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tween acts
바깥에서 망치로 철판을 두들기는 듯한 쇳소리가 울렸다 그치길 거듭하고 있었다.
그 소리가 세 번째로 들리기 시작했을 때, 권기영은 잠을 포기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시계를 보자 오전 열한 시.
워크숍은 고작해야 한 달에 지나지 않았지만 생체 시계를 흐트러뜨리기엔 충분해, 바로 지난밤 미국에서 돌아온 권기영으로서는 체감상 아직 한밤중인 시각이었다. 게다가 이래저래 정리하고 잠든 시각은 네 시간 전.
권기영은 미간에 짜증스런 주름을 짓곤 창문을 열었다. 뒷마당에 권기철이 잡다하게 널어놓은 공구들 사이에서 친구들 네댓과 더불어 떠들어 대고 있었다.
“기철아, 시끄럽다.”
권기영이 별반 크지 않은 목소리로 한마디 던지자 요란하던 소리들이 삽시에 가라앉았다. 권기철은 고개를 들어 2층 창가에 선 권기영을 보더니 겸연쩍은 얼굴로 “어, 형, 일어났어?” 하고 중얼거렸다. 녀석의 주위에 있던 친구들도 죄다 입을 다문 채 흘끔거리며 권기영의 눈치를 본다. “미안, 조용히 할게.” 하고 중얼거리는 녀석의 말을 듣는 척도 않고 권기영은 창가에서 걸음을 옮겼다.
한번 침대에서 일어났다가 다시 눕는 건 시간 낭비에 게으름의 표상 같아서 좋아하지 않았다. 차라리 이대로 일어나 밤까지 책이나 보는 게 시차에 몸을 익히는 데에 더 나을 성싶었다.
찬물로 목을 축이고 책을 펼친 권기영은, 그러나 십여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떠들썩해진 바깥 기척에 혀를 찼다. 권기철, 저 바보 같은 녀석에게 기억력이나 주의력 따위가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 새삼스럽게 화가 나지도 않는다.
권기영은 다시 창가로 가 창틀에 걸터앉았다.
마당에 머리를 맞대고 웅크리고 앉은 네댓 놈들 주위로 각종 공구며 분해된 자동차 부품이며 나사못, 쇳조각 따위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차 아래에 기어들어 간 권기철이 가끔 뭔가를 땅땅거리며 두들기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보니 차고에 두었던 컨티넨탈을 부수고 있었다. 어차피 더 이상은 타지 않는 차라 갖고 놀아도 상관은 없지만, 저 덜떨어진 놈은 장난감 모형 자동차 값도 벌어올 깜냥은 안 되는 주제에 망가뜨리는 건 잘도 한다.
권기영의 동생인 권기철은 늘 그랬다. 생산적인 일이라곤 하는 법이 없었다. 녀석은 늘 소모적인 일에 시간과 돈과 노력을 허비하고 낭비했다. 어릴 때부터 또래보다 덩치도 크고 힘도 센 데다 성격까지 괄괄했던 녀석은 탁월하게 뛰어난 누나와 형으로 인해 과도해진 부모님의 기대를 만족시킬 만한 머리는 없었지만, 본인의 환경이 타인보다 아주 대단히 우월하다는 걸 일찌감치 알아차리고 이용할 만큼 약삭빠른 머리는 갖고 있었다. 그런 성격과 그런 환경, 그런 머리로, 녀석이 또래들 사이에서 골목대장 행세를 하며 친구들을 우르르 끌고 다니는 건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야, 씨발, 주제에 나대지 말고 거기 스패너나 이리 내.”
자동차 부품을 만지작거리며 뜯어보고 있는 친구에게 낄낄거리며 발로 차는 시늉을 하는 동생을 권기영은 냉담하게 내려다보았다. 저 꼴사나운 임금님 행세라니. 고작해야 두 살 아래인데도 때로 권기철은 자신과는 아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비록 권기영이 좋아하지는 않지만 누나와 자신은 그럭저럭 닮은 구석이 있는 성싶기도 한데 저놈은 저 천박한 생태로 어떻게 자신의 동생일까, 그런 생각이 문득문득 들곤 한다.
그때 권기영의 시야에 한 소년이 들어왔다. 부수고 있는 자동차에는 별 흥미가 없는 듯 녀석들에게서 두세 걸음 물러나 나무 아래에 앉은 소년은 얼마 전에 권기영의 집에 들어온 도베르만 새끼를 손끝으로 어르며 놀고 있었다.
난 지 넉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어지간한 예닐곱 달짜리만큼은 훌쩍 큰 도베르만은 어려도 사납기 짝이 없는 놈이었는데, 소년이 들이댄 커다란 개껌의 반대쪽을 물고 크르르 험하게 목을 울리고 있었다. 소년은 개껌을 슬슬 흔들며 다른 손으로 개를 쓰다듬으려다가, 개가 화들짝 입을 벌리며 컹컹 짖자 그 결에 개껌을 손쉽게 빼앗아 들곤 웃었다. 그리곤 아쉬운 눈치인 개에게 다시 껌을 물려 준다.
개가 약이 올랐는지 놈을 물려고 덤볐다. 아직 이가 덜 여물었어도 제대로 물리면 병원행이다. 권기영이 짧게 혀를 찬 순간, 그러나 소년은 어렵잖게 피하며 이놈이, 하고 피식 웃더니 개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바닥에 눌렀다. 컹컹거리며 요란을 부리는 개의 발톱에 몇 군데 긁히면서도 끄떡없이 누르고 있는 소년의 옆에서, 개 소리를 들었는지 차 밑에서 고개를 비죽이 내민 권기철이 “야, 하늘아!!” 하고 황급히 외쳤다. 개가 사람을 무는 줄 알았나 보다.
개는 귀를 쫑긋이 세우기는 했지만 원래부터 아버지와 권기영의 말만 듣던 놈은 드러낸 이를 감추지 않았다.
얼간이, 누가 누구에게 눌리고 있는지도 안 보이나.
“하늘아, 조용.”
권기영이 말하자 그제야 위층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을 깨달은 소년들은 일시에 입을 다물었다. 개도 단박에 조용해졌지만, 이제야 주인이 왔다고 강아지답게 끙끙거리며 처량한 소리를 낸다.
개를 누르고 있다가 고개를 든 소년은 권기영과 눈이 마주치자 겸연쩍은 듯 개를 놓아주었고, 권기영은 다시 한번 달려들려는 개에게 “앉아.”라고 짤막하게 명령을 내린 뒤 소년을 무심히 살폈다. 소년이 권기영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못 보던 놈이다.
동생이 몰고 다니는 녀석들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저렇게 자세가 반듯한 놈은 처음 보는 성싶었다. 게다가 체격이 또래보다 훌쩍 큰 기철이에게도 뒤지지 않겠다. 무던한 얼굴을 한 놈이다. 말수도 적고, 다른 놈들처럼 촐랑거리지도 않고.
얼간이는 얼간이끼리 모여 놀더니, 오늘은 털빛이 다른 놈이 하나 끼어 있군.
권기영은 소년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이내 흥미 잃은 시선을 권기철에게 돌렸다.
“시끄러우니까 계속 차나 두들겨 댈 거면 나가서 놀아.”
“어……, 아냐, 형. 이제 두드릴 거 없어. ……미안, 조용히 할게.”
얌전하게 대답하는 동생에게 고개를 끄덕인 권기영은 다시 창가에서 떨어져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마자 바깥에서는 ‘인마, 네가 떠들어서 우리 형 화났잖아!’라고 소리 낮춰 성질을 부리는 동생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귀를 닫는다.
덩치만 큰 철부지, 권기영은 코웃음을 쳤다. 태어날 때부터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들을 갖고 제 능력을 과신하는 얼간이는 국적을 가리지 않고 세상 어디에나 흔한 모양이었다.
요 한 달간 머물렀던 워크숍에서도 그런 놈이 하나 있었다. 시애틀에서 왔다는 그놈은 미식축구 쿼터백에 명문대생인 상원의원의 아들이라는, 헛웃음이 날 만큼 그림에 그린 듯한 조건에 들어맞는 놈이었다. 상당히 멀쩡하게 생겨 먹기도 했다.
그놈이 권기영을 괜히 집적거리면서 귀찮게 굴 줄 권기영은 첫날부터 알고 있었다. 비록 권기영이 보기에 그놈은 한참 모자란 얼간이였지만 놈의 눈에는 권기영이 우두머리를 두고 다툴 만한 수컷으로 보였을 테니까. 또한, 권기영은 어쩌면 그놈 스스로도 몰랐을 그놈의 시선을 더 먼저 눈치채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권기영은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알아채는 데에는 비상했다.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 싫어한다면 권기영의 어떤 면이 안 맞아서인지 혹은 질투를 하거나 두려워해서인지, 좋아한다면 그것이 동경인지 호감인지 혹은 이성을 보는 눈인지,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고 또한 틀린 적이 없었다.
그 순종 쿼터백도 마찬가지였다. 기숙사에서 처음 마주쳐 서로 웃으며 인사를 나누는 순간, 권기영이 놈을―비록 턱없이 모자라나마―이곳에서는 제법 눈에 띌 만한 수컷이라고 판단한 만큼 이미 놈 역시 권기영을 호적수인 수컷으로 여기고 탐색하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 속에 더불어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누고 지켜보면서, 이놈 왠지 떨어질 놈 같은데, 하고 직감했다.
놈은 한 달 내도록 집요하게, 은근하게, 시비를 걸어왔다. 그리고 권기영은 그 시비들을 적당히 받아넘겼다. 비록 놈이 권기영보다 몸통이 한 뼘은 더 두껍긴 했지만 애초부터 놈은 권기영을 당해낼 수 있을 만한 놈이 아니었고, 그걸 못 알아보았던 게 그놈이 저지른 가장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리고 바로 사흘 전 워크숍을 마치는 송별 파티를 한 날, 술이 한껏 들어간 놈은 권기영에게 대놓고 시비를 걸어 왔고 권기영은 주정뱅이 따위는 무시하고 걸음을 돌렸다. 그 얼간이는 권기영을 따라 층계참까지 나왔는데, 아마도 이놈은 다른 때에도 그런 짓을 해 봤던 눈치였다. 대뜸 권기영에게 주먹을 날리더니 얌전히 있으라고 을러대며 사타구니를 비볐던 것이다.
그것이 놈이 마지막 기회를 떠나보낸 순간이었다.
딱 세 대, 주먹 두 대와 무릎 한 대만으로 속에 있는 걸 모조리 토해 내고 전의를 상실한 놈은 그 춥고 지저분한 층계참에서 덜덜 떨며 권기영의 성기를 핥아야 했고,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지르며 엉덩이를 뚫려야 했다. 그러는 내도록 선액을 줄줄 흘렸던 놈을 권기영은 유쾌하게 비웃었다.
그래, 비록 ‘이겼다’는 승리감을 줄 만한 놈은 못 되었지만, 그러나 늘 타인의 복종은 권기영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발밑에 무릎 꿇고 자신의 자비를 구걸하는 놈을 내려다보는 게 쾌감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권기영은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책장을 넘겼다.
책 한 권을 다 보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럭저럭 점심때가 다 된 시계로 시선을 준 권기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직 점심은 조금 더 있어야 한다는 가정부의 말을 듣고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사과를 한 알 집어 든 그는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바깥뜰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이 정도로 시간이 지났으면 차 한 대는 족히 부수고도 남았겠다고 생각하며 권기영은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뒷마당은 조금 전보다 더욱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권기철은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컨티넨탈의 보닛을 열어젖히고 그 안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이게 엔진이 돌아가야 되는데……, 왜 안 돌아가지, 씨발. 야, 아까 승수 네가 뭐 잘못 건드린 거 아냐?”
머리를 맞대고 있던 소년들이 권기영을 보고 몸을 움츠리며 뒤로 물러서는 모습들을 본체만체하고, 권기영은 신경질을 내며 투덜거리는 동생 옆으로 다가갔다.
“네가 요령이 나쁜 탓이지.”
“뭐, 이 씨――어, 형.”
눈을 사납게 희번덕거리며 돌아보던 권기철이 권기영을 보곤 얼른 입을 다물었다. 순한 양처럼 고분고분하게 “형, 엔진이 안 돌아가는 게 왜 그럴까? 다 제대로 했거든?” 하고 기가 눌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동생의 옆에서 보닛 안을 들여다 본 권기영은, 불쑥 손을 밀어 넣어 근처를 더듬으며 “벨트 하나 가져와.”라고 심상하게 중얼거렸다.
가끔 권기영이 변덕스럽게 기분이 내켜서 놀아 주기라도 하면 대번에 화색을 띠며 좋아라 달라붙곤 하는 권기철은, 당장 “응!” 하고 군말 없이 달려가 앞자리에 달려 있던 벨트를 뚝 끊어 왔다. 적당한 두께로 벨트를 접어 톱니 사이에 밀어 넣고 스위치를 올리며 벨트를 당기자, 당장 부르릉――하며 엔진이 굉음을 내기 시작했다.
“우와! 됐다!! 형, 어떻게 한 거야?”
“이쯤 했으면 계속 시끄럽게 굴지 말고 밥이나 먹고 나가. 똑같은 말 여러 번 시키지 말고.”
벨트를 내던진 권기영은 기름때가 시커멓게 묻은 손을 내려다보곤 혀를 찼다. 뭔가 적당히 닦을 만한 수건이라도 있어야겠다고 고개를 들던 그는 마침 자신을 보고 있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앉아 있다가 막 일어선 듯 엉거주춤하게 그를 보고 있던 소년은 권기영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까 그놈이다. 그러고 보니 기철이가 끌고 다니는 놈들치고 좀 반듯하게 자세가 잡힌 놈이 하나 있었다.
권기영은 직선적인 시선이 다가오자 조금 당황한 눈치였지만 묵묵히 그 시선을 맞받고 있는 소년을 ‘이것 봐라.’ 하고 쳐다보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위에서 보았을 때보다 더 체구가 있어 보인다. 단순히 키뿐 아니라 몸 자체가 균형이 잡혀 있었다. 어린 티가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음에도 이제 완연히 어른의 냄새를 풍기고 있는 성인의 몸.
“…….”
권기영은 소년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불쑥 손을 뻗었다. 놈의 뺨을 가볍게 때리듯이 쓰다듬고 지나가자 말끔하던 뺨에 기름때가 거뭇하게 묻었다. 소년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못 보던 놈인데.”
“어, 중학교 때 같은 동아리였어. 고등학교가 갈라져서 한참 못 봤는데 얼마 전에 축구장에서 만났거든. 그 뒤로 집에 자주 놀러 오고 있어.”
막 입을 열려고 하던 소년 대신 권기철이 뒤에서 외쳤다. 평소에 제 친구에게 관심이라곤 없는 형이 그렇게 물어본 게 이상했는지 냉큼 끼어든 권기철을 권기영이 냉정하게 쳐다보았고, 동생은 함부로 끼어드는 걸 싫어하는 형의 성격을 떠올리곤 입을 다물었다.
권기영이 다시 시선을 돌리자 소년은 그제야 꾸벅, 이번에는 허리까지 굽혀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김건준이라고 합니다.”
이미 자리가 잡혀 있는 낮고 조용한 목소리. 게다가 침착한 태도까지. ……동생이 평소 끌고 다니는 얼간이들 중에서는 그래도 제법 나아 보인다.
그러나 또렷하게 대답하는 음색에 어딘지 모르게 배어 있는 긴장감은 권기영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보는 소년의 얼굴에도 알게 모르게 드러나 있었고, 그것이 아직 소년이 어리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권기영은 이미 예전부터 흔하다 못해 당연하게 받아 온 그 표정에 어린 긴장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동경이다. 동생이 끌고 다니는 다른 녀석들이 권기영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
제법 쓸 만한 놈이 될 것 같긴 한데……, 그렇지도 않은가.
어딘지 미묘하게 수컷의 본능을 자극시키는 데가 있기는 한데 정작 소년은 맹랑한 분위기라곤 요만치도 없이 순하고 얌전하게 권기영을 살피고 있었다.
권기영은 얼마간 놈을 바라보다가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이곤 이내 걸음을 돌렸다. 잠시 움틀거리는가 싶던 흥미가 사그라지면서 소년에게 기울어졌던 관심도 흩어지고 말았다. 뒤에서는 동생이 ‘밥이나 먹고 그만 나가자.’고 떠들고 있었다.
*
좋은 말씀 많이 듣고 본받거라, 아버지가 주위 사람들에게 권기영을 인사시킬 때에 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 모두가 부러워하고 질시하는 아들인 권기영은 그럴 때마다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그들에게 말하곤 했지만, 속으로 코웃음 치는 것이었다.
본받으라니, 저들을?
그들에게 권기영이 본받을 싶은 거라곤 하나도 없었다. 죄다 익힌 것과 이룬 것들이 많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굳이 그들에게 본받지 않아도 권기영이 충분히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들이 가진 것은 그뿐, 권기영의 시선을 사로잡는 패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버지와 긴밀하게 지내는 극소수의 어른들 중에는 간혹 ‘만만찮다’ 싶은 남자가 드물게 보이긴 했지만 한 손에 넉넉히 꼽을 정도였고, 아버지와 더불어 만나게 되는 거의 모든 인간들은 그저 천박하고 용렬했다.
이렇게나 흥을 끄는 인간이 없을까. 이 얼마나 지루하고 형편없는 시간들인지. 이미 익숙한 일인데도, 배에 낀 기름밖에는 가진 게 없는 자들이 나누는 이야기들을 듣다 돌아오면 머릿속에 기름때가 끼는 기분이 들어 불쾌해진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점심때 잠깐 나갔다가 그 결에 아버지의 지인들과 더불어 식사를 하고 돌아온 권기영은 오후에 나가 보려던 예정을 취소하고 방에서 책이나 읽으며 머리를 식히기로 했다. 때로 사람의 독에 침식당하는 기분이 들 때면 종종 그러곤 했다.
한창 책을 보고 있는데 바깥에서 요란스러운 소리들이 가까워지는 듯했다. 지난밤 클럽에 간다고 나갔다가 들어오지 않았던 권기철이 이제야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심지어는 혼자도 아니고 또 친구들을 몰고 왔나 보다. 보통은 바깥에서 뭔가를 부수면서 놀거나 뜰에 자리 깔고 앉아 떠들어 대곤 하는데 오늘은 제 방에서 놀 건지, 복도가 부산스러워지더니 놈의 방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났다. 낄낄거리며 시시덕거리던 목소리가 벽들 너머로 흐려졌다.
또 무슨 사고라도 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별일 없었던 모양이다. 권기영은 지난밤 권기철이 나가기 전에 친구와 통화하면서 나누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야, 오늘 그년이 거기 갈 거란다. 동석이 오라고 해. 씨발, 순진한 놈 꼬셔서 수천만 원을 훑어 먹고서 오빠는 그냥 친한 오빠라는 둥 되도 않는 소리나 지껄이는 쌍년, 내가 오늘 그년 제대로 따먹게 해 줄 테니까 동석이한테 닥치고 오라고 해. ――어, 얼마 전에 새로 들어온 그거, 벌써 써 봤지. 두통도 없고 뒷맛도 좋고 습관성도 없어. ……어, 아주 질질 싸.’
2층 거실에서 널브러져 앉아 전화를 붙들고 킬킬거리던 권기철은 외출에서 돌아와 계단을 올라가던 권기영과 눈이 마주친 순간 알사탕을 잘못 삼킨 것처럼 눈을 홉뜨며 입을 다물었다. 어, 응, 나중에 전화할게, 황급하게 말을 얼버무리며 전화를 끊어 버리곤 절절매며 눈치를 살피는 그를, 권기영은 냉정하게 내려다보았다.
‘귀찮은 일 만들지 마라.’
당장 고개를 끄덕이며 ‘어, 걱정하지 마, 형.’ 하고 말은 잘도 하는 권기철이었지만, 권기영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녀석은 사고를 칠 줄만 알지 책임이라곤 지는 법을 몰랐다. 그러나 굳이 학습 능력도 없는 멍청한 놈을 붙들고 헛수고를 할 생각은 들지 않아 그대로 앞을 스쳐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어쨌든 지난밤에는 권기영의 충고를 들어서인지 운이 좋았는지 별일은 없었던 모양이다. 귀찮은 일을 할 필요가 없으니 잘됐다.
