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1)

4.

권기영은 보기 드물게 만취한 부친을 안방 침대에 눕히고 나오면서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자신은 거의 마시지 않았는데도 술 냄새에 절어 버린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가 아직껏 긴밀하게 연락하고 지내는 동창들 몇몇과 술잔을 나누는 자리에 따라갔다 돌아온 권기영은 이제야 목 단추를 풀 수 있었다.

“아버지는? 주무시니?”

권기영이 방문을 나오는 걸 보고 꿀물을 들고 오던 어머니가 미간을 찡그리더니 그럼 너라도 마시라며 잔을 권기영에게 내밀었다.

“예. 내일도 오전에 나가셔야 하니까 푹 주무시게 두세요.”

“그래……, 너도 얼른 씻고 쉬렴.”

“남은 일 마저 좀 보고요.”

내일은 일요일이었지만 앞으로 한두 달은 휴일도 주말도 없었다. 심지어 이미 시각은 밤 열 시를 넘어가고 있었지만 권기영은 아직도 할 일이 남아 잠자리에 들려면 멀었다. 지친 기색을 드러낼 겨를도 없이 꿀물을 들이켜는 아들의 어깨를 대견한 듯 두드리며 어머니도 시계를 본다.

“네 누나는 차가 많이 막히는 모양이다.”

권기영은 꿀물을 마시다 멈칫했다.

“아직 안 왔어요?”

“응, 아까 저녁에 출발한다고 전화는 왔었는데……, 어머, 왔나 보다, 얘.”

바깥에서 차고 문이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약혼자와 강원도에 바람 쐬러 갔다 오겠다고 했던 누이가 이제 돌아온 모양이었다. 곧 수런수런 이야기를 나누는 기척이 가까워지더니 현관문이 열렸다.

“엄마, 저 왔어요. 건준 씨도 같이 왔어요. 차 한 잔 마시고 가라고 내가 붙들었어.”

“어머, 그래. 어서 와요. 오늘 재미는 있었고?”

응, 대관령 넘어왔는데 한적하게 좋더라, 하고 어머니에게 재잘거리며 들어서는 누이의 뒤로, 그녀의 약혼자인 남자도 함께 들어왔다. 어머니에게 먼저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넨 그는 눈웃음이 서린 시선을 권기영에게도 돌렸다.

“늦은 시간에 실례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권기영은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김건준은 한층 짙은 눈웃음을 지으며 권기영의 차림을 훑었다.

“기영 씨도 이제 막 들어오신 모양입니다. 아버님은요?”

“약주를 드시고 오셔서 지금 주무십니다.”

그렇군요, 하고 아쉽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그를 어머니가 거실로 들였다. 어머니는 이 사윗감을 아버지나 딸 못지않게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오로지 권기영뿐이다. 그가 거슬리는 것은.

“마침 잘됐네. 며칠 전에 아주 좋은 차가 선물로 들어왔거든. 앉아 있어요, 금방 끓여다 줄 테니까. 얘, 기윤아. 어서 손 씻고 오렴.”

약혼자에게 차쯤은 직접 끓여서 내가라고, 어머니가 누이에게 눈짓을 하며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불만스런 기색도 없이 어머니의 뒤를 따르던 누이가 권기영을, 이어 김건준을 돌아보았다.

“그럼 잠시 둘이서 이야기 나누고 있어요.”

“미안하지만 나는 할 일이 많아서.”

손님의 이야기 상대를 하고 있으라는 시선에 권기영은 낯을 구기며 반사적으로 대꾸하고 말았다. 그러자 어머니가 겸연쩍은 듯이 권기영을 타이른다.

“얘, 그래도 모처럼 얼굴 보는데 이야기도 좀 나누고 그러면 좋잖니. 잠시 있으렴. 너도 차 한 잔 마시고.”

알았지?, 하고 시선으로 못 박은 어머니가 누이를 이끌고 주방으로 갔다. 둘만 남은 자리에서, 김건준이 소리 없이 웃는 기척이 났다. 권기영은 속이 욱하고 뒤틀렸다. 하루 내도록 운전하고 다녔을 텐데도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소파에 앉은 김건준에게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권기영도 잠자코 앉았다.

“요즘 아버님께서 술자리가 잦으신가 봅니다.”

“예, 오늘은 오랜만에 동창 친구 분들과 자리를 함께하셔서요.”

“아아, 그렇다면 많이 드셨을 만하군요. 한구호 상무님이 술이 세시지요.”

권기영의 부친이 누구와 술자리를 했는지 짐작한 김건준이 웃으며 말했다. 정작 그 한 상무에게 술로 이겼다고 하는 그 남자를 냉랭하게 쳐다보던 권기영은 별로 대꾸하고 싶지 않아 말을 돌렸다.

“누나와 강원도는 잘 다녀오셨습니까? 아침부터 내도록 다니시느라 피곤하시겠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생각보다 차가 더 막혀서, 밤에 장시간 운전을 한 건 오랜만이라 그런지 좀 피곤하긴 하네요.”

“모처럼 바람 쐬러 가신 김에 거기서 주무시고 오시지 그러셨습니까.”

“하하, 저야 그렇다 쳐도 기윤 씨는 그럴 수 없지요. 아직 혼전인데 소중하게 대해 드리는 게 도리일 테니까요.”

개소리.

속이 욱하고 치밀어 오른 권기영은 성실하고 반듯한 청년의 얼굴로 여유로운 눈웃음을 띠고 있는 남자를 노려보며 코웃음을 쳤다.

“혼전이라 소중히 여기시겠다……? 가족 된 입장에서 대단히 미더운 말씀이군요. 모쪼록 앞으로도 그렇게 믿음직하게 지내 주십시오.”

“그야 물론이지요. 저는 약속을 지키는 상대에게는 결코 제가 먼저 약속을 어기는 일이 없거든요. ……그러고 보니,”

권기영이 저도 모르게 비아냥거리자 아무렇지 않게 선뜻 대꾸하던 남자가 눈매를 조금 더 휘었다. 그의 눈길이 권기영의 얼굴에서 아래로 느리게 미끄러졌다. 노골적으로 더듬어 내려가던 시선은 이윽고 권기영의 사타구니에서 멎었다.

“권기영 씨야말로 약속은 잘 지켜 주고 있으신지?”

권기영은 이를 짓씹었다.

“――아아, 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확인해 볼까요. 내리십시오.”

남자는 어디 보자는 듯 편안하게 손을 깍지 끼며 권기영의 사타구니로 고갯짓했다. 권기영은 사납게 그를 노려보았다.

주방에서는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두 모녀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언제 그들이 거기에서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고 그 사이에는 시선을 가릴 만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미쳤습니까?”

“그걸 아신다면 결정을 빨리 내리시는 편이 좋으리란 것도 아실 텐데요.”

남자는 평소처럼 다정한 얼굴로 웃었다. 권기영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권기영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그의 말을 따른다, 따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선택해야만 하는 쪽은 정해져 있었다.

차라리 어서. 아직 그릇을 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사이에. 모녀의 대화가 저 안에서 이어지는 동안.

그러지 않으면 이 악마 같은 남자는 틀림없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끔찍한 상황으로 그를 몰아넣을 것이다.

권기영의 악문 턱에 힘이 들어갔다. 딱딱하게 굳은 손이 허리춤으로 내려갔다. 부들거리는 손가락을 주시하는 남자의 시선이 즐거운 듯 휘어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욱하고 속이 치밀며 새카맣게 타들어 간다.

지익, 퍼스너가 내려가는 작은 소리가 소름 끼치게 고막을 긁는다. 이윽고 끝까지 내린 끝에 소리가 멎었을 때,

“잘 보이지 않는군요. 벌려 보십시오.”

정작 권기영의 사타구니보다도 그 떨리는 손가락이며 이를 악문 표정 따위로 유쾌한 시선을 주고 있던 남자가 말을 건넸다. 주방에서는 주전자에서 물이 끓는 소리가 났고 이내 그 소리가 멈추었다. 그녀들이 돌아오기까지는 이제 금방이다.

미친 새끼. 권기영은 악마 같이 웃고 있는 남자를 노려보며 퍼스너를 벌렸다. 남자의 눈길은 초조하게 부들거리고 있는 손가락에 먼저 멎었다가 그 사이로 느릿하게 옮겨갔다.

정장 바지의 퍼스너를 잡아당겨 벌리자 그 틈새로 거뭇한 음모가 비어져 나왔다. 정장 바로 아래에서 권기영의 성기는 뻣뻣한 체모로만 덮여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하루 종일 속옷도 없이 바지 한 겹 안에서만 흔들렸던 성기다.

까맣고 단정한 정장 사이로 불거져 나온 성기는 이질감 때문일까 유난히 음란하게 강조되어 보였다. 잘 포장된 겉껍질 아래에 덮여 있는 그의 본모습은 바로 이거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남자는 웃음 서린 눈으로 권기영을 핥듯이 내려다보았다. 아니, 보란 듯이 느릿하게 이를 혀로 핥는 놈은 이미 권기영을 핥고 있었다.

남자에게 잘 보이도록 바지 앞섶을 제 손으로 벌린 채 권기영은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맞받았다. 시선마저 피할 수는 없었다. 그거야말로 꼬리 내린 개 꼴이 아닌가.

이 내가. 결코 그럴 수는 없었다. 굴욕은 있을지언정 굴복은 있을 수 없다.

그때 주방에서 물을 붓는 기척이 나며 그녀들의 대화가 잠시 끊겼다. 이제 나온다. 그녀들이 바깥으로 나오려고 걸음을 내딛는 기척이 예민하게 느껴졌다.

싸늘하게 일렁이던 심장이 크게 파도 치는 느낌.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권기영의 얼굴을 살핀 남자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웃음이 떨어진 순간 권기영은 굳어 버린 손가락으로 급하게 퍼스너를 올렸고, 동시에 주방 바깥으로 다과상을 든 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며 이리로 향하는 누이는 옷자락을 정돈하는 기색으로 허리춤을 가볍게 몇 번 문지르다가 눈길을 드는 권기영에게 무심한 시선을 스쳤다. 건너편에 앉으며 “원래 가향차는 그렇게 즐기지 않는데, 이 차는 향이 무척 좋지 뭐예요.”라고 김건준에게 말을 건네는 누이에게 “정말 향이 좋네요.” 하고 남자가 대꾸한다.

아무 이상할 것 없이 여상한 대화가 오가는 가운데 어머니가 앞에 내려놓은 찻잔을 집어 들던 권기영은 그제야 자신의 손바닥이 축축하다는 걸 깨달았다. 놈은 그것마저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

욕지기가 치밀었다.

권기영은 놈이 좋다고 한 향마저 구역질이 나 찻잔을 입에 대지도 않고 도로 내려놓았다.

“저는 할 일이 많아서 이만 올라가 보겠습니다.”

권기영이 자리를 떨치고 일어서자 잠시 대화가 끊겼다. “어머, 얘, 그래도 차는 마시고 가지 그러니.” 하고 어머니가 곱게 눈살을 찌푸렸지만, 할 일이 많다는 말을 거듭한 권기영은 냉랭한 얼굴로 남자와 누이에게 “그럼 이야기 나누십시오.” 하고 짧은 인사를 남겼다.

“얘, 너는 그래도 모처럼 사람이 왔는데…….”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그럼 일 보십시오. 이야기야 앞으로도 얼마든지 나눌 시간이 많으니까요.”

누이가 기분 상한 듯 입을 열자 남자가 도중에 그녀를 가로막으며 권기영을 거들었다. 배려가 담긴 얼굴로 부드럽게 웃음 짓는 그를 권기영은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그 눈길을 얼른 돌려 버린 것은, 그 이상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감정을 눈빛 아래 억누르기 어려웠던 탓이다.

“그럼 천천히 이야기 나누시고, 조심해서 가십시오.”

“예,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서슴없이 걸음을 돌리는 권기영의 뒤로 짤막한 침묵이 흘렀다. 이내 그 침묵은 ‘요즘 저 애가 워낙 바빠서요. 때가 때이다 보니’, ‘그러게 말입니다. 그러잖아도 많이 바쁘시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뭐라도 도와드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하고 허울 좋은 대화로 이어졌다.

2층 계단을 올라 층계참을 돌아선 뒤에야 권기영은 하얗게 관절이 드러나도록 주먹을 움켜쥐었다. 더 이상은 돌아서도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도, 등 뒤로 놈의 송곳 같은 시선이 비린 웃음과 함께 달라붙는 것 같았다.

* * *

그는 믿어지지 않았다.

이미 감각조차 사라져 자신의 몸에 달린 게 아닌 듯한 성기에서 투명한 액체가 방울방울 떨어지는 걸, 넋 나간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사람의 몸이란 게 대단해요, 그렇죠? 그렇게나 쥐어짰는데도 아직 나올 게 남아 있긴 했던 모양이니. 한 방울도 남지 않을 때까지, 그럼 마저 짜 볼까요.’

놈이 나직이 웃으며 손에 쥐고 있던 기구를 마구잡이로 뒤흔들었다. 굵직한 진동 기구가 퉁퉁 부은 채 벌어져 있는 권기영의 항문을 질퍽거리며 파헤쳤다.

권기영은 바싹 마른 목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그 소리는 바람 소리처럼 간신히 새어 나올 뿐이었다.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데도 목이 비명을 터뜨리고 몸이 절로 퍼덕거리고 있었다.

무리다. 더 남은 게 있을 리 없다. 몇 시간도 더 전부터 그랬다. 이미 훨씬 전부터 텅 비어 있는 곳에, 한두 방울 간신히 새로 고이고 나면 그걸 악착같이 짜내고 있는 게 지금이었다.

‘그, ……, …그, 마, ㄴ, 으, 흐, …―.’

바람 소리 같은 쉰 소리가 더듬더듬, 알아듣지 못할 말을 뱉었다. 그러나 그 말을 뻔히 알아들었을 텐데도 놈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도리어 몸속을 휘저으며 큼직큼직하게 추삽질을 하는 손길을 한층 더 빨리했다.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 대면서 권기영은 아까부터 감각이 마비되어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그러나 완전히 시들지도 않고 뜨끈한 발기만이 지속되고 있는 자신의 성기를 내려다보다가 결국 다시 의식을 놓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이미 수십 번이나 거듭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다시 의식을 찾아도 여전히 놈은 그 자신의 성기로든 기구로든 권기영의 몸을 벌려 놓고 있으리라는 걸.

시간 감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기절하고 깨는 동안 밖이 어두운지, 날이 밝았는지, 끼니때면 입에 죽 같은 게 놈의 성기와 함께 처박히는지, 일일이 기억할 수 없었다.

놈은 미친 것 같았다. 아니 미쳤다.

처음 놈이 무자비하게 권기영을 깔고 짓뭉개기 시작했을 때, 권기영은 경악과 혼란으로 뒤죽박죽이 된 머리로나마 견디다 못해 놈을 후려갈겼다. 미친 새끼, 개새끼, 욕을 퍼부으며 날뛰는 권기영에게 돌아온 답은 거침없이 목을 조르는 손이었다.

놈은 정말로 권기영을 죽이려 했다. 숨통이 막혀 놈의 손을 쥐어뜯는 권기영을 내려다보는 눈길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숨이 막혀 까맣게 사라져 버린 의식을 되찾았을 때, 권기영은 머리를 베개에 처박고서 높게 쳐든 엉덩이로 놈을 받고 있었다.

그 이후로 줄곧 그랬다.

권기영이 기억하는 한―아마도 기억하지 못하는 동안에도―권기영의 몸속에 뭐든 들어 있지 않았던 때는 한순간도 없었다. 놈의 성기로든 기구로든, 권기영이 기절을 했든 깨어나 있든, 놈은 쉬지 않고 박아 댔고 권기영의 사타구니는 줄곧 벌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줄기차게 성기를 훑어 올리는 손길 아래 권기영이 몇 번, 몇십 번이나 억지로 사정을 했는지, 나중에는 그것이 쾌감인지 고통인지도 분간할 수 없어졌다.

무슨 감각이 무슨 감각인지도 알 수 없어진 건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미 그때부터 권기영은 광인狂人과 같았다. 그 상태로 거의 하루를 더.

고문과 다름없는 시간 뒤, 권기영에게는 더 이상 의식이라는 게 남아 있지 않았다.

권기영이 눈을 떴을 때, 뜻밖에도 그는 홀로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엉덩이 속에서 요동치고 있어야 할 감각도 없이, 그는 그저 알몸으로 널브러져 있을 뿐이었다.

줄곧 당연한 듯이 벌어져 있던 항문이 텅 빈 게 어쩐지 낯설게마저 느껴진다. 몽롱한 머릿속에 그런 생각을 떠올린 권기영은, 다음 순간 자신의 그런 생각에 소스라치고 말았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벌떡 몸을 일으키던 그는, 그러나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이 욱신거려 도중에 멈추고 말았다.

