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acts
상공회에서 기업 관련 정책 토론회가 있다고 권기영의 아버지 앞으로 안내장이 왔다. 꼭 참석해야 할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날은 딱히 다른 일정이 없어 참석하겠다고 연락을 해 뒀었는데, 그 직전에 지방에서 보다 중요한 일이 생기고 말았다. 결국 아버지는 다른 비서관을 대동하고 지방으로 내려갔고, 그날 잡혀 있던 일정은 권기영이 대신 소화하게 되었다.
그래도 크게 중요한 예정이 들어 있었던 것은 아니라 다행이다. 권기영은 회의장에 앉아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들을 들으며 그날의 일정을 떠올렸다.
오전에 잡혀 있었던 소규모 신문사의 인터뷰는 연기했다. 급하다고 울상을 하며 매달리는 바람에 내일 오전 일정 사이에 끼워 넣느라 애를 좀 먹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고, 저녁에 잡혀 있었던 아버지의 전우회 약속도 혹시라도 늦을 경우를 생각해 취소했다. 그 외에는 내부 업무이니까 상관없다.
슬슬 바빠지기 시작할 시기에 일정이 어긋나면 두 배쯤 더 바빠져 버린다. 당장 월말까지 매일같이 일들이 쌓여 있었지만 이번 월말에는 휴일이 주말과 붙어 며칠 이어져 있으니 그때 그럭저럭 숨 돌리면 될 것이다.
“권기영 보좌관님 아니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혼자 오셨습니까?”
“예, 한 사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버지는 지방에 급하게 볼일이 생기셔서 제가 대신 오게 되었습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늦게 왔는지 회의 도중에 조용히 들어온 남자가 권기영의 옆자리에 앉으며 인사를 건넨다. 권기영은 낯익은 얼굴에 대꾸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자리에 오면 으레 아는 얼굴들을 여럿 마주치게 된다. 이미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인사를 나눈 사람만 두 손으로 못 꼽을 지경이었다.
그때 뭐라고 떠들고 있던 사회자의 입에서 낯익은 이름이 나왔다. 귀에 익은 이름을 듣고 고개를 돌리자 주제에 관해 발언을 하려는지 한 남자가 연단 앞에 서고 있었다.
“김건준 사장님이네요. 그러고 보니 권 보좌관님과도 잘 아시는 사이셨죠?”
“예, 좀.”
권기영은 짧게 대답하고 말았다. 저 남자가 권기영의 누이와 약혼했다가 파혼했다는 소문은 이미 업계에서 좀 관심 있게 보았다 싶은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지는 말들이 분분했지만, 그런 일이 있은 뒤에도 그가 권기영의 아버지와 일적으로는 돈독하게 지낸다는 것도 다들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요즘 하는 일마다 뭐가 붙은 것처럼 잘된다고 하시던데, 참 부럽습니다, 하고 감탄 반 질시 반으로 말하는 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하며 권기영은 멀찍이 앞에 선 김건준을 보았다. 널찍한 회장 안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을 꺼내던 그의 시선이 잠시 권기영의 위에 머문 것 같았지만 곧 아무렇지 않게 스쳐 갔다.
이미 아까 회의장에 들어서면서 김건준과 마주쳐 인사를 나누었다. 안녕하십니까, 오셨군요, 의원님은 바쁘신가 봅니다, 여상한 대화 몇 마디를 나누곤 김건준은 김건준대로, 권기영은 권기영대로 달리 아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그대로 스쳐 지났다. 어차피 권기영도 그도 업무차 온 것이니 달리 더 나눌 말도 없다.
연단에 선 김건준은, 굳이 연단에 서서가 아니라 멀리서도 단연 눈에 띄었다. 훤칠한 장신에 단정하고 말끔한 외견 때문만은 아니다. 늘 인상 좋게 웃음을 띠고 있지만 함부로 찔러 보기는 꺼려지는 분위기를 띠고 있는 남자는, 자기 영역에서는 내로라한다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이 자리에서도 누구에게도 눌리지 않고 고개를 세우고 있었다. 거만하지 않으나 당당하게, 아주 자연스럽게 그는 좌중을 이끌어 가고 있었다.
편안한 어투로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중점만 짚어 정확하게 이야기하면서 간간이 세련된 우스개로 분위기를 풀어 주는 것까지, 비딱한 눈으로 보더라도 감탄할 만한 화술이다.
“개인적으로는 말을 섞어 본 적이 없지만, 주위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평이 아주 좋더라고요. 아직 젊은데 사람도 됐고 능력도 출중하고……, 하하, 그래서 그런지 경쟁 업체 사람들은 아주 평가가 혹독하긴 하더군요. 아직 새파랗게 젊은 놈이 치고 들어온다고……, 이런, 실례했습니다.”
옆자리의 남자는 신나게 주절거리다가 김건준이 권기영 쪽과 나름대로 친분이 있다는 걸 떠올렸는지, 혹은 권기영도 그들 사이에서 보기에는 ‘새파랗게 젊은 놈’이라는 게 생각났는지, 조금 머쓱하게 말을 흐렸다. 권기영은 가볍게 고개를 젓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고 앞을 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건준은 연단에서 물러났고 다른 사람이 그 뒤를 이었다. 멀찍한 앞자리에 앉는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권기영은 시선을 거두었다.
회의는 예정된 시각보다 약간 빨리 끝났다. 딱히 쓸 만한 결론도 없는 회의였다고 생각하며, 권기영은 사회자가 끝을 알림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장에서 나왔다. 사무실로 돌아가 일을 정리하고 나면 아버지가 돌아올 시각이 될 거다. 저녁 약속은 취소했으니 여유롭게 바로 귀가할 수 있을 터였다.
머릿속으로 예정을 늘어놓으며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 나오던 권기영은 그 사이에 회의장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의 사이에 섞여 걸어가다가 여남은 걸음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김건준을 발견했다. 옆 사람과 여상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고 있는 그에게 말없이 시선을 던지는데, 그때 권기영의 조금 뒤에서 한 남자가 갑자기 걸음을 서두르며 앞서가는가 싶더니 김건준에게 다가가며 말을 거는 게 보였다.
목에 걸고 있는 출입용 표지가 빨간색인 게 얼핏 눈에 들어왔다. 기자다. 뭔가 물어볼 말이라도 있었나 보다.
