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왜 이래, 갑자기?”
권기영에게 끌려가다시피 하며 한신주는 어리둥절한 듯 눈을 껌벅였다.
권기영이 호텔에 도착했을 때 한신주는 이미 로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반갑게 손을 들어 보이는 한신주에게 눈짓으로 알은체만 하곤 인사보다 먼저 체크인 수속을 마친 권기영은, 무슨 일이냐고 의아해하는 그에게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엘리베이터에 밀어 넣었다.
다짜고짜 호텔 방까지 끌려 들어온 한신주는 갑자기 왜 이러는 거냐고 낯을 찌푸렸지만, 방문을 닫기가 무섭게 입술부터 물어뜯는 권기영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웬일이야, 기영 씨가, 별일이네, 하고 중얼거리면서도 권기영이 옷을 벗기는 대로 순순히 몸을 움직여 거들었다.
한신주가 싫다고 한다 해도 권기영은 아랑곳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가 그럴 줄은 알고 있었다. 한신주는 한 번도 요구를 거절한 적이 없었다. 그는 거의 섹스 중독이었는데, 권기영과 만나기 전부터 그랬다. 아침이건 대낮이건 밥을 먹던 도중이건 전철을 타고 가던 참이건, 생각이 나면 화장실이나 사람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으로 가 자위를 하고 오는 것쯤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물론 권기영과 함께 있을 때에는 그에게 ‘몸 풀러’ 잠시 갔다 오지 않겠냐고, 그들이 만나는 고작 몇 시간 동안에도 여러 번이나 눈짓을 하곤 했다.
‘너만큼 아랫도리가 문란한 갈보는 처음이다.’
언젠가 유난히 심했던 하루, 백화점에서 같이 쇼핑을 하는 두어 시간 동안 세 번째로 한신주가 권기영에게 은근히 귀엣말로 ‘나 싸고 싶어.’라고 말했을 때 권기영이 어이없이 중얼거리자, 한신주는 불쾌한 빛도 없이 ‘그 문란한 갈보 하나 못 만족시켜 줄 남자는 아니잖아, 권기영이?’라고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었다.
스스로도 ‘나는 섹스를 밥 먹는 것보다 더 좋아하는 인간이야.’라고 말하는 한신주였지만, 권기영은 그런 그에게 불만은 없었다. 육체의 상성이 썩 잘 맞는 데다 언제든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는 만큼 편리하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사람 눈치를 보는 데에 귀신같은 이 청년은 권기영의 기분에 따라 지금이 농담을 해도 되는 때인지 아니면 얌전히 입 다물고 하라는 대로만 따라야 하는 때인지 정확하게 알아차렸다.
짓궂고 때로는 건방지다 싶도록 멋대로 굴면서도 결코 권기영의 선을 넘어가지는 않는 그 눈치 때문에, 한신주와의 관계는 제법 오래 이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오래도록 고정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한신주가 유일했다.
그리고 그것은 한신주의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게이들이 모인 어느 곳에서든 최고의 수컷으로 군림하는 탑을 그토록 오랫동안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최고의 수컷이다.
어디든, 적어도 권기영이 있는 자리에서 권기영보다 더 나은 탑은 없었다.
“아! 아! 좋아, 아, 거기……! 좋아, 아, 거기, 응, 좀 더, …―아, 좋아……!”
고작 몇 번 얕은 추삽질을 하는 사이에 한신주의 몸속은 금방 물기가 배어 나왔다. 전희도 없이 바로 삽입했지만 별로 힘들이지 않고 권기영은 뿌리까지 박아 넣었다.
한신주는 교성을 지르며 엉덩이짓을 하고 있었다. 좋아 죽겠다고 엉덩이를 들썩일 때마다 그의 몸속 깊이 파묻힌 권기영의 성기가 들락거리며 보였다 말았다 했다.
“오늘 유난히 빨리 젖잖아. 한 판 뛰고 온 거 아냐? ――말해 봐, 이 엉덩이를 맛본 놈이 얼마나 돼.”
권기영은 자신의 욕구를 거침없이 밀어붙이며 한신주의 엉덩이를 철썩 두드렸다. 아픔보다는 쾌감으로 다가가는지 “아!” 하고 외치는 목소리에 열락이 스몄다. 한신주는 몸을 수축하면서 보다 격렬하게 엉덩이를 흔들었다. 그 사이사이에 이성을 남겨 둔 듯 뒤를 돌아보며 미묘하게 웃는다.
“몇이나 될 것 같아?”
“일이백 정도가 아니겠지, 이 화냥기로.”
권기영이 말하자 한신주는 소리 내어 웃었다. 흥, 하고 코웃음 치며 사타구니를 조인다.
“일이천이랑 잤다 해도 신경도 안 쓸 거면서. ……아! 응, 아, 지금 거기, 거기 더 세게 박아 줘, 거기, 얼른……!”
넘어갈 듯 자지러지는 목소리가 헐떡이며 소리를 질렀다. 죽을 만큼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얼굴에서 빠른 속도로 이성이 사라져 갔다. 어디를 어떻게 건드려도 정신없이 느끼는 예민한 몸이 아우성을 치며 요동쳤다. 그리고 그 몸짓에 어우러져 권기영도 점점 더 격렬하게 허리를 밀어붙였다.
여태 관계를 가졌던 인간들 가운데 권기영은 한신주가 가장 만족스러웠다. 이렇게나 민감하고 음란한 몸은 본 적이 없었다. 하긴 하루에도 몇 번이나 엉덩이짓을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이 몸으로는 당연한지도 모르겠지만.
너무 지나치게 느꼈는지 한신주는 금세라도 기절할 듯 하얗게 눈을 부릅뜨고서 비명 같은 교성을 지르고 있었다. 드높이 치켜올린 채 격렬하게 춤추듯 요동치던 엉덩이가 조금 느려지는가 싶었다.
“제발, 제발……!”
쾌락으로 이성을 잃고 영문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거의 흐느끼는 한신주의 몸속에서, 권기영 자신도 세 번째인지 네 번째인지 모를 절정이 폭발하듯 다가왔다.
거친 호흡이 빠르게 이어지던 권기영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터졌다. 거의 동시에 한신주가 하악, 숨을 들이켜며 자지러졌다.
짧은 정적.
두 사람 모두에게서 이성이 날아가는 짧은 순간, 성기를 삼킨 사타구니에서 희뿌연 정액이 왈칵 비어져 나왔다. 이미 그 전의 몇 번에 걸친 정사로 그 아래 흥건하게 고여 있던 웅덩이가 불어났다.
“…―.”
이윽고 다시 사고가 돌아온 권기영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래에 기절하듯 쓰러져 있는 한신주를 개운하고 나른한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아직 덜 시든 성기로 가볍게 쿡 찔러 주자 한신주는 색 섞인 신음을 흘리며 부르르 떤다.
권기영은 한신주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어 끝을 알리며 그의 몸에서 자신의 성기를 끌어내었다. 주르륵, 젖은 소리와 함께 살덩이가 끌려 나오자 한신주가 아쉬운 듯 눈을 뜬다. 그러나 그럭저럭 욕구는 채워졌는지 만족스러운 숨을 토해 내었다.
“아……, 죽을 만큼 좋았어.”
“그래? 나도 좋았어.”
권기영은 수건으로 사타구니를 대충 훔치며 한신주의 엉덩이를 가볍게 꼬집었다. 한신주가 키득거리며 장난스럽게 엉덩이를 흔든다.
“복상사를 하는 사람들은 말이지, 하다가 정말로 죽을 정도라면 대체 얼마나 끝내주는 기분이라는 걸까?”
“그런 사람들도 너보다 더 요란하게 자지러지지는 않을걸. 엉덩이에 박히는 게 그렇게 좋아?”
한신주는 빨갛게 부은 눈으로 가느스름하게 웃으며 흘끔 권기영을 보았다.
“세상에 그것보다 더 황홀한 건 없을걸. 제대로 정확하게 짚어 주기만 하면――정말 그 순간 죽어 버리고 싶을 만큼 좋아. 페니스로 사정하는 것보다 뒤로 느껴서 사정하는 쾌락이 몇 배, 아니 몇십 배는 더 클걸.”
“그거 좋겠군.”
권기영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한신주가 미묘하게 눈웃음을 지으며 장난스럽게 눈짓한다.
“기영 씨도 시험 삼아 한번 해 보지 그래?”
“농담 마. 생각도 하기 싫어.”
권기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잘라 말했다. 밖에서 멀끔한 얼굴로 제법 행세도 하고 다니는 놈들이 자신의 아래에서 엉덩이를 뚫리고 흐느끼는 모습을 보는 게 유쾌했고 질보다 훨씬 단단하고 찰지게 조이는 그 아랫도리를 몹시 즐기긴 했지만, 자신이 그 입장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불쾌감이 노골적으로 밴 권기영의 대꾸는 한신주에게는 거슬리는 말일 수도 있었을 테지만, 한신주는 그를 한 번 얄밉게 노려보며 코웃음만 쳤을 뿐 아무래도 좋다는 듯 이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긴 나도 기영 씨가 바텀이 되는 건 싫어. 기영 씨만큼 죽여주는 탑은 없거든.”
그렇게 말하면서 한신주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막 방금 정사를 마쳤을 뿐인데 또 다시 회가 동하는지 아직 늘어져 있는 자신의 성기를 쓰다듬는다. 그런 한신주를 보고 권기영은 어이없이 웃었다. 그야 만족할 줄을 모르는 이 탐욕스러운 구멍을 그나마 채워 줄 수 있으려면, 나쯤 되지 않으면 힘들 테지.
권기영은 자신의 성기로 슬그머니 뻗어 오는 한신주의 손을 뿌리치곤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갔다. 오늘은 이만 됐다. 자신은 충분히 만족했다.
“샤워하는 동안 전화 왔었어.”
권기영이 욕실에서 나왔을 때 한신주는 룸서비스로 샌드위치와 음료를 시켜 먹고 있었다.
권기영은 젖은 머리를 닦으며 테이블 쪽으로 가 휴대전화를 확인하곤 도로 내려놓았다.
“다시 전화 안 해 봐도 되는 연락이야?”
“응.”
권기영은 대수롭잖게 대꾸하며 미니바에서 맥주를 꺼내었다. 동생에게서 온 전화였다. 보나 마나 얼마 안 있어 다시 전화가 올 거다. 어차피 용돈이 부족하다든가, 무슨 사고를 쳤는데 도와줄 사람 좀 소개시켜 달라든가, 그런 볼일일 터였다.
권기영은 맥주를 들이켜며 시계를 보았다.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내일은 아침 일찍부터 아버지의 골프 약속에 동반해야 하니 슬슬 들어가 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때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 누나랑 결혼할 남자 본다고 하지 않았었어? 만나고 온 거야? 어땠어?”
한신주가 샌드위치를 입에 밀어 넣으며 생각났다는 듯이 말한 순간, 권기영은 맥주를 넘기던 목을 멈추었다. 머릿속에서 지웠던 기억이 다시 떠올라 눈살을 찌푸리고 만다.
“그 얼굴을 보니 별로 신통찮은 남자였나 봐? 아니지, 그러면 기영 씨는 오히려 신경도 안 썼을 테고……, 의외로 괜찮은 남자였는지도 모르겠는데? 기영 씨가 신경 쓸 만큼?”
