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자정이 지나 개표의 집계가 끝남과 동시에 선거도 끝이 났다.
자정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권기영의 부친은 늦저녁 무렵에 이미 당선이 확정되었으나, 사무실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끝까지 집계를 지켜보고 나왔기 때문에 집에 돌아왔을 때에는 자정이 훨씬 넘어 있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바쁘던 몇 달의 나날은 일단락되었다.
부가적인 사무 처리들 때문에 이달 말까지는 더 바쁠 테지만, 그래도 선거 전보다는 훨씬 여유롭게 일할 수 있을 터였다.
“아버지, 축하드립니다. 그동안 워낙 바쁜 일정을 보내셔서 많이 피로하실 텐데, 오늘은 푹 주무세요.”
권기영이 아버지에게 겨우 축하 인사를 건넨 것은 집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면서였다. 그때까지 계속 여기저기서 걸려 오는 연락에 응대하느라 그 한마디를 할 틈도 없었다.
“그래, 너도 그간 고생 많았다. 푹 쉬려무나. 그런데 내일 아침 일정은 어떻게 되지?”
“여덟 시까지는 사무실로 나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으니까, 여섯 시까지는 편히 주무실 수 있겠네요.”
아버지는 한 시가 다 되어 가는 시계를 보며 허허 헛웃음을 웃었지만 그래도 기분은 썩 좋아 보였다. 권기영 역시 예상한 결과였다고는 해도 과업을 하나 마치자 미루었던 과제를 해치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면 이제 미루어 뒀던 일들을 하나씩 정리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아버지와 나란히 계단을 올라가던 권기영은, 오늘 선물로 밀려든 듯 현관 앞을 풍성하게 장식하고 있는 갖가지 호화로운 축하 화분들을 무심하게 둘러보다가 한 군데서 시선을 멈추었다.
사람 허리까지 올 법한 키에 멋들어진 모양새로 공들여 키운 분재가 눈에 띄었다. 아버지가 허어, 이것 참 훌륭하구나, 하고 절로 감탄하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권기영은 분재 받침대에 묶여 있는 비단 끈을 바라보았다. 아주 짤막한 축하 문구 끝에 김건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
내일 김 사장에게 귀한 것을 잘 받았다고 연락해야겠다면서 흐뭇하게 집 안으로 들어가는 아버지의 뒤를 따르며, 권기영은 어두운 눈으로 그 분재를 흘끗 바라보곤 시선을 거두었다.
미루어 뒀던 일들을 정리해야 할 때인 것은 자신만이 아니었다.
* * *
김건준이 사무실로 찾아온 것은 일주일가량 지나서였다. 당선 직후에 짧은 광풍처럼 바빴던 일정들이 지나고 이제 겨우 숨을 돌릴 즈음이었다.
이미 아버지와 통화는 했던 걸로 알고 있는 그 남자의 이름을 일정표에서 봤을 때 권기영은 얼핏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 이후 내도록 묵직하게 일렁이던 기분은 놈이 온다고 했던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더 가파르게 날이 섰다. 스스로도 그 사실을 인식하고 있어, 놈을 그렇게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불쾌해졌다.
그러나, 그래서 권기영은 놈이 찾아왔을 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입니다.”라고 인사를 건넬 수 있음에 속으로 안도했다. 표정에마저 그 초조함이 드러난다면 그게 무슨 꼴사나운 일일까, 그것마저 줄곧 신경을 갉작였던 것이다.
정신없이 바빴던 것은 권기영의 사무실만이 아니고 거의 아슬아슬할 정도로 기울어지는 듯 보이던 김건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간 일이 얽힌 두세 번의 통화를 제외하고는, 그날 새벽 이래 마주친 적이 없었다.
“더 일찍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이번에 좋은 결과 얻으신 것, 정말로 축하드립니다. 사실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걱정도 안 했었지만요.”
“허허, 고맙네. 그래, 그때 보내 준 분재는 잘 받았네. 그게 보니까 돈만 있다고 살 수 있을 만한 게 아니던데, 아주 귀한 걸 그렇게 다 보내고, 이거 참. 자네도 일 잘돼 가고 있다면서.”
권기영은 바깥쪽 자리에 앉아, 마주 보고 앉은 아버지와 김건준의 이야기를 말없이 듣기만 했다. 가끔 그들이 화제를 돌릴 때마다 한두 마디씩 말을 거들긴 했지만 거의 입을 다물고 그를 살폈다.
김건준은 초췌해졌던 낯빛이 그새 예전대로 돌아와 있었다. 예전보다는 아주 약간쯤 더 야윈 듯도 했지만 그 여유롭고 선선한 분위기는 예전 그대로, 아니 어쩌면 그때보다 더 찌를 구석을 찾아보기 힘들어진 느낌이다.
“의원님께서 여러모로 돌봐 주신 덕분입니다. 저야말로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니야, 무슨. 김 사장 일이 잘된 덕을 나도 많이 봤지.”
“기영 씨한테도 수고를 많이 끼쳤지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권기영은 자로 잰 듯한 태도로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김건준에게 마찬가지로 목례를 하며 별말씀을요, 하고 대꾸했다.
김건준의 일은 순조롭게 제 궤도에 오르고 있었다. 거기에는 그가 달리 손대려 했던 새 일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가 인사한 대로 권기영의 부친이 뒤를 봐준 것도 제법 도움이 되었을 터였다. 놈이 해내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훨씬 더 편해지긴 했을 거다. 자칫하면 이쪽까지 위험해질 여지가 있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들어주지 않을 청까지 무리해서 들어줬으니까.
그 덕분에 실질적으로 이곳저곳에 연락하고 일을 처리하는 권기영의 일이 늘긴 했었다.
권기영은 그들을 지켜보던 시선을 떨어뜨려 말없이 차로 입술을 축였다. 둘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이 관계가 권기영은 내키지 않았다. 놈과 얽히는 것은 무엇이든 거리껴졌다. 단순히 업무 때문에 전화하는 것만으로도 신경이 파랗게 곤두서고 있었다.
――그만해. 놈이 뭘 어떻게 할 수 있다고. 맘대로 해 보라고 해.
――그렇게 대차게 말해 놓고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거냐? 겁이라도 먹은 거야?
웃기지 마. 나를 뭐로 보고.
권기영은 턱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사모님께도 축하드린다고 인사드려야 하는데, 요즘 잘 지내십니까?”
“아――뭐, 잘 지내고 있네. 집사람도 이런저런 모임 때문에 바빠. 가끔은 나보다 더 바쁜 것 같아.”
그렇군요, 하고 김건준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당선 직후라 어머니는 요즘 여기저기 모임에 불려 다니고 있긴 하지만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딸 결혼이 얼마 남지 않은 게 아니냐고 물어 오는 이들에게 할 말이 궁하다고, 얼마 전 울상을 하며 아버지에게 말하는 걸 언뜻 들은 적이 있었다.
오히려 누이는 속마음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차라리 이편이 낫다고, 이대로 혼담을 진행시켜서 계속 눈치라도 보듯이 사는 건 싫다고 딱 잘라 마음을 접은 눈치였는데 어머니가 더 낙담했고, 바로 얼마 전에도 그래서 아버지의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런 것 따위도 결국은 시간이 흐르면서 흐려질 문제다.
“그러면 바쁘실 텐데 그만 가 보겠습니다. 좀 한가해지실 즈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의례적인 인사를 마친 김건준이 시계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놈이 얼마 전 손댄 일에 대한 성과를 들은 아버지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덩달아 일어나며 “그래, 그럼 조심해서 가 보게. 내가 도와줄 만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고. 성 회장님께도 안부 전해 주게나.”라고 말을 건네며 권기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배웅을 해 주라는 거다.
아주 대단한 귀빈 나셨군, 권기영은 속으로 코웃음 치곤, 걸음을 돌리는 김건준의 뒤를 따랐다.
사무실 사람들에게도 짤막짤막하게 인사를 하는 김건준을 따라 복도로 나섰을 때 엘리베이터는 1층에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여기까지 올라올 약간의 시간조차 놈과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권기영은 얼른 버튼을 누르고 숫자판을 노려보았다.
“그러고 보니 기철이가 주말쯤 퇴원한다고 했던가요?”
둘만 남은 고요한 공간에서 놈이 불쑥 입을 열었다. 권기영은 움칫, 잠시 침묵하다 아무렇지 않게 “예.” 하고 대꾸했다.
“퇴원하기 전에 한 번쯤 더 문병을 가려고 했는데 워낙 일이 바쁘다 보니 그것도 여의치 않았군요. 미안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예, 그렇게 말해 두겠습니다.”
놈이 그 말에 기뻐할지는 모르겠지만, 권기영은 냉소를 머금었다.
권기철이 병원에 있는 동안 권기영은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선거 막바지로 한창 바쁠 때이기도 했지만 찾아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러던 가운데 김건준이 그를 찾아갔었다는 말을 나중에 전해 들었다.
마침 사무실 사람이 찾아갔을 때였다고 한다. 부루퉁한 얼굴로 온갖 짜증을 다 부리고 있던 권기철이, 병실 문이 열리며 한 문병객이 들어선 순간 입을 다물었다고 했다. 예전에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던 사무실 사람은 커다란 과일 바구니를 들고 들어선 그 문병객이 김건준이라는 걸 금세 알아보았고, 그는 여느 때와 같이 사람 좋게 웃으며 그 직원에게도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내가 요즘 바빠서 그랬어. 이해해 줄 거지?’
김건준이 웃으며 말을 걸었지만 권기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를 뚫어져라 올려다보기만 하며 입조차 열지 않는 권기철에게, 김건준은 별로 마음 상하지도 않은 눈치로 선선히 말을 이었다.
‘많이 다쳤다며. 조심하지 그랬어. 그래도 순조롭게 잘 나아 가고 있다니 다행이다. 하긴 예전부터 회복력만큼은 워낙 좋았으니까. 기철이 너는 숨만 붙어 있으면 금방 다 나을 것 같거든, 몇 번을 다쳐도. 안심이야.’
‘……, …―.’
‘벌써 많이 나아 간다며. 그럼 다시 예전처럼 다닐 수 있겠네. 밤중에 바이크를 달리든, 숲속에 들어가든. 많이 따분할 텐데 어서 나으면 좋겠어.’
그때쯤 사무실 직원은 한마디 말도 않고 뚫어져라 김건준을 바라보기만 하는 권기철을 보고 살짝 의아해졌다고 한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하얗게 빛바랜 얼굴에 언뜻 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제법 친하다고 들었는데 그렇지 않았던 건가, 하지만 김건준은 친한 사람을 대하는 허물없는 얼굴로 웃고 있지 않은가, 아니면 몸이 갑자기 안 좋아진 걸까, 사무실 직원이 고개를 기웃하는데 김건준이 마치 그 의문에 대답이라도 해 주는 것처럼 ‘아직은 몸이 많이 안 좋은가 보다. 식은땀이 다 나네.’라고 중얼거리며 권기철의 이마를 가만히 손바닥으로 쓸어 주었다.
‘기철이가 몸이 좀 안 좋은가 본데, 미안하지만 간호사를 좀 불러 주시겠습니까?’
직원은 김건준이 던지는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예, 하고 대답하며 병실에서 나갔다. 워낙 갑작스러워서 너스콜은 떠올리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간호사를 데리고 돌아왔을 때 김건준은 막 병실에서 나서는 참이었고, 눈웃음과 함께 목례를 남기고 떠나간 그의 뒤로 병실에 홀로 남은 권기철은 얼어붙은 얼굴로 허공만 노려보고 있었다고, 직원은 조금 이상하다는 투로 권기영에게 말을 전했다.
과연 놈이 권기철에게 무슨 말을 했을지.
어차피 짐작이 가기에 그리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이번까지는 없었던 일로 덮어 두겠다고 했습니다. 기철이한테.”
그때, 마치 권기영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김건준이 말했다. 권기영이 돌아보자 그는 유유히 웃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친구니까요. 앞으로도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 보자고, 전에 병문안을 갔을 때 말했었어요. 기철이도 그러자고 고개를 끄덕였고. 풀이 많이 죽은 것 같던데 퇴원하고 나면 같이 술이라도 한잔해야겠습니다. 기영 씨도 함께하시겠습니까?”
“글쎄요. 한동안은 그렇게까지는 여유가 안 될 것 같군요.”
“하하, 하긴 기철이랑 술 마시는 자리는 기영 씨에게 별로 맞지 않을 것 같긴 하군요. 그 녀석 기분을 풀어 주려면 술도 술이지만 여자가 있어야 해서요.”
권기영은 눈썹을 꿈틀하며 김건준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그때 엘리베이터가 다다랐고, 김건준은 “그럼 가 보겠습니다.”라며 권기영을 돌아보았다.
“저도 이제야 좀 한가해진 참입니다. 그간 일 때문에 겨를이 없어서 개인적인 일들은 다 제쳐 두고 있었거든요. 기영 씨와 의원님 덕분에 지난주에 중요한 일들을 다 마무리 지었으니, 이제는 미뤄 뒀던 일들도 처리할 수 있겠습니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김건준이 복도에 선 권기영을 마주 보며 말했다. 권기영은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표정이 굳는 것을 느꼈다. 그 표정을 지그시 바라본 놈이 빙긋이 웃는다.
“그럼 조만간 다시 뵙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그러나 그 뒤에도 권기영은 한동안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어야 했다.
* * *
외부 일을 마치고 평소보다 일찌감치 집으로 들어오던 권기영의 귀에 경박하게 웃고 있는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권기영은 뜰에서 키들거리며 통화를 하고 있는 그 목소리를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권기철이 오늘 퇴원한다고 했었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 어머니가 그런 말을 했었는데 귀담아듣지 않아 잊고 있었다.
권기영이 뜰로 올라섰을 때 권기철은 이쪽을 향해 등을 돌린 채 전화에 대고 키들키들 떠들어 대고 있었다.