거친 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리자 놈이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아 권기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깥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던 놈은 권기영과 눈이 마주치자 천천히 웃었다. 소름이 끼쳤다.

‘슬슬 시간이 다 됐습니다. 오늘 밤에는 댁에 들어가셔야 할 테니, 어디 보자, 한 두어 시간쯤 여유가 남았나요.’

놈이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느릿하게 말했다. 권기영은 귀가 번쩍 띄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악몽 같던 시간이 어느새 지나 있었던가.

‘두 시간 정도면 충분하군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박아 드린 다음에 씻고서 적당히 식사를 하고 나가기에는.’

식사. 이 짓거리를 끝내고 씻은 뒤에 둘이 나란히 밥을 먹고서 집으로 돌아간다? 이가 갈리게 웃긴 말이다. 권기영은 실핏줄이 터져 시뻘건 눈으로 놈을 노려보았다. 놈은 그 시선에 오히려 즐겁다는 듯 웃었다.

‘이제 정신이 좀 드셨나 보군요. 하긴 안 그러면 제가 아쉬워지지요. 마지막으로 박기 전에 의식은 제대로 찾으시라고 일부러 몇 시간이나 편히 주무시게 해 드렸으니까요. ――좋습니다.’

놈이 일어서 침대 위로 올라왔다. 권기영에게 다가서며 놈이 자신의 성기를 몇 번 대수롭잖게 흔들자 그 검붉은 성기는 지친 기색도 없이 두툼하게 고개를 들었다.

지난 이틀간, 거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권기영의 사타구니를 찢을 듯이 빠듯하게 채워 두고 있었던 성기다. 이제는 권기영 본인의 것보다 더욱 낯익은 느낌마저 드는.

갑자기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동시에, 놈이 왜 권기영에게 몇 시간의 휴식이라는 자비를 베풀었는지 무의식중에 깨닫는다.

‘그럼 이틀이 얼마나 보람찼는지 확인해 보도록 할까요.’

이를 드러내며 웃는 놈의 웃음에 소름이 주욱 끼쳤다.

안 돼, 안 된다.

그러나 권기영이 미처 몸을 물릴 사이도 없이 놈은 사냥감을 물어뜯는 맹수처럼 단숨에 권기영을 덮쳤다.

‘아, 아, 아아, 아아아아아아―――!!’

목구멍을 찢으며 튀어나온 것은 숨 막히는 비명이었다.

그렇다. 숨이 막혔다.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침대 위에서 허우적거리며 벗어나려 안간힘 쓰면서, 허리를 움켜쥐고 잡아당기는 놈의 손길에 질질 끌려가면서, 권기영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있었다.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시커멓게 웃고 있었다.

놈의 성기가 가차없이 권기영의 사타구니를 푸욱 파고들었다. 그 무시무시하게 굵고 거대한 살덩이가 내장을 짓치며 몸속으로 우악스럽게 꾸역꾸역 밀고 들어왔을 때.

권기영은 거의 쇼크에 가까운 감각 속에서 외마디 소리를 울부짖었다. 그러나 아무리 끔찍하게 몸서리치며 고함을 내질러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시선 끝에서 권기영의 성기는 꿈틀거리며 발기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된다. 이럴 수는 없다.

놈은 두 손으로 권기영의 허리를 단단히 붙들고 짐승이 교미하는 것처럼 뒤에서 거침없이 추삽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뿐, 다른 곳에는 손가락 하나 닿지 않았다.

그런데도 권기영의 성기는 단단하게 부풀고 있었다. 숨이 턱턱 막히도록 강렬한 감각이 저릿저릿하게 아랫도리를 달렸고, 그때마다 허리가 튀어오르며 흔들렸다.

‘안, 아, 하, 하지, …―.’

권기영이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부들거리며 달싹였다.

귓가에서 놈의 속삭임이 웃음과 섞여 들렸다.

‘왜요? 겁이 납니까? 하긴, 이미 알고 계시죠? 형이 허리를 흔들어 대는 게――제가 처박아 대서 그런 것만은 아니란 거.’

놈의 웃음소리가 커지면서 사타구니를 마구 두들겨 대는 허릿짓도 한결 거세어졌다. 몸속을 은근하게 지져 대는 전류 같은 감각이 숨 가쁠 만큼 높아졌다.

‘안, 아니야, 이건, 아니,’

권기영은 부릅뜬 눈으로 자신의 사타구니를 본다. 뒤에서 철벅거리며 비어져 나온 체액이 허벅지를 타고 줄줄 흘러내린다. 그리고 그 앞에서 그 자신의 성기가 점점 더 크게 끄덕끄덕 흔들리며 선액을 흘리고 있었다.

아니다. 이럴 리 없다. 내가 이럴 리,

‘으, 아, 아아, 아아아아아아아!’

그 순간이었다. 놈의 성기가 권기영의 몸속 깊숙이 아슬아슬하게 달아올라 있던 곳을 들이받았다. 동시에 둑이 터져 버린 듯한 격류가 온몸을 휩쓸었다.

권기영은 아무런 자극도 받지 않은 자신의 성기가 귀두 끝 구멍을 뻐끔거리며 희멀건 정액을 토해 내는 걸 보았다. 놈이 허리를 쳐올리는 대로 덩달아 흔들거리면서 꾸역꾸역 사정하며 파르르 떤다.

동시에 세차게 수축하는 내벽이 놈의 성기를 조이며 몇 번이고 빨아 대자, 놈은 권기영의 등에 시야가 가렸을 텐데도 그가 사정한 걸 알아차리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 하하하, 아하하하하, 잘했습니다. 아주 잘했어요.’

악마가 웃고 있었다.

몸이 덜덜 떨렸다. 머릿속에서 뭔가 갈기갈기 찢겨 나간다.

이 끔찍한 순간이라니. 내가. 이 내가.

권기영의 뒤에 올라탄 악마는 더없이 유쾌하게 웃으면서 몇 번 더 추삽질을 했고, 그 압박에 밀려 권기영이 나머지 정액을 내뿜는 동안 놈도 파정했다. 흐, 으, 권기영이 짐승처럼 신음하는 동안 놈의 입에서는 만족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땠습니까, 뒷구멍으로만 사정한 첫 경험은?’

놈이 권기영에게서 허리를 끌어냈다. 꽉 끼어 있는가 싶던 성기가 미끈하고 단숨에 빠져나가자 정액이 끝도 없이 왈칵거리며 쏟아졌다.

‘아주 야무지게 빨아 당기면서 허리를 흔들어 대신 걸 보면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는 말이었나요?’

‘……. 이런 식으로 보복하는 거냐……?’

권기영의 몸속을 손가락으로 헤집으며 정액을 긁어내던 놈은, 권기영이 불쑥 던진 중얼거림에 문득 입을 다물었다. 손가락마저 멈춘 놈은 어딘지 예상치 못한 고무공에 가볍게 머리를 얻어맞기라도 한 듯 기묘한 눈으로 권기영을 내려다보았다.

자괴감과 굴욕감 따위로 눈앞이 시뻘게진 권기영은 침대에 엎드려 널브러진 채로 놈을 무시무시하게 노려보았다. 울분으로 몸이 덜덜 떨렸다.

그게 왜.

자신은 그저 귀찮게 달라붙는 각다귀를 하나 눈앞에서 치워 버렸을 뿐이다.

그때 자신은 분명히 그에게 미리 경고를 했었다. 그때 순순히 말귀를 알아먹고 권기영의 앞에서 사라졌더라면 권기영이 그를 억지로 눈앞에서 치워 버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권기영이 미리 경고했는데도 그 말을 듣지 않고 고집스럽게 얼쩡거린 건 놈이었다.

‘보복이라.’

되새겨 보는 것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놈이 피식 웃었다.

‘글쎄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악! …―!!’

그 순간 권기영의 몸속을 쓰다듬고 있던 손가락이 푸욱, 거칠게 틀어박혔다. 권기영의 몸이 푸드덕 튀었다.

‘처음부터 이러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처……으…….’

‘예, 처음부터.’

놈은 권기영에게서 손을 거두었다.

이걸로 이번 주말의 행위는 끝났다는 듯, 선뜻한 태도로 물러선 그는 협탁 위에 던져 두었던 가운을 집어 들었다. 고통스럽게 몸을 웅크리고 그를 노려보는 권기영에게 냉정한 시선이 다가왔다.

‘바뀌는 것은 없습니다.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로 매일 자정 이후마다 만나는 겁니다. 물론 만나서 할 일도 똑같지요.’

권기영은 놈을 노려보며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헛소리 치워, 입술만 달싹인 그 말을 놈은 알아들은 눈치였다. 입가에 냉담한 웃음이 밴다.

‘사람이 하나 죽어 나갔습니다. 필요하다면 그 숫자는 얼마든지 더 늘어날 수도 있겠지요. 이번에는 누구에게 청탁해서 제 입을 막으시겠습니까?’

놈은 일시에 말이 막혀 눈만 시퍼렇게 뜨고 있는 권기영이 아무 거부도 못하리라는 걸 확인하곤 그러면, 하고 다음 말을 이었다.

‘이제는 굳이 그 클럽에서 봐야 할 이유는 없는 셈인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설마하니 기영 씨 집에서 만날 수는 없을 테고, 제 집으로 오시겠습니까?’

호텔이라도 상관없지만 매일 호텔을 드나드는 게 다른 사람들 눈에 띄는 건 싫으시겠죠, 하고 덧붙이는 말을 듣고서야 권기영은 놈의 말을 알아들었다. 밤마다 어디서 만날 건가. 놈의 집에서?

――말도 안 되는 개소리다.

권기영은 악문 잇새로 ‘웃기지 마.’ 하고 앓듯이 내뱉었다.

놈의 집. 온전한 놈의 영역. 놈의 가장 개인적인 공간.

그것은 마치 모든 것을 완전히 굽히고 놈의 뜻대로 순종하며 걸어 들어가는 듯한 느낌 아닌가.

결코, 그런 빛이 서린 권기영을 놈은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는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선선히 ‘그러면 클럽에서.’라고 결론을 내렸다.

‘어찌 되었든 축하드립니다. 뒷구멍만으로 사정하는 게 아무나 원한다고 다 되는 일은 아니니까요.’

나직이 웃는 놈을 이 자리에서 죽일 수만 있다면 혼을 팔아도 좋았다. 권기영의 부들거리는 주먹을 즐겁게 바라보는 놈을 죽여 버릴 수만 있다면.

‘그런 의미로, 상을 하나 드리지요. 앞으로 저건 걸치지 않아도 좋습니다.’

이런, 혹시 아쉬우신가요?, 상이 아니라 벌이 되는 셈입니까?, 하고 비릿하게 웃으며 놈은 시선을 옮긴다. 그 시선 끝의 테이블 위에는 여태 ‘KK’가 권기영에게 채워 왔던 딜도 달린 가죽끈이 놓여 있었다.

놈의 시선을 따라 테이블 위를 본 권기영은 이 끔찍한 상황에서도 저 알량한 것 하나로 일말의 안도감을 느끼는 스스로에게 울분이 치밀었다. 그러나, 그래, 이 오물통 같은 기분으로 저것까지 도로 쑤셔 박아야 한다면 정말로 미쳐 버릴지도 몰랐다.

‘다만.’

그때 놈이 단서를 달았다. 가느스름한 시선이 권기영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속옷도 안 됩니다. 어차피 상의는 속옷을 입지 않으셨죠? 그렇다면 간단하군요. 바지 안에 아무것도 입지 마십시오. 그게 싫다면, 원하는 대로 선택하셔도 좋습니다. 저것을 걸칠지, 속옷을 걸칠지.’

권기영은 아연한 눈으로 놈을 보았다. 그것은 선택지라고 할 것도 없어, 이내 그는 이를 갈며 테이블 위를 험악하게 일별했다. 그것이 대답임을 놈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부들거리는 몸으로 억지로 일어나 바지를 사납게 잡아채는 권기영을 보며 빙그레 웃은 놈은 아주 상냥하게 속삭였다.

‘늘 생각하십시오. 옷 한 겹 아래를 벌거벗겨 놓은 게 누구인지.’

* * *

구역질 나는 곳이다.

음습하게 그늘진 어둠 구석구석마다 지저분하고 천박한 놈들이 난잡하게 뒤엉켜 헉헉거리고 있었다. 엉덩이를 기분 좋게 파 주기만 한다면 간이라도 빼놓을 듯 엎드려서 발을 핥는 놈들도, 가진 거라곤 쥐뿔도 없으면서 알량한 힘 하나로 여기에서나 으스대며 임금 노릇을 하는 놈들도, 경멸스럽기 짝이 없다. 여기에는 죄 그런 놈들뿐이다.

불이라도 질러서 싹 없애 버리면 좋을걸.

권기영은 숨넘어갈 듯 울부짖으며 엉덩이를 흔들어 대는 놈들의 옆을 스쳐 가면서 코웃음을 쳤다. 권기영의 벗은 몸이며 딱 붙는 바지 위로 드러난 사타구니 따위를 흘끔거리는 시선들도 짜증스럽다.

누구든 권기영에게 한마디 수작이라도 걸면 당장 그 낯짝에 주먹을 박아 줄 터였지만, 그가 복도의 문 안쪽으로 들어설 때까지 그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왔어, 이쁜이?”

감옥처럼 삭막한 방이었다. 하얀 매트리스만 얹혀 있는 철제 침대 하나. 선반 하나. 의자 하나.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철제 의자에 팔짱을 끼고 우두커니 앉아 있던 남자가, 권기영이 방으로 들어서자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웃기지도 않은 후드를 뒤집어쓴 ‘KK’가 권기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벗어.”

놈이 말했다. 유들유들 웃는 입매를 노려보며 권기영은 입을 꾹 다물고 버클을 풀었다. 놈이 권기영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보란 듯이 가죽 바지 위로 사타구니를 주물렀다.

바지 하나를 벗어 내는 것만으로 권기영은 알몸이 되었다. 노골적인 눈으로 권기영을 천천히 쓸어내린 놈이 히죽 웃으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오늘은 유난히 젖꼭지가 예쁜걸. 그럼 일단 젖꼭지부터 빨면서 시작하자고.”

놈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의자에 나태하게 기대어 앉은 놈은, 권기영이 그의 바로 앞까지 다가가 멈춰서도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입매를 틀어 올리더니 혀를 길게 빼 느릿하게 흔들거린다.

자, 내 혀는 여기라고. 네가 뭘 해야 할지는 알고 있겠지.

권기영은 굴욕에 물들어 딱딱해진 얼굴로 놈의 머리를 품에 안듯이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나며 유두에 숨결이 닿는가 싶더니 이내 놈이 굶주린 듯 유두를 빨기 시작한다.

권기영은 입술과 함께 신음을 짓씹었다. 놈은 당연한 듯이 손을 뻗어 아무것도 입지 않은 권기영의 사타구니를 주물렀다. 공을 갖고 놀듯 고환을 손바닥으로 흔들다가 갑자기 손가락으로 뒤를 뚫고 들어온다. 움찔, 몸을 멈칫하는 권기영의 기척에 놈이 킬킬 웃으며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우리 이쁜이는 정말로 구멍을 타고난 모양이야. 매일같이 쑤셔 줘도 도무지 헐렁해질 줄을 모르거든. 하루 종일 딜도를 끼고 살 때는 그래도 딱 좋게 풀어져 있더니만, 이건 뭐 아주 쫀득쫀득한 게 밤새도록 쑤셔 달라고 보채는 것 같잖아.”

“…―.”

“기다려 봐, 우리 이쁜이 바쁜 날 지나고 나면 구멍 닫힐 틈도 없이 박아 줄 테니까.”

놈이 소름 끼치는 소리를 지껄이다 갑자기 유두를 깨물었다. 권기영이 무심결에 짧게 소리 지르며 몸을 움츠리자 거침없는 손바닥이 권기영의 엉덩이를 철썩 두들겼다.

“더 빨아 달라고 꼿꼿하게 세운 주제에 왜 빼고 있어. 밑구멍을 후비기가 무섭게 젖꼭지부터 발딱 세우더니――.”

“닥쳐, 이 개새끼야.”

권기영은 삽시에 머릿속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벌컥 으르렁거리고 말았다. 그 비아냥거리는 조롱에 분노보다도 수치가 먼저 치솟는 건 그 말이 사실인 탓이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빌어먹을빌어먹을.

놈이 웃는 소리가 고막을 긁어 댔다. 닥치라고 권기영이 고함을 지르기 직전에, 놈이 갑자기 권기영의 허리를 움켜쥐고 아래로 확 잡아당겼다. 벌어져 있던 사타구니 사이로 놈의 성기가 단숨에 짓치고 들어와 박혔다.

