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11화 (11/173)

11화

“형, 괜찮아요? 목 아파요?”

“어? 아냐. 목말라서 그래.”

이진이 목을 만지작대는 걸 봤는지 승현이 물었다. 조금 놀란 것 같은 표정에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했으나 승현은 두리번대며 마실 거리를 찾았다.

‘얘는 왜 이렇게 관심이 많아.’

말이 별로 없어서 잘 몰랐는데 선승현은 생각보다 남에게 관심도 많고 챙겨 주기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잠깐 목을 쓰다듬은 것 가지고 아프냐며 묻거나 이진의 대답에 건조한 목을 축여야 한다는 임무라도 부여 받은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대지도 않을 것이다.

이진은 승현이 자신에게만 관심이 많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억지로 머릿속에서 밀어냈다. 사소할지라도 엄한 곳에다 기대를 품었다가는 자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다행히 승현이 정말로 음료를 구해 오기 전, 장내가 정리되고 다음 순서가 진행됐다. 두 번째 게임은 짝짓기 게임이었다. 사회자가 지시한 숫자만큼의 사람이 모여 손을 잡고 자리에 앉아야 하는 방식으로, 단순하지만 다량의 인원을 효과적으로 떨어뜨리기 좋았다.

남은 인원이 모두 손에 손을 마주잡고 강강술래 하듯 큰 원을 만들자 밝고 경쾌한 음악이 나왔다. 요즘 유행하는 아이돌 노래인 듯 양손이 봉인된 채로도 제자리에 서서 현란한 발놀림을 보여 주는 참가자들이 몇 보였다. 미열은 흥은 넘치지만 춤을 잘 추지 못해서 어깨만 씰룩거렸다.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거대한 원이 시계 방향으로 뱅글뱅글 돌아갔다. 노래가 하이라이트에 접어들수록 원이 돌아가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이러다 다치는 사람이 나오겠다 싶을 무렵, 호루라기가 정확히 세 번 울렸다. 자신을 포함한 세 명을 찾아 손을 맞잡고 자리에 주저앉으면 통과였다.

이진은 이미 왼손으로는 선승현, 오른 손으로는 백미열을 잡고 있었기에 양쪽을 후다닥 두리번거렸다. 승현은 제 왼손을 미열에게 내밀고 있었고, 미열은 오른손을 붙잡은 누군가를 떼어 내기 위해 안간힘이었다. 승현이 미열의 팔목을 잡고 휙 끌어당기자 그제야 거머리같이 달라붙어 있던 미열의 지인을 무사히 떼어 낼 수 있었다.

두 번째 숫자는 5였는데 미열의 친구 둘이 후다닥 달려와 금방 머릿수를 채울 수 있었다. 사람들끼리 의리를 지킬 만큼 친하지 않은 덕인지 생각보다 생존자가 많았다. 물론 그 와중에도 탈락자는 나왔다. 버려진 인간들은 배신감에 찌든 표정으로 ‘두고 봐!’ 하고 소리치며 프로필 사진을 찍으러 이동했다.

마지막 숫자는 7이었다. 데뷔할 수 있는 인원. 미열이 별 사소한 게임에서도 컨셉을 확고히 한다고 중얼거렸다. 그 말투가 그리 달가운 어조는 아니라 이진은 미열의 목소리가 이상한 편집에 사용될까 조금 걱정됐다.

세 사람은 다섯 명끼리 뭉친 그룹과 맞닥뜨렸는데, 처음으로 닥친 위기 상황이었다. 그들은 미열과 친구인지 당연하다는 듯 그에게 둘 중 하나만 데려오라고 했다. 이진은 대체 미열이 하룻밤 사이에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든 건지, 그저 어이가 없었다. 그때 그의 왼손을 잡고 있던 승현이 이진을 쓱 돌아봤다.

‘설마…… 알아서 꺼지라고?’

둘 중 하나만 오라고 한다면 가야 할 사람은 당연히 이진이 아닌 승현이었다. 미열이 이진에게 그만큼 의리를 지켜 줄 이유도 없었고, 센터 포지션인 이진보다는 서브 보컬2인 승현이 더 절박할 터였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순간, 이진은 자신의 위치를 온몸으로 실감했다. 아무리 선승현이 지금 당장 이진의 예상보다 그를 맘에 들어 할지라도 아직은 선택의 순간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패였다. 그게 확 와닿았다.

이진은 지금 이 눈빛이 프로그램 내내 자신을 계속 따라다니리라 예견했다. 버릴지 말지 고민하는 눈빛. 만약 이진이 우승하지 못한다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가 제발 자신을 뽑아 주길 간절히 바라야 할 것이다.