“어, 씨이발, 지겨워 죽는 줄 알았다. 이 새끼 형님이 입원한 동안 병원에도 한 번 안 왔다 이거지, 씨발놈아, 너는 대가리 박을 각오하고 나와라, 어? ……새끼야, 그건 왜 물어. 너랑 상관없는 일이면 닥쳐. ……그래? 얼마나 이뻐? 너 또 나갔더니 걸레 같은 면상들만 나와 있으면 죽을 줄 알어. ……아, 몰라. 씨발아, 닥쳐.”
권기영은 녀석의 구부정한 등을 차갑게 일별하곤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이 닫혀 저 목소리가 차단되자 귀가 한결 편해졌다.
변할 줄 모르는 병신. 머리에 똥만 들어찬 얼간이. 평생 저렇게 살 멍청이. 생전 도움이라곤 안 되는.
권기영은 이제 들어오냐는 어머니에게 짧게 인사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환기를 시킨다고 활짝 열어 둔 테라스로 녀석이 낄낄거리는 목소리가 여과 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경멸스럽다 못해 혐오감까지 들었다.
어쩌면 저렇게 한결같을 수 있을까, 권기영은 감탄마저 하며 옷을 벗어 던지고 욕실로 들어갔다. 불쾌한 기분이 먼지처럼 자욱하게 덮이는 것 같았다.
권기철은 바로 다음 주말 비행기로 미국에 돌아가기로 했다. 누이의 결혼이 물 건너간 이상 더 머물 이유도 없었고, 또 다행히 선거에 별 지장은 없었지만 그 중요한 시기에 대책 없이 싸움에나 휘말려―다른 가족들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병원에 틀어박혀 있었던 저 머저리에게 아버지가 냉큼 돌아가라고 역정을 내었다. 군말 없이 그날 당장 본인이 직접 비행기를 예약한 걸 보면 녀석도 어서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긴 그래, 뜨고 싶을 만도 하지. ……제 할 일 하나 못 하고 도망이나 쳐 버리면 되는 마음 편한 놈.
차가운 물줄기를 뒤집어쓰면서 권기영은 끊임없이 권기철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녀석을 눈앞에서 보자 눌러 두었던 울화가 치밀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시키는 일도 제대로 못 하고.
그 무식한 힘 하나밖에는 쓸모도 없는 주제에 그조차 써먹지도 못하고.
도리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기나 했다. 그리고 놈은 혼자서 달아나 버리려 하고 있었다. 늘 그랬듯이.
이건 모두 다 저놈이 제대로 해내지 못한 탓이었다. 그날 밤 저놈만 시킨 대로 제대로 했더라면 지금 권기영이 이렇게 바작바작 이글거리는 심경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지낼 이유도 없었다.
모든 것이 다, 그래, 이 모든 게 다 저 녀석 때문이다. 머리에 든 거라곤 없이 한 치 앞도 볼 줄 모르고 바로 눈앞에 들이댄 유혹은 그게 독이든 뭐든 집어삼키고 보는 병신.
권기영이 샤워를 마치고 나갔을 때에도 여전히 권기철은 뜰에서 떠들어 대고 있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천박한 말들이나 줄줄이 늘어놓는 저 목소리가 구역질 나도록 귀에 거슬렸다.
“시끄러우니까 닥치고 조용히 해, 권기철.”
권기영이 테라스를 향해 사납게 외쳤다. 대번에 그 아래가 조용해졌다. 잠시 뒤 허겁지겁, 작은 목소리로 야, 나중에 전화하자, 속삭이는가 싶더니 조금 전과는 딴판으로 어눌하게 “어, 형, 언제 왔어?” 하고 묻는다. 권기영은 대꾸하지 않고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컴퓨터를 켰다. 혐오감에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다.
그 뒤로 며칠, 놈에게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이제 한가해졌다고 했던 그 말은 경고가 아니었던가. 어쩌려는 속셈이지.
그날 올라온 국정 자료를 기계적으로 체크하며 머릿속으로는 초조하게 생각을 굴리던 권기영의 귀에 조심스럽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얼마 뒤였다.
“형, 저기, 나 잠깐 들어가도 돼?”
권기영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대꾸 없이 무시했다. 한 번 더 노크하며 “형, 나 들어갈게……?” 하고 주눅 들어 중얼거린 권기철이 멋대로 문을 살짝 열고 안을 훔쳐보았다. 짜증이 치민 권기영은 돌아보지도 않고 짧게 말했다.
“뭐야.”
“형. ……미안해. ……저기, 괜찮아. 난 괜찮으니까 걱정 안 해 줘도 돼.”
권기영은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이 병신 같은 소리는 또 뭐란 말인가. 차갑게 던지는 권기영의 시선을 받고 권기철은 입매를 꿈틀하더니 등 뒤로 문을 닫으며 우물우물 중얼거렸다.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계속 생각해 봤는데, 그놈이 뭘 어떻게 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놈이 나한테 정말로 보복을 하려고 했더라면 이 정도로 그치지도 않았을 테고, 또 이제는 누나랑도 파혼했잖아. 우리 집안에 뭘 어쩌려는 속셈 같았으면 그렇게 파혼도 안 했을 거고……, 게다가 난 다음 주말이면 다시 돌아가니까, 그 뒤에는 그놈이 날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거야.”
벌써 십 년도 더 된 일이고, 그놈이 무슨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 와서 어떻게 할 수도 없을 테고, 권기철이 웅얼웅얼 혼잣말처럼 지껄이는 소리를 듣다가 권기영은 헛웃음을 웃었다.
무슨 헛소리인가 했더니. 놈에게 겁을 집어먹긴 했는데 저 허세로 가득한 자존심에 움츠러들었다고 표를 내진 못하겠고, 더는 놈에게 어떻게 해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을 빙빙 돌려서 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권기영이 그를 경멸할 건 두려웠는지 제 나름대로 생각해 낸 이유를 열심히 덧붙여 대면서, ‘걱정해 줘서 고맙지만 괜찮을 것 같다’고 늠름한 척을 하고 있었다. 그 빤한 속셈을, 놈은 권기영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까도 퇴원 축하한다고 전화를 했더라고. 술이라도 한잔하자고, 내가 입원해 있는 동안 계속 마음이 안 좋았다고……, 나랑 화해하고 싶은 눈치더라고.”
권기철은 권기영의 표정이 싸늘해지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앞으로 아버지한테도 계속 도움을 얻어야 할 거라며. 아무래도 그놈이, 그래서 그런가 봐. 아버지한테 잘 보이려면 나랑도 친해 둬야겠다고 생각했나 보지.”
그런데 그놈이 뭘 어쩌겠어, 하고 말하는 권기철의 얼굴은 조금 의기양양해 보였다. 알게 모르게 김건준에게 열등감을 느꼈을 녀석의 비뚤어진 오만이 은연중에 드러난다.
권기영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어이없는 눈으로 녀석을 보았다. 녀석은 김건준이 전화한 것도 자신의 눈치를 봐서 그런 거라고, 환심을 사려는 거라고 득의양양하게 지껄이고 있었다. 그 속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느끼고 있을 텐데도 자신의 열등감 때문에 그 느낌을 기어코 부정해 버린다.
싸늘하게 녀석을 바라보는 권기영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거만한 얼굴로 비뚜름한 웃음을 띠는 듯하던 권기철은 이내 뜨끔한 눈으로 권기영을 보며 순하게 덧붙인다.
“그러니까, 형. ……고마워. 나 걱정해 줘서. 나 때문에 형이 얼마나 신경 썼는지 알아. ……미안해, 형.”
권기영은 사나운 말 한마디를 하려다가 도중에 그만두고 말았다. 무슨 말을 한들 저 머리통에 들어가 박힐 리가 없다고 다시 한번 생각하고 만 것이다. 권기영이 김건준을 없애려고 한 것이 오로지 권기철에게 해코지라도 할까 걱정해서 그랬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머저리라니.
이놈은 옛날부터 그런 놈이었다.
제멋대로에 오만할 만큼 자기중심적인 멍청이에 모든 걸 다 자기 위주로 판단하는 철부지다. 그러면서 동시에 녀석은 철저하게 권기영을 숭배했다. 권기영이 하는 모든 일에는 명백한 이유가 있었고 그 이유들은 모두 옳은 것이었다. 이번 일 역시 놈의 머릿속에서는 그렇게 합리화되었을 것이다. 왜 권기영이 굳이 김건준을 없애려 했는지. 권기철이 저지른 짓에 대한 과거의 망령이 되살아나 동생을 해치기라도 할까, 극단의 조치를 생각한 거라고.
권기영은 언제나 옳았다. 언제나 누구보다 위에 있었고,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그것은 범접할 수 없도록 확고한 진실로 권기철의 머릿속에 새겨져 있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그랬던 동생을 가느스름하게 바라보며 권기영은 코웃음 쳤다. 그래. 그런 놈이었지. 그런 놈이었어.
권기영은 누구보다도 권기철을 경멸했다. 무능력하고, 무책임하고, 천박하며, 비겁하고, 주제를 모르고 허세나 부려 대는. 권기영이 가장 혐오하는 인간형이다. 그럼에도 그를 감싸 안았던 이유는 동생이라서가 아니다. 녀석은 평생 권기영의 아래에서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아갈, 완전한 숭배자였다.
“할 말 그것뿐이면 그만하고 나가.”
권기영은 싸늘하게 대꾸했지만 그의 목소리가 한풀 누그러진 걸 금세 알아챈 권기철은 응, 형, 고마워, 미안해, 한 번 더 지껄여 대곤 권기영의 눈치를 보며 얼른 방에서 나갔다.
권기영은 컴을 노려보다가 짜증스럽게 혀를 차며 창을 닫아 버렸다.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권기철이 주절거리고 나간 건 김칫국이나 퍼마신 멍청이의 헛소리다. 어차피 권기철을 이용해 놈을 죽일 기회는 다시는 없었다. 놈은 보다 교활하고 주의 깊어질 것이고, 보다 철저하게 권기영을 옭아맬 것이었다.
“…―.”
권기영은 사리문 잇새로 빌어먹을, 욕설을 내뱉었다.
억지로 눌러 두었던 불안이 다시 스멀거리며 되살아났다. 그날부터 끊임없이 머릿속에 들러붙어 이명처럼 갉작갉작하는 불길한 불쾌감.
어쩔 속셈이지. 어쩔 속셈일까.
주먹 쥔 손이 떨렸다. 그날 놈에게 그렇게 당당히 소리를 질렀음에도 권기영의 심장은 부들거리며 떨리고 있었다.
정신 차려. 마음 다잡아.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잊지 말아야 한다. 놈이 무슨 짓을 하든 하나만큼은 반드시 지켜야 했다. 결코 놈에게 뼛속까지 고개를 숙여서는 안 되었다.
오로지 그것만이 권기영을 버티게 해 줄 터였으니까.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 놈에게서 연락이 왔다.
* * *
――저라면 제 개가 다른 데 정신을 판다면 목을 꺾어서라도 제 쪽만 쳐다보고 있게 만들어 놓을 테니까요.
그때 불현듯 아, 이것이 답이구나, 그런 생각을 떠올렸었다.
‘…….’
그 말을 언제 들었었지.
권기영은 가느스름하게 눈을 뜨며 생각했다. 누가 그 말을 했었더라, 생각나지 않았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조그맣게 심장이 진동했던 것만 떠오른다.
권기영은 이내 흐려지는 기억을 뒤쫓길 포기하고 눈동자를 옆으로 돌렸다. 바로 옆에 나란히 놓인 라운지체어에 앉아 있는 소년의 등이 보였다. 소년이라기엔 이미 어른보다도 훤칠하게 자란, 널찍한 등이다. 나무그늘에 앉아 있는데도 후덥지근한 날씨는 이길 수 없는지 굵은 목덜미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잔바람에 흔들거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햇빛이 일렁일렁 비쳐들고 있었다. 짤막한 선잠에서 깬 권기영은 문득 저 땀방울은 어떤 맛일까를 생각했다.
어떤 맛인지는 이미 알고 있다. 소년은 동생과 어울린다는 핑계로 집에 찾아올 때마다 권기영의 근처를 어른거렸고 그럴 때면 으레 권기영과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관계를 주고받곤 했다.
갓 욕망을 알게 된 소년은 나날이 더 욕심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것은 때로 말없는 안달에 가깝기까지 해, 권기영은 그 시선이 마음에 들었다.
막 방금도 소년과 더불어 욕망을 풀고 잠시 눈을 붙였던 참이지만, 아마 지금도 저 땀방울을 핥으면 소년은 깜짝 놀란 얼굴로 돌아보곤 쑥스러운 듯 잠깐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그 시선으로 권기영을 볼 터였다.
숨김없이 드러나는 직선적인 시선――그 결벽함이 좋았다.
어떻게 할까, 그러나 권기영의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시선만 돌려 소년을 바라보았을 뿐인데도 등을 돌리고 있던 소년은 권기영이 일어난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대로 등을 돌린 채 불쑥 입을 연다.
‘하늘이가 형만 보고 있어요.’
이제 보니 녀석의 시선 끝에는 개가 있었나 보다. 권기영은 발치에 앉아 있는 개를 그제야 흘끔 보았다.
‘주인이니까.’
이상할 것 없잖아, 대수롭잖게 대꾸한 권기영은 묵묵히 개를 바라보는 소년을 보고 ‘왜, 이상해?’ 하고 물었다.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잠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렇게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고 보고 있는 걸 충성이라고 해야 할지 애정이라고 해야 할지.’
‘어느 게 더 좋을 것 같아, 너는.’
‘……. 글쎄요. 형은요?’
권기영은 잎새로 비쳐 들어 얼굴 위에서 흔들리는 햇살을 한 번 훔쳐 내었다. 그걸로 잠기운이 말끔하게 가신다.
‘뭐든. 보다 절대적으로 내가 바라는 대로 따를 걸로.’
담담하게 대꾸하며 몸을 일으켜 테이블에 놓아두었던 커피를 집어 들자 그제야 소년의 시선이 권기영을 향했다.
‘충성 쪽이 변심도는 더 낮겠군.’
‘예?’