권기영의 눈치를 보며 실실거리는 한신주를, 권기영은 차갑게 일별했다. 한신주는 짐짓 움찔한 척 어깨를 움츠리면서도 키득거렸다. 권기영이 어쩐 일로 기분 상한 빛을 보이는 게 재미있는 모양이다.
“네 구멍을 꽉 채우고도 넘치는 물건을 가지기만 했으면 덮어 놓고 환장을 하는 너한테는 퍽 괜찮은 남자겠더군, 화장실에서 보니.”
권기영이 쌀쌀맞게 대꾸하자 한신주는 금세 웃음을 멈추었다. 기분이 상한 듯 코웃음 치며 권기영을 노려본다. 권기영은 그 시선을 무시하고 창가로 가 바깥의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괜찮은 남자.
괜찮은 남자는 무슨. 그냥 평범해 빠진 남자다.
문득 초조한 짜증이 솟으며 심장 고동이 빨라졌다. 권기영은 사납게 혀를 찼다.
그래. 인정할 만큼은 인정하자. 그는 저 까다로운 아버지와 누이의 눈에 들 만한 남자다. 그것만으로도 권기영은 그를 만나기도 전부터 호승심을 느끼지 않았던가. 그는 그냥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사람 좋고 다정하기만 한 남자는 아닐 터였다.
그러나――이 기묘한 느낌. 기묘한 꺼림칙함.
그래. 그 남자는 꺼림칙했다. 머릿속에서 뭔가 자꾸 신경을 갉작거리며 조심하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조심하라고.
“…―.”
그 말을 떠올린 순간 권기영은 낯을 굳혔다.
조심하라니. 뭘. 지금 내가 이유도 없이 누군가에게 위협을 느낀다는 건가. 다른 사람도 아닌 이 내가.
속에서 울컥 화가 치밀었다.
천만에. 그저――마음에 안 들 뿐이다. 그래, 그뿐이었다.
“화났어? 그냥 한 말인 거 알잖아. 기분 풀어.”
어느새 한신주가 권기영의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고양이처럼 조용하고 변덕도 심한 그는 눈웃음을 지으며 권기영의 눈치를 가늠한다. 지금의 기분, 지금의 분위기라면 어디까지 허용해 줄까, 한신주는 그 선을 틀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허리를 구부려 권기영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날름 손가락을 핥으며 권기영을 쳐다보는 시선이 가늘어졌다. 권기영은 처음에는 쪼는 듯하다 점차 진하게 살갗을 핥으며 시선을 맞추는 한신주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기영 씨. 기분 풀라니까. ……응? 대신, 빨아 줄게.”
조그맣게 속살거리면서 권기영의 앞에 무릎걸음으로 와 앉은 한신주는 권기영의 가운 자락을 걷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이제 막 샤워를 마치고 나와 어렴풋한 습기가 남아 있는 성기를 입에 가득 문다. 권기영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냉정하게 그를 내려다보다 이윽고 코웃음을 쳤다.
“단순히 네가 빨고 싶어졌을 뿐인 주제에.”
경멸 섞인 어조로 내뱉으며, 한신주의 뒷머리를 그러쥐었다. 그리고 자신의 사타구니에 더 세게 짓누른다. 한신주는 순간 숨이 막힌 듯 목구멍 안쪽으로 기침을 두어 번 했지만 이내 키득거리며 웃었다. 이제 화 푸는 거지? 하고 가릉거리며 본격적으로 권기영의 성기를 삼키기 시작했다.
권기영은 창가에 걸터앉아 한신주의 머리를 그러쥔 채 손 하나 까딱 않고 그의 입놀림을 받기만 했다. 그가 손을 뻗어 자신의 성기를 애타는 듯 만지작거리는 게 보였지만 거들어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절정이 찾아왔다. 거친 숨과 함께 열락을 터뜨린 순간 한신주가 멈칫했다. 가볍게 사레가 들린 듯 기침처럼 어깨를 몇 번 움칫거리던 그는 이윽고 천천히 목울대를 울렸다. 꿀꺽, 꿀꺽, 두세 번 울린 뒤에야 한신주는 입을 열어 성기를 뱉었다. 그런 뒤 한 방울이라도 남기지 않으려는 듯 한 번 더 말끔하게 핥아 낸다.
우유 거품을 핥은 고양이 같은 얼굴로 만족스럽게 올려다보는 한신주를, 권기영은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기분이 썩 나아졌다.
그럼 나도 씻고 올게, 하고 일어서 욕실로 가는 그의 엉덩이를 두드려 준 권기영은 나머지 맥주를 마저 마시기 시작했다.
저 눈치와 애교 때문이다. 일도 물건도, 심지어는 사람마저도 쉽게 질려 하는 권기영과 오랫동안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건.
한신주는 바라는 게 생기면 권기영의 눈치를 귀신같이 살펴 가장 적절한 때에 말을 꺼내었다. 그가 뭘 바라고 살갑게 구는 건지 뻔히 들여다보이는데도 선선히 승낙할 기분이 들 만한 때다.
“…….”
권기영은 다 비운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욕실 쪽을 보았다. 한신주가 뭔가를 조르는 건 딱 이렇게, 내 말이 좀 심하긴 했지, 라는 생각과 더불어 공들인 애무로 일방적으로 욕구를 푼 만족감에 권기영의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타이밍이었다.
이번엔 뭘 조를까. 자동차. 시계. 아니면 보통 방법으로는 구하기 힘든 약이라거나.
권기영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욕실 문이 열렸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알몸을 닦으며 나온 한신주가 “그러고 보니 아는 사람에게 들었는데 말야.”라고 말문을 연다.
“조금 하드코어한 게이 클럽이 있다더라. 사실은 조금이 아니고 많이 하드한가 봐. 회원제라는데 비밀리에 폐쇄적으로 운영되고 있어서 기존 회원의 소개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대. 게다가 안전을 위해 반드시 한 쌍으로만 출입 가능하고.”
권기영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가벼운 바나 클럽보다 좀 더 깊이 들어간 그런 데가 있다는 건 권기영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권기영은 격하고 거친 섹스를 좋아하긴 했지만 성벽 자체는 온건했다. 하드한―소위 말하는 변태적인―행위를 하라면 못할 건 아니었지만 별로 좋아하지 않아, 굳이 하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 곳에는 그다지 관심도 없었고 썩 내키지도 않았다.
“나, 거기 한번 가 보고 싶은데.”
젖은 몸을 닦으며 곳곳에 울혈이 생긴 자신의 몸을 거울에 비추어 보던 한신주가 거울 속으로 할끗 권기영을 보았다. 비밀리에 운영되는 폐쇄적인 회원제라도 권기영이 손을 쓴다면 들어갈 수 있으리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가 보자. 응? 데려가 줘.”
한신주는 권기영에게 선뜻 다가와 귓가에 가릉거린다. 권기영은 냉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글쎄. 난 별로 안 내키는데.”
“제발. 기영 씨가 데려가 주지 않으면 난 그런 데 못 가 본단 말이야. 나 생일 얼마 안 남았잖아. 선물해 주는 셈치고. 응?”
한신주가 권기영의 귓가며 볼에 입을 맞추며 고양이처럼 머리를 비볐다. 권기영은 혀를 차며 그를 곁눈질로 보았다. 편리한 욕구풀이 상대 정도가 이 남자에 대한 감상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정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적어도 생일에 원하는 선물 하나쯤 던져 줄 만큼은 있다.
“생일이라……. ……알았어. 한 번쯤.”
권기영은 귀찮은 투로 말했다. 한신주가 반색을 하며 “정말?” 하고 얼굴 가득 기쁜 기색을 띠었다. 그때 권기영은 “하지만.” 하고 전제를 둔다. 해 주는 건 거기까지였다.
“난 거기에서 즐길 생각은 없으니까 거기서 나한테 엉겨 붙지 마. 너도, 가볍게 즐기는 애무 정도라면 눈감아 주겠지만 적어도 내 눈앞에서 다른 놈에게 박히지는 말고.”
한신주는 조금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의 상상 속에서 펼쳐지고 있을 그 자극적인 모습들을 앞두고 정작 섹스라면 사족을 못 쓰는 그가 권기영과―그가 아는 최고의 탑과―즐길 수 없다니.
그러나 눈치 빠른 그는 권기영이 그 이상은 응낙해 주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알았어, 가볍게 맛보기만 하면 되잖아.”라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발갛게 들떠 반들거리기 시작한 눈으로 가느스름하게 웃으며 잔뜩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떡하지? 상상만으로도 쌀 것 같아. ……아. ……진짜로.”
권기영의 귓가에 입술을 바싹 대고 속삭이면서 한신주는 벗은 가슴을 권기영의 팔뚝에 문지른다. 권기영은 그새 유두가 뾰족하게 솟아 숨결을 띄우고 있는 한신주를 경멸스럽게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
이렇게 게걸스럽게 밝히는 놈이 하드코어 클럽? 맛보기만 한다고? 차라리 개가 똥을 끊는다고 하지.
놈은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권기영의 눈을 피해 자신의 구멍에 박아 넣을 성기를 찾기에 급급할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구멍을 채우기만 하고 나면, 눈앞에 권기영이 나타나든 말든 정신없이 울부짖으며 허리를 흔들어 댈 거다. 그런 뒤 한참 나중에야 권기영의 눈치를 보며 고양이 같은 소리로 아양을 떨며 울어 대겠지. 내기를 해도 좋다. 권기영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잘 알고 있었고, 권기영이 알고 있다는 걸 한신주도 알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알고 있었다.
상관없었다.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서로의 타산이 맞아떨어진다면.
애초부터 이놈에게 정조 같은 어리석은 걸 바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놈이 어디에서 누구에게 박히든, 자신의 앞에서 자신이 바랄 때 언제든 다리를 벌리고 함부로 기어오르려 들지만 않으면 그걸로 족했다.
권기영은 한신주의 유두를 세게 꼬집었다. 한신주가 교성을 내지르며 요란하게 웃었다.
*
전화 너머로 「잘 지냈어? 다들 별일 없지?」라고, 어설프게 순한 투로 말하는 동생의 첫마디를 들었을 때부터 권기영은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걸 짐작했다. 돈이든 뭐든 부탁할 일이 있는 말투다. 동생이 전화를 하는 용건은 거의 똑같았기에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런데, 형도 알지? 민우 형 말야, 왜 전에 말했잖아. 발렌티노 발보니 갖고 있다던 형. 한정으로 나와서 지금은 못 구하는 그 차 말야. 민우 형 차 많잖아. 이제 그거 좀 지겨워진 눈치라서 잘 하면 넘길 것 같던데……. 생각해 보니까 나 지금 타는 차도 벌써 2년이 다 됐고, 요새 좀 안 나가는 것 같기도 하고――」
“얼마가 필요한데.”
동생의 용건을 파악한 권기영은 도중에 말을 잘랐다. 이놈과의 통화는 시간 낭비다. 그나마 원하는 게 돈이라면, 예전처럼 가벼운 사고―놈의 말에 따르면―를 쳐서 일이 커졌는데 아버지 귀에 들어가지 않게 도와줄 만한 사람을 좀 알아봐 달라고 징징거리는 것보다는 시간을 더 낭비할 일이 없을 테니 짜증은 덜하다.
동생이 살짝 말꼬리를 끌며 중얼거린 액수는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권기영은 이번에도 오래 묻지 않았다.
“알았어. 더 할 말 있어?”