권기영은 놈에게서 신경을 끄고 계속 책에 열중했다. 간간이 왁자하게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더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권기영이 책의 마지막 장을 막 넘겼을 때였다.
방문이 열리는 기척에 고개를 든 권기영은 막 들어오려다가 걸음을 멈칫하며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소년을 발견했다. 그놈이었다. 동생이 데려왔던 그 낯선 친구.
녀석은 당황한 듯 머뭇거리다 고개를 꾸벅 숙였다.
“화장실을 찾던 중인데 잘못 알고……, 죄송합니다.”
“화장실은 복도 끝 왼쪽이야.”
권기영은 책을 덮으며 말했다. 그리곤 다시 고개를 숙이며 걸음을 돌리는 녀석에게 “뒷권.” 하고 말을 이었다. 막 나가려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권기영을 본 그는, 권기영이 가볍게 들어 보이는 책을 보곤 이내 이해한 듯 “예.” 하고 안으로 머뭇거리며 들어섰다.
여남은 평은 족히 될 넓은 방에 빼곡하게 들어찬 책장을 난감한 듯 둘러본 그는 나름대로 종류별로 분류되어 있는 책들을 잠시 살피다가 권기영이 보던 책의 뒷권이 꽂혀 있을 만한 곳 근처를 더듬기 시작했다. 그가 뒷권을 뽑아 권기영에게 내민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여기요. 앞권은 다시 꽂아 놓을까요?”
“이름이 뭐라고 했었지?”
뒷권을 받고 앞권을 건네주며 묻자 그는 잠시 멈칫했다가 “김건준이라고 합니다. 권기영 선배님.” 하고 대답했다.
“어느 학교 다녀.”
“현문고등학교입니다.”
“아아, 이 앞에 있는 거기. 나는 거기 안 나왔어.”
“예, 거기가 아니라 중학교 후배입니다. 재원중을 나왔습니다, 기철이랑 같이요.”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들었던 것도 같다. 과연, 선배란 참 갖다 붙이기 쉬운 말이다.
조용하게나마 할 말은 따박따박 하는 걸 보니까 은근히 맹랑한 구석도 있을 것 같은데, 하고 권기영은 녀석을 쳐다보았지만 별반 기분이 상하진 않았다.
“기철이는 뭐 하고 있어.”
“카드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기껏 하는 짓이란 게, 권기영은 혀를 찼다. 앞권을 책장에 꽂아 넣던 녀석은 그런 권기영을 돌아보더니 문득 웃었다. 왜 웃냐고 시선으로 묻자 녀석은 잠시 사이를 두고 대답했다.
“선배님도 잘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자주 한다’의 의미가 아니라면 그렇지.”
카드 게임이라고 해 봐야 프로도 아닌 이상은 확률 게임이니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저 즐기지 않을 뿐이다.
“예, 실력이 좋으시다고 기철이가 자랑 많이 하던데요. 소문도 많이 들었습니다. 욱이 선배님도 많이 말씀하셨고.”
“? 그게 누구야.”
“욱이 선배님이요. 김욱 선배님. 기영 선배님이랑 같은 중학교 나오셨다고……, 중학교 때 같은 반에 옆자리라서 꽤 친하게 지내셨다고 하시던데요.”
“……. 글쎄, 누구더라.”
권기영은 고개를 기웃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녀석이 있었던 것도 같지만 잘 모르겠다. 그런 사람은 흔하게 널렸고 굳이 기억할 이유도 없었다. 김건준은 조금 겸연쩍은 눈치였지만 “그냥,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기철이도 워낙 선배님 이야기는 많이 하니까요.”라고 얼버무리고 만다.
“그 녀석 이야기는 반의 반으로 깎아서 듣는 게 좋을걸. 브라더 콤플렉스가 꽤 있는 녀석이라서.”
김건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정곡을 짚었다는 그 웃음은, 오만하게 허세를 부리고 다니면서도 권기영에게는 무조건적으로 엎드리는 권기철을 알고 있다면 그럴 만도 했다. 권기철보다도 입장이 약한 녀석이라면 이런 말에 제대로 웃지도 못하겠지만.
“아니…… 하지만 콤플렉스가 없기 어려운 환경이니까요.”
이것 봐라. 권기영은 담담하게 웃는 녀석을 보며 피식 웃었다. 넉넉한 말본새하며 태도하며, 이놈은 ‘권기철이 끌고 다니는’ 놈이 아니겠다. 아니, 오히려 이 녀석의 그릇에 권기철이 담겨 있다는 편이 옳을 성싶었다. 이번에는 동생이 꽤 쓸 만한 친구―아마도 동생은 제 입맛대로 휘두를 수 있는 녀석쯤으로 여길 것 같았지만―를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문득 녀석이 입을 다물더니 웃고 있는 권기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권기영의 웃음 띤 입매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녀석을 권기영이 왜 그러냐는 듯 마주 보자 뒤늦게 눈이 마주친 녀석은 왠지 얼핏 머쓱한 얼굴을 했다.
“아니, ……요전에 뵈었을 때와 인상이 다르셔서요.”
“내가?”
“그때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있고 해서 더……, 냉정하고 어려운 분위기였습니다.”
“지금은 쉬워 보이나 보지.”
권기영이 웃으며 말하자 녀석도 웃었다.
“여전히 냉정하고 어려운 분위기입니다.”
“같잖아.”
“하지만 그때는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은 전혀 안 들었으니까요.”
말하고 난 뒤에야 녀석은 괜한 말실수를 해 버렸다 싶은 얼굴을 했다. 겸연쩍게 권기영의 눈치를 살피는 게 좀 쑥스러운 눈치였다. 이거야 제법 귀여운 데가 있잖아.
“너야말로 요전에 봤을 때에는 말도 한마디 없이 개만 붙들고 놀기에 말을 못하는 건가 싶더니, 이제 보니 제법 잘 떠드는데.”
녀석은 머쓱하게 권기영을 보았다.
“그때…… 처음 뵈어서 긴장했었습니다. 소문이 과장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듣던 거랑 똑같아서 놀라기도 했고.”
자신에 대한 소문이 무성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거기에 신경 써 본 적은 없는 권기영은 무심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소문이라. 어떤 거?”
“…….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듣고 싶으십니까?”
“어차피 소문은 소문일 뿐이고, 그 자체로는 좋고 나쁘고가 없어. 같은 일을 두고도 칭찬하는 사람이 있고 고깝게 보는 사람이 있으니까. 내가 묻는 건 네 귀에 들어간 게 어떤 소문이었냐는 건데――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나쁜 쪽이었던 모양이지.”
녀석은 아닙니다, 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왠지 조금 망설이는 눈치이던 녀석은 얼마간 더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소문으로는, 권기영 선배님은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 그거 대단하군. 그 권기영 선배라는 놈 나도 한 번 만나 보고 싶은데.”
권기영은 코웃음 쳤다. 어느 얼간이들 사이에서 무슨 소문이 돌아다니든 알 바는 아니지만 헛웃음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소문이랑 내가 같았다?”
“예.”
“그렇게 안 보이는데, 의외로 입 발린 소리도 잘 하는 모양이야.”
우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김건준을 보며 권기영이 비웃듯 말했지만 그는 딱히 기분 상한 빛도 없이 담담했다.
“완벽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를 수는 있겠지만요.”
권기영은 어이없이 웃었다. 권기영에게 홀린 듯 시선을 주고 있던 김건준은 고개를 약간 숙이며 따라 웃었다.
이미 소년이라기보다는 청년이라는 게 어울릴, 사내 냄새가 물씬 풍기는 녀석임에도 웃는 게 제법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멋쩍어하는 눈매에 어렴풋이 어린 티가 남아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권기영이 뚫어져라 노골적으로 바라보자 김건준은 어색해하면서도 시선을 오래 피하진 않았다. 일부러 기를 쓰고 마주 보는 것도 아니고 담담하게 시선을 맞받는 걸 보며 권기영은 웃었다.
이건 꽤 괜찮은 수컷인지도 몰랐다.
그래, 은근히 호전성을 일깨우는 놈이다. 전혀 불쾌감을 동반하지 않은 탓에 그것이 호전성이라는 것도 뒤늦게야 깨달았다. 이건 제법, 상당히, 유쾌하지 않은가.
권기영이 눈앞의 소년을 새삼스럽게 훑어볼 때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한 뼘쯤 문이 열리면서 그 사이로 권기철이 기웃거리는 게 보였다.
“형, 혹시 여기……, 아, 여기 있었네. 건준이 너 여기서 뭐 해. 하도 안 와서 어디 갔나 했더니만. 우리 형 바쁜데 네가 그러고 있으면 널 데려온 내가 뭐가 되냐. 얼른 돌아가서 같이 카드나 치자. ――형, 미안, 방해해서.”
대뜸 문을 열고 들어선 권기철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다가와 탐탁잖게 김건준을 노려보았다. 제 친구들에게 형 자랑을 실컷 하면서도 그중 누군가 형에게 친한 척을 하는 꼴은 못 두고 보는 권기철이 김건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재촉하자 김건준은 권기영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쯤에서 슬슬 접어 둘까, 권기영은 김건준이 꺼내 주었던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더 이야기해도 그럭저럭 재미있을 성싶긴 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일 모양이다.
“그래, 그럼 그만 가 봐라.”
권기영이 말하자 김건준은 잠시 침묵하다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 그럼 가 보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김건준의 눈길이 권기영에게 아쉬운 듯 짧게 머물다 떨어졌다. 그리곤 한 번 뒤돌아보는 일도 없이 그는 뭔가를 떨쳐 내기라도 하듯 방에서 선뜻 나가 버렸다.
……아.
불현듯 권기영이 이유도 없이 무언가를 예감한 것은 그때였다. 그것은 어쩌면 김건준 본인도 깨닫지 못했을 직감이었다.
*
거기서 놈을 본 권기영은 걸음을 멈추었다.
야외 부지의 운동장에서 한 무리의 남자들이 공을 쫓으며 달리고 있었는데 그 안에 익숙한 얼굴이 하나 섞여 있었다. 축구라기보다는 공놀이라는 편이 어울릴 그들의 모습 속에 들어 있는 김건준에게 시선을 주며 권기영은 멈춰 섰다.
온몸을 땀에 흠뻑 적시고서 뭐가 그렇게 좋은지 정신없이 몰두해서 달리는 모습이 꼭 천진하게 즐거워하는 어린 꼬마 같다. 그것은 저 젖은 셔츠 아래로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이미 완연히 어른이 된 저 몸체와는 무척 안 어울리는 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몹시 잘 어울려 권기영은 한참 동안이나 그 모습을 바라보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전반이 끝나고 쉬는 시간인지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그들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잊고 있던 호흡 충동과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지 묵직한 다리를 질질 끌면서 저마다 왁자하게 떠들고 음료를 마시며 옷으로 부채질을 한다. 놈은 아예 웃옷을 벗어 버렸다.
거칠게 어깨를 들썩이고는 있었지만 지친 빛은 없이 활기차게 웃고 있는 김건준의 옆으로 여자애 하나가 다가가 주스를 건네다가 손이 미끄러져 주스를 엎지르는 게 보였다. 여자애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수건을 내밀었지만 김건준은 가볍게 웃으며 손을 내젓곤 울상을 짓는 그녀의 머리를 친근하게 톡톡 두드린 뒤 탈의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래. 이렇게 전혀 다른 장소에서 마주쳐 새삼스럽게 보니 분명히 눈에 띄는 녀석이었다. 별다른 일을 하지 않고 묻혀 있어도 송곳처럼 눈에 들어온다. 고양이 새끼들 속에 범 새끼가 한 마리 섞여 있는 것처럼.
“어? 기영아. 웬일이야?”
그때 운동장 쪽에서 한 남자가 권기영을 보곤 눈을 둥그렇게 뜨며 다가왔다. 그리 친하지는 않은 같은 과 동기다. 워낙 붙임성이 좋아 지난 학기에는 과대를 했던 녀석이었다.
“응, 잠깐 지나가는 길에. 너는, 조기축구?”
“응? 하하, 그냥 동네에서 적당히 아는 사람들 모여서 노는 거지 뭐. 너도 시간 있으면 뛰고 가지? 마침 한 녀석이 체력 후달려서 못 뛰겠다고 뻗었는데.”
글쎄, 하고 권기영은 잠시 침묵했다. 운동 자체는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사람들과 부대끼며 땀 흘리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 한번 뛰어 볼까.”
어, 진짜? 하고, 자기가 말해 놓고도 설마 그런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는 듯 놀라는 동기의 옆에서 권기영은 면바지에 운동화라도 상관없겠지, 하고 발끝으로 땅을 가볍게 두드렸다. 동기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기뻐하면서 “너 들어오면 좋지! 야, 기영이 넌 무조건 우리 편이다.” 하고 그를 운동장으로 이끌었다.
그것은 변덕이었다. 탈의실 쪽에서 가벼운 걸음으로 뛰어오다가 권기영을 보고 놀란 듯 걸음을 늦추는 김건준을 보며, 권기영은 이런 변덕도 꽤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뭐 하는 녀석이야?’
권기영이 그렇게 물었을 때, ‘승수랑 건준이랑 원호랑 또 누구지, 하여간 몇 명 해서 밤에 고수부지 좀 달리고 올게.’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던 동생은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그러다가 이내 소꿉친구인 승수나 원호에 대해 새삼스럽게 물어볼 리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아, 건준이?’ 하고 되묻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은 놈이야. 은근히 이것저것 잘하고 얘기하다 보면 아는 것도 꽤 많고. 아버지는 무슨 사업 하신다던데.’
뭐라더라, 하고 동생이 떠벌리는 말을 듣고 권기영은 별로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제법 건실하게 해 나가고 있다고 들은 업체를 하나 기억해 냈다. 고개를 끄덕이는데 권기철이 생각난 듯이 입매를 찡그리며 웃었다.
‘그놈 좀 재밌어. 워낙 말수가 적어서 평소에 거의 이야기를 안 하고 남의 말을 듣기만 하는 편이거든. 그런데 형 이야기가 나오면 꼭 한두 마디씩 거들더라. 나중에 보면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다 기억해.’
그럴 놈처럼 안 보이는데 형한테 되게 관심 많은가 봐, 권기철은 못마땅한 듯 입술을 삐죽거렸고, 그런 사람이 한둘도 아니기에 권기영은 듣고서 그냥 흘려 넘겼다. 김건준이 동경에 가까운 눈길로 자신을 본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이놈 봐라.
권기영은 속으로 헛웃음을 웃었다. 진지한 낯으로 권기영을 막아서고 있는 김건준은 호락호락 앞을 터 주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끈질기게 앞을 가로막으며 진로를 방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놈의 움직임이 전반과 판이하게 달랐다. 움직이는 걸로 봐서 체력이 떨어진 탓은 아닐 텐데, 거침없이 상대편을 몰아붙이던 전반에 비해 미묘하게 방어적으로 나오며 때로 미세하게 멈칫거리고 있었다.
……이놈이 사람을 봐줘 가며 하려 들어?
속이 서늘하게 뜨거워지는 이 기분은 퍽 오랜만이다. 이 건방진 꼬맹이에 대한 불쾌감이 고양감처럼 피어올랐다. 그래, 그러면 네가 원하는 만큼 무덤을 파든가. 권기영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순간 김건준의 눈매가 움칫하는 듯했다. 동시에 권기영은 공을 놈의 다리 사이로 미끄러뜨리며 옆으로 빠졌고, 그 짧은 찰나의 움직임을 미처 뒤따르지 못했던 김건준이――.
삐익!, 호루라기가 울렸다.
권기영은 어느새 자신의 무릎을 걸고 넘어진 김건준과 한데 뒤섞여 바닥을 나뒹굴고 말았다. 동시에 권기영은 속으로 허, 하고 거친 헛웃음을 웃고 만다.
틀림없이 빠져나갈 수 있었다. 놈이 공을 쫓았더라면. 그러면 권기영은 놈에게서 공을 되찾아 달려 나설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놈은 공을 쫓는 대신 권기영의 자세를 무너뜨리는 쪽을 택했다.
이미 축구라기보다는 머릿수만 많은 공놀이를 거의 단독 게임으로 하고 있던 이 상황에서는 그것이 놈에게 가장 안전한 선택이다. 그리고 권기영의 성질을 돋우는 선택이기도 했다.
그래, 봐줘 가면서 하더라도 지는 건 싫단 소리지.
권기영은 사납게 김건준을 돌아보다가 멈칫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김건준이 어딘지 미묘한 얼굴로 주저앉아 껌벅껌벅 땅바닥을 보고 있었다. 고개를 기웃하며 약간 발목을 까닥이던 그는, 권기영과 눈이 마주치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얼른 묻는다.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
“그건 네가 들어야 할 말이겠지.”
권기영은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며 자리에서 훌쩍 일어섰다. 바닥을 뒹구는 순간부터 이미 공놀이를 즐길 생각은 사라졌다. 권기영은 당혹스레 올려다보는 김건준에게 몸을 굽혀 두말없이 놈의 팔을 어깨에 메고 일으켜 세웠다. 묵직하게 어깨에 실리는 무게감 위로 놈이 당황한 듯 “어, 잠깐,” 하고 중얼거린다.
“기영아, 왜. 건준이 어디 다쳤어?”
동기가 뛰어와서 물었다. 김건준이 “아니, 별로 대단치는,” 하고 중얼거리다가 권기영이 냉랭하게 쳐다보자 입을 다문다.
“삐었나 봐. 약 있어?”
“어, 탈의실에 약 상자 있을걸. 야, 뛸 수 있겠어?”
“못 뛰니까 약을 찾는 거잖아.”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을 동기에게 던진 권기영은 “어, 그래, 가서 보고 와.” 하고 머쓱하게 어물거리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걸음을 돌렸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부축을 받고 따라 걸어가며 김건준은 당황한 투로 “저는 괜찮은데요.”라고 중얼거렸지만, 이번에도 그는 권기영의 마뜩잖은 시선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하긴 부축을 받으면서도 살짝 절뚝거리는 티가 나는 발목을 두고 괜찮다고 말하기도 겸연쩍었을 거다.
“발목을 푼다고 풀었는데……, 좀 긴장했나 봐요.”
운동장에서 물러나 탈의실 가건물로 들어서며 김건준이 중얼거렸다. 이미 권기영의 어깨에 편안하게 체중을 싣고 있던 녀석을 캐비닛 앞의 벤치에 앉히며 권기영은 선반 위에 바로 눈에 띄는 약 상자를 꺼내었다. 아, 아, 하고 아프다는 시늉을 하는 놈을 무시하고 발목을 꾹꾹 눌러 보고, 이 정도면 일단은 테이핑으로 되겠다고 생각한다.
“얌전히 공이나 쫓아가지 않고 사람을 덮치니까 그렇지.”
“어, 하지만……, ……그러게요.”
김건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냥 웃고 말았다. 그러면 제가 지잖아요, 그 말은 못하겠나 보다. 권기영이 놈의 발목에 감던 테이프를 꽉 잡아당기자 놈이 입을 다물고 움찔 얼굴을 찌푸렸다. 정말로 아프면 오히려 아무 말도 안 하는 성격인 모양이었다.
순간 속에서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게 있었다. 권기영은 예고 없이 놈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콰당, 등 뒤의 캐비닛에 부딪히도록 호되게 얼굴이 돌아간 놈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얼굴을 감싸 쥔 채 어리둥절하게 권기영을 쳐다보았다.
“내가 그렇게 쉬워 보였나? 적당히 봐줘 가면서 하려 들게?”
권기영이 냉랭하게 코웃음 치자 김건준이 얼핏 눈을 크게 뜨더니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이며 “아닙니다!”라고 외쳤다.
“쉬워 보이다니, 설마요. 절대 아닙니다.”
설마 사정을 두고 상대하는 것도 모를 만큼 바보라고 생각하나, 권기영은 싸늘하게 김건준을 보았다. 김건준은 뭔가 변명이라도 하고 싶은 듯 입술을 멈칫거리다가 이윽고 포기한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제가 경기를 할 때 좀 험하게 하는 편입니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고 저도 모르게, 특히 상대가 세면 셀수록 더 그런 편인데……, 그러다 보면 저도 그 상대도 꼭 어디든 다치게 되어서요.”