‘애정은 언제든지 얼마든지 변하기 쉽잖아. 때로는 정반대로 변질되기도 하고.’
그야 개라면 그럴 일은 별로 없겠지만, 권기영은 끈질기게 시선을 주며 앉아 있는 개에게 무심한 시선을 주며 커피를 마셨다. 얼음이 녹아 컵이 젖어 있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변한다…….’
소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는 변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권기영은 흘끔 소년에게 시선을 주었다.
‘애정이든 충성이든, 그걸로 안 된다면 다른 무엇이든, 확고하게 변함없는 게 좋습니다.’
‘변함없는 거라……. 일단 애정은 아니겠군. 충성도 아닐 성싶고. 그럼 뭐가 있을까…….’
실없는 말장난이라도 이놈과 하고 있으면 그럭저럭 재미나긴 했다. 아무래도 좋을 일인데도 사뭇 진지한 얼굴로 생각에 잠기는 게 재미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소년은 한참을 묵묵히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권기영이 햇빛에 반짝이는 잔디를 바라보며 그 대화를 잊어갈 즈음, 그가 불쑥 중얼거렸다.
‘절대로 버리지 못할 것.’
권기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에게 흘끗 시선을 주었다.
‘상대가 절대로 포기하지 못할 것. 그것을 쥐면…….’
‘약점?’
권기영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늘 반듯한 이 소년과는 꽤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한다 싶더니, 소년은 이내 머쓱한 얼굴을 했다.
‘약점……, 그런가요. ……그렇군요.’
그 말이 그 말인데도 그렇게 표현하니 영 걸렸는지 소년은 멋쩍게 목덜미를 긁적였다. 권기영은 가볍게 웃고 말았다.
‘그러려면 상대에 대해 어지간히 잘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 극한 상황까지 몰렸을 때에도 결코 포기하지 못할 게 그리 흔하지는 않으니까.’
해가 노오랗게 기울어 가고 있었다. 늦은 오후의 볕이 가장 빛깔이 아름답다고 전에 소년이 던졌던 말을 떠올리며 권기영은 아아, 정말 그렇구나, 하고 새삼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면서 별 뜻 없이 물었다.
‘너는 어떤 상황에서든 절대로 포기하지 못할 게 있어?’
순간, 자신도 테이블에 놓아두었던 컵을 도로 집어 들던 소년이 멈칫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유리컵 안에서 녹차가 살짝 찰랑인다. 찰나 소년의 시선이 권기영에게 닿은 듯싶었다.
권기영이 소년을 보았을 때 이미 소년은 고개를 돌리고 있었지만 그의 목덜미가 언뜻 달아오른 게 보였다. 말없이 차로 목을 축이는 소리만 꿀꺽, 천천히 들려온다.
권기영은 슬며시 짓궂은 마음이 들었지만 소년을 더 몰아붙이는 건 관뒀다. 이쯤이면 됐다.
지금은 한적함을 좀 더 즐기는 게 좋았다.
* * *
『오늘 자정, 늘 보던 곳』
권기영이 문자를 확인한 것은 동창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조금 나누다가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조수석에 던져두었던 전화가 문자 수신음을 울렸을 때, 권기영은 저도 모르게 운전대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일 때문에 급한 연락이 들어올 만한 시기도 아닌 지금, 열한 시가 넘은 이 밤중에 날아올 만한 문자는 별로 없었던 것이다. 자연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얼마 전까지 밤이 깊어 가는 시각에 종종 날아들곤 하던 문자였다. 한 손으로 더듬어 문자 내용을 보고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확인한 권기영은 굳게 다문 턱에 힘을 주었다.
놈이다.
드디어 연락이 왔다.
심장이 급격하게 커다란 소리를 내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권기영은 이를 악물고 앞을 노려보았으나 오래 망설이지는 않았다. 그다음 교차로에서 차를 돌려 방향을 틀었다.
피할 생각은 없었다. 피하려 한들 피할 도리도 없다는 걸 권기영은 알고 있었다. 그래 봐야 험한 꼴이나 보이고 결국은 놈이 원했던 대로 질질 끌려갈 뿐이라는 걸 이미 과거의 일들이 알려 주고 있었다.
그래, 어디 한번 보자고.
권기영은 얼마 전까지 매일 밤마다 드나들었던 클럽을 향해 액셀을 밟았다. 이미 시각은 자정에서 그리 멀지 않아, 그가 클럽에 도착했을 때에는 자정에서 십여 분 정도만 남았을 뿐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에 뵙는군요.”
변함없이 가면 같은 얼굴로 웃음을 띠고 있는 전실의 매니저가 그를 맞았다. 언제 봐도 마음에 안 드는 면상이다. 권기영은 한마디 대꾸도 않고 매니저가 정중하게 내미는 후드와 캐비닛 열쇠를 낚아채다시피 받아 들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밖에서는 상상도 못할 만큼 널찍한 공간을 어두운 조명으로 흐리게 비추고 있는 이 비밀스런 클럽은 변함없이 구질구질하고 기분 더러웠다.
탈의실에서 연결되어 있는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가자마자 복도 한쪽의 커다란 카우치 위에서 짐승 같은 자세로 맞붙어 허리를 놀리고 있는 사내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할 것도 없이, 어둑한 그늘 구석구석에 그런 놈들이 도사리고서 헐떡거리고 있었다.
씨발아, 헐렁하게 흘려 대지 말고 제대로 안 조일래?!, 아, 아아아, 좀 더 왼쪽, 왼쪽, 아학, 응, 거기, 더, 더 세게, 누가 혼자 질질 싸래, 구멍을 확 찢어서 못 쓰게 만들어 버리는 수가 있어, 온갖 욕설과 음담패설이 크고 작게 뒤섞이고 있었다. 그 질척거리는 진창 속을 걸어가면서 권기영은 경멸 어린 눈으로 그들을 훑는다.
워낙 폐쇄적인 곳이다 보니 몸집이며 외형이 익숙한 놈이 대부분이다. 거의 매일같이 하루도 빠짐없이 드나든 권기영은 이곳에 드나드는 놈들 대부분이 눈에 익었다.
똑같다. 변함없다. 이 구역질 나고 욕지기가 치미는 곳은.
‘어어라……, 저 새끼 오랜만이네. 한동안 날이면 날마다 드나들더니…….’
어디선가 키들거리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권기영은 시선도 주지 않았지만 직감적으로 그것이 자신을 두고 하는 이야기임을 깨달았다.
‘어? 누구? ……휘유, 몸 좋은데. 자지도 커 보이고, 아주 멋져.’
‘관둬, 말뚝 박혀 있는 놈이니까.’
‘흐, 여기에 말뚝을 하나만 박는 놈도 있어?’
‘관두라니까. 저 새끼 주먹 좀 쓰는 놈이야. ……그 말뚝, 독차지 그만하고 저 새끼 좀 안 돌리나 몰라. 뭐 그렇게 되면, 저 새끼한테 얻어맞고 벼르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라서 구멍이 망가질 때까지 처박힐 테니까 내 차례까지는 안 돌아오겠지만.’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한데, 음산한 웃음이 속삭임과 더불어 귓전을 간질였다.
권기영은 꿈틀 입매를 비틀었다. 얼음 같은 분노가 가슴을 얼렸다. 저 건방진 소리나 지껄이는 입에 주먹을 처박아 주려 돌아보았지만, 저 어둑어둑한 그늘 속에서 난잡하게 뒤엉켜 있는 추잡한 놈들 중 누가 그 개소리를 지껄인 놈인지 알 수가 없었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가슴 한구석이 싸해졌다.
벼르는 놈들. 평생 벼르기나 할 그런 놈들은 열이든 백이든 상관없었다. 그러나 만일 거기에 놈이 가세한다면.
“…―.”
권기영은 이를 악물었다.
저놈들에게 돌릴 수도 있었다. 혹은 개 우리에 던질 수도 있었다. 혹은 권기영이 생각지 못하는 어떤 끔찍한 짓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놈은 그럴 수 있었다. ――빌어먹을. 놈은 그럴 수 있었다.
좋을 대로 해 봐. 오만한 머리가 떨리는 심장을 누르며 외쳤다. 놈이 무슨 짓을 하든 놈은 결코 머릿속까지 짓밟고 올라앉지는 못할 거다.
권기영은 주먹을 움켜쥐곤 그놈과 뒤엉키곤 하던 방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그 좁은 복도로 막 들어서기 직전,
“왔어, 이쁜이?”
흐린 웃음을 머금은 나직한 목소리가 등 바로 뒤에 바싹 붙어 왔다. 굵은 팔이 불쑥 다가와 권기영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라. 이쁜이는 그동안 구멍이 굶주려서 괴로웠겠어. 아니면 가끔씩 뭐로 좀 쑤셔 줬나?”
“――.”
“그래, 그러고 보니 나 말고는 아무도 이 구멍에 들이지 않겠다고 아주 사랑스런 소리도 했었지. 큭큭큭……, 네 손가락쯤은 후벼 넣어도 좋다고 허락해 주지.”
권기영은 킬킬거리는 놈을 사납게 뿌리쳤다. 허리에 단단히 감겨 있던 팔은 생각보다 쉽게 풀려나가, 권기영은 돌아서 놈을 마주 보았다.
왔다. 놈이. 결국 눈앞에 다시 두고 말았다.
심장이 요란하게 날뛰었다. 놈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만으로도 시야가 하얗게 바래며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괴물이 눈앞에서 입을 벌리고 웃고 있었다.
권기영은 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정신 차려. 네가 누군지 잊지 마. 꼴사나운 짓 하지 말고. 마음속으로 몇 번 되뇌는 사이에 심장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모든 것이 여전하다. KK, 저 짜증나는 후드마저도.
권기영은 비틀린 웃음을 웃는 입매만 내다보이는 놈을 차갑게 응시하며 잇새로 내뱉었다.
“웃기지도 않는 후드 놀이가 재미있나 보지.”
“왜, 마음에 안 드나? 나는 후드를 쓰고 있는 이쁜이도 제법 마음에 드는데. 뭐――그래――, 그렇게 오래가진 않을 거야. 어쨌거나 이곳을 이용하는 동안에는 이곳의 방침쯤은 따라 줘야지.”
놈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안쪽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권기영은 놈을 더 마주 보고 있는 것조차 소름이 끼쳐 바로 걸음을 돌려 버렸다. 놈을 시야에 넣지 않으려 먼저 앞서서 늘 가곤 하던 방을 향해 걷는다.
둘이 나란히 걸으면 꽉 찰 정도의 복도를 걸어가는데 안쪽에서 한 사람이 걸어왔다. 이 안에서는 특이하게도 일상적인 차림에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그 젊은 남자는 놈을 보더니 보일 듯 말 듯 목례를 하고 지나갔다.
예전에 보았던 조련사였다. 그날, 사람만큼 커다란 개의 목줄을 잡고 끌고 왔던.
저도 모르게 걸음을 늦춘 권기영이 몸을 돌려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걸 보고 놈이 빙긋이 웃었다.
“그러고 보니 가끔 연락을 하나? 그 정키.”
“…….”
“종혁이 말로는 아주 잘 지내고 있다고 하던데. 거의 사육장에 붙어 산다고 하더군.”
아, 좀 전에 지나간 놈이 종혁이야, 전에 본 적 있지?, 하고 놈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권기영은 조련사의 모습이 복도 끝으로 사라진 뒤에야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한신주에게서는 그 뒤로 연락이 끊겼다. 클럽에 드나들면서도 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기억은 문 너머에서 들려오던 녀석의 교성, 짐승이 헐떡이던 소리.
“새로운 생활이 적성에 썩 잘 맞나 봐. 아주 정신을 못 차린다던데. 얼마 전에는 집에서도 개를 길러야겠다고 했다던,”
“집어치워.”
권기영은 도중에 사납게 중얼거렸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고 듣고 싶지도 않았다. 녀석이 어떻게 살아가든 더 신경 쓰고 싶지도 않다.
“왜, 개에게 내던지든 말든 멋대로 하라고 한 입이랑, 개랑 뒹굴며 헐떡거리는 놈 이야기를 듣는 귀랑은 전혀 별개인가?”
권기영은 킬킬거리는 놈의 입을 뭉개 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진저리가 쳐졌다. 놈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쩔 작정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더욱 소름이 끼친다. 그것은 놈이 유유히 뒤따르며 “걱정 마. 나는 개랑 구멍동서가 될 생각은 없거든.” 하고 느릿하게 중얼거려도 마찬가지였다.
늘 가곤 하던 방으로 들어선 권기영은 뒤이어 들어선 놈이 문 닫는 소리를 등 뒤로 들으며 시선을 의자 위로 고정시켰다.
침대 옆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는 철제 의자, 그 위에 구두상자만 한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평범한 하얀 상자. 낯익은 공간에 낯선 물건이 있다는 것이 몹시 신경에 거슬렸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더욱 그렇다.
놈이 아무 기색도 보이지 않는 걸 보고 권기영은 그것이 놈의 물건임을 알아차렸다. 이미 권기영보다 더 먼저 와서 이 방에도 들렀던 건가.
“저건,”
“벗어.”
권기영이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놈이 잘라 말했다. 놈은 구경하듯이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어 선다.
“개소리 집어치워.”
권기영은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심장이 쿵쿵 뛴다.
알고 있다. 놈의 완력을 당해 낼 수는 없을 터였다. 결국은 놈이 원하는 대로 되고 말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순순히 따라 줄 마음은 없었다. 어디 좋을 대로 해 봐. 그래 본들 머릿속까지는 안 된다.
놈은 물끄러미 권기영을 보았다. 후드 속에서 섬뜩할 만큼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드는 게 느껴졌다. 권기영은 그 시선을 똑바로 맞받았다. 이윽고 놈이 웃는가 싶었다.
두 걸음 성큼 다가온 놈은 대번에 권기영의 복부로 주먹을 날렸다. 그 주먹을 후려치며 권기영 역시 놈의 얼굴을 후려갈겼고, 이어 난투가 벌어졌다.
그것은 어쩌면 광분과도 같았다.