김건준이 뒤를 돌아본다. 그 남자를 보고 처음에 의례적인 웃음을 띠던 그는, 곧 그 기자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잠깐 놀라는 듯하더니 갑자기 얼굴을 반갑게 허물어뜨리는 게 보였다. 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워낙 많아 소리는 들리지 않았는데,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입 모양이 그렇게 움직이는 걸 보니 아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뒤로 돌아서 그 기자와 말을 몇 마디 나누던 김건준의 시선이 그 뒤로 걸어가고 있던 권기영에게 닿았다. 권기영은 무심결에 눈썹을 살짝 찌푸리고 만다. 김건준의 눈매가 휘었다.
“벌써 가신 줄 알았습니다. 잘됐군요, 그러잖아도 전화 드리려고 하던 참입니다.”
말없이 옆을 스쳐 가려던 권기영에게, 기자와 마주 서 있던 김건준이 말을 걸어왔다. 그 기자도 덩달아 권기영에게 눈길을 준다.
“……, 예, 지금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만, 일이 오늘 오전에 일단락되어서 여유가 생긴 참이거든요. 한동안 못 뵈었는데 오늘 저녁에 식사라도 함께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권기영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저녁에는 예정이 있다고 하려 했지만 이미 아버지가 지방에 간 것도, 그 때문에 일정이 취소된 것도 이 남자는 다 알고 있을 터였다. 짧은 망설임 끝에 “예, 그럼.”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때 옆에서 뚫어져라 권기영을 보고 있던 기자가 입을 열었다.
“혹시 기철이네 형님 아니신지요?”
갑자기 튀어나온 낯익은 이름에 권기영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 기자를 보았다. 말을 들어서는 동생과 아는 사이인 성싶었지만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기자는 권기영의 표정을 보고 금방 확신한 듯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저 기철이 친구 한준수라고 합니다. 오래전에 가끔 댁에 놀러 가곤 했었는데……, ……기억 안 나시죠, 하하…….”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는 권기영을 보고 조금 머쓱해졌는지 목덜미를 긁적이던 기자는, 그러나 원래 넉살이 좋은 성격인지 이내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 기철이 들어왔을 때 잠깐 만나기도 했었거든요. 그 자식은 미국 가서 생전 연락이 없더니, 이번엔 돌아가면 연락 좀 하고 살라고 그랬는데 또 연락이 없네요, 하여튼.”
주절거리는 기자에게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주며, 권기영은 그제야 이 남자와 김건준이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를 짐작했다. 오래전 권기철과 더불어 집으로 종종 놀러 오곤 했던 남자라면 자연히 김건준과도 아는 사이였을 것이다. 김건준의 표정으로 봐서는 이들도 퍽 오랜만에 만난 눈치였다. 어쩌면 김건준이 고교 때 지방으로 내려간 이래 처음으로.
권기영은 흘끔 김건준을 보았다. 김건준은 여느 때와 같은 웃음을 띤 채 그들을 보고 있다가 권기영과 눈이 마주치자 눈가의 웃음을 더욱 짙게 한다.
남자가 품에서 명함을 꺼내어 권기영에게 내밀었다. 그 명함에는 눈에 익은 회사명이 적혀 있었다. 권기영이 바로 얼마 전에 연락을 했던 곳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원래라면 아버님이랑 인터뷰를 할 예정이었는데요. 내일로 연기됐다고 해서, 저희 내일 일정 다시 잡느라 난리였어요. 내일은 확실히 되는 거겠죠?”
아니나 다를까, 남자가 다짐하듯이 묻는 말을 들으며 권기영은 오전에 잡혀 있었다가 연기되었던 인터뷰를 다시금 떠올렸다. 이 남자가 그 담당이었던 모양이다.
“예, 됩니다. 내일 약속했던 대로 열 시 반까지 사무실로 오시면 됩니다.”
“에이, 말 낮추세요. 기철이네 형이면 저보다 한참 윗사람이신데. 아, 그리고 원래 오늘 인터뷰 가면 말씀드리려고 했었는데, 혹시 인터뷰 요청을 해도 괜찮을까요?”
권기영은 남자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제야 남자는 자신의 말에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얼른 덧붙인다.
“아, 그게요, 아버님 인터뷰하는 거 말고, 저희 신문사에서 펴내는 주간지에서 차세대를 이끌어갈 사람을 주제로 대담 코너가 있거든요. 안 그래도 바로 다음 예정자로 잡힌 사람이 여기, 건준이라서 오늘 여기 온 김에 미리 인사나 나눠 둘 겸 말을 걸었는데, 왠지 낯이 익다 싶더니만 알고 보니까 옛날 친구잖아요. 아, 형님도 건준이 아시죠? 얘도 기철이랑 같이 형님 댁에 놀러 많이 갔었는데.”
“……, 예, 압니다. 그럼 인터뷰에 대한 이야기는 내일 다시 하도록 하고, 두 분 말씀 나누십시오. 저는 일이 남아 있어서 먼저 가 봐야겠습니다.”
별달리 인터뷰라는 걸 하고 싶지도 않았고 동생 친구라는 새 얼굴이 반갑지도 않았다. 거기에 김건준이 함께 섞여 있어서야 더하다. 그 시절의 이야기 따위는 사양이다.
남자는 권기영이 은연중 사양하려는 뜻을 민감하게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어, 하고 좀 곤란한 얼굴을 하더니 갑자기 “아, 그럼 저기요,” 하고 재차 말을 건다.
“두 분 오늘 저녁 같이 드실 거면, 저기, 저도 같이 먹으면 안 될까요? 제가 대접할게요.”
회사 돈이지만, 하고 넉살 좋게 빙글거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권기영은 침묵했다. 눈동자만 돌려 김건준을 보자 그 역시 생각지도 못한 말이라는 빛을 잠깐 띠더니, 짧은 침묵 끝에 사람 좋게 웃음 지었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기영 씨만 괜찮으시다면요.”
“……글쎄요, 저도 그다지…….”
권기영이 애매하게 말을 흐리자 그 남자는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가 튀기 전에 못을 박아야겠다고 생각했는지 “그럼 저녁 일곱 시 반쯤 해서 뵙는 걸로 하죠. 괜찮으세요?”라고 얼른 말을 꺼냈다. 그리고는 수첩까지 꺼내어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고 채근하는 통에, 그대로 저녁 약속이 굳어졌다.
*
집으로 돌아가자 낮에 기철이에게서 연락이 왔었다고 어머니가 말을 전했다. 아버지가 탐탁지 않은 얼굴로 그러냐고 대수롭잖게 묻고 넘어가자 서운한 기색을 띠는 어머니에게 권기영이 대신해서 뭐라고 하더냐고 말을 맞추었다.