구차하고 비겁하게, 결국 그룹을 떠날 것임을 알고 있는 상대에게 미래를 구걸하듯이…….

“야! 너 나가, 인마!”

미열의 외침이 이진의 상념을 깨트렸다. 고개를 들자 미열이 승현과 이진 사이에 끼어들어 두 사람의 어깨를 휘감더니 상대편 그룹에서 한 명을 발로 휙 걷어찼다.

“너 혼자 힙합하는 주제에 왜 아직도 탈락 안 했어! 포지션 바꿀 필요도 없는 자식이!”

“그렇다고 억지로 지냐!”

걷어차인 남자가 반박했지만, 이미 미열의 말에 수긍한 상대편은 그러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 사람을 홀랑 버리고 동그랗게 원을 만들었다. 미열이 승현과 이진의 가운데에 끼어드는 바람에 왼쪽으로는 미열이, 오른쪽으로는 모르는 사람이 이진의 손을 잡았다.

“하나같이 지기 싫어가지고.”

“게임인데, 뭘.”

……이진은 이 불완전한 소속감에라도 만족하기로 했다.

몸을 움직여서 신이 났는지 승현과 미열의 뺨이 약간 달아올랐다. 어쩐지 볼이 뜨겁더라니. 이진은 거울을 보지 않아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제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휘슬이 울리고 게임이 종료되었다. 그와 동시에 이진을 푹 허리를 숙이고 양 무릎을 짚었다. 정신력 소모가 큰 탓인지 금세 탈력감을 느꼈다.

힐끔 고개를 돌려 방금 탈락한 사람을 바라봤다. 혼자만 힙합을 한다기에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김진영이었다. 뚜렷한 프로필은 확실하지 않았지만, 오른쪽 눈썹 위의 흉터를 보고 그도 트라이엄프의 멤버였음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음악 스타일 상 딱히 주목받던 멤버는 아니었다. 애초에 선승현 외의 멤버는 조금씩 묻힌 감이 있었다. 그의 경우에는 노래에 딱히 파트가 없다고 해야 하나……. 실력에 비해 아까운 멤버라는 평을 들은 기억이 났다.

그가 퇴장하는 모습을 보며 이진은 다시금 상기했다. 이진이 데뷔를 한다는 건, 과거 데뷔했던 멤버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자리를 빼앗긴 이는 자신이 예정되었던 미래와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 자체를 모를 것이다. 이진의 성공은 최소 한 명 이상의 인생을 희생한 결과였다.

강당에 새로운 게임을 설치하는 겸, 지친 참가자들을 위해 잠시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세 사람은 강당 끝으로 걸어가 벽에 기대앉았다. 제일 지친 미열은 헉헉거리며 몸을 축 늘어뜨렸다.

“안 힘드냐?”

승현은 아주 쌩쌩했고 이진도 정신이 지친 것일 뿐 몸은 멀쩡했다. 애초에 그만큼 움직이지도 않았다. 잠도 푹 자서 따지자면 오늘은 컨디션이 몹시 좋은 편이었다.

“평소에 운동 좀 하라니까.”

“너도 내 나이 되어 봐라……. 젊은 놈이.”

미열이 엄살을 피웠다. 둘은 동갑일 텐데 나이를 운운하는 게 우스워 이진이 하하, 웃었다. 그러다 젊은 놈이란 소리를 들었지만 미소의 흔적조차 없는 승현과 눈이 마주쳐 슬쩍 입꼬리를 내렸다.

“어? 너 어디 가?”

“물.”

승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저 멀리 강당 입구까지 달려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운 생수 세 병을 들고 돌아왔다. 그는 적절한 물건을 구해 온 것이 뿌듯하기라도 한지 미열과 이진에게 생수를 한 병씩 건네주며 방긋 웃었다.

“아, 좀 살겠다!”

”고마워, 승현아.”

왠지 승현이 아까 이진의 변명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아 신경 써서 고맙다는 인사를 한 번 더 했다. 승현은 멋쩍은 듯 대답은 않고 제 생수를 따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물을 공급받고 조금 살맛이 나는지 미열이 승현과 이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마지막에서 살아남으면 어디로 갈 거야?”

답이 정해져 있던 이진은 별 고민 없이 대답했다.

“아마 메인 보컬이나 리드 보컬?”

“너는?”

미열도 이미 예상한 바인 듯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승현을 향해 다시 물었다. 승현은 생수병을 닫다가 그제야 떠올랐다는 듯 아, 하더니 뺨을 긁적이며 고민했다.

“글세. 난 그냥 랩만 아니면 상관없어.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 같아서.”

