿈을 이룰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니. 그 기회조차 한없이 연습생들에게 불리한 조건이었다.

“한찬우 알지? 걔는 대표가 자기 손에 쥐고 놔주기 싫어서 엄청 말렸는데 결국 계약 깨고 왔잖아. 데뷔가 세 번인가 밀렸대.”

이진은 잠자코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 속이라 보이진 않겠지만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런데 대형에서 1등 노릴 법한 애 하나에 그냥저냥인 애들을 붙여서 보낸 거야. 화제성도 확보됐겠다, 소속 연습생이 우승하고 기획사를 자기네로 선택하면 완전 꿩 먹고 알 먹고잖아. 바비의 정하늘, 루키의 강재규, 피치의 허동규. 셋 다 다음 분기 데뷔 후보군이래. 만약 우승 못 하고 데뷔하면 3년 정도 외부 활동 하다가 자기네 그룹에 합류시키거나 데뷔하기 전에 인지도 쌓은 걸로 만족하고 최종 라운드 가기 전에 자진 하차 시키겠지.”

미열은 아예 엎드려 이진을 바라본 채로 말을 이었다. 그 셋은 이진에게도 익숙한 이름이었다. 정확히 누가 데뷔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아마 적어도 후보에는 이름을 올렸을 것이다.

“쉽게 말해 이곳은 원래 뒷배 없이 궁지에 몰린 애들이랑 대형 기획사의 자리 싸움 판이었던 거지. 그런데…… 이틀 만에 일반인 출신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나타난 거지.”

이진은 승현을 바라봤다. 대형 기획사에서 선별된 사람들을 모두 제치고 당당히 우승을 차지한 선승현은 어느새 옆으로 웅크리고 누워 이불을 목 끝까지 덮고 잠이 들어 있었다. 미열의 설명을 들으며 상황을 파악해 보니 승현은 과연 제 생각보다도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가 어떤 태도로 팬들을 대하고 기만했는지와는 별개로, 그에겐 분명 사람을 이끄는 힘이 있었다.

“유이진. 바로 형이 지금 제일 눈에 띄는 일반인 출신 참가자야.”

“……내가?”

“형이랑 같은 방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흥분했는지 미열이 조금 커진 목소리로 말했다. 당황한 이진이 몸을 반쯤 일으켜 2층 침대에서 머리를 쑥 내민 미열을 올려다봤다.

“형은 우선 생긴 것부터 방송 타면 시선 집중 각인데, 스스로 메인 보컬 파트에 들어온 걸 보니 실력에도 자신이 있어 보인단 말야. 춤이나 노래 둘 중 하나만 잘하면 되는데 춤도 나쁘지 않고. 시청자들도 나름대로 이길 것 같은 참가자한테 투표하고 싶어 할 테니 초반부터 어필만 잘 되면 형은 사실 우승 후보 중 하나인 거잖아.”

이진은 우승 후보라는 말에 아예 일어나 앉았다. 창문 밖에서 흘러 들어온 달빛에 비친 미열의 표정은 평소보다도 냉철하고 굳건해 보였다. 이진은 미열의 다음 말을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솔직히 난 형한테 조금 기대 가려는 마음이 있어. 처음 정문에서 형이 걸어 들어오는 걸 봤을 때 완전 땡잡았다고 생각했거든.”

그건 이진이 해야 할 말이었다. 이진은 자신을 그렇게 뛰어난 인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어떻게든 데뷔하겠노라 마음을 먹긴 했지만…… 자신을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진의 가장 큰 약점이자 제일 먼저 드러날 밑천은 바로 인성이었다.

이진은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고 이끌어 갈 만한 그릇이 못되었다. 제게 먼저 다가오는 사람은 경계하고, 다가오지 않는 사람을 미워했다. 잘난 사람은 질투하고 못난 사람은 경멸했다. 하물며 사교성도 부족해 친구도 쉽게 사귀지 못하던 이진이다.

“난…….”

“그렇게 어처구니없단 표정으로 보니까 좀 민망한데.”

“그게 아니라…….”

이진은 말끝을 흐리며 뒤통수를 보인 채로 미동 없이 누운 승현을 바라봤다.

“승현이는?”

“선승현 쟤는 솔직히 무슨 생각으로 나왔는지 모르겠어. 혼자 출연하긴 무서워서 같이 가자고 꼬셔 보긴 했는데 진짜로 나올 줄이야. 얘가 춤을 그렇게 금방 외울 수 있는지도 몰랐어. 노래는 노래방에서 가끔 들어 봤지만…… 뭐 가창력보단 음색으로 밀고 가는 타입 정도? 대학도 완전 다른 과고.”

승현을 향한 미열의 평가는 생각보다 가차 없었다.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친구인 것 같다가도 서로에게 매정한 부분이 있었다. 그게 친한 사이에서 나오는 신뢰인지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물론, 훈련받은 적 없으니까 이 정도면 우수한 요건이긴 한데. 반짝 스타가 되기에는 조금 아쉽다 이거지.”

미열은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진은 잠시 침묵하다가 미열에게 물었다.

“그럼 너는?”

“응?”

“네가 생각하기에 너는, 우승 후보감이라 할 수 있어?”

미열이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시선을 피했다.

“나는 솔직히 인지도 면에서는 뒤처지지 않을 자신이 있어. 하지만 코어 팬끼리 싸움에서 표를 많이 모아 올 수 있느냐, 하면 아닌 것 같거든.”

