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1)

3.

전화가 울린 것은 권기영이 방문을 닫고 막 넥타이를 풀었을 때였다. 액정에 뜬 해외 발신 번호를 본 권기영은 혀를 차곤 넥타이를 마저 풀며 “왜.” 하고 전화를 받았다.

「어, 형. 나야. 잘 지냈어?」

눈치를 살피며 양순하게 말을 거는 저 목소리는, 권기영의 대꾸가 무뚝뚝해서만은 아닐 터였다. 늘 아쉬운 소리를 할 때에나 전화를 하는 놈이 평소보다 더 순하게 말을 붙이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권기영은 짜증이 치밀었다. 이놈이 또 뭔가 일을 쳤구나.

누나 결혼 준비는 잘돼 가고 있지, 요즘 아버지 사무실 많이 바쁘겠네, 흰소리를 주절주절 늘어놓는 동생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무슨 일로 전화했어.”

「어, 아니 그게……, 그……, 사고가 좀 났거든. 별건 아니고 그냥 펍에서 시비가 붙었는데, 내가 그날 조교가 자꾸 심통을 부리면서 짜증나게 굴어서 술이 좀 들어갔었거든. 그래서 안 그래도 기분 나쁘던 차에 웬 양키가 헛소리를 지껄여서 좀, 그냥 가볍게 몇 대 때렸을 뿐인데……, 그렇게 많이 다친 것도 아냐. 한 몇 주면 다 나을 건데, 그 새끼가 괜히…….」

“그 정도 일도 네가 알아서 못 해?”

「――어, 그게, 정 변호사한테 연락을 했는데, 괜히 말을 빙빙 돌리잖아. 그러다가 결국은 형한테 먼저 말해 보라고, ……그 자식, 받아먹을 땐 실컷 받아먹더니 요새 아주…….」

본론보다 변명을 더 길게 섞어서 주절거리는 동생은, 권기영 모르게 해 보려고 하다가 제대로 안 된 눈치다. 그 말은, 제 입으로 말하는 것만큼 ‘가볍게 몇 대 때리고 많이 다친 것도 아닌’ 게 아니라는 소리다. 권기영은 울컥 속이 치밀었다.

“나이 먹을 만큼 먹은 놈이, 병신 짓이나 하고 다니라고 거기 보낸 줄 알아? 머리에 뭐가 들어찼어, 이 얼간이 같은 놈아. 그 정도 일로 일일이 연락하지 말고 알아서 해! 그 정도도 못 할 것 같으면 옥살이나 하고 오든가!”

권기영은 사납게 퍼붓고는 전화 너머에서 동생이 뭐라고 웅얼거리는 기척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짜증이 치솟았다. 이런 일은 한두 번도 아니라 아마 동생은 이번에도 권기영이 쌀쌀맞게 대충 알았다고 대꾸하고 처리해 줄 줄 알았을 거다. 그리고 권기영은 이렇게 말했다 해도 결국은 놈을 도와줄 사람을 수배해 연락하게 될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삼스럽지도 않은 저 병신 같은 놈의 골빈 짓이 참을 수 없이 짜증스러웠다. 그것은 아마도 권기영이 오늘 하루 종일―아니 오늘뿐 아니라 요 근래 내도록―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는 탓이기도 할 거다. 얄팍한 유리처럼 아슬아슬해진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그때 권기영의 방문이 열리더니 아버지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무슨 일이냐. 큰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던데.”

“별것 아닙니다. 기철이가 친구와 싸웠나 본데, 그 친구가 좀 다쳤나 봐요. 그래서 연락한 겁니다.”

“……. 알아서 조용히 도와줘라. 요즘 그러잖아도 여러 모로 민감한 때인데 잡스러운 소리 나지 않게 신경 잘 써.”

예, 아버지, 하고 권기영은 군말 없이 대답하자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래, 너만 믿는다.”라며 권기영의 어깨를 두드리곤 방에서 나갔다.

선거가 가까워지면서 아버지도 은근히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사소한 잡음 하나라도 날 만한 일이라면 유난히 기척을 세운다.

그래, 얼마 전에도.

권기영이 박 사장에게 연락했을 때에도 그랬다. 함부로 말하기는 어려운 종류의 일을 맡기곤 하는 그와 그냥 안부차 연락한 양 통화를 하면서, 권기영은 농담인 듯이 넌지시 물었었다.

‘그러고 보니 말입니다. 눈에 걸리는 걸 하나, 흔적 없이 아예 치워 버리려면……, 조용히 깔끔하게 되겠습니까?’

‘아? 아하……, 그야 어떤 물건이냐에 따라 비용이 조금씩 달라지긴 하지만 대개는 별문제 없이……, 하하,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그런데 보좌관님이 웬일로 그런 말씀을 다 하십니까.’

박 사장은 조금 의외라는 듯, 그러나 장난스럽게 능글능글 웃으며 대꾸했다. 이 남자도 험한 곳만 골라서 수십 년 구르다 보니 눈치가 백단이다. 여태 오래도록 연락을 해 오긴 했지만, 아무 일이나 덥석 맡길 만큼 신뢰를 쌓아 두고 있는지는 자신할 수 없었다. 게다가 어차피 전화로 할 이야기도 아니다.

권기영은 ‘그냥 생각나서 드려 본 말씀입니다.’라고 적당히 말을 얼버무렸고 박 사장도 ‘언제든 필요하실 때 말씀하십시오. 제가 발 벗고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흔쾌히 대답하면서 그 화제는 묻혔다.

그리고 그날 저녁이었다. 아버지가 식사 자리에서 조용히 말을 꺼냈다. 민감한 시기 지날 때까지는 사소한 일이라도 벌이지 말고 몸 사리라고.

권기영의 통화를 누군가 듣고 전했는지, 혹은 박 사장 쪽에서 어쩌다가 이야기가 나갔는지, 권기영이 박 사장에게 넌지시 운을 뗀 게 아버지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권기영은 잠시 침묵했지만 순순히 ‘예, 아버지.’ 하고 대꾸하면서 생각했다.

박 사장은 안 된다. 다른 쪽을 찾아봐야 한다. 일 처리와 입단속 모두 확실하게 신뢰할 수 있는 쪽을.

선거와 누이의 결혼이 모두 마무리되려면 아직 몇 달은 더 있어야 했다. 그 몇 달 동안 손가락 빨면서 그저 시간이 지나기를 얌전히 기다리라니, ――절대로 그럴 수는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단 하루라도 빨리.

죽여야 했다.

놈을 죽여 버려야 했다.

권기영은 오싹하고 소름이 돋는 등을 움츠리며 턱을 악물었다. 온몸의 털이 빳빳이 곤두서며 한기가 돈다.

――놈을 죽여야 한다.

그것은 이미 강박과 같았다. 그 생각은 점점 집요하게 머릿속에 들러붙고 있어, 정신을 차리고 보면 권기영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놈을 죽여야 한다고.

매일 밤마다 놈은 권기영을 집어삼켰다. 잘근거리며 씹어 부수고 조각조각 내며 분쇄해, 이윽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고깃덩이를 만들고 나서야 뱉어 내었다. 그리고 말하는 것이다. 내일 또 보자고.

권기영의 몸속에 자리 잡은 채로 고정된 딜도가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건 자정 이후의 두 시간뿐이었다. 그러나 그 두 시간 동안에도 권기영의 몸이 비는 건 아니었다. 나머지 시간 동안은 놈 자신이 권기영의 몸속을 비집었다. 고작해야 몇 분, 변기 위에서 볼일을 보는 짧은 시간을 제외하고는.

‘좀 익숙해진 모양이지. 입 다물고 잘 참는 걸 보면.’

놈이 권기영의 다리 사이로 허리를 들이밀며 웃었다. 푹, 단숨에 뿌리 끝까지 밀고 들어온 성기가 권기영의 몸을 빠듯하게 벌렸다. 이를 악물고 자신의 주먹만 노려보는 권기영에게, 놈이 빙글거리며 귓가에 속삭인다.

‘이제는 앙탈 부리는 것도 그만뒀나 봐.’

‘――.’

분노로 숨이 막혔다. 놈의 뻔한 도발이란 걸 알면서도 권기영은 순간적으로 눈앞이 하얘지도록 치밀어 오른 분노를 참지 못하고 놈에게 팔꿈치를 휘두르고 말았다. 놈은 그 팔을 붙잡아 등 뒤로 꺾으며, ‘이러면 못쓰지.’ 하고 어린애라도 타이르듯 혀를 차곤 허리를 세게 밀었다. 놈의 성기가 권기영의 몸속을 거세게 휘저으며 요동쳐, 권기영은 짧은 신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굴욕과 좌절은 날마다 권기영의 정신을 짓밟았다.

처음 한동안은 놈이 권기영에게 채워 둔 사슬 끈을 푸는 순간 권기영은 놈에게 달려들었다. 굶주림 같은 울분으로 날뛰는 권기영을, 그러나 놈은 무지막지한 힘으로 무자비하게 짓눌렀다. 그런 뒤에는 어김없이 ‘벌’을 내렸다.

직장 속에 엄청난 양의 물을 부어 넣고 딜도로 틀어막아 버린 그 기억은 머릿속에 끔찍하게 아로새겨졌다. 불룩하게 부른 아랫배를 감싸 쥐고 식은땀을 흘리며 들끓는 배 속을 안간힘을 다해 견디던 권기영을 유유히 내려다보던 차가운 눈동자. 권기영이 떨리는 입술로 ‘제발’이라는 단어를 소리 내었을 때, 놈의 굳게 닫혀 있던 입매가 느슨하게 휘어지던 걸 잊을 수 없다.

그럼에도 그 순간을 모면하고 나면 다시금 차오르는 굴욕감을 이기지 못해 다음날도 다시 놈에게 달려들고, 또 달려들기를 거듭한 권기영은, 그러던 나날의 마지막, 놈이 나체인 권기영에게 딜도를 밀어 넣고 그대로 두말없이 가게 밖으로 끌고 나가 한밤중이라 인적이 끊긴 공원의 가로등 기둥에 결박해 놓은 뒤 그대로 서슴없이 자리를 떠 버렸을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포에 ‘질렸다’. 일 분 일 초가 끔찍하게 긴 시간으로, 나중에는 정신이 너덜너덜해질 지경이었다. 그런 권기영이 풀려난 것은 동이 트기 전의 가장 컴컴한 시각, 놈에게 연락을 받고 찾아왔다는 매니저에 의해서였다. 그때 권기영은 이미 말을 할 기운조차 없었다.

‘이젠 별로 아프지도 않지? 흐, 거의 24시간 내내 이렇게 구멍을 벌리고 있으면 좀 헐거워질 만도 한데 여전히 찰지게 쫄깃거리는 걸 보면, 구멍 하나는 타고났어, 응?’

놈이 추삽질을 하면서 권기영의 엉덩이를 철썩 두드렸다. 권기영은 이를 짓씹었다. 여전히 배 속을 꾸역꾸역 벌리면서 파고드는 이물감에는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놈의 말마따나 아픈 건 아니었다. 배 속을 짓치며 뒤흔드는 폭력적인 질량감에 숨이 막히면서 속이 메슥거릴 뿐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 따위보다 더욱 숨통을 쥐어짜는 건, 이거다.

‘이쁜이도 재미 좀 봐야겠지?’

놈은 자신의 성기를 꽂아 넣은 채 권기영의 성기를 주물렀다. 완급을 줘 가며 훑어 올리는 손길에 권기영은 금세 발기하고 만다.

처음 얼마간은 놈의 성기가 박힌 상태에서는 고통과 숨 막히는 압박감 때문에 권기영은 발기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나 하루 내도록 몸속에 이물질을 담고 있는 나날이 계속되면서 그럭저럭 그 불편한 이물감이 몸에 익게 되자, 고통이 아닌 다른 감각들도 조금씩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놈은 그 빌어먹을 살덩이를 처넣고서 권기영의 성기를 끈질기게 훑었다. 권기영이 발기할 때까지, 발기한 뒤에도. 놈은 반드시 자신의 성기를 삽입해 둔 상태에서만 권기영을 발기시켰다.

그것을 권기영은 견딜 수 없었다.

놈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사내에게 엉덩이를 뚫린 채로 발기하는 스스로에게 욕을 퍼붓는 권기영을. 놈은 분명히 알고서 의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한참을 주물러야 겨우 고개 좀 드는가 싶더니, 이제는 조금만 훑어 줘도 금방 뻣뻣해진단 말이야. 응? ――그럼 슬슬 싸 볼까.’

킬킬거린 놈은 그 말을 끝으로, 권기영의 몸속 한곳을 집중적으로 찌르기 시작했다. 가벼운 자극만으로도 사타구니가 움찔거리는 전립선을 거침없이 긁어 대며 두들기는 감각에, 어찌할 도리 없이 권기영의 신경이 날뛰었다.

몸의 구조가 그렇게 생겨 먹었다는 걸 알면서도, 권기영은 아랫도리를 덮쳐 오는 저릿한 감각에 고개를 드는 자신의 성기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놈의 커다란 손이 훑고 있었다.

금세라도 새어 나올 것 같은 신음을 막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견뎌도 금방 숨이 차올라 거칠고 급한 호흡이 터져 나왔다. 그것이 오히려 신음보다도 더욱 급박하고 애타게 들린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거친 호흡을 가다듬을 수 없었다.

그렇게, 놈은 권기영이 거칠게 숨을 내쉬며 요동치면 소리 내어 웃으면서 사정을 하고, 동시에 놈의 손 안에서 권기영도 절정을 맞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날은 달랐다.

발기한 권기영의 성기를 주무르던 놈은 사정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갑자기 손을 뗐다. 의아하게 놈을 노려보는 권기영에게 히죽 웃어 보인 놈은, 그 손으로 권기영의 유두를 비틀며 주물렀다. 동시에 추삽질에 박차를 가했다.

‘…―?!’

정확하게 자극점을 찔러 대며 거침없이 허리를 추어올리는 통에 권기영은 숨을 헐떡이며 몸을 뒤틀었다. 뻣뻣하게 부풀어 충혈된 성기가 크게 앞뒤로 흔들렸다.

어째서? 놈은 권기영의 성기를 훑는 손에 완급을 주며 반응을 살펴, 늘 자신이 사정할 때에 맞춰 권기영도 사정시켰다. 그러나 이때는 허공에서 흔들리며 권기영 자신과 놈의 아랫배에만 부딪히는 성기를 방치한 채로 자극점을 찌르고, 찌르고, 또 찔러――놈이 사정했다.

순간 꼬집듯이 유두를 잡아당기는 손길에 권기영은 짤막한 신음을 터뜨렸다. 동시에 놈이 몸속에 연거푸 정액을 들이붓는 걸 느끼고, 그 다음으로는 충족되지 않고 불연소한 상태로 멈춰 버린 자신의 욕구에 세찬 갈증을 느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해 준다면.

――뭘.

‘아직은 좀 이른가. 하지만 머지않은 것 같군. 구멍에 박히기만 해도 싸게 될 날이 말이야.’

놈이 권기영의 뻣뻣하게 일어서 부들거리고 있는 성기를 내려다보면서 빙글거리며 중얼거렸다. 한 번 더 쿡, 장난스럽게 놈이 허리를 추어올리자 이미 쉴 새 없이 흘러내린 선액으로 흠뻑 젖어 있던 권기영의 성기가 희뿌연 액체를 한 방울 불룩 뱉어 내며 끄덕거렸다. 그것이 신호인 양 희끄무레한 정액이 불룩, 불룩, 커다랗게 방울져 연달아 몇 방울 더 흘러내렸다. 사정이라고 하기에는 이른, ――욕망의 증거.

