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1)

Hidden track.

어두운 거리는 잠잠했다. 벌써 새벽 세 시가 넘은 시각이라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었고, 원래 번잡한 길도 아니다.

김건준은 차창을 조금 열었다. 이제 막 불을 붙인 담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그 좁은 틈으로 빠져나갔다. 가끔 뜸하게 한 개비씩 피우는 담배는 딱히 맛있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왜 피우는지는 알 성싶었다.

“…….”

시계는 째깍째깍 계속해서 초를 새기고 있었다. 다른 때라면 이미 이곳을 떴을 시각인데 김건준이 응시하고 있는 길 건너의 작은 문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늦다.

쓸데없이 꼬이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김건준은 차창 틈으로 연기를 불어 내었다. 그러면서, 바로 한 시간 남짓 전에 보았던 남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가볍게 전극이 통하는 기구를 삽입한 정도였다. 기구 자체를 혐오하는 남자는 처음에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이를 악물고 기구를 집어넣었다가, 김건준이 스위치를 누르는 순간 몸을 퍼득거리며 경악했다. 그리고 당장 기구를 빼내려 했지만 김건준이 그렇게 두지 않았다.

겨우 한 번, 제일 약한 수준의 전류를 흘린 것만으로 남자는 발기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한 번 더 가볍게 눌렀을 때에는 성기가 크게 흔들리며 귀두 끝에 선액이 한 방울 불룩 맺혔다.

‘마음에 들었나 본데 굳이 뺄 필요 있겠어? 그냥 아예 내일까지 계속 박고 있어. 주욱.’

김건준이―KK가―이를 드러내며 웃자 남자는 부들거리는 턱을 악물었다. 멋대로 기구를 빼기라도 했다간 내일 밤까지 계속해서 그것을 집어넣고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달은 빛이었다.

기구를 빼내는 대신 시트를 잡아 뜯을 듯이 움켜쥔 채 남자는 엉덩이를 쳐들고 수십 수백 번이나 소리를 질렀고, 그러는 사이사이에 몇 차례나 사정을 한 끝에 결국은 부들부들 경련하며 의식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김건준은 오늘 밤은 더 이상 그의 성기에 정액이 남아 있지 않음을 확인한 뒤 방에서 나왔던 것이다.

“…….”

정신을 차린 다음에 나올 걸 그랬나, 김건준은 머릿속에 잠시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담뱃재를 털어 내었다. 그 남자에게 다른 어설픈 놈들이 해를 입힐 수 있을 리는 없겠지만, 평소보다 늦어지고 있으니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김건준은 시계를 보는 자신의 시선이 잦아지고 있다는 걸 깨닫고 쓰게 웃었다.

그때 길 건너편의 문이 열렸고, 그 안에서 익숙한 모습이 나왔다. 김건준은 담배를 끄며 그제야 편안히 시트에 기대었다.

남자는 사나운 눈매를 하고 있긴 했지만 대낮에 마주쳐도 전혀 이상할 것 없도록 멀쩡한 모습이었다. 흠잡을 데 없이 단정한 그 모습이 감탄스럽기까지 하다. 낯빛이 다소 초췌하긴 하지만 그 외에는 입 댈 데가 없었다.

도무지 소리를 지르며 요분질을 할 남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김건준이 여유로워진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는 동안 그는 건물에 딸린 주차장에 세워 두었던 차를 타고 자리를 떴고, 그 모습을 확인한 뒤에야 김건준도 차에 시동을 걸었다. 오늘 하루가 끝났다.

*

권기철의 형에 대한 소문은 무성하게 들었다.

권기철을 만나게 되기 전부터 이미 듣고 있었다. 소문만 들어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기만 한 그 사람에 대해, 김건준은 그런 사람이 있다고 말을 듣긴 했지만 아는 거라곤 없었다. 이름도 나이도 어디 사는지도, 딱히 관심도 없었다.

그래서 권기철과 만나 다른 친구들과 더불어 어울리게 되면서 ‘그 사람이 기철이 형이래.’라는 말을 듣고서야, 그러고 보니 그런 사람이 있다고 했었지, 라고 생각한 정도였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권기철과 그 남자는 김건준의 머릿속에서는 전혀 별개의 인물이었고, 권기철이 늘상 ‘우리 형, 내 형’이라고 강조하며 자랑하는 것처럼 그들을 밀접하게 엮어서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남자가 김건준에게 무슨 상관인가. 직접 아는 사람도 아니었고, 대단하든 말든 김건준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실상 권기철은, 김건준이 딱히 호감을 두는 성격은 아니었다.