“흐억……!!”

권기영은 숨을 삼키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작살에 꿰뚫리는 듯한 감각은 결코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 뒤에 터져 나오는 웃음도.

“화내지 마, 애 그만 태우고 네가 좋아하는 거 줄 테니까. 왜, 네가 바라던 게 이거 맞잖아, 내 자지. ……흐, 넣자마자 싸는 것 좀 보라지.”

놈이 손으로 엉덩이 속을 헤집는 동안 반쯤 발기해 있던 성기가, 놈의 물건이 짓쳐들어온 순간 울컥하고 선액을 한 방울 토해 냈다. 놈이 그 선액을 귀두에 덧바르면서 킬킬거렸다. 권기영의 악문 턱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유쾌하게 바라보는 눈초리가 휘어졌다.

이놈이 정말로 그 남자일까.

권기영은 후드 속에서 잔인하게 번들거리는 눈을 마주 보며 이곳에서 놈을 마주할 때마다 떠올리는 의문을 다시 곱씹었다.

다른 사람일 리는 없다. 이 우악스럽고 건장한 몸을 권기영은 부정하고 싶을 정도로 구석구석 잘 알고 있었다. 더 이상은 약을 삼키지 않는 그 목소리도 틀림없는 그 남자의 목소리다.

그러나 ‘KK’와 ‘김건준’은, 눈앞에서 후드를 벗어 버린다 해도 도무지 일치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달랐다.

“아주 착해, 이쁜이. 몸도 솔직하고, 요분질도 잘하고, 또――말도 잘 듣거든.”

말도 잘 듣거든, 놈이 권기영의 귓가에 입술을 바싹 갖다 대고 아주 나직이 속삭였다. 소름이 끼쳤다. 아래에서 정신없이 치고 올라오는 흉포한 추삽질에 짐승 같은 숨을 허덕거리며, 권기영은 생각했다.

그래, 이 미친 정신병자 놈은 그 남자가 맞았다.

이 시궁창 같은 구석을 벗어나는 순간 멀끔하고 양순한 모습으로 변모해 부드럽게 웃으며 미친 짓을 벌이는 그 소름 끼치는 남자다.

이미 익히 깨닫지 않았던가.

그때도 놈은 그렇게 유순하게 웃고 있었다.

그것은 심지어 호텔에서 그 끔찍했던 주말을 보낸 바로 다음날이었다. 외부 일로 외근을 나갔다가 뜻하지 않게 그곳에서 놈을 마주쳤다.

놈은 빈틈없으나 사람 좋은 얼굴로 웃음 지으며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그 빌딩의 다른 층에 있던 거래처에 들렀다 나오는 길이었던 듯 놈도 권기영을 보곤 놀란 눈치였다.

‘일 보러 나오셨습니까? 하하, 이렇게 우연히 뵈니까 더 반가운걸요.’

권기영에게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넨 그는 옆에 배웅 나와 있던 거래처 사람을 간결하게 소개시켜 주었고, 그 거래처 사람은 권기영과 악수 정도를 나누곤 곧 돌아가 버렸다. 권기영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길 기다리고만 있었다.

몸속의 심지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 같았다. 만 이틀이라는 지옥 같은 시간에서 풀려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 걸음을 내딛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비명을 지르며 욱신거리는 걸 권기영은 악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부드럽고 상냥하게 웃고 있었다. 그 가증에 소름이 끼치다 못해 심장이 선뜩해졌다.

×× 선생님이 후원해 주기로 하셨다고요, 어서 좀 한가해지셔야 할 텐데요, 하하, 기영 씨 수완에 결과는 너무 뻔히 보여서 걱정이 안 되는걸요, 친근하고도 예의 바른 청년의 모습으로 그는 여상하게 말을 건네고 있었고, 권기영은 거의 단답으로 대답하며 어서 주차장으로 내려가 이 소름 끼치는 놈의 꼴을 눈앞에서 치워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다다랐고, 둘을 태운 엘리베이터는 조용히 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곧 점심시간이군요. 식사는 하셨습니까?’

‘예.’

아니요, 세 글자조차 말을 섞기 싫어 짧게 대꾸하고 입을 다무는 권기영을 보고 그는 빙긋이 웃었다.

‘빠르시군요. 커피라도 드시고 가시겠습니까?’

‘아쉽지만 일이 많아서요.’

‘아아……, 하긴 정말로 바쁘시긴 한 모양이긴 합니다. 몸도 불편하실 텐데 오전부터 외부 일을 도시는 걸 보니.’

말꼬리가 명확히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느릿하게 늘어졌다. 일순 굳었던 권기영은 눈동자만 돌려 놈을 보았다. 가느스름하게 웃고 있는 놈의 눈초리가 거기 있었다.

‘좀 다닐 만하십니까?’

부드럽게 묻는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으나 권기영의 귀에는 명백한 의도가 담긴 것처럼 들렸다. 사납게 놈을 노려보던 권기영은 예, 하고 입매를 비틀었다.

‘요즘 영 일이 꼴사납게 돌아가긴 하는데 앓아누울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길 바라셨다면 유감이시겠지만요.’

‘제가? 설마요.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한 적 없습니다.’

‘예, 물론 그러시겠지요.’

권기영이 코웃음 치자 놈은 한동안 웃고 있다가 한 걸음 다가섰다.

‘저는 권기영 씨에게 빈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 정도는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그렇지, 빈말이라고 하니 생각난 김에…….’

‘――이 미친 새끼가!!’

권기영의 바로 앞으로 바싹 다가선 놈이 거침없이 권기영의 바지 퍼스너를 내리더니 그 안으로 손을 불쑥 집어넣었다. 권기영이 반사적으로 놈을 밀어내며 외쳤지만 놈은 끄덕도 않고 오히려 권기영을 엘리베이터 벽으로 밀어붙였다.

‘이런……. 제가 어제 분명히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딜도를 빼고 다녀도 좋은 대신에, 어떻게 하라고 했었죠?’

놈의 손이 권기영의 바지 속에서 성기를 속옷째로 지그시 움켜쥐었다.

‘이 변태 같은 새끼, 당장 손 빼. 여기가 어딘지 알고――.’

권기영은 점점 줄어들어 가는 엘리베이터 숫자판을 초조하게 쳐다보곤 이를 갈았다. 수십 개의 업체가 들어와 있는 커다란 빌딩이다. 어느 층에서 서도 이상할 게 없었다. 게다가 그렇지 않다 해도 늘 사람들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 1층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어디서든 이런 일을 당하기 싫으면 약속은 지키셔야죠. 보이지 않는다고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저는 빈말을 싫어한다고 말씀 안 드렸던가요?’

평연하게 중얼거리며 속옷 위로 성기를 두어 번 움켜쥔 놈은 곧 속옷 안까지 손을 집어넣었다. 성기 위로 곧바로 닿는 서늘한 손길에 권기영이 움칫한 찰나, 놈이 성기를 움켜쥐더니 바깥으로 끄집어냈다. 속옷은 물론 바지까지 헤치고 나온 살덩이가 퍼스너 밖으로 드러났다.

동시에 권기영의 눈에는 3, 2, 점점 줄어드는 숫자가 커다랗게 들어왔다. 이윽고 크게 뜬 눈에 ‘1’이라는 숫자가 박히며 땡, 하고 엘리베이터가 멈췄을 때, 다급하게 놈의 손을 움켜쥐는 권기영의 손길을 매섭게 뿌리치며 오히려 바지 버클까지 활짝 풀어 젖힌 놈은 유유히 한 걸음 물러섰다.

문이 열린다.

마치 슬로 모션처럼, 천천히 열려가는 문 사이로 그 바깥에 서 있는 서너 명의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미처 옷을 추스를 틈도 없는 그 짧은 시간. 권기영은 젖혀진 바지춤 사이로 성기를 늘어뜨린 채 망연히 얼어붙었다.

시간이 멈춘 듯 머릿속이 하얘진――그때.

놈이 웃는 듯했다. 그때까지 권기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그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팔에 걸치고 있던 재킷을 권기영에게 던졌다. 엉겁결에 재킷을 끌어안아 옷자락으로 바지 앞섶을 가린 것은 사람들의 여상한 시선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온 것과 동시였다.

‘가시지요.’

놈은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돌려 걸어 나섰고, 권기영은 한 걸음 늦게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사람들을 피해 그의 뒤를 따라갔다.

심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손바닥이 축축하다.

버클이 풀린 바지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재킷으로 옷자락을 누른 채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며, 권기영은 재킷 자락에 스치며 바지 밖에서 흔들리는 성기를 선명하게 의식해야 했다.

도중에 권기영의 차 뒤를 스쳐 가며 놈이 ‘제 재킷은 돌려주셔야죠?’라며 웃음 지어 결국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놈의 차까지 걸어가면서, 권기영은 자신이 무슨 정신인지도 알 수 없었다.

조수석에 들어가 앉아서도 한동안 입을 열지 못하는 권기영에게서 놈은 재킷을 빼앗다시피 가져갔다. 그 아래에 드러난 성기를 손끝으로 툭툭 두드리며 웃는 놈을 쳐다보지도 않고 권기영은 넋 나간 듯 중얼거렸다.

‘미친 새끼.’

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그렇게 한동안 권기영의 성기를 갖고 장난치듯이 만지작거리던 놈은 그럭저럭 만족했는지 다시 속옷 속으로 넣어 주었다. 퍼스너를 올리고, 버클을 채우고, 옷자락까지 마저 차근차근 정돈해 준 놈은 허옇게 핏기가 사라진 권기영의 얼굴로 빙그레 웃음 띤 시선을 돌렸다.

‘다음번에도 도와드리지는 않을 겁니다.’

소름이 끼쳤다.

놈은 정말로 미쳤다. 아니, 적어도 놈은 권기영이 어떻게 되든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있었다. 그로 인해 권기영이 난처한 상황에 처한다 하더라도 놈에게는 또 다른 여흥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해야.

“헉……! 크, 으……!!”

권기영은 가쁜 신음을 뱉으며 마구 뒤흔들리는 천장을 보았다. 삭막한 시멘트벽이 고스란히 드러난 꼴이 감옥 같다.

아니, 감옥은 이곳이 아니다. 놈이다. 놈이 감옥이다.

“좋아 죽겠어? 어? 아주 좋아 죽겠지? 구멍이 꼭 백 년은 굶은 아귀 같아, 아주 욕심 사납게 쭉쭉 빨아 당기는 게.”

“흐어, 아! 하아, 하아, 아, 아아!!”

“아까부터 쉴 새도 없이 질질 싸더라니, 앞뒤 할 것 없이 죄다 홍수가 났어, 응? 구멍마다 흥건하니까 좋아 죽겠지, 이쁜이?”

놈이 짐승처럼 헐떡이며 권기영의 엉덩이를 철썩 두들겼다. 권기영은 쉰 목으로 소리를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놈이 허리를 추어올릴 때마다 아래에서 푹푹 쳐올리는 압박감에 속이 메슥거렸다. 몸이 둘로 쪼개질 것 같다. 그럼에도 아랫도리를 쉴 새 없이 잇따라 가르는 번개 같은 감각에 권기영의 성기는 꼿꼿이 곧추서 꺼덕거리며 허여멀건 액체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권기영은 지옥에 떨어진 것 같았다. 놈은 성기로 몸속을 가르며 쑤셔 댈 때마다 충격과 같은 감각이 휩쓰는 곳을 정확하게 긁어 댔고, 그때마다 권기영의 성기는 폭발할 듯 부르르 떨렸다. 머릿속에서는 치욕과 분노가 시뻘겋게 살아서 타오르고 있는데도 그랬다.

이건 생지옥이다.

“아! 아아! 아아아, 아, 아, 아아아아――!!”

“……하! 아하, 아하하하하,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나한테 박히면서 좋아라 허리를 흔들어 대며 싸는 거라고! 그래, 그래, 좋아, 아주 잘했어, 이쁜이, 그럼 나도, 부어 주지……!”

권기영이 비명처럼 사정한 순간 놈이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거친 숨과 함께 한결 더 거칠게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철벅철벅철벅철벅, 물기 섞인 살 소리가 점차 빨라지더니, 놈이 어느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낮게 터져 나오는 놈의 신음과 함께 권기영이 몸속에 쏟아져 들어오는 뜨끈한 물줄기를 맞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빈틈없이 꽉 맞물린 접합부 사이로, 팽팽하게 벌어진 주름의 흔적을 타고 정액이 방울방울 줄줄이 비어져 나오더니 놈이 쾌락 어린 숨을 토해 내며 허리를 한번 흔들자 이내 폭포수처럼 넘쳐흘렀다.

아, 아……, 축 늘어진 권기영이 몸을 부르르 떨며 억누른 소리를 한 번 더 흘린다.

“오늘도 아주 잘했어, 이쁜이.”

놈이 만족스럽게 속삭이며 권기영의 입술을 끈적하게 핥았다. 여전히 몸속에 담가 놓은 성기를 살짝살짝 휘돌리며 킬킬거린다.

오늘도 아주 잘했어, 이쁜이.

어제도 들었던 말이다. 그제도. 그끄제도. 그 전날들도.

놈은 막상 삽입을 하기 전에는 권기영의 성기를 집요하게 희롱하다가도 권기영에게 성기를 밀어 넣은 다음에는 거기에 손끝조차 대지 않았다. 권기영은 절정을 견디려고 악을 쓰며 버티다가도 결국은 울부짖으며 사정을 하고 말았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아마 내일도.

“…….”

손가락 하나 들 힘 없이 희멀겋게 치뜬 눈으로 놈을 노려보자, 놈이 키득거리더니 권기영의 유두를 질근 깨물었다. 권기영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퍼득 튀었다.

“지금 네 꼴이 어떤지 알아? 온몸에 죄 잇자국을 울긋불긋하게 달고서, 젖꼭지도 더 빨아 달라고 빨갛게 부어올랐지, 밑구멍도 빨갛게 부어서 정액을 질금질금 싸면서도 더 쑤셔 달라고 뻐끔거리고 있지, 그러면서 불그레한 눈으로 사람을 쳐다보면 그 꼴이 뭐겠냐고, 응?”

놈이 킬킬 웃더니 권기영의 가슴을 덥석 입에 물었다. 죽죽 거침없이 빨며 잘근거리는 감각에 권기영은 쉰 목으로 다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놈의 성기가 몸속에 꽂힌 채 도로 부풀기 시작하는 게 느껴졌다.

나날이 온몸에 신경이 점점 더 곤두서 가는 것 같았다. 예전에는 그런 곳이 민감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곳이 무서울 만큼 예민해져 있었다. 마치 모든 곳이 다 성감대로 바뀌어 가는 것 같다. 모든 감각이 새파랗게 벼린 날처럼 날카로웠다.

……그렇다. 그래서다.

권기영은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문틈으로 그들을 몰래 훔쳐보는 반들거리는 눈동자.

뱀 같은 눈동자가 반들반들, 욕망에 절어 그들을 훔쳐보고 있었다. 문 뒤에서 하아, 하아, 들뜬 숨을 토해 내며 스스로 욕망을 달래는 그 시선은 집요하고 끈끈하게 그들을 핥는다.

그가 훔쳐보고 있었다.

놈을 거듦으로써 이 퇴폐적인 지옥에 천국인 양 드나들 권리를 얻은 그가.

어느 구석에선가 아무에게나 다리를 벌리고 뭐든 아래에 박아 주기만 하면 엉엉 울며 천박한 몸뚱이를 흔들어 댈 그 갈보가――한신주가, 밤마다 문밖에서 탐욕스럽게 달뜬 눈으로 그들을 훔쳐보며 자위했다.

권기영은 그 집요한 관음觀淫의 시선을 받으며 이를 부득 악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아랫도리를 크게 헤집으며 휘젓기 시작하는 놈의 허릿짓에 소리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 * *

“예, 어머니. 갈아입을 옷이랑 속옷 정도만 챙겨 놔 주세요. 제 것도 같이요. 일정이 좀 지연돼서 저녁에 천안 내려가서 자고 내일 거기에서 바로 평택에 들렀다가 돌아오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예, 지금 가고 있어요. 근처에 다 왔으니까 금방 도착할 거예요. ……아, 어머니. 다른 데서 전화가 들어와서 끊을게요. 그럼 금방 갈 테니까 필요한 것들 좀 챙겨 주세요. ――예, 권기영입니다.”

갑작스럽게 일정이 변경되어 필요한 물건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가면서 어머니에게 전화를 하던 도중에 통화대기음이 울렸다. 운전을 하던 권기영은 전화 상대를 볼 틈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동시에 전화 저편에서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를 듣고 입매를 찌푸린다.

「형, 난데……. 바빠?」

“운전 중이야. 짧게 말해.”