서브 보컬 자리를 묵묵히 받아들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냥 포지션 자체에 큰 생각이 없는 거였다. 이진은 울컥, 그렇다면 아까 게임에서 먼저 빠져 줄 것이지 왜 그런 눈으로 바라본 건지 내심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이상적으로는 마흔아홉 명이 남았어야 했지만 우왕좌왕하다 머릿수를 맞추지 못한 사람들이 있어 최종적으로 마흔두 명이 남았다.

세 번째 게임은 긴 줄 넘기 게임이었다. 참가자들이 일렬로 정렬하자 다시 배경 음악이 깔리더니, 근육질로 유명한 개그맨 둘이 거대한 줄의 양 끝을 손에 쥐고 들어왔다. 촬영장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두 사람이 시범 삼아 돌리는 줄에서 아주 무서운 소리가 났다. 땅에 부딪히는 줄의 위력이 상상을 초월했다.

이번에도 룰은 간단했다. 적당히 눈치를 봐 가며 줄 안으로 진입해 숫자 열을 세고 무사히 나오면 성공이었다. 단 게임 시간은 첫 경연곡이 끝날 때까지로, 5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다. 대략적으로만 계산해도 한 번에 열 명씩 들어가서 1분 안에 빠져나와야만 통과할 수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 게임인데도 생각보다 살아남은 사람이 많았다. 이진은 가볍게 관절을 돌리며 긴 줄 넘기에 뛰어들 준비를 했다. 멍하니 차례를 기다리다간 시간이 다해 본전도 못 건질 게 뻔했다.

촬영이 다시 시작되기 전 줄을 돌리는 속도와 박자를 맞추기 위해 음악이 재생되었다. 다들 아이돌 지망생들이라 과연 끼가 넘치는지 촬영 중이 아님에도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메인 카메라는 돌고 있지 않지만 아직 꺼지지 않은 카메라들도 꽤 있으니 아마 지금 촬영 본 중 쓸 만한 클립이 나온다면 촬영장 비하인드 컷으로 업로드될 수도 있었다.

그는 카메라에 한 번이라도 더 잡히기 위한 노력들을 유심히 잘 지켜봤다. 미열은 춤을 추지는 않고 고개만 까딱이다가 후렴구가 나오자 안무가 아닌 전혀 다른 이상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게 대체 뭐야?”

“춤을 어떻게 벌써 다 외워? 난 그냥 음악에 몸을 맡긴다.”

이진이 미열의 춤사위를 보고 묻자 그가 비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줄곧 얌전하던 이진이 미열의 허우적거림에 즐겁게 웃자 승현도 합세해 정체 모를 춤을 따라했다. 멀쩡한 허우대를 가진 두 사람이 사정없이 망가지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가뜩이나 미열은 아는 사람이 많아 근처에 서 있던 이진에겐 초면인 참가자들도 그를 보고 웃어 댔다.

“놀리지 말고 본인들이 춰 보시던가!”

놀림거리가 되는 게 민망했던지 미열이 살짝 삑사리를 내며 소리쳤다. 미열의 얼렁뚱땅한 춤사위를 보고 자신감이 불쑥 치밀어 오른 이진은 음악을 듣고 얼추 몸에 익은 춤사위를 떠올리며 가볍게 몸을 움직였다. 미열은 이진이 춤도 잘 춘다는 사실에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바라봤다.

설렁설렁 미열의 춤을 따라하던 승현도 이진이 팔다리를 움직여 안무를 그려 내자 바로 동작을 바꿨다. 미열이 얼이 빠진 사이에 이진과 승현은 가볍지만 망설임 없는 움직임으로 뛰어난 안무 습득력을 증명했다. 과하지 않은 동작들임에도 춤의 타이밍이 딱딱 들어맞자 구경하던 사람들도 몸을 들썩였다.

“나만 몸치야?”

“나도 이다음부턴 잘 몰라.”

“평소에 운동 좀 하랬잖아.”

음악이 끝날 무렵, 예열이 끝난 듯 몸이 적당히 달아올라 활기가 돌았다. 막무가내로 몸을 움직일 때는 진이 빠졌는데, 노래 하나 틀어 줬다고 신나서 폴짝대며 뛰어다닌 게 뒤늦게 민망해졌다. 그나마 방금 전까지 의욕 없는 표정으로 대충 걸어 다니던 승현도 점잔 빼지 않고 같이 흥분한 게 위안이 됐다.

‘잘 찍혔으려나?’

이진은 춤을 추는 내내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한 카메라 쪽으로 슬쩍 눈을 돌렸다. 바로 촬영을 시작하느라 대부분의 카메라가 붉은 빛을 내뿜기 시작한 이후라 카메라가 이진에게 관심을 가졌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는 없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