권기철은 별다른 일 없이 지내고 있다고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권기영은 그 말을 전해 듣고 속으로 코웃음 쳤다. 어머니 듣기 좋으라고―혹은 잔소리를 듣기 싫어서―그렇게 말한 모양이다. 권기영에게 그의 소식을 전해 주는 변호사는, 녀석이 여전히 자잘한 사고를 치고 다닌다고 바로 지난주에도 전화를 했었다.
권기철은 더 이상 예전처럼 권기영에게 자주 연락을 하지는 않았다. 가끔 돈이 부족할 때면 몹시 망설이는 기미로 전화를 하곤 했지만 그 외에는 연락이 없었다. 예전 같으면 사고를 쳤으니 도와달라고 징징거리느라 수차례는 더 전화했을 텐데 그런 이야기는 이제 모두 그 변호사에게만 말하는 눈치였다.
어쩌면 더 이상은 권기영에게 연락하지 않도록 김건준에게 뭔가 말이라도 들었던 건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도 필경 그럴 성싶었다. 권기철은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 아버지가 그렇게 다그쳐도 입을 다물고 있었을 무렵에도 이미 권기영에게 말을 붙이길 꺼려 했다. 숨 붙이고 살고 싶으면 입조심 잘하고 살라고, 김건준이 놈에게 경고했을 그 말에는 권기영에 대해서도 포함되어 있었던 눈치다.
권기영은 굳이 권기철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녀석이 더 이상 매달리지 않는다면 권기영으로서도 편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권기영도 권기철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겨우 의식 아래에 눌러 둔 끔찍한 기억이 새파랗게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싫다. 생각만으로 구역질이 치민다. 가능하다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평생 마주치는 일 없이 살기를 바랐다.
그래서 변호사가 은근하게 ‘요즘 권기철 씨가 술이 부쩍 늘었습니다.’라고 전하는 말이 위험 신호라는 걸 감지하고서도 권기영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가 그런 경고를 할 정도라면 상태는 꽤 심할 게 분명했다. 병원에라도 처박으라지, 그래, 차라리 그렇게 해서 평생 보지 않는 것도 좋았다.
어차피 세상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그런 쓸모없는 병신 따위, 영원히 안 보이는 게 좋다.
권기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어딘가 처넣어 버려도 좋을 거라고.
“기철이가 없으니까 참 허전하더라고요. 얼른 한국에 들어오면 좋을 텐데 언제 들어올지도 모르겠고. 걔 거기 계속 있을 거래요?”
눈앞에서 남자가 주절주절 지껄여 대고 있었다. 아까부터 그가 이곳에서 오가는 모든 말의 9할쯤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권기영은 동생의 친구라는 이 남자가 떠드는 말을 들으며, 이토록 사람마다 누군가를 보는 견해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기철이는 뭘 해도 잘 될 것 같았거든요. 리더십 있고 재주도 좋고 사람들 잘 이끌고, 그렇잖아요. 그 녀석이 있으면 다들 떠들썩하게 되게 즐겁게 놀았거든요.”
남자는 아까부터 권기철의 칭찬을 늘어놓으면서 가끔씩 권기영의 눈치를 보았다. 아마도 권기영의 친동생이니까 그의 앞에서 한층 더 띄워 주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그 말 자체가 아예 다 꾸며 낸 말 같지는 않았다. 틀림없이 남자는 잘 포장된 그 말 가운데 어느 부분은 진실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 굳이 좋게 보자면 곰보 자국도 보조개로 보이는 법이다. 권기영이 보기에는 하등 쓸모없는 얼간이라도 누군가가 보기에는 둘도 없이 멋진 친구가 될지도 몰랐다.
하긴 그 당시 권기철은 주위 또래들의 눈에는 필경 ‘있어 보였을’ 거다. 꽤나 잘산다 하는 집안 아이들이 다니곤 하는 사립고에서도 권기철은 월등하게 뛰어난 환경을 두르고 있었고, 그 또래에 먹힐 수 있을 만한 완력도 갖추었었다. 권기철 본인도 스스로에 대해 그렇게 믿고 있는 것처럼, 가진 것도 많고 능력도 좋고 사람들 사이에서 늘 중심에 선 월등하게 뛰어난 인물로 비쳤을 수도 있다. 모든 걸 다 가진 사람 같았을 테니.
권기영은 식사에 곁들여 나온 술을 마시며 흘끗 눈동자만 들어 김건준을 보았다. 그는 말없이 웃음 짓고 있었다. 그러면서 간간이 남자의 말에 그렇지, 그랬지, 하고 맞장구도 쳐 준다.
그 당시의 권기철이 얼마나 훌륭한 친구였는지 떠들어 대는 말을 들으며 놈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기철이가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지. 배포 좋고 인심도 좋아서. 게다가 남자다웠잖아.”
순순히 칭찬을 거들어 주는 김건준의 말을 들으며 권기영이 쓰게 냉소를 띨 때였다. 김건준이 문득 시선을 돌려 권기영을 보면서 눈웃음을 지었다.
“우리 형, 우리 형 걸핏하면 노래를 부르는 것 빼고는.”
“어? 아――맞아 맞아, 으하하, 그랬었지, 그래.”
김건준이 말하기 무섭게 남자는 더럭 기억이 떠올랐는지 박장대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 다 좋은데 브라더 콤플렉스가 좀 심하다고 우리끼리 뒤에서 얘기하곤 했었어……, 아, 형님, 이건 기철이한테는 비밀입니다. 기철이가 알면 장난 아니게 화낼걸요. 그 녀석 자존심도 되게 세잖아요.”
언뜻 눈살을 찌푸렸던 권기영은 말없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권기영의 앞에서는 죽은 듯 말대꾸 하나 못하고 지내면서도 다른 데서는 결코 남 밑에 고개 숙이고 산다는 티를 내지 않으며 으스대는 멍청이였다.
“그런데 다들 납득하는 분위기였어요. 그것도 그럴 게, 형님이 워낙 화려하셨잖아요. 무슨, 소문이 나도 전교 단위가 아니고 전국 단위이고, 못하시는 것도 없고, 분위기도 진짜 카리스마 있으시고, 좀 구름 위에 있는 느낌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기철이도 잘났는데 아예 급이 달라서 비교 대상이 안 될 정도였으니까, 하고 남자는 실실거리면서 다시 권기영의 눈치를 흘끔흘끔 본다.