권기영은 반쯤 이성을 놓은 채 놈에게 주먹을 휘두르며 발길질을 하는 한편 그만큼 얻어맞으면서도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급소를 정확하게, 몸을 가누기 힘들되 의식을 잃지는 않을 정도로 힘을 조절해서 놈은 권기영에게 거침없이 반격했고, 결국 난투는 오래가지 않았다.
미친 듯이 날뛰던 권기영은 침대에 짓눌리면서 흥분도 함께 짓눌렸고, 놈은 단순하지만 단호한 힘으로 권기영을 짓누른 채 권기영의 옷을 끌어 내렸다. 무릎까지만 내려간 바지가 거치적거리며 다리를 방해한다.
“오랜만이니까 제대로 박혀 봐야겠다 싶지, 어?”
놈이 지익 퍼스너를 내렸다. 엎드려서 짓눌린 권기영은 등 뒤에서 일어나는 일을 눈으로 볼 수는 없어도 환하게 알 수 있었다. 바지 앞섶을 벌리는 기척, 그 안에서 불쑥 튀어나왔을 놈의 성기, 권기영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젖히는 손길에 노골적으로 드러났을 입구까지.
“그래도 한동안 안 했으니까 물칠 좀 해 준 다음에 박을까 싶었는데, 팔팔한 걸 보니 안 그래도 되겠어. ――엇, 차.”
“아!!”
놈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서늘한 공기가 닿던 아랫도리로 예고 없이 퍼억, 놈의 성기가 후려갈기듯이 틀어박혀 왔다.
권기영은 짧은소리를 터뜨리며 낯을 일그러뜨렸다. 말라 있던 몸속을 비집어 벌린 성기는 단숨에 반이 파고들었다. 몸을 꾸역꾸역 벌리는 부피감이 퍽, 퍽, 몸속으로 짓치고 들어올 때마다 권기영은 몸을 푸드득 떨며 이를 악물었다.
“이 씨발새끼……, 넌……, 절대로……, 가만……, 어헉!!”
권기영이 부들부들 떨리는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다가 도중에 삼키고 말았다. 여기쯤이었지?, 하고 놈이 허리를 추어올린 순간 몸속에서 낯익은 자극이 꿈틀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거 얼마나 됐다고, 그새 까먹으면 안 되지? 사내 맛이 얼마나 좋은지 그렇게 잘 알고 있었으면서 그새 이렇게 빡빡해지면 나도 아프잖아, 어? 흐, 그래도 찢어지지는 않고 용케 벌리는 걸 보니 타고난 천성만큼은 아주 기가 막혀, 우리 이쁜이.”
그럼 다 집어넣었으니까 이제 어디, 얼마나 잘 기억하고 있나 보자고, 놈이 웃으며 속삭였다. 그리고 아래를 리드미컬하게 들락날락하며 거칠게 두들겨 대는 추삽질이 시작되었다.
권기영은 입을 꾹 다물었으나 간간이 비명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몸속에 주먹질을 하는 듯한 생소한 고통은 이내 낯익은 자극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공포였다. 이 굴욕적인 폭력에 몸이 절로 흠칫거리며 아랫도리가 서서히 일어서기 시작하는 것도, 그 저릿저릿한 감각이 익숙하다고 느껴지는 것도.
싫다.
엉덩이를 벌려지면서 발기하는 것 따위, 끔찍한 분노와 혐오감이 치밀었다. 입에서 새어 나오는 억눌린 신음도 진저리쳐졌다.
“슬슬 쑤시기 편해지는데. 속이 축축해지는 게, 내가 싼 걸로만 젖는 건 아닌가 본데. 앞도 젖고 뒤도 젖고, 아주 좋은가 봐, 응?”
놈이 등 뒤에서 킬킬거렸다. 아랫도리에서는 질퍽거리는 소리가 벌써 들려오고 있었다. 권기영은 턱을 악물고 하얘진 주먹으로 시트를 움켜쥔다.
“이제 도로 기억이 나기 시작하지? 그럼 슬슬, 박히면서 싸 보자고.”
“아, ……아! 아!! 아, 아!!”
몸을 낮춘 놈의 가슴이 권기영의 등에 바싹 닿았다. 동시에 맞붙은 아랫도리를 거칠게 추어올리기 시작했다. 배 속을 후려갈기는 것처럼 거침없이 박혀 드는 타격에 권기영은 소리를 터뜨리고 말았다.
낯익은 전격이 몸속으로 번개처럼 퍼져갔다. 말초 감각의 끝까지 저릿저릿하게 번쩍거리는 것은, 끔찍하게도, 쾌감이다.
권기영은 악문 잇새로 도저히 미처 다 삼킬 수 없는 낮은 비명을 토해 내며 벌겋게 젖어 드는 눈가를 손등에 묻었다.
괜찮다. 지금 잠시일 뿐이다. 멋대로 해. 권기영은 반드시 놈을 죽일 것이다. 설령 그때 다시 실패한다 하더라도 또다시. 또다시. 그렇게, 언젠가 권기영은 반드시 놈을 죽여 버리고 말 터였다.
권기영은 명백하게 쾌감이 어려 있는 비명을 헐떡이면서 몇 번이고 그 생각을 곱씹었다. 그것만이 그를 버티게 해 주었다.
이윽고 놈이 거친 숨을 토해 내며 깊이 추삽질을 한 순간 권기영은 사정하고 말았고, 놈은 유쾌하게 웃으며 권기영의 몸속에서 사정했다. 맞붙은 아랫도리로 왈칵왈칵 비어져 나오는 정액이 이미 흥건하게 젖어 있는 허벅지에 물기를 더했다.
“구멍을 조였다 풀었다 하면서 줄줄 싸는 걸 보니 이제 기억이 다 난 모양이야. ――자, 어디 계속 가 볼까.”
권기영의 엉덩이를 철썩 두드린 놈은 성기를 꽂아 넣은 그대로, 쉼 없이 권기영의 몸을 뒤집었다. 성기에 들러붙은 내벽이 비틀리는 느낌에 고통스런 신음을 터뜨린 권기영이었지만 그조차 끝에는 쾌감이 어려 있었다. 그것을 권기영도, 놈도 안다.
놈을 죽인다. 언제든, 반드시 그렇게 하고 말 거다. 권기영은 머릿속을 그 생각만으로 채우려 애썼다. 이 감각을 쾌감이라고 인식할 수는 결코 없었다.
한 번 사정하고도 전혀 풀 죽지 않은 놈은 바로 다시 추삽질을 시작했고, 한동안 늘어져 있던 권기영의 성기 역시 그 끈질긴 추삽질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권기영은 욕설을 뱉어 주려 했으나 신음이 섞여 여의치 않아 결국 이를 악물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언젠가. 언젠가는 꼭.
이런 건 내가 아니다. 이 내가 순순히 당하고만 있을 리는 없다. 언젠가 필히 놈의 숨통을 끊어 놓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모든 걸 포기해 버리고 당하는 게 아니야. 이 기억은 굴욕으로만 남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나는.
그것이 언제가 될지도 알 수 없고 어쩌면 영영 되갚아 주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아주 어렴풋하고 막연한 생각은 머릿속 깊숙이 꾹꾹 눌러서 잠가 버렸다. 이 내가 그런 허약한 생각을 떠올릴 리 없다. 내가. 이 내가.
“아, 아아아아, 아아!!―――, ――――…….”
세 번, 혹은 네 번, 정신없이 몰아치는 감각 속에서 의식이 혼동되기 시작했을 때, 그 몇 번째인가의 사정을 마친 놈이 만족스러운 숨을 길게 토해 내었다. 묽어진 정액을 흘리며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권기영의 성기는 반쯤 죽어 있었다.
“이제야 몸이 좀 풀리는데. 슬슬 땀도 나고…….”
놈이 느른한 웃음을 띠었다. 그러더니 후드를 잡아당겨 벗어 낸다. 탈력해서 아련하게 흐려진 권기영의 눈에 놈의 얼굴이 드러났다. 거기에는 부드러운 인상으로 웃음 띤 김건준이 있었다.
“…―.”
그 순간 권기영은 마지막으로 한 방울쯤 남아 있던 정액을 마저 흘려내었다. 반사적으로 몸이 부르르 떨리며 아직껏 몸속에 담겨 있던 김건준의 성기를 꾸욱 조여, 지금 이 순간 놈이 자신의 몸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실감하고 만다.
권기영은 아득한 눈으로 놈을 바라보며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지친 몸이 늘어져 꿈쩍도 않는다.
“벌써 그렇게 늘어지면 어떻게 합니까. 이제 겨우 시작인데.”
나지막이 웃으며 권기영에게 입맞추는 놈은 김건준이었다. 얼굴도, 말투도, 상냥하게 속삭이면서도 욕심 사납게 입술을 먹어 치우는 탐욕스러움도.
놈이 아랫도리를 물리자 묵직한 살덩이가 체액과 함께 주르륵 끌러나갔다. 둔중하게 욱신거리는 통증이 일순의 선뜩한 자극과 더불어 스쳐 가 권기영은 숨을 삼켰다.
김건준이 바로 위에서 권기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웃는 듯 마는 듯 희미하게 호를 그린 눈매가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곧 놈이 고개를 숙여 권기영에게 다시 입술을 겹쳤다. 권기영은 그대로 놈의 입술을 물어뜯어 버린다. 피 맛이 입속에 쏟아지며 놈의 얼굴 근육이 움찔 움직였다. 그러나 비명 하나 내뱉지 않은 놈은 잠자코 입술을 맡기고 있다가 빙긋이 웃었다.
“이 정도 까탈쯤이라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놈은 권기영의 턱을 단단히 움켜쥐고 벌리더니 더욱 깊이 혀를 밀어 넣었다. 권기영이 어떻게 하든 결국은 자신이 원하는 걸 얻고야 마는 놈은, 벌어진 채 다물지 못하는 권기영의 입안을 만족할 때까지 맛본 뒤에야 떨어져 나갔다.
“생각해 보면 기영 형은 예전에도 종종 그러셨어요. 늘 예기치 못한 때에 밀어냈었지요.”
그것도 지나다 보니 대충, 이제쯤 밀어내겠구나, 하고 예상할 수 있게 됐지만 말입니다, 하고 놈이 말했다. 권기영은 얼핏 눈살을 찌푸리며 놈을 노려보았다. 놈이 말하는 예전이라면 이미 오래전의 언젠가다.
“냉정하고 단호한 얼굴로만 보면 기영 형은 금욕적인 느낌도 들어서요. 그런 얼굴로 문득문득 거침없이 사람을 끌어당겨 애무를 할 때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도발적이었습니다. 입 맞추는 것도, 애무하는 것도 전혀 망설임이 없었지요. 그때 저는 남과 살을 섞는 데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 때마다 당황했었는데요. 원래 표정이 희박한 편이라 얼굴에 별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기영 형은 알고 있었죠?”
알고 있었다.
권기영은 그 어느 때라고 한 시점을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놈이 말하는 어느 순간을 떠올릴 수 있었다. 반듯하고 담담한 얼굴에 알게 모르게 당혹스런 빛이 떠오르는 그 표정을 권기영은 마음에 들어 했었다.
“형이 입을 맞출 때마다, 쓰다듬을 때마다, 매만질 때마다 온몸의 신경이란 신경이 다 널뛰는 것 같았는데……, 그러다가 그 감각들이 취할 정도로 기분 좋아서 푹 빠져들려고 하면, 그 순간 끊어 내셨었지요. 여기까지, 하고.”
권기영은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다. 놈과는 가벼운 페팅을 나누며 늘 서로 쾌감을 얻었으니 도중에 멈춰서 애태웠던 적은 없을 텐데, 그가 생각하던 때 빙긋이 웃고 있던 김건준이 말을 잇는다.
“그렇게 끊겨도, 끊겨도, 결국 빠져드는 건 어쩔 수 없었어요. 푹. 머리끝까지 잠겨서 헤어나지도 못하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김건준은 입을 다물었다. 권기영의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며, 김건준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떠한 망설임이었다. 딱 한 걸음을 남겨둔 주저.
잠자코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던 김건준이 어느 순간 속삭이듯 말한다.
“기영 형, 말해 봐요.”
놈의 목소리는 너무 낮아서 마치 쉰 것 같았다.
“저는 빈말도 거짓말도 싫어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믿어 줄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말해 봐요. 앞으로 주욱 저와 함께 지내겠다고.”
“――.”
“지금이라면 여기서 그만둘 수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 말해요. 다시는 제게서 벗어날 생각 같은 건 하지 않겠다고. 믿어 줄 테니까.”
권기영은 다그치듯이 속삭이는 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거짓말이라는 걸 뻔히 알아도 믿어 주겠다고. 그러니까 말하라고.
무슨 수작이야.
권기영은 무서울 만큼 진지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놈을 뚫어질 듯 마주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은 새카맣게 가라앉아 있어 그 안을 도무지 들여다볼 수 없었다. 무슨 수작인지, 무슨 속셈인지.
다시는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겠다. ――놈의 영역 안에서 얌전히 머물겠다, 고. 놈이 하라는 대로, 놈이 베풀어 주는 자비의 안에서만 자유로이 움직이라고. 놈에게 숙이라고.
권기영은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이 내가?
놈이 저 새카만 눈 속에 무엇을 감추고 있을지,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내가 누구였던가.
“개소리 마.”
권기영이 말을 짓씹었다.
“네가 언제까지고 나를 눌러 놓을 수 있을 줄 아나? 천만에. 일 년 뒤가 됐든 십 년 뒤가 됐든, 나는 반드시 네놈을 떨쳐 낼 거다. 실컷 멋대로 해 봐, 지금뿐이니까. 이 정신병자 개새끼야!”
서슬 퍼렇게 말을 쏟아 낸 권기영을, 속을 알 수 없는 눈이 까맣게 내려다본다. 놈은 무표정한 얼굴로 침묵하며 권기영을 바라보았지만, 그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저는 당신에게 기회를 줬습니다. 그걸 당신이 걷어찼어요.”
