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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3화 (3/173)

3화

잠에서 깨어난 이진이 가장 처음 느낀 이질감은 바로 집이었다. 스튜디오 근처로 이사 가기 전 살고 있던 대학가 원룸에서 깨어난 것이다. 새로 얻은 집 인테리어를 꼼꼼히 손봤던 이진이었다. 누렇게 변색된 벽지와 노란 장판 바닥, 쿠션이 전부 사라져 맨바닥에서 자는 것과 다름없는 파란 꽃무늬 이불이 이진을 반겼다.

‘안녕, 오랜만이지?’

‘그동안 우리 없이 외롭지 않았어?’

벽지와 이불이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이진은 아직 잠이 덜 깬 탓이라며 정신없이 도리질 치다가 화장실로 뛰어가 정신없이 세수를 했다. 거울 속에 여전히 원룸의 비좁고 곰팡이 낀 화장실이 비쳤다.

“……꿈인가?”

3여 년간 외모에 큰 변화가 없었던지라 얼굴로는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대신 이전보다 팔다리에 힘이 느껴지는 게 아직 고깃집에서 알바를 하고 있는 시절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이진은 휴대폰을 한번 뒤져 보곤 빨리 씻고 아르바이트를 하던 고깃집으로 향했다. 만약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상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거나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대학생 때 살던 집으로 자던 중에 옮겨진 거라면 사장님이 자신을 보고 놀랄 것이고, 정말로 몇 년 전으로 되돌아간 거라면……. 확인을 위해서는 이진을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 보는 게 가장 빨랐다.

“이진아, 단체 다 빠졌으니까 오늘은 그만 들어가 봐라. 그러고 보니 오늘이 마지막 날이었지? 잘 살고 가끔 놀러 와라.”

이진은 자신의 이론이 맞는지 확인을 하고자 찾아간 고깃집에서 겪은 열 시간의 중노동으로 시간을 거슬러 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확인했다. 사장은 오랜만에 만난 이진에게 반가운 기색 하나 없이 오늘은 단체가 있어 바쁘다며 ‘한 시간 일찍 보내 줄 테니 마지막 날에 고생 좀 하자‘고 말했다. 덕분에 이진은 오늘이 대학 졸업식이자 아르바이트 마지막 날이자 자신이 웬 남자에게 모욕을 당한 날임을 알 수 있었다.

9시가 되어서야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가게를 빠져나온 이진은 앞으로 어떡하지 하는 막연한 걱정을 하며 집으로 향했다. 벌어 둔 돈도, 집도 다 잃고 아무것도 없는 과거로 돌아와 버렸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기 위해서는 ‘예술 길목’을 반드시 지나야 했다. 좁다란 골목에서 넓게 트인 길에 다다르니 이진에게 다시 고뇌가 찾아왔다. 3년 전 그때야 인생이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자기도 모르게 버스킹 공연을 홀린 듯이 감상했지만, 지금의 이진은 몸은 지쳤어도 머리는 최근 10년 내에 최고조의 속력을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이진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보름 뒤에 이진이 3년간 몸담을 예정인 ‘스튜디오 비긴’ 면접이 예정되어 있었다.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느냐,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느냐……. 물론 3년 전에 우연히 마주친 그 무례한 남자를 이번에도 마주칠 것인지, 또 그가 다시 이진에게 명함을 내밀 것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우선 그 버스커를 찾아 공연이나 구경하고 있어야 뭐라도 선택지가 주어질 것 같은데 도통 그곳이 어딘지 누구의 공연을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비현실적인 일을 겪은 탓인지, 이진의 마음은 평소에 비해 다소 가벼워졌다. 꿈을 꿀 때는 현실이라고 느끼면서도 무모한 행동을 하게 되듯이, 근본을 알 수 없는 태평함이 생겼다.

‘무작정 걷다가 인연이 되면 만나겠지.’