김건준과 친하게 지내는 두셋이 권기철과 가깝게 지내서 그들과 함께 어울리는 와중에 권기철과도 더불어 지내게 되었지만, 그뿐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싫지도 않았다. 김건준은 모든 사람과 두루 잘 지냈는데,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모든 사람과 적당한 관계를 유지한 탓이었다.

친구들을 집으로 끌고 가는 걸 좋아하는 권기철의 집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로, 김건준은 떠들썩하게 노는 그들과 적당히 말을 섞고 있었다. 오래된 차를 장난감처럼 분해하는 데에는 큰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차보다 훨씬 그의 관심을 끈 개를 얼렀다.

훈련이 잘되어 의젓하게 앉아 있는 개는, 그러나 아직 어린 탓인지 똘망거리는 눈망울에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 마구 뛰어놀고 싶은데 ‘나는 훈련을 잘 받은 훌륭한 개이니까 의젓하게 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얼굴에 쓰여 있었다.

김건준은 피식 웃었다. 원래부터 개를 좋아하는 그는 어머니 때문에 집에서 개를 기르지는 못했지만 워낙 친구들의 개를 많이 어르고 놀았던 탓에, 그놈을 홀리는 데에는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원래부터 개들이 잘 따르는 편이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개집 옆의 상자에 담겨 있던 개껌 하나로 개를 어르고 노는데, 그게 다른 사람의 눈에는 위험해 보였던 모양이다. 하긴 어리다곤 해도 덩치도 큰 데다 원래 사나운 종이라 그럴 만도 하다. 권기철이 고함을 지르는 게 들렸지만 저놈은 이 개의 주인이 아니었는지, 뻔히 그 소리가 들렸을 텐데도 개는 김건준에게 달려들었다. 권기철이 험악한 얼굴로 일어서는 게 보여 그만 적당히 해 둘까, 하고 김건준이 생각할 때였다.

‘하늘아, 조용.’

머리 위에서 나직하고 단호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 목소리가 들린 순간 개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움직임을 딱 멈추더니 위를 쳐다보았다. 잘못했다는 듯이 끙끙거리는 어린 강아지의 시선을 따라 김건준도 위를 올려다보았다. 2층에서 남자가 테라스에 팔을 걸치고 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냉담한 눈매에 아주 약간의 짜증을 품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김건준도 벼락을 맞은 것처럼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어쩐지 조금은 희한한 듯이 김건준을 훑어보는 눈매가, 마치 김건준을 속속들이 다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그 시선은 옆으로 옮겨갔고, 김건준은 가슴에 묵직하게 허한 기분이 실리는 걸 느꼈다.

‘시끄러우니까 계속 차나 두들겨 댈 거면 나가서 놀아.’

남자가 냉랭하게 말하자 권기철이, 언제나 오만할 정도로 자신감에 넘치는 저 권기철이 당장 풀죽은 목소리로 아냐, 미안, 조용히 할게, 라고 조심스럽게 대답한다.

저 남자가 권기철의 형이구나.

김건준은 다시 남자를 보았다. 그리고 익히 들어 왔던 소문을 확인한다. 저 권기철이 말끝마다 그렇게 납작 엎드리다시피 자랑했던 ‘우리 형’도.

남자는 이내 테라스 안으로 다시 모습을 감추었고, 뚫어져라 그를 바라보고 있던 김건준은 아쉬움을 느꼈다. 더, 좀 더 보고 싶은데, 그런 생각을 문득 깨닫고, 그 낯선 기분에 놀라고 만다.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던 순간이 떠올랐다. 김건준은 처음으로 짓눌리는 기분을 느꼈다.

여태 그런 기분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타인을 누른다는 생각도, 눌린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 자신은 자신, 그렇게 각각 별개로 나아가는 이들이었고 타인에게서 어떠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적도 없었다. 그런 걸 의식한 적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의 그 압도감.

그는――진짜였다.

단순한 소문이나 과장이 아니라, 그는 정말로 김건준이 들었던 대로의 남자였다. 하늘 위에 있는. 아무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만으로 타인을 압도하는.

‘――.’

그것은 오히려 상쾌할 정도였다. 가슴속이 트이는 것과 같은 감각이다. 저 정도면 누구든 눌릴 수밖에 없겠다고, 순수하게 터져 나오는 감탄.

김건준은 이제는 하늘밖에 비치지 않는 위를 계속해서 올려다보았다. 혹시라도 한 번 더 고개를 내밀지 않을까, 연신 위로 시선을 주면서도 자신이 그러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남자가 뜰로 나왔을 때, 이쪽으로 다가오는 그 모습을 본 찰나 심장을 두들겨 맞은 듯 가슴속이 욱신, 수축하고서야 김건준은 자신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

“오늘은 조금 늦게 오셨군요.”

