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1)

7.

권기철은 예정보다 한 달가량 늦게 도미했다. 그리고 그 한 달간 집안은 얼음장이었다.

노력은 해 보겠으나 아마도 다시는 생식을 하기 어렵게 될 거라는 담당 의사의 말이 전해졌을 때, 아버지는 크게 분노해 불화같이 화를 내었고 어머니는 울며불며 앓아눕다시피 했다. 권기철을 그렇게 만든 사람에 대한 아버지의 분노는 곧 권기철에게로 옮겨갔는데, 그것은 권기철이 누구에게 당했는지 입을 다문 탓이었다.

권기철은 아버지의 노호에 벌벌 떨고 더듬거리면서도 끝까지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이 꼴을 당하고서도 말을 못하는 이유가 뭐냐고 아버지도 어머니도 권기철을 닦달했지만 그는 입을 여는 순간 죽기라도 하는 양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이었다.

‘그럼 그렇게 함부로 살아 놓고 죽을 때까지 멀쩡할 줄 알았어?’

그 소식을 들은 누이는 그렇게 말하며 냉소했다.

권기철이 그간 외부에 드러나지 않은 크고 작은 문제들을 숱하게 일으켰다는 건, 모른 척 눈감아 온 그들이 사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어디서 원한을 샀다 한들 이상할 건 없었고, 심지어 다른 곳도 아닌 성기를 못 쓰게 만들 만한 원한이라면 두 손으로 다 꼽지도 못할 터였다.

결국 권기철은 국내에서 딱히 희망적인 전망이 없어 그럭저럭 몸을 추스르는 대로 곧바로 도망치듯 미국으로 넘어갔다.

그로써 권기철은 한국에서의 인간관계에서 당분간 벗어나게 되었지만, 남은 사람들은 그렇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그 뒤로도 한참―지금껏―심기가 언짢았고 어머니는 별일 없는 듯 생활하다가도 가끔 울적한 듯 훌쩍이곤 했다. 누이는 비교적 아무렇지 않은 편이었으나 집안의 분위기에 눌려 덩달아 마음이 언짢은 듯했다.

그리고 권기영은, 그중 유일하게 실질적으로 치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기철이 말이다, 어떤 놈이 그랬는지 아직도 소식이 없나?”

막 서류철을 정돈해 넣고 캐비닛을 닫던 권기영은 잠시 손을 멈추는 듯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저었다.

“예, 아직 모르겠습니다.”

“쯧……, 잘 알아봐. 어떤 놈인지, 계집이든 사내든, 내 식솔에게 해를 끼치는 고얀 놈을 그냥 둬서야 안 될 노릇이지.”

권기철에게서 끝내 말을 듣지 못하자 권기영에게 그 진상을 알아보라고 채근했던 아버지는 언짢은 기색으로 책을 덮고서 안경을 벗어 내려놓았다.

여유로운 오후를 보내는 사이에 퇴근할 시간이 되어 있었다. 요 얼마간은 종전과는 비할 수 없이 한가로운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고작 일이십 분이나마 정규 퇴근 시간 전인데 아버지가 “그만 돌아가자.”라고 권기영에게 말하는 건 한두 달 전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너 저녁에 일 있다더니.”

주차장에 연락해 차를 미리 대기시키고 나갈 채비를 하는 권기영에게, 아버지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니요, 술 약속이라서요. 저녁은 집에 돌아가서 먹고 다시 나와 봐야 합니다.”

“그래. 친구와 만나기로 한 거냐?”

“……, 김건준 씨와 보기로 했습니다.”

권기영이 잠깐 사이를 두고 대답하자 아버지는 그러냐,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김 사장은 일이 잘돼 가고 있나 모르겠구나. 만나면 한번 물어보려무나.”

김건준의 사업에 돈을 얹어 놓은 아버지는 한동안 묻어 놓은 듯이 잊고 있던 그 돈이 문득 생각난 모양이었다. 때마다 보고서처럼 보내 오는 현황 알림은 사업이 착실하게 내실을 다지며 커 가고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따로 말을 듣는 것만은 못한지, 아버지는 가끔 김건준이 안부차 연락을 하면 매우 기꺼워하곤 했다.

“뭐든 맡기면 참 깔끔하게 해낸단 말이야…….”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아버지의 얼굴에 언뜻 아쉬움이 묻어났다. 아마도 누이와의 깨어진 혼담을 떠올린 듯한 아버지는 그러다가 문득 다른 생각에 잠기는 눈치였다.

“김 사장, 김건준이는 뒷사정 같은 것도 잘 캐내어 올 것 같은데, 기철이 그놈이 어느 놈에게 그 꼴이 됐는지를 좀 알아 오라고 시키면……. ……. 아니다. 가족의 흠을 남에게 알리는 건 좋은 일이 아니지. 일단은 두고 보자꾸나.”

아버지는 홀로 읊조리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서랍 등을 잠그고 마지막으로 사무실을 둘러보던 권기영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그럼 나갈까요.”라고 말을 건넸다.

앞서 나가는 아버지의 뒤를 따르며 권기영은 속으로 생각한다. 권기철의 진상에 대한 소식이 끝내 권기영을 통해 들어오지 않으면 아버지는 아마도 권기영에게 역정을 내고는, 정말로 김건준에게까지 알아보라고 부탁할지도 몰랐다. 권기영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태연하게 웃으며 ‘예, 알아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할 놈의 얼굴이 떠올라 입매를 찡그렸지만 곧 다시 무표정을 되찾았다.

“집에 들어갔다 다시 나오려면 시간도 어중간한데, 차라리 식사 약속을 잡지 않고.”

“김건준 씨가 저녁까지는 일이 있다고 해서요.”

“허허, 변함없이 바쁜가 보구나. 하긴 마음 편히 쉬고 있을 겨를이 어디 있겠나. 온 사방에 호시탐탐 노리는 자들이 천지인데.”

아버지는 뭐가 흡족한지 껄껄 웃었다. 그것이, 그럼에도 결코 빈틈 따위를 주지 않을 그 남자에 대한 흡족함이라는 걸 권기영은 알고 있었다.