권기영이 냉담하게 묻자 동생은 원하던 바를 얻어서 한시름 놓음과 동시에 형의 눈치를 보느라 미묘하게 풀이 죽은 목소리로 아니, 하고 중얼거렸다.
“그래. 9월 초에 누나 결혼식 날짜 잡힌 건 알지? 8월 말일로 항공권 예약해 뒀으니 기억해 둬.”
권기영은 응, 적어 뒀어, 하는 동생의 대답을 확인하곤 전화를 끊었다.
고교를 졸업할 즈음부터 유학을 한다는 허울로 보스턴에 가 있는 동생은, 결코 백조가 될 일은 없을 미운오리새끼였다. 몇 살 많은 누이와 형이 지나치게 뛰어났던 탓에 상대적으로 열등하게 보였다고만 할 수는 없었다.
동생은 권기영이 생각하기엔 무능하고 머리가 비었다. 이를테면 방금의 통화도 그렇다. 동생은 부탁할 일이 있으면 권기영에게 연락을 하곤 했는데 비굴하게 눈치를 보며 부탁하는 내용은 늘 이렇듯 하잘것없었다.
“…….”
권기영은 차갑게 혀를 한 번 차곤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들었다. 초여름 저녁, 인적 뜸한 도로변의 야외 테라스는 딱 좋을 정도로 선선했다.
외부 약속이 잡힌 시각이 늦은 오후라 볼일을 마치고 나자 저녁이 되어 있었다. 지난달까지는 정신없이 바빠 야근을 밥 먹듯이 했지만 이번 달 들어서는 그럭저럭 한가해져, 사무실에 연락만 하고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도 될 터였다. 그러나 한두 가지, 시간이 거의 걸리지 않는 간단한 일이나마 덜 마친 게 떠올라 마저 처리하려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목도 마르고 그리 서두를 것도 없어 사무실 근처의 카페 앞에 잠시 차를 세워 두고 들어와 앉아 쉬고 있던 차에 동생에게 전화가 온 것이다.
그래도 단순한 욕망으로 돈이 필요한 거라니 차라리 나았다. 허세를 부리고 다니다가 제힘으로 책임지지도 못할 사고를 치고서 새파란 얼굴로 매달리는 얼간이 짓의 뒤치다꺼리 따위보다는.
하긴 저놈도, 쓸데없는 치기에 휩쓸려 사고를 치는 일이 예전보다는 많이 줄긴 했다. 깡통 소리가 나는 저 머리통은 도무지 채워지지 않을 것 같지만.
“…….”
권기영은 커피잔을 내리던 손을 멈칫했다. 지금 뭔가 생각날 것 같았는데. 뭔가. 그것은 분명――.
“권기영 씨?”
희미하게 점멸하던 사고가 확 불을 밝히려 한 그때, 목소리가 그 위를 덮었다. 커피잔을 쥔 손을 움칫한 권기영은 시선을 들었다. 테라스 바로 앞의 도로에 까만 차 한 대가 멎었다. 열린 차창 속에는 김건준이 앉아 있었다.
권기영이 그를 쳐다보며 고개만 끄덕이자 그는 선뜻 차를 세우고 나왔다. 보도와 이어져 있는 테라스로 들어와 자연스럽게 앞자리에 앉는다.
“이런 데서 다 뵙네요. 돌아가시는 길입니까?”
“……, 사무실로 들어가다가 잠시 쉬던 참입니다.”
뜻밖의 만남에 반갑다는 빛을 띠며 서글서글하게 웃는 김건준이었지만, 권기영은 역시 이 남자가 편하지 않았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도 좋다고 말한 적 없는데요, 그 말이 나오지 않은 것은 순전히 그가 누이와 결혼하게 될 사람이라서였다.
“결혼 준비는 잘 되어 가시나요?”
권기영이 홀로 말없이 커피만 마셔도 김건준은 그다지 거북해하는 빛을 띠지 않아, 결국 권기영은 잔을 내려놓으며 떨떠름하게 말을 걸고 만다. 신접살림을 차릴 곳이든 예물예단이든 신혼여행이든, 큰 것에서 사소한 것까지 뭐든 누이가 바라는 대로 해 준다고 하니 무슨 문제가 있을까만. 그러나 혹시 남자로서는 내심 불만이 있지나 않을까 했는데 그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김건준은 선선히 웃었다.
“예. 하지만 요즘 워낙 회사 일이 바빠서 주말에나 겨우 얼굴을 볼 정도라서요. 기윤 씨가 좀 토라진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바쁘시면 어쩔 수 없죠. 다음 주말이 연휴와 겹쳐 있던데 그때라도 천천히 만나 보세요. 누나가, 토라지면 여러 가지로 사람을 좀 귀찮게 만드는 성격이라서요.”
뭐 이미 아시겠지만, 하고 권기영이 덧붙이자 역시나 이미 알고 있었는지 김건준은 조용하면서도 난처한 웃음을 웃었다.
“다음 주말에도 회사 일 때문에 지방에 내려가 봐야 할 것 같거든요. 오래 걸릴 일은 아니지만…….”
아아. 과연. 고작 하루라 해도 일이든 뭐든 자신이 우선되지 않으면 못 견뎌 하는 누이니, 성질깨나 부리겠다. 권기영은 “힘드시겠군요.”라고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김건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제가 좋아서 기윤 씨와 결혼하려는 거니까요.”
“……. 그 사람이 어디가 좋았어요?”
취향 하곤, 권기영은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이 얼굴에 드러나는 것도 별로 신경 쓰지 않으며 물었다.
어릴 때부터 누이와는 도무지 안 맞았던 권기영이다. 누이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할지도 모르지만, 권기영은 누이 같은 여자와 결혼하려는 인종을 가장 이해할 수 없었다. 누이의 외모와 배경만으로도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헛똑똑한 부나방은 과거에도 한둘이 아니었다. 누이를 따라올 부귀영화만 손에 넣고 나면 여자야 바깥에 따로 둬도 된다는 속셈을 가진 인간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저런 독살스럽고 정 떨어지는 여자가 자신의 집에 버티고 있다니, 권기영은 사양이었다.
권기영의 물음과 표정이 그렇게 우스웠는지, 김건준은 한동안 말 없는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다 웃음이 담긴 부드러운 목소리가 어느 순간 속삭인다.
“기영 씨 누나잖아요.”
“……. 예?”
권기영은 짤막하게 침묵한 뒤 되물었다. 김건준은 권기영을 보며 웃고 있었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를 보며 권기영은 천천히 표정을 지웠다. 기영 씨 누나잖아요. 이유 없이 가슴이 식었다.
“…―그,”
“‘그 사람’이라니, 누나인데 꼭 남처럼 말씀하시는군요. 하하. 성격이 잘 안 맞으시다는 건 들었지만요.”
김건준은 농담처럼 덧붙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잠시 그대로 묵묵히 김건준을 보고 있던 권기영은 아, 예, 하고 시선을 떨어뜨려 커피잔을 집어 든다. 뭐야, 그런 의미였나. 순간 숨을 죽였던 심장이 느리게 다시 박동 쳤다.
문득 갈증이 솟아 커피로 목을 축이는 권기영의 앞에서 김건준은 아무렇지 않게―이번에야말로―권기영의 물음에 대답을 하고 있었다.
“기윤 씨의 좋은 점이라……, 많죠. 긍지 높고, 이성적이고, 자신을 아낄 줄 알고.”
그럴싸하게 포장된 그 말을 풀어 보면 자존심 세고, 냉정하고, 이기적이라는 말이었지만, 권기영은 “그런가요.”라고 냉소적인 대답만 곁들였다. 김건준은 다시 뭐가 우스운지 한동안 웃었다. 그러다가 불쑥 말한다.
“한눈에 알았어요. 두 분이 남매라는 건.”
“…―.”
“외모도 성격도 아주 많이 닮았거든요.”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자주 들었지만 한 번도 유쾌하게 여긴 적이 없었던 말을 다시 들으며 권기영이 눈살을 찌푸리자 김건준은 이내 알아차렸는지 웃으며 덧붙였다.
“처음에 봤을 때 그랬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그다지 닮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얼굴은 같은데 표정이 다르다고 할까……. 성격적인 부분도 그렇고.”
“건준 씨는 외아들이라고 하셨던가요?”
그리 유쾌한 화제가 아니라 말을 바꾸자 김건준은 순순히 따라왔다. 예,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형제가 있는 친구들이 참 부러웠어요. 나도 형제가 있으면 좋겠다고, 중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어서까지 아쉬워했으니까요. 그나마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포기하고 그런 생각은 안 하게 되었지만요.”
“없는 입장에서는 부러울 수도 있겠지만, 없느니만 못한 형제란 것도 있습니다. 외아들도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권기영은 툭 던지듯 중얼거렸다. 한 번도 마음이 맞아 본 적이라곤 없이 서로 냉담하게 무시하는 누나도, 형을 두려워하며 말을 잘 듣기는 하지만 골빈 짓이나 일삼으며 사고가 생기면 징징거리며 매달릴 줄밖에 모르는 동생도, 있어서 좋다는 생각이 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없는 사람은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게 정말로 탐이 나거든요. 특히나 그것이 근사하면 근사할수록, 손에 들어올 가능성이 낮으면 낮을수록 더. 무슨 짓을 해서든 갖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어요.”
“부모님께 동생을 낳아 달라고 졸라 보시지 그러셨어요.”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뭔가를 갖고 싶어할 만한 탐욕이 있는 걸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권기영이 말하자 김건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못내 갖고 싶어진 건 형이었어요. 그전까지는 사실 동생을 원했었는데, 고등학교 때 가깝게 지냈던 친구가 아주 멋진 형을 갖고 있었거든요. 공부든 운동이든 뭐든 그 형을 따라갈 사람이 없어서, 인근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형이었어요. 모든 친구들이 다 그 친구를 부러워했었죠. 저를 포함해서. 그때 저는 정말로 형을 갖고 싶었어요. 그런데 형이라는 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가질 수 없잖습니까.”
“확실히, 동생이라면 모를까 형이라면 부모님께 조른다 한들 가질 도리가 없겠지요.”
다리 건너 지인이 겪은 것처럼 뒤늦게 아버지의 숨겨 둔 자식이 나타나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은, 하고 권기영은 속으로 덧붙였다. 그러나 어차피 이제 와서는 상관없는 이야기이지만, 이 남자는 애초에 형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이 남자는 비슷한 또래인 누군가의 아래에서 얻어맞기도 하고 야단을 맞기도 하면서 자랐을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래, 아무리 눈앞에서 유순한 눈웃음을 짓고 있다 해도.
“그때는 정말로 형을 갖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몰랐었는데.”
김건준이 중얼거렸다. 방향 없이 흘러나온 나직한 말은 혼잣말인 것 같았다.
눈이 마주쳤다. 김건준의 눈매는 가느스름하게 웃고 있었다.
“가질 수 없는 것보다 더 힘든 게 뭔지 아십니까?”
그가 툭 물음을 던졌다. 뭔가 재미난 옛일이라도 생각하는 것처럼 빙글빙글 웃음을 짓는 그를 보며 권기영은 글쎄요, 하고 고개를 젓는다.
“‘어쩌면 가질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 헛된 망상이 산산이 부서지는 겁니다.”
권기영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김건준의 초승달처럼 굽어진 눈매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 눈동자 안쪽에서 뭔가가 숨 쉬는 것 같다. 일순 지금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어졌다.