김건준은 망설이듯이 뜸을 들이다 “선배님은 할 일이 많으시잖습니까.”라고 낮게 덧붙인다.
“결국은 그래서 사정을 봐 가면서 했다는 말이지.”
권기영의 싸늘한 말에 김건준은 뭐라고 변명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말없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얻어맞은 얼굴을 어루만지며 우울하게 고개를 떨어뜨린 모습이 완전히 풀이 죽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들릴 듯 말 듯 희미하게 중얼거린다.
권기영은 다시 주먹을 당겼다. 그렇게 느리지는 않았지만 예기치 못할 만큼 빠르지도 않았기에 피하려면 피할 수 있을 텐데 잠깐 반사적으로 움찔했을 뿐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놈을, 권기영은 거침없이 한 번 더 후려갈겼다.
이번에도 콰당!, 캐비닛에 부딪힌 놈은 얻어맞은 얼굴도 부딪힌 머리도 제법 아팠을 텐데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때리는 만큼 맞겠다는 듯 다시 자세를 바로잡으며 앉는다.
권기영은 그런 놈을 보며 헛웃음을 웃었다. 얻어맞겠다고 반듯이 앉는 꼴이라니, 어이가 없다 못해 힘이 빠진다.
“건방 떨지 마.”
권기영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놈의 발목을 테이프로 단단히 감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한 번 더 말하며 고개를 숙이는 놈의 정수리로 흘끔 시선을 주었다. 그 아래로 길고 가지런한 속눈썹이 느리게 깜박거리고 있었다. 좀 더 내려가면 볕에 그을린 굵은 목과 너른 어깨가 이어진다.
양순하게 고개를 떨군 호랑이 새끼.
권기영은 여전히 불쾌한 감은 남아 있지만 그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는 걸 보면 아무래도 이놈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하긴 이렇게 순한 호랑이 새끼는 그리 흔하게 볼 수 있는 종도 아니다.
이놈이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면 어떨까.
놈의 머리에서 어깨, 벗은 가슴, 그렇게 가만히 시선으로 더듬어 내리던 권기영은 문득 그의 바지춤에서 눈길을 멈추었다. 널찍한 운동복 반바지가 무릎을 세우고 앉은 그의 허벅지 아래로 흘러내려 가 있었다. 그 넓은 통 사이로 안이 언뜻 들여다보인다.
“속옷은 안 입고 다니나 보지.”
허벅지 안쪽으로 귀두 끝이 반쯤 가려져 보이고 있었다. 권기영이 불쑥 묻자 “예?” 하고 질문을 이해 못한 듯 되물은 그는, 두어 번 눈을 껌벅인 뒤에야 갑자기 당황해서 얼굴을 굳히더니 다리를 움츠려 권기영의 시야에서 사타구니를 가렸다.
“어, ……그, 아까 주스를 쏟아서요. 예비로 가져온 게 없어서,”
“변명할 것 없어. 좀 벗고 다니면 어때. 시원해서 좋다고 그러는 놈들이 간혹 있던데.”
“아닙니다. 늘 제대로 입고 다닙니다.”
“남에게 보여 주는 취미만 없으면 상관없지. 그런 건 아니지?”
“아닙니다. 절대로 안 보여 줍――.”
털을 바짝 곤두세우고 진땀을 흘리며 정색을 하는 녀석을, 권기영은 태평한 얼굴로 말을 툭툭 던지며 빤히 쳐다보았다. 늘 담담하던 녀석이 기를 쓰는 얼굴이라니 제법 보는 재미가 있었다.
김건준은 이내 권기영이 무심한 얼굴로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듯했다. 희미하게 웃음을 띠고 있는 눈매를 뚫어져라 마주 보던 그는 문득 어느 순간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그라운드 위에서는 쏠 듯이 노려봐도 절대로 피하지 않던 놈이.
권기영은 웃긴 놈이라고 생각했다. 어딘가 어색한 듯 시선을 어디에 둘지도 모르고 헤매는 모습이 꼭 동경하는 스타를 눈앞에 둔 수줍은 어린애 같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안경, 안 쓰십니까?”
고개를 숙인 채 불쑥 중얼거리는 말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내용이라 권기영은 테이핑의 매듭을 짓던 손을 잠시 멈추고 말았다.
“운동할 때는 벗어. 위험하기도 하거니와 벗어도 웬만큼은 보이니까.”
“……. 벗는 게 더 잘 어울립니다.”
그 말을 끝으로 녀석은 권기영이 다 묶고 손을 뗀 매듭만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고집스럽게 시선을 떨어뜨리고 있던 녀석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매듭을 만지작거렸다. 놈이 몸을 기울인 순간 땀 냄새가 훅 풍기며 더운 체온이 권기영의 어깨 위로 끼쳤다.
아직 어린놈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거의 다 자란 수컷이다.
기묘하게 불쑥 일렁이는 고양감 속에서 권기영은 문득 얼마 전의 감각을 떠올렸다.
그랬었다.
이놈은 필경 넘어온다.
말을 하고도 자신이 이유도 없이 쓸데없는 말을 해 버렸다는 얼굴로 매듭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놈을 권기영은 지그시 바라보았다. 별안간 변덕스러운 흥이 솟았다. 아주 사소한 유희.
“…―.”
놈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그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끌어당긴 권기영은 바로 앞, 시선의 초점이 간신히 맞을락 말락 한 코앞에서 놈을 들여다보았다. 커다랗게 벌어진 새까만 눈동자 안에 권기영이 비치고 있었다.
“이 정도 거리쯤 되면 도리어 잘 안 보이지. ……가끔은 잘 안 보이는 게 나을 때도 있잖아.”
응?, 나직한 속삭임과 함께 녀석의 두 뺨을 쓰다듬듯이 두드린 권기영은 얼어붙은 듯 권기영을 쳐다보는 녀석의 입술에 아주 잠깐 입술을 맞대었다.
매우 짧은 찰나.
다음 순간 이미 권기영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녀석에게서 선뜻 떨어져 창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 이쪽 팀이 이기겠는데. 너 말고는 별로 전력이 될 만한 놈이 없는 모양이야, 너희 쪽은.”
바깥에서 공을 쫓으며 뛰어다니는 남자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권기영이 여상하게 웃으며 돌아보았다.
김건준은 한쪽 다리를 벤치에 올린 자세 그대로, 아주 작은 미동조차 없이 커다란 눈으로 권기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권기영이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기울이자 그의 입술이 움칫 움직였다.
거미줄에 친친 옭죄었다가 겨우 바닥에 툭 떨어진 벌레 같다.
권기영은 천천히 눈으로 놈을 훑었다. 그 노골적인 눈길 끝에서, 놈이 권기영을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지도 못한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손에 잡힐 듯 보였다. 뭔가 말하려는 듯하면서도 아무 말도 안 나오는 입술만 멈칫멈칫, 간간이 떨리듯 움직일 뿐이다.
“슬슬 나가 볼까. 나는 이제 그만 돌아가 볼까 싶은데.”
더 이상 저 공놀이에 동참할 생각은 전혀 없었던 권기영은 시계를 보았다. 바쁠 일은 없었지만 굳이 여기에 머무를 이유도 없다.
권기영은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순간 놈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게 보였다. 널찍한 어깨가 움찔한다.
권기영은 돌아보지도 않고 앉은 자세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 있는 녀석의 등 뒤로 “먼저 간다.”라고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남기고 나왔다.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심장이 퉁, 퉁, 높다랗게 뛴다. 권기영은 웃음을 터뜨렸다.
놈의 휘둥그런 눈. 넋을 놓던 표정. 움칫하던 입술.
그 모든 것이――참을 수 없이 유쾌했다.
*
차고에 차를 세워 두고 계단을 올라가던 권기영의 귀에 동생이 떠들썩하게 떠들어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뜰에서 또 친구 몇 명 끌고 와서 노는 모양이었다.
지난밤에도 집에 안 들어온 동생은, 요즘 종종 그랬다. 클럽 같은 곳에서 밤새도록 놀다가 호텔에서 뒹굴고 느지막이 귀가하는 짓을 권기영은 일일이 간섭할 생각은 없었다. 권기영 자신도 가끔 내키면 그렇게 놀곤 했고, 무엇보다 어차피 저놈은 그렇게 살 인생이었다. 제 좋을 대로 낭비나 하면서 얼간이처럼 살아가면 그만이다.
여태 녀석은 몇 번이나 크고 작은 사고를 쳤고 그때마다 권기영은 그 수습으로 번거로워야 했지만 상관없었다. 사고라고 해 봐야 몇 푼 돈과 몇 마디 말로 막을 수 있는 정도였고, 그런 일들이 생길 때마다 동생은 점점 더 얌전한 강아지가 되어 갔다.
하룻강아지 같은 위세를 부리며 또래들을 몰고 다니는 동생은 집안에서 자신이 덜떨어진 얼간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고, 그만큼 자신이 비빌 언덕이 어디인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평생 결코 가족에게 대들지 않을 녀석은 가족을―그중에서도 특히 권기영을―은근히 자신과 동일시하며 몹시 자랑스럽게 여겨 주위에 뻐기고 과시하는 도구로 이용을 하면서, 권기영의 앞에서는 절대적으로 복종했다.
그 불쌍하고 비천한 인생이라니.
권기영은 자애로운 왕과 같이 그 경멸스럽고도 가엾은 동생을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권기영이 계단을 올라가 뜰로 올라서자 또래들 사이에서 한껏 거만한 얼굴을 하고 거드름을 피우고 있던 권기철이 “어, 형!” 하고 반갑게 외쳤다. 왁자하게 떠들던 걸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거리는 그 주위 녀석들에게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걸어가던 권기영은 그들 가운데서 김건준을 보았다.
변함없이 반듯한 자세로 꾸벅 고개를 숙이던 김건준과 눈이 마주쳤다. 놈은 일순 눈썹을 치켜올리는가 싶더니 말없이 시선을 돌려 버렸다.
이것 봐라……?, 권기영은 코웃음 쳤다. 이내 놈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동생 쪽을 돌아본다. “빨리 왔네, 형?” 하고 주인 만난 강아지처럼 눈초리를 접는 동생에게, “그래. 너 어제도 안 들어온 모양이던데, 적당한 선에서 놀아 둬라.”라고 짤막하게 충고를 던지고 걸음을 뗐다.
집으로 들어갈 때까지, 저들이 다시 왁자하게 떠들기 시작한 뒤에도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그 확연한 시선을 무시하고 권기영은 등 뒤로 문을 닫았다.
그렇다면 상관없다. 그 여럿 중에서 곧바로 놈이 눈에 띌 정도로 놈에게 흥미가 있는 건 분명했지만 굳이 쫓을 생각까지는 없었다.
게다가 권기영은 확신하고 있었다. 놈은 온다고.
책 한 권을 뽑아 들고 뒤뜰로 나가자 집채 저편에서 녀석들이 떠들어 대는 소리가 건너왔다. 그러나 그사이의 건물이며 무성하게 자란 화초들에 걸러져서인지 귀에 거슬릴 만큼의 소음은 아니었다. 권기영은 그늘진 벤치에 앉아 책을 펼쳤다. 권기영의 냄새를 맡았는지 어디선가 도베르만이 다가와 벤치 아래에 배를 깔고 엎드렸다.
여름도 중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얼마 있지 않아 새로 학기가 시작되면 이만큼의 여유도 부릴 수 없게 될 터였다. 한 해 한 해 지나면서 더해 갈 것이고, 언젠가 다시 여유를 되찾게 될 무렵이면 이미 머리는 하얗게 세어 있을 것이다. 그날까지 그는 언제나 다른 이의 위에 있을 터였고, 그것이 여유나 그 무엇보다도 값지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높다랗게 자라 우거진 나무는 뒤뜰에 넓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권기영은 잎새로 비쳐드는 햇빛들을 가느스름하게 쳐다보다가 눈을 감았다. 값비싼 오수다.
몇 분쯤이나 눈을 붙였을까. 아무런 소리도 없는 곳에 기척이 있었다. 권기영은 눈을 떠 그에게 닿는 시선의 끝에 서 있던 김건준을 보았다.
――그래. 그것 보라지.
권기영은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물 좀 갖다 줘.”
여상하게 말을 꺼내기 무섭게 놈은 멈칫하는가 싶더니 모습을 감추었다가 이내 물컵을 들고 나타났다. 권기영은 그가 건네주는 컵을 받아 목을 축이며 물끄러미 놈을 보았다. 권기영을 말없이 내려다보던 그는 눈이 마주치자 다시 거북한 기색으로 시선을 피했지만 자리를 뜨려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권기영이 빈 컵을 건네며 아무렇지 않게 손가락으로 녀석의 손을 쓸어내린 순간, 그가 무심결인 듯 움칫 손을 움츠렸다. 그 결에 마치 뿌리치는 것처럼 권기영의 손을 쳐 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묵묵히 손을 내려다보는 권기영도, 제풀에 놀란 듯 그 손만 내려다보는 김건준도 말이 없었다. 이윽고,
“아아……, 그래, ‘그게’ 기분 나빴구나.”
권기영이 알겠다는 듯 조용히 중얼거리는 ‘그것’이 무엇을 지칭하는지는 김건준도 바로 알아차렸을 터였다.
권기영은 더는 건드리지 않겠다는 듯 손을 거두었다. 무안하게 뿌리쳐진 손 위로 김건준이 그게 아닌데,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초조한 시선을 준다.
“나는 또, 뭣 때문에 화가 나서 아까부터 눈을 피하나 했더니.”
“화가 난 게 아닙니다.”
권기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꾸가 돌아왔다. 그 목소리야말로 정말로 화가 난 것 같은 목소리라고 김건준 본인도 생각했는지 곧 소리를 낮추어 “정말입니다.”라고 덧붙인다. 권기영은 빤히 녀석을 보다가 “그럼 됐고.” 하고 간결하게 말을 맺었다.
“그, ……왜 그러셨습니까?”
얼마간 망설이던 김건준이 권기영을 똑바로 마주 보며 물었다. 사뭇 진지한 그 얼굴을 낱낱이 바라보며 권기영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 싶었으니까, 그때.”
김건준은 당혹스러운 듯, 좀체 납득이 안 간다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고 권기영은 그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결벽하게 구는 게 좀 우스웠다.
“너 동정이야?”
대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별 뜻 없이 비아냥처럼 물어보았던 권기영은 조개처럼 입을 다물어 버리는 김건준을 보고 도리어 멈칫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외아들이라고 했던가?”
이번에는 예,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이 돌아온다.
아아, 그래서, 하고 중얼거리면서도 권기영은 그 두 가지에 전혀 개연성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가르쳐 줄 사람이 없다고 못 배우는 일도 아니다. 그렇다고 놈이 치명적으로 인기가 없어서 그럴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가장 먼저, 그리고 거의 확실하게 떠오른 결론은,
“섹스에 관심이 없나 보지.”
이번에도 대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긍정이라서가 아니라 생각에 잠기는 눈치였다. 묵묵히 발치를 보던 김건준은 시선을 들어 권기영을 보며 우스울 만큼 진지하게 물었다.
“좋습니까?”
“……. 글쎄, 보통은 그렇다고들 하지.”
이런 어처구니없는 문답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권기영은 반쯤은 정말로 어이가 없어져서 주름이 지려는 미간을 문질렀다.
“나도 좋아하는 편이야. 내 차지라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권기영은 섹스에서 자신이 상대를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을 좋아했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보다 몸이 부드럽고 유연한 여자를 안지, 구태여 남자까지 섹스의 대상에 넣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개인적인 감상까지 남에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건 개인차가 있는 부분이겠고, 무엇보다 확실하게 좋다고 할 수 있는 건 말초 감각이겠지.”
권기영은 벤치에 기대어 앉은 그대로 다리를 들었다.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김건준을 빤히 바라보며 그의 사타구니에 발을 올렸을 때, 놈이 움찔하는 게 발아래로 선명하게 느껴졌다. 어렴풋이 당혹스런 기색을 보이면서도 비키지 않는 김건준과 시선을 맞춘 채 권기영은 지그시 발을 눌렀다. 입을 다물고 있던 그의 턱이 움칫했다.
“그게 어떤 건지는 너도 알 것 아냐.”
자위든 몽정이든, 동정이라고 해서 그 감각 자체를 모를 리는 없다. 옷 너머로 발바닥에 닿는 물컹한 살덩이의 느낌이 완연하게 굳어지기 시작하는 걸 권기영뿐 아니라 그 자신도 알아차렸을 것처럼.
“그야……, 하지만 그렇게까지 좋다고는…….”
“서툰가 보지. 방법이 잘못됐거나.”
혼잣말처럼 우물거리는 놈을 비웃으며 권기영은 느릿하게 발을 움직였다. 점차 단단해지며 발바닥을 누르는 양감.
놈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 아래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권기영을 노려보는 것처럼 뚫어져라 바라본다.
그 당혹감. 불안감. 흥분. 망설임. 그 모든 것들이 손에 잡힐 듯 보였다. 권기영의 심장이 뿌듯하게 부풀었다. 그래, 이 유쾌한 기분. 설렘과도 같은 흥분.
“가르쳐 줄까.”
권기영이 나직하게 말을 던졌을 때, 권기영은 이미 알고 있었다. 움칫하며 혼란스러운 눈으로 권기영을 노려보던 놈이 이윽고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일 것임을.
남자가 자위하는 모습을 처음 보는 게 아니었다. 우연찮게 맞닥뜨렸던 적도 있고, 건방지게 으스대는 놈을 힘으로 깔아뭉개고 강제로 눈앞에서 자위를 시켰던 적도 있었고, 혹은 그를 유혹하려는 의도로 보란 듯이 성기를 주무르는 놈도 있었다.
게다가 권기영은 성에 무턱대고 흥분할 만큼 굶주리지도 않았고, 일단 관계를 맺게 되면 욕구에 탐욕스러웠지만 일상 속에서 이성으로 충분히 성욕을 자제할 수 있을 만큼은 담백했다. 도리어 욕구에 눈멀어 성욕을 일상까지 끌고 오는 놈을 경멸하며 비웃곤 했다.
그럼에도, 권기영은 지금 눈앞에서 억누른 숨을 거칠게 내쉬고 있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놈은 드러낸 성기를 손으로 훑으며 권기영을 뚫어져라 마주 보고 있었다. 처음에 머뭇거리며 쑥스러운 눈치를 보였던 빛은 이미 사라지고, 거기에는 순수하게 욕망을 호소하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 으, ……, …―, 흐, 으, …――.”
어린애라고 생각했는데, 바지 앞섶 사이로 터무니없이 거대하게 비어져 나온 성기는 이미 팽팽하게 충혈되어 묵직하게 끄덕거리고 있었다. 젊은 수컷의 짙은 냄새가 차 안에 가득 찼다.
권기영은 점차 거칠어지는 숨소리를 들으며 자신도 덩달아 가슴속이 고양되는 걸 느꼈다. 그래서, 원래라면 그렇게까지 해 주는 일은 거의 없음에도,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놈의 손 위에 손을 겹쳤다.
“조금 더.”
권기영이 낮게 속삭이며 손을 미끄러뜨려 고환을 그러쥐자 놈이 움찔하는가 싶었다. 더 뻣뻣하게 부풀어 오르는 성기 끝에서 선액이 흘러넘친다. 금세라도 사정할 듯 뻐끔거리는 귀두 끄트머리를 보며 권기영은 자신의 아랫도리까지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다른 손으로 스스로의 사타구니를 더듬자 자신의 성기도 이미 일어서기 시작하고 있었다.
차를 타고 집에서 나와 산자락 위로 올라올 때까지 놈은 조수석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만 있었다. 이윽고 시내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스카이웨이의 구석진 한 자락에 멈춰 섰을 때, 놈의 긴장은 절정에 이른 듯 표정까지 뻣뻣해져 권기영을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싫으면 지금이라도 그만둬. 억지로 데려왔다 칠 생각 없으니까.’