구름 위. 권기영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코웃음 쳤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비웃음이다.
지금 김건준은 저 말을 들으며 얼마나 비웃고 있을까. 구름 위? 급이 달라? 웃긴 소리다. 심지어는 그를 진창에 처박고 그 위를 밟고 선 인간의 앞에서 듣고 싶은 말은 결코 아니었다.
“맞아. 사람들 속에 가만히 있어도 혼자 빛나는 것처럼 화려해 보이는 사람이었지.”
냉소하며 술잔을 입에 대던 권기영은 그때 불쑥 놈이 속삭이는 말을 듣고 멈칫했다.
김건준이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권기영이 생각했던 조롱 어린 비웃음이 아니었다. 그리운 듯, 꼭 진심인 것처럼 희미하게 웃음 짓고 있다.
“…….”
권기영은 술잔을 내려놓았다. 차라리 비웃음이 나았을 것 같다. 저 웃음이 비웃음보다 훨씬 불쾌하게 심장에 거슬렸다.
“그래도 형님, 그때보다 더 좋아지신 것 같아요. 그때는 완전히 말도 못 붙일 분위기였는데, 그래도 이렇게 좀, 이야기는 나누고 있잖아요. 더 유해지셨나 봐요.”
권기영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진 걸 민감하게 알아차렸는지, 그의 심사가 왜 상했는지도 모르고 남자는 얼른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며 그의 기분을 다독이려 들었다. 권기영은 “그래?” 하고 짧게 되묻기만 하고 말았다.
좋아진 것도 유해진 것도 아니다. 그저 녹이 슬었을 뿐이다. 빛나는 것처럼 화려해 보이던 것은 이제 땅바닥 위를 나뒹굴면서 녹이 잔뜩 슬어 버렸다.
――당신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것 하나만은 버리지 못하는군요.
언젠가 놈이 했던 말이 떠올렸다. 그때 놈은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듯, 한편으로는 아쉬운 듯 권기영을 바라보았었다. 무슨 감정인지 읽을 수 없는 그 미묘한 얼굴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자자, 그럼 뭐 옛날이야기는 이쯤 해 두고, 모처럼 이렇게 만났는데 재밌게 놀아 보죠. 여자라도 좀 부를까요? 이 가게, 좀 좋은 데예요. 가끔 접대할 때에 오곤 하는 데거든요.”
그때, 남자가 왠지 분위기가 딱히 좋지는 않다 싶었는지 과장된 투로 말을 꺼내었다. 따로 방이 마련되어 있는 이 가게에 들어설 때부터 종업원들의 태도며 메뉴 따위를 보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단순히 음식만 먹을 수 있는 가게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 이놈도 굴러먹을 만큼은 굴러먹은 놈이란 거지. 권기영은 남자를 보며 냉소했다.
“기자 앞에서 여자를 끼고 놀라고?”
“하하, 에이, 형님, 여기선 그런 게 아니죠. 절 못 믿으세요?”
짐짓 손을 내저으며 눈살을 찌푸리는 남자를 권기영은 냉담하게 바라보았다. 눈치를 보아하니 접대라는 핑계로 제가 여자를 끼고 놀고 싶었던 모양이다. 기철이랑은 아주 죽이 잘 맞겠군, 권기영은 남자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머쓱한 눈치로 스멀스멀 웃음을 지우던 남자를 달래기라도 하듯 조용히 말을 건넨 것은 김건준이었다.
“미안하지만 난 사양하겠어. 따로 푸는 상대가 있거든.”
부드럽지만 단호한 거절의 말을 듣는 순간 권기영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푸는 상대. 가슴속에서 욱하고 치미는 걸 삼키며, 권기영은 입매를 비틀었다.
“너 사귀는 여자 없다며?!”
남자는 그 말을 듣고 놀란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김건준이 애매하게 웃자 멍하니 그를 보던 남자는 이내 이해했다는 듯 아하, 하고 미묘하게 웃는다.
“섹파 있나 보지? 좋겠네, 나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어때, 어떤 사람이야? 그거 잘해?”
“잘 싸.”
히죽거리며 몸을 기울이는 남자에게 김건준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권기영은 입을 다물었다. 술잔을 내려다보는 눈길이 사나워진 것을 김건준은 틀림없이 알았을 것이다. 그의 입가에 느릿하게 웃음이 걸리고 있었다.
남자는 생각지도 못하게 갑작스레 돌아온 노골적인 말에 일순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도리어 마음이 편해진 듯 활짝 웃었다.
“이야아, 김건준이, 화끈한데. 그래, 남자뿐인데 뭐 어때. 그래, 아주 민감한가 봐, 그 상대가?”
“발목 잡고 다리를 벌리라고만 해도 구멍이 움찔거릴 만큼은 잘 느끼지.”
남자가 꿀꺽 목울대를 울렸다. 김건준에게 번들거리는 시선을 던지느라 그 옆에서 권기영의 표정이 굳어 버리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놈이 며칠 전에 했던 말이다. 무엇 때문에 기분이 상했었는지―그전에 잠시 누이가 파혼을 아쉬워하는 눈치라는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그 와중에 뭔지는 몰라도 권기영에게 기분이 상한 성싶었다―권기영의 엉덩이를 손가락으로 거칠게 헤집어 발기시킨 뒤, 내팽개치듯이 뒤로 물러서 그런 말을 했었다. 뒤로 돌아서 발목을 붙잡고 다리를 벌리라고. 더. 더. 더. 몇 번의 ‘더’ 끝에 놈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성기를 세우고 구멍을 움찔거리는 게 아주 절경이군요, 하고.
그것이 놈의 방식이었다. 외부에서는 무슨 일이 있든 권기영에게 내색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권기영에게 기분이 상하는 일이 생기면 놈은 권기영이 치를 떨며 싫어하는 짓을 그렇게 하곤 했다.
“야, 부러운데……. 그런 사람 있으면 좋지, 응?”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입맛을 다시는 게, 정말로 부러운 눈치였다. 김건준은 일상적인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평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원할 때 원하는 걸 할 수 있으니까.”
“그래도 왜, 가끔 상대가 사정이 안 맞으면 못할 때도 있긴 하잖아?”
“젖꼭지만 잡아당겨도 허리를 부들거릴 만큼 밝히는 사람이면 별로 그렇지도 않아.”
“야……, 끝내준다……. 너랑은 잘 맞나 보다?”