그리고 권기영은.

조금의 미동도 없이.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얼어붙었다.

절정을 바라며 들끓던 욕망은, 놈이 권기영의 몸속에서 사정하며 움직임을 멈추던 순간 무엇을 바랐던가. 조금만 더, 무엇을.

심장이,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때 놈이 정액과 섞인 선액을 줄줄 흘리고 있는 권기영의 성기를 손끝으로 툭 쳤다. 그리고 그 순간, 한계까지 충혈되어 방울방울 흘려 내고 있던 성기는 어이없이 터져 버렸다. 세차게 사정을 하며 경련하는 권기영을 보며 놈이 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 아하하하, 아하하하하하, 이거야 정말로 얼마 안 남았겠는데. 박히기만 해도 쌀 때까지 길어야 며칠이겠어. ――그러면 그 다음에는, 그렇지. 젖꼭지만 빨아도 싸게 해 줄까.’

아주 기대가 커, 이쁜이, 놈이 소름끼치는 말을 속삭이며 권기영의 입술을 물어뜯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사정의 여운이 멎지 않아 움찔움찔 경련을 하면서, 권기영은 넋이 나간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말도 안 된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어떻게 내가.

권기영은 머릿속으로 자신의 고함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정신이 지독하게 소모되어 까끌까끌하게 삭아 가고 있었다.

이럴 수는 없다.

어서.

어서 조금이라도 빨리, ――놈을 죽여야 했다.

*

권기영이 김건준을 불러낸 것은 반쯤은 우연이었고, 반쯤은 필연이었다.

외부 일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면서 시내 중심가를 거쳤다. 불그스름한 저녁 하늘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권기영의 시선 끝에 김건준의 회사 건물이 들어온 것은 우연이었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은연중 그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의 회사를 보았건 말건 권기영이 먼저 그에게 연락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김건준의 회사를 스쳐 지난 한산한 옆길에 차를 세우고서도 한동안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며 망설인 게 무색하게, 발신음이 울리고 신호가 몇 번 떨어지기도 전에 그는 전화를 받았고, 게다가 데스크 업무가 아니라 거의 회사에 붙어 있는 일이 없을 그는 하필 그날따라 회사에 있다고 했다.

근처를 지나다 생각이 나서 전화해 봤다는 권기영의 말에 김건준은 선뜻 ‘그럼 식사라도 같이 하시죠. 바로 내려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

과연 그 남자를 불러낸 게 잘한 일일까. 권기영은 개운치 않은 기분으로 생각했다. 아니, 한번 떠보기나 하고 아니다 싶으면 그냥 밥이나 먹고 헤어지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러면, 달리 누구에게…….

권기영이 미처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똑똑, 조수석의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이 마주치자 김건준이 웃으며 고개를 꾸벅이곤 조수석 문을 연다.

“반갑습니다. 마침 딱 오늘만 저녁 시간이 비었던 참인데, 잘됐네요.”

“바쁘신가 봅니다. 타십시오.”

“하하, 바쁜 걸로 치자면 기영 씨만 할까요.”

김건준은 조수석에 앉으며 잠시 말없이 권기영을 응시했다. 권기영이 의아하게 눈썹을 치켜올리자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니, 뜻밖이라서요. 이렇게, 지나던 길에 연락을 주실 줄은 몰랐거든요.”

“……. 제가 그렇게 잔정 없는 사람처럼 보였습니까?”

김건준은 긍정도 부정도 않고 웃었다. 권기영이 냉담하게 “잘 보셨습니다.” 하고 대꾸하자 그제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고 소리 내어 웃는다.

늘 그렇지만 이 남자는 오늘도 여유롭고 즐거운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공연히 거슬리는 건 권기영의 기분이 날카로운 탓이다.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까, 당장 이렇다 할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침묵은 아주 짧았을 뿐인데도 입술이 바싹 말랐다. 한층 더 기분이 날카로워지는 것 같다.

그때 먼저 입을 연 것은 김건준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예?”

“얼굴이 많이 상하신 것 같아서요. 게다가 좀…….”

거기까지 말하다가 김건준은 입을 다물고 애매하게 말을 흐렸다. 얼핏 난감한 듯한 그 웃음이 거슬려, 권기영은 굳이 뒷말을 캔다.

“게다가 좀?”

“그냥 약간……, 불안정한 느낌이 든달까……. 아니, 괜한 말이었습니다. 좀 야위셔서 그렇게 보였나 봅니다.”

바쁘시겠지만 잘 챙겨 드십시오, 라고 덧붙이며 아무렇지 않게 말을 얼버무리는 김건준의 말을 들으며 권기영은 낯빛을 굳혔다.

불안정한 느낌이 든다. 이 내가.

기분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는 건, 그것이 틀린 말이 아닌 탓이다. 권기영도 최근 자신이 불안정하다는 걸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나 오후, 저녁, 밤 시간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정신에 새파랗게 날이 섰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그러지는 않았을 터였다. 권기영의 주위의 아무도 그런 내색은 비친 적이 없었다. 그저 이 남자가 무섭도록 예민할 뿐이다.

불안정한 권기영. 이 얼마나 속이 뒤틀리는 말인가.

권기영은 싸늘한 시선을 김건준에게 주다가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이 남자의 잘못이 아니다. 이건 모두 다――놈의 탓이다.

“식사는 아직 안 하셨지요? 뭘 드시겠습니까?”

“글쎄요. 어디 근처에 괜찮은 데 아시는 곳이 있으시다면 그리로 가죠. 별로 가리는 건 없으니까요.”

근처에 괜찮은 데라, 하고 김건준은 생각에 잠기는 눈치였다. 그러다 이내 생각이 난 듯 아, 하고 입을 연다.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는데,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맛있는 집이 있습니다.”

좁은 골목 안에 있는 허름한 선짓국집에 그들이 다다랐을 때, 그곳에 유일하게 앉아 있던 술 취한 손님 하나가 막 나가고 있었다. 건물이 허름한 데에 비해서는 깔끔했지만, 바로 옆이 공사판이라 시끄러운 소리가 가게 안까지 들려오고 손님도 거의 없는 이런 외진 곳이 정말로 괜찮은 곳인지는 의심스러웠다.

이런 곳에서 식사라니 생각지 못한 일이었지만 권기영은 앞서 들어가는 김건준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어차피 도란도란 식사나 하려고 그를 불러낸 것도 아니다. 차라리 인적 드물고 소음 때문에 옆자리 소리도 잘 안 들리는 이런 곳이 나을지도 몰랐다.

“선짓국 두 그릇 주세요. 곱빼기로요.”

선짓국만 파는 가게라서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다고, 김건준은 주인아주머니에게 마음대로 주문한 뒤 권기영에게 말했다.

“기영 씨 많이 드셔야 할 것 같아서요. 요즘 사무실 일이 바쁜 줄은 알겠지만, 많이 수척해지셨어요. 사실 조금 전에 보고 놀랐습니다. 뵌 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그사이에 얼굴이 많이 상하셔서.”

“아아……, 사무실 일 말고도 이래저래 손 가는 일이 많아서요.”

“기철 씨 일이라든가요.”

김건준이 농담처럼 말하며 웃었다. 기윤 씨한테 들었습니다, 라고 그가 덧붙이는 말을 들으며 권기영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어 의외라는 낯빛을 거두었다.

저 자존심 센 누이가 자칫하면 제 얼굴에 먹칠밖에 되지 않는 이야기까지 다 늘어놓는 걸 보니, 어지간히 이 남자에게 마음을 열어 놓고 있는 모양이었다. 권기영은 속으로 코웃음 쳤다.

“예전부터 기영 씨가 기철 씨를 많이 챙겨 주셨다면서요.”

“저를 제일 잘 따라서요. 무슨 일만 있다 하면 저에게 와서 징징거리는 통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하, 귀여운 동생이었군요.”

그 말에 권기영은 이번에야말로 코웃음을 치고 만다.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었지요. 지금도 그렇지만. 머리도 나쁜 녀석이 힘만 좋은 데다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자라다 보니까, 골목대장 노릇을 하면서 사고깨나 치고 다녔습니다. 친동생만 아니었더라면 어디 갱생 시설에라도 처박아 버렸을걸요.”

따지고 보면 보스턴에 보내 버린 것도 갱생 시설을 대신한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사고 한 건을 크게 터뜨린 놈을 재빨리 멀리 치워 버린 것이었으니. 그 뒤로도 놈은 종종 일을 치곤 권기영에게 전화해 대기 일쑤였지만, 그래도 그 병신 짓을 눈앞에서 보지는 않으니 한결 나았다.

권기영의 말을 겉치레나 겸양쯤으로 들었는지, 김건준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래도 많이 아끼시나 봅니다.”

“어쨌든 동생이니까요. 끝까지 곁에 남을 건 결국 피붙이 아니겠습니까.”

권기영은 문득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김건준의 시선을 느끼고 왜 그러냐는 듯 마주 보았다. 김건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피붙이가 남보다 못하다는 사람도 많은데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참 좋아 보여서요.”

“그놈은 어떤 경우에든 제 등에 칼을 꽂지는 않을 녀석이거든요.”

그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권기영은 동생이 갖고 있는 열등감과,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동경과 신뢰를 잘 알고 있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그 머릿속 깊이 새겨져 있는 그 생각이, 권기영이 유일하게 동생을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부분이었다.

김건준은 한동안 권기영을 바라보다가 빙긋이 웃었다.

“좋은 형제애군요. ……그런데, 이번엔 일을 좀 크게 치셨나 봅니다. 박 사장님께 연락하셨다면서요.”

권기영은 입을 다물었다. 이 남자는 귀를 어디까지 세우고 있는 걸까. 어찌 되었든 박 사장에게 일을 맡기지 않은 건 결과적으로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권기영은 말했다.

“아니, 그건 다른 일입니다. 동생 일은 달리 아는 사람에게 연락해 뒀어요. 그렇게까지 큰 사고도 아니었고.”

“그러잖아도 한창 바쁘실 때일 텐데 일이 많으시군요.”

“……. 건준 씨야말로 바쁘실 텐데 참 많은 이야기를 듣고 다니시나 봅니다.”

김건준은 권기영의 말 속에 은근하게 드러나 있는 가시를 이내 알아차린 듯했다. 조금 난처하게 웃더니 입을 연다.

“직업상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귀에 들어옵니다. 일부러 알아보려고 한 건 아니고, 제가 기윤 씨와 사귀고 있다 보니 댁에 대한 소식이 있으면 사람들이 먼저 제게 귀띔해 주곤 하거든요.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제가 박 사장님을 왜 찾았는지도 알려 주던가요, 그 사람들이?”

“글쎄요, 거기까지는…….”

김건준은 말을 흐리며 고개를 기웃했다. 속을 알 수 없는 그 웃음을 보며, 권기영은 이 남자가 정말로 모르는 걸까, 혹은 알면서 시치미를 떼는 걸까를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금 되짚어 본다.

어떻게 할까.

이 남자를 신뢰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박 사장보다는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권기영의 매형이 될 터였고, 이 야심 많은 남자가 권기영의 집안과의 인연을 내팽개칠 리는 없을 테니 그 예정이 어긋날 리는 없었다. 또한, 그렇다면 그가 이쪽에 불리하게 움직일 리도 없다.

아니, 설령 최악의 경우 혼담이 깨어진다 한들, 이미 얽혀 있는 것은 혼담만이 아니었다. 사업과 인맥들이 조금씩 그들을 옭아매고 있었다. 게다가 이 남자가 아버지의 정적政敵들과 일절 연관이 없다는 건 다른 누구보다도 권기영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걸로는 오히려 수십 년을 함께 일해 온 박 사장보다도 이 남자가 훨씬 더 믿음직했다.

그럼에도 꺼림칙한 건 속을 알 수 없는 탓이다.

――아니, 어설프게 속을 내비치는 놈보다는 일을 맡기기에 훨씬 믿음직하다고 볼 수도 있지 않겠어?

권기영의 머릿속에서 뭔가가 속삭였다.

그것은 초조함이다. 초조함과 조급함이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어서. 하루라도 빨리. 한시라도 빨리. 어서 놈을 없애야 한다.

달리 이보다 더 믿을 만한 자가 누가 있을까. 게다가 자신도 알고 있지 않은가. 일을 처리하는 솜씨만큼은 확실하게 이 남자를 신뢰할 수 있으리라고.

권기영은 묵묵히 김건준을 바라보았다. 김건준은 그 침묵의 시선에 의아한 빛을 띠면서도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권기영이 김건준을 찾은―정말로 지나가다가 그냥 생각이 나서 연락했다곤 애초부터 생각지 않았을, 그를 불러낸 진정한―이유를 말하길.

“사람을 하나 정리하고 싶습니다.”

권기영이 입을 떼었을 때, 한동안 침묵이 돌았다.

아주 짧은 찰나, 김건준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진 것 같았다. 그러나 잘못 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만큼 금방 여느 때의 안색으로 돌아온 그는 권기영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깥 공사장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유난히 요란하게 귀를 찔렀다.

그때, 주인아주머니가 선짓국 두 그릇을 내어왔다. 무뚝뚝한 손길로 뚝배기와 밑반찬 따위를 달그락달그락 내려놓고서 돌아갈 때까지 그곳에는 아무 말도 없었다.

이윽고 김건준이 빙긋이 웃었다. 숟가락을 들면서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여상하게 입을 연다.

“먹으면서 이야기할까요. 드십시오. 입에 맞으셔야 할 텐데요.”

권기영도 잠자코 수저를 들었다. 정갈하게 나온 반찬을 무슨 맛인지도 모르게 몇 젓가락 손대고 선짓국을 떴다. 더운 김이 확 끼쳐, 부옇게 김이 서린 안경을 벗어 앞주머니에 꽂아 넣는다.

“벗으시는 편이 낫군요.”

“예?”

“안경이요.”

권기영은 안경을 눈짓으로 가리키는 김건준에게 “그렇습니까?” 하고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김건준이 웃었다.

“그런 말씀 안 들어 보셨습니까?”

“글쎄요……, 잘 모르겠군요.”

권기영은 고개를 기웃했다. 몇 번쯤 그런 말을 들어 본 듯도 했다. 언젠가는 그런 말을 자주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게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의 일이고, 굳이 기억할 만큼 중요한 일도 아니다. 아니, 무엇보다도 지금은 안경을 벗고 말고 따위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태평하게 그런 이야기나 하려는 게 아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입니까.”

김건준이 불쑥, 아무렇지 않게 말문을 텄다. 권기영은 흘끔 그를 보곤 마찬가지로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내색으로 “모릅니다.”라고 대꾸했다. 그 말에 김건준이 의아한 시선을 주었고, 권기영은 혀를 찼다.

“아마 대등하게 맞붙어서는 당해 낼 수 없을 겁니다. 힘으로도, 기술로도.”

“……. 그 말씀은, 실례지만, 기영 씨로서도 벅차다는 뜻입니까?”

권기영은 속에서 뭔가 욱하고 치밀었다. 자신으로서도 벅차다. 태어나서 한 번도 뱉었던 적이 없는 말을, 그는 지금 꺼내어야 했다.

“예.”