매니저는 변함없이 그린 듯한 웃음을 띤 얼굴로 김건준에게 후드를 넘겨주었다. 그 얼굴을 보면서 김건준은 언젠가 남자가 ‘저 매니저는 얼굴 가죽을 두 꺼풀 달았다’고 했던 말을 떠올리며 혼자 피식 웃었다. 그가 웃자 매니저가 의아한 눈치로 보았지만 그러면서도 입가의 미소는 변함없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온 매니저는 사람을 끌고 갈 능력은 부족했지만 일을 지정해서 맡겨 놓으면 빈틈이 없었다. 단순한 고용 관계보다는 가깝다고 할 수 있을 만한 친분으로,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아니면 입을 다물곤 하는 이 매니저는 김건준에게는 종종 첨언을 하곤 했다.

“와 있어?”

평소라면 ‘어서 오십시오’, 라고 그 얼굴처럼 그린 듯한 인사를 할 매니저가 굳이 늦었다고 말하는 걸 보니 남자가 이미 와 있는 모양이었다. 거의 언제나 김건준이 먼저 와서 기다리곤 하지만 드물게 남자가 먼저 올 때가 있었다. 오늘이 그런 날인가 보다.

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에게 김건준은 후드를 확인하면서 말했다.

“나보다 먼저 오면 주의해서 잘 봐. 어디서 당할 사람은 아니지만 굳이 불쾌한 꼬투리를 만들 이유는 없지.”

어디서든 시선을 사는 사람이다. 남자가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 그에게 몰리던 시선을 김건준은 잘 알고 있었다. 존재 자체만으로 화려한 사람인데, 시선이 모이지 않을 수가 없다.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글쎄요, 다른 사람을 모두 걷어 내기엔 그분이 좀 너무…….”

매니저는 고개를 기웃하며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웃음이 좀 더 짙어지는 그에게 김건준은 심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치명적이지.”

짧은 대꾸를 남긴 그는 전실 뒤로 들어가 외부인 출입금지라고 붙어 있는 문을 열었다. 그 뒤로 매니저의 가면 같은 얼굴에 언뜻 금이 갔다. 미묘한 눈으로 그의 뒤통수를 쳐다보면서 매니저는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창고방처럼 선반이 켜켜이 올려져 있는 실내에는 가지런히 줄지은 상자가 가득했고, 김건준은 무심한 시선으로 그것들을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밖에서는 내가 알아서 하고 있지만, 안에서 혹시라도 내 눈이 미치지 않을 때가 있다면 네가 잘 보고 있어.”

“……, 예.”

미묘하게 대답이 한 뜸 늦어지는 매니저를 김건준은 흘끗 바라보았다. 지금은 조금 인간답게 흐트러진 저 얼굴은, 얼마 전 남자가 클럽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걸 확인하고 난 뒤 김건준이 차에 시동을 걸 때, 잠깐 바깥으로 나왔다가 우연히 그를 목격한 매니저가 보여 줬던 그 얼굴과 매우 흡사했다.

그러든 말든 무심하게 시선을 돌린 김건준은 상자들 위로 손가락을 주욱 스치며 ‘오늘은 뭘 가져가 볼까, 약은 별로고 기구도 딱히 눈에 차는 게 없는데…….’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걸로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매니저가 가리킨 상자에는 딱 보기만 해도 진저리가 쳐지도록 흉측하게 생긴 딜도가 들어 있었다. 상당한 변태가 아니라면 저런 걸 즐기는 건 무리다. 김건준은 고개를 저으며 평범한 구속끈이 들어 있는 상자를 집었다. 이쪽이 나을 성싶었다.

그 상자로 왠지 안 내키는 시선을 준 매니저가 애매하게 김건준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모쪼록 적당히 사정 둬 가면서 하십시오.”

사장님은 평범한 걸 가지고 가실 때면 더 혹독하게 하시더군요, 라고 매니저가 전에 말한 적이 있었다. 클럽 내부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감시 카메라로 모든 것을 다 보고 있을 그는, 김건준이 남자에게 밤마다 지독한 짓을 하는 걸 모두 봐 왔을 터였다.

“걱정 마. 완벽하게 돌아서지 않을 정도로는 주의를 하고 있으니.”

남자 본인에게 주의를 한다기보다는 그 주위의 상황에 주의를 한다는 편이 옳겠지만, 하고 속으로 덧붙인 김건준은 상자를 들고 돌아섰다. 매니저가 미묘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할 말이라도 있나?”