시동을 끄며 권기영이 여상하게 말하자 놈은 곤혹스러운 눈치를 비쳤지만 이내 고집스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권기영이 ‘어려울 것 없어.’라는 가벼운 말로 시작하는 대로, 순순히 제 손으로 옷 위를 더듬고 샅을 부풀리며 여기까지 이끌려 왔다.
“아, ………――!!”
권기영이 놈의 고환을 매만진 순간이었다. 놈의 하체가 움찔하게 긴장하는 걸 보고 지금이라고 권기영이 생각했을 때, 갑자기 놈이 권기영의 손을 움켜쥐고 잡아끌어 자신의 성기를 억지로 쥐여 주었다.
권기영은 뿌리칠 틈도 없이 자신의 손 안에 뿌듯하게 들어찬 놈의 성기에 일순 숨을 멈추고 말았다. 불이 붙은 듯 뜨겁게 맥박 치는, 한 손으로 미처 다 감싸 쥘 수도 없이 두꺼운 타인의 성기.
그때 풋풋한 비린내가 확 번지면서 놈이 성대하게 토정했다. 차 유리며 대시보드에 하얗게 정액이 튀며 권기영의 손도 끈적하게 젖었다.
하아. 하아. 하아……. 놈이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차 안이 엉망이 될 정도로 토정을 하고서도 아직껏 단단함이 남아 있는 성기를 감싸 쥔 권기영의 손을, 놈이 느릿하게 애무하듯 어루만졌다.
“좋았나 보지?”
권기영이 놈에게서 손을 빼자 손마디 틈새에 흥건하게 고여 있던 정액이 끈끈하게 흘러내렸다. 권기영은 눈살을 찌푸리고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놈에게 손을 내밀며 대시보드 위에 있던 휴지를 눈짓을 가리켰다.
“닦아.”
“…….”
김건준은 권기영의 손을 잡아끌었다. 날름, 놈의 혀가 손가락 끝을 휘감은 순간 권기영은 몸속이 오싹해졌다.
더러워진 손가락을 하나하나 느리게 입속에 집어넣어 빨아먹는 행위는 세정과 애무의 사이를 미묘하게 오가고 있었다. 권기영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직선적인 눈은 그것이 애무라고 말하고 있다.
손가락 사이사이, 손바닥의 주름 하나하나, 매끄러운 손등, 하나도 남김없이 혀를 미끄러뜨리는 김건준을 보며 권기영은 이미 조금 전부터 어슴푸레하게 싹 틔우고 있던 흥분이 거세게 살아나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그래, 아직 어린 풋내가 난다만, 때로는 그런 풋풋한 유혹에 더욱 회가 동하기도 하는 법이다.
권기영은 웃었다. 놈에게 한 손을 맡겨 둔 채 다른 손으로 자신의 퍼스너를 내리고 그 안에서 슬며시 일어서려는 기미를 보이는 성기를 끄집어냈다. 손가락을 빨던 녀석이 멈칫하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대번에 그 시선에 욕망이 번지는 걸 바라보면서 권기영은 만족스럽게 자신의 성기를 훑어 올리기 시작했다.
놈의 시선이 홀린 듯 권기영에게 붙박였다.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아쉬운지 권기영의 사타구니를 잡아먹을 것처럼 바라보면서, 놈의 숨결이 차차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들떠 오르는 욕망을 고스란히 엿보면서 권기영은 아랫도리뿐 아니라 심장까지 고양되어 갔다. 놈은 권기영을 갈망하고 있었다. 그 어리고 풋풋한 욕구에 권기영을 가득 채워 놓고 어쩔 줄 몰라 끙끙거리고 있었다. 그 애타는 갈망을 바라보는 이 쾌감이라니.
차 안에 후덥지근한 열기가 끈끈한 침묵과 함께 감돌았다.
이윽고,
“…―, ――!!”
권기영이 욕망을 터뜨리는 순간 김건준의 눈이 번들거렸다. 사정을 한 것은 권기영이었는데도 오히려 그가 절정을 맞은 것처럼 입매가 부들 떨린다. 그 모습 하나하나를 눈에 담으며, 권기영은 아주 지독하게 저릿저릿한 절정감을 느꼈다.
손으로 귀두를 둥글게 감싸 쥔 탓에 정액은 바깥으로 튀지 않고 손바닥 안쪽만을 흥건하게 적시며 흘러내렸다.
“……, …―후우…….”
권기영은 끈적한 손을 내려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위를 할 일은 거의 없었다. 자위보다는 상대가 있는 편이 더 즐거웠고 상대가 부족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끔은 이런 자위도 나쁘지 않았다. 이번에는 상당히 좋았다.
“워낙 오랜만이라서 어떨까 했는데, 제법 나쁘지 않은걸.”
“……. 그럼 평소에는 잘 안 하십니까?”
묵직하게 늘어진 권기영의 사타구니를 내려다보는 김건준의 목소리가 낮게 쉬어 있었다. 놈의 성기가 다시 불룩하게 일어서기 시작하는 걸 곁눈질로 보며 권기영은 속으로 웃었다.
“자위는 거의 안 하지. 상대가 있으면 할 게 많으니까. 굳이 삽입을 하는 게 아니라도 입으로 해 준다든가. 보통은 그게 더 쾌감이 크고, 또 편해서 좋아해.”
때로는 사타구니에 삽입을 하기보다도 구음을 받는 것이 더욱 유쾌할 때가 있었다. 본인의 의지로 무릎을 꿇고 복종을 하는 상대를 내려다보는 정복감.
권기영은 묵묵히 입 다물고 권기영을 흘끗거리는 그를 즐거이 바라보았다.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담백했던 어린 소년은, 지금 바싹 마르는 입술을 연신 축이며 뻣뻣해지는 아랫도리를 주물거리고 있었다. 그 모든 순간 동안 그의 시선은 권기영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럼,”
이윽고 소년이 낮게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을 때, 권기영의 심장은 터질 듯 부풀었다. 손끝까지 저릿저릿했다.
“제가 해 드려도 될까요.”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권기영은 이 반듯했던 소년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욕망을 호소하는 걸 지켜보면서 천천히 입매를 올렸다. 이 비틀린 만족감은, 아직 어리지만 틀림없이 집채만큼 크게 자랄 호랑이 새끼를 희롱한다는 쾌감이다.
놈은 다시 불룩하게 솟아오른 사타구니를 붙들고 권기영을 애타게 갈망하고 있었다.
그런 놈이 문득 사무치게 사랑스러워졌다. 이 순종적이고 잘생긴 호랑이 새끼가 못내 귀여워 권기영은 변덕스럽게 놈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왈칵 입술을 맞대고 혀를 밀어 넣자 놈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 결에 더 흥분했는지 아랫도리를 부르르 떤다.
얼어붙은 듯 굳어 있긴 했지만 권기영이 혀를 움직이는 대로 순순히 입을 벌려 주며 가쁜 숨만 내쉬던 그는, 이윽고 권기영이 놈의 머리를 아래로 밀어 내리자 순순히 허리를 구부렸다.
곧 떨리는 입술이 권기영의 성기를 삼켰고, 그다음 순간 머뭇거리던 기색은 씻은 듯 사라지고 허겁지겁 갈증을 채우려는 사나운 욕망만 남았다.
한 번도 남자의 성기를 물어 본 적이라곤 없는 입이 욕심 사납게 권기영을 빨아 당기며 우물거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권기영은 놈의 입안에 토정했다. 그 순간 놈은 그것을 고스란히 마시며 그 자신도 몸을 부르르 떨면서 사정했고, 권기영은 사정보다도 더욱 큰 희열 속에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렇게 양순하고 예쁜 호랑이 새끼라니.
이 완벽한 순종이라니.
그것은 완벽에 가까운 희열이었다.
* * *
김건준이 순진했는지는 몰라도 수줍거나 내성적인 성격은 결코 아니었음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뒤로 김건준은 욕망의 눈으로 권기영을 보았다. 감추거나 얼버무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순수한 찬탄과 동경에는 명백한 욕망이 서려 있었다.
동생이나 여타 또래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나름대로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 딱히 권기영에게 시선을 집중하지도 않았고 무난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또래들의 화제에 섞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권기영은 그가 간간이 시선을 줄 때면 거기에서 분명한 욕망을 느꼈다.
사랑스러웠다. 권기영만 쳐다보며 그를 갈구하는 그 한결같은 눈이 몹시 흡족하고 만족스러웠다.
이를테면 지금도 그렇다.
친구들을 몰고 와 뜰에서 자동차인지 바이크인지를 두들기며 떠들썩하게 놀고 있던 동생에게 짤막하게 인사를 건네고 2층 방으로 올라온 권기영은, 그들 사이에 섞여 있던 김건준이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에서 빠져나와 2층을 기웃거릴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몇십 분도 지나기 전에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테라스에 나와 앉아 있던 권기영은 뒤에서 다가오는 기척에 별로 놀란 빛도 없이 돌아보았다. 김건준이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에 다가와 앉았다.
“학생이 놀기만 해도 돼? 기철이 녀석은 그렇다 쳐도, 너 잘살아?”
권기영이 다시 책으로 시선을 떨어뜨리며 심상하게 묻자 김건준이 웃었다. “먹고 살 만은 합니다.”라고 선선히 대답하는 게, 그럭저럭 만족할 만큼은 되는 모양이다.
“그래도 확실히 요즘은 아버지도 일이 힘에 부치시는 눈치라서, 어서 도와드리고 싶긴 해요.”
“효자였군. 아버지가 든든하시겠어.”
“아하하, 지난주에 같이 내기 테니스를 쳐서 제가 이겼더니 천하의 불효자라고 역정을 내시던데요.”
꽤 살뜰한 부자지간인 모양이다. 자신의 주위에서는 보기 드문 분위기라고 생각하며 권기영은 놈의 아버지가 한다는 일을 떠올렸다. 그 업계라면 얼마 전부터 규제도 바뀐 데다 원자재 값도 꾸준히 오르고 있어서 한동안은 힘들 성싶었다. 아마 몇 년 안에 망하는 곳도 꽤 나올 거다.
그러나 이 녀석이 얹혀 있다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말수가 적긴 하지만 가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순간순간 놀랄 정도로 똑똑한 구석이 있었다. 뭘 시켜도 요령을 금방 아는 데다 어수룩하게 손해 볼 일은 결코 없을 것 같다.
아직 어리고 이렇게 순종적인 놈이 아니었더라면, 권기영은 이놈의 목줄기를 미리 물어뜯어 놓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여차하면 기철이나 도와줘. 그놈을 간판으로 앉혀 놓고 실질적으로는 네가 굴리면 되겠지. 아마 적당히 비위나 맞춰 주고 돈이나 넉넉히 주머니에 들어가게 해 주면 네 뜻대로 굴리기도 쉬울걸, 단순한 놈이니까.”
그렇게 할 거면 회사 차리는 건 내가 도와주지, 권기영은 농담처럼 가볍게 웃었지만 실제로 놈이 하겠다면 그렇게 해 줄 요량도 있었다. 그러나 놈은 웃기만 했다. 그럴 줄 알았다. 실세든 뭐든 남의 밑에 머리 박고 있을 놈은 아니다.
“기철이를 많이 아끼시나 봅니다.”
“뭐?”
“처음에는 무척 방임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뭘 하든 자유롭게 놔두면서 뒤를 돌봐 주실 생각이신 것 같아서요.”
권기영의 손바닥 위에서 움직이기만 한다면, 그 전제를 놈이 입속으로 삼키는 게 보였다. 무슨 말을 해도 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 놈은 알고 있었다. ……이러니까 녹록지 않은 거지, 권기영은 웃었다.
“어쨌거나 동생이니까.”
“동생……, 부럽군요.”
김건준은 테라스 바깥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 아래에서 권기철이 무리 속의 임금님처럼 떠들어 대는 소리가 올라오고 있었다.
“제가 선배님이랑 이야기하거나 그러는 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에요, 기철이는.”
갑자기 김건준이 불쑥 말했다. 권기영은 “브라더 콤플렉스가 있는 놈이라니까.” 하고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얼마 전 예고도 없이 김건준을 데리고 차를 몰고 나갔다 왔을 때에도 권기철은 몹시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었다. 권기영에게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지만 아마 놈의 성격상 김건준에게는 우리 형, 우리 형 하면서 싫은 소리깨나 했을 거다.
“너도 형이라고 부르든가.”
“……. 그래도 됩니까?”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인데 녀석이 눈을 크게 뜨며 돌아보았다. 그 얼굴을 보고서야 권기영은 어쩌면 놈이 몹시 그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고 뒤늦게 알아차렸다. 동시에 하, 하고 웃고 만다. 원래라면 권기영이 선선히 옆에 둘 만큼 만만한 놈이 아닌데도 결국은 귀여운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건 이 때문이다. 이 맹목적이고 한결같은 갈구.
“그러든가. 하지만 난 동생이랑 그런 짓 하는 취미는 없는데.”
권기영은 놈의 사타구니로 지긋한 시선을 주었다. 당장 놈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러나 당황하거나 망설이는 빛 없이 바로 몸을 일으키는가 싶던 녀석은 권기영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었다.
권기영은 퍼스너를 내리고 상기된 얼굴을 그의 사타구니에 묻는 김건준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핥았다. 기영 형, 바싹 쉬어 속삭이는 목소리가 권기영의 사타구니에 묻혔다.
권기영은 소리 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발을 들어 놈의 사타구니를 문질렀다. 놈이 핥고 있는 자신의 성기와 마찬가지로 놈도 이미 발기하고 있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둘만 있으면 놈은 권기영을 만지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면 권기영은 그런 놈을 즐거이 충분히 바라본 뒤에야 너그럽게 놈이 바라는 걸 주는 것이다.
이미 김건준은 담백하고 순진한 소년은 아니었다. 뭐든 배우는 게 빠르면 이런 것도 빠른지, 한 번 두 번 거듭할 때마다 놈은 눈에 띄게 능숙해졌다. 입맞춤도 애무도 이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심지어 농후하게 되받아치기도 했다.
그러나 권기영이 기다리라고 하면 욕심 가득하게 거친 숨을 허덕거리면서도 애써 참다가 결국은 앓는 소리처럼 ‘선배님.’ 하고 애원하듯 불렀고, 그렇게 애원하는 놈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권기영은 그 애원을 만끽한 다음에야 놈의 사타구니를 쓰다듬어 주는 것이었다.
“…―.”
절정은 오래지 않아 찾아왔다. 놈은 권기영이 어디를 핥고 언제 빨면 가장 민감하게 느끼는지 알고 있었고, 권기영은 순간 눈앞이 아찔하게 새카매지는 감각과 함께 사정했다. 놈 역시 자신의 성기를 꺼내어 권기영의 발목이며 다리에 문지르면서 토정한다.
“……형, 기영 형…….”
놈은 권기영의 시들어 가는 성기에 후희를 퍼붓는 양 부드럽게 핥으며 그 이름을 그렇게 부르고 싶었던 듯이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권기영은 어이없이 헛웃음을 웃으면서도 그게 꽤 귀여워 손을 뻗어 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눈동자를 들어 시선을 맞춘 놈은 권기영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어 왔다.
이미 말끔히 삼켰다고는 하나 정액이 남아 있을 입술이 썩 달갑지는 않았지만, 권기영은 순순히 놈에게 입을 맞추어 주었다. 이놈에게는 나도 제법 관대하단 말이야, 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아닌 게 아니라 꽤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팅만으로 이렇게 만족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
그때 김건준이 문득 생각에 잠긴 듯 권기영의 어깨 너머 허공으로 시선을 주었다.
“왜.”
“……아니요. ……그냥 갑자기 좀, …―넣으면, 어떤 기분일까 해서요.”
망설이는 기미로 중얼거리는 그의 말을 듣고 권기영은, 그러고 보니 놈에게 넣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남자와의 섹스에서 가장 큰 만족을 주는 부분은 정복감이다. 그러나 놈은 처음부터 순종적이었기에 여태 한 번도 ‘강제로 굴복시킨다’는 유의 비틀린 쾌감은 떠올리지 않았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놈에게 넣는다면. 딱히 새삼스럽게 구미가 당기는 건 아니었지만 놈이 원한다면 굳이 거절할 건 없었다.
“왜. 해 보고 싶어?”
원한다면 넣어 줄 수도 있다는 투로 묻자 놈은 잠시 생각해 보는 눈치였다. 그러다가 언뜻 권기영의 눈치를 보는 게, 해 보고 싶긴 한데 뭔가 걸리는 게 있는 낌새다.
“하지만 아프다고 들어서요. 힘드실 텐데…….”
“……. 나? ……. 내가?”
권기영은 기묘한 얼굴로 놈을 바라보았다. 놈 역시 어리둥절하게 권기영을 마주 보다가 다음 순간 어, 하고 허를 찔린 듯 중얼거렸다. 동시에 권기영도 대화의 어느 부분이 어긋났었는지 알아챈다.
하,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이놈이 하는 짓이 귀엽다고 많이 봐줬더니 기어오르려 드는 데에도 정도가 있다. 권기영은 불쾌감이 솟아 쌀쌀맞게 “웃긴 소리.” 하고 내뱉었다.
“사내놈한테 깔리라고? 내가 그런 꼴사나운 짓을 해? 건방진 소리 마. 어딜 네가 주제도 모르고,”
그러나 말하던 도중에 권기영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김건준이 얼어붙은 듯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권기영을 보고 있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로 뒤통수를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놈의 눈동자 저 깊은 곳이 언뜻 흔들리는 듯했다. 그와 함께, 알아채지도 못할 만큼 작던 불씨 위에 기름을 들이부은 듯 확 하고 타오르는 푸르스름하고 선뜩한 감각.
권기영은 심장이 싸늘해졌다. 저릿저릿하게 피어오르는 본능적인 경계, 경고.
권기영의 말이, 놈이 의식하지 않고 있던 수컷으로서의 본능,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자존심을 흔들었는지도 몰랐다. 눈앞에 있는 건 자신도 포효할 수 있음을 깨달은 젊고 흉맹한 수컷이었다.
――그래. 놈도 수컷이었다. 남 밑에 순순히 머리 숙이고 고개를 처박을 놈이 아니라는 걸 머리로만 알량하게 알면서 간과하고 있었다. 작정하고 물어뜯으려고 덤빈다면 대단히 귀찮고 번거로워질지도 모를 어린 싹.
위험한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자각이 그제야 들었다.
권기영은 표정 없이 묵묵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김건준을 마주 보았다. 그렇다면 여기까지일 따름이다. 권기영은 선뜻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였다. 놈이 얼핏 낯을 일그러뜨리는가 싶었다. 찰나 사이에 복잡한 심경이 수없이 교차하는 듯했다. 그러나 권기영이 미련 없이 돌아서려던 때, 움칫 움츠러드는가 싶던 김건준의 손은 권기영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떨리는 손은 허리에 닿기 무섭게 단단히 부둥켜안으며 다급하게 매달렸고, 그는 권기영의 허리에, 배에, 닥치는 대로 입 맞추며 신음처럼 속삭였다.
“아닙니다. 그런 말 하지 않을게요. 안 해도 괜찮아요. 같이 이렇게 있을 수만 있어도 좋으니까, ……그러니까, 기영 형,”
불안스럽게 속삭이며 연신 입을 맞추는 놈을 내려다보며 권기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서 그만둬도 아무런 상관도 없다. 아니, 여기서 그만두는 편이 나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이대로 떨치고 가 버리면 그만인데, 왠지 뭔가가 아쉽게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 같았다. 잘라 버리기 아쉬운 미련은 이렇듯 잘 맞는 녀석이 드물어서인지도 몰랐고, 혹은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보이려는가 싶다가도 결국 자신의 발아래에서 배를 드러내는 이 순종적인 호랑이 새끼가 아쉬워서인지도 몰랐다.
“형, 기영 형…….”
“…….”
권기영은 애가 끓는 듯 연신 속삭이는 김건준을 내려다보다 혀를 찼다. 움켜쥐고 있던 주먹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
적당히 그만두는 편이 좋아. ――하지만 조금쯤은 더 지켜보다 그만둬도 되겠지. 지금 바로 잘라 낼 것까진 없잖아.