권기영은 그제야 국제전화를 표시하고 있는 액정화면을 흘끔 내려다보며 대꾸했다. 동시에, 잊고 있던 것이 기억에 떠올라 짜증이 일었다.

얼마 전에 이놈이 벌였다는 폭력 사건은 적당히 무마되었다고, 그쪽에서 권기철의 뒤처리를 해 주고 있는 변호사에게 전갈을 받았다. 그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 말을 들어 보니 이놈이 권기영 모르게 사고를 치고 매달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나 보다. 그 일이 있기 바로 얼마 전에도 교포 여자애 하나를 임신시켜 놓고 어쩌다 살짝 밀쳤다가―놈의 표현에 따르면―넘어뜨려 유산을 시켰던 모양이다. 그걸 간신히 어떻게 수습을 해 놨더니 달이 넘어가기도 전에 또 사고를 치더라는 게, 변호사가 웃으면서 전하는 말이었다.

이 정신 나간 놈이, 사고를 쳐도 웬만하면 교포는 건드리지 말라고 했는데도 이 꼴이다. 아마 그 친구가 일일이 말을 전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터였다.

「형, 나 다음 달쯤에 한국 들어갈까 하는데.」

“다음 달 언제.”

「그냥, 초순쯤? 어차피 갈 거, 오랜만인데 좀 빨리 가려고. 여기 인간들도 짜증 나고, 좀 쉬고 싶어. 아 진짜, 친구입네 하던 놈들도 다 쓸모없고…….」

주절주절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하는 동생의 말을 듣는 건 몇 초만으로 충분했다. 요는 사고를 친 직후이다 보니 켕겨하며 조심스러워하는 주위 상황들이 짜증스럽다는 거다.

“알았어. 귀국편 변경한 뒤에 연락해. 지금이 어떤 시기인지 알 테니까 들어오면 한동안 몸 사리고 있을 생각하고, 사방에 떠들어 대지 말고 조용히 들어와. 내 말 알겠지.”

어, 형, 하고 우물우물 얼버무리는 목소리를 들으니, 이미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다음 달에 들어갈 거라고 떠들어 댄 눈치다. 들어오자마자 쏘다니며 옛날처럼 돼먹잖은 골목대장 노릇이나 하고 돌아다닐 생각이었을 거다.

권기영은 다른 용건이 없다는 걸 확인하곤 전화를 끊었다. 이놈은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평생 이럴 터였다. 나 잘났네 행세하면서도 결국은 권기영에게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며 눈치를 볼 놈. 죽을 때까지 권기영의 아래에 있을 놈이다.

“…….”

공원을 끼고 한적한 주택가로 이어지는 모퉁이를 돌던 권기영은 창밖으로 무심한 시선을 주다가 저도 모르게 브레이크에 발을 올렸다. 느리게 굴러가는 차창 밖으로 탁 트인 공원이 보였고, 거기에 김건준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셔츠를 팔뚝까지 걷어붙이고 단추를 하나 푼 그가 어딘가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 시선 끝에서 도베르만 한 마리가 프리스비를 물고 달려오고 있었다. 이미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노견인데도 활기차게 달려오는 그놈은 권기영의 집에서 기르는 놈이었다.

누이를 만나러 왔다가 잠깐 놀아 주고 있는 눈치였다. 주위에 누이가 안 보이는 걸로 봐선 누이는 집에 있는 모양이다.

권기영은 차를 멈추었다. 시계로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놈을 본다. 놈은 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프리스비를 받아들고 있었다. 잘했어, 입 모양으로 그렇게 칭찬한 그는 다시 프리스비를 멀찍이 던졌고, 개는 신이 나서 원반을 쫓아갔다. 놈이 뒤에서 얼굴 가득 웃으며 옳지, 잘했어, 하고 외친다.

권기영은 냉담하게 놈을 바라보았다.

……그래. 생각해 보면 놈은 옛날에도 저랬었다.

알고 나니까, 왜 여태 알아채지 못했는지 이상할 지경이었다.

그 오래전 놈은 동생과 더불어 종종 권기영의 집으로 놀러 와서도 틈틈이 개를 어르며 데리고 놀곤 했었다. 그럴 때면 무덤덤하고 어른스럽던 얼굴이 허물어지며 장난스럽고 즐거운 웃음을 웃어, 권기영은 2층에서 내려다보면서 저놈은 친구들이랑 놀러 오는 건지 개랑 놀러 오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혼자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어쩌면 권기영은 그 자신도 미처 알지 못했지만 그를 제법, 상당히, 마음에 들어 했던 것도 같다.

권기영은 어쩐지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겉껍질만 그대로일 뿐 놈은 그때와 지금 전혀 다른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권기영의 기억 속에 묻혀 있던 김건준은 어른스럽고 현명하면서도 순수한, 고집이 있긴 하지만 반듯하고 올곧은 소년이었다. 지금 권기영을 옭아매고 있는 저 속을 알 수 없는―소름 끼치는 남자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저 앞에서 허물없이 웃으며 개를 쓰다듬고 있는 남자의 모습은 오래전 권기영이 알았던 그 소년과 겹쳐지고 있었다.

“…….”

권기영은 왠지 모르게 서늘한 기분이 들어 팔을 쓰다듬었다. 속이 묵직하게 불편해졌다.

아니다. 놈은 권기영이 알던 그 소년이 아니다. 그럴 리 없지 않은가. 놈은 소년의 기억과 육체를 공유하고 있는 다른 사람이다.

놈이 원하는 게 뭘까.

복수. 권기영의 파멸. 피가 바싹 마른 권기영이 미쳐 버리거나 자멸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한 걸음 한 걸음, 놈은 차근차근 권기영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 끝에는 틀림없이 놈이 원하는 뭔가가 있을 터였다.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과연 언제쯤이면.

권기영은 가슴속이 서늘해져 입술을 짓씹으며 놈을 바라보았다.

지치지도 않고 프리스비를 물어 온 도베르만의 머리를 쓰다듬은 그는 이제 그만할 생각인지 옆에 놓아두었던 목줄을 도로 채웠다. 개는 싫어하는 눈치였지만 얌전히 그의 손에 목을 맡기고 있었다. 제 주인보다 오히려 저놈이 더 좋은가 보군, 권기영은 차갑게 코웃음 쳤다.

권기영은 도로 사이드브레이크를 내리고 액셀에 발을 올렸다. 그리고 막 차를 출발시키려고 한 그때였다. 전화가 울렸다.

액정에 놈의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권기영은 시선을 돌려 놈을 보았다. 놈은 한 손에 전화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목줄을 쥐고서 막 벤치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예, 권기영입니다.”

「구경은 실컷 하셨습니까?」

놈이 걸음을 돌렸다. 망설임 없이 이리로 시선을 주는 놈과 눈이 마주쳤다. 놈은 웃고 있었다.

「이제 돌아가려는 참인데, 댁으로 가실 거면 같이 타고 가도 괜찮을까요?」

놈은 권기영과 시선을 마주친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침묵하다 전화를 끊어 버린 권기영은 벌레 씹은 기분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금세 다가온 놈은 개를 뒷자리에 태운 뒤 조수석에 앉았다.

“기윤 씨와 약속한 시간을 제가 잘못 알고 있었지 뭡니까. 기윤 씨한테 야단맞았어요.”

한 시간쯤 지났으니 이제는 슬슬 나갈 준비가 다 됐겠죠, 하고 덧붙이며 놈은 웃었다. 권기영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차를 움직였다.

누이와 약속이 있었나 보다. 그러고 보면 결혼 날짜도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놈이 누이와 결혼을 하게 되면 그 뒤에는 어떻게 되는 걸까. 어느 쪽이든, 결코 지금보다 나아지지는 않을 터였다.

“이런 데서 기영 씨와 마주칠 줄은 몰랐습니다. 벌써 일을 마치신 건 아닌 것 같은데요.”

“필요한 게 있어서 가지러 가는 길입니다. 저야말로, 김건준 씨가 이런 시간에 이런 데서 한가롭게 개나 데리고 놀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저도 원래라면 지금쯤 기윤 씨와 갤러리를 돌아보고 있을 줄 알았지요. 하지만 이렇게 시간을 죽이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요.”

놈은 뒷자리에 얌전히 앉은 개를 돌아보며 웃음 지었다. 권기영은 리어뷰미러로 그런 그를 보며 냉소했다.

“어지간히 개를 좋아하시나 봅니다. 누나랑 같이 데려가십시오. 어차피 그놈도 제 주인이 누군지 모르는 모양인데.”

“하하. 이런……, 하늘이가 저를 제법 따르는 것 같아서 기분이 별로이신가 봅니다. 하긴 주인이 아닌 사람한테도 꼬리를 흔든다면 도베르만을 기르는 보람이 없긴 하겠군요.”

너 쫓겨나게 생겼는데 어떡할 거야, 하고 놈은 팔을 뻗어 개를 쓰다듬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이 녀석이 저를 좀 잘 따르긴 하는데, 이놈은 저랑은 비교도 안 되게 기영 씨를 좋아해요. 옛날부터 그랬는데, 이놈은 저랑 신나게 놀다가도 기영 씨 기척만 느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절 싹 모른 척하고 기영 씨만 쳐다보더라고요.”

놈은 오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래전 언젠가를 떠올렸는지 눈초리에 웃음 주름이 진다.

“그래서 그때는 기영 씨가 근처에 있으면 이 녀석 덕분에 금방 알 수 있었어요. 실컷 장난을 쳐 대던 놈이 갑자기 의젓한 척하면서 저를 무시하면 십중팔구는 얼마 안 있어서 기영 씨가 보였거든요. 그러다 보니 어느 때부터인가 저도 기영 씨가 가까이 있으면 감이 오더군요.”

지금은 이놈보다 제가 더 빨리 알아차릴걸요, 하고 놈이 웃었다. 권기영은 놈이 목줄을 쥐고 돌아섰을 때에야 이쪽을 보고 귀를 세우던 개를 떠올리곤 코웃음 쳤다.

“사람보다 늦게 알아차릴 정도라면 더 쓸모없군요. 데려가시지 않겠다면 내다 버려야겠습니다.”

하하, 이를 어쩐다, 하고 놈이 난처한 듯이 웃었다. 얌전히 자세를 낮추고 앉아 있는 개의 귓등을 긁으며 웃고 있던 놈이 하긴, 하고 입을 연다.

“저도 개를 키운다면 저에게만 온 정신을 다 쏟는 놈이 아니면 싫긴 합니다. 그러고 보면 내다 버린다는 기영 씨가 더 다정한지도 모르겠군요. 저라면 제 개가 다른 데 정신을 판다면 목을 꺾어서라도 제 쪽만 쳐다보고 있게 만들어 놓을 테니까요.”

권기영은 문득 불쾌해졌다. 섬뜩한 감각이 가슴속에 묵직하게 얹히는 기분이다.

“……그렇게 개를 좋아하시는데 한 마리 키우지 그러셨습니까.”

“아아, 어머니가 동물을 싫어하셨거든요. 아버지는 언제나 어머니 편이었고요. 그러다가 제가 따로 나와 살게 될 즈음에는 개를 키울 만한 상황이 아니었죠.”

놈이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 말을 들으며 권기영은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걸 처음 발견한 사람이 어머니였거든요. 그 뒤로 살짝 의식이 좀 흐려지셔서요. 요양 병원에 모셔서 더 이상은 같이 살지 않는데도, 어머니가 싫어하셨던 게 생각나니까 개를 키우게 되지는 않더라고요. 이제 아마 어머니랑 같이 살게 될 날은 오지 않을 텐데도 괜히 말이지요.”

운전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앞만 바라보는 권기영의 시야에 멀찍이 집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지금 이 짓거리를 벌이고 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냐. 그게 다 너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꼴좋다고, 실컷 후회하라고? 웃기지 마.

“일부러 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아시겠지만 아버지는 그때 이미 암 말기셨으니까요.”

게다가 개도, 제가 집에서 키우는 건 아니지만 사업장이나 회사 소유 농장에서는 여러 마리 키우고 있고요, 가볍게 덧붙이는 놈의 목소리는 여전히 선선한 기색이었다. 애써 빈말을 하는 기색도 아닌 목소리를 들으며 권기영은 집 앞에 다다를 때까지 말없이 앞만 바라보았다.

차 소리가 들렸는지 창문으로 누이가 고개를 내미는 게 보였다. 이미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그녀에게 그가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안심한 듯 마주 웃는 그녀를 뒤로하고 권기영은 차고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즐거웠습니다. 이렇게 잠깐이라도 뵈니 좋네요.”

놈이 안전띠를 풀며 말했다. 여느 때와 같이 사람 좋은 청년의 얼굴을 하고 있는 놈을 잠시 바라보다 권기영은 냉담하게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라고만 대꾸하자 놈이 웃었다.

“빈말보다는 그게 훨씬 낫군요. 예, 다음에 뵙겠습니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놈은 그 말을 남긴 뒤 차에서 내렸고, 권기영은 놈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 * *

놈은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권기영은 비어 있는 방을 보고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런 날은 거의 없긴 하지만, 오늘은 권기영이 놈을 기다려야 하려나 보다.

“그이가 아직 안 왔나 보지. 올 때까지 내가 놀아 줄까?”

옆방에서 나오던 놈 하나가 권기영을 훑어보더니 비리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불룩한 사타구니를 느릿하게 쓰다듬는 그놈을 흘끗 쳐다본 권기영은 “꺼져.”라는 대꾸만 남기고 방으로 들어섰다.

비어 있는 침대를 보자 속이 뒤틀렸다. 지금 여기에서 자신은 자신의 엉덩이에 박아 대며 킬킬거리는 놈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권기영은 욕설을 내뱉으며 평소 놈이 앉는 철제 의자를 걷어차고 말았다.

“씨발년이 생긴 대로 노네? 성깔 좀 있어, 어?”

복도에서 봤던 놈이 벌컥 문을 열고 뒤따라 들어오며 이죽거렸다. 권기영은 그놈을 짜증스럽게 노려보았다. 눈치도 없는 머저리는 딱 질색이다.

“나랑도 좆질 좀 해 보자니까 뭘 튕기고 있어? 네 구멍은 뭐 그 새끼 좆 맞춤이야? 죽여 주게 박아 준다니까?”

“나가라, 얼간아.”

“흐, 좀 괜찮게 빠졌다 싶은 놈들은 하여간 꼭 성질머리가 이렇거든. 오늘 오빠한테 귀여움 좀 받아 보자, 구석구석까지――.”

그놈의 말은 거기에서 그쳤다. 권기영에게 성큼성큼 다가서며 덥석 움켜쥐려 손을 내밀던 그놈의 얼굴을 그대로 후려갈겨 버린 것이다.

뚜둑, 콧대가 부러지는 느낌이 주먹에 분명하게 전해졌다. 얻어맞은 반동으로 튕겨 나간 그놈은 벽에 등을 세차게 부딪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외마디 비명을 끝으로 놈은 피칠갑을 하고 바닥에 널브러져 꿈틀거렸다.

“굳이 얻어맞으려고 기어들어 오긴 왜 기어들어 와, 병신 같은 게.”

개나 소나 사람을 물로 보고, 권기영은 울컥 치밀어 그놈의 배를 거침없이 걷어찼다. 신음을 게워 내며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놈에게 경멸스런 시선을 주는 걸 마지막으로 그에게서 신경을 끄고 의자에 앉았다.

놈은 언제 올까. 늦어도 자정을 넘기진 않을 테니 오래 기다리진 않을 거다. 권기영은 초조하게 시계를 보며 혀를 찼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걸까.

불현듯 그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놈은 언제까지 이 짓을 할까. 누이와 결혼할 때까지? 내가 피 말라 돌아 버릴 때까지? 아니면 놈이 질릴 때? 내가 죽을 때까지?

요즘 놈은 줄곧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래도록 초조하게 탐내던 장난감을 손에 넣은 것처럼 마음에 한층 여유가 생긴 듯한 느낌이다. 권기영을 보는 놈의 눈매엔 늘 만족스러운 웃음이 감돌고 있었다.

“……빌어먹을.”

권기영은 그 웃음이 싫었다. 때로 그 웃음은 권기영이 기억하고 있는 그 오래전의 소년과 겹쳐졌다. 그럴 때마다 기억 속에 눌러놓았던 낯설고 불편한 감각에 속이 거북해진다.

언제까지 이렇게.

권기영은 입술을 짓씹으며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때 철문이 열리는 기척이 났다.

놈이 왔나, 그쪽으로 시선을 돌려 문 틈새로 고개를 들이민 사람을 확인한 권기영의 낯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우와……, 바보같이……, 기영 씨한테 시비 걸었구나?”

바닥에 피투성이로 널브러져 있는 사람을 질렸다는 듯 내려다보며 쯧쯧 혀를 찬 그는 시선을 들어 권기영을 보았다. 이내 그의 눈이 고양이처럼 비스듬하게 휘었다. 

