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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12화 (12/173)

12화

노래가 리플레이 되면서 줄넘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거대한 원을 그리는 묵직한 줄 안으로 용기 있는 사람들부터 하나둘씩 뛰어들었다.

“히압!”

한찬우가 입으로 효과음을 내며 줄 안으로 들어갔다. 남들은 열 번을 세느라 긴장해 있는데 운동 신경이 탁월한 찬우는 줄을 넘으면서도 노래에 맞춰 안무를 완벽히 추는 기행을 보여 줬다.

“와. 대박이네.”

찬우를 보고 미열이 입을 적 벌리고 웃었다. 찬우는 정확히 열 번째에 가볍게 줄 밖으로 빠져나왔다. 찬우와 같이 있었는지 윤인준과 오연재, 이진연, 이우진이 나란히 줄을 빠져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도 들어가야지.”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미열이 못 들어갈 것 같다고 미적거리던 사이, 노래가 거의 끝날 무렵이 되었다. 이진은 미열을 두고 갈 만큼 모질지 못해 발이 묶여 버렸다. 막무가내로 데리고 들어갈 수도 없는 게, 한 사람이 삐끗해서 같이 뛰던 사람들이 모두 탈락하는 경우가 방금 눈앞에서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억울할 법도 했지만 카메라 앞에서 게임을 하다가 화내는 치졸한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는지 다들 괜찮다고 웃으며 넘어갔다.

“계속 랩 하다가 말 거면 그러고 있던가.”

승현이 미열에게 말하고 먼저 성큼성큼 줄 안으로 들어갔다. 이진도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 미열도 슬슬 용기를 내지 않으면 안 될 때라는 걸 느꼈는지 요란 법석을 떨면서도 이진의 뒤를 따라왔다.

줄 안에 진입하기까지는 성공적이었다. 쌩쌩 지나가는 굵은 줄이 위협적이긴 했지만 박자가 일정했기에 그다지 무섭지도 않았다. 미열도 벌벌 떨던 것에 비하면 잘 따라왔고, 승현은 뒤를 돌아 늦게 들어온 미열과 이진을 바라보는 여유까지 있었다.

“어?”

안정적으로 열 번을 무사히 뛰고 줄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돌아가는 속도가 빨라졌다. 노래가 끝나기 직전이라 줄을 돌리는 개그맨들이 장난을 치는 모양이었다. 사전에 협의된 건지 뭔지 스테프들은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스톱! 제발 스톱해요!”

세 사람과 함께 줄 안에 들어와 있던 참가자가 그만하라고 외쳤다. 억양이 살짝 어눌한 게 외국인 참가자인 것 같았다. 그러나 줄 안에 있는 참가자들이 아무리 항의해도 줄의 속도는 줄지 않았다. 오히려 땅에 발이 닿아 있는 시간이 1초도 되지 않을 만큼 점점 더 빨라졌다.

노래가 끝나고 나서야 휘슬이 울리며 게임이 끝났다. 가까스로 줄에 발이 걸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버틴 사람을 포함해 생존자는 총 스물일곱 명이었다.

휘슬 소리가 들리고 다들 한숨 돌리려던 중, 빠른 속도로 돌아가다 갑자기 공중에서 멈추자 반동을 이기지 못한 줄이 이진의 머리 위로 쏜살같이 내려왔다. 짜악, 큰 소리와 함께 이진의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아!”

“악!”

이곳저곳에서 고통에 찬 소리가 들렸다. 얼룩덜룩해진 시야가 도로 돌아오고, 이진은 한쪽 뺨에서 불에 덴 듯한 통증을 느꼈다. 반사적으로 그쪽 얼굴을 감싸고 몸을 살짝 웅크렸다.

“형?”

“어? 뭐야! 형 얼굴 맞았어?”

승현이 이진의 손을 잡아채고 화끈거리는 얼굴을 확인했다. 시야에 선승현의 얼굴이 가득 들어와 깜짝 놀란 이진이 붙잡힌 자신의 손을 빼내 도로 얼굴을 감쌌다. 승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마지막까지 줄 안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단체로 줄에 얻어맞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다들 피하지 못하고 팔이나 머리를 맞았는데, 운이 나쁘게도 얼굴에 얻어맞은 이진은 반쪽 얼굴에 커다란 채찍 자국이 생기고 말았다.

“이거 약 발라야 돼요.”

“아니, 잠깐…….”

“여기 부상자 있어요!”