놈이 음색이 일변했다. 칼날처럼 서늘한 목소리는 마치 일말의 망설임을 잘라 내듯 단호했다. 권기영의 위에서 몸을 일으킨 그는 침대에서 내려갔다.
권기영은 놈이 의자로 걸어가 그 위에 놓여 있던 상자를 집어 드는 걸 보았다. 다시 권기영에게 돌아서는 놈의 가면처럼 표정 없는 얼굴에서 시선을 떨어뜨려, 권기영은 놈이 여는 상자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저로서도 결코 유쾌하지 않은 일입니다만, 제가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는 건 그 부분이 아니니 어쩔 수 없지요. 어떻게 되든 결코 버릴 수 없는 게 있다면 다른 아쉬운 것을 단념하는 수밖에.”
놈이 나직이 잇새로 내뱉었다. 씻은 듯 표정을 지운 놈은 무섭도록 차가운 눈으로 권기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상자 속에서 놈이 꺼낸 건 재갈이었다.
보다 더 소름끼치는 것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에 비하면 예상보다 훨씬 가벼운 물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작해야 입을 막을 뿐인 그 물건에 권기영은 알 수 없이 불길한 예감이 들어 표정을 굳혔다.
놈이 다가왔다. 권기영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뭘 어쩔 속셈이야. 치워.”
“입 벌리십시오.”
권기영의 말에는 아랑곳 않고 다가온 놈은 권기영의 턱을 움켜쥐었다. 권기영은 입속에 단단한 쇠막대가 밀려드는 순간 그 싸늘한 폐쇄감에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주먹을 휘둘렀다. 놈이 상자를 들고 있던 손으로 권기영의 주먹을 가로막았다.
움푹 찌그러지며 바닥에 떨어지는 상자에서 작은 유리병이 굴러 나왔다. 비어 있는 유리병 안에는 얼마 전까지 약액 같은 게 들어 있었던 듯 노란 액체가 바닥에 묻어 있었다.
권기영의 굳은 시선이 그리로 향하는 걸 쫓은 놈은 대수롭잖게 아아, 하고 입을 연다.
“기영 형에게 쓴 게 아닙니다. 기영 형이 쓸 건 이것뿐입니다.”
그 말과 동시에, 놈은 약병에 잠시 신경을 빼앗긴 권기영의 배에 주먹을 질러 넣었다. 예고 없이 닥쳐온 고통에 권기영이 허를 찔린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놈은 권기영에게 재갈을 물렸다. 그리고 그가 미처 뱉어 내기 전에 재갈에 달린 사슬 끈을 후드 위로 둘러 구속구를 잠가 버린다.
“……, …―!!”
“피차 유쾌하지 못한 밤이 되겠군요.”
놈은 뭔가를 외치고 있었지만 그 소리가 입속에서 막혀 나오지 않는 권기영을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놈은 입을 꾹 다문 채 두말없이 권기영의 팔을 등 뒤로 돌려 비끄러매었다. 심장을 얼리는 불길한 예감에 미친 듯이 날뛰는 권기영을 짓누른 놈은 뒤로 묶은 손목에 사슬을 채워 벽에 단단히 박힌 갈고리에 건 뒤 물러났다.
움직임이 묶여 버린 채 고함조차 지르지 못하게 된 권기영은 이유 모를 불길한 기분이 개미처럼 스멀스멀 피부를 타고 올랐다.
어째서. 뭘 어떻게 할 셈으로.
놈의 완력이라면 어차피 권기영을 자유롭게 풀어 두더라도 어렵잖게 짓누를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어째서 굳이 이렇게.
권기영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엎드리다시피 앉은 채 불안하게 부릅뜬 눈으로 놈을 노려보았고, 놈은 물끄러미 권기영을 내려다보다가 걸음을 돌려 방에서 나갔다. 문이 닫히면서 권기영은 방에 홀로 남았다.
두근.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권기영은 문득 심장이 뛰었다.
두근. 두근. 심장이 고통과도 같은 불안을 호소하며 헐떡이기 시작한다. 뒤로 젖혀진 어깨가 욱신거렸다. 팔이 당겨서 아프다. 입을 막은 재갈에 숨까지 막히는 것 같았고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 엎어진 부자유스러운 자세가 힘들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도 더욱 숨통을 조이는 것은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새파랗게 곤두서는 불안이다.
어째서. 왜. 뭘 어떻게 할 속셈으로.
권기영은 텅 빈 잿빛 벽을 노려보았다. 괜찮아. 정신 차려. 뭘 어떻게 한들. 나중에 갚아 줄 것이다. 나중에 언젠가는. 그러니까 이것은 잠시의 굴욕일 뿐이다.
권기영은 부들부들 떨리는 두 손을 꾹 맞잡았다. 이건 불안이 아니다. 공포도 아니야. 내가 그런 감정에 휩쓸릴 리 없다. 그저 초연하게, 나중에 갚아 줄 일이라 여기고, 분노를 담아 두면 되는 거다. 그저 그걸로――.
그때.
발소리가 들렸다.
복도 저편에서 이리로 다가오는 발소리는 ……두 명.
후드 속으로 권기영의 낯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것은 몹시 막연하나 한편으로는 더없이 분명한 예감이었다. 저 소리가 끔찍한 악몽을 몰고 오고 있다는.
이윽고 발소리가 문 앞에서 멈췄고, 곧 문이 열렸다.
그리고.
권기영은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듯했다.
거기에는 김건준과 함께, 권기철이 서 있었다.
권기철은 붉은 기가 도는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스듬하게 자세가 흐트러진 몸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어렴풋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멀쩡한 낯빛을 하고 있었음에도 어딘지 모르게 취한 듯한 위화감이 느껴지는 시선이 권기영을 훑는다. 후드를 뒤집어쓴 채 재갈을 물고 있는 얼굴에서부터 뒤로 묶인 손, 벌거벗은 몸을 주욱 훑은 시선은 권기영의 사타구니에서 멈추었다.
“흐, 벌써 걸판지게 했나 보네. 씨이발, 아주 홍수 났다, 홍수 났어. 몇 판이나 뛴 거야?”
희뿌연 정액으로 뒤덮여 번들거리는 사타구니를 보며 권기철이 키들거렸다. 그 옆에서 “뭐 그냥 몇 번.”이라고 대수롭잖게 대꾸하며 빙긋이 웃어 보인 김건준이 권기영에게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놈과 눈이 마주쳤다. 그 새카만 눈동자가 소름끼치게 삭막했다.
……뭐야.
이게 무슨. 뭐. 아니, 설마, 아니다. 그럴 리, 이건, 뭐가 잘못,
넋이 나간 듯 망연히 그들을 응시하고 있는 권기영에게 권기철이 휘적휘적 다가갔다. 흔들리는 걸음으로 다가선 권기철이 웅크리고 앉자 술 냄새와 알코올 냄새가 섞인 듯한 기묘한 냄새가 훅 끼쳤다.
“이 웃기지도 않는 후드하곤. 어차피 우리밖에 없는데 그냥 벗겨 버리지?”
권기철이 손을 뻗어 권기영의 후드를 움켜쥐었다. 권기영이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막 후드를 잡아당기려던 권기철을 김건준이 조용히 만류했다.
“그만둬. 규정을 어기고 있는 건 너나 나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매니저가 아주 깐깐하거든, 하고 덧붙이며 김건준은 후드를 움켜쥐고 있던 권기철의 손목을 붙들어 가만히 떼어 놓았다. 권기철은 마음에 안 드는 듯 칫, 하고 혀를 찼지만 순순히 손을 놓았다.
“흐, 김건준이한테 이런 취미가 있을 줄은 몰랐네……. 하긴 그래, 그러고 보면 너 옛날에 우리 형 좆도 빨았었잖아? 큭큭……, 이 새끼랑 하면서도 빨아 주냐? 어으 씨발…….”
권기철은 키들거리면서 권기영의 축 늘어진 성기를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힘없이 덜렁거리는 성기를 보며 웃음을 터뜨린다.
권기영은 찢어질 듯이 부릅뜬 눈을 거의 깜박이지도 않고 권기철을, 이어 김건준을 본다. 말없이 웃음만 짓는 김건준도 권기영을 보고 있었다.
소름이 끼쳤다. 등줄기를 얼음송곳으로 쑤시는 것 같다.
“사내새끼랑 자는 건 그렇다 쳐도 이런 가게에 드나들 줄은 몰랐는데. 바른 생활인 줄 알았더니……?”
“너도 처음 온 것치고는 금방 잘 적응하고 놀던데.”
“구멍에 박는 거야 똑같지. 게다가 뭐, 그래, 새끼들이 더 꽉꽉 잘 조여 주긴 하더만. 가끔 별식 삼아 먹을 만은 하겠어.”
그래도 다 따지면 여자보다 못하지, 하고 권기철은 자신은 여기에 드나드는 놈들과는 다르다고 굳이 덧붙이며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다시 눈앞에 묶여 있는 몸으로 가느다란 눈길을 준다.
“그러니까 이놈이 네가 전용으로 박는 구멍이라는 거지. 그래도 아주 미끈하게 빠진 놈으로 잘 골랐네. 흐, 젖꼭지 튀어나온 거 봐라. 건준이 너한테 하도 빨려서 이렇게 된 거냐, 아니면 원래 이렇게 생겨 먹은 거냐? ……어이구, 느낀다 이거지.”
손에 잡히는 대로 유두를 꼬집으며 잡아당기던 권기철은 그가 움찔 몸을 움츠리자 높다랗게 웃어 대며 유두를 한층 더 집요하게 주물러 댔다. 그런 권기철을 조용히 바라보던 놈이 나직이 말한다.
“원래도 민감했어. 나랑 지내면서 더 민감해지긴 했지만. ……마음에 들어?”
“글쎄, 뭐, 사내새끼를 마음에 드네 안 드네 할 것도 없겠지만, 네가 전용으로 삼을 정도면 어지간하겠냐. 틀림없이 맛이 기가 막히겠지. 스으……, 슬슬 꼴리네.”
권기철이 자신의 트렁크 속으로 손을 넣고 사타구니를 주무르다가 이내 성기를 아예 끄집어냈다. 시커먼 성기가 발기해 있었다.
김건준만 뚫어질 듯 홉뜬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권기영의 시야 한구석에 그 시커먼 살덩이가 들어왔다. 숨통이 막힌다.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럴 리는 없었다. 이렇게까지는, 이렇게까지 할 리는.
“야, 이거 나 먹는다?”
권기철이 흘끔 김건준의 눈치를 보며 이죽거렸다.
그 자리에 짤막한 침묵이 흘렀다. 권기영은 아까부터 줄곧 시선을 마주치고 있는 놈의 눈을 망연히 바라본다. 새카맣게 가라앉은,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모를 눈이다.
권기철이 “야?” 하고 의아하게 한 번 더 그를 불렀을 때, 말없이 권기영을 내려다보던 김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권기영의 얼굴이 납빛으로 질려 버리는 걸, 놈은 틀림없이 알았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는 내가 여자 돌리고 하면 싫어하더니, 이제 너도 말 좀 통하게 됐나 보다, 어?”
“――글쎄……, 예전에도 나와 좀 가까워 보인다 싶은 여자면 네가 유독 그 여자를 가지려 들었던 게 생각나서. 이런 것도 좋아하지 않을까 싶었지.”
김건준을 곁눈질로 흘끔거리며 비뚜름하게 웃던 권기철이 움칫 입매를 찡그렸다. 권기철은 울컥 기분이 상한 기색으로 침묵하다가 김건준에게 불만스럽게 말한다.
“너랑 가까워 보인다고 그런다는 게 뭐야. 그냥 나랑 자겠다고 덤빈 년들이 어쩌다 보니 너랑 좀 얘기도 나누고 그랬었겠지. 이 새끼도 봐, 네 전용이라며? 좀 만져 줬다고 젖꼭지나 세우고 이러는데, 이건 뭐 개나 소나 다 좋다고 덤벼들 놈인 거 아냐.”
권기철이 권기영의 유두를 사납게 잡아당겼다. 권기영이 억눌린 신음을 삼키며 몸을 부르르 떨자 권기철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거뭇한 성기를 주물럭거리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 시선에는 명백한 욕망이 서리고 있었다.
묵묵히 그를 내려다보던 김건준은 시선을 돌리더니 의자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네가 그렇게 여자를 공유하면서 친구들과 사이가 돈독해졌던 게 갑자기 생각나서 말이야, 기철아. 너 다음 주에 미국으로 돌아가잖아. 그럼 이제 언제 올지 모르는데, 네가 돌아가기 전에 너랑 좀 툭 터놓고, 혹시라도 쌓인 게 있으면 다 풀고 싶었거든. 그동안 나한테 서운한 거 있었으면 너도 좀 풀었으면 좋겠고.”
담담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마치 달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권기철은 그가 자신의 기분을 풀려고 애쓰는 듯한 이 상황이 마음에 드는지 만족스런 빛으로 흘끔흘끔 김건준을 보았다.
“그래, 뭐……, 그때는 너도 나도 서로 철도 없고 그랬잖아. 실수도 하고 그런 법이지. 다 풀고 서로 잘 지내면 좋고, 응? 이제 어린애도 아니고.”
권기철은 점점 부풀어 오르는 자신의 성기를 주물거리며 번들거리는 눈으로 앞에 묶여 있는 알몸을 핥았다. 김건준의 전용이라고, 다른 사람과는 상대하지 않고 또한 김건준 역시 이놈과만 한다는, 오로지 김건준만의 것이라고 여기에 들어오기 전에 들었던 놈이었다. 확실히 같은 남자의 눈으로 봐도 감탄사가 나올 만큼 잘 빠진 몸이다.
“흐, 여튼 네가 이런 취미가 있다는 건 나도 입 다물고 있어 주마. 그래, 동참도 해 주지.”
이걸로 우위에 서기라도 한 듯 권기철이 히죽 웃었다. 김건준은 웃는 듯 마는 듯 미묘하게 입매를 올린 채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서늘한 눈으로 권기철을, 그리고 권기영을 응시할 뿐이었다.
