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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10화 (10/173)

10화

홍서는 작은 체구에서 폭발적인 힘을 뿜는 파워 댄스로 유명한, 7년째 식지 않는 인기를 누리고 있는 6인조 보이 그룹 ‘시티 로열’의 센터였다. 이진은 개인적으로 시티 로열의 메인 보컬을 좋아했는데, 그가 고아 출신임에도 당당히 연예계의 최정상에 오른 자수성가의 아이콘이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카메라 설치가 완료되자 홍서는 다시 한번 허리를 깊게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시티 로열의 홍서입니다! 이번 라운드 심사 위원이자 여러분의 멘토가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카메라가 돌아가자 홍서는 온몸으로 기합을 잔뜩 내뿜었다. 마치 예능에선 최소한 이 정도 기운은 내야 한다고 보여 주는 것 같았다. 표정도 부자연스럽게 밝았고 동작도 다소 어색하리만큼 커다랬다.

어쨌든 이진은 그 동작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눈에 띄어서 살아남아 승리하는 것이다. 이용할 수 있는 건 전부 이용해야 했다.

홍서의 레슨은 꽤나 체계적이었다. 찬우에게 춤을 배웠다면 홍서에겐 아이돌의 무대에 대해서 배웠다. 동선, 표정 관리, 섬세한 손짓이나 시선 처리까지. 안무 연습으로 익히긴 어려운 기술들이었으나 홍서는 날카롭고 효율적인 피드백으로 쉽게 성과를 끌어올렸다. 물론 아직 동작을 외우지 못한 초보들이라 음악을 틀고 들어가면 곧바로 무너질 수준이었지만.

수업의 중점은 보컬과 안무를 같이 소화하기였는데, 이건 꾸준한 연습을 통해 발전해야 할 부분이기에 하루 만에 외운 가사를 중얼대는 걸로도 만족했다.

이것저것 곧잘 따라하고 배우는 이진은 찬우와 함께 홍서의 눈에 든 우등생이었다. 하지만 도무지 표정 연기만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무리 얼굴에 철판을 깔고 망가져 보자고 주입해 봐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자존심이 상해서가 아니라 천성이 그랬다.

이진은 유독 거짓말이나 남을 속이는 연기 같은 것에 약했다. 그나마 공적인 자리에서 어색한 듯한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된 것도 다년간의 아르바이트와 직장 생활을 통해 빚어 낸 결과였다.

“표정 연기? 벌써 그런 걸 시켜?”

저녁 촬영에 들어가기 전, 잠깐 얻은 휴식 시간에 방에서 만난 미열과 승현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과 대화하다 얼결에 그 말을 털어놓자 미열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이쪽은 발음 연습만 하루 종일 했어. 어떻게 된 게 랩에 재능 좀 있다는 놈이 하나도 없는지……. 아니다. 하나둘 정도는 있던가? 포지션을 제작진 멋대로 뒤집어 놓으니까 수업을 하나마나잖아.”

적성에 맞지 않는 포지션에 배정된 건 미열도 마찬가지였으니 하고픈 말이 참 많아 보였다. 미열이 승현을 향해 눈짓하자 그가 미묘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여긴 다들 의욕이 없네.”

“아, 하긴…….”

랩이나 센터같이 특징적인 포지션이 아닌 서브 보컬, 그것도 서브 보컬2라는 어중간한 자리에 배정되었다는 것 자체만으로 꿈과 기대에 가득 부풀어 있던 사람들의 의욕을 파삭 꺾어 버리기에 충분했다.

‘정확히는 그 정도뿐인 의욕이라고 해야 하나.’

이진은 승현의 말을 들으며 가장 인기 많은 포지션에 선택받았기에 가능한 냉소적인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내 ‘표정 연기도 제대로 못 하는 주제에’라는 생각이 들자 자신감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갔다.

