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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9화 (9/173)

9화

본격적으로 파트별 연습에 들어갔다. 연예인 멘토와 함께하는 레슨이자 본 촬영이 일반 레슨과 격일로 배정되어 있었는데, 두 레슨 모두 3시부터 시작이라 그 전까지는 자유 시간이었다. 촬영 시작 첫날이라 그런지 다들 일찍부터 나와 진지한 얼굴로 개인 연습을 했다.

어제 저녁도 먹지 않고 잠든 이진은 새벽 일찍 깨어나 샤워를 하고 연습실로 내려갔다. 아무도 없는 연습실에서 아침 식사 전까지 스트레칭과 발성 훈련으로 시간을 보낸 이진은, 식당 문 앞에서 도착해서야 카드 키를 들고 오지 않았단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도로 방으로 돌아갔다.

“아침 먹자고오.”

“응…….”

문을 열자마자 들려오는 두 룸메이트의 실랑이가 들려왔다. 옷을 갖춰 입은 미열이 아래층 침대 위에 걸터앉아 승현을 마구 괴롭히고 있었다.

“하. 이 자식 죽어도 안 일어나네.”

“안 일어나요?”

“형은 새벽부터 어딜 그렇게 나갔다 와요?”

“잠깐 스트레칭 하러…….”

승현의 양 볼을 잡고 좌우로 무자비하게 흔들던 미열이 이진을 보고서야 친구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는데도 승현은 아직 꿈나라를 헤매고 있었다.

“얘 버리고 우리끼리 밥 먹으러 가요.”

결국 미열은 이불로 덮인 승현의 배 위를 퍽 소리 나게 때리고는 이진에게 찰싹 붙었다. 선승현의 의외의 모습에 이진은 아침부터 살짝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아침잠이 많은 건 둘째 치고 친구에게 이렇게 얻어맞고 살 줄은 몰랐다.

미열은 이진의 미묘한 시선을 느끼고는 ‘우리가 고등학생 때부터 알아서……. 고딩들 어떻게 노는지 알잖아요.’라며 변명을 늘어놨다. 고등학교 3년 내내 마땅히 친구라 부를 만한 존재가 없었던 이진은 피식 웃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그나저나 말 편하게 해요, 형. 당분간 같이 지낼 건데 계속 이러면 불편하잖아요.”

“저는 괜찮아요.”

“말 놓고 싶은데 형이 계속 존댓말하면 제가 못 놓잖아요.”

미열이 투덜거렸다. 이진은 미열의 사교스킬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트라이엄프에 좋은 감정이 없던 이진을 무장해제 시킬 만큼 사람의 마음속을 파고드는 솜씨가 노련했다.

“그래, 그럼.”

“아,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이진이 대답하자마자 미열이 엄살을 부리며 친근하게 치대 왔다. 고등학생 때 친구 어쩌고 하더니 그냥 애교도 많고 장난도 잘 치는 성격이었다.

“나 진짜 형이랑 만난 날부터 제발 형이 이거 참가하라고 물 떠 놓고 기도 드렸는데. 방까지 같이 써서 너무 좋다!”

미열은 밥을 먹는 내내 쉬지 않고 떠들었다. 이진에겐 다행으로 식사 중간에 미열과 같은 랩 파트 몇 명이 테이블에 합류했다. 말이 많고 성격이 활발한 게 미열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덕분에 이진은 어, 응, 아니, 그래 정도의 단답만 하고도 대화에 순조롭게 참여할 수 있었다.

미열은 식사 후 같은 파트 사람들이랑 곧장 연습실로 가겠다며 자리를 떴고 이진은 침대 위에서 굶고 있을 1등 예정자에게 뭐라도 먹이기 위해 식빵과 버터 몇 개를 싸 들고 방으로 올라갔다. 사실 아직도 카드 키를 챙기지 못해 가는 거였지만 겸사겸사 점수라도 따면 좋다고 생각했다.

길가다 선승현 광고판만 봐도 기분을 확 잡치곤 했는데 이렇게 직접 밥을 떠먹여 주러 가는 꼴이 우스웠다. 어차피 같은 방을 쓰게 되었으니 어느 정도 가까워질 필요는 분명히 있었으나 선승현에게 상냥한 척 말을 붙일 때마다 이중적인 자신의 모습에 한숨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었다.

