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4화 (4/173)

4화

이진은 밝은 기분으로 ‘에라 모르겠다.’ 하고 목을 풀며 심호흡을 했다. 얼마 만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지…….

평소의 우울하고 섬세한 이진이 옆에 있었다면 미친 거 아니냐고 당장 말렸겠지만, 지금의 이진은 갑자기 과거로 돌아와 현실감을 조금 상실한 상태였다. 후, 마이크를 타고 목소리가 넓게 울려 퍼지자 아까부터 저릿저릿하던 가슴께에서 무언가 울컥 터져 나왔다. 미열이 잔잔하게 반주를 깔자 이진이 여덟 번의 박자를 기다렸다가 들어갔다.

“Look at me. I may never pass for a perfect bride. Or a perfect daughter.”

이진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잘 정제돼 있었다. 미열은 첫 소절만 듣고도 그가 훈련된 가수임을 눈치챘다. 호흡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감정도 부담스럽지 않게 잘 처리했다. 음의 높낮이에 상관없이 진성과 가성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노련함까지 보였다. 객관적으로 봐도 그는 미열보다 수준이 높은 보컬이었다. 눈을 감고 감정을 조금씩 쌓아 나가는 모습은 마치 디즈니 왕자가 스크린을 뚫고 튀어나온 것 같았다.

이진은 가사를 곱씹다가 어쩐지 제 상황과 비슷한 구석을 발견했다. 물 위에 반사된 자신의 모습이 왜 내가 모르는 누군가인지 묻는 가사는 이진의 마음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해 고요하던 마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외로운 시간을 홀로 견뎌 내며 그는 강해져야만 했다. 무신경한 사람들의 악의 없는 말에 다치지 않도록, 단단한 사람이 되어야만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이 낯설어졌다. 왈칵 참아왔던 설움이 쏟아질 것 같았다. 이진은 길거리 공연에서 가볍게 부르기 시작한 노래에 너무 감정을 담지 않도록 노력했다.

이진의 목소리를 듣고 평소 공연에 몇 배에 달하도록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어디선가 들어본 멜로디에 이끌리듯 찾아온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노래 부르는 이가 누구인지 궁금해지는 아름다운 목소리에 매료되었다.

“When will my reflection show who I am inside?”

이진은 마지막 가사를 부르며 미열을 향해 작게 미소 지었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삶의 목표, 살아가는 이유를 이제야 되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진은 결심했다. 지금 신이 자신에게 주려는 것이 새로운 기회인지, 자존심을 꺾어도 안 될 놈은 안 된다는 교훈인지 모르겠으나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고 따라가기로.

사람들은 노래가 끝나고 몇 초가 지나서야 우레와 같은 찬사를 쏟아 냈다. 동영상을 찍던 이들이 팔을 내리고 영상을 저장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미열은 박수를 치다가 이진이 넘겨준 마이크를 받고 탄성을 질렀다.

“그냥 시켜 본 건데 제가 대박을 건졌네요.”

마치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 위원 같은 말투였다. 노래에 심취해 있던 이진은 뒤늦게 자신에게 달라붙은 사람들의 시선을 깨닫고 부담스러워져 꾸벅꾸벅 인사를 하며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수줍음이 많으시네!”

마이크를 통해 증폭된 미열의 목소리가 뛰듯이 도망치는 이진의 뒤통수에 푹 꽂혔다. 결심은 결심이고, 지금은 감당할 수 없는 관심을 회피하는 게 우선이었다.

***

윈올에 참가하기로 배짱 좋게 마음먹은 것과 달리 막상 전화를 걸려니 손이 벌벌 떨렸다. 당연한 얘기지만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데엔 큰 용기가 필요했다. 하물며 마음이 아닌 행동에 변화가 필요하다면 더더욱. 이진은 명함에 적힌 번호를 차곡차곡 누르며 연신 심호흡을 했다.

‘나에겐 자격이 있어. 성공할 자격이 아니라 도전할 자격이.’

그렇게 자기 세뇌를 거치지 않으면 모처럼 굳힌 의지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지금 이진의 결심은 모래사장에 쓴 글씨와도 같았다. 파도가 덮치고 나면 꼼짝없이 지워지고 말, 참으로 덧없고 연약한 상태였다. 이진은 제 온몸을 동원해서라도 필사적으로 파도를 막아야만 했다.