“생각보다 금방 지치는 것 빼곤. 서너 번 만에 늘어져 버리거든.”
서너 번, 하고 남자가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권기영은 술잔을 노려보며 비틀린 웃음을 웃었다. 권기영이 네댓 번은 절정을 맞을 즈음에야 겨우 그 서너 번에 달하는 놈은, 뻔뻔한 얼굴로 저런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야? 누군데, 응?”
남자가 호기심에 가득 차 묻는 말이 들려왔다. 권기영은 염려할 일 없다는 걸 알면서도 심장이 서늘해져 숨을 멈추고 만다. 술잔에만 시선을 주고 있는데도 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냥 봐선 그렇게 창부 같은 줄 아무도 모를 사람.”
놈의 말이 비수처럼 귀를 찔렀다.
“섹스도 딱 정석적으로만 할 것 같은 사람. ……하긴 처음에는 그랬어. 잘하긴 하는데 정석적으로만 했거든.”
“지금은 너 만나서 바뀌었나 보지?”
“구멍에 손가락만 넣어도 줄줄 싸게 됐거든. 제대로 박아 주면 당장 울부짖으면서 허리를 흔들어 대며 죽죽 빨아 당기니까.”
야, 정말 엄청난 요부를 낚았나 보다, 하고 남자가 부러운 듯이 중얼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다리를 꼬면서 앉은 자세를 바꾸는 몸짓이 초조해 보였다.
권기영은 천천히 술잔에서 시선을 떨어뜨려 놈을 보았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놈도 웃음을 담은 눈길을 돌려 권기영을 본다.
“아직 멀었어. 나한테 박히는 것만 머릿속에 가득 차게 만들고 싶거든. 이런 바깥에서도, 나와 같이 앉아 있기만 하면 머릿속으로 내 성기를 빠는 것만 생각할 정도로.”
놈의 목소리는 혼잣말처럼 나직했다.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마주친 시선 속에서 들려오는 그 말이 마치 주문이라도 거는 것 같아, 권기영은 희미하게 어깨를 움츠렸다. 심장이 서늘하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권기영이 술잔을 쥔 손에 움칫 힘을 주었을 때, 놈이 마치 여태 장난스런 농담이라도 늘어놓았다는 것처럼 빙긋이 웃었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긴 하지만, 언젠가는 되겠지.”
농담처럼 가볍게 덧붙이는 놈의 말에, 남자는 꿈에서 깬 것 같은 얼굴로 눈을 껌벅거리다가 어, 응, 하고 중얼거렸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분명히 되겠지. 네가 뭘 원해서 이루지 못한 건 없었잖아.”
김건준은 그러길 바라야지, 하고 가벼운 어투로 말한다.
“일단은 월말 연휴 때 내내 침대에서 안 나갈 거니까 그때에도 좀 노력해 보고.”
장난스러운 투로 덧붙이는 김건준의 말에 권기영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
“좋겠군. 나는 연휴에 아버지를 모시고 지방으로 골프를 다닐 예정인데.”
권기영이 냉담하게 말하자 ‘저런, 모처럼 연휴인데 쉬지도 못하고 피곤하시겠네요.’ 하고 남자가 멋모르고 말하는 옆에서 김건준이 가볍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다른 보좌관에게 가라고 하고 쉬십시오.”
“그럴 수는 없지. 내 일인데.”
권기영이 단호하게 대답하자 놈은 잠시 권기영을 바라보다 “그렇습니까?”라고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별달리 더 파고들지 않는 놈을 미심쩍게 바라보며 권기영은 술잔을 비웠다.
“그러고 보니까 기영 형님은 사귀는 분 없으세요?”
“없어.”
“어……, 하긴 형님한테 어울릴 만한 분이 별로 흔할 것 같지는 않아요. 눈도 되게 높으실 것 같고.”
권기영은 비틀린 웃음을 웃으려다 말았다. 옆에서 놈이 미묘하게 웃음 짓는 게 눈에 들어와 속이 뒤틀린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권기영이 마음에 걸렸는지, 남자는 흘끔거리며 눈치를 보다가 괜히 김건준에게 화살을 돌렸다.
“야, 너는 혼자만 그렇게 끝내주는 섹파 거느리지 말고, 형님께도 좀 소개시켜 드리고 그래.”
권기영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주제넘은 간섭이다. 굳이 놈이 있는 자리에서가 아니라도, 처음 보는 아랫사람에게 들을 말은 아니었다. 남자에게 싸늘한 시선을 던지는 권기영을 보며 김건준은 미묘하게 웃었다.
“글쎄, 그건 어떨지.”
“왜? 아, 그야 기영 형님한테 걸맞은 사람은 찾기 힘들 테지만 내 말은 그게 아니고, 그냥 너 그렇게 즐기는 것처럼, 형님도 편하게 즐길 사람 한둘쯤 있으면 좋잖아. 어차피 유유상종이라고, 네 섹파 주위에도 또 비슷한 사람 있을 것 아냐? 형님한테도 한번 선뵈어 드리고…….”
더 있으면 나한테도, 하고 농담인 척 진심을 슬쩍 흘리는 남자의 말을 듣는 듯 마는 듯, 김건준은 물끄러미 권기영을 보았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미묘한 웃음을 짓고서 한동안 시선을 주고 있던 김건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별로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
“어? 뭐, 그 사람?”
“난 내 애인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는 건 안 좋아하거든.”
김건준이 담담하게 말한 순간 권기영은 막 목을 넘기던 술을 꿀꺽, 헛바람과 함께 삼키고 말았다. 숨을 멈추고 가슴속으로만 쿨룩 기침을 하며, 그는 부릅뜬 눈을 껌벅이며 놈을 보았다.
“어? ……어? 무슨 애인?”
남자가 안주를 집어먹던 젓가락질을 멈추고 멀뚱하게 물었다. 김건준은 평연한 어투로 뭘 새삼스러운 말을 하냐는 듯 대꾸한다.
“여태 말했잖아.”
“어? 너 사귀는 여자 없다고 그랬잖아. ……그냥 섹파, 아니었어?”
남자가 어리둥절하게 눈을 껌벅이며 더듬거렸다. 낭패한 얼굴로 콧잔등을 찡그리는 게, 여태 자신이 했던 말 중에 뭔가 실수가 있지는 않았나 돌이켜보는 얼굴이다.