이성이 전자를 경고하는데도 감정이 후자에 무게를 싣는다. 아직은 손 놓고 싶은 생각보다는 좀 더 데리고 가고 싶은 생각 쪽이 더 컸다. ……그래. 그러면 조금만 더.
어쩌면 자신은 놈에게 지나치게 너그러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권기영은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그리고 냉정하게 놈의 턱을 들어 입을 맞춰 준다. 기영 형, 놈이 한숨처럼 속삭이며 열렬하게 권기영의 혀에 매달렸다.
하는 수 없다. 아직까지는 이 맛이 몹시 달았으니까.
*
권기철은 잔뜩 취해 걸음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술에 가볍게 약이라도 섞은 모양이다.
권기영은 냉랭한 시선을 던지곤 비어 있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사촌이 오랜만에 얼굴이라도 보자고 불러내 술 한잔하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친김에 근처에 있던 클럽에 온 참이었다. 예전에 권기영이 가끔 왔던 곳이고 요즘엔 동생이 종종 드나든다고 들었지만, 이렇게 맞닥뜨릴 줄은 몰랐다.
“어, 기철이도 와 있었네. 부를까?”
“됐어.”
옆에서 리듬을 타고 있는 여자와 어깨를 문지르며 시시덕거리고 있던 사촌이 홀 가운데에 있는 무리 쪽으로 시선을 주다가 동생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권기영이 냉랭하게 대꾸하자 어깨를 으쓱하곤 모르는 척한다.
난 오늘 여기 물 좀 살피고 올게, 하고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사촌을 본체만체하고 권기영은 동생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녀석은 제 덩치의 반밖에 안 되어 보이는 여자를 부둥켜안고 몸을 비벼 대고 있었다. 여기에서 만났다기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사이인 듯한 분위기를 보고, 권기영은 동생이 종종 친구들과 통화하면서 ‘내 몸상대’라고 낄낄거리곤 하던 게 저 여자인가 보다고 짐작했다. 동생뿐 아니라 저 여자도 약을 들이켰는지 몽롱하게 반쯤 눈이 풀려 있었다.
끼리끼리 잘들 논다, 권기영은 코웃음을 치며 맥주병을 기울였다. 녀석이 뭘 하든 관심 없었지만 딱히 이런 곳에서 여자를 물색할 생각도 없었고 음악을 탈 기분도 들지 않아 동생에게 무심하게 시선을 주던 권기영은, 곡이 끝나자 잠시 쉴 요량인지 홀 가장자리로 자리를 옮기는 동생을 눈으로 쫓다가 눈살을 찌푸리고 만다.
동생과 종종 같이 놀러 다니는 무리 몇 명이 가장자리에 서 있었는데, 그들 중 하나랑 뭔가 이야기를 나누며 키득거리던 동생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은근히 건네주는 게 보였다. 흘끔 눈치를 살피듯 주위를 둘러본 다른 놈도 동생에게 손을 내밀어 그 뭔가를 얻어 간다. 마치 대단한 은전이라도 베푸는 것처럼 거만한 꼴로 동생은 이놈 저놈에게, 그리고 그의 옆구리에 달라붙어 있는 그 몽롱하게 취해 있는 여자에게도 그 작은 것을 건넸다.
권기영은 혀를 찼다. 저 앞뒤 분간 못하는 얼간이가 또 사고를 칠 요량이다. 놈이 어리석게 인심을 쓰고 있는 게 크랙 따위라는 건 불 보듯 뻔했다. 어린놈이 돈으로 쉽게 손에 넣어 저렇게 뿌리고 다닐 만한 거면 대단한 물건은 아닐 테고 가볍게 트립이나 하는 종류겠지만, 저런 짓을 해서 좋을 일은 당연히 없었다. 나한테도 좀 달라며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리는 꼴을 보면서 좋아라 하는 저 멍청이는 그런 생각을 할 머리도 없는 모양이었지만.
아무래도 저놈을 불러다가 저 쓸모없는 귓구멍에 한마디 단단히 박아 둬야겠다고 권기영이 생각할 때였다.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걸어가는 동생의 모습을 눈으로 쫓다가 멈칫했다.
동생이 실실거리며 약을 건네주는 상대가 눈에 들어왔다. 벽에 기대어 서 있던 그 훤칠한 남자는 김건준이었다. 같이 놀러 왔던 모양이다.
약을 건네받은 김건준은 난감한 얼굴로 그걸 내려다보곤 동생에게 다시 돌려주려는 눈치였지만 동생은 이미 그 앞을 스쳐지나 다른 놈을 붙들고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그때 동생의 ‘몸상대’인 여자가 김건준에게 말을 붙였고, 이미 알고 있는 사이인 듯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던 김건준은 동생을 가리키며 그녀에게 약을 건네주었다. 아마도 그녀더러 돌려주라는 것 같았는데 눈치를 보아하니 종종 그런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
주위에 휩쓸릴 만도 한데 꿋꿋하게 선을 지키는 그를 권기영은 멀찍이서 시선으로 훑었다. 어둑하게 그림자가 진 곳에 가만히 기대어 서서 맥주만 마시고 있는데도 워낙 키며 몸집이 훌쩍 크다보니 금방 눈에 들어왔다.
아니, 체구 때문만이 아니다. 넉넉하게 웃으면서 주위 녀석들과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놈은, 그 나이 대에 쉽게 보기 힘든 여유로운 자신감이 은연중에 배어 있었다. 인기도 제법 있는지 놈에게 은근히 시선을 던지며 말을 붙이는 여자들도 여럿 보였다.
그래, 썩 괜찮은 수컷이다. 지금도 멀찍이서 봐도 당장 눈에 띌 정도인데 몇 년쯤 지난 뒤엔 어떨까. 아마 어지간해선 당해 낼 놈이 없게 될 터였다.
권기영은 김건준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천천히 살폈다.
놈은 요즘 빈번하게 권기영의 집을 찾아오고 있었다. 집뿐 아니라 권기영이 아침에 운동을 하는 코스나 체육관에도 얼굴을 내밀곤 했다. 그리고 그렇게 마주칠 때마다 놈은 권기영과 둘만 남게 되면 약속이라도 한 듯이 권기영에게 입 맞추고 정성 어린 애무의 손길을 뻗치곤 했다.
하루하루 놈이 권기영에게 더욱 깊이 탐닉해 가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고, 그 관계는 만족스러웠다. 놈이 권기영을 바라보는 찬탄 어린 시선, 애 끓는 목소리, 쓰다듬고 있으면서도 아쉬워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손길 하나하나가 권기영에게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을 주었다.
게다가 놈은 권기영이 뭘 싫어하는지 잘 알았다. 절대로 고의로는 권기영을 향해 사정하지 않았고 가끔 한창 달아올라 권기영에게 사타구니를 문지르다가 자칫 정액이 묻기라도 하면 늘 정성껏 닦아 내었다. 자신의 욕구를 만져 달라고 밀어붙이지도 않았고, 놈이 권기영의 성기를 구음한 뒤에 입을 맞출 때에는 반드시 어느 정도의 시간차를 두고 조심스럽게 했다. 권기영이 언짢아하는 눈치를 보이면 한창 달아올라 있을 때라도 힘겨워하는 기색을 역력히 보이면서도 물러났다.
놈은 권기영에게 깊이 몰입해 있었으며 또한 필사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인가 권기영은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뭔가가 까끌까끌하게 걸리는 기분.
그게 뭘까, 알 수 없지만 뭔가 걸리는 기분을 냉정하게 되새겨 보며 권기영이 놈과 거리를 두어야 할까를 생각할 때면, 무서울 만큼 머리가 좋고 눈치도 빠른 놈은 곧 권기영에게 애원하는 것이다. 형, 기영 형,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뭐든 할게요, 서슴없이 무릎을 꿇고 속삭이며.
틀림없이 위협적인 수컷으로 성장할 게 분명하게 예상되는 놈인데도, 동시에 이렇게나 완전한 복종을 표하는 녀석이라니.
애무만이 아니라 아예 놈에게 삽입해서 확실하게 섹스를 해 볼까, 그런 생각도 했다. 그런 뒤 철저하게 깔아뭉개면 이 미묘하게 까끌거리는 기분도 가라앉을까 싶었다. 그러나 내키지 않는 건, 그러면 정말로 놈을 내칠 수 없게 되어 버릴 것 같았던 탓이다.
뭘까. 틀림없이 놈과의 관계는 권기영에게 더없는 만족감을 주고 있었고 딱히 이렇다 하게 걸리는 부분이 확고하게 보이는 것도 아니었는데 왠지 모르게 위험하다는 기분이 들고 있었다.
권기영은 맥주병을 기울이며 옆의 또래와 아무렇지 않게, 그에게 보이던 간절하고 아슬아슬한 빛이라곤 없이 편안하고 넉넉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놈의 모습이 퍽 낯설다고 생각했다.
“자기, 오랜만이네.”
그때 권기영의 어깨에 팔을 감으며 속삭이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권기영은 그녀에게 시선만 흘끗 주곤 “응.” 하고 무뚝뚝하게 대꾸하며 뺨에 입 맞추었다. 클럽 오너인 그녀는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권기영의 뺨에 자신의 뺨을 톡톡 부딪쳤다.
“뭘 그렇게 봐? 아, 기영 씨 동생?”
“아니…….”
그 뒤를 가리키는 권기영의 가벼운 턱짓만으로도 그녀는 김건준을 눈에 담았는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괜찮은 놈처럼 보이지?”
“응, 동생 친구지? 자주 같이 와서 알아. 게다가 저 가운데서 유일하게 약을 한 번도 안 했을걸.”
저때에는 분위기에 휩쓸려 한 번이라도 해 보기 쉬운데 의지가 확고하단 말야, 아님 그냥 샌님인가?, 하고 그녀는 깔깔 웃었다. 권기영은 놈에게 시선을 주는 채로 냉랭하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기철이한테 약 주지 마.”
“어머, 왜 이래. 우리 아냐. 다른 데서 가져오는 거라구. 안 그래도 별로 곱게 보이지는 않는데 기영 씨 동생이라서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는 거야. 기영 씨야말로 동생한테 말 좀 해 주지? 우리 가게에서 남의 약 돌리지 말라고? 들어 보니까 별로 질도 안 좋은 것 같던데.”
권기영은 혀를 찼다. 조만간 말해 두지, 하고 자신의 뺨을 밉살스럽다는 듯이 깨무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우리도 팔 건 좀 팔아야지, 하고 그녀가 키득키득 속삭였다.
“하긴 저 동생 친구 같은 애만 데려오면 팔아먹기도 힘들겠어. 쟤는 기영 씨 동생이 나눠줘도 꼭 그걸 동생한테나 아니면 동생 애인한테 돌려주더라.”
“그런 걸 일일이 다 보고 있었나 보지.”
“눈에 띄는 남자잖아? 나 말고도 눈여겨보는 사람 많을걸.”
그녀는 웬 바보 같은 소리를 하냐는 투로 웃으며 야릇한 시선을 저쪽으로 주었다. 권기영은 부정할 마음은 없어 잠자코 있었다. 분명 김건준은 눈에 띄었다. 딱히 무슨 일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해도 천천히,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온다.
“기영 씨도 한창 여기 올 때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에 확 들어왔는데, 저 애도 만만찮단 말야.”
“내가 저랬어?”
“음…… 기영 씨가 더 화려했지?”
권기영이 픽 웃으며 “무슨 눈요깃거리 공작새 같기라도 했나 보군.” 하고 내뱉자 그녀도 조그맣게 깔깔 웃었다.
“존재 자체로 눈이 가는 사람이 있잖아. 아, 정말 탐나는 수컷이다, 한번 먹어 보고 싶어――이런 거.”
권기영은 그녀에게 짧은 시선을 주었다. 그래서 나한테도 대뜸 자자고 했었나 보지, 라고 과거에 있었던 일을 비아냥거리듯 중얼거리자 그녀는 다시 깔깔거리며 웃고 만다. 권기영의 귀에 입술을 문지르다가 “한 번 자고 말았잖아.”라며 귓바퀴를 살짝 씹는다.
그러나, ‘화려하다’라. 그 말을 듣는 건 두 번째다. 심지어 첫 번째도 얼마 전에야 들었다.
권기영은 자신이 타인의 눈을 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자신보다 세고 강한 동성, 자신에게 보다 많은 것을 줄 수 있는 이성, 그런 것은 본능이 알려 주는 탓이다.
그러나 멋지다, 세련되다, 강하다, 세다, 그런 숱한 말을 듣는 와중에도 화려하다고 말했던 사람은 없었는데, 그 말을 얼마 전에 들었다.
――처음 봤을 때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었어요. 저렇게 화려한 사람이 있구나 하고.
애무 뒤 권기영에게 연신 입을 맞추던 김건준이 뜬금없이 불쑥 꺼낸 말이었다. 그때 권기영은 무척 우스운 기분으로 ‘화려해?’라고 되물었다. 내가 어지간히 요란해 보였나 보지, 하고 웃는 권기영에게 김건준은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숨이 막혔어요.
너무 과분한 찬사인데, 하고 권기영이 웃음을 터뜨리자 김건준은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그 말은 그보다 더한 찬사이기라도 했는지 겸연쩍은 얼굴을 하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면서 한층 더 짙은 입맞춤을 퍼부어 댔다.
얼마나 그렇게 수 번, 수십 번을 조심스러우면서 열렬하게 입 맞추었을까. 놈이 어느 순간 문득 아주 조심스럽게, 어렴풋이 떨림조차 감춘 목소리로, 나직이 속삭였다.
――기영 형, 좋아해요.
매우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을 만한 목소리였다. 억지로 억눌렀지만 말꼬리가 긴장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권기영은 이것이 놈 나름대로 내린 결단임을 깨달았다. 스스로에게도, 그리고 권기영에게도 확고하게 알리는 ‘고백’이다.
권기영은 진지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놈을 마주 보았다.
그런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놈 나름대로는 내색하지 않으려 했는지는 모르지만 설마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가. 그런 눈길로 바라보고 그런 손길로 만져 오면서.
권기영은 대답하지 않고 대신 놈에게 입을 맞추었다. 놈의 어깨가 희미하게 아주 조금 늘어졌다. 그 입맞춤이 놈의 고백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그러나 대답을 추궁하기는 두려웠는지 놈은 순순히 그 입맞춤을 받아들이며 더 이상은 말을 하지 않았다.
“…….”
권기영은 주위에 제법 사람을 두르고 있는 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됐다. 신경 쓸 필요 없다. 가벼운 관계를 굳이 무겁게 만들 필요는 없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눈을 뗄 수 없다, 라…….
그녀의 말대로 ‘화려하다’라는 게 ‘탐나고 먹어 보고 싶다’는 의미라면, 또한 놈이 말했던 듯이 ‘화려하면 눈을 뗄 수 없다’면, 저놈 역시 ‘화려한’ 남자라고 해야 할 성싶었다.
“저놈도 화려해 보여?”
권기영이 김건준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묻자 그녀는 글쎄, 하고 고개를 기울이며 야릇하게 웃었다.
“기영 씨랑 다르지만, 눈에 띄는 건 분명하지. 수수해 보이는데 은근히 눈이 가거든. 분명히 굉장히 맛있을걸.”
가느스름해지는 그녀의 눈매에 욕심이 서리는 걸 보고 권기영은 코웃음 쳤다. 그래, 그 말은 더할 나위 없는 정답이다.
“가서 자자고 해 보지?”
“옆에 나보다 어리고 예쁜 것들이 눈독 들이는 것 좀 봐. 난 싫어. 기영 씨랑 놀래.”
그녀는 키득거리면서 권기영에게 뺨을 비비다가 귓불을 잘근거렸다. 권기영은 성가셨지만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아 쌀쌀한 시선만 한 번 주고 내버려 뒀다. 원래부터 스킨십이 진한 편이기도 했지만 약간 취한 것 같았다. 이 여자도 어지간히 똑똑한 여자니 약은 아닐 테고 그냥 술이나 조금 들어간 듯하다.
그때다. 저쪽 구석에서 같이 온 일행인 듯한 여자애 하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김건준이 이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별 뜻 없이 고개를 돌린 듯 부드럽게 눈매를 휘고 웃고 있던 얼굴 그대로 이쪽을 본 녀석이, 그대로 스쳐 지나려던 시선을 멈추었다. 놈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권기영 역시 그늘진 곳에 있어 금방 알아보기는 힘들었을 텐데도 잠시 뚫어져라 이쪽을 보던 녀석은 맥주병을 옆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이리로 걸어 나섰다.
우연히 이쪽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는 게 아닌, 똑바로 이쪽을 보면서 인파를 헤치고 성큼성큼 걸어오는 녀석은 권기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 시선은 어두운 조명이 비친 탓인지 기묘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어머, 저 애 이쪽으로 오네? 자자고 해 볼까?”
오너가 장난스럽게 키득거렸다. 그런데 왜 저렇게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담, 꼭 사람 하나 잡을 것 같은 얼굴로, 하고 중얼거리던 그녀는 도중에 말을 멈추고 말았다. 녀석이 바로 몇 걸음 앞까지 다가왔고, 그제야 놈이 다름 아닌 그들에게로 오고 있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
서늘하게 굳어진 얼굴로 단숨에 다가온 놈은 그 커다란 손에 다 들어가는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우악스럽게 움켜쥐고 당장 권기영에게서 잡아뗐다. 짤막한 비명을 지르며 놀라서 녀석을 쳐다보는 그녀를 놈은 무시무시하게 노려보았다. 그리곤 확 밀쳐내 버린다.
“언제 오셨습니까?”
놈은 평소와 달리 조금도 웃지 않고 권기영을 바라보았다. 권기영은 눈썹을 치켜올리곤 마뜩잖게 “좀 전에.” 하고 대꾸한다. 새초롬한 눈으로 놈과 권기영을 번갈아 보는 여자를 놈이 흘끗 바라보았다.
“같이 오신 겁니까?”
“아니, 사촌이랑 같이 왔어. 그놈은 여자 낚으러 갔고. 그 여자는 여기 오너.”
“친하신가 봅니다.”
“……. 옛날에 잤던 적이 있긴 하지.”
놈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화는 나는데 차마 권기영에게는 화를 내지 못해 억지로 삭이는 그 모습을 보며 권기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이런 건 귀엽다. 네가 어디서든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다니는 놈이라 한들 내게 기어오를 수는 없는 거다.
“저는 기영 형이 다른 사람과 자는 것 싫습니다.”
그때 김건준이 권기영을 똑바로 바라보며 잘라 말했다. 권기영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김건준이 자신의 앞에서 사나운 빛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건 처음이었다.
맹수가 짖는 것처럼 순간적으로 심장이 뜨끔하니 서늘해진다. 큰 고동을 한 번 울리며 들뜨는 심장은 흥분했을 때와 흡사한 감각이다. 오싹오싹하게 목덜미가 저린.
――이것이 아마도 놈의 본성에 더 가까울 터.
“착각하지 마. 너는 너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권기영은 싸늘하게 대꾸했다.
“네가 거기까지 요구할 수는 없을 텐데. 게다가 내가 내키는 모든 때에 늘 네가 해 주는 것도 아닐 테고.”
다른 때였더라면 ‘그래서 뭐?’, 그 말만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래서 싫다면 거기서 끝, 그걸로 그만이었다. 그럼에도 권기영은 가슴속을 자극하는 어떤 것 때문에 말을 받았다.
“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해 드릴까요?”
대답은 서슴없이 돌아왔다. 권기영은 시선을 피하지 않는 놈을 노려보듯이 똑바로 바라보다가 입매를 틀어 올렸다.
“마음대로.”
이 사람 많은 클럽 안에서.
어지간히 미치지 않고서야 못할 짓이다. 혹은 절대적인 복종이 없고서는.
놈은 표정 없이 선뜻 다가왔다. 높다란 의자에 앉은 권기영의 벨트를 푸는 놈에게, 그 시끄럽고 북적거리는 클럽 안에서도 사소한 이변을 눈치챈 주위의 이목이 한둘씩 모이고 있었다.
팔걸이에 나른하게 팔을 걸치고 놈을 냉소하듯 내려다보고만 있는 권기영에게, 바지의 퍼스너를 내리고 속옷의 앞섶으로 손을 넣은 놈이 성기를 꺼내기 직전 시선을 주었다.