권기영이 딱딱하게 대꾸하자 김건준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권기영쯤 되는 사람이 당해 낼 수 없다니 그야말로 의외라는 그 시선은, 지금 권기영에게는 굴욕에 다름 아니었다.

“누군지 모른다고 하셨는데, 직접 대한 적은 있으시고요?”

“예. 클럽 같은 곳에서 마주친 놈인데,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생긴 것도요.”

김건준은 의아한 얼굴을 했지만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누군지 모른다면, 혹시라도 사라졌다가 곤란한 일이라도 생기지는 않겠습니까?”

“아니요. 없애야 합니다.”

권기영의 대답은 단호한 동시에 날카로웠다. 얼핏 놀란 빛을 띠는 김건준의 시선을 보고 어렴풋이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 부분에 있어서는 조금도 무를 여지가 없었다.

놈을 없애야 한다. ――아무렴. 놈은 지옥에 떨어져야 했고, 그것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망설일 겨를은 없었다.

“그렇군요. 그런데, 누군지 모른다면 어떻게 찾아내야 할까요.”

“제가 놈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권기영은 점차 가슴속이 술렁거렸다. 알 수 없는 초조감이 스멀거리며 심장을 갉작거린다. 이 남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옳은 걸까. 자신이 간과한 부분은 없었던가. 불안감과 초조감이 섞여 날카롭게 곤두선 신경을 자극했다.

“무슨 이유로 그 사람을――.”

“도움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김건준의 말을 자른 권기영의 물음은 서슬 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이 이상은 없다. 여기까지만 듣고 결정하도록, 권기영은 그를 다그치고 있었다.

김건준은 놀란 듯 권기영을 바라보았다. 그가 갑자기 날카롭게 응대하자 놀란 눈치였다. 그 시선을 읽고 권기영은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낸 스스로에게 혀를 차며, 물잔을 집어 들어 마른 입을 축였다.

빌어먹을. ……모든 것이 다 놈 때문이다. 놈과 관련된 일은 죄다 엉망진창이다. 놈을 없애야 했다. 역시 그 수밖에 없었다.

“낯빛이 많이 안 좋으십니다.”

김건준이 말했다. 이렇게 초췌해져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는 가만히 손을 뻗는다. 막 물잔을 비운 권기영은 그 손이 자신의 얼굴로 다가오는 걸 움직임을 멈춘 채 바라보았다. 길고 모양 좋은 손가락, 굵직한 손마디, 그 손은 천천히 권기영에게 다가와――뺨에 닿기 직전, 선뜻 물러났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돌아간 손은 그 앞에 있던 물병을 들어, 권기영의 빈 잔을 채워 주었다.

뭐지. 지금. 언뜻 뭔가 생각날 듯했――.

“좋습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김건준이 선선히 말했다. 그는 무슨 한갓진 이야기라도 하는 양 평연히 숟가락을 집어 들며 “언제쯤이 좋으시겠습니까?”라고 이었다.

권기영은 말없이 그를 보았다.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다. 말을 꺼내면 아마도 승낙하리라고 생각했었으니 뜻밖의 대답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뭘까. 이 이상한 기분은. 마치 돌이킬 수 없는 바퀴를 돌려 버린 듯한.

“……최대한 빨리.”

그러나 어차피 돌이킬 수 없는 바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그대로 굴릴 수밖에 없다. 그 바퀴로 놈을 짓이겨 버릴 수만 있다면.

“사람 입을 타지 않게 조용히 정리되면 좋겠습니다. 가급적이면 저와 건준 씨 선에서 일이 끝나도록. 물론 아버지나 누나에게도 조용히, 말입니다.”

김건준은 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 개인 선에서 마무리하지요. ――대단한 도움은 되지 못하더라도, 아마 원하시는 결과는 내 드릴 수 있을 겁니다.”

권기영은 평소와 같은 얼굴로 웃는 듯 마는 듯 눈매를 굽히는 김건준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남자라면.

지나치게 캐묻지도 않고 권기영이 바라는 대로 따르는 이 남자라면 틀림없이 도움이 될 터였다. 이 남자가 혼자서 놈을 감당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자신도 당해 내지 못한 놈을 혼자 감당할 사람이 있을 리 없다. 그러나 권기영에 더불어 김건준까지라면 놈을 없앨 수 있다.

등줄기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희열과 분노가 뒤섞인 흥분이 권기영을 감싼다. 온몸에 서늘한 한기가 감돌 지경이었다. 놈을 죽인다. 그래, 놈은 마땅히 죽어야 했다. 권기영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식기 전에 드십시오.”

화제의 끝을 알리며, 김건준이 권기영에게 고갯짓을 한다. 담담하게 식사를 계속하는 김건준을, 이자 역시 겉보기와는 다른 놈이라고 생각하며, 권기영은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나락에 가라앉았던 심장이 쿵, 쿵, 다시 뛰기 시작하는 시커먼 유쾌감 속에서 권기영은 거뭇하게 굳어진 핏덩어리를 입안에 넣고 씹었다.

* * *

플라스틱 가벽이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옆 칸으로 들어서는 기척이 들리고 얼마 있지 않아서였다.

처음부터 두 놈이 들어간 줄은 기척으로 알고 있었다. 복도에서든 홀에서든 아무 데서나 흘레붙어 뒹구는 판에, 화장실의 빈칸에 처박혀 그 짓을 한다는 게 별다를 건 없다. 외려 남 눈에 적나라하게 내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는 게 그나마 점잖다고 해 줘야 할 터였다.

그러나 점잖긴, 턱도 없는 소리다.

‘엉덩이 더 치켜들어. 잘 보이게. 더. 그래.’

‘아, 잠깐, 그렇게 갑자기 뽑, ――하악, 아아아―….’

‘큭큭, 아――냄새. 새끼 많이도 싸발기긴. 시원하냐? ……이것 봐라, 뒤로만 싼 게 아니잖아. 그렇게 좋았어? 어? 한 번 더 씻어 줄까? 이번엔 아예 2리터쯤 부어 봐?’

보는 쪽도 보이는 쪽도 흥분으로 달아오른 목소리가 가벽 위로 넘어왔다. 이내 쾌락이 섞인 울음소리, 철썩거리는 살 소리와 거칠게 몰아붙이는 목소리 따위가 뒤섞이기 시작했다.

듣는 것만으로도 귀가 더러워지는 기분이다. 화장실 칸이 쓸데없이 넓은 건 저런 놈들이 놀기 위한 용도였던 모양이다. 이미 이런 경우를 마주친 게 한두 번도 아닌데도 권기영은 지저분한 새끼들, 하고 욕설을 뱉으며 일어나 화장실 칸에서 나왔다.

화장실 한쪽에 비치된 샤워 부스에서 사타구니를 물로 헹구자 절로 낯이 일그러졌다. 배 속과 입구가 뻐근하게 욱신거렸다. 하루 종일 몸속에 담겨 있던 딜도를 뽑아내고 볼일을 보고 나면 이렇다. 비어 있는 장이 꿈틀거리는 느낌.

빌어먹을, 권기영은 샤워기를 잠그고 막 나가려다 걸음을 멈추고 만다. 무릎에서 가슴까지만 가리는 샤워 부스의 문 너머, 유리로 된 화장실 문 바깥에 놈의 모습이 보였다. 팔짱을 끼고 비스듬하게 의자에 앉은 놈은 뭔가 생각에 잠긴 듯 그대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건장하지만 결코 둔해 보이지 않는 날렵한 근육. 비례가 잘 맞는 팔다리와 탄탄한 동체. 마치 흠잡을 데 없이 깎아 놓은 조각상 같다.

――기영 씨에게 벅찰 만한 사람이 흔할 리 없는데……, 한번 알아볼까요?

미심쩍은 듯이 생각에 잠겨 있던 김건준이 그렇게 물었을 때, 권기영은 ‘그럴 필요 없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권기영이라고 해서 놈이 어떤 인간인지 알아보려 하지 않은 게 아니다. 그러나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놈은 꼬리를 잡히지 않았다. 미행을 할 여지도, 매니저를 을러서 캐낼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 그나마 클럽이라는 접점이 있는 권기영조차 그럴진대, 김건준이 놈을 쉽게 잡아내리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설령 잡는다 해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터였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만에 하나라도 김건준이 놈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그를 죽여야만 하는 이유’를 눈치채게 된다면.

“…―.”

생각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워낙 눈치가 빠른 남자다. 어쩌면 놈을 죽이면서 뭔가 낌새는 눈치챌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단코 ‘확신’만큼은 주어선 안 되었다. 권기영은 어디까지나 모두의 머리 위에 올라선 남자여야 했다.

그때, 권기영의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놈이 약간 고개를 들었다. 후드 너머로도 눈이 마주친 걸 알 수 있었다. 놈이 입매를 틀어 올렸기 때문이다.

놈이 보란 듯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성기를 툭툭 두드렸다. 몸에 붙는 속옷 위로 뚜렷하게 굴곡을 드러내고 있는 성기가 흔들린다.

――그래, 놈이 뭐 하는 놈인지 알 필요가 뭐 있을까. 어차피 죽이리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는데.

권기영은 이를 짓씹으며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놈이 한 손에 든 사슬 끈을 잘그락거리며 비죽이 웃었다.

“시원하게 잘 쌌나? 구멍은 주름마다 깨끗하게 씻었겠지?”

혀를 길게 내밀어 구물구물 핥는 시늉을 한 놈은, 권기영이 턱을 악다물자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 비틀린 입매를 노려보며 권기영은 푸르스름한 웃음을 웃었다.

그래, 웃어라. 머지않아 숨통을 끊어 줄 테니.

“그러고 보니 그 정키는 요즘도 만나나?”

몇 번째인지 모를 사정을 하고서야 겨우 적당히 수그러든 물건을 뽑아낸 놈은, 시체처럼 엎드려 늘어져 있는 권기영의 옆에 비스듬히 모로 누워 가슴 아래에 집어넣은 손으로 유두를 만지작거리다가 불현듯 생각난 듯 물었다.

권기영은 움칫 눈살을 꿈틀거리며 눈꺼풀을 들었다가 도로 감고 말았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게 생각나 버렸다. 당시의 기분이 선명하게 되살아나며 속이 울컥 뒤틀렸다.

그날 이후로 한신주와는 만난 적이 없었다. 전화가 왔었지만 받지 않고 수신 거부 번호로 등록했다. 그를 다시 볼 생각은 없었고, 몇 번을 끈질기게 전화하든 알 바 아니었다.

그날, 놈에게 사정없이 박히고 또 박혀 하얗게 비어 버린 머리에 마지막으로 맺혔던 시야, 거기에 비친 것은 한신주였다. 넋이 나간 듯 텅 비어 있던 놈의 눈동자 속에 무엇이 비쳤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넋 나간 눈동자가 기묘하게 반들거리는 것은 보았다.

……그놈 따위에게. 늘 자신의 성기에 달라붙어 어쩔 줄을 몰라 하던 그런 갈보 따위에게.

“하긴 구멍에 딜도를 박힌 채로 딴 놈한테 박아 대면 그것도 좀 웃기지?”

놈은 권기영을 빤히 바라보다가 무언의 답을 알아차렸는지 큭큭 웃었다. 유두를 갉작거리던 손을 쓸어내려 권기영의 엉덩이를 움켜쥔 놈은 이내 그 가운데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권기영은 반사적으로 이를 악물고 말았다.

“뭘 그래, 아프지도 않을 거면서. 막 방금까지 내 물건도 실컷 집어삼켰으면서 손가락 두세 개쯤은 별것도 아니잖아, 응?”

놈이 손가락들을 제각기 구불거리며 느릿하게 피스톤질을 시작했다. 권기영은 자신의 엉덩이 속을 직격하는 그 생경한 이물감에 낯이 절로 일그러졌다. 

죽여 버린다. 죽여 버릴 테다. 그 빌어먹을 손가락도 성기도 모조리 토막을 내서 개밥으로 던져 줄 테다.

“정말이지 죽여주는 구멍이란 말이야. 말했던가? 내가 먹어 본 가운데 가장 맛 좋은 구멍이라고?”

놈이 아래를 헤집던 손을 빼 권기영의 코앞에서 흔들었다. 연유통에 손을 담갔다 꺼낸 것처럼 흥건하게 뚝뚝 흐르는 정액을 권기영의 입술에 문질렀다. 순간 권기영은 욱하고 치밀어 놈에게 저도 모르게 주먹을 휘두르고 말았다. 그러나 늘어져 있던 그의 주먹 따위는 대수도 아니라는 듯 손바닥으로 가볍게 후려치며 놈은 즐겁게 킬킬거렸다.

“칭찬해 주는데 왜 까탈을 부리고 있어. 이러다 오히려 내가 중독되겠다 싶어 곤란해질 만큼 맛있는 구멍이라는데. 요새는 낮에도 너를 생각하면 발딱 서거든, 내 새끼가.”

도로 권기영의 엉덩이 속에―조금 전에 주먹을 휘두른 벌이라는 양―한결 거침없이 손가락들을 틀어박은 놈은, 마구잡이로 엉덩이 속을 휘저으며 “하긴 곤란할 건 없지.” 하고 이를 드러낸다.

“너도 내 물건을 먹어 치우는 게 점점 더 욕심 사나워지고 있으니. 너, 사실은 낮 동안 엉덩이 속에 박힌 딜도로 휘저어 대면서 싸지?”

“개소리 마, 씹새끼야.”

이를 가는 권기영을 보며 놈은 비죽 웃었다. 말도 참 예쁘게 하지, 우리 이쁜이, 놈이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권기영은 숨을 삼키고 말았다. 몸속을 헤집던 손가락들이 가장 민감한 곳을 긁은 것이다. 권기영이 허리를 움찔한 걸 금세 알아차린 놈은 낮게 웃으며 집요하게 그곳을 찔러 대기 시작했다.

“……, …―, …―! ――!!”

권기영은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이를 악물었지만 거칠어지는 숨소리는 여과 없이 흘러나가고 만다. 이미 더 나올 것도 없을 만큼 쥐어짜였는데도, 직격으로 잇따르는 자극에 허리가 부들거렸다. 권기영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벽이 놈의 손가락을 조이는 게 느껴진다.

“아주 예쁘게 생겨 먹은 몸이란 말야. 웬만한 양복은 다 잘 어울리겠어. 번듯하게 양복을 입혀 놓고서 거시기만 꺼내 놓고 자위를 시키면 아주 눈요깃감으로 그만일 텐데……. 상상만 해도, 봐.”

놈이 자신의 사타구니를 주물렀다. 이미 오늘 몫은 마쳤을 텐데도 놈의 성기는 다시 핏기가 올라 있었다. 발정기의 짐승 같은 놈, 권기영은 욕설을 짓씹으며 잇새로 내뱉었다.

“왜, 아예 양복을 입고 오라고 하지.”

“그래, 그러면 좋겠지만 여기 매니저는 복장 규정에 깐깐하단 말야, 유감스럽게도.”

“그럼 밖에서 보든가.”

놈이 침묵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인 듯 말을 하지 않는 놈에게, 권기영이 코웃음 치며 내뱉었다.

“왜. 이 구질구질한 데가 아니면 네 맘대로 활개 칠 수도 없을 것 같나?”

이 폐쇄된 곳이나 네 세상이지, 악이 서린 목소리를 짓씹는 권기영을 바라보던 놈이 문득 씨익 웃었다.