그 가운데 권기영은 하, 속으로 헛웃음을 웃었다. 웃음조차 나지 않아 조금 움칫거리는가 싶던 입매는 도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애인이 아니라 정부겠지. 창부를 애인으로 둔 게 아닌 바에야.”
권기영이 싸늘하게 내뱉자 남자가 움찔 입을 다물며 권기영을, 그리고 김건준을 번갈아 보며 눈치를 살폈다. 다른 사람의 애인에 대해 함부로 폭언을 내뱉는 게―게다가 여태 자신이 말을 함부로 했던 듯한 게―마음에 걸렸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하하, 형님도 참…….” 하고 얼버무리려 했지만 권기영과 김건준이 서로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걸 보고 입을 다물고 만다.
김건준은 말없이 권기영을 응시했다. 웃는 듯 마는 듯한 눈매가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그렇게 한동안 권기영을 보다가 이윽고 짧게 단언했다.
“애인입니다.”
권기영은 표정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천천히 입매를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하, 낮은 코웃음이 희미하게 흘러나오다가 그조차 멎어 버렸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어……, 아니 뭐, 애인 사이에는 그러기도 하긴 하잖아요. 손만 잡고 다니고 손만 잡고 자고……, 뭐 그러기만 하는 게 애인은 아니니까요.”
우리가 나이가 몇인데, 하고 남자가 과장되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눈치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 술 더 시키자. 그리고 먹을 것도. 뭐 먹을래? 가만있자, 나는 좀 개운한 걸로 먹고 싶은데…….”
남자는 얼른 화제를 돌리며 문을 열더니 밖에 있던 사람을 불렀고,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러 들어오면서 그 안의 대화가 멈추었다.
한참이나 그들에게 ‘뭘 마실까’, ‘이건 머리가 좀 아프더라’, ‘이건 바깥에서는 얼마를 받는데 여기는 얼마다, 회사 돈 아니면 이런 바가지는 못 마신다’ 등등 열심히 떠들어 대던 남자는 주문을 다 받은 종업원이 나가기 무섭게 “그러고 보니까 인터뷰 말인데요.” 하고 회사 일로 화제를 바꾸었고, 자연스럽게 그전까지 흘러가던 화제는 흐지부지되어 지워졌다.
김건준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남자의 화제에 따라갔고, 남자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김건준에게 인터뷰 일정이며 내용에 대해 줄줄 늘어놓았다. 그러는 사이사이에 권기영에게도 가끔 말을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 남자는 기자보다는 차라리 영업을 뛰는 편이 훨씬 적성에 맞겠다고 생각하며 권기영은 잠자코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나 술이 무슨 맛인지도 느껴지지 않았고 취기도 돌지 않았다.
우습지도 않은 개소리를 들어 버렸다.
속이 얹히기라도 한 듯 묵직하다. 권기영은 마셔 봐야 속이 더욱 거북해지기만 하는 술을 결국 손에서 놓고 말았다. 이따위 자리는 나오는 게 아니었다.
머릿속에 놈의 말이 진득하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
몇 번이나 거듭해서 권기영에게 인터뷰 의향을 떠보던 남자는, 권기영이 끝내 고개를 저으며 ‘그 이야기는 내일 사무실에서 하자’라고 잘라 말하자 몹시 아쉬운 눈치였다. 아마도 이 사람은 안 먹히겠구나, 하고 깨달은 듯했다.
결국 업무에 관련된 대화는 김건준과 남자 사이에서 주로 오갔고, 그마저 끝나고 나자 자리는 금방 파장이 났다. 남자는 회사 돈으로 좀 더 즐기며 놀지 못한 게 아쉬운지 혹은 거의 십여 년 만에 만난 옛 친구와 더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는 게 아쉬운지 김건준을 더 잡아 두고 싶은 눈치였지만, 김건준이 고개를 젓자 그마저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권기영에게는 물어보지도 않고 당연한 듯이 대리운전 기사에게 자신의 집 주소를 말한 김건준은, 그들만 남은 차 안에서 이제야 숨을 돌리기라도 하는 듯 긴 숨을 내쉬었다.
그 남자와 더불어 제법 술을 마신 김건준의 숨결에서 술 냄새가 풍겼다. 술을 독으로 갖다 부어도 취하는 법이 없는 그는, 그러나 술기운에 몸이 나른하기는 한지 시트에 목까지 기대었다.
“인터뷰쯤이야 한 번 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저보다는 오히려 기영 씨에게 인터뷰를 따고 싶어서 안달을 하는 눈치이던데요.”
아주 약간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시선을 던지는 김건준에게, 권기영은 고개를 저었다.
“젊어서는 말을 아끼는 편이 나아.”
나이가 들어서도 마찬가지지만, 젊어서는 특히나 꼬투리를 잡히기 쉽다. 지금은 보좌관에 지나지 않지만 차후를 보았을 때, 젊을 때 벌인 일로 두고두고 말을 들을 꼬투리는 사소한 것이나마 만들 생각은 없었다. 김건준과는 발을 딛고 선 세상이 다르다.
김건준은 이내 이해한 듯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월말 연휴, 의원님께 연락드려서 기영 씨는 여가를 주십사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생각난 듯이 김건준이 불쑥 꺼내는 말에, 창밖으로 시선을 주고 있던 권기영은 움찔 미간을 찌푸리며 놈을 돌아보았다.
“기영 씨가 할 일이지만, 꼭 기영 씨가 해야 하는 일은 아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놈은 여상하게 권기영을 보며 말했고, 권기영은 욱해서 뭔가 말하려 하다가 곧 도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놈을 유난히 기꺼워하는 아버지다. 놈은 필경 무슨 핑계든 그럴싸하게 들리는 말을 늘어놓을 터였고, 아버지는 권기영에게 자유로운 연휴를 내 줄 터였다.
게다가 놈은 어차피 연휴에 시간을 못 뺀다는 권기영의 말이 사실을 기반으로 둔 핑계라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정말로 업무와 관련된 일이라면 놈이 함부로 끼어드는 것을 끝까지 용납하지 않았을 권기영은 쓰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주말을 껴서 나흘은 되는 연휴다. 그동안, 놈의 말마따나 창부처럼 지내야 할 터였다.
“…….”
다시 떠오르고 말았다. 타르처럼 끈끈하게 귓전에 들러붙어 있는 헛소리가.