승현의 외침에 각자 통증으로 부산스럽던 사람들이 하나둘 이진을 바라봤다. 잘생긴 청년들이 엄살 피우는 모습을 껄껄대며 지켜보던 두 개그맨도 조금씩 심각해지는 상황을 파악을 하고 후다닥 달려와 미안하다고, 많이 다쳤냐고 물어 왔다.

“아이고 미안해요. 우리는 그게 그렇게 떨어질 줄 모르고…….”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진은 바짝 거리를 좁히고 제 얼굴에 난 흉터를 빤히 바라보는 승현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고 얼빠진 소리만 냈다. 버스 정류장 광고판보다 선명한 실물이 눈을 마주치며 괜찮냐고 물어 대는데, 괜찮을 리가 없었다.

스태프가 구급상자를 들고 와 빨갛게 흉이 지고 부어오른 상처를 치료할 때까지도 승현은 굳은 얼굴을 펴지 못하고 이진의 옆을 지켰다. 뒤에서 미열이 그의 등을 토닥이며 진정시키는 것 같았다. 그제야 이진은 아까 전 방에서 승현과 단둘이 남아 있었을 때, 그가 ‘손을 잡아 줘서 고맙다’고 한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해 냈다.

‘안 어울리게 어지간히 소심하네.’

이진은 승현이 진심으로 걱정하는 모습에 자신이 아주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잠깐 중단되었던 촬영이 다시 시작될 때 이진은 오른쪽 뺨에 커다란 거즈를 붙이고 있었다. 그렇게 심한 부상은 아니었지만 스태프가 치료를 멈추려고 하면 승현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는 바람에 피부라도 찢어진 것 같은 몰골이 되었다. 이진은 이렇게 눈에 띄는 흔적을 달게 되었으니 적어도 왜 다치게 됐는지 편집은 안 되겠다며 자조했다.

살아남은 스물일곱 명이 이름순으로 원하는 포지션을 결정했다. 상대방의 포지션을 원하는 사람이 적극 어필해서 쌍방이 만족한 교환이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게 서브 보컬에서 다른 포지션으로 옮겨 가는 형식이었다. 새로이 서브 보컬이 된 사람은 마치 유배지에라도 가는 것처럼 우울한 표정이었다.

미열은 리드 보컬로, 승현은 서브 보컬2에서 서브 보컬1로 옮겨갔다. 이진도 메인 보컬 포지션을 선택했다. 의외로 래퍼 포지션으로 옮겨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목받은 기존 래퍼들은 굉장히 기뻐 보였다. 아까 이진의 뒤에서 ‘스톱’을 외쳤던 참가자도 서브 보컬3에서 래퍼로 포지션을 옮겼다.

“하긴 연습생이 몇인데. 그동안 조에 랩 하는 애가 하나도 없던 게 말이 안 됐던 거지.”

”애초에 적어 낸 희망 포지션이 있는데 왜 섞은 거야?”

메인 보컬은 인기 있는 포지션이지만 리드 보컬에 비해 고음 파트가 많아 꽤 부담스런 자리기도 했다. 그래서 변동 인원이 많지 않았는데 비록 하루 이틀 차이지만 면식이 있는 사람들 틈에 섞여 들려니 굉장히 어색했다. 트레이닝셔츠에 붙은 스티커를 센터에서 ‘멘보’로 바꾼 이진은 같은 스티커를 단 사람들을 향해 걸어갔다.

“아까 다치신 거 봤어요.”

“괜찮으세요?”

저들끼리 방송 시스템에 대해 투덜거리던 메인 보컬들이 이진을 보고 아는 체했다.

“원래 보컬이셨어요?”

“네. 센터엔 어쩌다 보니…….”

“근데 춤도 잘 추시던데요? 원래 연습생이셨어요? 몇 살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 근데 형 아닌가? 아까 미열이 형이 형이라고 부르던데.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우리 쭉 같이 연습할 텐데 말 놔도 돼요?”

이진은 순식간에 강아지들에게 둘러싸인 기분이 되었다. 센터조 사람들이 이진과 엇비슷한 키에 눈이 화려한 미형이었다면, 메인 보컬들은 생김새는 제각기 다르지만 대체로 평균이거나 평균보다 조금 작은 키에 천진난만한 소년 같은 인상이었다.

“저는 지흔이에요. 강지흔.”

“고은준입니다!”

“저는 최강희요.”

“유이진입니다.”

그들과 어색한 통성명을 하고 있을 때 승현이 다가왔다. 승현의 키는 이진보다 조금 큰 정도였는데 이쪽으로 오니까 머리만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형, 프로필 찍게 모이래요.”