“그래, 나라도 동종으로 사업을 했더라면 그놈의 싹을 꺾어 버리고 싶었을 게야. 무성한 나무로 자라 볕을 혼자 다 먹어 버릴 게 눈에 훤히 보이는데 그걸 그냥 놔둘 마음이 들겠나, 얼른 뿌리째 들어내 버려야지. ……그러려고 하다가 되레 나가떨어지는 놈들이 요새 끊이지를 않나 보던데.”

이미 들어내 버리기에는 때를 놓친 게지, 하고 아버지는 재미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다가 말없이 옆자리를 지키고 있는 권기영을 돌아본다.

“잘 사귀어 둬라. 나중에까지 도움이 될 테니.”

권기영은 짤막한 침묵 뒤에 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

김건준과 만나기로 한 곳은 권기영이 예전에 가끔 가곤 했던 선술집이었다.

선술집이라고는 하나 웬만한 요릿집보다 음식들이 맛깔스럽게 나오고 좋은 술을 잘 구비해 놓았다. 게다가 그 몫을 하는 가격대라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아, 가끔 가벼운 분위기에서 한적하게 몇 잔 마시기에는 딱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요 몇 달 정신없이 바빠서 걸음 하지 못한 사이에 가게는 그리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바뀌어 있었다. 한산하고 아늑했던 분위기는 어디로 가고,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꽉꽉 차서 시끌시끌했다. 언뜻 듣자니 어딘가 소개되기라도 한 모양이다.

오랜만에 간 권기영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주인이 예약석이라는 표지를 붙여 놓았던 안쪽 구석진 자리를 비워 주어 자리에 앉긴 했지만, 앞으로는 안 올 성싶다.

권기영은 재킷을 벗어 옆자리에 놓으며 시계를 보았다. 약속했던 시각에는 아직 십여 분쯤 못 미쳤다. 늘 약속을 하면 정시에 오는 남자이니, 얼마 있지 않아 오겠다.

곧 주인이 물수건과 물잔을 갖다 주었고, 일행이 오면 시키겠다는 말을 건넨 권기영은 조용히 숨을 돌렸다. 들으려 하지 않아도 주위의 말들이 귀에 들어왔다. 일일 연속극, 친구의 결혼, 미워하던 동창의 승진, 그들의 삶이 이 공간에서 속닥속닥 오간다. 그 가운데 권기영은 홀로 침묵을 지켰다.

약속 시각 정시가 되었을 때,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가게 문이 열렸다. 구석진 자리라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권기영은 김건준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새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는지 어깨에 묻은 물방울을 털어 내며 들어온 그는 가게 주인이 인사를 건네자 인상 좋은 웃음으로 답했다.

딱히 그를 부를 생각은 들지 않아 말없이 그에게 시선만 주고 있는데, 이 사람 많은 곳에서 별로 두리번거리는 기색도 없이 김건준이 곧장 이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권기영이 거기에 있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눈이 마주치자 빙긋이 웃음 짓는다.

“…….”

권기영이 있는 자리로 다가온 그는 건너편 자리에 앉으며 눈웃음을 띠었다. 권기영이 언뜻 눈살을 찌푸리며 그 웃음을 의아하게 바라보자 김건준은 주인이 뒤따라와 건네주는 메뉴판을 받아 들며 대수롭잖게 말한다.

“역시 기영 씨는 바로 눈에 띄는군요.”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도 찾기 쉬워서 좋은데요, 라고 말하며 메뉴판을 훑어본 김건준은 그것을 권기영에게 건네었고, 권기영은 그걸 보려고도 하지 않고 주인에게 “정종 데워서 한 병 주시고, 곁들일 것은 오늘 재료 괜찮은 걸로 적당히 주세요.”라고 말했다.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가게를 둘러본 김건준은 웃는 얼굴 그대로 고개를 약간 비스듬히 기울였다.

“좋은 가게군요. 기영 씨 취향치고는 다소 번잡한 것 같긴 하지만 말입니다.”

“…….”

권기영은 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한 그의 말에, 이제는 별반 놀라운 건 아니었지만 속이 뒤틀려 대꾸 없이 다른 이야기를 꺼내었다.

“일 마치고 바로 오신 모양입니다.”

“예. 인천에서 오는 길입니다. 워낙 일들이 계속 밀려 있어서 분 단위로 예정을 잡고 다니다 보니, 오늘도 하마터면 늦을 뻔했어요. 예정보다 조금 늦게 나왔는데 도로가 막혀서 늦을까 봐 얼마나 초조했는지 모릅니다.”

초조해하는 일이라곤 평생 없을 남자가 넉살 좋게 말하며 짐짓 어깨를 움츠려 보였다. 이 남자가 곤란에 빠지는 일이 있을까.

“바빠서 즐거우신가 본데요.”

“일이요? 딱히 취미가 없으니까요. 한가한 것보다는 바쁜 걸 좋아하긴 합니다. 정신이 한가한 건 안 좋아하거든요. 쓸데없는 생각이 떠오르기 쉬워서.”

그때 주인이 음식에 앞서 술병과 잔을 갖다 주었고, 권기영은 잠시 감도는 침묵 속에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보다가 내심 코웃음을 치고 만다. 쓸데없는 생각, 그런 걸 떠올릴 놈이었던가.

놈은 이런 때에도 권기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금방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권기영의 잔에 술을 따라 주며 빙긋이 웃는다.

“안 그럴 것 같습니까?”

“네, 별로 그렇게는 안 보이는군요.”

권기영이 냉담하게 대꾸하자 놈은 잠시 말없이 웃기만 했다.

“하긴 상당히 오랫동안 안 그러긴 했습니다. 어디……, 고등학생 무렵부터였으니까 꽤 오래되었네요.”

기억을 더듬는 듯 짤막하게 뜸을 들인 김건준이 말한 순간 권기영은 입을 다물었다. 고등학생, 권기영이야말로 쓸데없는 생각이 떠오를 것 같았다.

“많이 힘드셨겠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한가하지 않은 머릿속으로 살아오셨다면.”

냉소하는 권기영을 김건준은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어려 있었다.

“힘들진 않았습니다. 순수하고 완전하게 열중할 어떤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희열이 생기거든요. ‘미쳐 있는 상태’ 말입니다.”