“저는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기영 형을 보여 주는 게 불쾌할 뿐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놈은 입을 다물었다. 다물 수밖에 없었다. 곧바로 권기영의 성기를 끄집어내어 입에 물었으니까.
주위가 술렁거렸다. 키득거리는 소리나 욕하는 소리, 호들갑을 떠는 소리들 속에서 꿋꿋이 남자의 성기를 핥고 있는 놈을 권기영은 냉담하게 내려다보았다. 오너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리려다가 권기영이 냉랭하게 눈짓하자 입을 삐죽거리며 물러났다.
놈은 평소보다 더욱 느리게 공들여 권기영을 핥고 있었다. 권기영의 귀두 끝에서부터 기둥, 고환 아래까지 낱낱이 그 모양을 따라 빈틈없이 입술로 감싸며 혀로 더듬는다. 타액으로 젖어 번들거리는 성기가 좀처럼 반응을 보이지 않더라도 끈질기게 정성껏 핥고 빨았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면서 권기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심장이 서늘하게 박동치는 건 완벽한 만족감에 다가선 흥분 탓이다.
그 무엇에도 아랑곳 않고 권기영만을 바라보는 맹목적인 순정이었다. 거칠 것 없이 강대한 짐승의 절대적인 복종.
웃음이 터져 나왔다. 권기영은 손을 내밀어 말 잘 듣고 어여쁜 애완 짐승을 칭찬하듯이 놈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이 양순하고 사랑스러운 것의 뺨을 어루만지며 가볍게 두드려준다.
그때 놈이 시선을 들었다. 여전히 권기영의 사타구니를 입에 한가득 문 채 눈동자만 들어 권기영을 바라보는 놈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권기영은 손을 멈추고 말았다.
심장에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싸늘하게 심장을 얼리며 머리를 세차게 두들기는 감각.
――아니다.
이것은 놈의 복종이 아니다. 놈은 어떠한 상황에서든 권기영이 원하는 대로 하리라고 순종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놈은 영역을 표시하고 있었다. 이것은 자신이 먹어 치울 몫이라고 사방에 드러내 보이면서.
이 위험하고 섬뜩한 짐승의 얼굴.
그 순간,
와장창――.
우악스런 손에 김건준이 뒤로 휙 끌려나가 옆으로 내던져졌다. 옆 테이블이 그에게 부딪혀 넘어지면서 그 위에 있던 병이며 잔 따위가 와르륵 흩어져 깨어졌다. 짤막한 비명 소리들이 솟았다. 그 소리들을 모조리 묻어 버리며 커다랗게 요동치는 고함 소리.
“이 씨발 새끼가! 이게 죽으려고! 이게 어디서, 어디서 감히!!”
퍽, 퍽, 퍽, 취기와 분노가 뒤섞여 눈이 뒤집힌 권기철이 마구 주먹질,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엉망으로 취해서 주먹도 다리도 흔들리고 있었고 어눌하게 느렸지만 한 발 한 발 휘두를 때마다 무시무시한 힘이 담긴다.
“이 건방진 새끼가, 어디서 우리 형한테 지저분한 지랄을 부리고 있어!! 이 씨발 새끼야, 너 오늘 죽었어!”
권기철은 불침 맞은 소처럼 길길이 날뛰었고, 불시에 끌려나와 내팽개쳐진 김건준은 유리 파편들 사이에 주저앉은 채 얼마간 그 주먹과 발길질을 고스란히 얻어맞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상황을 파악하고 되받아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해야 몇 초쯤이었다.
“――.”
말 한마디 없이, 김건준은 권기철의 주먹을 도중에 움켜쥐고 비틀었다. 와당탕하고 바닥에 나뒹구는 놈의 위에 올라타 거침없이 주먹을 휘두른다. 신음 섞인 숨을 내뱉으며 얻어맞은 권기철은 한동안 쿨럭쿨럭 기침을 하며 정신을 못 차리는 듯했지만 이내 이를 부드득 갈며 반격에 나섰다.
곧 그들을 중심에 두고 주위에 둥글게 사람들이 원을 그리며 물러섰고, 아무도 그 안으로는 들어서지 못하도록 험악한 싸움이 벌어졌다. 삽시에 주위의 물건들이 부서지고 바닥에 핏방울이 후드득 흩어졌다.
“기영 씨, 좀 말려 봐! 남의 장사 말아먹을 거야?”
오너가 다가와 새된 목소리로 외쳤지만 권기영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그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권기철은 어릴 때부터 또래보다 훨씬 덩치가 크고 싸움을 잘했다. 비록 손쓰지 못할 얼간이에 사고를 칠 줄밖에 모르는 형편없는 멍청이였지만 권기영은 그가 어디서든 몸싸움에서 지는 꼴은 본 적이 없고, 또한 싸워서 지지는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서.
권기철과 호각으로 싸우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아니, 호각조차 아니다. 점차 싸움의 형세는 권기철에게 불리하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저 멍청이는 죽어라 주먹질을 하면서도 아직껏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아마도 놈은 이미 자신이 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권기영의 눈에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권기영은 그 자리에 붙박인 듯 미동도 없이 눈조차 깜박이지 않으며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왜 몰랐을까.
아니, 알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가볍게 넘기며 간과했다. 어리석게도.
저기에서 다른 한 마리의 목줄기를 물어뜯고 있는 것은 애완견이 아니라 투견이었다. 근본적으로는 누구의 손에도 길들지 않을.
……아니다.
저것은 잘라 내야 한다.
권기영은 눈앞에서 날뛰고 있는 낯선 짐승을 보면서 생각했다.
“기영 씨, 어떻게 좀 해 보라니까? 아님 경찰 불러?”
옆에서 오너가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권기영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들 사이로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그만둬.”
그리 크지 않은 소리였지만 이미 음악이 꺼져 있는 공간에서는 충분히 그들의 귀에도 들어갔을 터였다. 그 순간 김건준은 막 휘두르려던 주먹을 멈칫했고, 그러는 사이에 권기철이 악에 받쳐 휘갈긴 주먹에 얻어맞고 나가떨어졌다.
술 때문이든 화 때문이든 저 멍청이는 말도 들어먹지 않을 만큼 맛이 가 있었다. 권기영은 욱하고 화가 치밀어 그 멍청이의 머리를 거침없이 구둣발로 후려찼다. 단숨에 뒤로 날려간 놈이 테이블에 머리를 부딪치곤 눈을 까뒤집으며 늘어졌다. 손가락을 미세하게 꿈틀거리며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의식을 놓아 버리는 동생을 싸늘하게 내려다보던 권기영은 옆에 엉거주춤하게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던 김건준에게 시선을 주었다.
잔뜩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된 얼굴에 퉁퉁 부은 눈. 놈은 그보다 몇 배는 더 후려갈기고 물어뜯은 주제에 혼자 다 얻어맞기만 한 양 불쌍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다.
“……기영 형.”
권기영은 놈을 흘끔 쳐다보기만 하고 돌아섰다. 견딜 수 없이 화가 나고 속이 치밀었다.
놈에게 속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니, 놈은 자신을 속인 적이 없었다.
그러면, 경계해야 할 수컷이라서? 그래, 놈은 분명히 만만찮고 까다로운 놈이 될 터였다. 하지만 당장은 아니다.
그러나――당장 끊어 내야 한다.
놈을 더 오래 끌고 갈 수는 없었다.
권기영은 걸음을 돌려 뒤돌아보지도 않고 클럽 출구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출구로 나가 막 계단을 올라가던 때에 뒤에서 따라잡아 황급하게 허리를 끌어안는 팔에 걸음이 막히고 말았다.
“형, 기영 형, ……그러지 마세요.”
불안하게 더듬거리는 목소리를 들은 순간 권기영은 허, 하고 헛웃음을 웃고 말았다. 이 기가 막히게 머리가 좋은 놈은 이미 권기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꿰뚫고 있었다.
“형. 좋아해요. 기영 형. 저, 형을 정말로 좋아해요. 사랑하고 있어요. 형, 그러니까…….”
이제 와서 비 맞은 고양이새끼처럼 처량하게 야옹거린들 놈은 더 이상 고양이가 될 수도 없었고 새끼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기묘한 느낌을 뭐라고 해야 할까.
권기영은 물끄러미 놈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권기영이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기묘한 기분이었다. 이대로 무시하고 나가면 그만이고 또 당연히 그렇게 해 왔었는데도.
그럼에도 뭔가가 뒤통수를 잡아당기는 듯, 발목에 자꾸 걸리는 듯 돌아보고야 마는 기분. 가슴속에 까끌하게 걸리는 아쉬움. 그것은 마치 권기영이 여태 한 번도 깨닫지 못한 자신 속의 나약함 같아서――.
“그만두자.”
말은 생각보다 선뜻, 냉담하게 목구멍을 넘었다.
잘라 내야겠다, 그 생각은 결심이 되어 굳어졌다.
안 된다. 더 오래 놔두면 더 잘라 내기 어려워질 거다. 놈은 위험했다. 놈 자체도, 그리고 어쩌면 자신의 내부에도 어떠한 식으로든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틀림없이 뭔가, 자신에게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어떤 것이 썩어 버릴지도 몰랐다.
놈은 표정을 잃었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를 못했다는 얼굴로 권기영을 쳐다보던 그는 권기영이 다시 걸음을 돌린 순간 더욱 화급하게 허리를 부둥켜안고 움켜쥐었다.
“뭐든 할게요. 저, 뭐든 할 수 있어요. 형. 형이 싫어하는 건 절대로 하지 않고 형이 원하는 건 뭐든――.”
“뭐든. 그러면 네 주위 모두에게 알릴 수 있겠어? 너는 나랑 섹스를 하면서 내가 하라는 대로 하는 놈이 될 거라고?”
불현듯 왜 그 생각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놈이 가족 이야기를 하며 지금의 저 얼굴과는 딴판으로 푸근하게 웃었던 게 떠올랐다. 그것은 틀림없이 놈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한 것일 게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놈이 말을 멈추었다. 권기영은 창백하게 낯빛이 바래 가는 놈을 차갑게 내려다보다가 그의 손을 허리에서 뜯어내었다.
“알겠지. 그만둬.”
그 말만 남기고 권기영은 계단을 올라갔다. 뒤에서 희미하게 흐려지는 목소리가 그를 부른 것 같았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
생각하지 마. 구태여 더 생각할 필요 없어. 누군가 힘들어하든 말든 그건 이미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권기영은 잠에서 깨자마자 머릿속에 새카맣게 밀려드는 불쾌한 기분 속에서 제일 먼저 그 말을 떠올렸다. 불쾌한 기분은 해결해야만 하는 상황이 아닌 이상은 굳이 오래 곱씹을 필요가 없었다. 그것이 이미 끝난 일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무엇 때문에 불쾌한가――그조차 기억에 떠올릴 필요 없었다. 없었던 일인 듯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한다.
권기영은 새벽 다섯 시를 조금 넘은 시계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뛰고 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트레이닝복을 입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주자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어 어딘지 을씨년스러웠다. 새벽안개가 이렇게 낀 걸 보니 낮에는 덥겠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데 잠에 취한 얼굴로 욕실에서 막 나오던 권기철과 마주쳤다. 녀석은 권기영과 눈이 마주치자 공연히 움찔하더니 그의 눈치를 보며 어물어물 말을 붙였다.
“어……, 조깅하러 가……?”
놈은 권기영에게 혼나거나 얻어맞거나 혹은 자신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기분이 들면―그 이유가 뭔지 모르더라도―해결을 하기보다는 살얼음판에 선 것처럼 그의 눈치를 보며 권기영의 기분이 나아지기만 기다렸다.
아마 저렇게 빌빌대는 꼴을 봐서는 한동안 기가 죽어 설설 기며 지낼 것 같았다. 그래 봐야 못돼먹은 성질머리 때문에 집밖에서는 분풀이라도 하는 양 더 성질을 부리며 고약하게 놀 테지.
권기영은 놈에게 냉담한 시선만 던지고는 그대로 나와 버렸다.
차가운 안개가 옷깃 사이로 축축하게 파고들었다. 트레이닝복의 퍼스너를 끝까지 올린 권기영은 그가 현관을 나오는 순간부터 옆으로 달려와 달라붙은 개의 목줄을 붙들고 집 밖으로 나와 공원길로 달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들러붙은 짜증이 가시지 않았다.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요 한동안 잠자리도 편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이게 다,
――아니다. 생각하지 마. 떠올리지 마. 이러는 사이에 기억이 묻히고 흐려지면서 자연히 기분은 나아질 터였다.
권기영은 속도를 높였다. 목줄을 넉넉하게 쥔 개가 옆에서 숨소리를 허덕이며 달리는 소리만 들렸다.
날이 쌀쌀한 탓일까, 다른 때보다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안개가 몹시 짙게 끼어 일이십 미터 앞 정도까지만 보여서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공원의 조깅 코스는 이미 숱하게 다녀 익숙한데도 낯선 길처럼 보였다.
인적이 뜸해지는 모퉁이를 돌 때였다. 갑자기 개가 웡, 하고 짖었다. 위협하거나 경계한다기보다는 그저 알은체를 하는 것처럼 기척을 한 번 내지른 녀석은 모퉁이 안쪽으로 약간 방향을 틀며 걸음을 늦추었다. 권기영도 덩달아 걸음을 늦추고 말았다. 그쪽에서 한 인영이 다가온 탓이다.
“…….”
김건준이 그 앞에서 묵묵히 권기영을 보고 있었다. 고작해야 며칠인데도 까칠하게 야윈 녀석은 얼굴빛이 창백하다 못해 거무죽죽했다. 며칠 전에 싸웠던 상처가 군데군데 남아 있는 위에, 새로 어디선가 맞기라도 한 듯 얼굴에 시커멓게 멍이 들어 있었다.
권기영이 그의 몇 걸음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물끄러미 시선을 맞추고 있던 김건준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연을 끊으시겠대요. 그런 말을 가볍게 하시는 분은 아니라서, 하신다면 하실 겁니다.”
낮게 가라앉아 있지만 담담한 목소리였다. 권기영은 그를 말없이 바라보다 문득 시야에 뭔가 흔들리는 게 들어와 발치에서 얌전히 앉아 있는 개를 내려다보자 놈이 우뚝 앉은 채로 꼬리만 흔들고 있었다. 별안간 기분이 나빠졌다. “가만히 있어.”, 쌀쌀맞게 말하자 개가 움직임을 딱 멈춘다.
그래, 가만히 있어. 너도. 불안스레 높아지는 박동도. 그리고 쓸데없는 짓을 하고 온 네놈도.
머리가 좋은 놈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헛똑똑이였던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권기영은 냉랭하게 그를 보았다.
“나는 그런다고 너를 받아 준다고 하지는 않았는데.”
“예. 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뜻밖에 놈은 평연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전 이제 쳐다볼 곳이 형밖에 없어요.”
조용하게 속삭인 놈이 다가왔다. 천천히, 그러나 망설임은 없이 손을 뻗은 놈이 냉담하게 서 있는 권기영을 끌어안았다. 입을 맞추려나 했지만 가만히 끌어안은 그는 쉴 곳이 필요한 사람처럼 권기영의 어깨에 얼굴을 묻을 뿐이었다.
화를 내거나 혹은 반대로 싸늘한 냉소를 남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권기영의 기억에 제대로 남아 있지도 않았지만 욕설을 퍼붓거나 날뛰거나 혹은 칼부림을 벌인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그러나 놈은 권기영을 담담하게, 단단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권기영은 심장이 서늘하게 식어 가슴속까지 추워졌다.
놈은 아니다.
놈은 그들과 달랐고, 그는 원하는 것을 어떻게든 달성할 터였다.
그 사실이 머릿속을 번개처럼 두드린 순간 가슴속에 새카맣게 잉크처럼 번지는……공포.
아니다.
권기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나약하고 꼴사나운 것이 자신의 감정일 리 없고, 그런 일이 벌어질 리도 없다. 누가 자신에게 어떠한 영향이든 미칠 수 있겠는가. 자신이 원치 않는데. 아무도 그럴 수 없었다.
“난 더 이상 생각 없어. 그만둬.”
“저는 아닙니다.”
권기영이 싸늘하게 잘라 말했지만 놈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조용히 대꾸할 뿐이었다. 잉크가 한 방울, 두 방울, 계속해서 번져 나간다.
안 된다. 이놈은 떨어뜨려야 한다. 잘라 내야 했다. 반드시.
“저는 가지 않아요. 기영 형, 저에게는 형밖에 없어요.”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놈은 조용히 말했다. 약간 고개를 돌린 놈의 입술이 목덜미에 닿았다. 그 입술만큼은, 그러나,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 * *
불쾌한 기억은 지워 버려야 하고, 그러려면 아예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는 게 좋다. 그러나 그것은 ‘끝난 일’일 경우의 이야기이다. 끝나지 않은 일이라면 어떻게든 그것이 현실을 갉작거리지 않도록 끝을 내야 했다.
김건준은 그 뒤로 더 다가오지도 더 멀어지지도 않는 거리를 지키며 딱히 어떠한 일을 벌이는 것도 없이 종전처럼 지냈다. 가끔 권기영이 가는 곳에서 얼굴을 마주치거나 혹은 더 뜸하게 전화를 걸어 올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 사소한 일들이 권기영의 신경을 갉아먹는 것처럼 날카롭게 만들고 있었다.
무시해 버리고 신경 쓰지 않으면 된다. 그것은 권기영이 잘하는 일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계속해서 신경이 곤두섰다.
……빌어먹을.
권기영은 수면제를 만지작거리다가 쓰레기통에 내던져 버렸다. 수면제 따위를 먹어 볼까 생각이나마 할 정도로 예민해져 있다는 사실이 몹시 불쾌했다. 권기영은 새벽 두 시가 가까워지고 있는 시계를 노려보았다. 이대로라면 오늘도 몇 시간 자지 못할 터였다.
어떻게든 해야 한다.
권기영이 허공을 노려보고 있을 때 전화가 울렸다. 이런 시간에 전화를 거는 게 설마 놈일 리는 없을 텐데도 일순 심장 박동이 높아졌다. 그조차 언짢아진 권기영은 짜증스럽게 혀를 차며 전화를 집어 들었다.
발신자는 동생이었다. 오늘도 어디를 놀러 갔는지 아직껏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던 놈이 이 시간에 전화를 하는 걸 보면 놈이 뭔가 사고를 친 모양이었다.
슬슬 또 귀찮은 일을 벌일 즈음이라고 생각했다. 이 병신 같은 놈은 제가 저지른 일을 처리하지도 못하면서 사고만 쳐 댔다. 이런 쓸모없는 멍청이 따위는 어느 산골 구석에 처박아 버리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무슨 일이야.”
권기영은 통화 버튼을 누르며 싸늘하게 답했다. 그러나 전화 안에서 “혀, 형,” 하고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불길한 예감이 차가운 모래알처럼 까끌거리며 밀려왔다.
잔뜩 기가 죽어 비굴하게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터야 할 동생은, 그럴 정신도 없는 것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덜덜 떨며 두서없이 말을 내뱉고 있었다.
“형, 형, 어, 어떡하지? 이게 죽, 죽었어, 죽었나 봐……! 자꾸, 이 미친년이 자꾸 머리가 아프다고 질질 짜길래, 나는 그냥, 그냥 약이나 더 먹어 보라고 줬을 뿐인데, 그그러면 다른 때에는 그냥 곯아떨어졌거든, 그런데, 근데 이게 숨을 못 쉬겠다고 꺽꺽거려서, 그냥, 그냥 살짝 딱 한 대만 쳤을 뿐이거든, 근데 형, 형, 숨을 안 쉬어……! 어떡하지? 응, 형, 어떡, 어떡하지?”
비명처럼 울음 섞인 소리를 내지르는 동생의 목소리가 송곳처럼 귀를 찔렀다.
권기영이 호텔에 도착했을 때 권기철은 핏기 없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 옆에는 놈과 거의 다를 것 없는 낯빛을 한 낯익은 놈이 둘, 그리고 바닥에 푸르스름한 낯빛으로 가로누워 있는 여자 하나가 있었다.
권기영이 방에 들어서자 권기철은 지옥에서 그 위로 드리운 거미줄을 발견한 아귀처럼 달라붙었다.