“그 남자는 아직 안 왔나 봐?”

철문을 조금 더 밀며 살그머니 들어오고 있는 건 한신주였다.

권기영은 냉랭한 눈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한신주가 이 클럽에 매일 밤마다 드나들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권기영에게 등 돌리고 놈을 거듦으로써 이곳에 자유로이 드나들 권리를 얻은 그는 이미 이 퇴폐적이기 이를 데 없는 곳에서도 못 말릴 갈보로 정평이 난 모양이었다.

이제는 그냥 봐도 그렇게 보였다. 호텔에서 권기영을 이끌고 갔던 그날 이후로 한신주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 이후로 그렇게 시간이 오래 지난 것도 아닌데 놈은 이제 누가 봐도 ‘천박한 갈보’가 되어 있었다.

얼마나 짓씹히고 또 짓씹혔는지 울퉁불퉁하게 모양이 변해 버린 까만 유두에는 피어스가 달려 있었고, 온몸은 울긋불긋한 손자국과 잇자국으로 덮여 있었다. 안이 다 들여다보이는 가느다란 망사 끈을 덮은 성기는 어린애의 성기처럼 깨끗하게 면도가 되어 있었는데 조그만 피어스가 몇 개나 달린 그것은 반쯤 발기해 있었고, 그 뒤로는 엉덩이 사이로 얼핏 튀어나와 있는 굵직한 손잡이. 지금도 항문에는 거대한 모조 남근이 담겨 있었다.

권기영과 어울릴 무렵에도 한신주는 못 말릴 섹스 중독이었지만 그나마 권기영이 그어 놓은 선 안에서 탐닉했었는데, 지금은 그 선마저 아예 넘어 버린 듯했다.

“기영 씨, 요새 재미 좋은 것 같더라?”

한신주가 살살 웃으며 권기영에게 다가왔다. 권기영은 그에게서 차가운 시선을 떼지 않고 어이없이 코웃음 쳤다.

“너야말로 24시간 내내 재미 봐서 좋겠어. 그래, 그래서 정신이 나갔나 보지. 내 앞에 어슬렁거리며 그 얼굴을 들이민 걸 보니.”

갈가리 찢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은 놈이었다. 허락 없이는 내 발바닥도 함부로 핥지 못하던 갈보 주제에 분수도 모르고 주제넘게. 이런 갈보 따위를 없애 버리는 건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쉬웠다.

그럼에도 여태 그냥 놔뒀던 건 김건준 때문이다. 정작 먼저 짓밟아 죽여 버려야 할 놈은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있는데, 턱없이 약해 빠진 저놈부터 짓이겨 버리는 건 마치 무능력하게 분풀이나 하는 것 같은 꼴이 아닌가. 그렇게까지 자존심이 바닥으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지금 당장에라도 이놈의 목을 꺾어 버리고 싶어 가슴속이 부들거릴 정도였지만, 아직은 아니다. 김건준을 처리해 버릴 때까지는 이놈의 순서가 아니다. 그러나 그다음에는, 이놈은 권기영의 등에 칼을 꽂은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 할 터였다.

“화 많이 났어……? 있잖아, 나 계속 기영 씨한테 사과하고 싶어서 정말 하루도 빼지 않고 매일 이 바깥에서 망설였었어. 정말이야. 내가 얼마나 기영 씨 좋아하는지 알잖아.”

한신주가 시멘트바닥에 살그머니 무릎을 꿇고 권기영을 올려다보며 애틋하게 속살거렸다. 그 와중에 발꿈치가 항문에 박힌 손잡이를 꾸욱 누르자 눈매가 살짝 풀어지며 부르르 성기를 적시는 놈을 권기영은 차갑게 내려다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그렇게 망설이느라 문틈으로 훔쳐보며 열심히 자위나 해 댄 모양이지.”

“뭐야……, 역시 알고 있었구나? 그럼 내가 기영 씨만 봐도 몸이 달아오르는 것도 알 거 아냐. 그런데, 그런 걸 보고 어떻게 내가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겠어? 기영 씨도 알잖아, 응?”

뻔뻔한 얼굴로 대꾸한 한신주는 상상만으로도 달아올랐는지 숨이 들떴다. 발갛게 핏기가 오르는 얼굴 아래로 가슴이 달싹인다.

보기만 해도 질릴 이 창부 습성을 귀엽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경멸스러울 따름이었다. 역겨웠다.

“응, 기영 씨…….”

한신주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뾰족하게 일어선 유두를 권기영의 무릎에 문질렀다. 그 순간 권기영은 거침없이 그의 뺨을 후려쳤다. 매서운 소리와 함께 한신주가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밤마다 훔쳐보면서 제 손으로 뒷구멍을 후비는 걸로는 더 못 견딜 지경이 되었나 본데, 번지수를 잘못 찾은 모양이야. 그놈한테 박히고 싶으면 그놈한테 말해. 내 앞에 그 천박한 낯짝 들이대지 말고.”

남자의 성기만 보면 탐욕스럽게 눈을 반들거리며 이성을 잃는 놈이다. 그런 놈이, 누구에게 뒤진 적이라곤 없는 권기영조차 놀랍게 바라보았던 김건준을 보고 군침을 흘리지 않았을 리 없다.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찾아온 것일 테지만, 뭘 착각했는지는 몰라도 한참 잘못 짚었다.

벌게진 뺨을 움켜쥐고 눈을 커다랗게 껌벅이던 한신주는 대번에 고개를 내저었다.

“KK? 아냐, 난 당신을 찾아온 거라고. 당신이야, 기영 씨. 나는 당신만 봤어!”

한신주는 권기영에게로 다시 기어왔다. 바닥에 바싹 몸을 붙이고 엎드려 권기영의 발가락을 할짝인다. 예전 그렇게 해서 종종 권기영의 기분을 풀었던 때처럼 정성들여 발을 애무하며 속삭였다.

“그래――내가 그렇게 생겨 먹은 건 기영 씨도 알 테니까 솔직히 말해서, 그래, 그 남자가 그 크고 굵은 걸로 내 엉덩이를 쑤셔 주면 얼마나 좋을까, 처음에는 그 생각을 하면서 자위했어. 하지만 그것도 처음 한두 번뿐, 난 계속 기영 씨만 봤어. 기영 씨한테서 눈을 뗄 수가 없었어.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았어. 기영 씨가 얼마나……, 얼마나…….”

한신주가 문득 몸을 부르르 떨며 신음했다. 놈의 가랑이 사이로 투두둑 물기가 떨어지는 게 보였다. 놈이 눈을 일렁이며 헐떡거렸다.

“기영 씨……, 나랑 하자, 응? 뭐든지 하라는 대로 다 할게, 그러니까 제발……, 다른 사람이랑 아무리 해도 만족되지가 않아. 계속 기영 씨 모습이 생각나서, 기영 씨랑 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 ――나도, 웬만했으면 이렇게 찾아오지 않았을 거야. 기영 씨 성격 뻔히 아는데, 지금 당장에라도 나 죽을지도 모르는 거 아는데, ……그런데, 기영 씨랑 하고 싶어서 잠이 안 와. 나 정말 미칠 것 같아, 응, 제발…….”

한신주는 이미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사정 직전처럼 반들거리는 눈을 반쯤 까뒤집고서 모조 성기를 넣었다 뺐다 하며 헐떡거렸다.

추악하다.

권기영은 자신의 발을 핥으며 끙끙대는 한신주를 그대로 걷어차 버렸다.

“뻔뻔한 낯짝 하나는 알아줘야겠어, 한신주.”

“기영 씨, 기영…….”

“뭐든 처넣어 주기만 하면 자지러지면서 좋아 울부짖는 주제에, 이제 하다 하다 아예 돌아 버린 모양이지. 하긴 웬만한 걸로는 성에 차지도 않을 거야, 그 닳아빠진 엉덩이로는.”

허겁지겁 권기영에게로 돌아앉던 한신주가 입을 다물었다.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더니 움칫 권기영을 노려본다.

주제에 꼴같잖게 화는 나는 모양이다. 권기영은 그 반들거리는 눈매를 마주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그 더러운 사타구니는 다른 데에나 가서 벌려. 내 앞에 들이대지 말고. 나는 걸레에 내 몸 닦을 생각 전혀 없어.”

권기영이 내뱉자 한신주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새파랗게 질리는가 싶던 눈에 금세 독기가 피어올랐다.

“그래서, 잘난 기영 씨는?”

꾹 다문 입술을 짓씹으며 한동안 권기영을 노려보던 한신주가 이를 바득 갈며 내쏘았다.

“같은 사내놈한테 다리나 벌린다고 비웃어 대던 잘난 기영 씨는, 한 사람한테만 엉덩이를 내주니까 자기는 깨끗하다고 할 생각이야? 밤마다 그 남자한테 엉덩이를 뚫리고 헐떡거리면서? 세상에서 제일 잘난 수컷입네 하더니?”

싸늘하게 쏘아보는 권기영의 시선을 맞받으며 한신주는 뱀처럼 반들거리는 눈을 하고 악을 썼다.

“왜, 그 남자한테 날이면 날마다 박히다 보니, 이젠 박히는 거 아니면 안 하나 보지? 솔직하게 말해 봐, 나랑 자고 싶지 않은 게, 구멍에 박히는 게 더 짜릿해서 그런 건 아냐? 응?!”

권기영은 무시무시하게 한신주를 노려보았다.

언제 이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던가. 이따위 벌레 같은 놈에게 이런 소리를 듣고 있다니. 이 내가.

그때 한신주가 움찔하며 창백한 얼굴로 한 걸음 물러섰다. 권기영의 표정에 떠오른 선명한 살의를 보고서야 이성이 조금쯤 돌아온 듯했다.

권기영은 어느새 움켜쥐고 있던 주먹을 억지로 풀었다. 지금은 아니다. 한신주가 그 세 치 혀를 찧어 버리며 후회할 날은 오늘이 아니었다.

“나가. 네 지저분한 몸뚱이에서 썩는 냄새가 나니까.”

권기영이 내뱉자 한신주가 이를 악물었다. 부르르 떨리는 얼굴에는 분노와 수치,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한신주가 부들거리는 입술을 간신히 열었을 때였다.

“앞으로는 종종 늦게 와야겠어, 이런 재미난 구경거리를 보려면……?”

느릿한 비웃음이 뒤에서 들려왔다. 한신주가 번개를 맞은 듯 움찔 돌아보았다. KK, 그 후드를 뒤집어쓴 건장한 남자가 문턱에 기대어 히죽거리고 있었다.

“오늘은 재밌는 일이 많았었나 보지.”

남자가 바닥에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던 놈을 툭 걷어차며 들어왔다. 터벅, 터벅, 시멘트 바닥에 울리던 발소리는 한신주의 앞에서 멈추었다.

한신주가 흠칫했다. 남자가 허리를 구부리더니 한신주의 코앞으로 얼굴을 바싹 가까이 댔다. 후드 안에서 한신주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눈이 이윽고 가느스름하게 휘었다.

“누군가 했더니 그 정키잖아. 요새 아주 인기가 많은가 보던데. 클럽 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어.”

“…….”

“그런데 여기는 웬일이야, 응?”

한신주는 입을 꾹 다물더니 꺼림칙한 것이라도 피하듯 남자에게서 몸을 물렸다. 남자를 한 번 흘끔 노려보고 방에서 나가던 한신주는 문틀을 넘어서면서 권기영을 돌아보았다.

“잘난 척하지 마.”

이를 갈며 내뱉은 한신주는 사나운 시선을 마지막으로 걸음을 돌렸다. 시야에서 사라진 그의 기척은 곧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뭐야, 이건. 무슨 재미난 상황이지, 응?”

남자가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물었다. 권기영은 놈에게 차가운 눈길만 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으로 권기영을 뚫어져라 바라보았지만 굳이 캐묻진 않았다.

뭐 좋아, 놈이 어깨를 으쓱하곤 권기영을 침대에 밀어 눕히며 그 위로 올라탔다. 그리곤 평소와 똑같이 권기영에게 입술을 문지르며 팔 안에 가두듯이 세차게 끌어안았다. 그러나 그 직후 권기영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말았다. 놈이 권기영의 등을 쓸어내리며 천천히 두드리고 있었다. 탁. ……탁.

“뭐 하는 짓이야.”

“음……? 우리 이쁜이가 기분이 아주 단단히 상한 것 같아서 말이지.”

가만있어, 하고 중얼거리며 놈은 권기영을 더욱 바싹 끌어안았다. 탁, 탁, 아이라도 어르는 것처럼 느리게 등을 두드리는 손길이 이어졌다. 권기영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사람 우습게 보는 것도 작작해 둬.”

“우습게 봐? 그럼 이쁜이가 나한테 이래야겠는데. 그러려면 그러든가.”

놈은 별반 화난 빛도 없이 어깨를 으쓱하며 손을 멈추었다. 어이없이 낯을 구기는 권기영을 내려다보며 빙글거리던 놈은, 그것 보라는 듯 코웃음 치더니 다시 등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놈은 미쳤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저 머리통에 뭘 담고 있는지 당최 종잡을 수가 없다. 권기영은 바로 눈앞에 있는 놈의 느슨한 입매를 노려보다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 눈길 끝에 한 치쯤 열려 있는 문이 닿았다. 한신주가 나가면서 미처 덜 닫은 문이다. 아니, 그 문은 언제나 딱 그만큼 열려서 그 너머에 탐욕스럽게 훔쳐보는 눈길을 감추고 있었다. 그것이 오늘은 없다.

“…….”

권기영은 가슴속에 끈끈한 타르가 고이는 듯한 느낌에 눈살을 찌푸렸다. 왠지 뱀처럼 반들거리는 눈동자가 집요하게 들러붙는 기분이 들었다.

* * *

김건준이라는 남자는 사업 수완에 있어서는 틀림없는 기린아였다.

도무지 성공할 수가 없어 보이는 일들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이루어 내곤 하는 그 남자가 내민 서류에서 그 사실을 재삼 확인할 수 있었다.

얼핏 봐도 권리관계가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는 건이었다.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제대로 해결하기만 한다면 막대한 돈이 굴러들어 올 수 있는 건이었고, 거기서 한층 더 상세하게 파고들면 이건 제대로 해결할 방도가 없이 외려 함부로 건드렸다간 크게 손해를 보기 십상이라 애초에 손을 대지 말아야 하는 건이었다.

그런 것을, 이 남자는 ‘예상했던 범위보다 훨씬 더 막대한 돈으로 바꿔 놓았습니다’라는 결과의 서류를 내놓고 있었다. 아마도 며칠 안에 그 개요를 신문에서 다시 볼 수 있을 터였고, 권기영의 아버지가 김건준에게 내걸어서 이미 몇 배로 불어난 투자액은 그 며칠 동안 다시 눈덩이처럼 불어날 거다.

예비사위로서가 아니라 투자를 받은 사업가로서 사무실에 찾아온 김건준을 아버지는 대단히 기꺼운 얼굴로 맞아들였다. 그럴 만도 했다.

“하하, 자네라면 충분히 이 정도는 할 줄 알았지만 그래도 아주 훌륭하게 해냈어. 이번 건은 입찰 자체가 거의 도박이었을 것 같은데 배짱도 두둑하고. 하하하, 덕분에 나는 고맙게 되었군. 이거 내가 아주 크게 내야겠어.”

“아닙니다. 주위 분들이 도와주시지 않으셨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는걸요. 그저 제가 폐를 끼치지는 않게 되어서 다행일 따름입니다.”

미리 짜 놓은 듯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며 권기영은 속으로 냉소를 흘렸다. 사람 좋은 웃음을 늘 얼굴에 달고 사는 저 속 모를 남자야 그렇다 쳐도, 아버지는 정말로 기쁠 터였다. 김건준이 이번 입찰에 뛰어들었다는 소리를 듣고 자료를 받아 본 부친은 ‘아무래도 이번 일은 김 사장이 잘못 손댄 것 같구나. 제법 손해를 크게 보겠어.’ 하고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던 것이다. 그랬던 걸 이렇게나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해냈다.

사람을 건지는 게 가장 남는 장사라고 늘 말하고 다니는 아버지다. 돈보다도, 이렇듯 확고하게 검증된 남자가 자신의 사위가 된다는 사실이 크게 기껍지 않을 리 없었다.

“하하, 내가 정말 사람을 제대로 건졌어. 우리 딸아이 잘 부탁하네. 자네라면 하나 걱정할 것 없이 믿고 맡길 수 있겠어.”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는 아버지에게 김건준은 예의 바르게 웃으며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다.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다고 내심 냉소하던 권기영은 도중에 그 웃음을 흐리고 말았다. 그 연극이 완성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역할인 그 ‘딸아이’가 떠오른 탓이다.