“바깥이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곤 잠시 침묵하던 놈은 피식 웃더니 허리를 구부리며 권기영의 몸속을 더듬고 있던 손가락을 뺐다. 움칫 허리를 굳히는 권기영을, 정액으로 범벅이 되어 질척하게 젖은 손가락들이 거슬러 올라가더니 권기영의 유두에 문질러 닦기 시작했다.

동시에 놈이 길게 내민 혀도 권기영의 배꼽에서부터 피부 위를 따라 올라갔다. 뱀이 기어 올라오는 것처럼 느리게, 끈적하게, 놈의 혀는 목덜미를 타고 올라가 권기영의 입에 닿는다.

더운 혀가 끈끈하게 얽혀 오는 게 불쾌해 권기영은 고개를 돌렸다. 여느 때라면 턱을 움켜쥐고 하던 짓을 계속할 놈이 어쩐 일로 순순히 권기영의 귀로 옮겨가 할짝였다. 그러다가 문득,

“왜. 친구라도 부르려고, 이쁜이?”

놈이 웃음기 밴 목소리로 은근하게 속삭였다. 권기영은 욕설을 삼키며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놈은 뭐가 즐거운지 귓가에서 나직이 키득거렸다.

“글쎄……,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이쁜이가 원한다면 생각 못해 볼 것도 없지. 그런데 말이야, 바깥에서 만난다면 알아보기 힘들지 않겠어?”

놈이 그렇게 말하며 후드를 툭툭 두드린 순간, 권기영은 얼굴이 굳어 버렸다.

후드.

이 우스꽝스러운 도구는, 그러나 이곳에서 그들을 가려 주는 유일한 방패다. 이것만이 그들의 인격을 덮어 주고 있었다. 이걸 뒤집어씀으로써 그들은――권기영은 이곳에서 ‘권기영’이 아닐 수 있었고, 여태 놈에게 치욕을 당하며 짓밟혔던 것은 권기영이 아닌 ‘KK’일 수 있었다.

오로지 이것 하나로만.

“뭐든, 알아볼 만한 신호를 정하면 되잖아.”

“다른 놈이 나와서 그 신호를 할지 어떻게 알아.”

권기영의 딱딱한 대꾸에 놈이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저었다. 말없이 권기영을 바라보며 빙글거리는 놈의 웃음이 신경을 날카롭게 긁어 댄, 다음 순간.

“벗어.”

심장이 차가워졌다.

한낱 천조각 하나. 그러나 그 하나로 이곳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가 바뀌게 되는 물건이다.

“다른 놈이 나올지 어떻게 아느냐는 건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다면 나만 벗을 이유는 없을 텐데.”

권기영이 놈을 노려보며 대꾸하자 놈은 피식 웃었다.

“이쁜이. 지금 청을 하는 입장인 건 너야, 내가 아니라. 나는 이 구질구질한 데서만 박아 대도 아무런 불만이 없다고.”

“…―.”

“벗어.”

권기영의 턱이 부들 떨렸다. 벗으라고. 이걸. KK를.

누군지 정체도 알지 못하는 놈 앞에서 그런 위험한 짓을 할 수는 없다. 이것은 이성이 말하는 소리다. 또한 감정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벗기 싫다고.

그러나 또 다른 이성은 말한다. 어떻게든 놈을 끌어내야 해. 그렇게 해서 죽여 버린다면 무슨 상관일까. 영원히 저 입은 닫혀 버릴 텐데.

잘 생각해, 권기영.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얻어야 할지.

권기영은 이를 악물었다. 부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귓속에서 울렸다. 후드의 퍼스너를 여는 손에 힘이 들어가 하얗게 관절이 도드라진다. 이윽고――.

고작 후드 하나.

그러나 그 후드 하나가 벗겨지면서, 그곳에는 KK가 아닌 권기영이 남았다.

놈은 말없이 권기영을 응시했다. 팔짱을 끼고 한 걸음 물러서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놈은, 마치 값을 매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동안 말이 없었다. 후드 안에서 놈의 시선이 권기영의 얼굴 구석구석을 핥는 게 느껴졌다.

그런 시선을 무서운 눈초리로 받아치는 권기영을 충분히 살폈는지, 휘이――, 놈이 휘파람을 불었다. 놈의 입매가 올라갔다.

“이거야……아주 대박인데. 생긴 것까지 완벽하게 내 취향이잖아.”

횡재한 기분이야, 아니, 여태 손해 본 것 같은 기분이기도 하고, 놈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놈은 핥는 듯한 시선으로 다시 권기영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구석구석 살피며 자신의 사타구니를 주무르고 있었다. ‘권기영’을 보면서.

권기영은 붉게 물들 것만 같은 시야를 간신히 억누르며 굳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내일은 어디서 보도록 할까.”

“아아, 잠깐잠깐, 일단 생각해 보자고, 어떻게 할지.”

놈이 손을 내저으며 어깨를 추어올렸다. 순간 권기영은 왈칵 솟구치는 분노로 눈앞까지 새카맣게 흐려졌다.

“너――.”

“화내는 얼굴도 아주 그만인데. 섰어.”

놈이 자신의 성기를 툭 두드렸다. 받쳐 주는 손이 없이도 허공에서 끄덕거리는 성기 따위, 뜯어 발겨도 시원찮다. 권기영은 놈의 목을 움켜쥐고 벽에 밀어붙였다. 이 자리에서 당장이라도 놈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죽여 버릴 수만 있다면. 빌어먹을.

목뼈라도 부러뜨릴 기세로 놈의 목을 틀어쥐는 권기영을, 놈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빙글거리며 눈으로 핥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놈이 권기영의 손목을 붙잡고 뜯어낸다. 입술을 핥은 놈은 흥분으로 거칠어진 목소리를 나직이 죽이며 속삭였다.

“침대로 돌아가서 앉아. 날 보고. 그리고 네 손으로 구멍을 벌리는 거야. 네 얼굴과 구멍, 둘 다 잘 들여다보이게.”

“이――.”

“그리고 내일 밖에서 보자고.”

양복 입고, 응?, 놈이 장난스럽게 말하며 히죽 웃었다. 권기영은 코앞까지 다가온 놈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죽여 버리고 싶다. 죽여 버리고 싶어서 머리가 돌아 버릴 것 같았다. 놈을 죽이고 나면 희열로 미쳐 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놈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놈은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뭐 하고 있냐는 듯 느긋하게 턱짓으로 침상을 가리킨다. 놈은 권기영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권기영은 이를 악물었다. 악다문 턱이 부들거린다.

내일이면. 그래, 내일만 되면.

놈은 낱낱이 토막 나 어느 쓰레기통 안을 뒹굴게 될 터였다.

권기영은 이를 갈며 침상에 다리를 올리고 앉았다. 주먹을 움켜쥔 채 무시무시하게 놈을 노려보는 권기영의 몇 걸음 앞 정면에서, 놈은 발기한 자신의 성기를 슬슬 문지르며 “구멍 벌려야지, 활짝.” 하고 입매를 올린다.

놈의 발치에는 조금 전 권기영이 벗어던진 후드가 걸레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KK라는 글자는 구겨진 지 오래였고, 이곳에 앉은 것은 권기영이라는 인간이었다. 분노와 굴욕으로 파르라니 질린 얼굴을 고스란히 드러낸.

그리고.

권기영이 눈을 꾹 감고 부들거리는 손을 아래로 움직인 몇 초 후.

웃음을 터뜨린 놈이 “아주 잘했어.”라고 욕망에 찬 목소리로 속삭이며 성큼 다가왔고, 벌어져 있던 몸속으로 뜨거운 살덩이가 단숨에 비집고 들어왔다.

* * *

어디서 볼지는 내일 저녁에 연락하지, 그 말을 남기고 떠났던 놈이 초저녁쯤 보낸 문자에는 「자정 ××호텔 로비」라고만 적혀 있었다.

다른 누군가가 잠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짐작하면서 굳이 위험한 장소로 잡지는 않을 테니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따지면 이 일시는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셈이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오가는, 여차한 경우의 일반적인 안전은 그럭저럭 확보된, 그러나 사람이 그렇게 들끓지는 않을 때와 장소.

권기영은 벽을 등진 자리에 앉아, 자정에 가까운 시각임에도 그렇게까지 한산하지는 않은 로비로 시선을 주고 있었다. 체격 좋은 남자, 특히나 놈과 비슷할 만큼 건장한 남자에게는 조금 더 오래 시선을 준다. ……아냐. 저 남자는 아니다. 저 남자도.

권기영은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설마하니 그 웃기지도 않은 후드를 쓰고 나타날 리는 없으니 상대만이 자신을 알아볼 수 있다는 불리한 상황 속에서 시간이 다가올수록 초조감이 더 짙어지고 있었다. ‘놈’이라면 틀림없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자신의 감을 지나치게 믿었던 걸까.

권기영은 시계를 내려다보곤 다시 주위로 시선을 주었다. 멀찍이, 기둥으로 반쯤 가려져 있는 로비 저편의 소파에 앉아 신문을 넘기고 있는 김건준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권기영은 그에게서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돌리곤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이제 곧이다. 이제 곧.

‘방에 들어가기 전에 처리해야 합니다.’

만일 놈이 방을 잡아 뒀다면, 그런 전제를 두고서 권기영이 제일 먼저 못 박아 둔 말이었다. 놈이 권기영에게 보낸 문자를 시선으로 훑다가 고개를 드는 김건준에게 권기영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엘리베이터나 계단, 혹은 복도,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감시 카메라 쪽도 손을 써 뒀으니 신경 쓸 필요 없고, 남의 눈에만 안 띄면 됩니다.’

이 호텔은 제일 위의 다섯 층은 하루 전에 연락해서는 예약을 잡을 수 없고 아래의 다섯 층에는 편의 시설들이 들어와 있다. 나머지, 권기영에게 놈의 연락이 들어온 시점에서 비어 있던 방은 모두 빌려 뒀다. 놈 역시 위험 부담을 생각해야 하니 방으로 바로 부르지는 않을 터였다.

‘생각보다 넉넉하게 비어 있더군요. 자칫 복도에서 처리하게 되면 제일 가까이에 빌려 둔 방으로 옮기면 될 겁니다.’

그 방들에는 문고리 아래에 따로 표시해 뒀고 밀면 바로 열릴 거예요, 권기영이 참고하라고 호텔 내부구조도를 건네주며 말하자 김건준은 예, 하고 받아 들며 물었다.

‘그 남자가 기영 씨와 만나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긴다면……?’

‘눈치채이지 않게 바로 따라 오셔야겠지요.’

‘발신기가 있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아니요. 반드시, 놈과 제가 둘만 남게 되기 전에 처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일이 어긋나 알 수 없는 장소에 놈과 둘만 남게 되었을 때 김건준이 찾아와선 곤란하다. 무슨 짓을 하고 있을지 모를 상황에서, 그 모습을 그에게 보일 수는 없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차라리 다음 기회를 엿보는 편이 나았다.

‘힘들 것 같습니까?’

‘아니요, 밑준비들을 워낙 잘 챙겨 주셔서요. 예상 밖의 변수만 없다면 딱히 문제될 건 없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아무래도 여의치 않다 싶으면…….’

김건준은 양복의 가슴팍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 안에 꽂혀 있을 총을 건네준 것은 권기영이었다.

‘사격은 제법 쓸 만하게 하는 편입니다. 취미가 사냥이라서요.’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하고 담담하게 웃는 김건준이 그의 입으로 ‘제법 쓸 만하다’고 할 정도라면 상당한 기량을 가졌다고 생각해도 좋을 성싶었다. 권기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피치 못하게 써야 할 경우가 생긴다면, 머리가 좋겠군요.’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지 않고 단숨에 죽어 버리도록. 권기영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김건준을 왜 그러냐는 듯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김건준은 가만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히 말했던 걸까. 입맛이 썩 좋지는 않았다. 긴밀한 건수를 맡기면 맡길수록, 그만큼 큰 빚을 지게 되는 셈이다. 총을 쓸 바엔 차라리 자신이 직접 쏘아 버린다면――아니, 놈이 자신에게 경계를 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사를 시키려면, 역시 확실하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필요했다.

권기영은 묵묵히 김건준을 바라보았다. 새삼스럽게 호들갑을 떨 일까지는 아니겠지만, 이 남자는 사람을 죽이는 일을 앞두고도 태도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허세나 연기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

아버지가 자신의 굴에 불러들이려는 게 적어도 여우 새끼가 아닌 건 분명하다고 권기영이 생각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식사가 들어왔다. 저녁을 먹기에는 꽤 늦은 시각이었지만, 식사를 마치고 적당히 몇 마디 이야기나 나눈 뒤 자리를 옮기면 그럭저럭 시간이 맞을 것 같았다.

‘한창 바쁘실 때에 마음 편하게 받아들일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을 텐데 고맙습니다. 언제든 제가 도움이 될 때가 있다면 힘닿는 대로 성의껏 도와드리겠습니다.’

‘하하, 무슨 말씀을요. 곧 한 가족이 될 텐데, 어려운 일이 있으면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저보다는 오히려 기영 씨가 더 바쁘실 텐데, 휴일을 빼느라 힘드셨겠습니다.’

‘그나마 내일이 토요일이라 다른 때보다는 시간을 빼기가 쉬웠습니다. 집에는 일요일 저녁에 들어간다고 해 뒀으니, 제 시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놈을 죽인 뒤 토막을 쳐서 개먹이로 주든, 하수구에 흘려버리든, 권기영의 손으로 직접 뒤처리를 하려면 심적으로든 시간적으로든 최소한의 여유는 있어야 할 터였다. ……그래. 놈의 눈깔, 손가락, 혀, 성기. 모두 조각조각 뜯어서 개에게나 먹여 버릴 것이다.

권기영은 심장에 서늘하게 피어오르는 광기 어린 흥분 속에서, 입이 바싹 말라 오는 걸 느꼈다. 이제 금방이다. 앞으로 몇 시간.

반주로 따라 나온 술병을 집어든 권기영이 김건준에게 권하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신경 써야 할 일 전에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주십시오. 제가 따라 드리겠습니다.’

권기영은 자신의 잔을 채워 주던 김건준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가만히 웃는 걸 보았고, 김건준은 뒤늦게야 권기영의 시선을 알아차린 듯 시선을 맞추었다.

‘아니……, 아버지도 정종을 좋아하셔서 가끔 반주를 드실 때 따라 드렸던 기억이 나서요.’

‘아아……. 오래전에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예, 제가 고등학교 3학년일 때였습니다. 사업도 실패하시고 사람들 입도 거칠게 타고……, 그맘때 여러모로 힘든 일이 겹치다 보니 충격이 크셨던가 봅니다.’

‘병환을 얻으셨었다고…….’

권기영은 김건준의 이력에 적혀 있던 내용을 떠올렸다. 발견 당시 이미 암 말기였다고 적혀 있었다.

‘예, 그렇기도 합니다만, 자진하셨습니다.’

권기영은 입을 다물었다. 오히려 정작 당사자인 김건준은 이미 오래전에 지난 일이라는 듯 담담하게 말을 이으며 쓰게 웃었다.

‘그렇게 가시고 나니,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게 불효했던 기억만 나더군요.’

‘……. 좋은 아드님이라고 여기셨을 겁니다.’