권기영은 무심결에 코웃음을 칠 뻔했다. 서둘러 놈에게서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던져 버린다. 때로―아니 언제나―놈의 미친 머릿속은 무슨 생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도무지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그 뒤로는 대화가 끊겼다. 창밖에서 잠시 시선을 거두어 운전석 옆의 거울을 보자 시트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김건준이 비치고 있었다. 고르게 들려오는 숨에는 술 냄새까지 섞여, 모르는 사람이 보면 술에 취해서 잠들었다고 생각할 모습이다. 아마 거울로 흘끔 뒤를 살피다가 권기영과 눈이 마주친 대리운전 기사도 그렇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대리운전 기사가 교통 정보 때문에 조그맣게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자정 시보가 울리며 뒤이어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딱히 취기는 돌지 않았지만 머릿속이 묵직해진 권기영은 목적지까지는 아직 제법 거리가 남아 있는 현재 위치를 확인하곤 눈을 감았다. 잠들지는 않을 성싶었지만 눈만 감고 있어도 피로가 조금이나마 가벼워질 것 같았다.
라디오에서는 한 곡, 그리고 또 새로운 곡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권기영은 귀에 익은 피아노곡에 귀를 기울이며 낮은 숨을 내쉬었다.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던 머릿속이 조금쯤 나아지는 것 같다.
그때였다.
문득 손끝에 뭔가 스치는 감촉이 느껴졌다.
권기영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아래를 보았다. 시트 위에 내려놓은 손끝에, 마찬가지로 편안하게 시트에 툭 던져 놓다시피 한 김건준의 손이 닿고 있었다. 언뜻 눈살을 찌푸린 권기영은 대수롭잖게 손을 조금 안쪽으로 비키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 눈을 도로 뜨고 만 것은 몇 초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
김건준의 손이 권기영의 손을 덮어 가만히 그러쥐었다.
붙잡힌 손을 내려다본 권기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김건준에게 고개를 돌렸지만, 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잠들었을 리는 없다. 권기영이 붙잡힌 손을 뿌리치고 빼내려 했지만 으스러뜨리기라도 할 듯 꾹 움켜쥔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놈이 미쳤나 보다. 권기영은 어이없는 눈으로 놈을 쳐다보았다. 원래 미친 데가 있는 놈이긴 했지만, 이제는 온갖 방향으로 다 미치는 모양이다.
“놔.”
권기영은 나직이 말했다. 그러나 놈은 정말로 잠들기라도 한 것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놓으라니까.”
한 번 더, 이번에는 조금 더 싸늘하게 말하던 권기영은, 그러나 혀를 차고 말았다.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는 놈 대신 리어미러 속에서 운전기사가 흘끔 뒤를 살폈던 것이다.
여기서 지금 당장 놈의 손을 뿌리치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기사가 보든 말든 소리를 치는 것도 그 자체로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
권기영은 놈을 노려보다가 도로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더럭 심장이 불안하게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김건준은 자신이 원하는 일이면 무슨 짓이든 하고 마는 놈이라는 걸 권기영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남의 시선이나 앞날 따위는 놈의 머릿속에 아예 없는 것처럼 굴었다. 어느 순간이든, 지금도, 놈은 무슨 짓이든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심장이 뛰었다. 붙잡힌 손이 무덥다. 놈의 손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권기영은 손바닥이 축축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흘끔 대리운전 기사를 보자 그는 별다른 기색 없이 졸려 보이는 눈으로 앞을 보며 운전을 하고 있었다.
뭐야. 뭘 어쩌려는 수작이야. 남이 있다고 원하는 짓을 못할 놈이 아니다.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김건준은 그대로 눈을 감은 채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고, 권기영은 신경에 가파르게 날이 선 기분으로 얼어붙었다. 뭘. 언제쯤.
울렁거릴 정도로 불안정하게 날뛰는 가슴 때문에 구역질마저 느껴질 즈음, 이윽고 차는 목적지인 김건준의 집에 도착했다. 건물 앞의 주차장에 차를 세운 운전기사가 “손님, 다 왔습니다.”라고 말했을 때에는 긴장이 풀려 어깨가 뻐근해질 정도였다.
그제야 눈을 뜬 김건준은 아무렇지 않게 손을 놓곤 지갑을 꺼내었고, 권기영은 먼저 차에서 내려 버렸다.
어느새 식은땀이 나 있었는지 밤바람을 맞자 서늘했다. 뒤이어 차에서 내린 김건준은 큰길 쪽으로 서둘러 걸어가는 대리운전 기사에게서 등을 돌려 권기영의 옆으로 다가왔다.
권기영은 놈을 노려보았다. 필경 운전기사가 앞자리에 있는 그 바로 뒤에서 진땀을 흘리게 될 일을 벌이리라고 생각했다. 뭐 하는 수작인지 알 수 없는 한편, 그대로 아무 일도 없이 도착하자 오히려 이상한 기분이 들어 미심쩍게 놈을 바라본다.
“이상합니까?”
김건준은 권기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그리곤 아무 말 없이 놈을 노려보기만 하는 권기영을 보며 조금 더 짙게 웃는다.
“그 얼굴을 보고 싶었습니다.”
권기영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사람을 우습게 보는 것도 정도껏 해, 그렇게 내뱉으려 했지만 김건준은 한발 앞서 건물로 걸어가기 시작했고, 권기영은 놈의 뒷모습을 보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놈은 또 뭔가에 속이 뒤틀려 있었다. 권기영은 늘 많아야 한두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는 놈이 몇 걸음이나 훌쩍 앞서 걸어가는 걸 보고서야 깨달았다. 또 뭔가 기분이 틀어져서 저 짓을 했던 거다. 그렇게 보자면 다른 때에 비하면 매우 양호한 편이다.
아니, 차라리 낫다고 해야 할 거다. 어찌 되었든 한 번 난장을 치고 나면 그럭저럭 기분을 푸는 놈이었다.
권기영은 혀를 차며 놈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
김건준의 집은 언제나 약간 덥다 싶은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체로 있는 권기영에게 딱 좋을 정도의 온도다.
이 집에 들어설 때면 늘 현관에서부터 알몸이 되는 권기영은 여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사실을, ‘조금 서늘한데.’라는 생각을 이 집에서 처음 떠올리면서 알아차렸다.
평소처럼 놈에게 몇 차례나 연거푸 뒤흔들리고 늘어져 있는 사이에 몸에서 땀이 식은 탓이다. 다른 때에는 그대로 의식을 잃다시피 눈을 감고 있으면 놈이 그 위로 이불이든 뭐든 덮어 놓곤 했기 때문에 미처 몰랐다.
“…….”