“…….”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는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삶을 송두리째 사로잡도록 강렬한 감정이기만 하다면요. 삶에 구심점이 생긴다는 게 어떤 건지, 기영 씨는 아시겠습니까?”

권기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김건준은 거기서 화제를 그치기로 한 듯 고개를 기울이며 가벼운 웃음을 섞어 덧붙였다.

“그래서 저는 기영 씨한테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농담 같은 진담, 혹은 진담 같은 농담을 하며 김건준은 권기영의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 그즈음 주인이 소담하게 접시에 올린 음식들을 가지고 왔고, 이야기는 거기에서 끊겼다.

조용한 테이블 위로 수런수런,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들이 흘러갔다. 마치 다른 세상에 섞여 있는 것 같다.

“음식이 정갈하고 맛있군요. 기영 씨가 오실 만합니다.”

음식들을 한두 점 집어먹으며 그렇게 말하는 이 남자만이 권기영의 현실에 있었다. 권기영은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군요.”라고 대꾸하며 술만 입에 대었다.

가끔 사람들이 드나드느라 가게 문이 여닫힐 때면 희미하게 물 냄새가 들어왔다. 오후 내 흐리더니 본격적으로 비가 내리는 모양이었다. 궂은 날씨가 이어지는 계절이라 그런지 물비린내가 난다.

거기에 어느 순간 다른 냄새가 섞였다. 가게 안에 들어선 사람이 커다란 개의 목줄을 끌고 있었던 탓이다. 가게 주인이 “손님, 죄송합니다만…….” 하고 그에게 다가가는 동안 권기영은 무심하게 그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일어서면 사람 가슴쯤은 올 듯 큰 개다.

“…….”

“그러고 보니 한신주 씨, 종혁이네 집으로 들어가서 살기로 했다더군요.”

아주 짧은 찰나 권기영의 머리에 떠올랐던 이름이 김건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권기영이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아 속이 뒤틀리기 이전에, 권기영은 그 생각지 못한 말에 눈썹을 꿈틀한다.

“그 조련사 말입니까?”

“예. 넓은 단독 주택에서 개 대여섯 마리 기르면서 혼자 살고 있거든요. 그 녀석도 워낙 까다로운 놈인데, 의외로 한신주 씨가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집에 들이기로 했다는 걸 보니.”

“……, 그 남자도 절륜한가 보군요. 한신주가 같이 살겠다고 할 정도라면.”

권기영은 코웃음을 치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 이유에 대한 또 다른 가능성도 머리를 스쳤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놈은 짐작할 테지만. 그러나 권기영은 다음 순간 김건준이 평연하게 젓가락질을 하며 꺼내는 말을 듣고 멈칫하고 말았다.

“종혁이는 발기가 안 됩니다. 어릴 때 사고를 당해서 관계를 할 수가 없어요. 생식도 안 되고.”

“――.”

“하지만 타인의 섹스를 보는 건 좋아하지요. 개들이 교미하는 걸 보는 건 그보다 더 즐기고요.”

단숨에 술기운이 달아나는 것 같았다. 손에 술잔을 든 채 뚫어져라 그를 노려보는 권기영에게, 김건준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조련에 있어서는 저는 종혁이보다 나은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한신주 씨도 아주 번듯한 개가 될 테니까요.”

앞으로는 클럽에 데리고 나가지 않고 집에서만 키우겠다는 걸 보면 종혁이도 썩 마음에 들어 하는 모양이니 더욱 걱정할 것 없지요, 하고 김건준이 덧붙였다.

권기영은 술잔을 내려놓았다. 술맛이 떨어졌다. 접시 위에 놓여 있는 날고기에도 역한 기분이 들었다.

“기철이에게도, 개라도 키워 보라고 권해 줄 걸 그랬습니다. 즐거움이 하나 사라졌으면 다른 즐거움이라도 하나 찾아야 할 테니까요.”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김건준을 보며 권기영은 입매를 비틀었다.

권기철이, 그 천지 분간을 못하는 철부지가 어째서 아버지가 그렇게 다그치는데도 입을 다물고 있었는지 권기영은 알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매달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며 놈을 혼내 달라고 애걸했어야 할 그 멍청이는, 그럴 기회가 오기 전에 놈을 만났을 터였다. 그리고 그때 어떤 방식으로든 깨달았던 것이다. 딱 한 발, 딱 한 발만 더 내디디면 자신은 정말로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리라는 걸.

“하지만 기철이는 좋은 주인은 못 될 것 같으니, 뭔가를 키우는 건 권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군요.”

김건준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고, 권기영은 잠자코 침묵했다. 유쾌한 주제가 아니었다. 어떤 의미로든.

천천히 술잔을 기울이며, 접시가 비면 주인이 눈치 빠르게 적당한 음식들을 한두 가지 더 갖다 주곤 하는 사이에 시간이 제법 늦어진 모양이었다. 어느새 테이블이 한둘씩 빠져, 바깥에서 조용하게 내리는 비의 기척이 느껴질 정도로까지 한산해졌다.

“내일은 바쁘십니까?”

그때 김건준이 불쑥 물었다. 권기영은 침묵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오전에 일정이 하나, 오후에 일정이 하나 잡혀 있을 뿐입니다.”

“오전 일정이라. 외근입니까?”

“……, 인터뷰 일정입니다.”

그렇다면 사무실에서 일을 보시겠군요, 하고 김건준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놈이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있을 일을 권기영은 짐작할 수 있었고, 지금 이 순간 권기영이 그 짐작을 하고 있다는 것도 놈은 안다. 권기영의 표정을 살피던 놈이 짤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평일에 무리하라는 말은 하지 않을 테니까요. 다만, 오늘은 다른 생각을 할 여유는 없을 정도로 하는 편이 기영 씨에게 낫겠구나 싶어서요.”

권기영은 웃는 듯 마는 듯 입매를 비틀었다. 다른 생각, 그렇게 편했던 적은 여태 한 번도 없었다. 말없이 잔을 비운 권기영은 술병을 들었고, 병에서 흘러나온 술은 잔을 딱 반만 채우고 떨어졌다.