이진은 그렇게 무작정 거리를 헤맸다. 그러던 중 저녁도 대충 먹고 노동을 뛰었더니 뒤늦게 허기가 찾아와 노점에서 핫도그와 와플을 사서 그 자리에서 먹어 치웠다. 분명 재료가 다른데도 달고 짠, 자극적인 맛만 느껴졌다. 핫도그를 먹어도 와플 맛이 나고 와플을 먹어도 핫도그 맛이 났다. 알바생은 시선을 숨기려 노력하며 이진을 힐끔거렸다. 너무 흉하게 먹었나 싶어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다시 버스커들 쪽으로 발을 재촉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버스커의 특징은 어쿠스틱 기타를 들고 아이돌 커버곡을 불렀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캐스팅을 당했으니 외모도 눈에 띄는 편이겠지. 이진은 적당히 추측하며 기타를 든 잘생긴 청년이 있는지 훑어보았다. 겨울의 찬 바람에도 불구하고 거리는 인파로 북적였다. 배가 부르니 뇌가 일을 하기 시작했는지 뒤늦은 부끄러움이 찾아왔다.

속으로 욕이란 욕은 다 해 놓고 다시 기회가 주어졌다고 태도를 싹 바꾸고 자신을 모욕해 댄 남자를 찾아대는 스스로가 참 한심했다. 밤거리를 가득 채운 예술가들의 열정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이만큼의 열정을 불태울 수 없는 지금의 자신에게 새로운 기회는 사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물적인 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자격이 없는 게 아닐까.’

결국 이진은 빈 벤치를 향해 발을 터덜터덜 옮겼다. 벤치에 앉아 본 것이 얼마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더러운 벤치보다는 마시지 않을 음료라도 시켜 두고 커피숍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이 차라리 낫다 생각하는 편이었기에 길거리를 배회하는 것도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몇 년 만에 비로소 휴식을 취하는 기분이 들었다.

번화한 밤거리의 한복판, 관리가 안 돼 더럽고 지저분한 낙서로 도배된 벤치에 기대앉아 야경으로 물든 도시를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단단하게 굳은 가슴이 조금이나마 풀어지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한 자세로만 있어 굳어진 근육을 살살 문질러 풀어주는 것처럼, 여전히 딱딱하고 아프지만 그래도 조금은 즐거웠다.

“여기 제 지정석인데 방해 안 되면 여기서 공연해도 괜찮을까요?”

그때 벤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받은 이진은 놀란 가슴을 움켜쥐고 말을 건 상대를 확인했다.

“앉아 계신 거 보고 다른 자리 찾으려 한 바퀴 돌았는데, 여기밖에 남은 자리가 없어서 그래요!”

이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속사포로 이유를 덧붙이며 부탁했다. 잔뜩 멋 부린 외모에 어깨에 멘 기타 가방. 그리고…… 익숙한 얼굴.

“어…….”

이진이 찾던 3년 전의 버스커는 바로 트라이엄프의 메인 보컬 백미열이었다.

‘얘가 데뷔를 했었을 줄이야.’

이진은 새삼 자신의 무신경함에 감탄했다. 이진이 삐걱거리는 목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미열은 고맙다며 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이크와 스피커를 설치했다. 등받이가 없는 의자를 깔고 앉아 기타를 튜닝하며 손 풀기로 비교적 쉬운 곡을 연주한 미열은 공연을 시작하기 전, 이진에게 말을 걸었다.

“공연 보려고 앉아 계신 거예요?”

“아뇨, 잠깐 쉬려고 했는데…….”

“제가 방해했나 봐요.”

“공연 보는 것도 좋아해요.”

미래의 유명 아이돌 백미열과 사소하고 무의미한 대화를 나누는 상황이 멋쩍어 이진은 작게 웃었다. 이진과 달리 초면인 상대에게 말 붙이기를 몹시 즐거워하는 미열은 그가 보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에이, 거짓말인 것 같은데요? 그래도 감사하니까 대신 신청곡 받을게요. 좋아하시는 곡 알려 주시면 오늘 오프닝은 그걸로 할게요.”

신청곡을 부탁하는 것도 아니고 선심 쓰듯 받겠다고 말하는 그 태도에 더 웃음이 났다. 이진은 애니메이션 뮬란의 수록곡 Reflection을 부탁했다.

“수준 높은 선곡이시네요. 그니까…… 키가 높은.”

이진이 대답 없이 입으로만 웃자 미열은 목을 큼큼 풀며 이건 연습이라고 변명처럼 덧붙였다. 그리고 위아래로 큰 스트로크를 그리며 기타 연주를 시작했다. 그러나 미열의 입에서 나온 곡은 Reflection이 아니었다.

“Let’s get down to business, to defeat the Huns.”

우렁찬 목소리가 마이크의 힘을 받고 거리로 퍼져 나갔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익숙한데 잘 기억나지 않는 멜로디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관심을 표했다. “이거 무슨 노래더라?” 뮬란의 I’ll Make a Man Out of You였다. 미열은 눈을 감고 노래를 부르다가 한 번씩 이진과 눈을 맞췄다.