그때 김건준은 앞으로 약간 기울이고 있던 몸을 폈다. 그리고 선선히 웃으며 살짝 어깨를 추어올린다.
“지금은 형도 동생도 별로 바라지 않지만요. 앞으로도 바라지 않을 테고.”
“…….”
권기영은 얼마 남지 않은 커피를 마저 비웠다. 담배 같은 맛이 났다. 쓰고 불쾌한 맛이다.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래도 기쁘네요. 기윤 씨와 결혼을 하게 되면 기영 씨와 형제brother-in-law가 되는 셈이니.”
형제. 권기영은 얼핏 부릅뜬 시선을 들어 김건준을 보았다. 별 뜻 없이 말한 듯 서글서글하게 웃고 있던 그는 눈이 마주치자 “잘 부탁드립니다.”라며 가볍게 고개까지 끄덕인다.
권기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기울였지만 그 방향이 가로인지 세로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마도 세로는 아니었을 거다.
“그만 일어나 봐야겠습니다.”
권기영은 빈 잔을 내려놓으며 서슴없이 일어났다. 더 앉아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김건준도 따라 일어섰다.
“바래다 드릴까요?”
“아닙니다. 저도 저쪽에 차를 세워 둬서요.”
권기영은 길 건너편에 세워 둔 자신의 차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뒤를 돌아본 김건준은 권기영의 차가 어느 것인지 이미 알고 있는 듯 “그렇군요.” 하고 중얼거렸다.
“그럼, 만나 뵈어서 반가웠습니다.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김건준이 손을 내밀었다. 권기영은 형식적으로 그 손을 잡아 한 번쯤 흔들곤 놓았다. 눈에 띄게 성의 없는 악수임에도 김건준은 웃기만 할 뿐이었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돌아선 그와 헤어져 자신의 차로 돌아간 권기영은, 그의 차가 출발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그시 바라보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갉작거리는 느낌을. 정체를 알 수 없으나 씻어 낼 수도 없는 그 감각이 못내 거슬렸다. 의식 아래로 저 남자에게 온 신경이 쏠려 있는 듯한 느낌이다.
권기영은 한동안 그렇게 묵묵히 있다가 전화를 집어 들었다. 아무런 소득이 없으리란 걸 알면서도 쓸데없이 사소한 데에 손을 뻗어 볼 정도로 불안정해진 스스로를 깨닫고 언짢아져 혀를 찼지만 전화를 끊지는 않았다. 이내 낯익은 목소리가 전화 너머에서 응답했다.
“……예. 박 사장님. 권기영입니다. 좀 알아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
탁, 탁, 운전대를 두드리는 손가락에 냉랭한 불쾌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 * *
“건준 씨가 다음 주말에 경주에 같이 가자고 하던데요.”
저녁 식사를 하다가 누이가 그렇게 말했을 때, 권기영은 회사 일 때문에 지방에 내려가 봐야 한다고 했던 그 남자의 말을 떠올리며 회사 일이 취소라도 되었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럼 다녀오렴. 그런데 경주라니 멀리까지 가는구나. 다녀와서 쉬려면 토요일에 가야겠네. 피곤하지 않겠어?”
“토요일에 가서 일요일에 오면 어떻겠냐고 하던데요. 회사 일 때문에 경주에 가 봐야 하는데 오전 한나절이면 끝날 것 같으니까, 토요일에 같이 가서 오전에 얼른 일 보고 같이 좀 쉬다가 다음날 오후에 올라오려고요.”
누이가 말을 마치며 흘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았다. 멈칫하며 애매한 얼굴로 바라보는 부모님과 마찬가지로 권기영 역시 다소 의외라는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가 정혼자와 일박으로 여행을 갔다 오든 딴 남자와 백날을 뒹굴든 권기영이 알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런 말을 부모님이 있는 식사 자리에서 할 줄은 몰랐다.
“그래, 하긴 결혼 전에 마음 편하게 놀러 다니는 것도 좋지. 그런데 기윤아, 그래도 아직 결혼을 한 건 아니니까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게 낫지 않을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사를 계속하는 아버지의 옆에서 어머니가 곱게 눈살을 찌푸렸다. 누이도 설핏 눈살을 찌푸리며 “그렇죠.” 하고 말한다.
“하지만 지난달부터 건준 씨가 워낙 바빠서 좀처럼 마음 편히 만날 수도 없었고, 가을까지도 마찬가지라서 자주 보기는 힘들 것 같아요. 다음 주에 가자는 것도 회사 일을 겸해서 가는 거니까, 바쁘긴 많이 바쁜가 봐요. 그래도 모처럼 연휴가 끼어 있는데 아쉽다며 꼭 같이 갔으면 좋겠다고 그러던데…….”
누이는 말을 흐리며 흘끗 권기영을 보았다. 관심 없이 식사만 하고 있던 권기영은 그 시선을 의아하게 마주 보았다. 누이는 말하는 게 그다지 내키지 않는 투로 새침하게 입을 열었다.
“건준 씨가, 너도 같이 가면 어떠냐고 물어보래. 아무래도 아직은 결혼 전이니까 둘이서만 일박을 하면 부모님도 안 좋아하실 테고, 그렇다고 속이고 가고 싶지도 않다고.”
“나?”
권기영은 젓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황당해서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한 가족이 될 테니 너랑도 미리 친해지고 싶다고 하던걸.”
그렇게 말하는 누이는 권기영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게 못내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지만, 그러면서도 그 말을 하는 걸 보면 경주에 가고 싶긴 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싫어. 내키지 않아.”
어이없이 그녀를 쳐다보던 권기영이 고개를 젓자, 그녀가 차갑게 그를 보다가 어느 순간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너 전에도 그 사람이랑 같이 만날 때 표정이 안 좋던데, 그 사람이 싫은가 봐. 이유라도 있어?”
왜 싫어하냐고. 그 말을 듣고서야 권기영은 되짚어 보았다. 김건준을 싫어한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가 불행해지기를 바라거나 어떠한 악의를 떠올리지는 않았다. 사람이 나쁘다거나 악해 보인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었다. 김건준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호오와는 별개로 선명하게 떠오르는 개운찮은 감정. 개운찮기 때문에 신경에 날이 선다.
스스로도 납득을 하기 어려운 이런 말을 누이가 납득하리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또 자신이 알 수 없는 뭔가를 이유 없이 경계하고 있다는 말을 자신의 입으로 하고 싶지도 않았다.
“몇 번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을 싫고 말고 할 것도 없잖아. 그리고 다음 주말엔 친구랑 만나기로 한 약속도 있어.”
권기영은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핑계만은 아니었다. 다음 주말은 한신주의 생일이다. 생일이라고 일부러 챙겨 줄 건 없지만 이미 그날은 한신주가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회원제 클럽에 데려가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미루거나 취소할 수 없어?”
“응.”
“……. 그럼 그 친구도 같이 가면 어때?”
누이는 어지간히 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어지간히 그 남자가 좋거나. 권기영은 누이답지 않은 억지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싫어, 이번에야말로 딱 잘라 말하려 입을 연다. 그러나 그보다 한발 앞서,
“같이 다녀오지 그러냐.”
그때까지 말없이 식사를 하고 있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김 군이 아마 바쁘긴 할 거다. 사업이 그 속도로 커 가는데 바쁘지 않을 리 없지. 경주로 간다는 걸 보니 감포 쪽을 보러 가는 모양인데……, 그 김에 기영이 너도 미리 가서 살펴봐 둬. 올 연말쯤 그쪽 외곽으로 개발 얘기가 나올 텐데, 미리 봐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김 군이 어디 부근으로 다니는지도 참고해 둘 만하겠지.”
권기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싫다고 하기엔, 아버지의 시선에 이미 욕심 어린 호기심이 드러나 있었다. 아버지가 저렇듯 관심을 가진 바에야 이 자리에서 급조해 낼 만한 변명거리는 통하지 않을 터였다.
입맛이 떨어졌다. 결국 수저를 내려놓고 말았다.
*
한신주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누이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권기영의 옆에 친근하게 붙어 아무렇지 않게 팔이나 어깨를 살짝살짝 두드리는 그 태도가 붙임성 좋은 성격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누이며, 누이의 옆에 선 김건준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환하게 웃음 짓는 그를 보고, 누이는 얼핏 굳은 얼굴로 권기영을 노려보았다.
누이는 고교 때부터 권기영이 남자와 관계를 갖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요즘도 권기영을 바라보는 시선에 경멸이 스며 있는 건 그 때문일 거다. 그 일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 이유도 권기영을 위해서가 아니라 ‘입이 더러워지기 때문’이라는 누이였다.
그런데, 약혼자와 함께 여행을 가는 자리에 그런 ‘지저분한’ 관계에 있는 상대를 데려오다니, 누이의 얼굴이 모욕감으로 굳었다. 그리고 이 순간까지 이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 기분이 좋지 않았던 권기영은 누이의 그 얼굴을 보자 그제야 마음이 좀 풀렸다. 한신주와 함께 동행하기로 한 건 권기영의 뜻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것 하나만큼은 그를 데려온 보람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김건준이라고 합니다. 기영 씨 친구분이라고요. 성함이……?’
쌀쌀하게 굳은 누이의 옆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김건준은 여느 때처럼 웃으며 한신주에게 말을 걸었고 한신주 역시 생글거리며 ‘신주요. 한신주.’ 하고 친근하게 대답한다.
곧 김건준의 차에 올라타 경주로 내려가는 동안에도 그런 분위기는 계속되었다. 누이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고 한신주가 즐겁게 떠들면 김건준이나 권기영이 거기에 간간이 대답해 주곤 했다.
기분이 아주 엉망으로 구겨져 있겠군, 권기영은 조수석에 앉아 있는 누이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속으로 유쾌하게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가기 싫다는 권기영을 억지로 끌어오다시피 한 것이 그녀이니, 뭐라고 할 수는 없을 거다.
하지만, 정작 권기영도 그렇게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약속을 어기다니 너무하다고 투덜거리는 한신주에게 빈말로 ‘그럼 너도 같이 가든가.’라고 했을 뿐인데, 뭔가 곰곰이 생각하던 한신주가 선뜻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두루 붙임성이 좋긴 해도 낯선 사람들 속에 의도적으로 섞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놈이 어쩐 일인가 했던 권기영은, 경주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그 이유를 깨달았다. 한신주는 권기영을 이유 없이 언짢게 만들었다는 그 매형감이 궁금했던 것이다.
한신주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까부터 은근하게 김건준을 살펴보고 있었다. 굵직한 목덜미며 얇은 셔츠 아래로 드러나는 넓은 어깨, 두터운 팔과 운전대를 쥐고 있는 커다란 손. 한신주의 눈가에 어리는 욕심을 모를 리 없었다.
권기영의 매서운 눈길과 마주치면 한신주는 장난스럽게 웃어 얼버무리곤 했지만 운전석에 앉아 있는 김건준을 보는 시선은 반들거리며 달아올라 있었다.
“잠시 휴게소에 들렀다 갈까요. 앉아만 있어서 피곤하실 텐데.”
김건준이 차선을 바꾸며 말했다.
얼마 가지 않아 나타난 휴게소 안으로 차는 접어들었고, 주말이라곤 하나 아직 비교적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휴게소는 한적했다.
“난 뭐라도 좀 마셔야겠어. 건준 씨는 뭐 마실래요?”