김건준은 권기영에게 시선을 주었지만 웃기만 할 뿐 그 말에 대답은 하지 않았다. 권기영은 침묵 속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김건준의 어머니가 그즈음부터 요양원에서 지내기 시작했다고 적혀 있었던 걸 떠올렸다. 과연, 그때 집안이 산산이 깨어져 그 이후로 마음 붙일 곳도 없이 온갖 죽을 고생을 겪은 끝에 현재에 이르렀다는 거로군. 어지간한 일에는 속을 드러내지 않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내 김건준이 ‘죄송합니다, 우울한 이야기를 했군요.’라고 말을 꺼낸 것이다.

‘이런 따분한 이야기보다는, 기영 씨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요.’

‘글쎄요. 저는 워낙 별일 없이 지내서…….’

권기영에게는 지금껏 고난이라는 게 없었다. 모든 것이 다 ‘당연’한 일들이었고, 그 당연한 일들은 이야기해 봐야 자랑이나 잘난 척으로 치부되기 십상이었다. 달리 기억에 남는 일도 없다.

‘기윤 씨 말로는 여성 편력이 화려하셨다고 하던데요.’

김건준이 화젯거리를 찾도록 거들어 주려는 듯 웃으며 운을 뗐다. 권기영은 ‘글쎄요.’ 하고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편력이라고 불릴 정도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분은 없으십니까? 아니면 첫사랑이라든가.’

‘글쎄……, 없는 것 같군요. 별로 그런 데에 집중하지 않아서요. 중요하지 않은 건 굳이 기억에 담아 두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하고 김건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권기영은 딱히 여자―혹은 남자 등, 섹스 상대―에 관한 이야기를 즐기지는 않았지만 화제를 너무 단칼에 잘랐나 싶은 감이 들어 화살을 돌렸다.

‘건준 씨야말로 과거가 화려하셨을 것 같은데요.’

‘저요? 하하……, 아닙니다. 집이 어려워진 뒤에는 그럴 여유가 없었고, 그전에는 아직 고등학생 때였던 터라서 여자보다는 친구랑 노는 게 더 재미있었어요. 좀 많이 늦된 편이었죠.'

‘예에……. …….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지 않으셨던가요?’

예전의 대화를 떠올린 권기영이 묻자 김건준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이 희미하게 웃다가 입을 열었다.

‘고등학생 때 잘 어울려 놀았던 친구 집에 종종 놀러 가곤 했었는데, 그 친구한테는 형이랑 누나가 있었죠.’

미묘하게 맺는 말을 들은 순간 권기영은 아아, 하고 감을 잡았다. 친구의 누나라. 흔한 첫사랑이다. 김건준도 권기영이 금세 눈치채리라고 생각한 듯했다.

‘처음부터 그런 대상으로 본 건 아닙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동경이었어요. 뭐든 못하는 게 없이 빼어나고 완벽한 사람이었거든요. 그랬는데…….’

‘그러는 사이에 점점 그런 대상으로 보이던가요?’

남의 연애담 따위는 자신의 편력만큼이나 흥미도 관심도 없었지만, 이 남자의 첫사랑이라니 별로 상상이 가지 않아서인지 아주 재미가 없지도 않았다. 김건준은 잠시 웃고만 있다가 말을 이었다.

‘어쩌다 보니 우연찮게 스킨십이 있었는데 그 뒤로는 그런 대상으로밖에는 보이지 않게 되더군요. ……원래 사람에게 크게 감정을 주는 성격도 아니고 무심하다는 말도 많이 들었는데, 아니었던가 봅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뭔가에 목을 맨 때는 없었어요. 그 사람의 말 한마디, 손짓 하나, 모든 게 다 욕심이 나서 어쩔 줄을 몰라 했거든요. 그 사람이 싫어할까 봐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도 쓰고요.’

‘그렇게 좋아했다면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표가 났을 성싶은데요, 웬만큼 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정다감해 보이긴 하지만 그렇게 감정에 휘둘릴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 이 남자가 그랬던 적도 있다는 게 의외라고 생각하며 권기영이 말을 거들자 김건준은 예, 하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도 알았습니다. 제가 애가 달아서 눈에 보이는 게 없을 지경이라는 것도 알았지요.’

한동안 말이 멈추었다. 권기영이 ‘그래서요?’라고 묻자 기억에 잠긴 듯했던 김건준은 가만히 웃었다.

‘뭐……, 얼마 있지 않아 지방으로 전학을 가게 되어서요. 그 뒤로는 저도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졌지요.’

부친의 도산 이후 크게 뒤바뀌어 버린 김건준의 삶을 떠올리며 권기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냥 꿈에만 젖어 있을 수는 없었던 냉혹한 현실이 그때 찾아왔던가.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라고 하니까요.’

권기영은 의례적인 위로를 덧붙였다.

‘게다가 많이 미화되기도 한다니, 다시 만나 보면 그 당시와는 다르게 보일지도 모르지요. 다시 만난 적은 있으십니까?’

‘완벽한 사람’이었다니, 말도 안 되는 미화다. 기억 속의 환상은 시간이 지난 뒤 현실에 비추어 보면 형편없이 퇴색되기 십상이다. 특히나 미화되었으면 되었을수록 더.

김건준이 웃는 걸 보고 권기영은 그가 그녀를 다시 만나 보았으리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여전하더군요.’

선뜻 돌아온 대답은 권기영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입을 다문 김건준은 그 이상 이야기할 기색은 보이지 않았고 권기영은 약간은 어이없다는 기분과 함께 그래서 그 완벽한 사람과의 재회는 어떻게 되었는지를 묻고 싶은 기분도 들었지만 관두기로 했다. 본인이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바에야 이 이상은 지나치게 개인적인 영역이다.

‘이거야 원……, 누나가 걱정되는군요.’

권기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한숨처럼 중얼거리자 김건준은 짤막하게 웃고 말았다.

어차피 수십 년을 살아가는 동안 각자 배우자 외의 다른 남자든 여자든을 두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권기영은 실제로 누이에 대한 걱정 따위는 손톱만큼도 하지 않았지만 그와는 전혀 별개로 이 남자의 첫사랑이라는 그 완벽하다는 여자가 궁금해졌다. 풋내 나는 어린애도 아니고, 완벽이라.

지금의 인상이 강해서인지 이 남자는 고교 때에도 그렇게 풋내 나는 어린애였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더 헛웃음이 난다.

글쎄, 과연 이 남자는 그 무렵에 어땠을까.

‘기영 씨는 특별히 기억나는 분은 전혀 안 계십니까?’

그때 김건준이 말해 권기영은 생각의 화살을 돌리고 만다.

‘예, 그다지. 요 3, 4년 사이에 만났던 사람쯤이라도 되는 게 아니라면 아마 이제는 길에서 마주쳐도 못 알아볼걸요.’

‘하하……, 자칫해선 원망도 많이 들으시겠습니다. 안 좋은 기억으로라도 남아 있는 사람도 없습니까?’

‘글쎄요, 딱히……. 기억에 담아 둬서 좋을 게 없는 일이라면 더 깨끗이 잊어버리는 게 나으니까 안 좋은 기억은 더 빨리 잊어버리려고 하거든요. 실제로도 그렇고. 마인드컨트롤이 잘 되는 편이라서요.’

잊어버린다기보다는 의식적으로 생각을 안 한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요, 권기영은 심상하게 말했다. 김건준은 물끄러미 권기영을 보다가 빙긋이 웃었다. 권기영의 빈 잔에 다시 술을 따라 주며 조용히 말한다.

‘좋은 일입니다.’

그렇다. 불쾌하게 기억에 남은 일은 그 일이 끝난 이상은 굳이 다시 곱씹을 필요 없다. 없었던 일인 듯이 기억 속에 잠재워 두고 다시는 꺼내지 않는 게 좋다. 권기영은 허벅지 위에 깍지 끼고 올려 두었던 손에 희미하게 힘을 주었다.

이번 일 역시 마찬가지다. 놈을 죽이고 나면. 흔적조차 남지 않도록 아예 없애 버리고 나면, 머릿속에서 씻은 듯 지워 버릴 것이다. 그럴 수 있을 터였다.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동시에 가슴속은 뜨거워지는 기묘한 감각이 몸을 감싼다. 권기영은 다시금 가슴속에 일렁이며 떠오르는 흥분을 느끼며 시계를 보았다. 초조한 희열을 새기며 초침이 돌아가고 있었다.

열두 시.

심장이 뛰었다.

권기영의 시야에는 이렇다 하게 들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 몇 분쯤 늦는다 해도 이상할 건 없다. 권기영은 초조한 마음을 다독이며 시선을 멀리로 던졌다. 호텔 아래층에 있는 클럽에 가는 듯 화려하게 차린 아가씨 한둘이 계단 아래로 또각또각 내려가고 있었다. 잘 차려입은 젊은이들이 드문드문 보이는 건 그 탓인가 보다.

그때 권기영은 문득 한곳에 시선을 멈추었다. 계단에서 올라와 잠시 멈추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이쪽을 보곤 곧 이리 곧바로 걸어오기 시작하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가벼운 걸음으로 선뜻선뜻 다가오는 중키의 청년은 권기영과 눈이 마주치자 눈매를 휘며 웃었다.

즐겁게 들뜬 듯 가벼운 걸음걸이. 고양이처럼 끝이 살짝 올라간 눈매. 금세라도 웃음을 터뜨릴 듯 야릇한 미소를 머금은 입술.

그 낯익은 얼굴을, 권기영은 표정을 지운 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런 권기영을 본 청년은 점점 더 터질 듯한 웃음을 머금는다.

이윽고 청년이 권기영의 세 걸음 앞에서 멈춰 섰다.

“오랜만이야, 기영 씨.”

권기영의 꾹 다문 턱에 힘이 들어갔다. 이곳에서 마주친 게 우연일 리는 없는 한신주가, 그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

한신주는 반들거리는 눈을 예쁘게 접으며 속살거렸다.

“기영 씨, 전화 안 받더라? 요즘 많이 바빴어?”

“……. 너는 한가하다 못해 정신이 나간 모양이지.”

권기영이 입매를 틀어 올렸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건 약간의 당황을 크게 웃도는 분노였다. 그가 우연히 여기에 찾아왔다고 생각할 만큼 권기영이 바보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을 한신주는 기분 상한 빛도 없이 웃었다.

“올라가자. 기다리거든.”

엘리베이터 쪽을 고갯짓으로 가리키는 한신주에게 권기영은 코웃음을 쳤다. 시선을 돌리자 김건준이 이쪽을 기척 없이 살피고 있었다. 이곳의 말소리까지는 들리지 않을 그는 예상치 못한 낯익은 얼굴의 등장에, 만에 하나라도 우연일 가능성을 열어 두고서 어떻게 할지를 가늠하고 있는 듯했다. 권기영이 막 그에게 고갯짓을 하려 할 때,

“부르지 마. 여기서 내가 소리라도 지르면서 아무 말이나 막 떠들어 대면 별로 좋지는 않잖아?”

한신주가 재빨리 속삭였다. 여전히 생글거리고 있는 그 얼굴을 노려보며 권기영은 하, 하고 어이없이 웃었다.

“못 본 새 아주 대단해지셨는데. 내게 협박을 할 주제가 다 되시고.”

“오늘 그 남자를 못 만나면 나중에 곤란해질 텐데, 기영 씨? 그러지 마, 오래 안 기다린다고 했단 말야. 시간 별로 없어. 게다가,”

“…―!”

한신주가 주머니 속에서 손을 움직이는 기척이 난 것과 동시에, 권기영은 표정을 지웠다. 몸속에 담겨 있던 딜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주 약하고 느리지만 분명히 구물거리고 있었다.

“나한테 있는 리모컨으로는 켤 수만 있고 끄진 못해. 그 남자 못 만나면 당장 오늘도 곤란할 것 같지 않아?”

심술궂은 고양이처럼 빙글거리는 한신주를 권기영은 말없이 노려보았다. 이윽고 그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한신주가 순간 웃음을 지우며 움찔할 만큼 사납게 웃음 지으며, 권기영은 일어났다.

“한신주. 아랫도리가 너덜거리는 갈보라도 머리는 꽤 잘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너는 놈을 도운 걸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거다. ――그래, 그럼 어디 가 볼까.”

흘끔 두려운 눈치로 권기영을 쳐다본 한신주는 그러나 허세를 부리듯 고개를 치켜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었다. 권기영은 그 뒤를 따라가며 김건준에게 시선을 주었다. 눈이 마주친 김건준이 신문을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보였다.

엘리베이터 홀에 다다르자 네 대의 엘리베이터 중 한 대가 막 문이 열리는 참이었다. 한신주는 권기영과 둘만 올라타자마자 닫힘 버튼을 눌렀고, 권기영은 성큼성큼 다가오던 김건준에게 눈짓했다. 닫히는 문 사이로 김건준이 바로 옆의 엘리베이터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래. 이렇게 된 바엔 놈이 기다린다는 곳으로 아예 들이닥쳐 거기서 놈의 머리를 날려 버려도 될 터였다. 아마도 도중에 한 번쯤 멈추어 그들이 목적하는 층을 확인하고 따라올 김건준과는 필연적으로 시간차가 날 수밖에 없다. 그 정도의 시간쯤은, 한신주를 상대로는 얼마든지 벌 수 있었다.

권기영은 예상했던 층 가운데 가장 높은 층수를 누르는 한신주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분노가 유난할 만큼 끓어오르는 건 어렴풋한 불안이 섞인 초조감 탓이다.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리라고는 생각했었다. 그러나 거기에 익숙한―또한 권기영이 결코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얼굴이 섞임으로써, 어둑하고 불안정한 기분이 크게 요동쳤다.

“좋았어?”

그때 한신주가 불쑥 말을 걸었다. 권기영이 곁눈질로 일별하자 그가 악의로 가득한 웃음을 지었다.

“그 남자 좆 말이야. 그날 보니까 엄청나던――.”

이죽거리는 한신주의 말은 도중에 멈추고 말았다. 권기영이 그의 얼굴을 후려갈긴 탓이다. 비명을 지른 한신주는 입안이 터졌는지 입술이 붉게 물들었다.

“저승에서 후회하게 만들어 줄까? 내가 여기서 네 목 하나쯤 못 꺾어 버릴 것 같아?”

머리가 새카맣게 뜨거워지면서 피가 거꾸로 솟았다. 고작 이따위 놈이. 자신의 발이나 닦던 이 천박한 갈보가.

권기영이 그의 목을 움켜쥐었을 때였다. 더럭 겁에 질려 커다랗게 홉뜬 눈으로 권기영을 올려다본 한신주가 주머니를 더듬었다. 권기영의 몸속에서 느리게 움직이고 있던 딜도가 폭력처럼 날카롭게 속도를 높였다. 배 속을 두들기며 미친 듯이 날뛰는 기구.

숨을 들이켠 권기영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힘이 빠지는 다리로 간신히 바닥을 딛고 서며, 한신주의 팔을 움켜쥐고 사정없이 꺾어 올렸다.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는 놈의 손에서 볼펜만 한 리모컨을 억지로 빼앗는다. 그러나 두세 가지 버튼밖에 없는 리모컨을 아무리 눌러도 몸속의 요동은 가라앉지 않았다.

“당장 멈춰! 정말로 죽여 버리기 전에!”

“모, 못, 그걸로는, 나는, 못――, 기, 기여――.”