“아, 그래. 가자. 이따 연습 때 봬요.”

“다녀오세요!”

“어, 승현이 형 아니에요?”

이진은 불편한 대화에서 벗어나고자 곧바로 승현의 팔을 잡고 후다닥 메인 보컬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누군가 승현을 아는 체했지만 이대로 저 무리에 잡히면 프로필 촬영 순서가 한참 뒤로 밀릴 것 같았다.

“이열, 인기이인.”

문 근처에서 미열과 합류하자 그가 대뜸 이진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놀렸다.

“무슨 소리야?”

“아, 멘보 애들이 센터 출신 형아랑 비벼 보려고 애쓰잖아아.”

“뭐?”

무슨 뜻인지 되물었지만 미열은 말을 덧붙이지 않고 킥킥대며 이진의 뺨을 꾹 누르거나 옆구리를 찌르거나 하며 장난을 쳤다. 이진은 미열의 손을 피해 뒷걸음질을 치다 반대편에 있던 승현과 부딪혔다. 살짝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자 미열의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신들을 대중의 관심 속으로 이끌어 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는 얘기다. 마치 이진이 승현에게 그런 것처럼.

‘별로 그런 것 같진 않던데……. 내가 그 정도 주목을 받을 만한 타입도 아니고.’

이진은 조금 뚱한 표정으로 옆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공 열 개 쏩니다. 자세 자유롭게 잡아 주세요.”

왜 프로필 사진을 찍는데도 체육복을 갈아입지 않나 했더니 스튜디오 안에는 배구공 수십 개가 데굴데굴 굴러 다녔다. 신발을 벗고 롤 스크린 배경지에 올라가면 기계로 공 열 발을 날린다. 참가자들이 날아온 공을 손으로 받아 내거나 발로 드리블을 하는 등 각자 공과 놀고 있으면 그 자연스러운 모습을 사진에 담아내는 방식이었다.

이진은 무난하게 고등학교 수행 평가였던 언더핸드패스 자세로 공을 넘겼다. 공 열 개를 모두 안정적인 자세로 넘기자 구경하던 참가자들 무리에 섞여 있던 한찬우가 호루라기를 부는 척하며 “만점!” 하고 외쳤다.

승현은 토스로 수행 평가를 본건지 토스 자세를 취했다. 멀리도 날아간 공이 조명에 부딛힐 뻔했다. 같은 학교를 나왔다던 미열도 엉거주춤 토스 자세를 취했지만 공은 팔에 아프게 맞기만 하고 튕겨지진 않았다. 미열이 “아야!”거리며 엄살 섞인 비명을 질렀다.

찍힌 사진을 확인하지도 못하고 스튜디오를 나가야 했다. 스태프는 오늘 분 촬영이 끝났으니 방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말하며 이번 주에 남은 3일간의 촬영 스케쥴표를 전달했다.

“원래 더 일찍 드려야 했는데 지금 이런저런 변동 사항이 많아서요.”

먼지구덩이 스튜디오에서 방에 돌아온 세 사람은 차례대로 샤워를 했다. 뺨에 붙은 거즈를 떼어 내자 아직도 옅은 분홍기를 띠며 부어오른 피부가 보였다. 물에 닿을 때 조금 따갑긴 했지만 큰 통증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11시가 넘어서야 모두 잘 준비를 마쳤다. 셋은 이른 기상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하고 불을 껐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머리를 한 방향으로 맞대고 누워 있으니 입이 간질간질해져 쉽게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자……?”

미열도 마찬가지인 듯 조용히 물었다. 승현은 대답이 없었으나 딱히 자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진이 기척을 내자 미열이 형, 하고 늘어지는 소리를 내며 말을 걸었다.

“뭔가 연습할 땐 실감이 안 났는데 카메라로 도배된 곳에서 초등학생들이나 할 법한 게임 같은 거 하니까, 진짜 방송 출연하는 것 같고 기분 이상한 거 있지.”

정신이 없어서 그냥저냥 흘려보냈지만, 확실히 이진에게도 압도적인 경험이었다. 거대한 렌즈들과 수많은 사람들의 무기질적인 시선은 이진이 어떤 행동을 해도 속속들이 잡아내 모조리 파헤칠 것처럼 느껴졌다. 해체당하기 직전의 물고기가 이런 기분일까.

이진이 긴장하지 않을 수 있던 이유는, 백여 명의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처지에서 한 화면에 담기고 있다는 것에서 오는 위안과 곁에 선 선승현이라는 존재가 주는 알 수 없는 안정감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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