조심스럽게 냅킨으로 감싼 식빵은 아직 토스트기에서 구워진 열기가 빠지지 않아 뜨끈뜨끈했다. 한 손으로 토스트와 버터를 잡고 문을 돌리자 정면에 보이는 침대에서 반쯤 몸을 일으키고 끙끙대는 승현이 보였다.

“일어났어?”

“네…….”

잠긴 목소리를 듣고서야 미열과는 말을 텄지만 승현과는 아직이라는 걸 깨달았다. 승현이 제정신이 아니니 그건 미뤄 두고. 이진은 원형 테이블 위에 식빵을 올려두고 가까이 다가갔다.

아침잠이 아무리 많아도 이렇게까지 못 일어나는 건 뭔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저혈압이라도 있는 걸까. 이진은 무릎을 굽혀 승현과 눈높이를 맞췄다.

“괜찮아?”

“아, 괜찮아요…….”

승현은 그렇게 말하며 도로 침대 위로 털썩 쓰러졌다. 베개 밑으로 얼굴을 파묻고는 한참 미동이 없자 이진은 빵을 좀 가져다 놨으니 식기 전에 먹으라는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이번엔 카드 키도 제대로 챙겼다. 등 뒤로 승현이 끙끙대는 소리가 들렸다.

연습실에 도착하자 한찬우에게 나머지 네 명이 춤을 배우는 중이었다. 한 동작을 여러 부분으로 쪼개서 차근차근 알려 주는 모양새가 퍽 익숙해 보였다. ‘딛고, 스텝, 스텝. 찍고, 앞으로 가서 밀고, 밀고…….’ 귀로만 들어선 뭐라는지 모르겠지만, 동작을 하며 외워 보면 찰떡같이 어울리는 구호를 부르며 다 같이 한 몸이 된 듯 움직이고 있었다.

이진이 들어오자 다들 몸을 빙글 돌려 눈을 맞추며 어서 오라고 인사했다. 어쩐지 찬우를 보기가 조금 민망했지만 이진은 얼굴에 철판을 곱게 깔았다. 거울을 보고 일렬로 서 있던 사람들은 이진이 너무 멀리 가지 않도록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찬우 근처에 자리를 만들어 주었고 이진은 그 틈에 끼어 스텝, 스텝, 찍고, 어쩌고 하는 구호를 외며 함께 연습했다.

다 같이 우르르 몰려 나가서 점심을 먹고 소화시킬 겸 근처에서 산책을 한 바퀴 하고 다시 돌아와 조금 더 불어난 인원과 함께 연습을 했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단체 행동은 또 오랜만이라 기분이 새로웠다. 열댓 명의 남자들은 마치 학창시절로 돌아가기라도 한 듯 쉽게 마음을 열고 다가왔다. 이진도 얼결에 그 분위기에 쓸려 다 같이 호형호제를 하게 되었다.

그 결에 한찬우에 대한 정보를 조금 얻게 되었는데, 우선 그는 이진과 동갑인 연습생 출신이었다. 어느 용기 있는 이가 그 실력을 가지고도 연습생에 머물러 있는 이유를 묻자 그는 소속사가 빚이 있어 데뷔가 무산되었고, 소속사와의 계약이 파기되길 기다리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찬우는 기본적으로 호쾌한 성격이었으나 이 말을 할 때만큼은 약간의 조급함이 묻어났다. 이를 알아차린 사람들은 자신들의 우울한 이야기도 조금씩 풀어놨다.

또 다른 연습생 출신 이진연은 오디션에서 한 달에 서른 번을 떨어져 봤다고 했다. 춤과 노래 다 그럭저럭인 수준이라 굳이 그를 뽑을 이유가 없다는 게 면접관들의 한결같은 평이라고 말했다.

윤인준과 오연재는 친구였는데 두 사람 모두 부모님이 아이돌이 되는 것에 몹시 부정적이신지라 맘 놓고 준비를 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인준은 몰래 소속사 오디션을 봐 합격했지만 1군에 오르려면 연습뿐 아니라 사내 정치를 잘해야 한다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연재는 대학 댄스 동아리에서 무대를 하다가 명함을 받았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이우진은 딱히 잘하는 일이 없고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죄다 연예인을 하라고 하길래 친구들 말만 믿고 영화과에 갔는데, 연기에 소질이 없어 방황 중이며 이번 방송에서 다른 가능성을 찾고 싶어 참가했다고 말했다. 그는 춤을 춰 보니 몸을 쓰는 건 죄다 못하는 것 같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이진에게로 꽂혔다. 이진은 갑자기 수많은 눈알들이 자신을 바라보자 순간적으로 머리 위로 천장이 무너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바닥이 쑥 올라와 파도처럼 그를 덮칠 것만 같았다.