“형, 형……! 형……!!”
약이라도 들어간 듯 비정상적으로 흥분해서 울부짖는 동생을 밀어젖힌 권기영은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그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 빌어먹을 병신이 이번에야말로 골치 아프게 일을 쳐 버렸다는 걸.
권기영은 허덕허덕 울부짖으며 매달리는 권기철에게 싸늘하게 “닥치고 있어.”라고 한마디 했다. 그 말에 그는 여전히 헐떡거리는 숨결로 딸꾹질을 히끅거리면서도 애써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 입술에서도 흐으으, 하는 울음소리가 비어져 나온다.
표정 없이 푸르스름하게 굳어서 눈을 감고 있는 여자는 얼마 전 클럽에서 동생이 허리에 끼고 있던 그 여자였다. 약에 취해 살짝 넋이 나간 얼굴로 동생이며 다른 놈들에게 말을 붙이고 다니던 게 생각났다.
“언제 이랬어.”
“한, 한 시간 전? 모, 몰라, 모르겠어, 조용해져서 그냥 자는 줄 알았는데, 보니까 숨을 안 쉬고 있었어. 어, 어떡하지? 어떡,”
“어디서 이랬어.”
“클럽, 클럽에서. 거기서 막 토하고 꺽꺽거리고 그래서 그냥 데려왔는데, 오는 도중에 조용해져서 잠든 줄 알았거든. 정말이야. 늘 그랬다고. 근데 와서 보니까…….”
늘.
권기영은 여자를 내려다보던 시선을 들어 권기철을, 그리고 그 뒤에서 부들거리고 있는 두 놈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취한 것들 서넛이 늘 약 처먹고 호텔방이라. 무슨 짓을 하는지 안 봐도 뻔한 이 쓰레기 같은 놈들이 끝내 이 개판을 쳐 놨다는 소리다.
권기철은 권기영의 무시무시한 눈길 앞에서 움찔하고 어깨를 움츠리더니 겁에 질린 얼굴로 말도 제대로 못하고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두어 걸음 물러서다가 그조차 힘이 빠지는지 주저앉고 만다. 형, 혀엉, 울먹이는 소리만 새어 나왔다. 권기영이 흘끗 시선을 돌리자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두 놈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벌벌 떨며 서로 눈치를 보고 있다가 권기영의 시선이 닿자 얼어붙었다.
정신 나간 놈. 사고를 쳐도 될 선과 안 될 선도 구분 못하는 이런 쓰레기를 동생이라고. 이런 쓸모없는 놈이야말로 어디든 가서 죽어 버려야 하는데.
권기영은 속으로 욕을 퍼부었지만 어찌 되었든 놈이 권기영의 동생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어느 산골이든 병원이든 처박아 버리더라도, 적어도 나중에 가족이 흠이 잡힐 만한 곳에 집어넣을 수는 없었다.
권기영은 다시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오는 도중에 조용해졌다면 적어도 클럽에서는 숨이 붙어 있었을 거다. 호텔로 들어온 뒤로는 어떻게든 그럭저럭 권기영의 선에서 손쓸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클럽. 빌어먹을. 이놈들은 클럽에서 얼굴을 너무 팔았다. 아마 놈들이 어떤 행태로 놀았는지는 알고 있는 사람도 꽤 있을 터였다. 당장 오너만 해도 놈들이 어떻게 노는지 빤히 다 알고 있지 않던가.
“클럽에는 너희들만 갔었나?”
권기영은 놈들을 고갯짓으로 다 같이 둥글려 가리키며 물었다. 여자애를 제외하고 이 자리에 있는 나머지 둘은 권기영도 제법 낯이 익었다. 권기철이 오래전부터 옆에 두고 지내와 집에도 종종 오갔던 놈들이다.
“아, 아니, 더 있어. 네 명? 다섯 명?”
“나머지는 어디 있어.”
“하, 하나는 좀 먼저 돌아갔고 나머지는 그 전에 이미 다 약에 취해 뻗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어서, 그냥 두고 왔는데.”
다, 다들 여기로 오라고 할까?, 하고 허둥지둥 지껄이는 저 병신에게 짜증이 나서 속이 치밀었다. 권기영은 “묻는 말에만 대답해.”라고 사납게 눈을 부라리자 대번에 입을 다물어 버리는 놈에게 다시 말을 이었다.
“먼저 돌아갔다는 놈은 언제 갔어.”
“그게, 그러니까, 정, 정확히 몇 시에 갔는지는 모르겠는데 다들 대충 약 좀 하고 취해 갈 때쯤……? 건준이 그놈은 원래 그런 걸 즐기지도 않고, 또 요새 기분도 영 별로라서, 아마 금방 갔을 거야. 아마, 아마, 한 열두 시? 한 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대답하는 권기철의 말을 들으며 권기영은 입을 다물었다. 김건준. 놈도 거기에 있었나.
권기영은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적당히 어떻게 둘러대도 놈은 필경 어떻게 된 건지 대번에 알아차릴 터였다. 어차피 어떻게 처리하든 눈 가리고 아웅인 데다 이미 여기에서도 아는 놈들이 있으니 의미 없는 일이긴 했지만, 그러나 권기영은 그렇지 않았다. 놈에게는 어떠한 종류든 약점으로 써 먹힐 수 있을 만한 사소한 꼬투리나마 쥐여 주고 싶지 않았다. 설령 놈이 그럴 만한 놈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러면 놈을 어떻게든 이 일에서 떼어 놓아야 하거나, 혹은,
“…――.”
그때.
불현듯.
권기영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놈이라면.
이 일에 놈이 끼어 있었더라면. 아니, 애초에 이따위 상황에 끼어들 놈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놈이 이 상황 속에 섞여 있었더라면.
……그래.
권기영은 서늘해지는 심장이 둥, 둥, 맥박 치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요행히도 놈은 아직 어렸다. 제아무리 똑똑하고 명민하다 하더라도 놈은 아직은 어렸다. 가진 것이라곤 그 본인이라는 장래의 잠재적인 자본밖에 없는, 지금은 그 손에 쥔 게 아무것도 없어 기댈 만한 언덕조차 마땅치 않은 어리고 초라한 호랑이 새끼다.
잘라 낼 수 있다.
“…―.”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권기영은 덜덜 떨면서 반쯤 넋을 놓은 듯한 동생에게서 그 건너편에 있는 친구들에게로 냉랭한 시선을 돌렸다. 권기영이 생각에 잠겨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들은 창백한 눈을 더욱 크게 뜨며 눈치를 살폈다.
“너희들, 이름이 뭐였지?”
권기영이 입을 열자 놈들은 움찔하고 몸을 움츠리며 어, 저희요, 하고 더듬더듬 대답했다. 잔뜩 겁을 집어먹어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연신 적시고 있는 놈들 중 누군가 오줌이라도 지렸는지 희미하게 불쾌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그래, 성민이랑 윤호, 지금 몇 살이지? 기철이랑 동갑인가?”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겁에 질려 벌벌 떠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놈들 중 하나는 동생과 동갑이고 하나는 한 살 적었다.
“그럼 그리 오래지 않아서 사회생활을 해야겠군. 이번 일로 별일이 없다면 말이지. 사람 하나가 죽어 자빠질 때까지 손 놓고 약이나 처먹다가, 나중에 어쩔 생각이었어?”
권기영이 쌀쌀맞게 다그치자 놈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 아둔하고 멍청한 것들은 그저 새파랗게 질려서 벌벌 떨 줄밖에 몰랐다.
권기영은 잠시 그 영민한 호랑이 새끼를 떠올렸다. 문득 가슴속이 싸해지며 손끝까지 차가워졌다. 이 병신 같은 것들과는 견줄 수조차 없는 그 영특한 녀석을 이제는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그만두라고. 권기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쏟아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다. 결정을 내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권기영은 얼마간 생각에 잠겼지만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었고 고민할 것은 없었다. 싸하게 차가워진 가슴에 묵직하게 남아 있던 한 줌의 어떠한 껄끄러움을, 권기영은 말없이 저 새카만 아래로 밀어 넣고 문을 닫아 버렸다.
이윽고,
“잘 들어.”
권기영은 그 빌어먹을 멍청이들에게 입을 열었다.
* * *
“시간이 남는데 잠시 병원에 들러 보실래요?”
서류를 넘기고 있던 권기영은 옆에서 남자가 하는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병원이라니 무슨, 하고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본 권기영은 그때 막 차가 스쳐 가고 있던 병원 건물을 보곤 그제야 아아, 하고 알아들었다.
“김 변호사님이 볼일이 있으십니까?”
이미 참고로 할 이야기는 다 들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하고 권기영이 되묻자 남자는 “아니요, 제가 아니라,” 하고 머쓱하게 웃었다.
“저는 이미 충분히 말씀은 들었습니다. 그냥 마침 앞을 지나가는 길이기도 하고 시간도 좀 남으니까, 혹시라도 권기영 씨가 동생분 문병차 들르시지는 않을까 해서요.”
“저는 괜찮습니다. 바로 가도록 하지요. 시간이 남는다면 커피라도 한 잔 사서 들어가죠.”
권기영이 사무적으로 고개를 젓자 남자는 흘끔 권기영을 쳐다보긴 했지만 별말 없이 “예, 그럼 그렇게 할까요.”라고만 대꾸하고 말았다. 이미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은 쓸데없는 소리를 길게 지껄이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하며 권기영은 창밖으로 스쳐 가는 병원으로 무심한 시선을 주었다.
권기철은 지금쯤 저 병원의 어느 일인실에 처박혀 있을 것이다.
그날 일을 일단 필요한 선까지 수습해 둔 뒤 집으로 들어갔을 때, 이미 연락을 받고 잠에서 깬 아버지가 거실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권기영의 뒤를 따라 권기철이 들어가자마자 두말없이 골프채를 집어 놈의 머리를 후려갈겼고, 권기영은 다시 놈을 싣고 집에서 나가야 했다.
“그래도 심하게 안 다치셔서 다행입니다.”
“골프가 취미인 분이라서 딱 길게 지장이 남지 않을 정도까지만 머리를 부수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으시거든요.”
남자는 권기영이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는지 웃었다. 과거에 돈놀이를 하다가 사고를 친 비서관 하나를 비슷하게 보냈던 전적을 떠올린 권기영이었지만 구태여 진담이라고 말해 줄 이유도 없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창밖으로 시선을 주자 하교 시각인지 교복을 입은 소년들이 오가고 있었다. 낯익은 교복 무리를 보며, 그러고 보니 김건준이 다니던 학교가 이 근처가 아니었던가 생각한다.
“…….”
저 소년들은 알고 있을까. 아니, 저 소년들 중 모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적어도 학교의 교사진들 사이는 발칵 뒤집혔다고 들었다. 학생 하나가 약을 뿌렸고 그 와중에 사람이 죽었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니다. 아마 저 학교뿐 아니라 인근 학교들에도 ‘어느 학교 어떤 놈이 약 하다가 애 죽였다더라’라는 소문은 괴담처럼 돌았을 터였다. 소문이란 게 얼마나 빠른지, 또한 얼마나 부풀려지는지 권기영은 잘 알고 있었다.
“……그 학생이 피해자에게 약을 건네는 걸 봤다는 증언들은 꽤 많은데 일단은 이게 사망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확정적인 근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같이 다니던 친구들의 증언도 있고…….”
확실히는 좀 더 봐야겠습니다만 어쨌든 아마 권기철 군은 큰 문제없이 뒤로 돌려 둘 수 있을 겁니다, 다소의 잡음은 어쩔 수 없겠지만요, 옆에서는 남자가 아까 했던 얘기를 다시 주절거리고 있었다.
“그래도 사실 기철 군은 예전에도 크고 작은 일들을 좀 벌였기 때문에요……, 모두 잘 수습되었긴 합니다만, 이번에는 일도 일이고, 또 이목도 있고 하니까 한동안은 조용히 지내도록 잘 지켜보셔야겠죠.”
남자는 권기영을 바라보며 은근히 못 박았고 권기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겨울 되기 전에 미국으로 보낼 겁니다. 아예 거기서 공부시키려고 하니까 한동안은 안 들어올 거예요. 어쩌면 아예 거기서 살게 될 수도 있고.”
“예, 그러면 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곤 서류를 건성으로 넘기다가 중간중간, 이미 권기영이 알고 있는 이야기들을 확인하듯이 한 번씩 다시 짚어 말했다. 권기영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옆을 지나가는 그 교복으로 시선을 주었다.
시간은 아직 조금 일렀다. 유치장 안까지 소식이 전해졌을지는 알 수 없지만, 세 시에 찾아가겠다고 서署에는 연락해 뒀다. 일이십 분쯤 빨리 간다고 해서 별 차이는 없을 거다.
김건준이 권기철을 찾는다고 했다.
유치장에 들어가 있는 와중에도 놈은 틀림없이 이 일의 근원에 권기철이 엮여 있는 걸 알 텐데 그놈이라고 확증하지 않고, 그저 자신은 하지 않았다며 권기철에게 자세히 물어보고 싶다고 찾는다는 게 서에서 알려 준 이야기였다.
어떻게 할까요, 거의 모든 처리를 일임한 변호사는 권기영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 주면서도 적당히 자기 선에서 처리하게 되려니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권기영이 선뜻 자신이 가겠다고 하자 오히려 놀란 눈치였다.
맺을 때는 깔끔하게 끝을 보아야 한다. 그런 뒤에는 더 이상 놈을 떠올리지 않고 기억 속에 묻어 버려도 될 테고, 이 까끌거리는 기분도 함께 묻을 수 있을 것이다.
권기영은 가슴속에 뭔가 묵직하게 배겨서 욱신거리는 듯한 느낌에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내쉬는 숨에는 언짢은 한숨이 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경찰서 앞을 꺾어 들어갔고, 권기영은 다가오는 경찰서 건물을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권기영이 들어섰을 때, 벽에 바싹 붙여 놓은 의자에 기대어 앉은 김건준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고개를 든 그는 권기영이 올지도 모른다고 아예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아닐 텐데 어렴풋이 눈을 크게 떴다. 권기영이 그의 앞으로 가서 앉을 때까지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권기영을 바라보았다.
“……, 기철이는요?”
첫마디를 꺼낸 놈의 목소리는 잔뜩 잠겨 딴사람 같았다. 목소리뿐 아니라 거뭇하게 거칠어진 얼굴은 해쓱하게 야위어, 놈을 처음 보았을 무렵과는 딴판으로 몰라보게 초췌해져 있었다.
놈이 어떻게 생겼었더라, 권기영은 순간적으로 처음 만났을 때의 놈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아 잠시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그만큼 눈앞에 있는 그는 생김새도 인상도 달랐다. 그러나 생김새 따위보다 인상에 박히는 건 눈이다. 놈이 어떻게 웃었는지, 어떻게 울었는지는 더 이상 머릿속에 떠오르지도 않았다.
죽어 버린 시체에서 오로지 눈만 살아 있는 것처럼, 형형하게 번쩍이며 권기영을 바라보는 그 눈동자만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권기영은 놈을 천천히 훑어본 뒤에야 입을 열었다.
“그놈은 머리를 좀 다쳐서. 어차피 쓸모도 없는 머리니까 고칠 필요도 없긴 하지만, 지금 병원에 있어.”
권기영이 대꾸하자 놈이 입을 다물었다. 뭔가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낼지 모르는 듯 입매가 움칫거리다 만다.
권기영은 말없이 놈이 입을 열기를 기다려 주었다. 얼마간 침묵이 흐른 뒤 처음으로 흘러나온 그의 목소리는 두려워서인지 화가 나서인지 혹은 다른 이유인지 희미하게 들떠 떨리고 있었다.
“기영 형, 저는 안 그랬어요. 제가 그러지 않았어요.”
권기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무심하게 놈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문 쪽을 고갯짓을 가리켰다. 거기에서는 아까부터 간간이 찢어지는 고함 소리가 불쑥불쑥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 여자애 어머니란 사람, 지금 밖에 드러누워 있어. 들어 보니까 자식이 뭘 하든 내팽개쳐 놓고 집에도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던데, 너희 아버지가 사업 좀 굴린다는 걸 들었나 보지. 울고불고 고함치다가 내가 들어올 즈음엔 그것도 지쳤는지 그냥 쓰러져 있던데, 슬슬 또 기운이 나기 시작하는 모양이야.”
대답이랄 수 없는 대답이 돌아온 순간 김건준이 낯빛을 굳혔다. 크게 치뜨는 눈이 화급한 당혹감과 울분으로 몹시 흔들렸다.
“왜 우리 아버지를…―, 저 아니에요, 기영 형! 아시잖아요!”
“글쎄, 그건 내가 전혀 알 도리가 없지.”
“형!!”
처음으로 눈을 무시무시하게 번득이며 격앙된 소리를 내지르는 김건준은, 마치 그때껏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던 감정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것 같았다. 웅크리고 있다가 어느 순간 무섭게 으르렁거리며 이를 드러내는 짐승처럼 포효한다.
“제가 그러지 않았어요! 약이라니, 저는 손도 안 댔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검사를 해 보면 알 것 아닙니까! 제가 그런 게 아니에요!”
“네가 그 여자애에게 여러 번 약을 건네주는 걸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데.”
“기철이잖아요!! 그놈이 한 짓이잖아!! ――형 다 알고 있잖아요!!”
권기영이 한 말을 김건준은 이미 경찰에게서든 다른 사람에게서든 들었을 터였다. 그는 권기영의 말에 이를 갈며 외쳤다. 한번 터져 나온 노성은 가라앉지 않는지 그는 미친 사람처럼 악을 쓰며 눈을 번득였다.
권기영은 서슬 퍼렇게 고함을 지르며 포효하는 놈을 차갑게 바라보다가 놈이 거친 숨을 내쉬며 입을 다물자 말을 이었다.
“기철이는 병원에서 퇴원하면 곧 미국으로 보낼 거다. 아마 거기에서 지내면서 대학원까지 마칠 거야. 어쩌면 아예 안 들어올지도 모르고.”
김건준이 말을 멈추었다. 그는 움직임조차 멈추고 권기영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시퍼렇게 반들거리다 얼어붙는 눈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이야기가 갑자기 나온 이유를 깨달은 탓이다. 그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웃기지 마……, 그놈은 보내 버리고, 나더러 덮어쓰라고……? 내가 죽였다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 집어치워! 다른 놈들한테 물어봐! 내가 약을 줬다고? 내가 걔를 죽여?! 백이면 백 다 알고 있어! 난 안 그랬어!”
“약에 취해 인사불성으로 널브러졌을 그 백에게 일일이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글쎄, 아마 너일 거라고 얘기하는 놈은 두엇 있었지. 성민이랑 윤호랑……, 또 누구한테 더 물어볼까. 네가 그러지 않았다고 확실하게 보장해 줄 녀석이 누구인지 말해 봐. 그놈이 어떤 대답을 하는지 들려줄 테니.”
어느 이름을 말하든, 누구를 데리고 오든 놈의 손을 들어 줄 사람은 없었다. 놈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으나, 권기철은――권기영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김건준은 허를 찔린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럴 리 없다고, 말도 안 된다고 입술을 달싹거리는가 싶던 놈은, 곧 분노가 절절히 맺힌 노성을 터뜨렸다. 뭐라고 소리치는지도 알 수 없는 고함을 질러 대는 녀석의 말에서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던 말은 마지막에 놈이 권기영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외치는 소리뿐이었다.
“형은 다 알고 있잖아요!! 그놈이 그랬다는 거, 형은 알잖아! 그런데 왜 나야! 나한테 왜 이래!! 당신 동생이 한 짓인 걸 뻔히 다 알고 있으면서 왜 그러는 거냐고!!”
“왜……? 글쎄, 왜일까.”
권기영이 느릿하게 되물은 순간 김건준이 말을 멈추었다. 말뿐 아니라 숨소리까지 멈추어, 그곳에는 짧은 찰나 끔찍한 정적이 흘렀다. 바깥에서는 ‘내 딸을 죽였다고! 내 딸을!!’ 하고 울부짖으며 고함을 질러 대는 여자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김건준은 시간이 멈춘 듯 미동조차 않고 뚫어져라 권기영을 보고 있었다. 시체처럼 창백해진 얼굴은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를 한참 뒤에야 ‘형’, 핏기가 사라진 놈의 입술이 그 모양대로 달싹거렸다.