줄곧 언짢은 기색으로 입을 다물고 있던 누이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뒷자리에 앉았던 두 사람을 무시하며 김건준의 팔을 가볍게 잡아끌었고, 김건준은 살짝 난처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누이와 마찬가지로 잠시나마 따로 떨어져 있고 싶었던 권기영은 선선히 “그럼 한 30분 뒤에 봐.”라며 걸음을 돌렸다. 한신주에게 눈짓을 하자 이내 눈치 빠르게 알아챈 그는 “그럼 좀 있다 봐요.” 하며 그들에게 곰살궂게 인사하곤 권기영의 뒤를 따랐다.
“매형 말야, 괜찮은 남자잖아.”
권기영의 옆에 바싹 붙은 한신주는 즐거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권기영이 흘끔 쏘아보자 그는 눈초리를 구부리며 미묘하게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설마 내가 당신 누나 남편감한테 손대기라도 할까 봐? 당신도 같이 있는데?”
“너라면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할 것 없겠지.”
탐나는 남자가 보이면 약을 먹여서라도 올라타고 싶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놈이다. 물론 한신주가 정말로 김건준에게 손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노골적인 눈치를 흘리고 다닐 게 마음에 걸렸다.
“흥. 그래도 가족이 될 사람이라고, 신경은 쓰이나 보지. 남자랑도 잔다는 걸 누가 알아채든 말든 신경도 안 쓰던 사람이.”
한신주가 이죽거리다가 권기영이 정말로 짜증스럽게 노려보며 “그 입 좀 닥쳐.” 하고 으르렁거리자 그제야 입을 다문다.
남자 여자 가리지 않는―굳이 말하면 남자를 더 즐기는―성벽을, 권기영은 일부러 숨긴 적은 없었다. 그는 어떤 이유에서든 남에게 움츠러든 적이 없었고, 아무도 그에게 대놓고 경멸이나 비난의 시선을 보내지는 못했다. 혹여 그런 사람이 있으면 권기영은 ‘원하면 네놈의 엉덩이에도 박아 줄 수 있다’는 육식짐승 같은 눈으로 똑바로 쳐다보았고, 그러면 그 사람은 슬그머니 기가 죽어 시선을 돌리곤 했던 것이다.
김건준 역시 마찬가지다. 알려진들 상관없었다. 그게 뭐. 그가 자신을 비웃을 수나 있을까 봐? 천만에,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문제는――.
거기까지 생각하던 권기영은 멈칫했다. 문제는. 문제는, 뭐.
눈살을 찌푸리며 멈춰 선 권기영을, 옆에서 한신주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슬그머니 그의 팔에 어깨를 비비며 미묘한 눈길로 웃었다.
“기영 씨. 나 갈증 나는데. 계속 여기 서 있을 거야? 30분이면 가볍게 한 번 마시기엔 충분한 시간인데. ……모르겠어? 갈증 난다고.”
권기영은 가릉거리는 한신주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눈에 띄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어렴풋이 불룩해지기 시작한 아랫도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미친놈.”
그러나 권기영은 곧 화장실로 걸음을 돌렸다. 한신주가 목 안쪽으로 쿡쿡 웃으며 따라온다. 짜증스럽게 일렁이는 기분을 섹스로 종종 풀곤 하는 권기영의 버릇을 한신주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화장실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소변기 쪽은 두세 명이 오가고 있었지만 칸은 모두 텅 비어 있었다. 그런 빈칸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권기영은 서슴없이 널찍한 장애인용 화장실로 들어갔다. 한신주도 따라 들어가자 자동으로 문이 닫혔다.
“자, 이 화냥년아. 이거잖아. 네가 좋아하는 거.”
변기에 걸터앉은 권기영이 퍼스너를 내리고 성기를 꺼내자 한신주는 붉게 달아오른 눈으로 황급히 그 위에 올라앉았다. 서둘러 바지를 내리다가 초조해진 듯 뭐라고 욕설을 중얼거리던 그는 엉덩이가 드러나자마자 권기영의 성기를 그 사이로 파묻었고, 동시에 가쁜 숨을 터뜨렸다. 바르르 떨리는 몸이 권기영의 위에서 흔들렸다.
권기영 역시 달아오르긴 했으나 그 안에 이성은 갖춘 눈으로, 자신의 위에서 허리를 구불거리며 연신 밭은 숨을 터뜨리는 한신주를 보았다.
‘섹스라면 정신을 못 차리는 연놈들 여럿 봤지만, 그래도 너만 한 놈은 없었어.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몸뚱이야?’
언젠가 권기영이 감탄마저 섞인 비웃음을 흘렸던 적이 있다.
‘나라고 태어나면서부터 이랬던 것 같아? 나도 처음엔 그냥 가볍게 놀기나 해 볼 기분으로 엉덩이를 내줬던 거라고. 쾌락으로 인식한 뒤로는, 하면 할수록 점점 더 헤어날 수 없게 되더란 말이야.’
‘단순히 제 정신력이 약한 걸, 핑계는. 중독에서 헤어나는 인간들은 그럼 뭐야.’
권기영이 코웃음 치자 한신주는 말이 막힌 듯 그를 노려보았지만, 결국 ‘남 말이라고 함부로 하긴.’ 하고 밉살스럽게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상관없다.
섹스라면 환장을 하든 사족을 못 쓰든, 권기영으로서는 자신이 필요할 때 손쉽게 해결할 수 있으니 좋았다. 달콤한 말로 유혹하거나 분위기를 봐서 떠볼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때로는 너무 보채 대서 귀찮을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는 혼자 해결하라고 무시하면 그만이다.
게다가 지금처럼, 딱히 아주 흥이 솟지는 않아 권기영이 손 놓고 앉아만 있어도 한신주는 혼자 알아서 허리를 흔들며 쾌락을 자아내었다. 이놈만큼 ‘편한’ 놈은 없을 거다.
권기영은 한신주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순간, 아슬아슬하게 정점에 달하려 하고 있던 한신주가 짧은 신음을 터뜨렸다. 한신주의 성기를 감싸고 있던 휴지가 이내 뜨끈하게 젖었다. 세차게 수축하는 엉덩이 속에서, 권기영도 절정을 맞는다.
“……, 아……, 평생 이대로 들어 있었으면 좋겠어.”
이윽고 거칠어졌던 숨결이 잦아지자 한신주가 제일 처음 중얼거린 말이었다. 슬그머니 근육을 수축시켜 권기영의 성기를 오물거리는 엉덩이는 한 번 더 하고 싶다고 은근히 말하고 있었지만, 권기영은 냉정하게 한신주를 밀어내었다. 한신주는 아쉬운 듯 칫, 하고 입을 비죽이며 일어섰다. 엉덩이 속에서 젖은 살덩이가 빠져나왔다.
소변이라도 본 것처럼 익숙하게 뒤처리를 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한신주는 시계를 보았다.
“아랫입은 그럭저럭 갈증이 가셨지만 이번엔 윗입이 마르는데. 커피 한 잔쯤 마실 시간은 있겠지?”
“먼저 나가서 사고 있어. 난 이번에야말로 소변을 봐야겠으니까.”
권기영은 물에 적신 휴지로 성기에 묻은 이물질을 닦으며 말했다. “내 안에 그냥 같이 싸지 그랬어.”라며 키득거리던 한신주는 권기영의 매서운 시선을 받고는 짐짓 어깨를 움츠리는 시늉을 하며 걸음을 돌려 먼저 화장실에서 나갔다.
홀로 남은 권기영은 혀를 차며 변기 앞에 서 소변을 보았다.
한 번 선을 넘어선 인간은 점점 더 큰 자극을 찾는 법이다. 한신주는 이미 선을 넘어서고 있었다. 과연 저놈을 하드코어한 클럽에 데려가는 게 놈을 위해 좋은 일일지 미심쩍었지만, 권기영은 이내 아무렴 어때, 하고 생각을 그만뒀다. 이미 보통의 자극으로는 불만스러워하는 기미가 보이는 놈이 그 클럽에 다니게 되면 어떤 말로를 맞게 될지 눈에 선했지만, 그건 놈의 문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놈과의 관계는 그만두는 편이 좋겠지. 하드코어한 취향을 따라 줄 생각도 없고, 쓸데없는 병 따위도 사양이다.
권기영은 바지춤을 추스르곤 손을 씻은 뒤 걸음을 돌렸다.
화장실의 입구 근처에 마련되어 있던 장애인용 칸에서 나가던 권기영은, 걸음을 멈칫했다. 화장실 안쪽에서 김건준이 막 나오고 있었다. 젖은 손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나오던 김건준은 권기영을 보고 놀란 듯 눈썹을 올렸지만 이내 빙긋이 웃었다.
“그쪽이 더 넓고 깨끗해서 쓰기 편하죠?”
“……예, 뭐.”
“신주 씨도 조금 전에 거기에서 나오시더군요.”
권기영은 멈칫 입을 다물며 김건준을 보았다. 김건준은 아무 뜻 없이 한 말인 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이 휴게소는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깨끗한 편이네요.”라고 말을 잇다가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권기영을 깨닫곤 의아한 시선을 주었다. 권기영은 곧 “그렇군요.”라고 대꾸하며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자신의 신경이 좀 예민해진 것 같긴 하다. 아무렇지 않게 들으려면 아무렇지 않게 들을 수 있는 말까지 민감하게 귀를 세우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나가자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한신주가 두 손에 커피를 들고 서 있다가 권기영을 보곤 한 손을 들어 올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기영 씨, 아이스 아메리카노 괜찮지?”라고 소리를 치는 그에게 권기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다. 옆에서 김건준이 조용히 속삭였다.
“신주 씨와 있으면 갈증 날 일은 없겠어요.”
권기영이 돌아보자 김건준은 여느 때처럼 부드럽게 눈초리를 접으며 웃고 있었다.
“언제든 원할 때 해갈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지금처럼.”
지금처럼, 김건준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낮아지는 듯했다. 표정을 지우며 그를 바라보는 권기영에게 웃음 짓는 눈매가 조금 더 휘어진다.
그때 한신주가 권기영의 옆에 이르러 멈춰 섰다. “여기.” 하고 내미는 플라스틱 컵을 내려다본 김건준이 평연하게 싱긋 웃으며 입을 연다.
“커피가 시원해 보이는군요.”
“……, 갈증이 나시는 모양인데, 드십시오. 제 거라도 상관없으시다면.”
한신주에게서 컵을 받아 든 권기영은 그대로 김건준에게 내밀었다. 냉랭한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마주하며, 김건준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물론 전혀 상관없습니다만, 괜찮습니다. 참을 만하거든요. 아직은.”
그 목소리는 몹시 즐거운 것 같았다.
김건준의 회사 일이란 것은 금방 끝났다.
오래 걸릴 일은 아니라고 본인이 말했던 것처럼, 마중 나와 있던 남자와 더불어 지도 몇 군데를 짚어 가며 부근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살펴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걸로 끝이었다. 일 자체를 한다기보다는 사전 조사 겸 왔다고 하는 편이 나을 그 일은 두 시간 남짓 만에 끝났다.
“오늘 둘러본 곳들 가운데 어디가 괜찮아 보이던가요.”
일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김건준이 리어미러 속으로 뒷자리의 권기영을 보며 물었다. 웃음 짓고 있는 그 눈은 권기영이 왜 여기까지 따라오게 되었는지 이미 짐작하고 있는 눈치였다. 시치미를 떼어 봐야 꼴이 더 우습다.
