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5화 (5/173)

5화

‘그나저나 제목이랑 노래가 전혀 다른 내용이잖아.’

이진이 이렇게 생각할 무렵 노래의 분위기가 반전됐다.

이별이란 그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기회.

이별이란 맞아 너와 내 사랑을 시작할 기회!

그그그그 그녀와 이별하라 말을 할 수는 없지만.(에취!)

놀랍게도 빌리빌런즈는 귀여운 목소리와 컨셉으로 임자 있는 남자를 꼬시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작곡가로서의 이진은 컨셉과 노래가 꽤 잘 어울리는 숨은 명곡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디션 참가자로서의 이진은 갑자기 앞날이 캄캄해졌다.

다른 곡으로 교체하러 가기에는 아직도 긴 줄이 늘어서 있을 것 같아서 걱정되었다. 아까 노래 제목을 부랴부랴 검색해서 적던 모습도 찍혔을 텐데 수정까지 하러 가면 악의가 담긴 편집을 하기에 아주 좋은 먹이를 제공할 것 같았다.

이진은 불과 30분 전의 자신의 멱살을 잡는 상상을 했으나 곧 마음을 다잡고 연습에 전념했다.

‘운이 좋았던 적은 없으니까.’

예선에서 보기 좋게 탈락하고 웃긴 영상만 남아 놀림거리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애써 머리 밖으로 쫓아냈다. 이진은 승부수는 ‘이별이란’ 파트에 걸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입으로 중얼중얼 가사를 외웠다.

‘그나저나 제목이랑 노래가 전혀 다른 내용이잖아.’

이진이 이렇게 생각할 무렵 노래의 분위기가 반전됐다.

이별이란 그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기회.

이별이란 맞아 너와 내 사랑을 시작할 기회!

영문은 몰라도 갑자기 과거로 돌아와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회를 얻은 이진에게 꽤 어울리는 듯한 가사였다. 이진은 그렇게 필사적으로 최면을 걸었다.

곧 이름이 불린 이진은 안내원의 지시에 따라 무대 뒤로 이동했다. 이진은 그와 같은 그룹으로 묶인 참가자 네 명과 함께 대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행 요원이 다가와 자잘한 사항들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이름표가 제대로 부착되어 있는지 확인한 뒤 필요한 마이크를 선택하고 있을 때 어둠속에서 누군가가 달려와 이진을 비롯한 대기자들의 머리를 후다닥 정리하고 사라졌다.

“이름 불리시면 이쪽 계단으로 올라가고 청 테이프 붙은 곳 보이시죠? 저기에 서서 자기소개 하고 심사 위원이 별말 없으면 바로 무대 시작하시면 됩니다. 음악은 무대 올라가서 왼쪽에 서 있는 녹색 옷한테 눈짓 하면 바로 재생되고요. 무대 끝나고 이쪽이 아니라 반대편 계단으로 내려가시면 그쪽에서 스태프가 안내드릴 거예요.”

마이크 작동 여부를 확인하며 진행 순서를 설명한 진행 요원은 무대 바로 뒤에서 명단을 들고 대기하던 사람과 눈짓하더니 곧 이진의 등을 떠밀었다.

“참가 번호 A-13 유이진 참가자.”

진행자로 추측되는 사람이 이진의 이름을 불렀다. 등이 떠밀린 그는 종종걸음으로 후다닥 달려 나가다가 바로 앞 스태프에게 잡혀 천천히 걸어 나가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진은 결국 다시 한번 무대에 올랐다.

“안녕하세요. 유이진입니다.”

언제나 현실은 상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이진에겐 다행히도 거센 비난이나 민망한 침묵 같은 극적인 일은 없었다.

템포가 빠른 부분의 가사는 적당히 애드리브로 넘기고 미리 계획한대로 ‘이별이란’ 부분에 승부수를 걸었다. 우선은 가창력을 보여 주는 게 우선이라 생각해 노래를 멋대로 바꿔 부르긴 했지만, 이진은 이런 태도가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름대로 자신의 노력을 보여 주기 위해 마이크를 들지 않은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가사에 맞춰 율동을 넣는 민망한 짓도 감행했다.