-여보세요? SSTV 기획 2팀입니다.

“안녕하세요. 명함을 받고 연락드립니다.”

긴장한 게 무색하게도 막상 전화가 연결되자 물 흐르듯 대화가 이어졌다. 이진은 3년간 단련된 사회인이었다. 그때 만났던 무례한 남자가 아니라 친절한 비즈니스 모드를 장착한 여성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달칵 하고 업무 모드 스위치가 눌렸다. 정리가 안 되어서 방금까지 혼란스럽던 머릿속에도 불구하고, 깔끔하고 일목요연한 문장을 입 밖으로 낼 수 있었다.

-그럼 남겨 주신 번호로 이번 주 일요일 오디션 일정 안내드리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절로 터져 나오는 한숨을 푹 내쉬고 나서야 실감이 났다. 일반인 대상으로 진행되는 예선 오디션을 통과하면, 이진은 이번 해 가장 흥행하고 앞으로 3년간의 탄탄대로가 보장된 그룹을 배출할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된다.

이진은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솜이 죽어 딱딱한 이불을 펼치고 그 속에 들어갔다. 여전히 땅바닥이랑 다를 게 없었다. 이불을 새로 사야 하나.

‘자고 일어났더니 전부 꿈이면 어떡하지…….’

이진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이른 잠에 들었다.

일요일이 되었다. 이진은 가진 옷 중에서 가장 깔끔한 니트와 청바지, 코트를 찾아 입고 집을 나섰다. 묵직한 겨울 코트는 고등학생 때 구입한 거라 요즘 스타일이 아니고 신발은 밑창이 다 닳은 운동화가 전부였지만,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취업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으니 통장에 남은 돈으로 당분간 버텨야만 했다. 우선 아끼지 않으면 당장 한 달 뒤부터 식비를 걱정해야 할 판국이었다.

일반인 예선 오디션도 본 방송에 일부 방영될 예정이라 체육관을 빌려 급조한 세트장엔 카메라와 조명이 가득했다. 참가자가 많은 만큼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방송이 진행되다 보면 팬들을 위한 미공개 영상이 조금씩 풀릴 예정이었다. 그때를 위한 자료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기에 제법 본 촬영만큼의 웅장한 기운이 맴돌았다.

잠깐 둘러봤을 때도 생각했지만 오디션장에는 이진의 예상보다 사람이 많았다. 대기실 번호가 열 번이 넘어가는데 한 대기실에서 수용하는 인원이 스무 명 이상이니 최소 백 명이 오디션에 참가하는 것이다.

‘Winner Takes All’, 윈올의 초기 컨셉은 이랬다. 과장 좀 보태 아이돌 데뷔 적령기라 불리 우는 스무 살을 넘긴 애물단지 연습생, 평소 아이돌에 관심이 많았던 잘난 일반인을 모아 가장 잘난 사람을 가리자. 그리고 그에게 그룹에 대한 모든 권한을 부여하자.

이미 결과를 아는 이진은 3년 만에 우승자가 탈주한 그 그룹의 미래가 밝지 않음을 알았지만, 사실 기획만 놓고 보면 저비용으로 고효율을 낼 수 있는 아이디어였다. 참여하는 소속사 측에서는 말 그대로 애물단지이던 연습생에게 생색이라도 낼 수 있고, 당장 소속사에서 퇴출당하고 나면 갈 곳 없는 연습생 입장에서는 개인 방송이든 뭐든 뭐라도 할 수 있게 얼굴 도장을 찍을 기회이니 좋았다.

딱히 청소년기를 희생해 아이돌이 될 만한 열정은 없었지만 시켜 준다고 하면 마다하지 않을 일반인들도 차고 넘쳤다. 실용 음악과인 이진을 연습생이 아닌 일반인 취급하는 것으로 보아 소속사가 없으면 다 같은 취급을 받는 것 같은데, 예체능 업계인들도 대중에게 인지도를 쌓아 두어 손해 보지 않으니 굳이 과거의 못 다한 꿈을 이루러 오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오디션 참가자들이 많을 법했다.

‘설마 예선에서 탈락하는 건 아니겠지……?’

접수를 하며 준비한 곡을 적을 때 아까까진 없었던 카메라맨이 불쑥 다가와 렌즈를 들이밀며 “아이돌 노래로 적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라고 하기에 급히 음원 사이트에 들어가 차트 상위권에 있는 노래를 아무거나 적은 것이 걱정이었다. 뒤에 죽 늘어선 줄이 부담스러워 아는 노래가 뭔지 제대로 확인하지도 못했다.