“아니요. 그저 이런 분이신 줄은 몰랐기 때문에요.”

매니저가 문득 뜬금없는 소리를 중얼거린다. 김건준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 정도면 나름대로 온건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니까 말입니다.”

매니저는 입매를 찡그리며 웃었다. 이것도 조금 인간다운 얼굴이다.

“그렇게 로맨티스트인 양 하시는 분인 줄은 몰랐습니다.”

김건준은 잠깐 희한한 눈으로 매니저를 보다가 픽 웃고 말았다. 이놈도 제정신은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걸 민감하게 읽어 냈는지, 매니저가 단호하게 덧붙였다.

“중요한 건 ‘로맨티스트’가 아니라 ‘인 양’입니다.”

“그래, 이제야 너답군. 그리고 나답기도 하고.”

김건준은 매니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곤 걸음을 돌렸다. 안에서 남자가 기다리고 있다면 여기서 더 노닥거릴 생각은 없었다.

그 말을 끝으로 돌아보지도 않고 선뜻 안으로 들어서는 남자의 등 뒤로, 매니저가 기계처럼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라고 인사하는 소리가 울렸다.

*

김건준은 자신이 사람에 미칠 줄은 몰랐다. 살아가면서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 그것은 정말로 막연한 생각이었을 뿐 한 번도 현실로 다가올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늘 위에 있는 것만 같은 사람을 이 손으로 만질 수 있을 줄도 몰랐다. 남자를 처음으로 만지고 입 맞추고 쓰다듬으면서도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그것은 무척 생소하고도 무서운 기분이었다. 심장이 너무 부풀어서 무서울 지경이었다.

기회만 닿으면 권기철의 집에 찾아가면서―자신의 형이랑 가까워 보이는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권기철은 종종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했지만 그것도 모르는 척 거의 반쯤은 억지로 놀러 가면서―, 그러는 동안에도 김건준은 몰랐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욕망이 커진 뒤에야 막연하게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어떻게 하나, 심장이 철렁했다. 어느새 그렇게 욕망이 부풀어 오른 줄도 모르고 있었다. 넋 놓은 바보처럼.

그러다가 결국 그날을 맞았던 것이다. 그날을 맞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또 쳤지만, 막연하나 확고하게 예감했던 대로 끝내 그날은 닥쳐들고 말았다.

――멀리 내려가서 살아.

그것은 김건준의 기반이 무너지는 날이었다.

그때 이미 김건준의 옆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없었고, 가족이었던 사람들도 없었고, 건실하게 쌓아 올렸다고 생각했던 그의 생활 자체가 무너져 있었다.

아무것도.

어떻게든 손에 넣은 거라고, 불안하게나마 그 생각에 매달렸었던 남자도.

――싫은 일은 오래 생각하지 마라. 잊어버리고, 기억하지 마.

늘 냉정하던 남자가 그 말을 할 때만 유난히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착하지. 여태 그랬던 것처럼 말 잘 들을 거지. 그렇게 달래는 것처럼.

그리고 처음으로 그에게서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은 그 순간, 김건준은 정말로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또한, 무엇보다도 자신의 심장을 저미며 짓이기는 것은 자신의 기반이 무너진 것도, 바깥에서 남의 앞에 고개를 숙이며 울부짖고 있는 아버지도 아닌, 이 남자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임을 깨닫는다.

그 순간의 비탄.

나는 사람 새끼도 아니구나. 나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구나.

한 푼의 정도 없는 저 잔인하고 매정한 남자가 아직도 저렇게 빛나 보이고 탐나 보이는 나는.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없다면, 적어도 저 남자만큼은 가져야 했다. 모든 걸 다 저버리더라도,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설령 자신이 바라는 형태로는 결코 그를 얻을 수 없을지라도.

그래도 좋았다. 형태가 달라지더라도, 어떤 식으로는 그가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오기만 하면 되었다.

김건준은 오로지 그것만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을 쌓고 또 쌓았다. 오로지 그것만 생각하며.

*

“욕심이라는 게 누른다고 눌러지는 게 아니라는 걸 그때까지도 아직 몰랐나 봅니다.”

벽에 기대어 서 있던 김건준이 불쑥 말하자, 현관에 놓아둔 나무바구니 안에서 자신의 옷을 집어 들고 있던 남자가 흘끔, 언짢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옷을 벗는 것만큼이나 입는 것을 보이는 것도 싫어하는 남자는 찡그려진 눈썹으로 심기가 사나운 걸 드러내고 있었다.