그러나 심사 위원들은 오히려 예상외의 귀여운 노래를 잘 소화한 것을 신선하다 평했다. 그들의 표정을 살폈을 때 그다지 인상 깊었다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이진을 못마땅하게 보는 건 아닌 것 같아 우선은 꾸벅 인사를 했다. 마이크가 꺼지고 심사 위원들끼리 잠시 토론을 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운데에 앉은 심사 위원이 다시 마이크를 들고 이진에게 말했다.

“유이진 씨, 심사 위원 만장일치로 합격입니다.”

이진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이진의 무대는 만장일치 합격을 받을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이 모이긴 했으나 방송에 정식으로 출연 가능한 인원이 정해져 있기에 고작 일반인 오디션에서 막무가내로 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백여 명 정원을 반으로 똑 떼어 놓고 본다 하더라도 일반인은 최대 오십 명 정도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래서 5점 단위로 최대 100점 만점의 점수를 매겨 오디션이 모두 끝난 뒤 최종 결과를 발표하는데, 공정성 전에 재미가 보장되어야 하는 방송인만큼 만장일치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었다. 심사 위원이 모두 만점을 줬을 경우에 한해 즉시 합격을 보장하는 시스템인데, 각 조마다 심사 위원이 만점을 줄 수 있는 기회가 세 번 뿐이라 사실상 굉장히 드문 경우였다.

옆에서 다가온 스태프들이 이진에게 동그란 판 위에 ‘합격!’이라고 적혀 있는 딱지를 넘겨주었다. 지시에 따라 왼쪽 가슴팍에 착용을 하고 다시 꾸벅 인사를 한 뒤 무대에서 내려가려고 할 때, 제일 왼쪽에 앉은 젊은 여성 심사 위원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프로듀싱한 남자 아이돌이 세 그룹째 전성기를 누려 화제가 된 젊은 프로듀서였다.

“거울 볼 때마다 부모님께 감사하시겠어요.”

심사 위원들은 모두 활짝 웃고 있었지만 이진은 말 속에 숨겨진 가시에 찔린 것처럼 몸을 움찔거렸다. 가슴에 단 합격패가 몹시 무겁게 느껴졌다. 이진은 굳이 대답하지 않고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넨 뒤 무대를 내려갔다.

***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이진은 참 오랜만에 갖는 장기 휴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모르고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곡 작업을 시작했다. 스튜디오에서 이미 작업했던 곡들은 습작으로 만들어 남겨 두고 습작이던 곡들을 다듬어 가사를 붙였다. 작곡에 큰 뜻이 있는 것은 아니고 이진은 궁극적으로 무대에 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가수가 되고 싶었으니 이것은 정말 습관이었다.

성실하게 살라는 부모님의 말이 주술처럼 발목을 잡아 와 뭐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시간이 많은 학생일 적에도 제대로 놀아 본 적이 없었다. 남는 시간마다 가수가 되기 위한 수련에 정진했고 이는 성인이 되어 아르바이트와 대학을 병행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졸업이라는 현실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불쑥 불안해진 이진은 학과 내에서 그나마 취업률이 제일 좋다는 작곡을 만지기 시작했다. 이후 교수님께 호평을 받아 연결된 스튜디오에 취직을 한 뒤로는 우선 그곳에서 무시당하지 않고 버티기 위해 실력 쌓기에 정진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무대에 선다는 꿈 자체를 외면하고 살았다.

흘러가 버린 과거이자 미래에 대한 생각이 문득 들 때면 그곳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더 작업에 골몰했다. 내가 이 기회를 잡는 것이 과연 맞는 일일까. 하루에도 수십 번 머릿속에 사는 누군가가 이진에게 물었다. 그 말을 무시하는 방법은 머리도 써야 하고 반복적이기까지 한 작업에 온 힘을 들이는 것뿐이었다.

다행히 일주일 정도 버티자 어렴풋이 찾아온 봄기운과 함께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다.

-방송 기간은 약 6개월 정도 됩니다. 총 다섯 라운드가 준비되어 있는데 매 라운드마다 대략 2주에서 한 달간 합숙을 하며 촬영을 하게 될 거예요. 합숙 사이마다 약 1, 2주 정도의 휴식 기간이 주어지고요. 본격적으로 탈락을 결정짓는 투표는 휴식 기간 동안 치뤄진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각 스케줄은 유동적이니 자세한 건 촬영 진행하면서 알려 드릴게요.