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가 아니라 미열의 말을 이해했다는 뜻이었다. 3년 후의 백미열과 선승현을 데려다가 이 말을 들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네 예상이 맞았느냐 묻고 싶었다.

미래……. 과거로 돌아온 이진이 다른 선택을 내린 순간, 미래는 불확실해졌다.

이진이 화제성에 얹혀 가려던 백미열은 오히려 유이진을 우승 후보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드러내면서 은근히 ‘인지도에서 뒤처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며 자기 어필을 빼먹지 않는 미열의 모습에서 이진,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미래를 아는 사람은 오직 이진뿐이다. 평범한 대학생인 그들이 초반에 탈락할까 불안해하는 건 당연했다. 아직 제대로 된 프로필 사진도 찍지 않았으니 투표 등수와 팬 반응을 보며 살아남았다 안도를 하는 것도 아직은 멀고 먼 일이었다.

“이제 나랑 말 안 해?”

고개를 숙이고 생각을 정리하던 이진이 도로 자리에 정자세로 눕자 미열이 고개를 조금 더 빼며 물었다.

“우선은 내일을 위해 자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래. 알았어.”

미열도 부스럭대며 이불을 정돈하고 몸을 누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이진은 미열이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든 이후로도 한동안 잠들지 못했다.

선승현을 꺾고 우승을 거머쥐는 환상이 멈추질 않았다. 화려한 무대 위에서 가장 크고 밝은 조명을 받으며 관중들의 떠나갈 듯한 박수갈채를 익숙한 듯 흘려보낸 환상 속 이진은 몸을 틀어 그를 바라봤다.

이진을 냉정한 눈으로 돌아보던 승현은, 이곳에서는 마치 구애를 하듯 열렬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버리지 말아 달라는 애절한 눈빛으로.

***

우선 당장 오늘만 생각하자고 마음을 먹으니 시간은 금세 흘렀다. 같은 메인 보컬 포지션 사람들은 대체로 친절했다. 가끔 이진을 질투하듯 날선 말투를 마주치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는 그런 시기 섞인 태도들에 더 익숙했다.

마주 욕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척 넘기는 일이 조금 어렵긴 했지만, 새로 만난 멘토가 굉장히 긍정적인 기운을 가진 사람이라 반 분위기는 대체로 유한 편이었다.

새 포지션의 멘토는 아이돌로 데뷔했다가 요즘은 솔로로 더 잘나가고 있는 5년 차 가수 조엘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진을 콕 집어 자기 회사의 보컬 선생님보다 낫다며 엄청나게 띄워 줬다.

“다들 이런 후크 송에서도 감정을 싣는 연습을 많이 하면 좋을 것 같아요. 바로 우리 이진 씨처럼요!”

첫 레슨 때는 직설적인 칭찬에 익숙하지 않아 열이 오르는 뺨을 감추기에 급급했었다. 하지만 조엘 멘토가 원래 천성이 긍정적이고 칭찬에 헤프다는 걸 알고, 연습 시간 동안 내리 좋은 소리만 듣다 보니 그 화법에 금방 적응하게 되었다. 이진은 나중에 방송될 영상에 ‘오늘도 화목한 메인 보컬반’ 따위의 자막이 박혀 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1라운드의 경연곡은 ‘Choose one’라는 제목의 단조로운 후크 송이었다. 밝은 멜로디와 빠른 템포, 프로그램의 정체성인 경쟁과 승리. 참가자가 우승자를 선택한다는 시스템을 러브 송의 틀에 맞춘 가사는 노골적이고 뻔했지만 그만큼 듣는 이의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노래와 스토리의 결합. 뮤지컬 곡이 감정적으로 폭발적인 시너지를 내는 원천이잖아요. 우리와 결합된 스토리는 리얼 타임 실제 상황이니까 훨씬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거예요. 가사를 느끼면서 불러 봅시다.”

조엘이 멘토링하는 포지션이 메인 보컬이라 그런 건지 센터 포지션과는 중점적으로 보는 포인트가 달랐다. 홍서가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아이돌로서의 무대 매너를 전문적으로 가르쳤다면 조엘은 음원만 듣더라도 가수가 궁금해지는 노래를 부르자고 힘을 돋웠다.

You should choose one.

선택의 때가 왔어.

Can I be your only one.

날 선택해 줄래.

We could go higher.

너와 함께라면.

I can be the only one for you.

하이라이트 파트는 리드 보컬과 메인 보컬에게 한마디씩 번갈아 가며 분배되었는데, 샤우팅을 하다시피 뽑아야 하는 고음 파트의 영어 가사가 메인 보컬에게 전부 몰려 있어 아무래도 감정 잡기가 어려운 면이 있었다. 가사 자체도 공감하기 어렵게 막연한 편이었다.

“나 영어 발음 너무 안 좋아.”

“악보 밑에 이거 뭐야? 발음 적어 둔 거야?”

강희가 지흔의 악보를 뺏어가 놀렸다.

“유슛비츄줜.캐나, 비욜온리원……. 이렇게까지 적어야 하냐?”

“아, 놀리지 말라고! 나 수능 영어 9등급이란 말이야…….”

“찍어도 그것보단 잘 나오겠다!”

강희가 스물한 살, 지흔이 스무 살이라 한창 수능 얘기를 꽃피울 나이긴 했다. 이진은 자신의 수능 평균이 3등급이었던 어렴풋한 기억만 남아 있어 그들의 대화가 마냥 어리게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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