권기철이 권기영을 밀었다. 부자유스러운 자세로 비틀거리는 권기영에게 바싹 다가서던 권기철이 흘끔 김건준을 돌아보았다.
“넌 뭐, 그냥 거기서 구경만 하게?”
김건준은 말없이 아주 약간 턱을 당겼다.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 그를 보고 권기철은 코웃음을 친다.
“그래, 그럼 보고 있어라. 이 새끼가 너한테 박힐 때랑 어떻게 다른지 잘 보고 있어. ――너 운 좋은 줄 알어, 내가 오늘 아주 극락을 보여 줄 테니까.”
나중에 나 따라오고 싶다고 울지나 마라, 권기철이 눈앞에서 묶여 있는 몸을 향해 키들거렸다. 권기철이 한 손으로 그러쥐고 있는 시커먼 성기가 유난히 흉흉하게 부풀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권기영은.
찢어질 듯 커다랗게 홉뜬 눈으로 눈앞에 있는 낯선 얼굴을 보며 얼어붙어 있었다.
설마 현실일 리가.
설마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질 리가. 설마. 설마 그럴 리는.
권기영은 얼어붙은 눈으로 김건준을 보았고, 의자에 팔짱 끼고 앉은 채 표정 없이 바라보고만 있는 김건준과 눈이 마주친 순간 놈이 결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이것은 권기영이 겪어 본 그 모든 것들보다도 더욱 끔찍한 악몽이다.
“…―!!”
“컥!! ……이, 이게……!!”
권기영의 가슴팍을 미는 권기철을, 권기영이 반사적으로 걷어찼다. 불시에 배를 걷어차이고 뒤로 벌렁 나자빠진 권기철은 잠시 배를 움켜쥐고 신음을 흘리다가, 곧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달려들어 권기영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권기영의 몸이 흔들리자 뒤로 단단히 묶인 손목에서 사슬이 철렁거렸다.
아니다. 이건 아니다. 이것만은 아니다. 이것만은 결코 견딜 수 없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후드 안에서 땀이 맺혀 얼굴이 축축해졌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바닥마저도.
권기영은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할 짧은 사슬에 묶인 채, 그 부자유한 몸으로도 미친 듯이 날뛰었다. 닥치는 대로 권기철을 걷어찼고 밀어내었다. 재갈이 물린 입은 소리 없는 고함을 비명처럼 질러 대고 있었다.
이건.
이것만은 안 된다.
차라리 홀에 뒤엉켜 있는 놈들 사이에 던지는 게 나았다. 차라리 개를 끌고 오는 편이 더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어떤 짓을 하든 이것보다는 나았다.
그러나 이성을 잃다시피 날뛰는 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자유로운 건 고작해야 다리, 그조차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상태로는 권기철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얼굴에, 배에 몇 차례나 연거푸 날아드는 주먹을 고스란히 맞는 사이에 권기영은 권기철에게 짓눌려 바닥에 깔리고 만다.
“씨, 씨팔, 이 새끼가 미쳤나, 썅! 야, 이거 뭐야?!”
“한 번도 순순히 다리를 벌린 적이 없거든.”
고함을 지르는 권기철에게 김건준이 담담하게 대꾸한다. 기묘한 얼굴로 김건준을 노려보던 권기철이 하, 하고 웃었다.
“씨이발, 오늘 김건준이 취향 희한한 거 잘 알고 간다. 억지로 박는 거 좋아했었냐? 흐, 그래, 그래, 그게 좀 재밌지? 이제 보니 그건 나랑 좀 잘 맞네. 나도 그런 거 좋아하거든. 그러니까――오늘 너 죽었어, 새끼야.”
권기철이 권기영의 머리를 짓누르며 으르렁거렸다. 권기영의 다리를 벌리며 그 사이로 허리를 밀어 넣은 녀석이 바짝 일어선 성기를 권기영의 엉덩이 사이에 대었다.
엉덩이를 벌리며 그 안쪽의 주름 위를 누르는 뜨끈한 감촉.
권기영은 온몸에 소름이 끼치며 이성이 미칠 듯 요동치는 걸 느꼈다.
안 된다.
이건 안 된다. 이것만큼은 절대로 안 된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이것만은. 이것만큼은. ――제발.
권기영은 한 번도 입에 담아 본 적도, 떠올려 본 적조차도 없는 말을 쇠막대로 눌린 혀에 올리며, 짓눌린 고개를 억지로 돌려 김건준을 보았다. 그만둬. 그만해. 하지 마. 재갈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혀가 미친 듯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차갑게 가라앉는 새카만 시선.
그 심해 같은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권기영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충격과 함께 깨닫는다.
――저는 당신에게 기회를 줬습니다. 그걸 당신이 걷어찼어요.
번복할 기회는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걸.
그리고.
“…………――――――――――!!!”
몸속을 꿰뚫는 충격이 닥쳐들었다.
그것은 심장을 꿰뚫고, 동시에, 머릿속까지 관통한다.
벼락을 맞은 듯 움직임이 멈춰 버린 권기영의 등 뒤에서, 단숨에 그의 사타구니로 허리를 밀어넣은 권기철이 짐승 같은 탄성을 내지른다.
“하, 아……! 으, 으, ……어, 씨발, 이 새끼, 네가, 전용 삼을 만하네, 죽이게 조이잖아……! 크흐, 하아,”
어깨를 깨물며 거친 웃음을 터뜨리는 목소리가 소름끼치게 낯설다. 권기영의 다리 사이를 벌리고 권기철의 성기가 깊이 파고들어 있었다. 뜨거운 성기가 내벽을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는 게 선명하게 느껴진다.
권기영의 몸속에, 권기철의 성기가, 삽입되어 있었다.
그것은 자아가 붕괴되는 것과 같은 감각이었다.
내부에서 뭔가가 끔찍한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린다.
“……――――――.”
권기영은 이성이 사라진 비명을 내질렀다. 그 비명은 목구멍 속에서 돌아 권기영의 귀에만 닿는다. 처절하고 무시무시한 소리였다.
아니다.
아니야.
아니야아니다이럴리없어이런일이벌어질리없다이건아니야.
권기영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 고함을 내지르며 날뛰었다. 권기철의 성기가 사타구니에서 미끄러져 나가는 감각이 생생했다. 몸속의 내벽을 끌어당기며 주르륵 빠져나가는 동생의 성기.
“이, 이게……!”
권기철이 욕설을 내뱉으며 화급하게 권기영을 붙잡아 눌렀다. 권기영은 광란하듯 몸을 뒤틀며 머리로든 다리나 어깨로든 닥치는 대로 휘두른다. 몸의 자유가 없는 턱없이 불리한 상황에서조차 권기철은 한동안 그를 다잡지 못하고 쩔쩔매며 연신 욕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놈은.
권기철이 ‘야, 이 새끼 좀 눌러 봐.’라고 하는 말도, 권기영의 소리 없는 포효도 전혀 들리지 않는 듯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꿈쩍도 하지 않고 그들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새카맣게 가라앉은 눈으로.
권기영은 이성을 반쯤 놓은 듯이 날뛰면서도 자신의 얼굴로 날아오는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김건준의 시선이다. 놈은 알고 있다. 놈은 권기영이 시퍼렇게 핏기를 잃고서 광란에 질려 있다는 걸 틀림없이 들여다보고 있을 터였다.
아니다. 이럴 수는 없다. 이런 처참한 일을 내가 당할 리 없어.
권기영은 놈과 눈이 마주친 순간 저도 모르게 짐승 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놈에게 내달렸지만, 벽에 걸린 쇠사슬이 철컹거리며 그의 손목을 잡아챈다. 소용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권기영은 이성을 잃은 짐승처럼 놈을 향해 몸을 젖혔고, 놈은 바로 몇 걸음 앞에서 그런 권기영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어떻게 내가 이런.
어떻게 이 녀석에게.
미칠 듯한 기분이 머릿속을 진창처럼 휘젓는다.
이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이런 일만큼은 절대로 안 되었다.
“이 미친년이! 씨발년아, 얌전히 안 있어?! 이게……!”
몇 차례나 권기영이 휘두른 몸에 얻어맞으면서 움츠러들어 있던 권기철은 어느 순간 흘끔 김건준을 살피더니 눈에 쌍심지를 켰다. 묶여 있는 놈 하나 당해 내지 못하는 것에 수치만큼의 분노가 치솟아, 권기철은 발길질이 날아드는 걸 감수하고 권기영의 목덜미를 움켜쥐어 벽에 힘껏 찍어 눌렀다. 퍼억, 권기영은 머릿속이 뒤흔들려 그대로 미끄러지고 만다. 그리고 그런 권기영을 단단히 붙잡아 짓누르며, 권기철이 악을 쓰면서 그의 다리 사이로 자신의 성기를 얼른 도로 쑤셔 넣었다. 푸욱, 권기철의 성기가 파고드는 순간 권기영의 몸이 퍼득 튀었다.
“밑구멍을 확 찢어 버리기 전에 얌전히 있어, 씨발아! 너는, 씨발, 주먹으로 아예 구멍 속을 두들겨 맞아야 해, 어?! 어디 좀 있다 보자, 넌 오늘 이후로 이 구멍 못 써먹을 줄 알아……!”
“……!! …………!!!”
권기철이 마구잡이로 허리를 놀려 댔다. 푹, 푹, 푹, 푹, 권기영의 회음에 그의 고환이 철썩거리며 부딪히도록 끝까지 쑤셔 넣는 피스톤질이 격렬하게 이어진다.
어느새 엉덩이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허벅지까지 번들거리며 흘러내리는 건 권기철이 권기영의 몸속에 쏟아낸 선액이다. 녀석이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질퍽거리는 마찰음이 귓전을 때렸다.
어느 순간부터 권기영은 거의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얼어붙어 버린 듯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굳어서 권기철의 추삽질에 따라 몸을 뒤흔들리기만 했다.
부릅뜬 눈을 깜빡이지도 못하고 차가운 시멘트 바닥만 내려다보는 권기영의 몸에서 경련 같은 떨림이 그치지 않는다.
말도 안 된다.
이런 일이 벌어질 리 없다.
내가, 이놈에게.
설마, 이건 꿈이다. 아주 끔찍하게 더러운 악몽이다.
가늘게 떨리며 달싹거리는 입술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말을 미친 사람처럼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때다. 권기철이 멈칫거리는가 싶었다. 순간 권기영은 넋을 잃다시피 한 와중에 갑자기 번뜩 어떠한 느낌이 닥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뒤이어 녀석이 한결 거칠게 허리를 밀어붙이며 괴성 같은 소리를 질렀고, 동시에 몸속에 터져 들어오는 물줄기.
“……――――――――――.”
권기철이 권기영의 몸속에 사정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뒤흔들렸다. 의식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의식뿐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도 함께.
정신이.
정신이 산산이 부서진다.
“허억, 허억, 헉, 하, 하아, 하하, 이 새끼, 질질 흘리고 있잖아. 씨발……, 미친년이 야단법석을 떨어 대더니 질질 싸긴.”
권기철이 비웃는 소리가 귀청을 찔렀다. 권기영은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떨며 자신의 사타구니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설마. 설마 그럴 리가.
그러나 권기영의 절박한 의심을 비웃듯이, 거기에는 묵직하게 발기해 선액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볼썽사나운 성기가 꺼덕거리고 있었다.
권기영은 경악해 전율했다.
어떻게 이런, 어떻게, 이런 말도 안, 어떻게, 이건 거짓, 이, ――.
그때 권기철이 손을 뻗어 권기영의 고환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이미 발기해 있던 권기영은 어이없이 쉽게 토정하고 말았다. 투두둑, 힘없이 바닥이 흩뿌려지는 말간 액체를 권기영은 망연한 눈으로 바라본다.
……어떻게 이런.
내가. …………내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재갈이 없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권기영은 넋이 빠져나간 양 그대로 엎드린 채 더 이상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킥킥……, 새끼야, 너는 몸도 그럴싸하게 잘빠진 게 같은 사내새끼한테 엉덩이 파이면서 싸고 싶냐? 병신 같은 게. 야, 뒤로 돌아봐, 한 번 더 박을 거니까. ……씨발아, 싫어하는 척하지 마, 좀 박아 주니까 당장 질질 흘려 대는 주제에.”
권기철이 성기를 끌어내며 권기영의 엉덩이를 철썩 두들겼다. 꽉 끼어 있던 살덩이가 밀려 나가면서 녀석이 싸 놓은 정액이 허벅지를 타고 뚝뚝 흐른다. 그 모든 감각 하나하나가 권기영에게 생생하게 알려 준다. 너는 지금 이놈에게 꿰뚫린 거야.
“뭐해, 돌아누우라니까. 왜, 뒤치기로 더 하고 싶냐?”
권기철이 권기영을 돌아눕히려고 그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그때다.
김건준이 일어났다.
그때까지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그가 일어나자 권기철은 의아하게 그를 쳐다보더니 대수롭잖게 히죽 웃었다.
“야, 건준이 너 아주 쓸 만한 걸로 건졌다? 이렇게 쫄깃한 구멍을 어디서 파냈어? 아깝네……. 이거, 나 미국 가기 전까지 나한테 넘겨라, 응?”
“입맛에 잘 맞았나 보지. 맛있었어?”
김건준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물었다. 그때까지 표정이라곤 없이 그들을 내려다보던 얼굴에 처음으로 어렴풋하게 표정 비슷한 것이 어린다. 그것은 휘어지는 눈매만큼이나 부드러운 목소리 탓인지, 언뜻 웃음으로 비치기도 했다.
권기철이 “어, 몇 번 먹는 걸로는 성에도 안 차겠어. 그러니까 다음 주 토요일까지 이거 나 한다, 응?” 하고 주절거리며, 희뿌연 정액을 꿀럭꿀럭 쏟아 내고 있는 권기영의 항문에 탐욕스럽게 손가락을 찔러 넣은, 그때였다.
“그래, 잘됐네. 네 평생의 마지막 만찬일 텐데 만족스럽게 즐겼다니 다행이야, 권기철.”