“네. 합숙에 따로 챙겨가야 할 건 없나요?”

이진은 어깨에 전화를 고정시킨 채로 방을 뒤져 종이와 펜을 찾았다. 6개월, 5라운드, 한 달씩 합숙, 1주일 휴식……. 메모를 하며 들으니 프로그램의 흘러갈 방향이 어렴풋이 그려졌다.

-문자로 따로 안내 드리겠지만, 기본적으로 옷 몇 벌 정도만 챙겨 오시면 됩니다. 생필품과 가사 서비스, 기타 소모품은 모두 제공되니 걱정하실 것 없으세요. 숙소에 계실 때도 카메라는 있을 거고 카메라 위치와 가동 시간은 사전에 알려 드립니다.”

“그 외에 주의해야 할 점이 있을까요?”

-딱히 말씀드릴 만한 내용은 없네요. 아, 숙소는 4인 1실로 이층 침대예요. 룸메이트 분들과는 1라운드 이후에 탈락자가 없다면 다음 라운드에도 같은 방을 사용할 가능성이 크니 미리 관계가 나빠지지 않게 유념해 주세요.”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라니. 어린애한테나 할 법한 주의를 주길래 이진은 잠시 의아해졌다.

“네. 알겠습니다.”

-일반인 참가자 분이라 말 나온 김에 별도로 말씀드리는 건데…… 방송 나가서 이미지 관리 하는 거 쉬운 일이 아니에요. 어차피 초반이라 개개인에게 주목이 많이 돌아가진 않겠지만 미리 각오하고 오셔야 해요. 특히 연습생 출신은 회사에서 파워 싸움을 미리 겪어 봤던 애들이에요. 절대, 절대 분쟁 나지 않도록 주의해 주세요.

하긴 방송에서 진심으로 사이가 나빠지기라도 했다가는 당장 시청률에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남은 기간 동안 분위기가 망가질 것은 물론이요, 사전에 구상된 진행 내용 같은 것들에도 사소하게 지장이 갈 수 있었다. 가장 최악의 경우는 우승 후보 두 사람이 사이가 안 좋은 경우겠지.

“충고 감사합니다…….”

방송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무한 이진이었다. 친구 하나도 제대로 사귀지 못하는 이진이 괜히 파벌 싸움에라도 얽혔더라면 기껏 잡은 기회를 바보같이 떠나보내는 꼴이 났을지도 모른다. 이진은 당분간 최대한 숨을 죽이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진은 참가자를 보호하지는 못할망정 선전 포고 하듯 악성편집을 예고한 것이 괘씸해졌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 누군가의 진두지휘를 받고 어떻게든 시청률을 올려야 하는 일개미들이기에 굳이 따지지는 않기로 했다.

***

“어? 뮬란!”

캐리어가 없어 백팩에 몇 없는 살림살이를 싸 들고 온 이진은 합숙소 정문에서 익숙한 얼굴과 마주했다. 그의 부른 것이 분명해 보이는 백미열과 그 옆에 선 남자가 나란히 이진을 돌아봤다. 아직 데뷔는커녕 관리도 받기 전인데 두 사람은 어설프긴 해도 연예인다운 포스를 풍기고 있었다.

“뮬란?”

“전에 말했던 그 사람. 버스킹하는데…….”

“안녕하세요.”

“여기서 만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번호를 받았어야 했는데 막 도망가 버리셔서.”

미열이 곧장 오른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이진은 가볍게 잡고 놓으려 했지만 환한 미소를 지은 미열이 꽉 잡고 놔주지 않았다.

“원래 음악 하시던 분이죠?”

“네. 실용 음악과 졸업했어요.”

“어, 벌써요? 형님이셨네.”

그때 미열의 일행이 그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쿡 찔렀다. 그제야 미열이 이진의 손을 놓고 제 친구를 소개했다.

“이쪽은 제 고등학교 동창이자 같은 참가자예요.”

“반갑습니다. 유이진이에요.”

이진이 먼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남자도 무뚝뚝한 얼굴에 작은 미소를 걸으며 손을 맞잡았다.

“선승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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