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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8화 (8/173)

8화

배정된 숙소를 확인하기 전 같은 포지션끼리 모이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진은 이 포지션 선정이 어떤 기준으로 이뤄졌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닮았어.’

[센터]라는 팻말 중심으로 모이는 이들을 하나둘씩 관찰해 보니, 다들 묘하게 인상이 비슷했다. 평균보단 크지만 참가자들 사이에선 중간 정도의 키에, 날씬해서 덩치가 커 보이지는 않고, 전체적인 인상은 단정하고 곱상한 편이었다. 눈이 화려해 무표정일 땐 차갑고 웃을 땐 온기가 느껴졌다.

이 모든 것은 이제까지 이진을 수식하는 말이었으나 지금은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에게 해당됐다. 인상이 비슷한 사람을 한 번에 이렇게 많이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진이 난데없이 길거리 캐스팅을 당한 데에는 나름에 심오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외모가 기획자의 취향이었다는, 심오한 이유가.

“그…… 저희 통성명부터 할까요? 저는 이진연이라고 합니다.”

“저는 윤인준임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연재입니다!”

……심지어 이름도 비슷했다.

“유이진입니다.”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의미 없이 웃었다. 어색한 첫 만남이 카메라에 온통 담기고 있을 테니 어떻게든 분위기를 풀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지만, 다들 적극적으로 말을 할 자신은 없어 보였다. 그때 누군가가 모인 김에 영상 한 번만 따라 해 보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자연스럽게 분량 확보가 가능할 듯한 제안에 다들 화색을 띠며 좋다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제작진에게 받은 태블릿을 연습실 구석에 있는 대형 모니터에 연결하자 배 위에 포지션 이름을 적은 댄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무는 제법 단순한 편에 반복적인 동작이 많았지만, 센터 포지션이 외워야 할 안무의 수가 타 포지션에 비해 많은 편이었다.

“와…… 이거 출 수 있을까?”

누군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진도 그에 공감했다.

춤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중학교 3학년 체육 시간에 한 단체 안무 수행평가가 다였다. 남자 넷에 여자 넷이 조를 짜 3분 동안 노래에 맞춰 안무를 발표하는 수행 평가였으나 선생님의 암묵적 동의하에 당시 유행하던 아이돌 커버 댄스를 추는 시간이 되었다.

열여섯 살의 이진은 키가 175쯤에, 예쁘장하던 얼굴에 막 어른다운 형태가 잡혀 한창 남녀 가리지 않고 인기가 많았다. 이진과 같은 조가 된 아이들은 모든 안무를 이진 위주로 짜고 싶어 했고 이진은 그들의 기대 섞인 눈빛이 너무 부담스러워 잠도 자지 못하고 동영상을 보며 춤 연습에 매진했다.

이진은 굳이 옛 기억을 떠올리지 않으려 했지만 저도 모르게 그때의 기억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아니, 정확히는 그때의 풍경이 현실로 흘러나온 것만 같았다.

“이렇게…… 하나, 둘, 셋에 뛰고. 반대로 찍고, 찍고.”

“형, 입이랑 몸이랑 따로 노는데요?”

“아, 우진이 너무 웃겨!”

“아니, 너네도 해 보던가……!”

“이걸 왜 못 하지? 하나, 둘, 셋에…… 돌고,”

“거기는 뛰는 거라니까. 아까부터 자꾸 도냐.”

[센터] 문패가 붙은 연습실은, 그 이름이 부끄럽게도 중학생들의 오합지졸 수행 평가보다 결코 낫다고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한 번만 춰 보고 돌아가자던 사람들은 눈으로 보는 것과 몸을 움직이는 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연습실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진은 자신이 춤을 그나마 잘 추는 편에 속하리라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으나…… 이제는 그들이 못 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하며 자존감이나 충전했다.

인상이며 뭐며 죄다 비슷한 사람끼리 모였다고 생각했는데, 실력도 다 도토리 키재기였다. 어디서 이런 사람들을 모아왔는지. 이진은 자신이 그렇게 수집된 사람 중 하나일 뿐, 맨 처음 명함을 받았을 때 출연 제의를 승낙했다면 분명 이들과 함께 묻혀 사람들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을 거라 확신했다.

‘사실 아직 그 위험에선 벗어나지 못했지.’