한신주의 목을 조르듯 틀어쥔 권기영의 코앞에서, 한신주는 호흡이 가빠 시뻘게진 얼굴로 공포에 질려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권기영은 놈의 뺨을 후려갈겼고, 그 결에 풀려난 한신주는 연신 콜록거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권기영은 벽을 짚고 서 한신주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엘리베이터 구석으로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놈을 그대로 짓이겨 버리고 싶었지만, 내장을 주먹으로 짓이기는 것 같은 극심한 자극에 그조차 여의치 않았다. 순식간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맺혔다.

그때 어느새 목적층에 다다른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도망치듯 얼른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한신주의 뒤를 따라 내린 권기영은 옆 엘리베이터를 확인했다. 6층에서 멈춰 있던 엘리베이터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내린 층수를 확인한 김건준이 올라오고 있을 터였다.

그래, 그러면 한신주를 앞세워 이 층 어딘가 있을 그놈을――.

권기영이 옆 엘리베이터의 숫자를 노려보던 시선을 막 돌리던 때였다. 한신주가 건너편에 멈춰 있던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게 보였다. 소리 없이 열리는 문 안으로, 권기영의 뒤쪽으로 돌아든 한신주가 그를 몸으로 부딪쳐 밀었다.

한순간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려들어간 권기영이 반사적으로 문을 붙들 틈도 없이 한신주가 따라 들어와 문을 닫더니 네 층 위의 버튼을 누른다. 김건준이 탄 엘리베이터가 바로 아래층을 스치고 있을 즈음이었다.

“뭘 하는――.”

“말했잖아, 기다리고 있다고. 여기야.”

한신주는 올라가기 시작한 엘리베이터 안에서 잔뜩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22층. 그곳에 놈이 있다고.

권기영은 부릅뜬 눈으로 그 숫자를 보았다. 예상을 벗어난 그 층은, 그러나 고작 하루 전에 연락한다고 아무나 예약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닐 터였다. ……빌어먹을.

김건준은 과연 어떻게 할까. 위층으로 올라갔을 거라곤 생각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그 층에서 그들의 흔적을 찾을까. 혹은 움직이고 있는 건너편 엘리베이터를 보고 의심해서 쫓아올까. 만일 전자로 움직인다면, 권기영이 사전에 그에게 ‘놈과 내가 단둘만 남는 공간에 들어가고 나면 그 뒤에는 내버려 두라’고 못을 박아 뒀으니 이내 단념할지도 몰랐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권기영은 엘리베이터가 소리를 내며 멈춘 순간 더 생각할 것 없이 한신주의 턱 끝을 쳐올렸다. 짤막한 신음을 터뜨린 한신주는, 머릿속이 흔들려 눈앞이 도는 듯 입만 뻐끔거릴 뿐 아무런 말도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당장 고함을 지를지도 모를 시끄러운 입을 일단 막아 둔 권기영은 배 속에서 요동치며 아랫도리를 헤집는 딜도 탓에 부들거리는 다리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바로 옆의 계단실 문을 열었다.

“22층이야!”

거친 숨결로나마 고함을 질렀다. 계단실은 사방이 막혀 있어 소리가 울리니까 네 층 정도 아래서라면 김건준이 멀리 벗어나지 않은 한 그의 귀에도 닿을 것이다. 미친 듯이 울리는 심장을 움켜쥐고 권기영은 엘리베이터 쪽을 돌아보았다.

김건준이 들었을까. 혹은 못 들었을까.

엘리베이터는 움직이지 않았다. 점점 더 조급하게 심장 소리가 높아질 무렵, 계단실 아래에서 달려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엘리베이터보다도 빠른 속도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권기영의 심장은 안도감으로 크게 울렸다.

됐어. 그러면 이 층의 어딘가에 있을 놈을 찾아내서 머리통을 날려 버리면 끝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차라리 이 층인 게 잘 된 것일 수도 있었다. 이 층은 아래층들보다 객실이 비할 수 없이 넓은 대신 객실 수가 고작해야 네댓이다. 놈을 찾아내는 건 시간문제였다.

한 층, 또 한 층, 빠른 속도로 김건준의 발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리를 향해 권기영이 층계참으로 막 발을 내디뎠을 때.

“――!!”

엄청난 충격이 몸 전체를 강타했다.

아니, 몸 전체가 아니다. 정확하게는 사타구니였다. 성기와 고환을 비롯한 급소를 짓이기는 고통과 함께, 엉덩이 속에서 요동치고 있던 딜도를 더욱 깊이 쐐기 박듯 두들기는 타격.

뒤에서 누군가 권기영의 사타구니를 거침없이 걷어찼다는 건 몇 초쯤 하얗게 지워졌던 의식이 돌아온 뒤에야 알아차렸다. 그러나 까맣게 흐려진 시야가 천천히 돌아온 뒤에도 끔찍하게 들러붙은 고통 탓에 목구멍까지 틀어막혀 버렸던 목소리를 간신히 다시 낼 수 있게 되었을 즈음, 권기영은 이미 복도 안쪽의 객실 문으로 끌려 들어간 뒤였다.

찰각. 문이 닫히는 차가운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그리고 뒤이어 들리는 낯익은 목소리.

“어서 와, 이쁜이.”

권기영의 코앞에서 그 염병할 후드를 뒤집어 쓴 낯익은 얼굴이 히죽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친구랑 왔나 보지. 그놈도 너 빨아 주는 친군가?”

“개소리 집어치워.”

빌어먹을. 아주 조금만 더 있으면 됐는데.

권기영은 자신을 객실 안으로 잡아당기곤 문을 가로막고 선 놈을 무시무시하게 노려보았다. 지금쯤은 김건준이 이 층에 도착했을 터였다. 저 문을 열어젖힌다면 김건준을 부를 수 있을 텐데.

그러나 권기영은 자신이, 특히나 지금의 자신은 더욱이 놈을 젖히고 문까지 다다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또한 이대로 있으면 자신이 사전에 확고하게 못 박아 둔 말대로 김건준이 곧 단념하리란 것도.

――빌어먹을.

“생각대로 양복이 아주 잘 어울리는데. 자위할 준비는 됐겠지?”

“……신주한테는, 네가 연락했나?”

“어? 아아, 그 정키? 오랜만에 보니까 반가웠지?”

놈이 킬킬 웃으며 어깨를 추어올렸다.

“클럽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했더니 금방 넘어오던데. 어지간히 거기가 마음에 들었었나 봐.”

“거기를 자유롭게……?”

“내 거거든. 그 구질구질한 데 말이야.”

다시금 킬킬거리는 놈을, 권기영은 부릅뜬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곳이 놈의 것이라면 여태 놈의 홈그라운드에서 뒹굴었다는 소리다. 그 망할 가게 따위는 당장에 부숴 버렸어야 했다. 아냐, 잠깐. 그렇다면 소유권을 알아보면 설령 바로 잡히진 않더라도 놈을 캐낼 단서가……, 하지만 그런 뻔한 단서를 주는 이유가――.

그러나 권기영의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몸속에서 뒤흔들리며 난동을 부리는 딜도가 전립선 쪽을 두들기며 신경을 자극해, 몸이 절로 흠칫거렸다.

“힘들어 보이는데 벗지그래. 얼른 딜도 빼고 볼일 봐야지?”

권기영은 빙글거리며 말하는 놈의 뒤, 문을 흘끔 보았다. 그들이 옷가지를 제대로 걸치고 있는 아직은 김건준의 눈에 띄어도 괜찮았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가 저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올 리는 없을 테니 자신이 어떻게든――.

“헛짓 마, 이쁜이. 다시 벌거벗은 채로 공원에 밤새도록 묶여 있고 싶은 게 아니라면.”

“…―.”

승산이 없다는 건 알고 있다. 김건준이 바로 이 순간 저 문을 박차고 들어올 리 없다는 것도 안다.

빌어먹을. 차라리 신주 그놈만 있을 때 어떻게든 끝장을 봤어야 하는데. 그놈의 목을 꺾어서라도, 아니 그놈을 어떻게 회유해서라도, 차라리 그때 김건준이 그냥 그들의 엘리베이터에 탔더라면.

권기영은 몸속에서 요동치는 충격 속에서 식은땀을 뚝뚝 떨어뜨리며 혼잡하게 머릿속을 오가는 생각들 가운데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모든 게 다 엉망이었다. 한신주도 김건준도 죄다 쓸모가 없다.

“뭐해, 어서 벗어!”

거칠게 을러대는 놈을 노려보던 권기영은 이를 악물고 놈에게 몸으로 부딪치듯이 달려 나섰다. 어떻게든 놈을 밀치고 저 문을 열어젖혀 김건준을 부를 수 있다면.

놈은 권기영이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나서자 일순 멈칫한 듯했다. 권기영은 어깨로 놈의 가슴팍을 세게 후려갈기고 문 쪽으로 한달음에 달렸다. 어서,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그러나――.

권기영의 손이 막 문고리를 붙들기 직전, 뒤로 휘청이며 밀려났던 놈이 권기영의 허벅지를 움켜쥐고 끌어당겼다. 그와 동시에 권기영의 사타구니, 엉덩이 가운데를 주먹으로 두들겼다.

“――!!”

숨이 막혔다. 주먹에서 딜도로 전해지는 커다란 충격으로 몸속 전체가 뒤흔들렸다.

고작 몇 센티미터 정도의 차로 문고리를 놓친 권기영은 도로 놈에게 질질 끌려 방안에 내던져졌고, 벽에 등을 기대고 간신히 버텨 선 그는 숨이 턱까지 차 있었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서 자꾸 등이 미끄러졌다.

“벗어. 당장. 아니면 내 손으로 벗겨서 호텔 로비에 던져 주지.”

놈이 화가 난 듯 이를 드러내며 을렀다. 권기영은 숨을 허덕이며 놈을 노려보다가 이마에서 굴러내린 땀방울이 흘러들어 눈을 감고 말았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권기영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버클을 풀었다. 몸속이 흔들려서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어 벽에 기댄 채 겨우 바지를 내리는 게 고작이었다.

이것부터. 일단은 이 사슬 끈부터 풀어내야 한다. 지금은 이것 때문에 제대로 찬찬히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권기영은 속옷까지 단숨에 끌어내렸다. 위이잉――, 기계 소리가 한층 분명하게 들리며, 허리와 엉덩이를 감싸고 있는 사슬끈 가운데에서 뻣뻣하게 충혈되어 있는 성기가 불쑥 튀어나온다.

그 순간 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권기영의 사타구니를 뚫어져라 넋 나간 듯 응시하며 자신의 사타구니를 쓰다듬는다. 점점 거친 숨을 몰아쉬던 놈은, 꿈쩍도 하지 않는 놈을 의아하게 쳐다보며 권기영이 거칠게 “어서 풀어.”라고 내뱉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었다.

“어, 그래, 풀어야지. ……씨발, 끝내주는 좆이잖아.”

놈은 시계를 한 번 흘끔 쳐다보곤 욕설을 중얼거리며 권기영에게 다가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탐욕스러운 시선이 권기영의 사타구니에서 떠나지 않아, 권기영은 그 느릿한 태도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권기영의 등 뒤로 돌아가 사슬 끈의 매듭에 있는 자물쇠를 만지작거리는 손길도 아쉬운 듯 끊임없이 권기영의 엉덩이를 주무르는 탓인지 평소보다 훨씬 느렸다.

귀에 닿는 거친 숨소리가 유난히 거슬렸다. 딜도가 격렬하게 흔들리는 탓이겠지만, 꼭 놈의 손가락이 떨리는 것 같았다.

조그맣게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놈이 끈을 붙들고 딜도를 빼내기 시작하자 몸속을 비집어 채우고 있던 딜도가 저항이라도 하듯이 들썩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거친 숨결이 어깨에 닿았다. 권기영의 엉덩이에서 반쯤 빠져나온 딜도를 홀린 듯이 보고 있던 놈이 갑자기 딜도를 푹 밀어 넣었다.

“으, ……흐, …―!”

권기영은 예기치 못한 충격에 숨을 들이켜며 경련했다. 놈의 숨소리가 한층 거칠어졌다. 놈의 사타구니가 벌써부터 축축하게 젖어 옷 위로 조그만 얼룩을 만들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다른 때보다 어딘지 조급해 보이는 놈을, 권기영이 이를 갈며 노려보았다. ‘놀이’는 늘 권기영이 볼일을 보고 돌아온 뒤에 시작하는 놈이 오늘은 유난히 흥분한 눈치다.

“약을 처먹고 왔든 주사를 처맞고 왔든 헛짓은 나중――.”

그러나 권기영은 도중에 말을 멈추고 말았다. 하아, 하아, 흐으, 놈은 사타구니를 주물거리며 구불텅거리는 딜도로 추삽질을 시작하고 있었다.

“하아, 흐……, 구멍 벌어지는 것 좀 보라지, 흐흐, 움찔움찔……. 하아――.”

권기영은 순간 울컥해서 놈의 손목을 움켜쥐고 확 끌어내었다. 그 결에 딜도가 내벽을 긁어 몸서리를 치면서도 놈의 손목을 움켜쥔 채 허덕이며 놈을 노려보았다.

놈은 입을 다물고 권기영을 마주 보았다. 불만스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곧 혀를 차더니 “알았다고.”라고 혀를 차곤 손목을 뿌리쳤다. 아쉬운 듯 사타구니를 주물거리면서 여전히 꿈틀거리는 딜도를 만지작거리던 놈은 죽일 듯이 노려보는 권기영을 흘끔 쳐다보며 화장실 쪽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뭐 해, 가서 싸고 나와.”

여전히 샅샅이 핥는 듯한 눈으로 욕심 사납게 권기영을 훑어보면서 놈은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그 노골적인 천박함에 진저리를 치며 권기영은 화장실로 들어갔다. 부서져라 문을 닫아걸고 변기에 걸터앉자마자 앓는 소리를 삼키고 만다.

내도록 휘저어진 배 속이 욱신거렸다. 아직도 안에 뭐가 들어 있는 것처럼 아랫도리가 뜨겁게 저릿저릿하고 있었다. 반쯤 일어선 성기가 꿈틀거리며 발기해 있는 게 꼴사납기 짝이 없다.

“……빌어먹을!!”

권기영은 저도 모르게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이내 그 소리를 바깥에서 놈이 듣고 얼마나 우습게 여길까 생각하곤 다시 씨근거리며 억지로 화를 억눌렀다.

이를 갈며 성기를 움켜쥔 권기영은 화풀이라도 하는 것처럼 손을 움직였다. 적당히 달아올라 있던 성기는 금세 뻣뻣하게 부풀어 선액을 흘려 내기 시작했다.

울분이 구역질처럼 치미는데도 아랫도리의 욕구는 가라앉지 않았다. 이미 권기영의 성기는 엉덩이 속을 자극하면 오래지 않아 반응을 보이게 되어 있었다. 이대로는 놈이 했던 끔찍한 말처럼 정말로 얼마 안 가 엉덩이를 파이면서 싸게 될지도 몰랐다. 생각만으로도 욕지기가 치밀었다. 그렇게는 안 된다. 절대로.

“…―!!”

곧 뻣뻣이 멎은 성기에서 정액이 터져 나왔다. 이를 악물고 소리 죽여 사정을 한 권기영은 투둑, 투둑, 벽이며 바닥에 하얗게 묻은 정액을 밉살스럽게 노려보곤 거칠게 어깨를 들썩였다. 그제야 달아올라 있던 머릿속도 천천히 가라앉아 갔다.

엉망이다. 일을 그르쳐서 놈을 죽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기분이 최악으로 더러웠다.