“글쎄요……, 다 비슷비슷한 것 같긴 한데, 마지막으로 간 곳은 좀 아니었고……, 저라면 위치도 그렇고 지형도, 제일 처음 간 곳이 좋아 보이더군요.”
잠시 침묵하던 권기영이 선선히 대꾸하자 김건준은 웃더니 그렇죠,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리고 다시 리어미러 속으로 시선을 맞춘다.
“기대를 벗어나지 않는 아드님을 두셔서 아버님이 참 좋으시겠어요. 어릴 때부터 기대를 한 몸에 받으셨죠, 기영 씨는?”
권기영은 대답 대신 애매하게 고개만 까닥했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는 고교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고 들었는데, 과연 어땠을까. ……그야 충분히 기대받는 아들이었을 테지. 될성부른 싹은 그런 법이다.
“건준 씨야말로 촉망받는 아드님이었을 것 같은데요.”
그러나 김건준 역시 권기영이 던진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미묘한 웃음만이 돌아왔을 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건준이 오늘 묵을 곳으로 미리 예약해 두었다는 고택에 도착했다. 재작년 초까지 원래 주인이 실제로 살다가 전체적으로 고쳐서 외부에 잠자리를 제공하기 시작했다는 고택에는, 집을 보살피며 손님을 돌보도록 고용된 중년의 부부만 머무르고 있었다.
“한적하고 조용해서 좋은데? 나도 나중에 이런 데서 살면 좋겠다. 그런데, 방은 어느 방을 쓰면 돼요? 아무 데서나 자면 되나?”
도착하자마자 어디로 사라졌나 싶더니 어느새 집을 구석구석 돌아보고 온 한신주가 관리인에게 묻자, 그는 큰 방이 두 칸 있는 사랑채를 편하게 쓰면 된다며 사랑채로 안내해 주었다.
방 두 칸이라, 하고 중얼거린 권기영은 누이에게 무심한 시선을 돌렸다.
“나랑 신주가 방 같이 쓰고, 누나가 건준 씨랑 같이 쓰면 되겠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넌.”
이곳으로 오는 동안 내도록 그리 기분이 좋지 않았던 듯한 누이는 대번에 표정을 굳히더니 두 칸의 방 가운데 작은 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쪽을 제가 쓸게요.”라며 누구에게랄 것 없이 말한 그녀가 작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쌀쌀맞은 그 말투를 감지했는지 관리인이 세 남자의 눈치를 흘끔 보며 “저쪽 방이 훨씬 넓어서, 세 분이 주무셔도 아주 충분할 거예요.”라고 말을 거들었다. 이내 짐가방을 들고 넓은 방으로 들어간 한신주가 “셋이 각자 대자로 활개 쳐도 될 만큼 넓은데.”, 하고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외친다.
셋이 한 방. 별로 내키지 않는다. 셋이건 넷이건 방이 좁건 넓건 그런 것과는 별개로, 김건준이라는 남자와 같은 방을 쓰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불편하게 울렁거린다.
권기영은 방으로 들어갈 생각도 않고, 목조 건물이니까 불조심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는 관리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 자리에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고즈넉하고 아늑한 멋이 있는 고택을 뜻 없이 둘러본다. 초여름이긴 하지만 산기슭에 위치한 고택은 밤이 되면 쌀쌀해질 것 같았다.
“좋은 곳이군요. 인가와 적당히 떨어져 조용해서, 편히 쉬러 오기에 좋겠어요.”
권기영과 마찬가지로 고택 주위를 둘러보던 김건준이 중얼거렸다. 권기영과 시선이 마주치자 습관인 듯 넉넉하게 웃음 지은 그는, 방 안에서 수선스럽게 “이불은 안에 있는 거 아무거나 깔아도 되겠지? 난 낮잠부터 좀 자야겠어.”라고 떠들고 있는 한신주 쪽을 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밝고 붙임성이 좋은 친구분이네요. 기영 씨보다 많이 어려 보이는데, 어떻게 만나신 건가요?”
“……종종 가던 클럽에서 만났습니다. 이야기도 잘 통하고 성격도 맞는 데가 있어서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어요.”
“자기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과 그렇게 허물없이 지내기가 쉽지는 않을 텐데, 잘 맞으셨나 봐요.”
“워낙 싹싹하고 눈치가 빠른 녀석이라서요. 건준 씨도 이야기 잘 나누시던데요.”
권기영은 한신주와의 관계에 대해 오래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이야기의 중점을 김건준에게로 넘겼다. 저요? 라고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킨 김건준은 이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금방 마음을 터놓지는 못해요. 별로다 싶은 사람에게도 그렇지만, 참 좋다 싶은 사람에게도 쑥스러워서 말을 잘 못하거든요.”
이래 봬도 은근히 낯가림이 있어서요, 하고 웃는 김건준을 권기영은 뜻밖이라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별로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요.”
“하하, 그런 말은 많이 듣는데, 정말입니다. 오래전에 좋아하던 사람에게 고백할 때에도 수천 번쯤 속으로 되풀이한 끝에 겨우 말했어요. 그래 봐야 태도에 다 드러났었는지, 이미 알고 있더라고요.”
김건준은 오래전의 언젠가를 떠올리는 듯 눈가에 희미한 웃음을 담았다. 권기영은 정말로 의외라고 생각하며 그를 보았다. 낯을 가린다는 말이며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고백을 했다는 말도 이 남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저렇게 그리운 듯 웃는 얼굴 또한 예상 밖이었다. 곧잘 웃음 짓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도 웃을 줄 아는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저도 모르게 마음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뜻밖이라는 기분에 자극받았는지 문득 호기심이 솟는다.
“그래서, 좋아하던 사람과 잘 됐어요, 고백해서?”
김건준은 빙글빙글 웃음 짓는 얼굴 그대로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가볍게 어깨를 추어올린다.
“그랬더라면 지금 이러고 있지는 않았겠죠. ――기윤 씨에게는 비밀로 해 주세요.”
장난스럽게 덧붙이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권기영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걸 보면 평범한데……, 그런데도 간간이 이유 없이 불안스러운 위화감이 든다. 이렇게 보면 사람은 나름대로 소탈한 것 같고 괜찮은데.
권기영은 고개를 기웃하며 담뱃재를 털어내었다. 한동안 정신없이 바빴던 탓일까, 역시 지나치게 예민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누이가 그럭저럭 짐을 다 풀었는지 문을 열고 나왔다. 정혼자와 기껏 멀리까지 왔는데 연인다운 시간은 보내지 못한 탓인지 낯빛이 별반 좋지 않은 누이를 올려다보며, 권기영은 담배를 껐다.
“그럼 저녁 식사 때 뵙기로 하고, 두 분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더 이상 제가 같이 있었다간 누나가 정말로 화를 낼 것 같으니까요.”
아예 농담만은 아닌 말투로 권기영이 말하자 김건준은 웃었다.
“예. 뒷산 쪽으로 산책로가 잘 되어 있다고 하니까 그쪽이라도 갔다 올까 싶네요. 기영 씨도 모쪼록 친구분과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눈웃음과 함께 가벼운 목례를 남긴 김건준은 선뜻 돌아서 누이에게 걸어갔고, 권기영은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 사랑채 계단을 올라갔다.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인지도 몰라, 실상 딱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잖아, 애써 그런 생각을 하면서.
김건준과 누이는 제법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모양이다.
비록 해가 저물 무렵 돌아온 김건준이 물에 흠뻑 젖어 있긴 했지만, 그도 누이도 표정은 밝았다. 산책로 옆으로 흐르는 냇가에서 장난을 치다가 빠졌다는 모양이다.
‘빠진 사람이 저라서 다행이죠.’라며 웃음 지은 김건준이었지만, 아예 다행이라고 할 만한 건 아니었다. 산기슭에서 날이 저물어 가는데 젖은 옷을 입고 있으려니 춥긴 했는지 돌아오자마자 옷가지를 벗었지만, 어차피 하루 머물 셈이었기 때문에 그 옷 외에 더 가져온 여벌옷이 없었다. 그렇다고 원래 입고 왔던 양복을 입을 수도 없어, 결국 속옷만 걸칠 수밖에 없었다.
“제가 빠져 다행이긴 하지만, 춥긴 했어요.”
김건준은 커다란 타월을 어깨에 걸친 채 짐짓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아까 돌아왔을 당시에는 푸르스름하게 질려 있던 입술이 지금은 제 빛깔을 찾았다. 추운 기색도 없다. 따뜻하게 불을 땐 방에 앉아 식사를 하는 동안 몸에 묻어 있던 물기는 다 말라 있었다.
“옷은 내일이나 돼야 다 마르겠던데요.”
숭늉을 호륵거리던 한신주가 말하자 김건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이제 밤이라 나갈 일도 없긴 하지만, 화장실 갈 때 좀 고역이겠군요.”
“오늘은 일찌감치 쉬어요, 건준 씨. 오늘 피곤했을 텐데.”
누이가 말하자 김건준은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하고 그녀에게 웃음 띤 시선을 주었다. 사이좋은 연인처럼 시선을 나누는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한신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식은 몸을 데우는 데에는 사람 체온이 제일인데. 알몸으로 끌어안으면 정말 따뜻하거든요.”
미묘한 투로 그가 말하자 누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곱잖은 시선을 던졌다. 그러잖아도 한신주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는데, 문란한 상상을 떠올리는 투로 말을 하자 더욱 거슬렸던 탓이다. 그러나 그 옆에서 말없이 숭늉을 마시던 권기영은 다른 의미로 눈살을 찌푸렸다.
녀석의 저 말은 누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다. 아마도 저 머릿속의 외설적인 상상 속에서 알몸으로 끌어안고 있을 사람 중 하나는 필경 그 자신일 거다. 어쩌면 지금도 저 넉넉한 옷자락 아래로 발기해 있을지도 몰랐다.
한신주는 권기영과 눈이 마주치자 그가 자신의 머릿속을 다 들여다본다는 걸 안다는 듯 교태 섞인 눈웃음을 지었다. 물기를 띠고 반들거리는 저 눈매에는 선명하게 욕망이 서려 있었다.
그럴 만하다.
권기영은 천천히 숭늉을 불어 마시며 숭늉 그릇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러나 시야 한구석에는 김건준이 들어오고 있었다. 물기가 다 마르고 더 이상 춥지 않자 어깨의 수건이 거추장스러웠는지 그마저 걷어 낸 반라의 몸이다. 한신주가 핥듯이 쳐다보는 시선을 차마 떼지 못하고 탐욕에 젖어 어쩔 줄 모르도록 멋진 몸이었다.
그렇다. 멋진 몸이었다. 옷을 입고 있을 때에도 그랬지만, 이렇게 상상의 여지가 없이 드러나 있으면서도 어느 한 군데 흠잡을 수 없이 완성된 남자의 몸이다. 오죽하면, 매끈하고 늘씬한 몸매를 선호하는 권기영의 취향에서는 벗어난 건장하고 다부진 몸임에도 권기영조차 절로 시선이 따라갔다.
――두근.