――어쩐지 좀 그래.

누이는 어렴풋한 의혹이 담긴 목소리로 그렇게 속삭였었다.

누이와 어머니가 나누던 대화를 권기영이 듣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려 약을 가지러 아래층으로 내려가는데 주방에서 차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고 있던 모녀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왔던 것이다.

예단은 어떻게 하고, 혼수는 어떻게 하고, 그런 이야기 사이사이에 김건준에 대한 말들이 섞여 나오고 있었다. 사람이 집안이나 배경은 많이 떨어지지만 그 정도로 능력 있고 성품 좋으면 됐다, 그런 말들이 나오던 차였다.

‘얘, 그래도 너 결혼할 때까지 몸 간수는 잘해야 한다.’

문득 어머니가 누이에게 은근하게 못을 박았다. 누이가 대번에 뾰족하게 대꾸했다.

‘엄마는, 날 어떻게 보는 거야. 그리고 그 사람도 전혀 그런 거 없어. 그런 쪽에서는 얼마나 매너가 좋은데.’

‘얘는, 왜 화를 내고 그러니. 믿음직한 사람인 거 엄마도 알아. 알지만 혹시나 하고 당부해 두는 거지.’

걱정 마요, 그런 건, 하고 누이가 딱 잘라 말했다. 그러나 그 뒤로 누이는 뭐가 떠올랐는지 생각에 잠겨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가 차를 마시다가 그런 누이의 기색을 보곤 왜 그러냐고 묻자, 잠시 머뭇거리던 누이는 그냥, 하고 애매하게 입을 열었다.

‘근데 엄마, 그 사람, 밤엔 전화가 안 된다? 잘 때는 아예 꺼 놓고 잔다나 봐.’

‘……, 그럴 수도 있지, 그게 왜.’

누이의 미묘한 어투를 어머니도 금방 알아차린 눈치였다.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누이를 타이르듯이 상대의 역성을 들어 준다.

‘그냥, 사업한다는 사람이 보통은 안 그러잖아. 특이하기도 하고, ……어쩐지 좀 그래.’

‘얘, 괜히 흠잡지 마. 다 그러고 사는 거야. 그만한 사람 없다.’

‘아유, 알아. 그런 말 하려는 거 아냐.’

누이는 괜히 이야기를 꺼냈다는 듯 대꾸하곤 차를 홀짝였다.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말은 했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미묘한 의미를 본인도 알고 있었고, 거기에 뒤늦게 자존심이 상한 눈치였다.

“…….”

권기영은 눈앞에서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김건준의 반듯해 보이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누이는 감이 빠른 여자였다. 저 남자의 속을 어떻게 캐낼 수 있으랴만, 누이의 그 자존심에 저 남자에게 다른 여자라도 있다면 견디지 못할 거다. 심지어 그게 ‘다른’ ‘여자’도 아니라면.

권기영은 무심결에 얼굴이 구겨질 것 같아 의식적으로 표정을 지웠다. 그때 아버지가 권기영에게 말을 돌렸다.

“네 누이가 결혼하고 나면 너도 슬슬 생각해 봐야지. 어디, 마음에 둔 사람은 있고?”

“아……글쎄요, 딱히는…….”

권기영은 애매하게 고개를 기울이고 말았다. 저 정도쯤이면 적당히 서로 제반 조건도 맞고 이해관계에서도 무난하겠다 싶은 집은 서너 군데 짚이는 데가 있었고, 나중에 아버지가 들이밀 혼처도 필경 그중 하나일 것이다.

“쯧쯧, 동갑인 제 사촌도 올해 결혼을 한다는데 급한 줄도 모르고. 김 사장도 어디 좀 괜찮은 자리 있으면 알려 주게.”

어차피 내심으로는 이미 사돈이 될 만한 집을 찍어 놓았을 아버지는 짐짓 혀를 차더니 김건준에게 말을 돌렸고, 김건준은 말없이 웃고 있다가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때 비서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손님이 왔다고 알렸고, 아버지는 저녁에 가까워지는 시각을 확인하곤 김건준에게 시간이 되면 잠시 기다렸다가 저녁이라도 함께 먹자고 당부하고 일어섰다. 그동안 말동무라도 하고 있으라며 권기영을 대신 그곳에 남겨 두고 자리를 뜬다.

아버지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그곳에는 권기영과 김건준만 남았다. 김건준이 웃으며 권기영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마음에 드십니까?”

김건준의 성과를 기록한 그 내용을 떠올린 권기영은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글쎄요……, 제 마음에 들고 말고 할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훌륭한 결과더군요.”

“하하, 권기영 씨가 훌륭하다고 말씀해 주실 정도면 제가 나름대로 괜찮게 성과를 내긴 했나 봅니다.”

놈이 기분 좋게 웃었다. 권기영은 속이 뒤틀려 서류를 툭 내던지듯 내려놓았다.

“밤마다 꼬박꼬박 나다니셔서 일이 한가하신 줄 알았더니 의외로 정신없이 바쁘셨겠습니다, 이걸 보니. ……앞으로도 한동안은 바쁘실 텐데, 밤늦게 외출하는 간격을 적당히 늘이도록 하죠.”

사나흘에 한 번이든 일주일에 한 번이든, 권기영이 말하자 놈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건 제가 필요해서 제안을 한다면 모를까, 기영 씨 입장에서 먼저 제안할 수 있을 일은 아닐 텐데요. 밤에 몇 시간 취미 생활을 즐기는 정도로 일에 부담이 갈 일은 전혀 없으니까 괜찮습니다.”

“누나가 이상하게 여기는 눈치더군요. 김건준 씨가 밤마다 뭘 하느라 전화를 꺼 놓는지.”

권기영이 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김건준이 입을 다물었다. 그 눈치 빠른 여자가 뭘 미심쩍어하고 있을지, 이 눈치 빠른 남자가 짐작하지 못할 리 없었다.

적당히 몸 좀 사리셔야지. 놈을 위한 일인 양 알려 주며 느긋하게 등을 기대는 권기영에게, 이윽고 놈이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까?”

뜻밖일 정도로 선선히 대답한 놈은 여상한 얼굴로 웃었다.

“저는 기영 씨와 만나는 시간을 낮으로 바꿔도 상관없습니다. 기영 씨가 괜찮으시다면 낮에 보도록 하지요. 그 클럽은 낮에는 열지 않으니 호텔 정도가 적당하겠군요. 예전에 주말에 묵었던 그 객실은 어떠셨습니까?”

터무니없는 소리인 줄 알면서도 태연하게 지껄이는 놈을 노려보다가 권기영은 결국 욱하고 치민 말을 내뱉고 말았다.

“어쩔 작정입니까.”

“어쩔 작정이라 하시면……?”

“언제까지 이럴 거냔 말입니다.”

못 알아들었을 리 없는데 모른 척하는 그 천연덕스러운 낯에 권기영은 이를 갈았다.

“앞으로 당신이나 나나 처자식 만들고 처신 따지며 일해 갈 처지에 몇 년 몇십 년 이 짓 할 작정은 아닐 것 아냐. 원하는 게 뭐야.”

권기영은 놈을 무시무시하게 노려보며 나지막이 내쏘았다. 김건준은 웃는 듯 마는 듯 입가를 당긴 채 물끄러미 권기영을 마주 보다가 이윽고 피식 웃었다.

“머리도 좋으신 분이 의외로 기억은 별로이신 모양입니다. 저는 이미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그 썩어 빠진 집안에서 탐낼 만한 게 뭐가 있는지.”

――당신 말고.

언젠가 들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번개를 맞은 듯 표정을 지운 권기영을 가느스름한 눈으로 살피던 김건준은 느슨하게 웃는다.

“처자식이라……, 그럴 수 있을까요, 기영 씨가?”

“…―.”

“간단한 수술이 하나 있습니다.”

갑자기 난데없는 말을 꺼내는 그에게, 권기영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음경과 고환 사이에 이어져 있는 신경 하나를 끊으면 성기 자체의 자극만으로는 발기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자극에 대한 반응 자체는 멀쩡하기 때문에 전립선을 자극하면 발기할 수 있지요. ――즉 다시 말해, 항문에 남근이든 뭐든 박아 줘야만 물건이 선다는 뜻입니다.”

권기영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 놈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머리보다 먼저 심장이 이해한다. 가슴속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렇게 되면 부인과 잠자리를 할 때마다 본인의 구멍도 쑤셔 줘야 할 텐데, 참 재미난 꼴일 겁니다. 이해심 많은 부인을 만나셔야겠군요.”

물론 그렇게 된다 해도 저와의 관계는 그대로일 겁니다, 하고 놈이 웃었다.

권기영은 창백한 눈으로 놈을 노려보았다. 단단히 다문 턱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 남자는 미쳤다. 제정신이 아니다. 놈은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쓴 끔찍한 무언가였다.

그래서 놈이 “그냥 해 본 말입니다.”라고 가볍게 말하며 빙긋 웃었을 때, 그 웃음조차 귀밑까지 찢어진 악마의 웃음으로 보였다.

“아직 그런 것까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는 없겠지요. 그런 건 차차 두고 보도록 하고……, 좋은 분 생기면 알려 주십시오.”

소파에 기대며 여유롭게 말하는 놈을 권기영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그런 권기영에게 놈이 손을 내밀며 소리를 낮춘다.

“이리 오십시오.”

권기영은 길고 마디가 굵은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기계적인 발길이 한 걸음 놈에게 다가가자 놈의 입술이 휘었다. 한 걸음 더 다가가 손이 닿은 순간 놈이 나직한 웃음을 터뜨리며 권기영을 잡아끌었다.

소파 등에 손을 짚고 선 권기영의 목을 당겨 입을 맞추며 놈은 끈적한 혀를 거침없이 밀어 넣었다.

“기영 형, 제 말 들으세요.”

들릴락 말락 낮게 쉰 목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권기영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제 말만 듣는다면 기영 형이 해를 입을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까요.”

놈의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다시 입속으로 파고드는 축축한 혀를 삼키며, 권기영은 등줄기가 차가워졌다.

언제 열릴지 모를 응접실 문 앞에서 놈은 여유롭게 권기영의 입안을 탐닉한다. 그리고 권기영은 깨달았다. 놈은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다. 그래도 상관없는 것이다. 누이에게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놈의 숨결이 몹시 뜨거웠다. 그것은 결코 가시지 않을 것 같았다.

* * *

두 시에서 세 시 사이. 놈이 몸을 추스르고 일어서는 시각은 조금씩 차이가 있었지만 대개 그 사이였다.

마지막 사정을 마치고도 한동안 그대로 파고들어 있던 놈이 이윽고 만족스런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을 때, 권기영은 놈의 어깨너머로 두 시를 조금 넘기고 있는 시계를 보았다.

“이제 우리 이쁜이도 남자한테 안기는 기쁨을 완전히 알게 된 모양이야, 제법 그럴싸하게 울어 대면서 허리 놀리는 걸 보면.”

“…―.”

아랫도리를 앞뒤로 흔들어 조금씩 성기를 끌어내며 키득거리는 놈에게 권기영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속을 빡빡하게 벌리며 채웠던 물건이 미끌거리며 빠져나가자 낯이 절로 일그러졌다.

권기영의 몸속에서 성기를 완전히 끌어낸 놈은 그 틈새로 왈칵 터져 나와 끈끈하게 흘러나오는 정액을 엉덩이에 덧바르며 철썩 후려쳤다. 권기영이 이를 악물며 움찔하자 킬킬 웃으며 유두를 꼬집는다.

“더 빨아 주세요, 더 쑤셔 주세요, 예쁘게 보채기도 해 보지, 어?”

“미친 새끼.”

저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린 뒤에야 권기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차라리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고 있었어야 하는데, 이러고 나면 이 비틀린 놈은 무슨 끔찍한 수를 써서라도 제가 원하는 대로 해야 직성을 풀곤 했다.

그러나 놈은 다행히도 피식 웃고는 권기영의 엉덩이만 한 대 더 후려쳤을 뿐이다.

“말 좀 순순히 들으면, 어? 어련히 알아서 잘 안 해 줄까 봐. 뭐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보자고.”

시계를 본 놈은 몸을 구부려 권기영에게 입을 맞추었다. 입속을 핥으며 빨아먹는 그 입맞춤이 늘 마지막 순서다. 권기영이 오늘도 끝났다고 생각하며 순순히 입을 열어 주자 놈이 입속으로 웃는다.

이윽고 놈이 “그럼 내일 봐, 이쁜이. 오늘도 즐거웠어.”라는 말을 남기고 방에서 나갔다. 철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홀로 남은 권기영은 그제야 몸에서 힘을 풀었다.

허리 아래로 감각이 없었다. 잠시만 누워 있으면 그럭저럭 평소처럼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한참 쉬고도 다리를 질질 끌었던 데에 비하면 훨씬 나아진 셈이다.

……빌어먹을.

이따위 짓거리에 익숙해진 게 뭐가 나은 일이라고.

권기영은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벌떡 일어났다. 허리가 욱신거렸지만 억지로 버티고 앉는다.

“…….”

놈은 요즘 기분이 썩 좋아 보였다. 하긴 나쁠 일이 뭐 있을까. 사업은 번창하고 있고 주위의 평판은 좋다. 제멋대로 못 하는 일이 없었고 무슨 꺼림칙한 일이든 본인이 아랑곳 않는다면 애초에 약점이 될 수도 없었다.

오늘도 어제도 그전에도, 놈은 줄곧 즐겁고 유쾌하게 권기영을 갖고 놀았다. 고양이 쥐 생각해 주듯 제법 상냥한 척까지 하면서.

그래, 상냥한 척이다.

――이 정도는 안 아프잖아. 안 그래?

――왜, 힘든가 보지? 좀 더 벌린 뒤에 넣어 줄까, 이쁜이?

――숨 쉬어. ……숨 쉬어! 그래, 그렇게. 천천히. ……괜찮아. 자……, 그래, 그러면 돼. 괜찮아.

킬킬거리면서, 사납게 을러대면서, 무섭도록 진지하게, 놈은 상냥한 척을 하고 있었다. 마치 원래 그런 인간인 양.

생각해 보면 권기영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최초의 김건준은 그런 인간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겉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알고 보면 반듯하고 다정한 소년이었다. 그리고 그게 흥미를 끌었기 때문에 권기영은 소년을 보았었다.

제법 오래도록. 왜 보는지도 모르고.

“빌어먹을…….”

정신 차려, 권기영.

차라리 이대로 되는 대로 흘러가도 되지 않을까, ――그런 못난 생각은 하는 게 아니다.

이 이상 더 나빠질 일도 없을 텐데, 놈이 제법 다정한 낯을 하고 있는데, 이대로만 간다면 그냥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 몰라, 어차피 지금 당장 어떤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그것은 남의 발아래 빌빌대는 형편없는 놈들이나 하는 변명이야.

권기영은 묵직한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수십 가지의 생각들이 한꺼번에 교차하고 있다. ……이대로. ……아니 그럴 수는.

권기영은 갑자기 짜증이 일어서 혀를 찼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나중에 생각하자고 결정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지만 걸을 만은 했고 정액 냄새가 자욱하게 밴 이 방에 더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놈은 돌아갔을 테니 다시 얼굴 마주칠 일도 없겠지, 권기영은 시계로 시선을 주곤 걸음을 옮겼다. 자신도 적당히 물로 씻어 내고 돌아가야…….

막 문을 열고 나서던 권기영은, 그러나 이내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눈앞에 한 인영이 그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을까, 어둑한 복도에서 벽에 바싹 붙어 서 있던 작달막한 인영이 권기영의 앞을 막아섰다. 움칫 눈살을 찌푸리며 멈춰 선 권기영은, 다가선 사람을 확인하곤 더욱 미간을 찡그렸다.

한신주가 인형처럼 우두커니 서서 권기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무슨 볼일――.”

눈살을 찌푸린 권기영이 짜증스럽게 입을 열었을 때였다. 뚫어져라 권기영을 쳐다보던 한신주의 눈이 벌어지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

허리에 쿵 하고 세게 부딪치는 충격과 동시에 몸속을 단숨에 태워 버리는 듯한 전격이 온몸에 퍼졌다.

순간 숨이 막혔다.

파지직거리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듯했다.

권기영은 벌어진 입으로 아무 소리도 뱉지 못하고 눈만 부릅뜨고서 한신주를 바라보았다. 한신주가 흥분에 가득 차 번들거리는 눈으로 권기영을 보며 웃고 있었다.

‘됐어, 어서.’, 뒤에서 누군가 속삭이는 낯선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권기영은 의식을 잃었다.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 몸부림을 치려고 해도 가위눌린 것처럼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윽……!”

권기영은 꿈쩍도 않는 몸으로 요동을 치다가 번뜩 눈을 떴다.