“어? 뭐?”
권기철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되물었다.
그 순간, 성큼 다가온 김건준이 두말없이 권기철의 뒷목을 움켜쥐고 끌어내었다. 어, 어, 하고 뒤로 끌려 물러난 권기철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넘어진다. 어리둥절함과 울컥 솟은 분노가 뒤섞인 얼굴로 고개를 쳐드는 권기철을, 김건준이 우뚝 서서 내려다본다.
뒤로 손을 짚고 나동그라진 권기철의 찡그린 얼굴에서 주욱 내려온 차가운 시선은 희뿌옇게 젖은 채 발기해 꺼덕거리는 시커먼 성기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그의 얼굴로 올라갔다.
“건준이 너 이,”
“잘 먹었으면 이제 먹은 값을 치러야지.”
그것은 아주 여상하고 담담한 목소리였다.
조용히, 언뜻 들으면 웃음조차 배어 있는 걸로 들릴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
그 목소리가 무섭도록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권기철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막 뭔가 말하려 했을 때, 김건준이 발을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권기철의 명치를 내리찍는다.
부드득, 섬뜩한 소리가 났다.
“아아악!! ……! ……!!”
권기철이 비명을 터뜨리며 바닥 위를 나뒹굴었다. 그러나 그 뒤로는 비명도 안 나오는 듯 명치를 움켜쥐고서 권기철은 쫓기듯이 숨을 헐떡였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김건준을 올려다보는 권기철을,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는 평생 치를 더해도 부족할 만큼 과한 걸 먹었거든. 그 기억 하나만으로 충분히 배부를 만큼. 안 그래?”
숨도 제대로 못 쉬며 부들거리는 권기철의 귀에 김건준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김건준은 권기철의 배를 밟고서 허리를 구부렸다. 그리고 그의 축 늘어진 성기를 한 손에 그러쥔다.
“그리고 여태 한 번도 변변찮게 써먹었던 적이 없는 걸, 딱히 앞으로라고 해서 쓸모 있게 써먹을 것 같지도 않고.”
처음으로 김건준의 눈가에 짧게 경멸이 스쳤다. 아니, 어쩌면 조롱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빛은 이내 사라지고 담담한 무표정이 돌아오면서,
뚜둑.
물컹한 가죽이 끊어지는 듯한 낮고 작은 소리.
그 소리는 다음 순간 터져 나온 무시무시한 비명에 묻혀 버린다.
방 안을 뒤흔든 그 처절하고 끔찍한 비명은 권기영의 고막을 가득 메워 버렸다. 그 광포한 비명 속에서 권기영은 아연하게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며 눈을 부릅뜨고 만다.
권기철이 끔찍한 고함을 길게 뱉으며 작살 맞은 물고기처럼 경련하고 있었다. 눈을 까뒤집고 뒤로 넘어간 채 푸들푸들 손발을 떨며 움틀거리는 그의 옆에서, 김건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도로 허리를 펴고 일어나 침대 시트에 손을 아무렇게나 닦고 있었다.
권기영은 거의 쇼크 상태에 빠져 경련하고 있는 권기철을 얼어붙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겉가죽만 붙어 있는 게 분명할, 축 늘어져 이제 다시는 쓰지 못할 거무죽죽한 음경. 그 뒤로 흐늘거리며 매달려 있는, 엄청난 악력에 짓이겨져 제 기능을 잃고 만 고환.
영영 망가져 버린 자신의 성기에 차마 손조차 대지 못하고 끔찍한 고통에 부들부들 떠는 권기철은 이제 신음조차 가느스름하게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는 좆 함부로 놀리지 말고 얌전히 살아.”
혼절하다시피 한 권기철을 내려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김건준은 문 옆에 붙어 있던 인터폰을 들어 “그래, 이쪽으로 와.”라고 짤막하게 말했다. 그런 뒤에야 이윽고, 퍼렇게 질린 눈으로 놈을 쳐다보고 있는 권기영을 돌아본다.
“…….”
“좋으셨나 봅니다.”
김건준이 조용히 말하며 권기영의 사타구니를 내려다보았다. 희뿌연 정액이 말라붙은 성기가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가 가만히 손을 뻗어 벽에 고정되어 있던 사슬을 풀자 뒤로 한껏 당겨져 있던 권기영의 팔이 조금 느슨해졌다. 놈은 권기영의 손목을 묶은 끈마저 조용히 풀었고, 권기영은 허물어진 인형처럼 꿈쩍도 하지 않고 그의 손에 팔을 내맡기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짧은 노크 소리와 함께 매니저가 한 남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방 안의 상황을 보고도 전혀 동요하는 빛 따위는 없이 매니저는 김건준이 고갯짓하는 대로 권기철을 들것에 실어 데리고 나갔다.
다시 문이 닫히고 그곳에는 원래대로 김건준과 권기영만 남았다.
그곳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도록 고요했다. 무시무시한 비명이 이 방을 가득 메웠던 게 막 방금인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다.
김건준이 권기영에게 물려 둔 재갈마저 풀었다. 권기영은 이제 입이 자유로웠고 원하는 대로 말할 수 있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어 그는 권기영이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마저 벗긴다. 그 안에서 넋 나간 인형처럼 푸르스름하게 질려 있는 권기영의 얼굴이 드러난다.
김건준은 권기영의 앞에 웅크리고 앉은 채 그의 얼굴을 구석구석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권기영은 망연히 그를 마주 보기만 했다.
“상대가 누구든 이제는 박히기만 하면 서는군요.”
김건준이 조용히 말했다. 가면 같던 놈의 얼굴에 어렴풋이 표정이 돌아왔지만 그것이 무슨 표정인지 권기영은 읽을 수 없었다. 언뜻 웃는 것 같기도 한데 웃음으로 보이지 않았다.
아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심장이 계속해서 떨리고 있다는 것만 알 뿐이다.
권기영은 공황 상태로 놈을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아무것도 못했다. 석상처럼 그대로 움직이지도 않고 말도 않는다.
악몽을 꾼 것 같았다. 어쩌면 정말로 잠시 잠깐 백일몽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이 방에는 놈과 자신밖에 없지 않은가.
“지킬 게 없다고 하셨던가요.”
귓가에서 놈이 속삭였다. 권기영의 눈앞에서 놈이 흐릿하게 웃었다. 그 조용하고 상냥한 웃음이 그렇게 소름끼칠 수 없었다.
“약 때문에 다소 흥분한 데다 판단력도 흐려져 있어서 아마 좀 힘드셨을 겁니다.”
“…….”
“기철이는 자기가 누구에게 박았는지 몰라요. 아직은. 아마 별일이 없는 한 앞으로도 모르겠지요.”
아직은. 별일이 없는 한.
그 말이 천근의 추처럼 무겁게 심장 위로 늘어졌다. 권기영은 망연히 놈을 보았다. 놈은 아무런 의도도 없이 그런 말을 하는 놈이 아니었다. 권기영의 얼굴이 무섭게 창백해졌다.
“너, …―너, 는, ――.”
커다랗게 홉뜬 권기영의 눈동자 속에, 웃는 듯 마는 듯 입가를 올리고서 말없이 권기영을 바라보는 놈의 얼굴이 비쳤다.
혀뿌리가 굳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떨리는 턱을 어떻게든 열려 했지만 그조차 여의치 않다. 심장이 미친 듯 질주하고 있었다. 숨이 막혀 호흡마저 힘들다.
권기철이 이 사실을 알게 될 수도 있었다.
“――.”
그럴 수는 없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큼은 안 되었다.
“기철이를 위해서도 모르는 편이 낫겠지요. 섹스를 마운팅처럼 생각하는 녀석이니, 하늘 위에 앉아 있는 형님에게 그런 짓을 했다는 걸 알게 되면 그 녀석도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테니까 말입니다. 아마 하늘과 땅이 뒤바뀌는 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걸요.”
놈이 조용히 속삭였다. 권기영은 불안정하게 일렁이는 눈으로 놈을 본다. 놈은 웃고 있었고, 그 웃음은 몹시 다정하고 부드럽게 숨통을 조였다.
“……차라리,”
권기영은 얼어붙은 잇새로 더듬더듬, 거친 숨을 삼키며 겨우 말을 뱉어 내었다.
“차라리 저 바깥에 있는 놈들한테 돌려. 아니면 개 우리에 처넣든가. 아니면 다시 다 벗겨서 공원에라도 끌고 가. 왜, 그걸로도 부족하면 살점을 발라내든 뼈를 조각조각 다지든, 분 풀릴 때까지 그렇게 하라고. 너 그런 거 잘 하잖아!”
권기영은 헐떡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손아귀가 목을 야금야금 조여드는 게 느껴졌다. 숨통을, 심장을 옥죄어 막다른 곳까지 몰린 그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시간 질질 끌면서 피 말리는 짓 집어치우고 차라리 그렇게 해! 그러면 되잖아! 내가 미치는 꼴을 보고 싶으면 머리를 쪼개서 그 안 어디에 칼질이라도 하든가!”
권기영은 심장이 찢기도록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그조차 바싹 마른 목을 거치는 동안 바람 소리처럼 쉬어서 힘없이 새어 나온다. 잇새로 새어 나오는 오열마저 한숨 같았다.
길게 신음을 토하는 권기영을 말없이 내려다보던 김건준은 웅크리고 있던 몸을 조금 더 기울여 권기영의 귓가에 입술을 대었다.
“제가 바라는 게 그런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라는 건 기영 형도 알고 계실 텐데요.”
바람 소리처럼 가만히 귓불을 간질이는 낮고 낮은 속삭임.
“더는 모른 척해 봐야 무의미하지 않겠습니까? 형답지 않아요.”
놈이 웃는 기척이 났다. 권기영은 말을 잃고 놈의 너른 등을 내려다본다. 어느새 권기영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고 있던 놈은 다독이듯이 권기영의 어깨를 두드리곤 몸을 일으켰다.
의자로 돌아가 앉은 그는 권기영과 얼마간 시선을 마주하다가 어느 순간 빈손을 펼쳐 보였다.
“이게 제 마지막 카드입니다.”
한숨 같은 목소리가, 그러나 담담하게 흘러나왔다.
“기영 형이 이것조차 개의치 않으시겠다면 입장이 바뀌게 되겠죠. 이제는 제가 형에게 원하는 걸 구걸할 도리밖에 없을 겁니다.”
권기영은 붉게 핏기가 오른 눈을 망연하게 뜨고 김건준을 보았다. 그가 하고 있는 말이 아주 천천히, 한마디씩 귀를 파고들었다.
마지막 카드.
더 이상은 놈이 손을 쓸 방법이 없다고, 그렇게 말했다.
“선택하세요.”
놈이 속삭였다.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문 그는 참을성 있게 침묵을 지키며 권기영을 바라보았고, 권기영은 이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임을 깨달았다.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저버릴 수 없는 것이 있다.
권기영에게 있어 그것은 자신의 근간을 이루는 ‘무언가’였다.
마지막으로 한 줌 남은 그 무언가를 송두리째 가루로 만들어 버리고 저 남자에게서 벗어날 것인가. 혹은 저 남자를 따라갈 것인가.
권기영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뭔가가 가슴속에서 처참하게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것 또한 자신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던 한 부분이다.
차라리 다른 거라면 뭐든 견딜 수 있었다. 견딜 수 없는 일이라면, 아예 없었던 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다 깡그리 없애 버려서라도.
그러나――이것은 안 된다.
권기철은 아무것도 몰라야 했다. 녀석은 오로지 자신에게 닥친 비극에만 비탄하며 절망해야 했다. 다른 것은 알 필요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되었다.
녀석이 동생이라서가 아니다. 녀석이 그 무엇보다도 형편없고 혐오스러운 놈이며,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온전하고 완벽하게 굴종해야 할 놈인 탓이다.
――기철이를 위해서도 모르는 편이 낫겠지요. 형님에게 그런 짓을 했다는 걸 알게 되면 그 녀석도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테니까 말입니다. 아마 하늘과 땅이 뒤바뀌는 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걸요.
김건준은 권기영만큼이나 권기철을 정확하게 보고 있었다.
녀석이 알게 된다면.
권기철이, 권기영의 앞에서는 늘 빌빌거리며 눈치만 보면서도 다른 데서는 제가 잘난 줄 알고 남을 깔보며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있는 그 천박하고 무능한 멍청이가.
언제든 누구보다 위에 서서 모두를 내려다보는 권기영을 무조건적으로 동경하며 숭배하는 그놈이.
감히 아무도 범접할 수 없이 완벽하게 강한 권기영에게 전적이며 완전하게 복종하는 권기철이, 자신의 형이 자신에게 짓눌린 걸 알게 된다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듯 보일 테지만 사실은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 녀석의 시선이, 인식이, 머릿속이.
권기영은 그 모든 것을 감안해 이제 선택을 해야 했다.
늘 네 발밑에 밟혀 머리를 조아리고 복종하던 동생에게 뒷구멍을 파였다고 할 수 있겠어?
그 온전한 숭배를 산산이 부숴 버릴 수 있겠어?
너를 보는 녀석의 시선이 오만한 조롱과 경멸로 바뀌는 걸 두고 볼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는 없었다.
녀석에게만은 결코 그럴 수 없었다. 녀석은 언제나 반드시 권기영의 아래에 있어야 하는 놈이었다. 권기영이 실상 그 누구보다도 경멸하며 혐오하는 그 천박한 얼간이는 감히 권기영을 지금과 다른 시선으로 보아서는 안 되었다. 놈은 늘, 절대적으로, 권기영에게 복종해야 했다. 권기영은 결코 녀석에게만큼은 자신의 발밑에서 기어오를 자리를 내어줄 수 없었고, 녀석은 마지막 순간까지 경멸스러운 멍청이로 남아야 했다.
마찬가지다.
결코 바뀌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었다.
권기영이 어느 순간에도 권기영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근간에 그의 본질, 최후의 순간까지 결코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권기영은 언제부터인지 시간도 가늠할 수 없도록 오래도록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그를 바라보고 있는 김건준을 핏기 잃은 얼굴로 마주 보았다.