중학생 때도 이랬던가. 동작은 얼추 외우겠는데 어딘지 영상처럼 박진감 있고 노련한 모양새가 아니라 노래방 화면에서 열심히 춤추는 아바타 친구들 같았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여기서 아바타 친구들은 이진만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였다.

연습실은 동작도 채 외우지 못하는 그룹과 이진처럼 간신히 춤은 다 외웠지만 어딘가 어설픈 그룹 둘로 나뉘었는데, 그 두 그룹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바로 아까부터 첫 번째 그룹의 부진아들을 돌봐 주던 남자, 한찬우였다.

그는 영상을 본 뒤 10분 만에 안무를 모조리 외우고, 30분 만에 당장 공연에 올라도 좋을 정도로 완벽히 습득했다. 방 안에 모인 연습생들이 모두 놀라 탄성을 내지를 때, 이진은 다른 이유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맨 처음 자기소개를 들었을 때부터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을 조심히 더듬어 보다가 그의 춤을 보고 단번에 기억해 냈다. 한찬우는 선승현, 백미열과 함께 치열한 경쟁을 뚫고 데뷔한 멤버였다. 과연, 이 정도 되는 실력을 가졌으니 마지막 무대까지 올라가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실력만 좋았더라면 인기 몰이가 쉽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남의 외모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이진이 보기에도 찬우는 시원하게 잘 뻗은 콧날과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가 매력적이었다. 방송을 탄 이상 앞으로는 승승장구할 일만 남은 것 같았다.

“오늘은 안무만 살짝 익히는 정도로만 만난 거니까, 이만 해산할까요?”

무리의 중심에 있는 찬우가 말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하나둘 연습실을 빠져나갔다. 피곤했는데 내심 잘됐다는 표정을 짓는 이도 있었다. 지방에서 오늘 올라온 사람도 있을 테고, 합숙소 자체가 서울에서 오더라도 꽤 시간이 걸리는 곳이라 다들 피곤한 것은 마찬가지라 나쁘게 보이지는 않았다.

연습실에는 이제 찬우와 이진만이 남았다. 이진은 어차피 숙소로 가는 거면 같은 방향으로 갈 텐데 그동안 사람들과 어색한 대화를 나눌게 싫어 괜히 밍기적대며 볼일이 있는 척을 했다. 그런데 가서 쉬자는 말을 꺼낸 당사자도 나가질 않고 꾸물대고 있었다.

‘어떡하지…….’

어색하지 않게 인사하고 나갈 타이밍을 놓친 이진은 흘끔대며 찬우의 눈치를 봤다. 찬우는 다른 편에서 벽을 보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음, 그럼 저도 이만…….”

“아. 그 저기…….”

이진이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라는 말을 꺼냄과 동시에 찬우도 고개를 돌려 ‘아, 그 저기…….’ 하고 입을 열었다. 그 뒤로 두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입을 다문 탓에 연습실엔 기나긴 적막이 찾아왔다.

그나마 사회생활 짬밥이 있는 자신이 어떻게든 분위기를 풀어봐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낀 이진이었으나, 몸을 흠씬 움직이고 난 뒤에 만나는 사람은 비즈니스 관계보다는 더 사적이었다. 예를 들면 동네 헬스장 러닝 머신 위에서 눈이 마주친 듯한……. 그리고 이진은 사적인 관계엔 주위 사람이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로 숙맥이었다. 뚜렷한 목적과 임무를 부여받는 사회생활과 달리 사생활은 그야말로 자유 콘텐츠였다.

선택지를 빼앗기고 주관식 서술형 답안지만 남은 이진은 하염없이 백지를 노려볼 뿐 쉽사리 손에 쥔 펜을 움직이지 못했다. 다행히 찬우가 먼저 얼어붙은 공기를 뚫고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크흠. 그…… 더 연습하실 거면 비켜 드릴까요?”

“아뇨. 이만 가 보려고 했습니다. 찬우 씨는 계속 계실 건가요?”

“네. 아무래도 버스에 오래 갇혀 있었더니 몸이 좀 찌뿌둥해서…….”

찬우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스트레칭을 했다. 이진은 이번에야말로 인사를 하고 나갈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부리나케 고개를 숙이며 문으로 향했다.

“저, 그럼 이만. 춤…… 조심히 추세요.”