유력한 우승 후보 선승현이 서브 보컬 2에 배정받으면서 이진은 포지션에 아무 의미를 두지 않으려 했다. 지금의 포지션은 인기나 실력과는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하루 종일 센터에 선발되었다는 고양감에 휩싸인 사람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어느새 이진도 다소 오만한 생각을 하고 말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겸손하지 않은 사람을 누가 좋아해 줄까. 이진은 시청자들에게 표를 구걸해야 하는 입장이니 특별히 잘 보일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만약 선승현과 백미열이 이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티를 낸다면 시청자들이 이진을 좋게 보고 표를 나눠 줄 리가 없었다. 다행히 승현이나 미열이 이진의 포지션에 질투하는 기미가 없기에 망정이지 설령 그랬더라면 어떻게 이 얼굴들을 대해야 했을지 생각만으로도 막막해졌다.

“저녁에 촬영한다는 거 뭐였지?”

이진은 화제를 바꾸기 위해 시답잖은 질문을 했다.

“뭐 게임 같은 걸 한다던데.”

“프로필 촬영도 오늘 한다고 들었어요.”

“프로필을?”

“저희 그룹 애가 그러던데요.”

아무렇지 않게 말한 승현처럼 이진 역시 이를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들였지만 미열은 아니었다. 프로필 사진은 자고로 일주일간 붓기를 빼고 광낸 뒤 풀 메이크업을 한 상태에서 찍어야 했다. 아침 내내 안무 연습에 발음 연습을 하느라고 피곤해져 축 처진 외견을 거울에 비춰보던 미열은 이렇게 된 거 씻기라도 해야겠다며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자 승현과 이진 둘만이 방에 남았다.

이진은 어색함을 굳이 인식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그는 늘 어딘가 뻣뻣하고 삐걱대는 구석이 있었다. 사람들 속에 자연스럽게 섞이기. 그것이 지금의 이진에게 가장 급선무인 과제였다.

그래서 이진은 평소보다 힘을 덜 준 어색한 미소를 만들어 보이곤 승현에게 말을 걸었다.

“아침잠이 많더라.”

“네.”

눈물겨운 시도는 단답형 대답에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이진에겐 아직 단답에도 무난하게 대화를 이어 가는 기술이 없었기에 이번엔 승현이 노력해야만 자연스러운 대화를 주고받기가 가능했다.

“…….”

그러나 승현은 알 수 없는 무표정으로 한참을 말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다짜고짜 스스로 약점이라 여기고 있을지도 모르는 부분을 지적했으니 대답이 없을 만도 했다. 이진도 급격히 무거워진 공기를 수습하지 못하고 몇 분 동안이나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 감사합니다.”

“어, 뭐가?”

승현이 불쑥 자신이 만든 묵직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가 가뭄을 끝낸 단비처럼 느껴져 이진은 화색을 하며 대답했다.

“어제, 손잡아 주신 거요.”

“어?”

승현 딴에는 용기를 내서 한 말이었지만 이진은 당시의 일을 홀라당 까먹고 난 뒤였다. ‘우리가 손을 잡았다고? 언제, 누구 맘대로?’ 따위의 의문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고, 그들 중 무엇도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단비인 줄 알았더니 폭풍우였나?

폭풍의 눈은 고요하다더니,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미열이 샤워를 하는 물소리만이 방 안을 매웠다.

“……오늘 아침에도 고마웠어요.”

“아. 그거 먹었어?”

“네.”

“다행이다.”

이렇게만 말을 끝내면 또 코끼리보다 무거운 침묵이 드리울 것 같아서 이진은 다시 용기를 내 한마디를 덧붙였다.

“조금 기쁘네. 먹었다고 하니까.”

그렇게 말하고 살짝 웃는 것으로 이진은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비록 사이에 긴 침묵이 있긴 했지만 이 정도면 무난한 대화였어. 때마침 미열이 수건으로 머리에서 물을 훌훌 털며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이진은 부디 이 어색한 대화로 승현이 자신을 멀리하지 않기를 바랐다.