“Once you find your center, you are sure to win.”

노래가 진행되자 사람들이 북적댈 정도로 미열과 이진의 주변으로 모였다. 몇은 이진의 눈치를 보며 벤치에 같이 앉았다. 후렴구가 되자 노래를 아는 사람들이 ‘Be a man’을 외쳤고 노래를 모르던 사람들도 분위기를 타며 함께 따라 불렀다. 마치 뮤지컬 영화 속에 빨려 든 것 같았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 합창하는 게 이렇게 즐거운지 몰랐다.

노래가 끝나자 한가득 모인 사람들로부터 커다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미열은 마이크에 대고 감사 인사를 했다. 그때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선 관객들 속에서 키가 중간쯤 되는 중년 남자가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이진이 찾던 그 남자였다.

“이번에 새로 방영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캐스팅하고 싶은데 관심 있으면 연락  줘요.”

남자는 명함을 건네며 짧게 말했다. 미열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미소를 지으며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했다. 다시 보니 미열도 남자의 태도는 탐탁지 않아 하는 듯했다. 하지만 받은 명함을 제대로 읽고는 곧 눈빛이 달라졌다. 남자는 전과 같이 시선을 돌려 이진에게 다가왔다.

“얼굴 하나는 반반한데, 그쪽도 관심 있으면 연락하던가.”

무례한 평가를 다시 들으니 이번엔 화가 나기보단 허탈한 웃음이 났다. 어떤 상황에서도 똑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구나. 과거의 이진은 멍하니 서 있었으나 지금 이진은 벤치에 기대 앉아 다리를 꼬고 있었다. 별것 아닌 차이지만 자신이 더 상전같이 느껴지는 자세에 이진은 한 손으로 명함을 받으며 작게 웃었다.

“생각해 볼게요.”

시간을 되돌아와 바라보니 정말 별거 아니었다. 그의 태도는 지금의 자신에게 어떠한 모욕도 주지 못했다. 남을 평가하는 위치에 올라섰다고 전 세계 사람들을 평가질 하고 다니는 사람을 가까이에 둔 그 주변 사람들이 불쌍했다.

공연에 난입해 존재감을 가득 내뿜던 남자가 다시 군중 속으로 사라지자 미열은 살짝 흐트러진 집중을 모으려 화려한 기타 테크닉을 선보였다. 그리고 다시 관객을 향해 입을 열었다.

“사실 신청곡을 받았는데 방금 건 그 노래를 잘 부르기 위해 잠깐 연습 삼아 부른 거예요. 신청 받은 곡은 뮬란의 Reflection인데…….”

미열이 갑자기 이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런데, 여기 공연 구경하러 앉아 있다 캐스팅당한 굉장히 잘생긴 관객분이 계시거든요. 목소리가 어떤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여러분도 방금 좀 궁금하셨죠?”

미열의 말과 함께 주변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황을 파악하려 두리번거렸지만 이미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그가 마이크를 받도록 종용하고 있었다. 벤치 옆에 앉은 여자는 가사를 띄운 화면을 눈앞에 들이밀기까지 했다. 명함을 주고 간 남자 덕분에 벤치에 앉아 있던 잘생긴 남자에게 말을 걸 건수가 생긴 것이다.

이진은 마치 수련회 캠프파이어에서 출석 번호를 호명당한 학생처럼 놀란 표정으로 바짝 굳어 버렸다. 살다 보니 이렇게 어이없는 일만 가득한 날도 찾아온다.

이진의 외모를 보고 일방적인 호감을 갖는 사람들은 너무 쉽게, 그리고 너무 자주 그가 받은 호감에 대한 보답을 해 주길 바랐다. 이진은 그런 상황들을 질색해 대부분 피하는 편이다. 무대 위에서 관심을 받고 싶은 것과 아무 때나 무대 위에 올라가 관찰당하는 건 명백히 다르니까.

그러나 이진은 이번만큼은 능글맞게 웃는 미열에게서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그 몸짓에서 자신감이 묻어 나와 관객들이 다시 한번 뜨거운 환호를 보냈다. 3년간 이진이 몇십 번이고 후회했던 그 상황을 바꿔 냈다. 자존심을 굽히거나 마음에 상처를 입을 필요도 없이 쉬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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