처음부터 깔려 있었던 위험 부담이었지만 결국 아무런 도움은 못된 채 김건준에게 쓸데없는 의심만 사게 됐다. 왜 놈을 죽이려 했는지, 왜 가로막힌 공간에 들어서면 손을 떼야 하는지, 머리가 비상한 그 남자는 이미 짐작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차피 그가 무슨 의심을 하든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니 그 짐작은 그저 ‘의심’에서 그칠 테지만, 그럼에도.

속이 부글거리며 끓어올랐다. ……쓸모없는 놈!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욕설을 집어삼키던 권기영은 볼일을 마치곤 일어섰다. 샤워로 아랫도리를 씻어 내면서도 기분은 점점 더 더러워지기만 했다. 됐어. 시간이 조금 더 연장되었을 뿐이다. 놈의 목줄은 오늘이 아니라도 죌 수 있어.

나가자마자 신주 그놈부터 죽여 놓을 테다, 애써 스스로를 가다듬은 권기영은 욕실에서 나갔다.

놈은 창가에 서서 전화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려는데 받지 않는지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초조한 기색으로 서성이고 있다가 권기영을 보곤 전화를 끊는다.

“뭐야, 왜 벌써 나왔어.”

놈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전화를 흘끔 내려다보는 게 어딘지 모르게 낭패한 기색처럼 보인다. 권기영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전화라. 설마하니 다른 놈들을 부르려 하는 걸까.

“바쁘신가 보군.”

놈은 어깨를 으쓱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설마. 다른 놈이라니. 생각만으로도 신경이 파랗게 곤두선다.

“여긴 어떻게 예약했어? 하루 전에 전화해서 예약이 될 곳이 아닌데.”

“여기? 좋지? 가끔씩 쉬러 오는 데야.”

놈은 허리에 바스타월만 두르고 있는 권기영을 흘끔거리면서 창밖 야경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흥, 원래부터 평소에 잡아 두고 있었던 건가. 그래, 누구 이름으로 계약을 해 뒀든 이쪽도 캐 볼 여지는 있겠다.

권기영은 다시 어딘가로 전화 버튼을 누르면서 액정을 내려다보는 놈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평소에 하지 않는 짓을 하니 더욱 신경에 거슬린다. 심지어 놈은 평소보다 더 들떠 보이기도 했다.

“……. 왜, 누구 올 사람이라도 있나?”

마음에 안 들었다. 저 전화기, 어떻게 부숴 버릴 수 없을까. 한 발짝 다가가자 전화 안에서 흘러나오는 신호음이 희미하게 들렸다. 신호는 계속 가는데 받는 기색이 없다.

놈은 전화를 든 손을 늘어뜨린 채 권기영을 흘끔 보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내리는 눈길이 번들거렸다. 사타구니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호흡과 함께 조금씩 빨라졌다.

“글쎄 말이야……. 씨발……. 안 받는 놈이 나쁜 거야. 내버려 두자고.”

놈은 전화를 창가에 팽개치며 일어났다. 바지춤을 불룩하게 세운 사타구니를 주물거리며 권기영에게 다가와 손바닥으로 가슴을 어루만졌다. 권기영은 자신의 유두를 손끝으로 어루만지면서 빙글빙글 잡아당기곤 하는 놈에게 눈매를 치켜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저릿저릿한 느낌과 함께 유두가 딱딱하게 솟았다.

순간 놈의 숨소리가 한층 부풀어오르는 것 같았다. 한 손으로 사타구니를 주물거리는 놈은 기묘하게 입을 일그러뜨리며 웃고 있었는데, 숨소리가 꼭 흥분한 개처럼 거칠었다.

하아, 하, 하아, 유두를 만지작거리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꼬집는 것처럼 집요하게 유두를 당기는 손이 꼭 꼬집는 것 같다. 정말로 약이라도 먹고 온 놈처럼, 웃는 건지 숨소리가 들뜬 건지도 모를 만큼 거칠어진 호흡.

권기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렴풋한 위화감이 든다. 그때 놈이 갑자기 권기영의 가슴을 밀었다. 엉겁결에 바로 뒤에 있던 침대로 밀려 넘어진 권기영의 위로 놈이 허겁지겁 올라탄다.

씨발, 난 몰라, 모른다고, 혼잣말처럼 낮은 숨소리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놈은 권기영의 유두에 게걸스럽게 매달려 빨기 시작했다. 권기영은 넘어지던 와중에 등 뒤로 깔린 팔을 빼며 혀를 찼다. 그 와중에 놈의 사타구니에 손이 스쳐 욕설을 씹으며 손을 빼다가 진저리를 치고 말았다. 그 사이에 싸기라도 한 것처럼 아랫도리가 축축했다. 그 축축한 아랫도리를 권기영의 허벅지에 비비면서 놈은 걸신들린 듯 권기영의 가슴을 빨아 댄다.

원래부터 그랬지만 오늘따라 한결 혐오스럽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권기영은 몇 번이나 반사적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가 풀기를 거듭했다. 이대로 놈을 묵사발을 만들어 버린다면 좋을 텐데, 과거에 있었던 몇 차례의 굴욕이 권기영을 쇠사슬에 매단 코끼리처럼 무력하게 만든다. ……빌어먹을.

“하아, 하아, 으흐, 너, 구멍도 아주 쫄깃쫄깃하지, 응?”

놈이 권기영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주물거리던 손을 사타구니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권기영의 얼굴이 움틀 굳었다. 엉덩이 속으로 뻑뻑하게 밀고 들어오는 마른 손가락이 마구 꾸물거렸다. 이 새끼 정말로 약이라도 들이켜고 온 건――.

그때 권기영의 몸속을 쓰다듬던 놈이 목 졸리는 듯 기괴한 소리를 내며 아랫도리를 부들거렸다. 권기영은 천 너머로 허벅지에 닿아 있던 놈의 성기가 부들거리며 젖어 드는 걸 느끼고 어이없이 이를 갈았다. 꼭 개에게 당하는 기분이다.

“이 미치광이 새끼, 적당히――.”

“히, 히히, 그래, 그래, 적당히 슬슬 박아 줘야지, 안 박을 수는 없지, 이런 쫄깃한 구멍에?”

놈이 허덕거리며 아랫도리를 들썩였다. 지익, 놈이 퍼스너를 내리는 소리가 났다. 지나치게 서두른 탓에 안에서 물건이 잘 꺼내지지 않기라도 하는지 놈이 입속으로 뭐라고 욕설을 지껄인다.

이상하다. 이건 진짜로 약이라도 처먹고 온 것 같다. 아니, 아니다. 놈은 정말로 약을 했다.

권기영은 목덜미 근처에서 허덕거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는 놈의 구취를 맡고 눈을 부릅떴다. 어렴풋하나마 섞여 있는 야릇한 냄새. 아주 희미하게라도 냄새가 스칠 정도면 질도 나쁜 걸 얼마나 퍼먹은 건지.

――이 내가. 이런 정키 따위에게.

순간 미칠 듯한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권기영은 이를 부득 갈았다. 놈은 지저분한 정액이 끈적거리며 묻어 있는 성기를 꺼내어 권기영의 사타구니에 문질러 대고 있었다. 심지어는 제대로 된 사정도 아니고 아직껏 질금거리며 새어 나오는 정액을 권기영의 성기며 회음, 주름 뒤쪽까지 마구 문지르며 끈적하게 처발라 대고 있었다.

유난한 혐오감과 구역질로 소름이 돋았다. 그래서다. 반쯤은 무의식적으로 권기영은 놈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말았다. 그리고 놈은, 여느 때라면 그런 주먹쯤은 여유롭게 피해 내며 ‘이쁜이, 오늘도 험한 꼴 좀 봐야겠는데.’ 하고 위험스럽게 지껄일 놈은, 어이없이 그 주먹을 고스란히 얻어맞고 침대 아래로 나뒹굴었다.

“――!!”

권기영조차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워진 그 순간이었다. 창가에 놓아두었던 놈의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이가 부러졌는지 피투성이가 된 입을 부여잡고 한심한 꼴로 나자빠져 권기영을 올려다보던 놈은, 전화가 울린 순간 허겁지겁 그리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틈도 없었다. 저게 무슨 전화든―권기영이 짐작하는 것처럼 놈이 다른 놈들을 불러모으는 전화라면 더더욱―받게 놔둘 수는 없었다. 권기영은 다급하게 침대에서 뛰어내려, 놈이 막 전화를 움켜쥐기보다 한발 앞서 그 전화를 낚아채었다. 그리고 그 전화를 가운데 놓고 몸싸움이 벌어졌다.

“내놔! 이리 내! 내놓으라고! 씨발, 어서!!”

비명처럼 고함을 지르며 악귀 같은 형상으로 달려드는 놈을, 권기영은 커다랗게 홉뜬 눈으로 쳐다보면서도 전화를 멀리 내던져 버렸다. 침대 근처 어딘가에서 끈질기게 울리는 전화 쪽으로 달려가려는 놈의 다리를 반사적으로 끌어안으며 가로막자, 놈이 고함을 지르며 권기영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두어 대 얼결에 얻어맞고 권기영도 반사적으로 놈에게 반격하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기묘한 위화감은 뭐지. 놈이 평소와 달리 약에 절어서……? 그래, 그것도 그렇지만, 뭐랄까, 근본적으로――.

엉망으로 헝클어져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생각은 이내 멈추고 말았다. 미친 듯이 날뛰는 놈을 깔아 눕히고 그 허리 위에 올라타 얼굴에, 가슴에, 닥치는 대로 주먹질을 하던 권기영은 피투성이가 되어 흐느끼듯이 신음만 흘리는 놈을 내려다보며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뭐지, 이건. 아니, 일단은 먼저 이것부터다.

권기영은 놈이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벗겼다. 그리고 그 안에서 놈의, 여태 지긋지긋하게 증오했던 놈의 얼굴이 드러났다.

피범벅이 된 얼굴로 겁에 질려 권기영을 올려다보는 놈의 얼굴은 평범했다.

그야 도깨비나 귀신이 나올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상상과는 동떨어진――어디에나 흔히 있는 젊은이였다. 권기영보다 네댓 살,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아래일까.

죽은 듯한 정적이 흘렀다. 아까부터 끈질기게 울리던 전화는 어느새 조용해져 있었다.

“비, 비, 비, 비켜…….”

뒤늦게 정적을 깨며 놈이 힘없는 목소리로 부들부들 중얼거렸다.

이게 놈이라고. 휘둥그렇게 눈을 치뜨고 당황스럽게 권기영을 쳐다보는 이런 약해빠진 얼굴을 한 놈이. 이런 놈에게 여태.

분노보다도 먼저 허탈감이 솟구치려던 찰나, 직감이라는 이름을 달고 아주 조그맣게 피어오르는 의혹.

――이놈은――.

그때.

권기영의 생각이 미처 제대로 자리를 잡기도 전에.

작은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문이 열리는 작은 기계음.

그리고 두꺼운 카펫 위를 내딛는 조용한 기척.

권기영은 고개를 들었다.

거기에는,

“늦어서 죄송합니다.”

김건준이 서 있었다.

권기영은 씻은 듯이 새하얀 머리로 그를 보았다. 김건준은 말없이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 묵묵한 시선을 느끼고서야 권기영은 지금의 상황을 깨달았다.

한 치 흐트러짐 없이 단정한 김건준은, 뾰족하게 솟은 유두 주위에 울긋불긋한 잇자국을 달고 사타구니는 온통 놈의 정액으로 끈적하게 범벅이 된 채 알몸으로 놈 위에 올라앉아 있는 권기영을 찬찬히 살폈다. 그런 뒤 권기영의 아래에 깔려 정액 범벅의 지저분한 사타구니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피투성이의 얼굴로 기이한 소리를 더듬거리고 있는 놈을 본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얼굴에는 표정마저 없었다. 권기영은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김건준을 쳐다보기만 했다. 언뜻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바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빌어먹을. 오지 말라고 했었잖아. 놈과 둘만 남게 된 이후에는 그대로 손을 떼고 물러나라고 그렇게 말을 해 뒀었는데. 머리에서부터 핏기가 싹 가시는 듯한 굴욕감이 울컥 몰려들었다. 부들 떨리는 입술을 짓씹는다.

이윽고 김건준은 상황 파악을 마친 듯했다. 얼마간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기만 하던 눈길을 들어 권기영과 시선을 맞추었다. 크게 놀라거나 당황한 빛도 없이 권기영을 내려다보는 그가 유난히 냉랭한 눈빛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을 때,

“머리를 쏘라고 하셨던가요?”

여상하게 말한 김건준이 품에서 손을 넣었다. 총을 꺼내어 공이치기를 당기고 놈의 머리를 조준하는 손길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한 점의 망설임도 없어, 그 총이 마치 장난감처럼 보였다.

그러나 권기영이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김건준은 손가락을 움직였고, 다음 순간 퍼억――, 놈의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 버린다.

비명을 지를 틈조차 없이.

눈을 크게 뜬 놈이 미처 상황 파악도 하지 못하고 멍하게 그 총구를 쳐다보는 사이에.

어, 어어, 하고 중얼거리던 놈이 조용해졌고, 그곳에는 시체가 남았다.

“…―.”

권기영은 온몸에 피를 후드득 뒤집어쓰며 망연히 놈을 내려다보았다.

죽었다.

놈이 죽었다.

저 부릅뜬 눈이 권기영을 다시 쳐다볼 일은 없을 터였고, 바닥에 늘어진 손이 권기영을 더듬을 일도 두 번 다시 없었다.

순식간에 찾아온 놈의 죽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기영은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해방감이나 통쾌함 따위라고는 전혀 없이 이 질척질척하게 불연소된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까. 시커멓고 끈끈한 타르를 삼킨 것 같은 이 뒷맛은. 아니 무엇보다도 권기영의 머릿속에 들러붙어 있는 것은,

――이것은 정말로 놈이었을까.

놈이 살아 있던 마지막 순간에 권기영이 느꼈던 의문이었다.

순간 등줄기에 차가운 것이 타고 흘렀다.

그러나 이제는 사실을 알 수 없어졌다. 권기영의 머릿속에서는 아니야, 놈이 아니야, 직감이 외치고 있는데 확신할 수 없었다. 확인도 할 수가 없어졌다.

권기영은 김건준을 보았다. 품에 총을 갈무리하던 김건준은 시선을 느낀 듯 담담한 눈길을 권기영에게 주었다. 웃음기만 없을 뿐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는 그를 보며, 권기영은 복잡하게 헝클어진 머릿속으로 혀를 찼다.

어디서부터 어그러진 거지. 놈이 죽었음을 확신할 수도 없었고, 쓸데없는 도움을 받아―빚을 져―버렸고, 알려지지 말아야 할 것이 알려졌다. 빌어먹을. 이놈은 왜 하필 이때 들이닥쳐서.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아니, 그전에 먼저 이 남자부터 처리를――.

권기영은 옆에 널브러져 있던 수건으로 아무렇게나 피를 문질러 닦으며 일어났다. 최악의 기분이다. 입을 꾹 다문 권기영이 침대 옆에 걸쳐져 있던 옷가지를 집어 들었을 때, 김건준이 입을 열었다.

“입으실 것 없습니다.”

“……?”

“참고로 이 남자는 강제 추행으로 몇 번 들어갔다 나온 남자입니다. 쉽게 말하면 동성 강간이지요. 뿐만 아니라 마약 사범에 강도 사기 등, 죄목도 여럿입니다. 본인이 약 중독이기도 하고요. 즉 죽었다고 딱히 아쉬워할 필요 없는 남자란 뜻입니다. 이제 마음이 좀 가벼워지셨습니까?”