***

커다란 강당은 완벽히 스튜디오로 탈바꿈해 있었다. 천장에는 조명과 함께 마이크가 설치되었고 카메라와 스태프가 한쪽 벽면을 가득 메웠다. 출연자들은 저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있었는데, 주로 룸메이트나 같은 포지션인 사람들끼리 함께였다.

벌써 팀원들과 돈독한 관계가 된 건지 미열을 찾는 사람이 많았지만, 아침에 이진을 두고 간 것과 다르게 미열은 무리를 떠나지 않았다. 아마 승현 때문이 아닐까 싶었는데 두 사람은 딱히 대화도 하지 않았다. 승현은 멍하니 주변을 관찰하고, 미열은 찾아오는 사람들과 수다나 떨어 댔다. 이진은 딱히 할 일이 없어 미열의 친구들과 인사를 나눴다.

“백미열 룸메들이랑 있으니까 사람이 달라 보인다.”

“무슨 뜻이냐?”

모르는 얼굴이 미열에게 장난을 치며 이진과 승현을 들먹였다. 그러나 그 출연자는 대답을 하지 않고 제가 있던 그룹으로 쏙 돌아가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피커에서 어제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모두 여러분의 포지션에 만족하셨나요? 어제의 포지션 발표는 누군가에겐 희극, 누군가에겐 비극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은 게임을 통해 포지션 체인지를 할 기회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그 말에 강당이 웅성임으로 가득 찼다. 이진은 어딘가에서 안 된다고 탄식을 내뱉는 같은 센터조 멤버의 목소리를 들었다. 미열이나 승현에게는 좋은 일이었으나 이진은 이게 자기 자신에게 좋은 일일지 확신하지 못했다.

규칙은 간단했다. 게임에서 끝까지 생존하면 포지션을 바꿀 수 있다. 모두가 포지션을 바꿔 버리면 이미 정해 둔 의미가 없다. 즉 곧 진행될 게임은 탈락자가 어마어마하게 나올 만큼 자비 없고 치열할 것이다.

센터로 방송에 나가면, 아니 나가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앞으로 공개될 영상에서 센터의 자리에 서 있다면 어중간한 자리에 서는 것보다 관심을 많이 받게 될 것은 자명했다.

물론 메인 보컬이나 리드 보컬 자리에 가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것도 게임에서 이겼을 때의 일이지 만일 다른 사람이 이진을 지목해 포지션을 체인지하고 싶다고 한다면……. 이진은 그 훗날의 일은 둘째 치고 그러한 상황이 닥치면 기분 나쁜 티를 숨기지 못할 것이 걱정되었다.

사람들의 혼란을 뒤로 뒤로하고 목소리는 이번에 진행할 게임을 소개했다. 정확히 111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데리고 게임을 해야 하는 만큼 게임의 룰은 간단했다. 즉 개인의 각오와는 별 관계가 없었단 뜻이다.

첫 번째는 가위바위보 게임이었다. 이름 순서대로 나가 가위바위보를 하고 돌아오니 생존자가 반절로 뚝 줄어 있었다. 홍씨 성을 가진 사람이 부전승으로 살아남았다.

먼저 떨어진 사람들은 바로 옆에 마련된 스튜디오로 옮겨 1차 프로필 사진을 촬영했다. 똑같은 트레이닝복을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사라지는 광경을 보며 이곳에서 빛을 내는 사람. 아니, 적어도 빛을 잃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연예계에서 살아남을 별이 되겠구나 싶었다.

‘이 녀석이 그렇게까지 대단하다니.’

이진은 제 뒤에 서서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승현을 보며 생각했다.

‘그렇게까지 특별한가?’

자문해 보면 답은 ‘아니’였다. 어떤 경험이 그를 특별하게 만들었을지 이진으로서는 짐작도 되지 않았다. 어쩌면 외모 외에는 하나 잘난 것 없으면서 정치질을 잘해 살아남았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승현을 깎아 내리고 나니 속이 좋지 않았다. 혀뿌리, 목 안쪽으로 쓴맛이 감도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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