“그 잔이 비면 그만 일어서도록 하지요.”

김건준은 그 병이 비길 기다렸던 듯이 말했다.

* * *

김건준의 집은 벽이 없는 드넓은 공간이었다.

웬만한 가족이 들어가 살 만한 넓이였지만 벽 없이 트여 있는 이 특이한 구조의 집에 처음 들어섰을 때, 권기영은 알몸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현관에서 알몸이 되었다.

‘이 집의 현관 안쪽으로는, 제 것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들일 생각 없습니다.’

김건준은 막 현관에서 신을 벗으려던 권기영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멈칫하며 기묘한 표정으로 김건준을 보던 권기영은 천천히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닫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결국은 그가 하는 말을 따를 도리밖에 없었다. 옷도, 구두도, 시계도, 여타 모든 소지품과 몸에 걸친 것들을 모두 현관에 남겨 두고, 오로지 권기영 그 자체의 몸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그것은 주욱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가게에서 클럽까지 별로 멀지도 않았는데, 오랜만에 클럽으로 가 볼 걸 그랬나요?”

김건준은 생각난 듯이 불쑥 말했을 때, 권기영은 놈의 사타구니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편한 실내복으로 갈아입긴 했지만 바지 앞섶을 풀어 헤친 걸 제외하고는 제대로 옷을 갖춰 입고 있는 김건준과는 딴판으로 실올 하나 걸치지 않고 벌거벗은 채로.

그리고 김건준은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 권기영의 머리 위로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한 일이십 분 잠깐 일을 봐야 할 게 있다며, 놈은 권기영에게 ‘그동안 따분하실 테니 이거라도 물고 있으십시오.’라고 성기를 꺼내어 보였고, 권기영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권기영은 뜬금없는 말을 하는 놈을, 입에는 놈의 성기를 문 채 눈동자만 들어 올려다보았다. 슬슬 일을 마쳐 가는지 놈의 손에서 마지막 종잇장이 팔락이고 있었다.

“어제 다른 일 때문에 매니저와 통화를 하는데, 갑자기 발길이 뚝 끊어져서 무슨 일인가 가끔 소식을 묻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군요. 하긴 늘 밤마다 붙어 있던 둘이 갑자기 동시에 사라지니 궁금할 만도 하겠지요.”

그날 밤 이후로 그들은 클럽에 가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새로이 드나들게 된 장소가 김건준의 집이었다. 온전하게 놈의 영역인 곳. 현관문 하나를 경계로 권기영이 남김없이 놈의 것이 되는 곳이다.

“다음에 다시 가게 되면 아예 홀에서 제일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거기서 하는 걸 보여 주기라도 해야겠습니다, 그 둘이 찢어졌냐고 묻는 놈들도 꽤 된다는 걸 보니.”

김건준은 서류 체크를 마친 듯 종잇장을 도로 덮었다. 자신의 성기를 물고 있는 권기영의 뺨을 매만지며 가볍게 허리를 추어올리는 시늉을 한다. 그 작은 움직임으로 목구멍을 찔린 권기영은 저도 모르게 쿨럭, 낮은 기침을 토하고 만다.

김건준은 권기영을 부드럽게 밀어내었다. 아직 토정하지 않아 단단하게 부풀어 있는 성기가 젖은 소리를 내며 입 밖으로 나왔다. 그런 뒤에도 몇 번이나 쿨럭, 쿨럭 기침을 하는 권기영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김건준은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젖어 있는 입술을 끈적이는 소리를 내며 만족할 때까지 빨아먹은 김건준은 그러는 동안 줄곧 자신의 성기를 권기영의 허벅지 안쪽에 문지르고 있었다. 축축하게 젖어서 흘러내리는 선액의 감촉에 권기영이 허벅지 근육을 움찔하고 만다.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는 모양이지요. 참 이상하단 말이에요, 기영 형의 몸은 충분히 저한테 박히는 데에 익숙해진 것 같은데.”

그보다 훨씬 아무렇지 않을 부분에서 익숙해지질 않거든, 김건준은 나직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앉아요. 그대로.”

권기영에게 입을 맞추는 동안 그의 허리를 적당히 당겨 안은 김건준이 속삭였다. 아주 조금 몸을 내리며 앉으려던 권기영은 도중에 멈칫하고 말았다. 엉덩이 사이를 놈의 성기가 꾹 찔렀던 것이다. 그러나 권기영이 멈추기 무섭게 놈이 더욱 낮은 목소리로 한 번 더 말했다. 앉아요, 라고.

“…――.”

우람하게 부풀어 있던 더운 살덩이가 엉덩이 사이에 박혔다.

권기영은 반사적으로 이를 악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것도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을 부분이다. 주름을 벌리며 뜨거운 살덩이가 파고드는 느낌도, 몸속을 꾸역꾸역 채우며 밀려드는 느낌도, 그 순간 저릿하게 심장까지 조여드는 듯한 느낌도.

그런 것들이 이제는 일상이 되어 가고 있음에도 변함없이 그 순간은 섬뜩하고 소름끼쳤다.

그리고 또 하나, 죽을 때까지 익숙해지지 않을 것은,

“아!!!”

권기영이 몸을 내려 김건준의 성기가 반쯤 들어갔을 때였다. 김건준이 갑작스럽게 사타구니를 추어올렸고, 몸을 조금씩 벌려 들던 성기는 단숨에 저 깊은 곳까지 꿰뚫으며 들어왔다. 권기영은 짧은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짤막하게 터지는, 놈의 즐거운 듯한 웃음.

“그래요, 저만 즐기면 안 될 테니 말입니다.”

놈이 권기영의 성기를 툭 두드렸다. 고작해야 놈의 성기가 파고든 것뿐인데, 그것만으로 권기영의 성기는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놈의 손톱이 귀두며 기둥을 툭툭 두드릴 때마다 그것은 이리저리 흔들리며 조금씩 더 일어섰다.

“―――.”

권기영은 이를 악물었다. 심장이 수축하는 것처럼 욱신거렸다.

이 순간의 이 처참한 기분. 나락에 처박힌 듯한 분노.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을 터였다. 절대로 익숙해져선 안 되었다.