마지막 카드를 내보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권기영이 어떤 선택을 할지, 뭐라고 대답할지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실들을 알면서도 권기영은 결국 그가 짐작하는 대답을 할 터였다.
김건준은 권기영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오로지 권기영만 놈을 몰랐고 알려 하지 않았다. 이것은 처음부터 불리한 게임이었다는 걸 권기영은 이제야 깨닫는다. 공포와도 닮은 불안은 결국 이것이었나.
때가 되었다. 막다른 곳까지 몰리고 몰리고 또 몰려, 여기까지 왔다.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얼어붙어 놈과 한없이 오랜 시간을 마주 보고 있던 권기영은 악문 턱에 힘을 주었다. 납빛을 한 그의 얼굴이 한층 더 창백해졌다.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 말을 그리며 권기영이 입술을 움직인 순간.
오래도록 끈기 있게 기다리며 말없이 권기영을 응시하고 있던 놈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권기영이 놈에게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
“올라오십시오.”
김건준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권기영은 침대 헤드에 기대어 비스듬하게 앉아 있는 놈에게 느린 걸음으로 다가갔다. 권기영이 올라가야 할 곳은 침대가 아니다. 성기가 반쯤 고개를 들고 있는, 김건준의 사타구니 위다.
권기영이 침대 위로 올라가도 김건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패왕처럼 앉아 권기영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
아직 미처 완전히 발기하지 않은 그의 성기로 권기영이 시선을 내렸다. 언뜻 불쾌감이 스쳐 가는 시선을 들어 다시 그를 노려보는 권기영에게, 그는 빙긋이 웃곤 입을 약간 벌렸다. 뚫어져라 권기영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혀로 입술을 핥아 보이는 그의 뜻은 명백했다.
권기영의 표정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꾹 다문 턱이 일순 떨리는 듯했지만, 그는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김건준의 사타구니를 향해 얼굴을 가까이한 권기영은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성기를 보고 이를 악물었지만 곧 눈을 감고 입을 열었다.
“……, …―!”
권기영이 자신의 의지로 남자의 성기를 입에 무는 것은 처음이었다. 무더운 열기와 함께 그의 체취가 코에 확 끼친다. 어렴풋이 남아 있는 비린 맛이 민감한 입안에 번졌다.
성기는 눈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거대해 턱이 아플 정도로 입안을 가득 메우고도 아직껏 남았다. 김건준이 손을 뻗어 권기영의 볼을 매만지며 그 안에 담겨 있는 자신의 성기를 확인한다.
“제가 도와드릴 필요는 없겠죠? 금방 익숙해질 겁니다.”
익숙해진다. 이 감촉에. 이 맛에. 이 냄새에.
권기영은 움칫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그럴 겨를도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금방 입에 타액이 고여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김건준은 느리게 그의 성기를 핥으며 빨기 시작하는 권기영을 만족스럽게 내려다보았다. 그래요, 좋아요, 그렇게 속삭여 주며 권기영의 유두를 손끝으로 잡아당기며 문질렀다. 권기영이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리는 사이에 금세 유두가 꼿꼿하게 솟았다. 권기영 자신은 모를지도 모르지만 김건준은 그 순간 권기영의 성기가 언뜻 꿈틀거리는 걸 보았다.
말없이 웃음 짓는 김건준의 사타구니에 고개를 파묻은 권기영은 그의 성기를 끈질기게 핥았다. 귀두에서 선액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그는 나직이 “삼켜요.”라고 말하며 권기영의 머리를 가만히 감싸 쥐었다. 그 시큼한 비린 맛을 삼키는 동안 몇 번이나 권기영의 어깨가 떨리는 걸 김건준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건준은 권기영의 입속에 사정했고, 권기영은 그것을 고스란히 마신 뒤에야 겨우 입을 뗄 수 있었다. 목이 칼칼해 몇 번이나 기침을 하는 권기영에게 김건준이 입을 맞춘다. 잘했어요, 그렇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만족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뒤 뭘 해야 할지는 기영 씨가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김건준은 권기영에게 입술을 맞댄 채 속삭였다. 그의 성기가 전혀 시들지 않고 그대로 서서 권기영의 허벅지 안에 부딪히고 있었다.
권기영은 부들 떨리는 입술을 깨물고 그의 허리 위로 다리를 걸치고 앉았다. 김건준의 목 언저리로 사나운 시선을 주며 무릎을 구부린 권기영은 아래로 손을 뻗어 그의 성기를 쥐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자신의 엉덩이를 벌려, 그곳으로 성기를 이끈다.
권기영의 비부 주름에 김건준의 귀두가 닿았다. 권기영은 이를 사리물었다. 자신의 손으로 타인의 성기를 몸속으로 이끌고 있다는 이 현실이 마치 비현실인 것 같다.
그러나 김건준을 바라본 권기영은 조용하지만 단호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보며 이게 비현실도 꿈도 아님을 깨달았고, 곧 이를 악물고 허리를 내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
체중을 싣고 주저앉은 순간 그의 성기가 몸속 깊숙이까지 틀어박혔다. 권기영은 그 우악스러운 압박감에 숨을 삼키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도 모르게 숨이 막혀 숨결이 거칠어졌다.
“아픕니까? 그것만은 아니시겠죠. 기영 씨도 섰는데요.”
김건준이 웃으며 권기영의 성기를 툭 건드렸다. 그의 말대로 반쯤 일어서 있던 성기는 그의 손가락이 희롱하는 대로 흔들거리면서 조금씩 더 일어서고 있었다.
이제는 사내를 받아들이면 절로 반응하게 되는 몸이다. 손가락으로 툭툭 튀기며 희롱하는 손짓에도 저릿저릿하게 꿈틀거리는.
권기영은 신음이 나오려는 입을 억지로 다물었다. 신음은 금세라도 비통한 울음으로 변할 것 같았지만 그런 꼴사나운 낯을 권기영이 남 앞에서 보일 리는 없었다. 이미 권기영의 한 부분이 무너져 내렸다 하더라도 다른 부분만큼은 반드시 버티고 지탱해야 하는 것이다.
김건준은 이내 권기영의 성기에서 손을 거두었다. 그는 늘 추삽질을 할 때면 결코 권기영의 성기에 손을 대지 않고 삽입만으로 권기영이 사정할 때까지 끈질기게 몸속을 헤집기만 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권기영이 직감하고 눈썹을 일그러뜨림과 동시에 김건준은 허리를 밀어 올렸고, 권기영은 아래에서 성기를 박아 올리는 감각에 큭, 짧은 신음을 뱉고 말았다.
“이번에는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잘 잡으세요.”
김건준은 권기영의 허리를 단단히 움켜잡았다. 그는 참을성 있게 기다릴 터였지만 권기영은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느리게 뻗은 팔이 김건준의 목을 끌어안았고, 미묘하게 힘이 들어간 그 팔에 안기며 김건준이 목구멍 안으로 깊이 웃는 걸 알 수 있었다.
곧 거침없는 피스톤질이 시작되었다. 마치 조련하지 않은 말 위에 올라탄 것처럼, 권기영은 아래에서 거세게 짓쳐 올리는 성기에 수십 수백 번이나 몸속을 꿰뚫리면서, 결국은 소리를 터뜨리고 말았다. 짐승의 울음 같은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며, 권기영은 그 몸서리쳐지는 느낌에 놈의 목에 매달려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만신창이다.
너덜너덜해져 버렸다.
몸이. 마음이. 정신이. 머릿속이. 모든 게.
권기영은 그의 성기에 꿰뚫려 미친 듯이 뒤흔들리면서, 그 자신의 성기도 어느새 바싹 일어난 것을 알 수 있었다. 선액을 줄줄 흘리며 아랫배를 두드리는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뒤흔들리는 몸이 아래로 떨어져 놈의 성기를 더욱 깊이 들이박을 때마다 몸속을 전기로 파직파직 지지는 것 같았다. 손끝, 발끝까지 전류가 타고 흘러 발가락이 곱아든다. 권기영은 어느 순간 그의 허리를 허벅지로 세게 조이며 엉덩이를 움찔거리고 있는 스스로를 깨닫고 이를 악물며 비통하게 쾌감을 울부짖었다.
모든 게 다. 그 모든 게 너덜너덜하게 엉망진창이 되었다.
놈의 목을 부둥켜안고 쾌감 때문인지 굴욕 때문인지 모를 울음을 울며, 권기영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모른다. 놈의 성기를 먹어 치우며 탐욕스럽게 쾌감을 찾는 이런 놈 따위, 나는 모른다. 요분질을 하며 선액인지 정액인지를 줄줄 흘리고 있는 이런 굴욕 따위, 내 것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권기영은 그 자신이 갈가리 찢어져 부서지는 것 같았지만, 그러나 그 너덜한 것이나마 어떻게든 붙들고 지켜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이성의 마지막 부분에서 어떻게든 권기영은 자신의 의식을 붙들었다. 그러지 않으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말 터였기 때문이다. 권기영이라는 인간의 근본부터.
권기영은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굴욕과, 좌절과, 절망과, 또한 속일 수 없는 쾌락 때문이다. 그 모든 것 때문에 그는 고함을 지르고 소리를 지르면서 김건준의 어깨를 쥐어뜯었다.
“당신도 참 안됐어요.”
언제였을까, 온몸과 온 머릿속이 뒤흔들려 의식도 이성도 엉망으로 뒤섞여 있는 권기영의 귓가에 그가 거친 숨을 헐떡이며 나직이 내뱉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아무 쓸데도 없는 걸 보석인 줄 알고 놓지를 못하거든. 그 알량한 게 자신을 나락으로 처박는다는 걸 알면서도.”
김건준의 허릿짓이 거칠어졌다. 권기영은 그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조였다 풀렸다를 반복하고 있는 내벽으로 그의 성기가 몸속을 적시기 시작한 걸 고스란히 느끼며, 귓가를 스쳐 가는 놈의 속삭임을 흘렸다.
“그게 뭐라고……, 그 오만한 자존, 그걸 버리지 못해서――결국은 내 손에 들어왔어.”
거칠어지는 숨소리에 섞인 그 말이 혼잣말인지, 혹은 권기영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마치 꿈결에 들리는 말 같았다. 권기영은 아랫도리를 더 깊이, 더 넓게 파헤치며 짓쳐 드는 성기에 모든 감각이 몰렸다. 아랫도리가 부서지고 녹아 버려, 이윽고 그의 것과 하나로 뭉쳐지는 것 같았다. 이제는 어느 것이 누구의 성기인지, 자신의 항문마저 성기가 되어 버린 건지, 그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어느 순간 김건준이 포효하며 울부짖었다. 동시에 권기영은 몸속에서 터지는 그의 토정에, 그 세찬 물줄기를 얻어맞고 저릿하게 조여든 권기영 자신도 사정하고 말았다. 엉덩이 속으로 남자의 사정을 받으며 그 자신도 절정에 이르는 권기영을 가느스름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김건준이 웃었다. 몹시 유쾌하고 만족스럽게 희열에 젖어.
권기영을 으스러뜨릴 듯이 끌어안은 그는 뺨을 먹어치울 듯 커다랗게 깨물었다.
“그래, 그것이 곧 당신이지요. 그게 당신의 유일한 가치이고, 당신 그 자체야. 그 반짝이기만 하고 아무 값어치도 없는 게 보석으로 보이는 건 당신만은 아니었어.”
내가 모든 걸 버려서라도 갖고 싶은 것. 아무 값어치도 없으나 눈부시게 빛나는 그것. 그게 당신이다.
김건준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그걸 못내 갖고 싶어 견딜 수 없었어요. 내가 봐 왔던 무엇보다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거든. 아무도 손에 넣을 수 없는 휘황하고 눈부신 걸. ……무엇을 대가로 던져서라도.”
이제야 손에 넣었어.
김건준은 오늘 몇 번째인지 모를 사정을 하고서 모든 힘이 다 빠져 버린 듯 늘어져 버리는 권기영을 품에 끌어안고서, 그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김건준의 몸 위에 묵직하게 무게를 싣는 권기영을 끌어안은 팔은 절대로 다시는 풀리지 않을 듯 단단하고 억세었다. 그것은 그가 다른 모든 걸 버리면서, 앞으로 평생에 걸쳐 맛볼 쓰디쓴 후회의 무게까지 감수하며 드디어 손에 넣은 찬란한 것이었다.
“그동안 애썼습니다.”
김건준은 권기영의 귓가에 속삭였다. 잠들었는지, 의식을 잃었는지, 혹은 그저 눈을 감고만 있을 뿐인지, 권기영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김건준은 부드럽게 그의 뺨에 입술을 대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이제는 괜찮으니까, ――그래, 그렇게 붙들고 있어요. 계속.”
김건준은 자신의 어깨에 걸쳐져 있는 권기영의 팔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 팔에 어렴풋이 무게가 실린 것 같았지만 분명하지 않았고, 또한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면 저는 뭐든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줄 테니까. 당신이 저를 붙들고 있는 한 뭐든 당신이 바라는 대로. 그러니까 계속 그렇게 있어요.
김건준이 속삭였다. 이미 기력도 저항도 잃어 마음속의 한 귀퉁이가 무너져 버린 권기영에게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저 아래에 잠겨 드는 의식 구석으로 생각할 뿐이었다. 아아, 끝났구나.
권기영은 잠시 눈을 떴다. 몽롱하게 뜬 가느다란 눈에는 컴컴한 시멘트 벽이 보였다. 그것이 꼭 눈부신 보물을 안에 가둬 두고 잠가 버린 서랍 같았다. 권기영은 그런 생각을 하다 도로 눈을 감아 버렸다.
권기영을 단단히 끌어안은 채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김건준의 손길은 언제까지고 그치지 않았다.
어느 때인가, 문득 아주 희미하게 몸이 떨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떨림은 순간으로 그쳤고, 빈틈없이 꼭 부둥켜안고 있는 두 몸 중 누구의 몸이 떨린 것인지는 둘 중 누구도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