“아…….”

사람들의 눈동자에서 작은 기대를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어서 동조하라는 듯 소리 없이 부추기는 눈빛을 보아도 이진은 할 말이 없었다. 그들처럼 자신의 불행을 가볍게 입에 올리기에는 그들과 이진의 불행은 본질부터가 달랐다.

집이 가난해서 어려서부터 무시를 하도 당하는 통에 열등감만 자라났다. 부모님과 말 한마디를 겨우 주고받는 일상이 3년이 넘어갈 무렵, 이제 막 어른이 되는 문턱에 오른 이진의 곁에 부모님은 남아 계시지 않았다. 외로움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막막함에 몸을 혹사시키며 돈을 벌었다. 두 분이 바라시는 삶을 살고자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고자 했다. 그러다 보니 사는게 사는 것 같지가 않더라. 이런 이야기를 여기서, 어떻게 꺼내겠는가.

심지어 그의 마음속 깊은 속에는 아직도 열등감이 도사리고 있다. 방심하면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와 폭주를 막기 위해 높은 담을 그 주변에 둘렀다.

이진은 이제야 제 꿈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그런데, 가끔은 스스로에게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정말로 자신이 가진 재능을 아름답게 꽃피우고 싶어서 이 길을 택한 건지, 아니면 그 옆에 따라오는 막대한 부와 명예가 목적인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어느 하나라도 고스란히 털어놓았다가는 이진은 모두가 은연중에 기피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마음의 상처에선 악취가 났다. 건강한 사람들은 이진의 외모를 보고 잠깐 얼쩡거렸다가도 금방 썩은 내를 맡고 도망가 버린다.

그래서 이진은 평소대로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눈동자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보는 이진을 연기해 주자. 그것이 그들이 바라는 대답일 거다.

“나는…… 잘생겼다는 소리 듣는 게 스트레스야.”

이진이 민망한 목소리로 말하자 둘러앉은 사람들에게서 한마디씩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와. 형, 완전 진지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이렇게 이미지가 깨지네요.”

“들어 봐. 나름 진지할 수도 있잖아.”

“확실히 하루에 오백 번쯤 잘생겼단 소리 듣게 생기면 스트레스 받을 만도 하겠다.”

왁자직껄한 반응은 정확히 이진이 바라던 대로였다. 실제로 이진은 제 외모가 콤플렉스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진심이었다. 이진이 그들의 진심을 엿듣고, 그들과 진정으로 교류하고 싶은 만큼 치러야 할 대가치고는 가벼웠다. 남은 만큼은 죄책감으로 대신했다.

“난 실용 음악과인데 아무도 노래 불러 보란 소리 안 하거든. 내 노래엔 관심이 안 간다는 뜻이잖아.”

“진짜 차원이 다른 고민이다.”

“장기 자랑 타이밍인가요?”

“저 형 기억나요! 오디션에서 빌리빌런즈 노래 불렀잖아요!”

우진이 밝게 웃으며 이진을 아는 척했다. 이진은 그가 기억나지 않았으나 자신과 함께 대기하던 네 명 중 한 명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렇게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서로의 오디션 경험으로 흘러갈 때쯤 조금 이르게 멘토가 도착했다. 그가 이렇게 일찍 도착할 줄은 몰랐는지 스태프들이 뒤늦게 카메라를 설치하러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묵직한 철문을 열고 들어온 멘토가 얼굴을 가린 마스크를 벗으며 인사를 건네자 다들 웅성이며 제각기 대답했다. 그리고 차마 마음 속 말로 남겨 두지 못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와, 진짜 아이돌…….”

“헉. 저 진짜 팬이에요!”

이진도 오랜만에 연예인을 본 일반인의 표정이 되었다. 직업상 연예인을 만날 일이 잦은 데다가 음악이 아닌 스타 개개인에게 눈을 돌리지 않는 이진이지만, 그에게도 만나 보고 싶은 연예인은 있었다. 대표적으로 지금 눈앞에 있는 멘토, 홍서라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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