처참한 분노를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그 사실에 안도하는 기묘한 모순 속에서, 권기영은 김건준의 손에 밀려 뒤로 넘어졌다. 소파 위에 등을 대고 누워 버리는 권기영의 몸 위로 김건준의 무게가 실려 왔다. 거침없이 허리를 밀어붙이기 시작하는 놈의 움직임 아래에서, 권기영은 아아, 오늘은, 하고 일말의 안도를 느꼈다.

허리를 흔드십시오, 엉덩이를 조이십시오, 구멍에서 힘 빼요, 내 입에 젖꼭지를 물려요, 때로 놈은 나태하게 누워 권기영에게 움직임을 요구할 때가 있었고, 그럴 때면 권기영은 자신이 몸을 움직이며 놈의 쾌락을 돕는다는 것에 숨 막힐 정도의 수치를 느껴야만 했다.

차라리 이편이 낫다. 녀석이 멋대로 움직여 대는 게.

“그렇게 다행이라는 얼굴을 하면요, 기영 형.”

그때, 권기영의 바로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던 김건준이 웃었다.

“딱히 그렇게 다행은 아니라고 생각하게끔 만들어 주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란 말입니다.”

차라리 본인이 조절하며 움직이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도록 말이죠, 김건준이 비죽이 웃으며 잇새로 속삭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놈이 거친 쐐기질을 하며 권기영을 짓치고 들어왔다.

“……――――――!!!”

권기영은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마치 유쾌한 음악이라도 들은 듯 김건준의 웃음이 짙어졌다.

내장이 구겨지는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질펀하게 젖어 든 성기는 수없이 질퍽거리며 드나들었고, 마찰 때문에 얼얼하게 욱신거리는 입구는 감각이 둔해지고 있었다. 배 속을 거세게 벌리며 세찬 속도로 파고들었다 빠져나가길 반복하는 압박감은 줄어들지 않아 권기영은 뭍에 오른 물고기처럼 허덕거렸다.

무릎이 이마에 닿을 듯 구부러진 채 흔들리는 허리가 욱신거리며 삐걱였다. 온몸이 숨 막히고 힘들다고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도 권기영의 성기는 숨길 수 없이 쾌감을 드러내며 선액을 흘려 내고 있었다. 놈의 성기가 사타구니 속으로 파고들어 두들겨 댈 때마다 귀두가 뻐끔거리며 선액을 왈칵 뿜어내는 걸,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억누르려 해도 간간이 튀어나오는 고함은 이미 교성과 분간하기 어려웠다.

눈가를 벌겋게 물들인 그 상태에서도 이를 악물고 주먹을 움켜쥔 권기영을 끊임없이 내려다보며 그 위에서 거침없이 허릿짓을 하던 김건준이 문득 웃었다.

“기영 씨랑 제 성기가 달라붙어서 한 덩이가 된 것 같군요.”

기영 씨도 보시겠습니까?, 하고 놈은 허리가 삐걱거릴 정도로 몸이 구부러져 신음을 흘리는 권기영에게는 아랑곳 않고 머리를 끌어당겨 사타구니 쪽으로 기울였다. 땀이 맺혀 흐려진 권기영의 시야에 두 사람이 겹쳐져 있는 아랫도리가 들어왔다.

그곳은 정말로 한 덩이로 들러붙어 있었다.

주름 하나 남김없이 팽팽하게 벌어져 금세라도 찢어질 것처럼 벌어진 구멍에, 무시무시하게 굵은 성기가 벅차게 담겨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구멍은 성기를 빈틈없이 조이며 감싸고 있어, 구멍과 성기는 언뜻 한 덩이로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았다.

권기영은 눈을 크게 떴다. 절로 입매가 일그러진다.

그러나 이내 그 둘은 별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권기영이 그 모습을 눈에 담은 순간, 김건준이 허리를 뒤로 뺀 탓이다. 구멍 속에 빠듯하게 들어가 그 굵기 외에는 거의 형태를 보이지 않던 성기가 단숨에 길게 끌려 나왔다. 귀두의 두꺼운 둘레가 구멍 입구에 걸쳐질 정도까지 흉흉하게 핏줄이 불거진 성기가 주욱 빠져나왔다.

배설과 닮은 감각에 권기영이 반사적으로 내벽을 움츠리자 그의 눈앞에서 구멍이 오므라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곳으로, 길게 빠져나왔던 성기가 거침없이 짓치고 들어갔다. 질퍽거리는 소리와 함께, 구멍 속에 얼마나 들어찼는지 모를 희뿌연 정액이 거품을 내며 틈새로 새어 넘쳤다.

“으, 아아, 하, …―!! 아, …―아아, ……――!!!”

권기영은 내장을 두들기는 폭력 같은 추삽질에 쉰 목소리로 신음을 터뜨렸다.

저렇게 거대하게 벌어져 괴물 같은 남근을 집어삼키고 있는 구멍이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이, 눈으로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불그스름하게 부어올라 성기의 모양대로 늘어났다 오므라들었다를 거듭하고 있는 저 구멍이.

그러나 저 성기가 저 구멍에 푹푹 틀어박힐 때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기 같은 자극이 번쩍거려 몸서리가 쳐졌고, 구멍에서 비어져 나온 정액이 엉덩이골을 따라 흐르면 그 축축한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것은――익숙한 감각이다. 권기영은 이 느낌을 이미 익히 알고 있었다. 믿어지지 않아도, 믿고 싶지 않아도, 이것이 현실이다. 그의 몸은 이 익숙한 감각에 매달려 그의 의지와는 다르게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허리를 꿈틀거리며 흔드는 권기영을 내려다보며 김건준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습니까? 그렇게 좋아요? 그래요, 그러면 더 좋게 해 드릴 테니 다리에 잠시 힘 좀 풀어 보십시오. 너무 허리를 꽉 조이고 있어서 마음껏 박아 주기가 힘들거든요.”