등 뒤로 문이 닫히고 나서야 이진은 안도 반 민망함 반이 섞인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당황한 나머지 춤을 조심히 추라는 이상한 인사말까지 남기고 말았다. 연습실 안에서 풉,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이진은 ‘짐 더미를 들고 대중교통 세 시간 타기’란 큰 임무를 끝마치자마자 오랜 시간 앉아서 대기하느라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숙소가 있는 층으로 향했다.

“어?”

“왔어요?”

“아…….”

“내가 말했잖아요. 우리 완전 세트 상품 취급이라니까?”

스태프에게 생필품이 담긴 비닐 백을 받고 카드키에 적힌 호수로 향했다. 1004호. ‘10층이나 되는구나.’ 같은 생각을 하며 한가롭게 문을 열었는데, 열자마자 보이는 얼굴이 익숙했다. 지급된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미열과 승현이었다.

방은 4인 1실인데 이층 침대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기역자 모양으로 붙어 있었고 남는 공간에는 작은 냉장고와 원형 책상 하나, 왼쪽 벽에는 사물함 네 개가 따닥따닥 붙어 있었다. 승현과 미열은 창문 쪽 이층 침대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는데, 미열이 2층 승현이 1층이었다. 이진은 멍한 표정으로 사물함에 가방을 넣어 두고 벽 쪽 일층 침대에 앉았다.

운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데뷔가 확정되다시피 한 저 두 사람과 방을 같이 쓴다면 초반 분량은 확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번 라운드에서 제대로 된 실력을 보여 주지 못하더라도 인기 참가자와 한 그룹으로 묶이면 투표수도 덩달아 뛸 테니 본격적으로 경쟁이 심해지는 분기점 전까지는 버스를 얻어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으로 그의 잠자리를 책임질 숙소도 마음에 들었다. 살짝 몸을 뉘여 보니 침대 매트리스도 푹신푹신하고 아주 좋았다. 한 번도 침대를 사용해 본 적이 없어서 불안했는데 허공에 뜬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도 적당히 통통대는 매트리스 덕분에 머리가 아프지도 않고, 베개가 없어도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은…….

“형. 옷만 갈아입고 다시 누워요.”

미열이 2층에서 목만 삐죽 내밀고 이진에게 잔소리했다. 이진은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 어느새 감긴 눈을 번쩍 떴다. 많이 피곤하긴 했는지 깜빡 졸아 버렸다. 눈꺼풀이 무거워 눈만 끔뻑이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으로 커다란 손이 뻗어져 왔다. 승현이었다.

“도와줄게요.”

큰 손이 목 뒤로 들어와 뒷머리를 받치고 살짝 일으키더니 다시 척추를 따라 밑으로 내려와 등허리를 잡고 밀어 냈다. 몸이 완전히 앉혀졌다. 그사이 무릎 위에 배급된 잠옷이 놓여 있었다. 이진이 눈을 깜빡이며 잠과 사투를 벌이던 사이에, 승현은 이진의 이름이 적힌 사물함까지 갔다 온 것이다.

“입혀 줄까요.”

승현의 목소리는 고저가 불분명해 이게 물어보는 건지 갈아입히겠다고 통보하는 건지 확실치 않았다. 이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머리 위에서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니 다시금 승현의 손이 뻗어져 왔다.

계절은 이제 막 봄 근처에 발을 걸쳤지만 여전히 두텁기 만한 이진의 외투를 지퍼부터 풀어 조심히 벗겨내는 손길은 부드럽고도 서슴없었다. 남의 시중을 받아 본 적 없는 이진도 능숙함을 느낄 수 있었다. 후드 집업과 라운드 티도 마저 벗기고 터틀넥 내의 하나만을 남겼을 때 승현의 손이 멈췄다.

“내가 할게……. 고마워.”

이진이 잠옷을 가지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꾸물댔다. 적극적으로 옷을 갈아입히던 승현과 없는 사람인 척 입을 다물고 그 광경을 구경하던 미열, 두 사람의 얼굴에 작은 웃음이 걸렸다.

“아, 이 형 진짜 볼수록 재밌는 사람이네.”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손이 청바지와 내의를 툭 떨어뜨리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자 미열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승현은 딱히 입을 열지 않았으나, 미열은 낯가림 심한 제 친구가 이진에게 얼마나 마음을 쉽게 열었는지를 생각하면 뒤통수만 보고도 지금 짓고 있는 표정을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아직 저녁도 먹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1004호 세 사람은 이른 잠자리에 들었다. 방 안에 색색거리는 숨소리만이 가득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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