심장이 뛰었다. 욱신거렸다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아까부터 코끝에서 낯설게 신경을 자극하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실제로 후각을 자극하는 게 아닌 그 무취의, 그러나 온몸으로 강렬하게 느껴지는 냄새가 수컷의 냄새임을 권기영은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불안정하게 술렁거리는 심장이 점차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누나 말대로, 그만 쉬는 게 좋겠군요. 먼 길 운전하느라 지치셨을 텐데 체온까지 뺏겼으니,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게 낫겠어요.”
권기영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그만 쉬는 게 좋겠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때마침 관리인이 상을 치워도 될지 문 앞을 기웃거렸다.
모두 식사를 마쳤다고 하자 관리인은 상을 내어 갔고, 누이도 자신의 방으로 건너갔다. 한신주도 “그럼 나도 씻고 와야겠네.”라며 일어섰다. 나가면서 권기영에게 은근히 눈짓을 했지만 권기영은 냉담하게 무시했다. 짐짓 토라진 얼굴로 권기영을 노려본 한신주는 소리 없이 코웃음 치는 시늉을 하며 나가 버린다. 아까부터 반들거리는 눈을 미묘하게 굴리고 있던 저놈은 필경 화장실에서 제 엉덩이를 쑤시고 올 게 틀림없었다.
머릿속에 그 짓밖에 없는 갈보 같은 놈.
권기영은 이유 모르게 욱하고 언짢아져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바로 주무실 겁니까? 불 꺼도 될까요?”
김건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자 그가 허벅지 위로 이불을 덮고 반듯하게 앉아 있었다. 얼핏 옷가지라곤 걸치지 않은 듯 보이는 그의 몸에서 무뚝뚝하게 시선을 돌린 권기영은 예, 하고 중얼거리곤 누웠다.
곧 불이 꺼지고 방 안은 칠흑처럼 캄캄해졌다. 김건준이 자리에 누우며 사각사각 이불 스치는 소리가 났다. 시야가 가로막힌 탓인지 더욱 예민해진 청각에는 그 소리가 바로 지척에서 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곧 모든 소리는 사라지고 정적이 그 자리를 채웠다.
아무것도 없이 새카만 정적.
그곳이 현실인지 혹은 꿈속인지도 분간이 가지 않는 무無.
그곳에서 숨소리만 들려왔다. 불현듯, 바로 옆에서 들리는 그 숨소리가 무엇의 숨소리인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는 김건준이라고 하고 있는데도 뭔가 아주 다른 것이 숨 쉬는 것 같다.
바로 옆에서. 바로 지척에서 숨 쉬고 있었다. 무언가, 권기영이 한 번도 겪은 적이 없는 낯선 것이었다. 이 새카만 어둠 너머에서. 그것은 지독한 짐승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본능의 밑바닥을 그슬리는 냄새.
수컷 냄새다.
다른 모든 수컷의 냄새를 다 지워 버리는, 구역질이 나도록 짙은 수컷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오로지 그것만이 이 세상의 유일한 수컷인 양.
어느 순간 그 냄새가 코끝으로 확 끼쳤다.
“――.”
권기영은 번쩍 눈을 떴다. 감으나 뜨나 칠흑의 어둠은 다를 것 없었지만, 꼭 가위에서 풀리기라도 한 양 그 순간 냄새는 씻은 듯 사라졌다. 다시 찾아오는 건 저 바깥 멀찍이에서 움직이는 인기척 소리, 풀벌레 소리.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악몽에서 갓 깨어난 것처럼 의식은 있는데도 한동안 몸이 움직이지 않는 그 느낌에서 이윽고 천천히 되돌아온 권기영은, 여전히 불온한 느낌이 몸에 들러붙어 있는 것 같아 차라리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때다.
“인가와 동떨어진 산기슭에 있어서인지, 몹시 조용하군요. 숨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담담하고 낮은 김건준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흘러왔다. 그 순간 정체 모를 어떠한 것이 그 남자로 탈바꿈한 것 같았다. 권기영은 움칫 힘이 들어간 어깨에서 천천히 힘을 뺀다.
“……예.”
“세상에 둘만 남아 있는 것 같아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이유 모를 소름이 끼쳤다. 순식간에 신경이 곤두서 절로 손에 힘이 들어간 그 순간.
멀찍이서 뭔가 와장창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어렴풋이 한신주가 투덜거리는 소리도 섞이는 듯했다. 뭔가를 떨어뜨린 모양이다.
세상에 둘만 남아, 그 말이 주문이라도 되는 듯 일순 기괴한 기분에 사로잡혔던 권기영의 눈앞에 불현듯 천장이 보였다. 실제로는 여전히 칠흑 같은 어둠이 방안을 가득 메워 시각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지만, 그러나 눈앞으로 다시 시야가 돌아온 것 같았다.
동시에 권기영은 현실에 내동댕이쳐졌다. 아무 일도 없이 안온한 현실에.
잠시 천장을 노려보던 권기영은 허, 어깨에서 힘을 빼며 낮게 웃고 말았다. 그 여상한 현실에서 옆에 누워 있던 김건준도 무슨 생각을 하던 참인지 조용히 웃는 기척이 났다.
“오래전에, 세상에 둘만 남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독차지하고 싶은 사람이 있었거든요. 나만 보고, 나만 듣고, 나만 만지고.”
풋풋하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던지 김건준은 담담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은 그 목소리를 들으며 권기영은 잠시 사이를 두고 “어릴 때 첫사랑을 겪을 때는 흔히들 그렇다고 하니까요.”라고 대꾸했다. 김건준이 이쪽을 돌아보는 기척이 났다.
“기영 씨도 그랬던 적이 있습니까?”
권기영은 건성으로 대꾸하던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볼 필요도 없이 “없습니다.”라고 대답은 바로 나왔다.
“눈에 든다 싶은 사람에게 말을 걸면 다들 넘어왔으니까요.”
“굉장한데요. 하긴 기영 씨쯤 되면 싫다는 사람이 더 이상하겠지만 말입니다.”
김건준이 감탄스럽게 웃으며 덧붙이는 말에 권기영은 “그보다는” 하고 대꾸했다.
“제게 끌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에게는 저도 애초에 관심이 안 가요. 보면 알거든요.”
그렇다. 그런 건 보면 알 수 있었다. 아아, 되겠다, 하고. 이를테면 한신주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클럽에서 마주쳤을 때 직감적으로 이놈은 오늘 밤에라도 다리를 벌릴 거라는 걸 알았다.
그런 건 왠지 알 수 있었다. 여자뿐 아니라 남자도, 심지어 게이클럽이 아닌 일반적인 자리에서 마주친 남자라 해도 금방 감이 왔다. 눈이 마주친 그 순간 직감적으로 ‘될지 안 될지’ 알아차렸고, 그 직감이 빗나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기영 씨는 사귀었던 분이 많으신가 봅니다.”
“글쎄요……, 아마도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분은 없습니까?”
권기영은 입을 다물었다. 사귀었다고 할 만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같이 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그 가운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
누가 있었던가. 아마 없지는 않았을 거다. 말마따나 같이 잔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그 중 기억에 남는 사람이라면,
“――.”
아니. 권기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그런 건 기억할 필요 없다.
기억 속에 어둑하게 그늘이 드리우며, 대신 그 대답이 돌아왔다. 굳이 기억할 필요 따위는 없잖아. 그래. 그럴 필요 없다.
“글쎄요. 일일이 기억할 만큼 특별한 사람은 별로……. 사람을 만나서 하는 일이란 게 대체로 비슷비슷하니까요.”
권기영이 말하자 어둠 속에서는 그런가요, 하고 웃는 소리가 돌아왔다. 권기영은 문득 언짢아졌다.
“건준 씨는 어떠십니까?”
냉담한 물음에 대한 대답은 넉넉하게 사이를 두고 돌아왔지만 망설이는 빛은 없었다.
“모두 기억합니다. 기억에 남은 게 한 사람이거든요.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걸 기억하죠. 내게 무슨 말을 했는지, 그 말을 할 때 눈빛이 어땠는지, 어떤 목소리에 어떤 말투였는지.”
어렴풋하게 말꼬리가 흐려진 그 목소리는 마지막에 ‘모두 다.’, 그렇게 속삭인 것 같았다. 왠지 순간적으로 말이 나오지 않아 어둠 너머로 보이지 않는 김건준을 쳐다본 권기영은 “누나가 들으면 슬퍼하겠군요.”라고 생각에도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김건준이 낮게 웃는다.
조용히 오가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어둠 속에서 방문이 열리며 한신주가 들어왔다. 바깥에서 스며드는 달빛이 사람 그림자를 떠올렸다가 이내 다시 칠흑으로 잠긴다.
“벌써들 자요? 그런데 내 자리는 어디야? 아무 데서나 자면 되나?”
정적을 깬 낭랑한 목소리는 권기영이 “넌 이쪽.” 하고 말하는 대로, 더듬더듬 김건준의 반대쪽 벽가로 갔다. 난 아직 잠 안 오는데, 하고 투덜거리면서도 얌전히 눕는다.
“밤이라 그런지 밖엔 무지 춥네요. 세수하는데 얼굴 떨어져나가는 줄 알았어. 어우――, 아까 건준 씨 정말 추웠겠어요. 지금은 괜찮아요? 옷도 없이 이불 한 겹만 덮고 자면 추울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조금 쌀쌀하긴 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아요. 게다가 저는 잠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르게 깊이 자기 때문에, 추운 줄도 모르고 잘걸요.”
업어 가도 모르게, 하고 웃음 섞어 중얼거린 한신주가 가만히 손을 뻗어 바로 옆에 누워 있던 권기영의 이불 속을 소리 없이 더듬었다. 서슴없이 사타구니를 그러쥐는 그 손을, 권기영은 대번에 단호하게 떨쳐 냈다. “확실히 불빛 하나 없는 산자락이라 그런지 밤이 되어 불을 끄니까 아무것도 안 보이네요.”라고 아무렇지 않은 듯 중얼거리는 말 너머로 한신주는 조그맣게 키득거린다.
권기영은 나직이 “좋은 밤들 되십시오.”라고 잘라 말했다. 이 미친놈을 데리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하고 속으로 욕을 씹는다. 이어 김건준도 선선히 “두 분 다 좋은 꿈꾸세요.”라고 인사를 했고, 한신주도 잠기운이라곤 없는 목소리로나마 “좋은 밤요.”라고 중얼거린다.
곧 방에는 정적이 돌아왔다. 가끔 누군가 몸을 뒤척이는지 이불자락 스치는 소리 따위가 나긴 했지만 그조차 이내 사라지고, 방 안에는 완전한 어둠과 같은 완전한 정적이 깔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결에 권기영의 왼편, 김건준이 누운 곳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피곤도 했을 거다. 새벽같이 일어나 차를 몰고 내려와 볼일을 보고, 오후에는 잠시 쉬지도 못하고 누이와 산을 거닐다 왔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빠져 체온도 한껏 빼앗겼을 테니, 물 먹은 솜처럼 늘어져 잔다 해도 이상할 것 없다. 산책도, 야트막한 뒷산을 거닐다 오는 것치곤 퍽 오래 하지 않았던가. 신주였더라면 그 사이사이 서너 번은 족히 사타구니를 문질러 댔을 정도로 오래.
“…….”
불현듯 불쑥 생각이 들었다. 이 남자는 누이와 잤을까.
저 누이가 누군가와 벗고 뒹굴며 교성을 질러 대는 모습 같은 건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러나 능히 그럴 수 있다. 아니 그랬을 것이다. 이미 몇 번, 몇십 번 몸을 섞었을지 몰랐다.