김건준이 나직이 웃으면서 권기영의 허벅지를 두드린 뒤에야 권기영은 자신이 어느 결에 다리로 그의 허리를 부둥켜안듯이 단단히 휘감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까지 의식하지 못했지만 이 또한 익숙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권기영은 찬물을 끼얹은 듯한 충격에 몸을 떨고 만다. 그런 권기영의 무릎을 붙잡은 김건준은 허벅지가 가슴에 닿도록 밀었다. 권기영의 엉덩이가 더 높이 들리며 김건준을 집어삼키고 있는 비부가 완연하게 드러났다.

김건준이 본격적인 추삽질을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그나마 다정했다고 할 수 있도록 격렬하고 과격한 허리 놀림이, 퍽, 퍽, 퍽, 권기영의 사타구니 속으로 성기를 두들겨 박았다.

“아! 아아! 아아아아아!! ――――!!!”

권기영은 경련하듯 몸을 퍼득거렸다. 몸속에 든 게 입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압박감에 숨이 막혔다. 전립선 위를 거침없이 파헤쳐 아랫도리 전체에 전류가 끝없이 불꽃을 튀기는 것 같았다.

권기영은 자신이 사정하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이미 아까부터 선액으로 흠뻑 젖어 있던 성기는 뻣뻣하게 고개를 꺼덕이더니 어느 순간 몇 번이나 왈칵, 왈칵, 크게 휘어지며 사정했다.

김건준이 소리 내어 웃었다. 몹시 즐거운 듯한 그 웃음을 듣고서야 권기영은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은 자신의 성기가 절정을 맞은 것을 깨달았고, 이조차 더 이상은 낯설지 않다는 데에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좋아요, 아주 잘했어요, 김건준이 권기영의 귓가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오늘 처음으로 권기영의 성기에 닿은 손길이, 마치 상을 주듯이 다정하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직 흥분의 여운이 남은 성기가 놈의 손안에서 다시 힘을 받는 걸 느끼며, 권기영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돌렸다.

오래지 않아 김건준은 권기영의 안에서 토정했고, 거의 동시에 권기영 역시 그의 손 안에 다시 한번 쏟아 내었다. 성기 안에 남아 있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털어 내려는 듯 권기영의 성기를 끈질기게 매만지던 김건준은, 그 역시 몇 번이나 간헐적으로 뿜어낸 사정이 완전히 멎은 후에야 긴 숨을 내쉬었다.

권기영은 자신의 위로 엎드려 부드럽게 입을 맞추는 김건준에게 벌어진 입술을 그대로 내맡긴 채 늘어졌다.

김건준의 성기는 여전히 권기영의 몸속에 담겨 있었다. 놈은 여러 차례나 사정해 발기가 완전히 가라앉은 뒤에도 권기영에게 삽입한 채로 있는 걸 즐겨, 침대에서 일어나거나 움직여야 할 일이 없는 한 그대로 권기영에게 성기를 넣어 두고 있곤 했다.

지금 역시, 아직껏 권기영의 몸속에 담겨 있는 성기는 조금 전보다 풀이 죽어 압박감도 훨씬 덜했지만, 약간이라도 몸을 움직이려 하면 금세 그 부피감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차라리 움직이지 않는 게 나아. 권기영은 나른하게 늘어지는 몸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기영 형은 이제 저와 몸을 섞을 때마다 발기하고 사정하지요. 이제는 형의 신음도 괴로워서가 아니라 쾌감을 견디지 못해서 내는 신음이고……, 그런데,”

권기영의 얼굴을 천천히 입술로 쓸던 김건준이 중얼거렸다.

“그때마다 꼭 괴롭게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거든요.”

그의 말은 둘 다 진실이다. 김건준에게 다리를 벌릴 때마다 권기영의 몸은 쾌감으로 날뛰며 욕정을 토해 낸다. 그리고 그때마다 권기영의 정신은 나락에 처박히는 것이다.

권기영은 잠들지 않았지만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김건준도 한동안 말없이 권기영의 얼굴을 입술로 가만히 쓸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것까지 버릴 필요는 없겠지요. 그것쯤은 갖고 있어도 괜찮습니다. ……그게 당신을 더 힘들게 만들겠지만.”

버리지 않는 게 아니라 버릴 수 없는 것임을, 김건준도 권기영도 알고 있다. 그러나 둘 다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버릴 수 없는 것, 다른 무엇을 포기하더라도 결코 저버릴 수 없는 것이 어떤 것인지, 둘 다 아는 탓이다.

권기영은 그 뒤로도 죽은 듯이 늘어진 채 움직이지 않았고, 얼마간 시간이 흘러도 김건준은 계속해서 그대로 권기영과 몸을 맞대고 엎드려 언제까지고 그의 얼굴을 입술로 문지를 따름이었다.

*

소리 없이 방문이 열리며 소년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미 그가 계단을 올라올 때부터 기척을 알아차리고 있었기 때문에 권기영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돌아보곤 다시 책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걸 승낙이라고 생각했는지 소년이 조용히 문을 닫고 들어왔다.

아래에서는 권기철이 친구들을 끌고 와 떠들어 대고 있었고, 그 기척들 속에서 놈의 목소리 몇 마디를 들었을 때부터 권기영은 놈이 올라올 줄 알았다.

‘오늘은 바빠서 너랑 못 놀아 줘.’

리포트 제출 기일이 내일로 다가와 있었다. 한나절은 꼬박 들여야 할 분량이다. 고작해야 수십 분도 안 되는 시간쯤이야 낼 수 있었지만 하던 일을 도중에 접어 두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권기영 쪽으로 다가오던 소년은 잠시 걸음을 늦추는 듯했지만 곧 조용히 말했다.

‘상관없습니다. ……제가 있으면 방해가 됩니까?’

‘그건 아닌데――하고 싶어서 온 것 아냐?’

권기영은 잠시 손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아니라는 말을 듣고 안심한 듯 창가의 의자에 앉던 소년은, 권기영의 시선이 그의 사타구니에 노골적으로 꽂히자 언뜻 겸연쩍은 낯을 하더니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생각으로 온 게 아닙니다.’

권기영은 소년의 부정에 뭐라고 대답하는 대신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놈의 사타구니를 시선으로 쓰다듬다가 얼굴을 보자, 그 시선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눈치로 권기영을 바라보고 있던 놈이 얼핏 낯을 붉혔다. 아마도 권기영의 얼굴에 떠오른 비웃음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야, 하고 싶은 건 사실입니다. ……그런 기대도 했고요.’