속옷도 없이 바지부터 사납게 꿰입는 남자를 가느스름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김건준은 “욕심이라는 게 계속 한 자리에서 그 크기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하고 낮은 혼잣말을 덧붙인다. 사람이 원하던 것 하나를 이루고 나면 거기에 머무르면서 만족하는 게 아니라 더한 것을 바라게 된단 말이에요, 김건준은 낮게 중얼거렸다.

남자는 김건준이 꺼낸 말이 몹시 뜬금없다는 눈치였지만 무슨 소리냐고 묻지는 않았다. 그만큼의 관심조차 보이고 싶지 않다는 눈치가 그 무뚝뚝한 태도에서 역력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상관없었다. 김건준도 굳이 풀어서 설명해 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남자에게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중얼거려 보았을 뿐이다. 그렇지, 욕심이라는 게 처음 생각했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를 않아, 홀로 웃고 만다.

그러는 동안 남자는 셔츠에 재킷, 그리고 넥타이까지 완벽하게 걸쳤다. 사무실에서 퇴근하고 저녁 약속을 마친 뒤 바로 이곳으로 왔기 때문에 정장 차림이었다.

바로 직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든, 남자가 얼마나 울부짖고 허리를 흔들었든, 김건준의 성기를 수없이 받아들이며 그 자신도 몇 번이나 사정을 했든, 그는 돌아갈 때에는 언제나 감탄할 정도로 말끔한 모습으로 문을 나섰다. 막 방금까지 자신의 품 안에서 숨을 허덕이며 나신을 비틀었던 그 남자가 맞나, 김건준이 새삼스러운 초조함과 아쉬움을 느낄 정도로.

“바래다 드릴까요?”

막 현관문을 열려던 남자는 김건준이 불쑥 던진 말에 놀란 듯 돌아보았다. 숫제 미친놈을 보는 눈으로 뚫어져라 쳐다보다 말 한마디 없이 짧게 코웃음을 치며 문을 열고 나간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그냥 말해 보고 싶었다. 김건준은 피식 웃었다. 오늘은 왠지 모르게 공연한 변덕이 꿇는 날인가 보다.

남자는 이 집 안에서는 특히나 말수가 적어졌다. 그가 머릿속으로 어떤 감정들을 떠올리고 있을지는 김건준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김건준으로서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는데, 그랬었는데, 얼마 전부터는 문득 그것이 조금씩 아쉬워지고 있었다.

이것도 욕심이 커지는 탓이다.

김건준은 속으로 혀를 차며 웃고 만다. 

“조심해서 가십.”

김건준이 막 그에게 인사를 건넬 때였다.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려던 남자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돌아본다.

“내일 열 시에 사무실로 오기로 한 거, 적당히 여유 두고 와.”

“예? 아아, 알겠습니다.”

내일 오전에 보기로 한 남자의 아버지가 오늘 저녁 술을 과하게 마셨다고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평소보다 조금 늦게 출근할 수도 있으니 괜히 일찍 와서 헛걸음하지 말라고, 남자는 짤막하게 경고하고 돌아선다.

그게 끝이었다. 남자는 열려 있던 문을 굳이 밀어서 닫아 버렸고, 그가 엘리베이터를 탈 때까지는 지켜볼까 했던 김건준은 눈앞이 가로막혀 버렸다.

“……, 저분이 이제 일 얘기를 하면서 반말을 하시네…….”

김건준은 뒤늦게야 그 사실을 깨닫고 중얼거렸다. 김건준과는 달리 늘 칼같이 공사를 분리하는 남자가, 하고 피식 웃는다.

안 되는데. 이러면 욕심이 부푸는 걸 1할 정도는 남자의 탓으로 돌려 버리고 싶어진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김건준은 안 될 건 또 뭐야, 하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중얼거리고 말았다. 남자에게 말하면 틀림없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노려보다가 헛소리는 작작하라고 내뱉을 거다. 내일쯤 그 얼굴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거실의 전창 앞에 서서, 까마득하게 아래에 있는 주차장에서 남자의 차인 듯한 까만 차 한 대가 빠져나가는 걸 지켜본 뒤에야 김건준은 돌아섰다. 시계는 지금이 새벽에 가까운 밤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늘 김건준의 집에서 몸을 섞고 잠시 눈을 붙였다가 남자가 돌아가는 그 시간이다.

김건준은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다시 잠들기를 단념하고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내일을 위해서는 다시 침대로 돌아가 눈을 붙이는 편이 낫겠지만 잠이 완전히 깨어 버렸다. 욕심이 심장을 비집으며 뒤흔들고 있는 탓이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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