이 남자는 어떤 섹스를 할까. 정성껏 다정하게 애무를 하면서 여자를 위로할 것 같다. 누이와 이야기를 나눌 때 그러는 것처럼 상냥하고 부드럽게. 그래. 저 너른 가슴에 여자를 든든한 팔로 끌어안고, 그의 우악스런 성기가 여자를 다치지 않도록 정성 어린 전희를 충분히 한 뒤 조심스럽게 파고들겠지. 그런 뒤 여자에게 즐거움을 줄 것이다. 여자를 울리며, 쾌락에 들뜨게 만들며, 희열을 끌어낼 것이다. 넋 놓은 교성과 탄성을 귀에 담을 것이다.
“…―.”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섹스를 할지, 심지어는 자신의 누이와 그 남자가 섹스를 하는 장면이라니. 상상해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조차 없었다.
그러나 일단 머릿속에 불쑥 떠오른 생각은 지워지지 않고 이어졌고, 그 안에서 이 남자는 아까 보았던 그 건장한 몸에 땀방울을 떠올리며 거칠게 허리를 놀리고 있었다. 묵직하면서도 날렵한 선을 그리는 근육 위로 한 방울, 두 방울, 거기에 섞이는 거칠고 더운 숨결.
호흡이 얼핏 들떴다. 권기영은 욱신 더워지는 심장을 식히려 긴 숨을 들이쉬었다. 쿵, 쿵, 심장의 열기가 아랫도리로 전해진다.
그때 옆에서 한신주가 꿈틀거리는 작은 기척이 났다. 귀를 기울이자 숨결이 희미하게 들떠 있었다. 이불 속에서의 작은 움직임이며 호흡, 흥분해 있는 게 틀림없었다. 뭘 떠올렸는지 몰라도 권기영보다 덜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윽고 더 이상은 견디지 못한 듯 한신주가 조금씩 꿈지럭거리며 권기영의 이불로 파고들었다. 더운 체온과 함께 귓가에 훅 끼치는 숨결, 그보다 더 뜨겁게 허벅지 위를 지그시 누르는 발기된 성기.
‘기영 씨. 하자. 하고 싶어.’
정신 나간 놈, 권기영은 귓가에 입을 바싹 대고 속삭이는 한신주를 팔꿈치로 밀어 버렸다. 그러나 그 몸짓에 제대로 힘이 실리지 않았던 건 권기영 역시 아랫도리가 고동치기 시작한 탓이었고, 눈치가 귀신같은 이 섹스광이 그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었다. 도리어 더 바싹 달라붙으며 얼른 손을 뻗어 권기영의 성기를 쥐고 훑어 올리기 시작했다.
‘제발. 응? 구멍 속에 개미들이 수천 마리는 들락거리는 것 같아. 응, 나 미칠 것 같아. 제발.’
‘너랑 나만 있는 게 아니잖아, 미친 새끼.’
‘조용히 할게. 괜찮아. 안 깰 거야. 잠들면 안 깬다고 했잖아. 게다가 어차피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여.’
한신주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다. 권기영의 몸에 허겁지겁 올라가 엎드려, 반쯤밖에 발기하지 않은 그의 성기를 다급하게 자신의 엉덩이 사이로 들이밀었다. 굶주린 아귀 같은 아랫입이 순식간에 권기영의 성기를 먹어 치운다.
권기영은 한신주를 떠밀어 버리려다 도중에 멈추고 말았다. 미친 듯이 엉덩이를 흔들며 성기를 조여 대는 몸짓에, 이미 기묘한 감각에 감싸여 있던 권기영은 곧 흥분하고 말았던 것이다. 마치, 새파랗게 곤두선 신경이 모두 다 흥분으로 몰린 것처럼 이상할 정도로 달아오르고 만다.
‘이 화냥년, 갈보 새끼야……!’
권기영은 욕설을 지껄이며 허리를 추어올렸다. 하악, 한신주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제법 커 권기영은 순간 움직임을 멈춘다. 귀를 기울이자 왼쪽에서는 여전히 규칙적이고 긴 숨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곧 소리 없는 추삽질이 시작되었다. 한신주는 억지로 소리를 참으며 숨만 들이켜면서도 그 상황이 더욱 흥분되는지 미친 듯이 엉덩이를 들썩였고, 그의 허리를 움켜쥔 권기영은 벌써 질퍽거리기 시작하는 그의 아랫도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새카만 시야. 조그맣게 울려 대는 젖은 소리, 억누른 숨결, 뜨겁게 달아오른 공기.
그 속에서 권기영의 머리도 마비된 것 같았다. 몸으로는 한신주의 엉덩이를 쳐올려 대면서도 신경은 계속해서 왼쪽의 기척으로 열어 둔 채 그 깊고 고른 숨결을 끊임없이 확인한다.
자신도 약간은 이성적인 상태를 벗어난 것 같았다. 평소라면 이럴 리 없다. 실수를 할 여지는 애초에 만들지 않는 게 권기영이라는 인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다음 순간 들킬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권기영은 분명하게 흥분하고 있었다. 평소보다 더. 온 신경을 옆에 누운 남자에게로 열어 둔 채.
그러는 동안 뜨겁게 달아오른 몸이 이윽고 절정을 맞을 즈음에는, 자신이 섹스를 하는 상대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어졌다.
*
뒷자리에는 누이와 한신주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리어미러로 흘끔 쳐다보자 한신주의 옆에서 냉랭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누이는 어느 결에 잠들어 있었다. 한신주 역시 창문에 머리를 박고 자고 있다.
“기영 씨도 피곤하시면 좀 주무세요.”
리어미러로 그들을 쳐다본 권기영의 기척을 눈치챘는지 김건준이 시선을 주며 말했다.
“아닙니다. 건준 씨야말로 피곤하실 텐데, 다음 휴게소에 잠깐 들러 자리를 바꾸죠. 거기서부터는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애초에 누이가 권기영에게 조수석을 내어 주며 일렀던 게 그거였다. 도중에 바꿔서 운전을 하라는 그 말을 들으며, 권기영은 누이가 이 남자에게 빠지긴 빠진 모양이라고 코웃음 쳤다.
“이 정도 운전하는 것쯤은 괜찮습니다. 사업을 막 시작했었던 무렵에는 몇 주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하루 종일 운전하다시피 해서 전국을 돌아다니기도 했었는걸요.”
김건준은 웃으며 말했다. 눈치를 보건대 별다른 이유가 있지 않은 한은 운전대를 넘길 것 같지 않다. 이럴 거였더라면 굳이 자신이 조수석에 앉을 필요는 없었을걸, 하고 생각한 권기영이었지만, 누이가 조수석에서 냉랭한 눈매로 새침하게 앉아 있느니 차라리 뒷자리에서 잠들어 있는 게 낫다고 생각을 고쳤다.
권기영은 뻐근한 목을 까닥였다. 어제는 잠을 설쳤다. 모두 한신주의 탓이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는 저놈을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자리에 데리고 가지는 않을 것이다.
“어제 별로 못 주무셨죠.”
그때 김건준이 불쑥 말했다. 권기영은 멈칫했지만 이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원래 잠자리가 바뀌면 깊이 못 잡니다. 건준 씨는 깨지도 않고 잘 주무시더군요.”
“예, 잠자리를 가리지 않는 편이라서요. 어디서든 푹 잘 자는 편입니다.”
거울에 비친 김건준은 여상한 기색이었다. 눈가에 담긴 웃음도 잔잔한 목소리도 평소와 다를 바 없다. 권기영은 그를 살피던 시선을 돌려 창밖을 보았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한편으로는 날카롭게 날이 서다 못해 지친 신경은 아무렴 어때, 라고 내뱉고 있었다. 알든 모르든, 설령 아는 거라 해도 지금의 김건준을 보아선 모른 척할 눈치다. 그렇다면 무슨 상관일까. 이런 식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게 오히려 자신답지 않았다.
실제로 잠자리를 가리기도 하는 권기영이 그나마 눈을 붙인 건 새벽녘이 되어 장지문이 푸르스름해지기 시작했을 즈음이었다. 얼핏 선잠이 든 것처럼 의식을 잃은 게 정확히 언제쯤인지는 모르겠다.
어느 때인가 권기영은 무의식 위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을 느꼈다. 손가락 몇 개만으로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쓰다듬는 손길이 낯익었다. 예전에 이런 식으로 머리칼을 쓰다듬는 사람이 있었다. 이미 아주 오래전이었는데, 권기영이 짜증스럽게 눈을 부라리면 이내 아쉬운 듯 떨어지곤 했었다.
새벽에 든 선잠은 몹시 선명하다고 하더니, 그 말이 정말이었던가 보다. 불현듯 번뜩 눈을 뜬 권기영의 머리맡에는 아무도 없었다. 막 방금까지도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던 손은 바깥에서 평화로운 인기척이 들려오는 아침 공기 속에서 이슬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남아 있는 기척이라곤 옆에서 정신없이 곯아떨어져 있는 한신주뿐.
“…….”
권기영은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 탓이다. 아침부터 줄곧 기분이 좋지 않은 건. 현실처럼 선명하게 새겨진 꿈이 계속 언짢게 어른거리고 있었다.
누구였더라. 오래전 가볍게 놀았던 누구였을 텐데. 그래, 퍽 오래전, 아직 고교를 다니고 있었던 때. 혹은 갓 졸업했을 즈음.
그러니까 그게―….
“새벽에 눈을 뜨기 직전에 꾸는 꿈은 예지몽이라고, 어릴 적에 저희 할머니께서 그러셨었죠. 그래서 눈을 뜨자마자 금세 잊어버리고 만다고.”
순간 심장이 싸늘하게 식었다.
권기영은 표정 없는 얼굴을 돌려 김건준을 본다. 여상한 얼굴로 앞을 보며 운전하고 있던 김건준은 그런 권기영을 보곤 왜 그러냐는 듯 의아한 얼굴을 한다.
우연이겠지만 마치 속마음을 읽어 낸 것 같은 타이밍이다. 권기영은 그래요? 라고 가볍게 대꾸하며 다시 시선을 돌렸다. 순간적이나마 표정을 가눌 수 없었다. “갑자기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태연한 투로 그렇게 말하는 게 고작이었다. 김건준은 웃으며 말했다.
“새벽에 꿈을 꿨거든요. 금방 잊어버리지도 않도록 생생한 꿈이었어요. 그러니까 문득 할머니의 그 말씀이 떠오르더군요.”
“좋은 꿈이었나 보죠.”
김건준은 말없이 웃었다. 한동안 기다려도 대답할 것 같지 않아 권기영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새벽 꿈 운운하는 말에 지레 놀랐지만 스스로를 두고 하는 말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예지몽이라. 노인들의 미신에 지나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다. 그럼에도 권기영은 머리를 무겁게 누르는 불쾌한 감각 속에서 낯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역시 이 망할 여행에 같이 오는 게 아니었어.
속으로 욕설을 지껄이며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권기영의 귀에, 문득 김건준의 혼잣말 같은 속삭임이 닿았다.
“탐스럽게 농익어 벌어진 과실에서 꿀 같은 물이 떨어지는 꿈이었지요. 오래 기다린 갈증 따위는 단번에 해갈되도록 단물이.”
그 말을 끝으로 김건준은 입을 다물었다. 권기영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한동안 그의 입가에 어렴풋이 맺힌 웃음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