담담하게 설명하는 김건준을 권기영은 빤히 쳐다보았다. 권기영을 마주 보는 김건준의 눈가에는 그제야 웃는 듯 마는 듯, 평소의 표정이 돌아와 있었다.

“아니, 마음이 무거운 건 사람이 죽어서가 아니지요?”

그렇게 말하며 빙긋이 웃음 짓는 것은 소름끼치게 낯선 얼굴이었다. 권기영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미동조차 없이 눈앞에 있는 낯선 남자를 보았다.

뭘까. ……뭐지. 이 느리게 소용돌이치는 시커멓고 싸늘한 감각.

“워낙 자제력이 없어서 웬만하면 이놈으로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적당히 눈치 빠르고 무엇보다도 골격이나 구강 구조가 비슷한 사람을 달리 찾기가 쉽지 않아서 말입니다.”

김건준은 권기영이 내던진 수건을 들어 놈의 얼굴 위에 툭 덮어 놓곤 그 옆에 떨어져 있던 후드를 집어 들어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고민하느라 늦었습니다. 이대로 좀 더 놀아 볼까, 아니면 슬슬 장난은 마치도록 할까. ……원래라면 기영 씨가 볼일을 보는 사이에 적당히 바꿔치기해서 전자로 가든가, 아니면 ‘KK’를 없애고 지금 이 모든 상황이 왜 벌어졌는지를 눈치 빠르게 파악한 김건준이가 그 자리에 대신 얹힐까 했는데……, 생각해 보니 이미 놀 만큼은 놀았고, 또 기영 씨는 내키지 않는 일은 너무나 쉽게, 깨끗이 잊어버린단 말이에요. 어이없을 만큼.”

한 번은 그렇다 쳐도 두 번이나 잊힌다면 기분이 좀 그렇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저라도?, 웃으며 말하는 김건준을 보면서, 권기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혀가, 목이 굳어 버려 그 안에서 응어리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럴 리.

김건준은 손에 쥔 후드를 내려다보면서 피식 웃었다. 웃음 띤 눈매를 권기영에게 돌리며 그가 부드럽게 말했을 때,

“이 남자보다는 제게 더 어울릴 것 같지 않습니까?”

권기영은 얼음처럼 딱딱해진 목소리로 겨우 한마디만을 떼는 데에 성공했다.

“……목소리가,”

“아아, 매니저가 약은 권해 주지 않던가요? 하긴 성대에 꽤 무리가 가는 약이라서, 안 드시는 편이 나을 겁니다.”

기영 씨는 드실 필요도 없겠지만요, 하고 김건준이 웃었다. 흘끗 시계를 보곤 “한 시간이라…….”라고 중얼거리며 셔츠 단추를 툭툭 풀기 시작하는 그를, 권기영은 얼어붙은 눈으로 응시했다.

“슬슬 잘 안 움직일 겁니다. 아까 드신 술, 평소보다 맛있으셨나 봅니다. 따라 드리는 대로 잘 드시던데. 후유증도 없고 부담도 없는 약이니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굳이 약을 쓰지 않아도 별 달라질 것 없다는 건 이미 저나 기영 씨나 잘 알고 있지만, 이렇게 된 바에 굳이 불필요한 체력 소모를 하고 싶지는 않아서요.”

“……왜.”

어째서, 권기영은 푸릇한 입술로 중얼거렸다.

이미 사실은 의심할 바 없었다. 이거였나. 놈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끈끈하게 달라붙던 그 미심쩍은 감각은. 직감은 권기영의 머릿속에 차마 믿어지지 않는 현실로 떠오르고 있는 가정을 단호하게 긍정하고 있었다. 놈이다.

김건준이, 어째서. 무엇 때문에.

셔츠를 벗어 의자에 툭 던져두고 벨트의 버클을 풀면서 김건준은 권기영의 낯빛을 보고 픽 웃기만 했다.

“왜. 너 뭐야. 목적이 뭐야. 바라는 게 뭐야. 나한테 왜――.”

권기영의 약점을 잡아서 무엇을 하기 위해, 그런 생각을 하다가 권기영은 언뜻 입을 다문다. 아니, ‘내’가 아니겠지. 놈이 애초에 접근한 것은 누이였다. 누이를 발판 삼아 아버지에게. 이제 곧 선거를 앞두고 있는―그러나 낙선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아버지에게, 혹은 사회 각지에 손이 안 미치는 데가 없는 친척들에게.

“뭘 바라는 거야. 우리 집에서 뭘 어쩌고 싶,”

“이런……. 많이 당황하셨나 봅니다, 머리도 좋으신 분이.”

딱하다는 듯이 혀를 찬 김건준은 바지를 셔츠 위에 걸쳐 놓았다. 한 장 남은 속옷 위로 묵직하게 늘어진 성기가 비쳤고, 이윽고 그는 속옷마저 벗어 버린다.

“그 썩어 빠진 집안에서 탐낼 만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당신 말고. 안 그래요, 기영 형?”

낯익은 나신을 드러내고 권기영을 돌아본 김건준이 웃었을 때, 권기영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숨마저 멈추고 말았다.

기영 형.

특별할 것도 없는 그 부름이 화살처럼 머릿속에 박혔다.

몹시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것은 갈고리처럼 머릿속을 헤집고 파헤쳐, 아주 오래전, 저 밑바닥의 그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너덜너덜한 기억의 조각을 건져 올린다.

아니야. 기억하지 마. 떠올리지 마.

미동조차 없이 얼어붙어 한사코 그 조각을 떨쳐 내려 하는 권기영의 앞으로 김건준이 다가왔다. 빙긋이 입 끝을 올리는 낯익은 입매가 어느 순간 시야를 가득 메웠다.

물소리가 욕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널찍한 세면대 위에 상체를 엎드린 권기영은 배와 가슴에 달라붙은 얼음 같은 대리석과 허리 아래를 세차게 두들기는 더운 물줄기를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 두 가지는 섞여도 미지근해지지 않고 저마다 더 뜨겁게, 더 차갑게 몸속뿐 아니라 머릿속까지 뒤흔들고 있었다.

“저놈에게 박히지는 않은 모양이군요. 하긴 저놈이 당신을 깔 만한 깜냥이 못 되지만, 그래도 혹시나 했습니다. 저라고 생각하고 순순히 다리를 벌려 주지는 않았을까 하고. ……그랬더라면 머리를 쏜 걸 후회했겠지요.”

엉덩이 위로 샤워기의 물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벌어진 사이로, 물로 젖은 손가락 몇 개가 깊이까지 파고들어 쓰다듬고 있었다. 이윽고 가장 깊은 곳까지 만족할 만큼 더듬고 난 김건준은 흡족한 결론을 내린 듯 중얼거렸고, 그 순간 전립선 위를 연거푸 찔린 권기영은 절로 엉덩이가 움츠러들었다. 아까부터 자극을 받아 발기해 있던 성기가 움찔거린다.

바깥에서는 한참 전부터 인기척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이 욕실로 들어온 직후 방으로 누군가 두세 명의 사람이 들어온 듯, 조용하지만 부산하게 움직이는 기척이 났다. 소리는 욕실의 물소리에 가렸지만 유리문 너머로 사람이 움직이는 그림자가 보인다.

침대 발치에 부스럭거리는 깔개를 깔고, 커다란 인영을 둘둘 말아 감싸 어딘가에 옮겨 담고, 그 근처를 정리하는 그림자들로 시선을 주는 권기영을 알아차렸는지 김건준이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라고 아무렇지 않게 중얼거린다.

신경 쓸 필요 없다.

그들이 바깥을 정리하고 있는 것이든, 혹은 그들에게도 이쪽 너머의 그림자가 보일 반투명한 유리문 안쪽에서 엉덩이를 파이고 있는 것이든.

권기영이 신경 쓰는 게 전자이든 후자이든.

김건준은 권기영이 신경 써야 할 것은 그런 따위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권기영이 신경 써야 할 것은 지금 그가 당면한 감각, 권기영의 알몸을 마음대로 헤집는 타인의 손길과 그 손길의 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저에 대한 조사서는 굳이 박 사장님에게 부탁할 필요 없이 그냥 저에게 물어보지 그러셨습니까. 저는 언제쯤 당신이 제게 물어볼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권기영은 희미하게 어깨를 굳혔다. 물줄기가 씻어 내고 있는 것은 몸이 아니다. 기억 위에 오래도록 쌓인 먼지를 쓸어내는 것 같았다. 그 먼지는 무엇을 덮고 있었던가.

“제가 기대했던 건 당신을 다시 만난 첫날이었습니다. 기윤 씨의 결혼 상대로 나온 저를 보고 당신이 뭐라고 할지 기대했었는데, 정말로 깨끗하게 잊어버리셨더군요.”

하하, 김건준이 메마른 웃음을 웃었다.

“당신이 말했던 대로예요. 관심 없는 일은 금방 잊어버린다고 했었죠.”

이 남자를 언제 보았던가.

기억하지 마. 그냥 둬. 그대로 묻어 둬.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엎드려 있는 권기영의 등 뒤에서 김건준이 샤워기의 물을 잠갔다. 물소리가 멎자 순식간에 세상이 고요해졌다. 귀가 먹은 듯한 정적 가운데, 바깥에서 인기척이 빠져나가며 문이 달칵하고 닫히는 소리가 아주 조그맣게 들렸다. 그 뒤로 그곳은 완전한 정적에 잠겼다.

“기철이는 요즘도 여전한가 보더군요. 그 뒤로 결국 미국에서 안 들어왔죠? 그리운데요.”

……아.

결국은 안 되려나 보았다. 그대로 묻어 두었어야 하는데. 끈질기게 먼지를 문질러 낸 남자는 기어이 그 아래에서 기억을 끄집어내고야 말려 하고 있었다.

권기영은 눈을 감고 말았다.

몸 위로 커다란 수건이 넉넉하게 덮이며, 김건준이 그를 수건째로 감싸 안았다. 품속에 단단히 끌어안고 입술을 맞대는 건 어울리지 않도록 조심스러운 립키스다. 아주 천천히 한 번, 조심스럽게 두 번, 간청하듯이 세 번. 그런 뒤에는, 간신히 억눌렀던 충동을 견디다 못한 것처럼, 잡아먹을 것처럼 입술을 먹어치웠다.

그 무렵과 같았다. 그때에도 놈은 조심스럽게 반응을 갈구하고 애걸하듯이 입 맞추었다. 그러나 그때에는 지금처럼 오만한 잔인함은 없었을 터였다.

김건준은 그 자리에 미끄러지듯이 무릎 꿇었다. 덮여 있던 수건 자락을 들고 그 안으로 고개를 들이민 그는, 느리게 시들어 가고 있던 권기영의 성기를 입에 물었다. 움칫 몸을 움츠리는 권기영의 엉덩이를 움켜쥔 채 가만히 있으라는 듯 가볍게 이를 세우는 감촉이 얇은 피부 위로 생생하게 전해졌다.

이윽고,

“…―, ……! ……, …―으, 흐, 으, …―!!”

권기영은 악문 잇새로 숨소리를 흘려내기 시작했다. 귀두에서 밑동, 고환까지 샅샅이 빨고 입안에서 굴리며 살짝살짝 깨무는 자극들이, 권기영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잇따라 덮쳐왔다.

권기영이 완전히 발기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미 한 번 자극을 받아 일어섰던 성기는 금세 다시 뻣뻣하게 고개를 들어 선액을 흘려 대기 시작했다. 김건준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권기영의 성기를 훑어 올리는 속도를 더욱 높였다.

그러다가 권기영이 거친 숨을 토해 내며 허리를 움칫하며 멈춘, 바로 그때,

“――!!!”

권기영의 엉덩이 속을 김건준의 손가락이 뚫고 들어왔다. 거침없이 몸속을 헤치며 파고드는 자극이, 사정하는 순간의 자극과 한데 섞여 버린다. 그리고 어떤 자극이 먼저인지 판단할 여지도 없이, 권기영은 사정했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권기영이 몇 번이나 경련하며 토정할 때마다 김건준은 태연한 낯으로 목울대를 꿀꺽꿀꺽 울리며 마치 그의 사정을 더 재촉하듯 엉덩이 속을 깊고 느리게 찔러 올렸고, 그럴 때마다 바싹 수축하며 조여드는 내벽이 손가락에 촘촘하게 달라붙는다.

그것을 몇 차례나 거듭했을까.

이윽고 권기영의 성기가 힘을 잃어 시들고 김건준의 손가락을 삼킨 몸도 경련을 마치고 이완될 즈음에야 김건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기영의 눈앞에서 김건준은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제가 빨아 드리면 아주 좋아하는 건 여전하시군요. 저도 기쁩니다.”

김건준은 거친 숨을 내쉬며 아득하게 그를 바라보는 권기영에게 입을 맞추었다. 몹시 부드러운 입술이었다.

“기영 형, 말씀드리는데, 저는 정말로 당신에게 다정하게 대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좋아하고 기뻐하는 것만 해 드리고 싶거든요. 진심입니다. ……예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때는 어려서 잘 몰랐어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래서 당신이 좋아하는 것만 하려고 힘들여 참으며 노력했는데――결국 소용없었죠.”

권기영은 빙긋이 웃음 짓는 놈을 바라보았다. 웽웽거리는 귀울음이 울리고 있었다. 입에는 누군가 무거운 자물쇠를 채워 놓은 듯 혀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말이지요, 이번에는, 제가 바라는 걸 당신도 좋아하게 되도록 노력해 볼까 해서요. 꼭 그렇게 되도록 하겠습니다.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놈의 목소리가 귀울음에 섞여 아주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권기영은 놈을 노려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부들 떨린 입술이 잠깐 움직였지만 그 입술에서도 아무런 말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김건준이 다시 수건으로 권기영을 감싸 안아 들었다. 욕실 밖으로 나가자 고요하게 에어컨이 돌아가는 객실 안은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일요일 밤까지라면 앞으로 대략 만 이틀이군요. 그 정도라면 딱히 넉넉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기영 형 체력이라면 이틀쯤은 못 자도 괜찮으실 테고.”

김건준은 침대 위에 권기영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침대는 아무도 손대지 않았던 듯이 하얀 시트가 말끔하게 깔려 있었다. 침대뿐 아니다. 객실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아무런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희미하게 비린내가 나는 듯도 했지만 이내 익숙해지는 후각은 그조차 감각에서 잃어버리고 만다.

이곳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

남아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테이블 위에 곱게 놓여 있는 거뭇한 후드뿐.

반으로 접혀 있는 ‘KK’ 위로 시선을 주고 있던 권기영의 옆에서 김건준이 리모컨을 들어 에어컨 온도를 몇 도 더 낮추었다. 권기영이 어깨를 움츠리는 작은 움직임을 금세 알아챈 김건준이 돌아보았다.

“추우십니까? 죄송합니다. 하지만 곧 더워질 테니 이 정도가 딱 좋을 겁니다.”

리모컨을 내려놓고 돌아선 김건준은 권기영과 눈이 마주치자 부드럽게 눈매를 접으며 웃음 지었다.

“이틀이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거든요.”

빙긋이 휘어지는 잔인한 입매가, 저 테이블 위의 후드와 더불어 몹시 낯익은 느낌으로 권기영의 시야에 들어왔다.

[The end of the 1st act.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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