바깥에서 김건준이 통화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막 행위를 마쳤을 때 타이밍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전화가 울려서, 그 순간 권기영의 몸에서 자신의 성기를 뽑아내고 있었던 김건준은 짤막하게 혀를 차곤 바로 밖으로 나갔었다.
권기영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몸이 묵직하게 늘어졌지만 그럭저럭 앉을 만했다.
오늘은 그나마 덜 힘들었다. 한창 뒤흔들리던 당시에는 몸속을 꿰뚫는 행위 때문에 밭은 숨을 내쉬기에 급급해서 다른 때와 비교할 여유 따위는 없었지만, 뒤늦게 생각해 보면 다른 때보다는 비교적 온건했던 것 같다.
놈의 알 수 없는 변덕을 이해할 날은 아마도 결코 오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권기영은 언짢은 숨을 내쉬었다.
그때 김건준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권기영이 앉아 있는 걸 보더니 말없이 다가와 어깨 위에 넉넉한 수건을 걸쳐 주었다.
“쉬고 계실 줄 알았습니다.”
자신의 몫으로 들고 있었던 듯한 물잔까지 권기영에게 건네준 그는 협탁 위에서 빈 잔을 들어 다시 물을 따랐다.
“준수한테 온 전화였습니다. 기영 형이랑 친해 보이던데 인터뷰 좀 어떻게 부탁할 수 없겠냐고 하더군요.”
그 녀석도 꽤 끈질기죠, 라며 김건준이 웃었다. 권기영은 물을 마시다가 “게다가 눈까지 삐었군.” 하고 코웃음을 쳤다.
김건준은 대답 대신 미묘한 웃음을 남기며 권기영과 마주 보는 위치의 서랍장에 기대어 섰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준수는 참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고교 때――그러니까 기영 씨 집에 종종 찾아가곤 했던 그 무렵 이후로 처음이에요. 그때도 넉살 좋고 붙임성이 좋은 놈이었는데, 여전하더군요. 여자 밝히는 것도 여전하고. 눈치 잘 보는 것도 여전하고. 그래도 워낙 오랜만에 만난 거다 보니 반갑긴 하더군요.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나오던 걸 보면.”
권기영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예전과 연관 있는 사람이나 사물, 이야기 따위를 권기영이 별로 즐기지 않는다는 건 김건준도 알고 있었다. 잠시 말을 끊고 그를 내려다보던 김건준이 문득 눈매를 휘었다.
“당신이 정부가 된 것 같습니까?”
권기영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정부. 욱하고 속에서 치밀어 오른 덩어리가 목을 막는 것 같았다. 어이가 없어서, 화가 나서, 이가 갈려서 말이 안 나온다. 그러나 그것도 놈의 다음 말보다는 나았다.
“정부보다는 애인이 낫지 않습니까?”
권기영은 농담이라도 하는 것처럼 웃음을 띠고 있는 김건준을 미친놈 보듯 쳐다보았다.
“그런 농담을 하면 재미있나? 나는 하나도 재미없어.”
차라리 정부가 낫겠군, 권기영은 코웃음을 치며 어깨 위에 둘러져 있던 수건을 사납게 끌어내려 내동댕이쳤다. 서늘함 따위는 그새 가셔 버렸다. 김건준은 수건을 집어 들어 구석의 바구니 안에 던져 넣곤 잠시 침묵하다 웃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습니다. 기영 씨가 뭐가 되었든 어차피 저로서는 변하는 게 없으니까요.”
시계로 시선을 준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물잔을 단숨에 비웠다. 빈 잔을 내려놓으며 “그럼,” 하고 말을 꺼내는 그의 목소리에 언뜻 나른한 빛이 섞였다.
“그만 눈을 붙이도록 할까요. 얼마 안 있어 나가셔야 할 텐데.”
권기영이 이곳에서 아예 밤을 새우는 일은 없었다. 연휴라도 되어서 놈이 묶어 두지 않는 이상은 날이 밝기 전에 집으로 돌아갔다. 이곳은 권기영이 편안하게 긴 잠을 잘 곳이 아니었고, 샤워를 할 곳도, 느긋하게 뒹굴거릴 곳도 아니었다.
권기영이 이곳에서 생활을 하는 것은 며칠쯤 일을 뺄 시간이 되어 놈에게 이곳에 묶여 있는 때뿐이다.
“…….”
고작해야 한두 시간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야 할 시간이다. 그대로 일어나고 싶었지만 그건 김건준이 용납하지 않을 터였다.
작은 전등만 하나 켜 두고 방의 불을 끄고 침대로 들어선 김건준은 앉아 있는 권기영의 옆에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는가 싶던 그는 문득 도로 눈을 뜨더니 권기영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권기영은 그의 손을 자신의 것인 양 그러쥐어 자신의 옆으로 끌어당기는 김건준을 내려다보며 낯을 찡그렸다. 놈은 그대로 잘 요량인지 아무렇지 않은 기색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뭐 하자는 거야.”
권기영이 잇새로 내뱉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권기영이 손을 꿈틀하자 그 손을 쥐고 있던 김건준의 손아귀에 희미하게 힘이 들어간다.
놈이 뭘 생각하는지 정말로 알 수가 없었다. 뭐 하자는 수작인지 알 수 없다. 단순히 권기영의 반응이 우스운 건지도 몰랐다. 몸서리를 치며 뿌리치는 게 더 꼴사납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 남자는 미쳤다.
권기영은 오래도록 해 왔던 생각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언제나 무서울 만큼 제정신이었지만, 틀림없이 어느 근원에서부턴가 미쳐 있었다.
권기영은 쯧, 혀를 차며 손을 내려다보았다. 큰 손이 권기영의 손을 넉넉하게 그러쥐고 있었다. 넉넉해 보였지만 손을 빼려고 하면 무섭게 옭아맬 손이다. 잘 때 거치적거려서 불편하다고 말해도 끄덕도 않을 손이기도 했다.
권기영은 인상을 썼지만 곧 됐어, 하고 생각했다. 웃기지도 않은 실랑이를 벌이느니, 됐다. 손 하나쯤은.
권기영은 자리에 누웠다. 잠자리에는 예민한 편이라 많이 거슬릴 줄 알았는데, 뜻밖에 그렇게 생각한 탓인지 생각보다 그리 불편하지는 않았다. 한두 시간쯤은 충분히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권기영은 긴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그의 옆에서도 낮고 긴 숨을 내쉬는 기척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뒤로는 정적만 남았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