겨우 가위에서 풀려난 몸은 이제 자유로워야 할 텐데도, 눈을 떠 의식을 찾아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권기영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부릅떴다.

낯설지만 낯익은 시멘트 천장이 보였다. 클럽의 그 벌집 같은 방이다. 시멘트가 그대로 드러난 벽도, 등 뒤로 느껴지는 싸구려 스프링 침대도, 살풍경한 방 안도, 권기영이 밤마다 찾아드는 방과 똑같았다. 환풍구의 위치만 달라서 바로 그 방은 아니라는 걸 알겠다.

“일어났어?”

아래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권기영은 자신의 아랫도리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한신주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아니, 한신주만이 아니다. 한 걸음 옆에서 덩치 큰 남자 하나도 의자에 걸터앉아 그들을 보며 성기를 흔들어 대고 있었다.

“너……,”

권기영은 벌떡 일어나려다 멈췄다. 멈출 수밖에 없는 게, 침대 머리맡에 두 손이 박스 테이프로 묶여 있었다. 다리 역시 한쪽이 묶여, 사지 중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건 오른 다리밖에 없었다.

이 방 안에 있는 자들은 모두 알몸이었다. 권기영도, 한신주도, 저 남자도.

“여전히 맛있네, 기영 씨 거. 냄새도 여전하고. ……아아, 좋아…….”

권기영의 사타구니에 얼굴을 박고서 핥고 있던 한신주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붉게 달아오른 눈매가 흐려졌다.

“미친 게 아니면 당장 비키고 풀어.”

권기영은 싸늘하게 한신주를 노려보며 내뱉었다. 한신주는 가느스름하게 웃더니 뱀처럼 몸을 바싹 붙이고 기어올랐다.

“기영 씨가 나더러 늘 그랬잖아? 섹스에 미쳤다고. 그런데 내가 왜?”

“그래서, 섹스 한 번 하고 목숨 내놓으려고?”

권기영이 입술을 비틀자 한신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우, 무서워라. 그러지 마, 기영 씨. 기영 씨 화내면 나 무서워하는 거 알잖아?”

깔깔거리며 웃은 한신주는 권기영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혀로 그 위를 덧그렸다. 몸을 일으켜 권기영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는가 싶던 그는 반쯤 일어서 있는 권기영의 성기를 황홀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떨리는 숨결이 새어 나온다.

“알지, 내가 기영 씨를 모르겠어? 다 알지, 기영 씨 성질도, 힘도, 그리고 이게 얼마나 맛있는지도.”

권기영의 성기를 살짝살짝 쓰다듬던 한신주는 조급해진 듯 입술을 핥더니 몸을 들었다. 스스로 엉덩이를 벌리며 권기영의 성기 위에 올라앉아 허리를 내리려 한, 그때.

“――악!!”

콰당탕, 커다란 소리와 함께 한신주는 침대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벽까지 나가떨어져 나뒹굴며 신음을 흘리는 한신주의 앞에서, 자유로운 다리로 놈을 거침없이 걷어찬 권기영이 이를 드러냈다.

“내 성질 다 안다……? 그럼 네가 지금 정신이 나갔나 보군. 이 미친년아, 여태까지 널 그냥 둔 게 네가 예뻐서인 줄 알아? ――크윽,”

“이 새끼가 얌전히 안 있고, 이 새끼가, 이게!!”

그때,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가 놀란 듯 벌떡 일어나더니 권기영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휘둘렀다. 두 번, 세 번 얼굴을 후려갈기면서 남자가 욕설을 퍼붓는다. 권기영은 놈을 노려보았다. 후드를 뒤집어쓴 놈의 턱이며 귀 모양 따위를 눈에 새기며 입안에 찬 핏물을 뱉어 낸다.

“아하, 네가 아까 나한테 스턴건 휘두른 놈이구나. 이 불쌍한 얼간아. 네 인생이 얼마나 불쌍해질지 어디 보자고.”

“어쭈, 이게 입은 살아서……! 내 인생 걱정하기 전에 네 인생이나 걱정해, 씨발아. 이놈 다음엔 내 차례니까.”

남자가 권기영의 뺨을 후려치곤 자신의 성기를 주물렀다.

“안 그래도 꼴리던 참인데 얼마나 잘 빠는지부터 볼까. 씨발아, 입 벌려. 네 목구멍부터 쑤셔 줄 테니.”

그가 발기한 성기를 권기영의 얼굴에 들이댈 때였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한신주가 비척비척 다가오며 “그만두는 게 좋을걸.” 하고 말했다.

“물어뜯길 거라구.”

“흥, 그럼 이놈은 내 손에 죽는 거지.”

“고자 되고 나서? 그 사람이라면 진짜로 물어뜯어.”

그래도 상관없다면 해 보든가, 하고 한신주가 말하자 남자는 권기영과 한신주를 번갈아 보았다. 호기롭게 소리치긴 했지만 내심 걱정이 되었는지 우물쭈물하다가 칫, 하고 혀를 차며 물러섰다.

“뭐, 됐어. 위만 쑤실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얼른 해.”

아쉬운 듯 아래를 주물거리며 소리치는 남자의 말을 들으며 권기영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놈들이 지금――.

그러나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신주가 권기영의 사타구니 위에 올라가 서슴없이 권기영의 성기를 자신의 엉덩이 사이에 맞추고 주저앉았다. 묵직한 무게가 단숨에 허리 위를 내리눌렀다.

“…―!!”

권기영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권기영의 성기가 파고들자마자 한신주가 자지러지는 신음을 낮게 토하며 몸을 떨었다. 세게 수축하는 내벽이 권기영의 성기를 조였다. 한신주의 성기 끝에서는 투명한 물이 줄줄 새어 나오고 있었고, 바르르 떨리는 눈동자는 넋을 잃은 듯 희번덕거렸다.

사타구니의 감각에만 온 신경이 쏠린 사람처럼 아아, 아아, 한숨 같은 신음을 흘리며 엉덩이를 흔들어 대는 모습은 이미 권기영이 알던 한신주가 아니었다. 권기영의 성기를 조이는 내벽의 느낌조차, 대체 여태 거기에 뭘 얼마나 넣었던 건지 헐렁헐렁하게 풀려 있었다. 더는 써먹지도 못할 몸에 육욕만 남은 늙어빠진 창부처럼.

――이런 놈 따위가. 이런 놈 따위와 몸을 섞고 있다니.

권기영은 허, 어이없이 헛웃음을 웃었다. 불길 같은 울화가 치밀었다.

“정신 제대로 나갔군. 그래, 그러잖아도 네 목을 딸 순서가 언제쯤 올까 하던 참인데, 먼저 알아서 이렇게 새치기를 해 줬단 말이지. 아주 잘했어, 한신주.”

권기영은 자신의 성기를 꽂고 앉아 정신없이 허릿짓을 하는 한신주를 경멸스럽게 쳐다보며 이를 드러내었다. 그때 한신주가 권기영을 내려다보았다. 반쯤 풀린 눈이 기묘하게 번들거리는가 싶더니, 한신주가 귀신처럼 웃으며 코웃음 쳤다.

“흥……, 그래, 기영 씨는 늘 날 그런 눈으로 내려다봤지. 무슨 벌레를 보는 것처럼. ……하아, ……하악.”

한신주가 움찔하더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성기에서 물방울이 투두둑 떨어졌다. 이미 몇 번이나 제풀에 사정을 했었는지 투명한 물이 힘없이 조금 흐르다 마는데도 한신주는 한참을 움찔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 그래도 당신이 제일 근사한 수컷이었거든. 당신보다 더 나은 수컷 따위는 세상에 절대로 없을 거라고 믿었어.”

한신주가 무릎으로 일어났다. 이제는 벌어진 채 닫히지도 않는 항문에서 주르륵 빠져나온 권기영의 성기를 붙들고 탐나는 듯이 핥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를걸. 세상에 저 남자가, 저 강하고 오만한 권기영이 남자를 받다니. ……하,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알아? 저 권기영이, 그렇게 울부짖으며 허리를 흔들 줄은.”

“잘도 지껄이는군.”

이따위 천박한 놈에게 이런 말을 듣고 있다니. 권기영이 부득 악문 잇새로 내뱉자 한신주가 킥킥거렸다. 권기영의 성기를 할짝이며 몸을 엎드린 한신주는 그의 무릎에 자신의 성기를 문지르면서 왜, 하고 사납게 중얼거린다.

“벌레만도 못하게 여겼던 갈보한테 이런 말을 들으니 화가 나나 보지?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지? 그래, 그런데 이건 모두 기영 씨 탓이라구.”

한신주가 갑자기 권기영의 발목을 움켜쥐더니 무릎을 세우며 옆으로 벌렸다. 권기영이 반사적으로 놈을 걷어차려 하자, 옆에서 빈틈없이 주시하고 있던 남자가 재빨리 다가와 온 힘을 다해 권기영의 허벅지를 붙든다.

권기영의 다리가 벌어지며 사타구니 사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곳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던 한신주의 눈이 반들거리기 시작했다.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는 그의 거친 숨결이 고환 아래에 닿는다.

권기영의 낯빛이 싸늘하게 굳었다.

“뭐 하자는 짓거리야……!”

“나 정말로 당신을 좋아하나 봐, 기영 씨. 당신을 보면서 얼마나 쌌는지 몰라. 밤마다 당신이 그 남자한테 당하는 걸 보면서, 당신이 울부짖으며 요동치는 걸 보면서, 당신이 눈을 하얗게 뜨고 줄줄 싸면서 기절하는 걸 보면서, 난 내가 박혀서 쌀 때보다 훨씬 더 소름 끼치게 황홀한 기분으로 쌌단 말이야. 그래, 내 인생에서 여태 겪었던 그 어떤 오르가슴보다 더 격렬하게.”

권기영의 성기를 쓸어내리는 한신주의 목소리가 떨렸다. 음경에서 고환, 회음으로 타고 내려가며 쓰다듬다가 권기영의 닫혀 있는 주름에서 손을 멈춘 그는, 다음 순간 그 주름 속으로 거침없이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

움찔, 권기영의 몸이 튀었다. 권기영은 경악으로 눈을 부릅떴다. 일순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런 놈이. 이런 벌레 같은 놈 따위가. 이런――.

“그러다 보니까 견딜 수가 없어지더란 말야. 비록 내가 박는 것보다 박히는 걸 훨씬 좋아하긴 하지만, 이건 상황이 다르잖아. 그냥 보기만 해도 그렇게 황홀한데,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기영 씨한테 박으면서 기영 씨의 그런 모습들을 바로 눈앞에서 보면 얼마나, 대체 어떤, 어느 정도의 쾌감일까. 상상만으로도 몸이 벌벌 떨리면서 아랫도리가 다 젖는데, 아무리 그 무시무시한 남자가 다시는 기영 씨한테 말 걸지 말고 가까이 가지도 말라고 못 박았었다지만, 어떻게 참을 수 있겠어.”

낮게 신음하며 헐떡거리는 한신주의 말은 거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권기영은 푸르스름하게 굳어 버린 얼굴로 한신주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당장 그만둬. 너 하나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네 부모, 형, 동생, 다 네 눈앞에서 산 채로 난도질당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당장 그만둬, 한신주.”

“얼마든지 죽으라지, 그런 작자들.”

한신주의 뱀 같은 눈이 웃었다.

권기영의 몸속을 느리게 뒤적이던 손가락이 갑자기 거칠게 흔들렸다. 눈동자가 튀어나올 것처럼 눈을 부릅뜬 권기영의 입에 한신주가 시트를 찢은 천 조각을 욱여넣었다. 더는 말할 필요 없어, 하고 내뱉으며 권기영의 다리 사이로 무릎걸음으로 다가서는 한신주의 성기가 바싹 곧추서 흔들거리고 있었다.

“나한테 박히면서도 기영 씨는 싸겠지, 응?”

한신주가 헐떡거리며 몸을 기울였다.

순간 권기영은 틀어막힌 입으로 뜻 모를 고함을 내지르며 날뛰었다. 침대가 통째로 흔들리며 덜컹거렸다. 질긴 박스테이프가 조금만 더 하면 끊어질 듯 늘어져, 피가 통하지 않도록 손목을 파고든다.

남자가 허겁지겁 권기영의 어깨를 눌렀지만 미친 듯이 날뛰는 그를 누르기엔 역부족이라 팔꿈치에, 무릎에 호되게 얻어맞고 튕겨 나갔다.

“씨발, 이게……!”

“으, 커흑……, 억……!!”

권기영에게 다가서지도 못하고 움찔거리던 남자가 의자를 집어 들었다. 손이 닿을 거리까지는 다가가지도 못하고 부들거리면서 남자는 권기영을 의자로 마구잡이로 내리쳤고, 권기영은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무시무시하게 포효하며 날뛰다가 온몸에 피멍이 들어 멀쩡한 곳이 남지 않았을 즈음에야 겨우 늘어졌다.

“씨, 씨발 새끼, 내 차례만 돼 봐라, 구멍이 너덜거리도록 박아 줄 줄 알아.”

남자는 벌벌 떨면서 욕설을 내뱉은 뒤 한신주에게 얼른 하라고 고갯짓을 했다. 한신주는 발기가 가라앉지 않고 도리어 점점 더 흥분되는 것처럼 가슴을 들썩이며 헐떡거리고 있었다. 남자가 온 힘을 다해 권기영의 허벅지를 붙들어 벌리자, 한신주가 그 사이로 들어서 자신의 성기를 권기영의 사타구니에 대었다.

권기영이 천장을 노려보며 이가 으스러질 듯 턱을 악물었다.

그리고.

한신주의 성기가 막 권기영의 주름을 밀어젖히려고 한 때.

콰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잠겨 있던 철문의 자물쇠가 떨어져 나가며 거칠게 열린 문이 벽에 부딪힌 반동으로 기울어졌다. 뒤이어 저벅, 구두 소리가 삭막한 방 안에 울린다.

“어쩐지 오늘따라 나올 때가 한참 지났는데도 안 나온다 싶더니…….”

나직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몹시 낯설었다.

그것은 틀림없이 권기영이 잘 알고 있는 목소리였는데도 소름끼치게 낯설어, 권기영은 그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거기에는 낯익은 얼굴이 서 있었다. 김건준이다. 장례식에라도 찾아온 것처럼 온통 시커먼 정장을 멀끔하게 갖춰 입은 김건준이 비스듬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주머니에 손을 꽂고 서 있었다.

분명 낯익은 그 얼굴마저 유난히 낯설게 보이는 이유를 권기영은 그다음 순간에야 알아차렸다.

얼굴.

이 클럽 안에서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구질구질한 후드도, 나신에 가까운 가죽옷도 아닌 드러난 얼굴에 멀끔한 양복.

그런 것 따위를 다시 뒤집어쓸 겨를도 없이 들이닥친 것처럼 그는 바깥에서 보아 온 모습으로 거기에 서 있었다.

뒤늦게 누군가 쫓아오는 기척이 가까워지더니, 전실에서만 보았던 매니저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장님, 아무리 그래도 내부에서는 규칙을,” 하고 말을 퍼붓던 매니저는 그가 힐끗 눈동자만 돌려 바라보자 움찔 입을 다물었다.

다시 시선을 돌려 그들을 바라보는 그는, 웃음기만 없을 뿐 평소의 김건준과 같은 평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직껏 엉거주춤하게 의자를 쥐고 있는 남자와 창백해진 얼굴을 무섭게 굳히고 있는 권기영을 차례로 바라본 그는 마지막으로 하얀 낯빛을 한 한신주에게서 시선을 멈추었다.

표정 없이 물끄러미 한신주를 바라보던 그가 이윽고 웃는 듯 마는 듯 입매를 올렸다.

“여기에 자유로이 드나들어도 좋다고 하면서, 내가 분명히 조건을 걸었을 텐데.”

한신주가 움칫 어깨를 떨었다. “한 번 눈감아 줬으면 눈치껏 처신을 잘해야지, 응?” 하고 상냥하게 속삭인 김건준은 눈매를 휘며 아주 다정하게 웃었다.

침대 쪽으로 다가서던 김건준이 남자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그때까지 의자를 쥐고 주위를 살피며 눈을 희번덕거리고 있던 남자가 움찔하며 물러섰다. 김건준이 눈으로 의자를 가리키며 손을 내밀자 남자는 눈치를 살피다가 머뭇머뭇 의자를 건넸다. 그 의자를 받아든 순간 김건준은 남자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깡, 쇳소리가 나며 철제 의자의 철골이 움푹 꺼졌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나뒹구는 남자의 위로 김건준은 거침없이 의자를 내리찍었고, 남자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의자를 내던지고 다시 걸음을 옮긴 김건준은 침대 옆에서 멈춰 섰다. 여느 때처럼 여유로운 얼굴이 권기영을 내려다본다.