이진은 가수 지망생이었지 아이돌 지망생이 아니었기에 걸 그룹과 보이 그룹 곡을 부르면 노래에서 요구하는 발성과 호흡이 조금씩 안 맞았다. 그래도 찾아보면 소화하기 좋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겠지만 사전 안내 없이 자신 있는 곡을 준비하라고 하기에 무난한 발라드를 연습하고 말았다.

이진은 잘 몰랐지만 아이돌을 뽑는 프로그램이니 어쩌면 당연한 불문율일거라 적당히 납득했다. 춤을 함께 요구하는 게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가. 노래는 지금이라도 연습하면 그만이었다.

이진은 접수를 하고 받은 대기 번호와 이름표를 들고 배정받은 대기실을 찾아 서성거렸다. 이름표는 마라톤 선수들이나 쓸법하게 거대했다. A4 용지보다 조금 큰 사이즈의 종이에 이름과 나이, 희망 파트가 적혀 있었다. 이진은 아마 모니터로도 누가 누군지 쉽게 식별할 수 있게끔 만들었을 거라 추측했다.

배정받은 대기실을 찾아 들어가니 사람들의 견제 어린 시선이 순식간에 꽂혔다가 흩어졌다. 마치 대학 실기 시험장에 다시 돌아온 것 같았다. 방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은 이진은 우선 가사와 비트에 익숙해지기 위해 노래를 재생하기로 했다.

[빌리빌런즈 - 이별이란]

차트에 있는 노래들 중 그나마 제목이 무난한 노래를 골랐다. 잘못 고르면 보컬 파트는 전무하고 온통 영어 랩으로 도배된 노래를 고를지도 몰라 우선 한글로 된 제목을 우선으로 했다. 그리고 ‘이별이란‘ 이라는 제목에서 풍기는 서정적인 분위기가 록 발라드 정도의 장르를 예상하게 했다.

전직이자 미래의 작곡가인 이진의 머릿속에 이 무렵의 노래들이 이상하게도 남아 있지 않았다. 히트곡이 잘 터지지 않은 침체기이기도 했고 반년 뒤 트라이엄프라는 대형 신인이 나타나 가요계를 전부 쓸어버리는 큰 사건이 있기에 상대적으로 기억이 흐릿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진이 잠깐 한눈을 판 사이 차트 상위권에 있던 노래가 Top 50의 하위권으로 내려가 있었다. 이진은 설마하고 퍼져 나오는 불안한 마음을 누르고 노래를 검색했다. 수많은 노래들이 떴지만 인기순으로 정렬된 검색결과에는 빌리빌런즈라는 가수가 없었다.

정렬을 최신순으로 바꾸자 맨 위에 2주 전 발매된 노래가 떴다. 제목을 누르자 노래가 재생되는 것이 아니라 상세 정보 페이지로 넘어갔다.

이진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앨범 커버에는 깜찍한 악마 의상을 입은 다섯 명의 여성들이 빨강, 주황, 분홍, 노랑, 보라색 마법 봉을 들고 하트를 그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노래 선택에 실패한 것 같았다. 다시 메인 화면으로 돌아보니 인기 차트가 아닌 ‘금주의 최신 음악 pick’이라는 플레이 리스트를 잘못 본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이진은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우선 들어 보기로 했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 앨범 커버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이내 그 위로 가사가 떠올랐다.

쿡쿡쿡쿡쿡, 쿡쿡쿡쿡쿡!

아야 아야 아야 아야 뱃속이 뜨거워.

쿡쿡쿡쿡쿡, 쿡쿡쿡쿡쿡!

아야 아야 아야 아야 목이 달아올라.

왜 이럴까?(글쎄?) 왜 그럴까?(몰라!)

더는 묻지 마!

아야 아야 아야 아야 너무 좋아해서.(아잉~)

어머 어머 어머 어머 너무 빠졌나 봐.(어머!)

날 좋아해서 그런 거야.

난 사랑의 빌런(빌리빌런즈!)

빠른 비트에 톡톡 튀는 노랫말이 귓가에 쏙쏙 박혔다. 노래 자체는 기대 이상으로 괜찮았다. 그러나 이진이 소화하기 어려운 노래임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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