담담해 보이는 얼굴이 희미하게 붉어지는 것을 보며 권기영은 솔직하긴, 하고 픽 웃었다.

‘하지만 제가 바랐던 것과 다소 다르다고 해도 제가 제일 하고 싶은 건 여기에 있는 거니까, 괜찮습니다.’

이곳에 있기만 하면 된다. 권기영이 있는 곳에.

그 말을 듣고 권기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이 어린놈이 그럴싸하게 수작도 걸고, 제법이다.

‘너 제법 인기 많겠다?’

‘예? 아닙니다.’

진지하게 고개를 젓는 놈을 보며 권기영은 코웃음을 쳤다. 아니긴, 모르는 거겠지, 하고 생각하며 놈을 물끄러미 보던 권기영은 펜을 내려놓았다. 가끔 이 녀석은 곤란할 때가 있었다. 이렇게 별안간 변덕스럽게 마음이 동할 때가 있는 탓이다.

‘이리 와.’

‘예?’

‘빨고 싶어서 온 거잖아.’

인심 썼다는 듯 책까지 덮으며 소년 쪽으로 돌아앉는 권기영을, 소년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바라보았다. 해야 할 일이 있을 때에는 다른 데에 신경을 돌리지 않는 그를 아는 탓이다.

그러나 권기영이 바지의 퍼스너를 내리며 그 사이로 성기를 끄집어내어 흔들어 보인 순간, 일순 낯을 붉히는가 싶던 소년은 확 욕망이 솟아오른 듯 성큼 다가왔다. 권기영의 발 앞에 무릎 꿇고 앉은 소년은 권기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그의 성기를 욕심 사납게 입에 문다.

권기영은 기분 좋은 숨이 터져 나오는 걸 삼키며, 소년의 사타구니로 발을 뻗었다. 권기영의 발이 지그시 그 위를 누르자 움찔하고 반응하는 게 바지 너머로 느껴졌다. 권기영은 웃으며 바지 너머로 놈의 성기를 문지른다.

소년은 그예 거친 숨을 몰아쉬며 권기영의 성기를 빨고 있었다.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고 했던 놈이, 이제는 금방 아랫도리가 설 정도로 능숙해져 있었다. 권기영 역시 거칠어진 호흡을 소년의 머리 위로 내쉬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욕망으로 들뜬 소년의 눈이 권기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욕구로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권기영을 보면서 소년도 점점 더 들떠 오른다.

소년은 권기영과 페팅을 할 때엔 거의 늘 그의 얼굴을 보았다. 때로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똑바로 직시하는 그 시선을 받는 동안 권기영은 문득 알아차렸다. 소년은 권기영이 흥분한 얼굴을 보는 걸 좋아했다. 자신으로 인해 권기영이 쾌락을 느끼며 즐거워한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고, 또 그걸로 소년 또한 흥분하는 것이다.

권기영은 흥분과 쾌감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었다. 아니 오히려 보란 듯이 더욱 노골적으로 떠올리며 소년에게 가느스름하게 웃어준다. 그 순간 권기영의 발아래에서 소년의 성기가 울컥 부풀었다.

권기영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흥분하고 기뻐하면 덩달아 흥분하고 기뻐하는 소년의 그 얼굴이, 권기영도 마음에 들었다.

얼마 있지 않아 권기영은 소년의 입안에 토정했고, 소년은 타이밍을 예상하지 못한 듯 잠시 쿨룩거리긴 했지만 그것을 깔끔하게 입에 담았다. 소년 역시 사정한 듯 그의 성기가 움틀거리며 몇 번 맥박 치다가 조금 수그러드는 게 발아래에서 느껴졌다.

거칠어진 숨결이 잦아드는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 권기영은 이 종순한 소년에게 포상처럼 입을 맞춘다. 순순히 입을 벌리는 소년의 눈에 만족감이 드러났다. 그래, 그런 것이 마음에 드는 거다. 문득 권기영은 자신의 얼굴에 드러난 쾌락을 살피며 그것을 쾌락으로 삼는 소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끝. 이제 나는 리포트를 써야 하니까 나한테 말 걸지 마. 아니면 끝났으니 나가든가.’

권기영은 숨결이 잠잠하게 가라앉기 무섭게 소년에게서 떨어지며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앉았고, 소년은 순순히 ‘예.’ 하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일어났다. 볼일은 마쳤을 테니 그만 나가 볼 줄 알았는데 조금 전에 앉았던 그 의자에 도로 앉는다. 그리고 책장에서 책을 뽑아서 펼쳐 드는 소년을 한 번 돌아본 걸 마지막으로, 권기영은 정말로 그에게서 신경을 끄고 눈앞의 자료에 집중했다.

그러나 그렇게 자료를 보면서도 권기영은 소년의 시선이 책이 아닌 그의 뒷모습에 닿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시선은 권기영과 페팅을 하던 때와는 빛깔이 달랐지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눈길이다.

――제가 바랐던 것과 다소 다르다고 해도 제가 제일 하고 싶은 건 여기에 있는 거니까 괜찮습니다.

지금 당장 원하는 것과 다르다 해도.

겉으로 드러나는 형태는 다르더라도.

소년이 바라는 건 권기영과 머무르는 것이었다. 무엇을 하든, 어떤 형태로 있든,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그저 함께 있기만 하면 된다고, 그렇게 속삭이던 소년을 떠올린 권기영은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주 짧은 찰나 떠오른 그 생각은 달리 집중해야 할 일 앞에서 이내 흐려져 곧 씻은 듯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

눈을 떴을 때 권기영은 밤과 새벽의 경계에 있었다.

얇은 커튼 뒤에 있는 군청색 유리창을 보며 권기영은 세 시나 혹은 네 시, 그즈음 되었으리라고 짐작했다.

잠시 유리창을 보던 고개를 돌리자 그 반대편에 김건준이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다. 미동도 없이 워낙 죽은 듯 잠들어 있어, 이 고요한 공간에서조차 권기영이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여야 겨우 그의 낮고 고른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몇 차례나 거듭된 성교 끝에 완전히 늘어져 버린 권기영을 그가 침대로 옮겼던 게 기억났다. 그러나 그가 권기영의 옆에 누운 뒤부터는 기억에 없었다.