권기영은 놈을 무시무시하게 노려보았다.

지옥 밑바닥도 이 상황보다는 나을 것이다. 이렇게 비참한 몰골을 놈에게 보이다니. 이 끔찍한……굴욕.

김건준이 말없이 손을 뻗었다. 권기영의 입에서 천을 빼 주려는 모양이었지만 권기영은 이를 악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김건준은 잠시 침묵하다 픽 웃곤 도로 손을 거두었다.

그는 침대에 묶인 권기영이 날뛰는 동안 더욱 질기게 늘어진 박스테이프를 움켜쥐고 잡아당겼다. 뚝, 힘을 이기지 못하고 테이프가 끊어졌다. 피가 안 통할 정도로 세게 손목에 파고든 테이프를 마저 풀어 준다. 두 팔과 한쪽 다리의 테이프를 모두 그렇게 없앨 때까지 김건준은 침묵을 지켰고, 한 손이 자유로워지자마자 입의 천조각을 거칠게 빼낸 권기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빌어먹을. 이런 꼴을 놈에게 보이다니. 하필이면 놈에게.

그 굴욕감을 드러내는 것이 더욱 속이 뒤틀려, 권기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장만 노려보았다.

필경 이 꼴을 비웃으며 정중한 말투로 비아냥거릴 터인 놈은,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얗게 관절이 튀어나와 가늘게 떨리는 권기영의 주먹으로 잠시 시선을 떨어뜨린 김건준은 고개를 돌렸다. 그때까지 권기영의 다리 사이에 바싹 들어서 성기를 드러내고 있던 한신주에게 시선을 준다.

“너는 뭐야.”

“……?”

“네가 뭐냐고.”

한신주가 대답을 못 하자 조용한 물음을 던진 김건준이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담담하게 웃었다.

“네가 사람 새끼가 맞냐고 묻고 있잖아.”

“…―.”

“이 사람이 네게 해 준 걸 꼽아 볼까. 돈, 시계, 차, 네 머리부터 발끝까지 돈으로 바른 것들은 차치하고서라도, 네가 애교 좀 부리고 응석 좀 부리면 웬만한 부탁들은 다 들어줬겠지. 원래라면 네가 구경도 할 수 없었을 이런 클럽에 온 것처럼. 골치 아픈 일이나 소위 빽을 써야 하는 일이 생겼을 때에도 도와줬을 거야. 안 그래?”

마치 뒷조사라도 했던 것처럼 상세하게 늘어놓는 김건준은 부드럽게 말을 건네고 있었는데도 한신주는 창백하게 질려 대답을 못했다.

“짐승도 저를 예뻐해 준 주인을 물지는 않는데 말이야.”

김건준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손을 뻗었다. 천천히, 커다란 손이 한신주의 목으로 다가가는 걸 보며 한신주의 낯빛이 새하얘졌다. 그 손이 목을 움켜쥐기 직전,

“병신 취급하지 마라.”

권기영이 악문 잇새로 내뱉었다. 김건준이 손을 멈추며 권기영에게 눈동자를 돌렸다.

“내가, 네 손을 빌리지 않으면 빚을 갚아 주지도 못할 병신으로 보이나 보지. 어쭙잖게 날 돕겠다는 심산이라면 집어치워. 네놈이 나서지 마. 이건 내 일이니까 너는 그놈 건드리지 마.”

김건준은 희미하게 웃는 얼굴 그대로 권기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가 낮은 헛웃음을 웃었다.

“기영 씨 돕는 거 아닙니다.”

“…―.”

“기영 씨 나름대로 그 빚 얼마든지 갚으십시오. 저는 기영 씨가 이 청년한테 무슨 짓을 하든 전혀 방해할 생각은 없습니다. 기영 씨 일이니까요. ――그러니까 기영 씨도 제 일을 방해하지 마십시오. 이 청년은 저와 따져 봐야 할 일도 있거든요.”

허공에서 멈추었던 김건준의 손이 다시 움직인 순간 한신주가 움찔 고개를 움츠렸다. 그러나 김건준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 손으로 한신주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 떨어질 뿐이었다.

“저와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았고, 제 것을 넘봤으며, 저를 기만했습니다. 모두 제가 아주 싫어하는 일들이지요. 그러니까 이건 제 문제입니다. 아니면, 이 청년을 제가 건드리는 게 싫어서 그러십니까?”

권기영은 하, 헛웃음을 웃으며 김건준을 노려보기만 했다. 김건준은 더 이상 권기영과 할 이야기는 끝났다는 듯 부들부들 떨고 있는 한신주에게로 아예 몸을 틀어 버렸다.

“왜 그래, 무서워?”

“…….”

“무서운 일이 생길 것 같긴 한가 보지.”

김건준은 한신주의 머리에서 떨어진 손을 시선과 함께 천천히 내렸다.

“제대로 훈련이 안 된 개 같군. 나중에 혼날 줄은 알면서 당장 눈앞에 욕심나는 게 있으면 달려들고 마는 게. 하지만 그런 짐승도 최소한으로 지킬 건 지키는데…….”

김건준이, 어느새 풀이 죽어 늘어져 있던 한신주의 작달막한 성기를 움켜쥐었다. 한신주가 허리를 꺾으며 비명을 질렀다.

“너는 금수만도 못한 놈이 왜 사람 사이에 섞여 있어.”

김건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목소리야말로 인간이 아닌 섬뜩한 짐승 같다.

비명을 지르며 울음을 터뜨리는 한신주의 성기를 한 번 꽈악 움켜쥔 뒤에야 그것을 놓은 김건준은 사타구니를 잡고 경련하는 한신주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짐승은 짐승답게 살아야지. ――종혁이 불러와.”

김건준이 매니저에게 시선을 던졌다. 매니저는 일순 흠칫했지만 이내 씻은 듯 표정을 지우고 품에서 무전기를 꺼내며 밖으로 나갔다.

김건준은 바닥에 나뒹굴고 있던 철제 의자를 끌어와 앉으며 권기영을 돌아보았다.

“저나 이 청년이나 기영 씨에게 고맙다고 해야겠습니다. 아까 무심결에 목을 꺾어 버릴 참이었는데, 기영 씨가 말려 주시지 않았더라면 참혹한 짓을 벌일 뻔했어요.”

“…―.”

“그렇게 떨 것 없어. 죽을 위기는 지났으니까.”

벌벌 떨고 있는 한신주에게 평연하게 말을 던지는 김건준을 보며, 권기영은 헛웃음을 웃었다.

이제 저 매니저가 부르러 갔을 그 누군가가 오면 린치가 시작될 터였다.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린치를 권기영은 이 자리에서 당장 여남은 가지라도 댈 수 있었다. 그쯤은 알 한신주도 새파랗게 질려 겁먹은 눈으로 권기영을 보았다. 달싹거리는 입술이 도와달라고 호소한다.

권기영은 코웃음을 쳤다. 한신주를 돕다니 설마. 저놈은 김건준의 린치가 끝나는 대로 그다음엔 권기영의 손에 뼈 마디마디를 죄 꺾이게 될 것이다.

“오늘은 아무래도 여기서 밤을 새워야겠군요. 기영 씨는 제 볼일이 끝날 때까지 눈 좀 붙이셔도 됩니다. 먼저 돌아가셔도 좋고요.”

“아니, 기다리는 게 낫겠어. 빚을 오래 끄는 건 성미에 안 맞거든.”

너랑은 다르게 말이지, 말 속에 덧붙어 있는 말을 김건준도 알아들었는지 피식 웃었다.

“저도 기본적으로는 같습니다. 다만 목적에 따라 아주 오래 기다리는 것도 즐거이 감내할 수 있을 뿐이지요.”

목적. ――그래, 목적.

권기영의 앞에 다시 나타나기까지 아주 오래 기다려 왔을 놈의 목적. 그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은 여전히 명확하지 않은 상태로 머무르고 있었다.

권기영이 막 김건준에게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그가 입을 열기보다 먼저, 밖에서 소란스런 기척이 다가왔다.

“왔군요.”

김건준이 감흥 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곧 문이 열리며 들어오는 자들을 본 순간 권기영은 미심쩍게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에 무전기를 들고 나갔던 매니저와 함께 모자를 쓴 낯선 남자가 들어왔다. 그리고 김건준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는 그 남자의 손에 목줄을 끌려 뒤따라 들어오는 개가 한 마리.

어마어마한 덩치의 투견이었다. 웬만한 사람보다도 무게가 더 나갈 듯한 거대한 근육질의 맹수.

불안한 눈치로 그들을 보던 한신주가 더럭 낯빛을 굳혔다. 새파랗게 얼어붙는 한신주를 보고 김건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 보니 원래 눈치는 빨랐지. 어때, 마음에 드나? 페니스의 길이도 굵기도 어지간한 성인 남자보다 나으니까, 아마 네 늘어진 구멍에도 잘 맞을걸.”

그 말이 떨어진 순간, 의아하게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권기영 역시 찬물을 뒤집어쓴 듯 표정을 지웠다. 믿기지 않는 눈이 개를, 한신주를, 이어 김건준을 본다.

“아, 안, 안 돼, 제바, 제, 제발, 그, ……흐으윽…….”

한신주가 공포에 질린 눈으로 개를 바라보며 벽까지 뒷걸음질쳤다. 조련사가 목줄을 쥐고 있는 개는 약이라도 맞고 온 것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는데, 본능이 알려 주기라도 하는 양 시뻘건 눈으로 한신주를 응시하고 있었다.

“너……, 뭐 하자는 거야.”

질린 목소리로 말한 건 권기영이었다. 김건준은 “이런 건 본 적 없으십니까?”라고 태연하게 되물었다.

김건준이 한신주에게 던진 말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분명하게 알려 주고 있었다.

권기영 역시 그런 일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그런 걸 보며 즐긴다는 악취미인 놈도 한둘 알고 있었다. 변태 새끼, 하고 대수롭잖게 비웃으며 어차피 남의 취미라고 태연하게 넘겼던 권기영이었지만, 이건 다르다.

“그래, 아는 얼굴이 강제로 당하는 건 본 적 없어. 역겨운 짓 집어치워.”

김건준은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그걸 보고 권기영은 자신에게 명령할 권리가 없고 그가 따를 이유도 없다는 걸 깨달았고, 또한 눈앞에서 결국 벌어지고야 말 상황을 떠올릴 수 있었다.

“역겹다라……. 그럼 앞으로 기영 씨는 저 청년을 다시 볼 일은 없겠습니다. 오늘 이후로 그는 평생 사람이랑은 뒹굴지 못할 텐데요.”

“평생…….”

“오늘 하루로 끝날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저는 그렇게 마음이 너그럽지는 않습니다.”

권기영은 담담하게 웃는 김건준을 바라보며 천천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가슴속이 싸늘해졌다.

공포에 질려 히끅거리며 벽 구석에 웅크리고 앉은 한신주에게 개가 어슬렁거리며 다가가 냄새를 맡았다. 길쭉하게 비어져 나온 이빨은 그대로 그 작은 몸뚱이를 물어뜯을 것 같았다.

김건준이 눈짓하자 조련사가 다가가 싫다고 비명을 지르는 한신주를 잡아 눌렀다. 그가 주머니에서 꺼낸 약을 한신주의 항문 주위에 바르자, 돌연 개가 흥분한 듯 빠른 걸음으로 이리저리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조련사가 물러서는 그 순간 덤벼들 듯 크르르 목까지 울리기 시작한 개의 성기가 빨갛게 부푼다.

“이걸로 발정기의 냄새를 풀풀 풍기는 암캐도 준비됐군요.”

“역겨운 짓 치우라고 했잖아, 이게 무슨 구역질 나는 짓이야. 평생 저 역겨운 짓거리를 하라고? 차라리 평생 병신으로 사는 게 낫지.”

권기영은 사납게 내뱉었다. 차라리 뼈마디마다 분질러 버리든 관절을 모조리 부숴 버리든 그렇게 폐인으로 만드는 게 나을 터였다.

김건준은 어딘지 미묘한 얼굴로 권기영을 바라보다가 짙은 웃음을 웃었다. 글쎄요, 하고 중얼거린 그는 곧 “좋습니다.” 하고 입을 뗐다.

“그렇다면 기회를 주도록 할까요. 징벌 삼아 오늘 딱 하루로만 그칠지, 혹은 평생 짐승으로 살게 될지.”

조련사에게 목줄을 바싹 잡힌 개가 집요하게 한신주 쪽으로 몸을 기울일 때마다 혐오와 공포가 뒤섞인 얼굴로 기겁을 하며 벌벌 떨고 있는 한신주를 김건준이 가리켰다.

“기영 씨가 말한 그 ‘역겨운 짓’에 경기를 일으킬 듯이 질겁하고 있는 저 청년이 개와 교미를 마칠 때까지 계속 저렇게 울부짖으며 고통스러워한다면, 그에게도 사람다운 데가 남아 있다고 여기고 오늘 하루로 끝낸 뒤 팔다리 정도만 꺾어 버리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앞으로 평생 그는 성교가 아니라 교미를 하고 살아야 하게 될 겁니다.”

일상적인 이야기라도 하듯 심상하게 말한 김건준은 권기영을 보며 빙긋이 웃었다.

“기영 씨가 원하신 대로 오늘 하루로 끝날 수도 있겠지요. 비록 뭐든 아랫도리에 쑤셔 박기만 하면 줄줄 싼다고 소문이 난 청년이라지만, 그래도 인간이라면 짐승이랑 붙어먹는데 좋아라 할 리는 없을 테니까요.”

권기영은 다른 때와 전혀 다른 구석이 없는, 광기나 흥분 따위는 티끌만큼도 비치지 않는 김건준의 여상한 얼굴을 눈도 깜박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맙소사.

놈은 완전한 제정신이었다――이걸 제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면.

김건준이 조련사에게 고갯짓을 했다. 조련사가 목줄을 놓고 물러섰다.

개가 짖었다. 툭 치면 깨어질 유리 같은 얼굴로 덜덜 떨며 하얗게 질려 있던 한신주가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권기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건준이 흘끗 시선을 던지는 기색이었지만 돌아보지 않고 문으로 걸어갔고, 김건준도 굳이 그를 만류하지 않았다.

밖으로 나와 문을 닫는 권기영의 등 뒤로, 개가 간간이 짖으며 헐떡거리는 소리가 한신주의 울부짖는 비명 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권기영은 그제야 이를 악물었다.

소름이 끼치는 건 저 미친 광경 탓이 아니다. 놈은 제정신이었다. 놈은 온전한 정신으로 저 짓을 하고 있었다.

“…―.”

놈의 말을 듣지 않으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놈의 등에 칼을 꽂으려 들면.

놈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도. 사람을 사람이 아니게 만들어 버리는 것도. 그 어떤 끔찍한 짓이라도 놈은 아무렇지 않게 저지를 수 있었다.

저렇게 웃는 얼굴로. 인상 좋고 선량한 얼굴로 부드럽게 웃으면서, 다정한 목소리로. 언제든. 놈의 심경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안에서 살려 달라고, 도와 달라고, 제발 멈춰 달라고 울며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기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은 한신주가 아니다. 호텔에서 죽어 나갔던 남자였고, 여태 놈이 저 자리에 서기까지 앞을 가로막았던 숱한 사람들이었고, 앞으로 가로막게 될 자들이었고, 또한 권기영이었다.

“――.”

토할 것처럼 속이 메슥거렸다. 저 안에 있는 것은. 저 안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은.

……안 된다. 이대로는 안 된다. 나는 도대체 넋 놓은 채 뭘 하고 있었던 건가. 언제 찢겨 오물 속에 던져질 줄 알고.

방 안에서 질퍽하게 살갗 부딪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학학학학, 개가 그르렁거리며 숨을 헐떡이는 소리도 한결 빨라졌다. 그리고 흐윽, 끄윽, 목 졸린 듯 허덕거리며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

언제부터인가 비명은 들리지 않고 있었다. 그저 흐느끼는 소리만이 높게 낮게, 간간이 울음 섞여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차 음색이 바뀌기 시작했다. 조금씩 흐느낌이 잦아들면서 가쁜 숨결이 섞이기 시작한 한신주의 울음소리는 이윽고 완연하게 음란한 교성으로 넘어가――이윽고 권기영이 들어온 가운데 가장 끔찍한 소리로 바뀐다.

그것은 인간이 짐승으로 떨어지는 소리였다.

권기영은 부들거리는 이를 악물고 귀를 막았다. 그런데도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아아, 아학, 좋아, 하아악, 더, 좀 더, 아아아. 심장에 서늘하게 살얼음이 낀다. 바작바작, 바작바작. 구토가 치밀었다.

안 돼. 이대로는 안 된다. 놈에게서 벗어나야 한다.

권기영은 입가를 움켜쥐고 숨을 멈추었다.

――놈을 없애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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