권기영은 밀랍인형 같은 놈의 얼굴을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건 내가 널 도와줄 수 있다는 것뿐이야.”
안 그래?, 권기영은 가볍게 어깨를 추어올렸다. 푸르스름한 낯빛으로 권기영을 보고 있던 김건준이 혼잣말처럼 어렴풋이 중얼거렸다.
“……. 형이……? 날……?”
천천히, 놈이 웃는 듯 마는 듯 어설프게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창백한 눈매에는 웃음기라곤 조금도 없이 입매만 비틀려 올라간 모습이 마치 기괴하게 망가진 인형 같다.
“이대로 가면 넌 소년 교도소야. 형량이 좀 길어진다면 도중에 일반 교도소까지 구경하고 나오게 되겠지. 어린 날의 실수로 그런 일까지 벌어진다면 안타깝겠지?”
물론 어린 나이에 가엾게 죽어 버린 여자애도 더없이 안타깝지만 말이야, 하고 권기영은 혀를 찼다. 밖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고함소리는 때로 구슬픈 흐느낌으로, 때로 통렬한 비난으로 바뀌고 있었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덮어 줄 수 있어. 지금 단계에서는 아직, 말이지.”
권기영을 빤히 바라보던 놈이 문득 하……, 표정을 잃은 채로 헛웃음을 웃었다. 번들거리는 눈빛은 꼭 제정신이 아닌 사람의 것 같았는데도 목소리는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요. 내가 한 짓이 아닌데 뭘 덮어. 필요 없습니다. 좋을 대로 해 보십시오.”
놈이 이를 갈았다. 증오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시선이 소름끼치도록 강렬하게 권기영에게 꽂히고 있었다.
권기영은 가슴속이 서늘해졌다. 흥분을 닮은 선뜩한 느낌이 손끝을 타고 흐른다. 본능적인 호전성을 자극하는 이 오싹한 흥분. 눈앞에는 미칠 듯이 분노한 짐승이 시뻘겋게 입을 벌리고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 이런 놈이었다. 심장이 싸늘하게 일렁거렸다.
그러나.
아직은 멀었다. 아니 앞으로도 줄곧.
“김건준. 생각 잘해. 너 하나로 끝날 것 같아?”
권기영이 말한 그때였다. 마치 때를 재기라도 한 것처럼, 바깥에서 찢어지는 여자의 울음소리에 뒤이어 끝내 견디지 못한 듯 고함 같은 울부짖음이 터졌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쿵, 쿵, 뭔가 무겁게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나이 먹은 남자가 비통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건준의 얼굴이 삽시에 창백하게 일그러졌다. 무시무시하게 부라리던 눈에 울컥 물기가 부풀어 올랐다. 놈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가 안 그랬어요, 내가 안 그랬다고요, 아버지, 아버지……!, 흐느낌처럼 떨리는 목소리가 귀를 기울여야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조그맣게 새어 나왔다.
“사람 입까지는 완벽하게 단속해 주겠다고는 약속할 수 없어. 이미 소문은 퍼졌고, 떠들 사람은 지금도 떠들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부분까지는 최대한 막아 주겠다고 약속하지. 그래, 나중에 누가 네 과거를 아무리 샅샅이 조사하더라도 흔적이 남지 않을 만큼 깨끗하게 처리해 주겠어.”
“…―.”
“멀리 지방으로 내려가서 살아. 소문이란 게 따라갈 수도 있을 테지만, 사람 입이 떠들어 대는 것도 기껏해야 석 달 열흘이다. 한동안은 가까운 사람이나 친척, 친지들을 만나기도 힘들겠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되게 돼 있어.”
김건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벌겋게 충혈된 눈이 일렁이며 부풀어 올라 기이하게 번들거린다. 믿기지 않는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의혹, 경악, 그런 것들이 뒤섞인 시선이 권기영에게 못 박여 있었다.
“너도 머리는 좋은 놈이니 알겠지. 바보 같은 생각은 하지 말고 조용히 살아. 네 아버지, 내가 들어올 때부터 밖에서 무릎 꿇고 울고 계시더라. 여자애 약 먹여 죽인 자식 뒀다고 아버지 두고두고 손가락질 받지 않으시게, 잘 해.”
“……, 내가 형에게서 물러나지 않겠다고 해서 이런 겁니까.”
한참을 침묵하던 놈이 중얼거렸다. 권기영은 비스듬히 놈을 바라보다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며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답 아닌 대답을 한다.
“금방 잊을 수 있어. 노력해서 못 잊을 일은 별로 없거든. 이건 정말이야. 그러니까 너도 잊고 살아.”
그 생각 자체를 안 떠올리려고 조금만 애쓰면 돼, 그럼 금방 잊어버리게 되거든, 하고 말하는 권기영을 바라보며 김건준은 희미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기영 형,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 같았지만 권기영은 그의 핏기 잃은 입술로 시선도 주지 않았다.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이미 할 이야기는 다 했고 놈은 권기영이 하려는 말을 이해했을 터였다.
뭐든 할 말이 있으면 기다려 주겠다는 요량으로 권기영은 잠시 그 자리에서 김건준을 바라보았다.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고 권기영을 바라보던 김건준은 뭔가 말하려는 듯 두어 번 입술이 움칫 움직이려는가 싶었지만 끝내 말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밖에서는 늙은 남자가 흐느끼는 소리, 여자가 악을 쓰며 고함을 지르는 소리, 무겁게 뭔가를 사납게 두들기는 소리 따위가 엉망으로 섞여 들려오고 있었다. 그 소리 하나하나가 들릴 때마다 점점 더 창백해지는 김건준을 말없이 바라보던 권기영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기다려 줄 만큼은 기다려 주었다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님이랑 다시 이야기 나눠 봐. 그런 뒤에 나한테 오시라고 전해 줘.”
권기영은 아무것도 묻지 않은 옷소매를 가볍게 털어 내며 걸음을 돌렸다. 문고리를 잡고 막 당기기 직전, 그는 마지막으로 김건준을 돌아보았다. 그는 그 자리에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서 권기영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김건준은 거무죽죽하게 죽어 버린 얼굴 안에서, 눈만 저 깊은 곳에서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주 새카만――아주 어렴풋한 빛이라도 다 삼켜 버릴 것만 같은 칠흑의 빛.
그 순간 가슴을 뜨끔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낯선 감각. 그 선뜩하고 뜨거운 게 무엇인지 권기영은 알 수 없었다. 가슴속에서 뭔가 맹렬하게 외치고 있었는데, 그 소리가 뭔지 들리지 않았다.
권기영은 그 고통스러운 소리에서 애써 귀를 닫으려, 구태여 누차 이야기할 필요는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말을 굳이 꺼내었다.
“너 똑똑한 거 알아. 헛똑똑이처럼 굴어서 실망시키지 마라. 소용없는 짓은 처음부터 그만둬.”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듣고는 있는지 그저 새카맣게 가라앉은 눈만 권기영에게 향하고 있던 그는, 권기영이 “건준아.” 하고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어렴풋이 숨을 멈춘 듯했다.
권기영은 그의 이름을 부른 뒤 잠깐 말을 멈추었다. 아까부터,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아니, 이 결정을 내렸던 때부터 가슴속에서 사포처럼 까끌거리던 무엇이 일순 심장을 쓸었다. 그러나 그 뜨끔한 감각을 다시 의식 저 아래로 밀어 버리며, 권기영은 처음으로 진정코 그를 위해 충고했다.
“싫은 일은 오래 생각하지 마라. 잊어버리고, 기억하지 마.”
그러면 네 마음이 편해질 테니. 풀 길 없는 분노를 가져서 화를 만드는 것보다 그것이 그에게 훨씬 평온한 길일 터였다.
권기영은 묵묵히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는 김건준을 마주 보고 있다가 걸음을 돌렸다.
한 발짝, 두 발짝, 세 발짝. 그리고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 * *
차를 세워 두고 집으로 들어오던 권기영은 현관에서 신을 벗고 올라서다가 멈칫했다.
큼직한 스포츠백 하나를 옆에 둔 권기철이 어머니와 나란히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가 권기영을 보곤 “형 왔어?” 하고 중얼거리며 일어났다. 권기영은 벽시계로 시선을 주었다.
“아직 안 갔어? 어서 출발해야 할 텐데?”
어쩐지 대문 앞에 운전사가 시동을 켠 채로 대기하고 있어서 무슨 일인가 싶었다. 어머니가 이 늦은 시각에 어딘가 외출이라도 하시나 싶었는데, 권기철이 아직 떠나지 않았을 줄은 몰랐다. 놈의 비행기 출발 시각이 세 시간도 채 안 남았을 텐데, 하고 생각하며 놈을 보자 놈은 괜히 쭈뼛쭈뼛 권기영의 눈치를 보며 “어, 이제 가려고.”라고 기가 죽어 중얼거렸다. 옆에서 어머니가 안쓰러웠는지 말을 보탠다.
“너 올 시간 얼마 안 남았다고, 형 얼굴이나 보고 가겠다고 기다리고 있었어.”
권기영은 아, 예, 하고 심상하게 말했다. 권기철은 풀죽은 눈치로 우물쭈물 일어나 가방을 둘러멘다.
“형 봤으니까 됐어. ……그럼 나 가 볼게, 형.”
“그래, 공부 열심히 하고 잘 지내라.”
권기영이 의례적인 말을 건네자 놈은 “응.” 하고 고개를 꾸벅 숙이곤 현관으로 나섰다. 권기영은 곧 2층으로 올라가려 했지만 놈의 옆에서 어머니가 서운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쳐다보고 있어, 귀찮은 시선을 놈에게 던졌다. 놈은 권기영을 흘끔거리며 현관에서 우물쭈물 신발을 구겨 신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괜히 한 번 더 고개를 꾸벅했다.
“…….”
권기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리곤 걸음을 돌려 현관으로 가서 다시 신발을 신었다. 현관까지 나와 있던 어머니가 그제야 미간의 주름을 풀고 권기철에게 잘 지내라, 몸조심해라,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라, 전화 자주 하고 가끔 들어와라, 소용도 없을 말을 끝없이 늘어놓는다.
“어머니, 기철이 늦겠어요. 공항 도착하면 전화드릴 거예요.”
보다 못한 권기영이 그렇게 말하며 권기철에게 고갯짓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권기철은 얼른 밖으로 나갔고 권기영이 그 뒤를 따라나섰다.
그래, 차를 타는 모습까지 봐 주는 것쯤이야 해 줄 수도 있다.
권기영은 흘끔흘끔 뒤를 돌아보며 앞서 계단을 내려가는 권기철의 뒤를 따라갔다.
권기철은 늦여름날 이후로 줄곧 권기영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권기영뿐 아니라 놈에게 한마디도 고운 말을 해 주지 않는 아버지나 누나에게도 마찬가지로, 그나마 놈을 안쓰럽다고 쳐다보는 어머니에게나 기를 좀 폈다.
권기영은 놈에게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았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대화 몇 마디쯤은 아무렇지 않게 오가곤 했지만 그뿐이다. 그 일 이후 앞으로는 조심하라거나, 정신 좀 제대로 차리고 살라거나, 여태 놈이 사고를 친 뒤에 늘 그랬던 것처럼 쌀쌀맞지만 이걸로 이만 봐주겠다는 유의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래서 놈은 말 한마디를 붙일 때에도 몹시 권기영의 눈치를 보았고, 그렇게 이곳을 떠나는 날까지 이르렀다.
놈이 어머니에게 뭐라고 징징거렸는지 어머니가 권기영에게 슬그머니 와서 그만 용서 좀 해 주라고 했지만, 용서를 해 주니 마느니, 권기영은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놈이 지긋지긋했고 얼간이의 병신 짓거리를 보는 것도, 뒤를 닦아 주는 것도 짜증스러워졌을 따름이었다. 아마 놈이 살아 있는 한은 이런 일이 이걸로 끝이 아닐 거라는 사실 또한 진저리가 났다.
그러나 오늘이 지나면 기분은 한결 나아질 것이다. 이제 권기철은 오늘 이곳을 뜨고 나면 적어도 몇 년 이상은―가끔 며칠씩 들르는 것을 제외하고는―한국에 들어오지 않을 터였다. 그곳에서도 보나 마나 골빈 짓거리를 아예 끊지는 못할 테지만 눈앞에서 저 아둔한 꼴을 보는 것보다야 훨씬 나을 것이다.
“형, 저기,”
계단을 내려가면서 한참을 머뭇거리던 기색이던 권기철이 불쑥 입을 열었다. 권기영은 응, 하고 짤막하게 대꾸한다. 권기철은 그러고도 잠시 더 주저주저하다가, “고마워. 미안해.” 하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권기영은 이번에도 응, 하고 심상하게 대꾸하고 말았다.
그 짤막하게 잘라 버리는 대꾸를 듣고 권기철은 다시 기가 죽었는지 계단을 다 내려가 대문에 이를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놈에게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 아니었다. 얼간이에게 화를 내는 어리석은 짓을 오래도록 질질 끌 권기영이 아니었다. 그러나 병신 같은 얼간이에게는 질려 버려서 한동안 말을 섞고 싶지 않았고 말상대를 해 주는 것도 귀찮았다.
이놈을 보내고 나서 방으로 올라가서 씻고, 그러면 대충 열 시가 될 테니 세미나에서 나눠준 원생 논문들을 훑어보고 나면 그럭저럭……, 권기영은 저녁에 할 일을 꼽아 보며, 대기하고 있던 차 앞에 멈춰 선 동생의 뒤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공항에 가면 아버지랑 어머니한테 전화 드려. 그 외에도 연락할 데 있으면 연락하고.”
이런 것조차 따로 일러 줘야 하는 짓도 한동안은 그만이라고 생각하며 권기영이 말하자 동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응, 연락할 데는 적당히 다 연락했어. 공항 가면 전화할게.”라고 대답한다. 고개를 끄덕인 권기영이 차에 들어가라고 고갯짓하자 동생은 말을 덜 마친 듯 얼마간 주저하다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건준이가 연락이 안 됐거든. 혹시 나중에라도 연락하면…….”
일순 누구라고?, 하고 얼핏 의아하게 눈썹을 치켜올린 권기영은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서너 달 가량 의식 위로 떠올리지 않으려 애써 기억 속에 덮어 두었던 이름을 떠올리고 말았다. 권기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서 지냈던 이름이 불시에 뇌리에 떠올라 버렸다.
“쓸데없는 생각은 집어치우고 가서 얌전하게 지낼 생각이나 해.”
저도 모르게 싸늘하게 대꾸가 나갔다. 동생은 움찔한 듯 눈을 껌벅이더니 어, 형, 미안, 하고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곤 얼른 차에 올라탔다.
초조한 기색으로 시계를 보고 있던 운전사가 곧 차를 움직였고, 권기영은 창문 속에서 자신에게 고개를 꾸벅이는 동생에게 냉랭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곤 돌아섰다.
계단을 따라 올라오면서 울컥 치미는 짜증에 혀를 찼다.
일부러 생각하지 않고 있었는데. 어렴풋이 떠오르려고 하면 애써 다른 생각을 끌어내어 그 이름 자체를 생각지 않았다. 그럭저럭 묻어 가고 있던 중인데 그 언짢은 이름을, 떠나는 순간까지 쓸모라곤 없는 저 멍청이가 집어 올렸다.
계단을 다 오른 권기영은 뜰에 있다가 훌쩍 다가와 그를 올려다보는 개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곤 집으로 들어갔다.
김건준이라.
결국 그 뒤로 한 번이었던가 두 번이었던가, 일을 처리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과 한자리에서 잠깐씩만 얼굴을 마주치곤 다시 보지 못했다.
얼마간은 어쩌면 놈이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지는 않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라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기영은 놈이 찾아오지 않길 바랐다. 그것은 자신이 바라는 바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놈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렇게 어리석은 짓이나 하는 얼간이이길 바라지 않았다.
놈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놈은 아마 앞으로 많은 것을 손에 넣게 될 것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지금보다는 훨씬 더 많은 걸 얻을 거라고 권기영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쯤 되는 놈이라면 틀림없이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지간한 사람들의 머리 위를 밟고 올라서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확연한 사실이 있다. 그가 열 걸음을 달리는 동안 권기영이 고작 한 걸음만 내딛는다 하더라도, 놈은 죽는 날까지 권기영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이미 태어나는 순간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어쩌면, 놈이 제 능력을 남김없이 살려 내고 또한 운마저 대단히 좋다면,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 권기영보다 더 부유해질 수는 있을 것이다. 더 유명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권기영보다 더 높아질 수는 없었다.
놈은 권기영을 해칠 그 어떤 짓도 할 수 없었다.
“…….”
거실을 스쳐 2층으로 올라가는데, 거실에 켜 둔 텔레비전에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국내 제반 경제 상황에 대한 코멘트가 몇몇 업계의 전망과 함께 짧게 언급되고 지나간다.
김건준이 얼마 전에 가족들과 함께 지방으로 내려갔다는 말이 권기영이 들은 마지막 소식이었다. 그와 함께, 놈의 아버지가 하고 있다는 사업이 거의 돌이킬 수 없이 기울기 시작해 아마 머지않아 손쓰기 어려울 지경이 되리라는 말도 다른 사람이 귀띔해 줬지만 권기영은 모른 척했다. 모든 것을 끝맺은 판에 굳이 알려 줄 이유도 없었고, 한편으로는 생활이 힘들어져야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고 다른 데에 눈을 돌리지 않을 거라는 계산도 들었다.
그 때문인지 혹은 단순히 놈이 현명하게 선택한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결국 놈은 권기영을 찾아오지 않았고 어떠한 연락도 없었다. 그대로 조용히 권기영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권기영은 더 이상 놈을 떠올리지 않았다.
불쾌한 기억을 덮어 두는 데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가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현듯 불쑥불쑥 떠오르는 생각을 억지로 접어서 넣어 두는 게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권기영은 오래 전부터 그렇게 해 왔고, 이번에도 그렇게 했다. 어렴풋이 생각이 떠오를 것 같으면 억지로 저 아래에 밀어 넣고 다른 생각들로 그 위를 덮었다. 덮고, 덮고, 덮고, 그러는 사이에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생각이 흐려지게 되고, 그러면 기억은 시간 속에 묻히는 것이다.
또한 묻어야 했다.
이번에는 특히나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놈을 떠올리면 그 언짢은 기억들과 함께, 가슴속을 까끌까끌하게 긁어 대는 낯선 감각이 감정을 지치도록 문질렀다. 그것은 권기영이 여태 겪어 본 적 없는, 몹시 생경하고도 불쾌한―무거운―감각이었다.
그 감각이 무엇일까. 권기영은 굳이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놈에 대한 기억과 함께 통째로 저 아래에 묻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아직은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시간이 그렇게 오래 지나지 않았다. 이름을 들어도 까맣게 잊어버릴 만큼이 되려면 아마도 다른 때보다 힘들고 오래 걸릴 것 같았다.
권기영은 쓴 숨을 쉬며 2층으로 올라섰다.
이제는 동생도 사라져 그가 혼자서 쓰게 될 그 고적한 공간에서, 그는 종종 그곳으로 찾아와 그곳에 머물렀던 놈을 절로 불쑥 떠올리려 하는 기억을 도중에 잘라 버렸다.
생각하지 마. 기억하지 마. 없었던 일로 덮어 둬.
이렇게 천천히 시간을 들여 기다리다 보면 결국은 기억은 삭고 닳아서 저 아래 깊은 곳으로 묻힐 것이고 또한 그래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가슴속이 배겨서 서걱거린다. 그 불쾌하고 낯선 고통을 견딜 수 없었다.
그러니까 그 낯선 욱신거림까지 통째로 덮어 둬. 이제는 끝난 일로.
권기영은 숨을 깊이 들이쉬며 방으로 들어섰다. 그는 당장 해야 할 일이 많았고 불필요한 생각들을 할 여유는 없었다.
그는 얼마간 머릿속을 어지럽혔던 생각들을 저 깊숙한 아래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가만히 문을 닫았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