“…….”

권기영은 가만히 일어나 앉았다. 너른 침대 반대편에 한 뼘쯤 사이를 두고 시체처럼 누워 있는 김건준을 내려다본다. 어둠에 익은 눈은 깊은 새벽의 짙푸른 빛만으로도 그의 윤곽이며 턱에 까끌하게 돋아난 수염까지도 알아볼 수 있었다.

김건준은 무방비하게 누워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 그에게 칼이라도 내리꽂는다면 그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 것 같았다.

권기영은 문득 이런 모습을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아 그게 언제쯤이었더라,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때 그는 나무 그늘 아래의 잔디에 누워 있었다. 바로 옆에 라운지체어가 있는데도 굳이 풀밭 위에 누워 있는 그를, 권기영은 뜰로 나가다 말고 멈춰 서 바라보았었다.

그에게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볕 아래에는 개가 그와 나란히 엎드려 자고 있었는데, 권기영이 천천히 다가가자 그 기척에 잠깐 눈을 뜨는가 싶던 개는 졸린 눈꺼풀 아래로 권기영을 확인하곤 도로 눈을 감았다. 다른 때라면 발딱 일어나 앉아 반듯하게 권기영을 보았을 텐데 어지간히도 볕 아래서 졸렸나 보다.

그 옆에서 두 팔을 내던져 놓듯이 누워 있던 김건준도 잠시 눈을 뜬 것 같았지만, 권기영인 걸 확인하곤 다시 눈을 감는다. 저 사람은 괜찮아, 그런 것처럼 입매가 어렴풋이 풀어진다.

그게 왠지 우스워 권기영은 그들의 꼴을 잠시 지켜보다가 그 옆의 라운지체어에 앉아 고요한 오후를 맛보았다. 그러나 길지는 않았다. 얼마 있지 않아 동생이 나오자 개는 조금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기고 김건준도 이내 일어나 앉았으니까.

그때는 그게 몹시 자연스러운 일 같았다. 놈과 시간을 나누는 잠깐 잠깐이, 한 번도 불편하거나 어색했던 적이 없었다.

이제는 아주 오래되어 빛바랜 일이다.

“…….”

권기영은 그때보다 얼굴선이 날카로워지고 더 이상 어린 티를 찾아볼 수 없게 된 김건준을 내려다보았다.

닮은꼴이다. 그 소년과 똑같은 사람이기라도 한 것처럼 닮았다. 그때와는 전혀 다른 인간임에도.

이미 그 소년은 사라졌고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이제는 권기영의 기억 속에서조차 예전과 같은 느낌으로 돌아오지는 않게 되었다. 더 이상 그 소년은 없었고, 남은 것은 전혀 다른 이 남자뿐이었다. 그런데도 남자의 얼굴에는 그 소년의 면영이 희미하게 남아 있어, 더 이상은 그때도 그 소년도 아닌데 권기영은 왠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권기영은 김건준의 얼굴에서 목으로 시선을 옮겨갔다. 아무것도 없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굵고 건장한 목.

저 목을 졸라 버린다면. 뭐든 날카로운 걸로 저 목을 꿰뚫어 버리기만 한다면.

권기영은 그 목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주먹을 그러쥐었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무방비한 남자는 그대로 숨이 끊길 것 같았고, 그러면 권기영은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전처럼――이제는 현실이 되어 버린 지금과는 다르게.

순간 무섭게 충동이 일었다. 가슴속에서 일렁이던 숱한 감정들이 끈적한 토사물처럼 뒤엉켜 심장을 때리며 술렁였다. 죽일까. 죽여 버릴까. 지금이라면.

권기영은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그를 내려다보며 부들, 순간적으로 떨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것은 어제와 같다. 그저께와도. 놈과 몸을 섞고 의식을 잃었다 깨어난 모든 날이 이날과 같았다. 늘 김건준은 권기영의 옆에서 무방비하게 잠들어 있었고, 그를 바라보며 권기영은 진심으로 밀어닥치는 충동에 몸서리쳤다.

――삶을 송두리째 사로잡도록 강렬한 감정.

놈은 그렇게 말했었다.

과거에 이 남자 같은 사람이 있었던가.

아니, 없었다. 실제로 숨이 막혀 눈앞이 새카매질 정도로 강렬한 감정을 그에게서 끌어내는 사람은 이 남자가 유일했다. 앞으로도 그럴 테지. 겉보기에는 변화가 없는 삶을 살아가면서, 권기영은 거의 한순간도 쉬지 않고 이 남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는 부차적인 문제라고, 그렇게 말했던 이 남자의 말이 옳다면, 그래, 그렇다면 내 삶의 구심점은 이 남자가 맞다.

권기영은 눈앞에서 무방비하게 눈을 감고 있는 김건준을 뚫어질 듯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아주 천천히, 천천히 주먹에서 힘을 풀었다. 아니다, 지금은. 적어도 오늘은 아니다.

권기영은 소리 없는 숨을 내쉬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소용돌이치며 심장을 두들기던 충동이 아쉽게 가라앉아 간다. 내일은 어떨까. 모레는. 언제까지 이 충동이 밀어닥치고――그런 끝에 결국은 어떻게 되는 걸까.

어쩌면 어느 날 충동에 눌려 놈을 죽여 버리려 할지도 몰랐다. 혹은 죽을 때까지 이렇듯 충동으로 떨리는 몸을 억누를지도.

어찌 되었든 오늘은 아니었고, 권기영은 가만히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느린 숨을 내쉬는 사이에 의식이 조금씩 가라앉아갈 때쯤이다. 권기영의 얼굴 위를 가만히 더듬는 조용한 시선이 다가왔고, 그 시선은 오래도록 권기영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것 역시 어제도, 오늘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언제 어느 날까지.

권기영은 눈을 뜨지 않았고 시선도 권기영을 깨우지 않았다.

오늘 하루가 끝났다.

그것은 줄곧 이어지는 하루이기도 했다.

[The end of the 2nd act. The end of the pl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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