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권기영은 자신보다 두 살 많은 누이를 좋게 여겨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매사에 결벽증이 있는 것처럼 딱 부러지고 반듯한 누이는 허술한 정감이라곤 없었고 쌀쌀맞았다. 권기영 역시 살갑고 다감한 성격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누이와는 한집에 살면서도 데면데면하게 지내 왔다.
어머니를 닮아 생김새는 곱지만 얼음꽃 같은 누이의 결혼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을 때, 권기영으로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긴 했지만 저 여자가 선뜻 결혼을 하겠다고 호감을 비칠 만한 사람이라니 어떤 남자일지 궁금해지긴 했다. 하긴 누이의 배경과 연을 맺고자 하는 숱한 혼담들 가운데 아버지가 깐깐하게 고르고 골랐을 테니 어련할까만, 그렇게 잘 골라낸 남자들과 몇 차례나 선을 보면서도 딱히 내키는 빛을 보이지 않았던 누이가 처음으로 새침한 얼굴에 홍조를 띠는 상대인 것이다.
하지만, 권기영은 그 남자가 조금 궁금하긴 해도 일부러 시간 내어 만나 보고 싶을 만큼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다.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 냉랭하고 삭막한 쪽에 가까운 누이와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누이와 결혼해 매형이 될 사람과도 가족이라는 형식적인 이름만 쓰고 살아가게 될 터였다.
그래서 매형이 될 남자를 권기영이 처음으로 만난 것은 결혼이 결정되어 상견례도 마치고 결혼식 날짜까지 잡히고 난 뒤였다. 그나마 미리 만나 두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없었더라면, 굳이 그 남자가 보고 싶지도 궁금하지도 않았던 권기영은 결혼식 당일에 매형의 얼굴을 처음 보았을지도 몰랐다.
주말의 저녁 시간을 빼기는 귀찮았지만 오늘 보고 나면 결혼식 날까지 다시 볼 일은 없을 터였고 누이와 더불어 셋이서 한두 시간 식사나 하는 것쯤이야 집안사람으로서의 의무치고는 가벼운 일이었다. 귀찮기는 했으나 싫다고 할 만한 일은 아니었고, 게다가 어찌 되었든 누이와 결혼한다는 남자가 궁금하기도 했던 것이다.
남의 일에는 관심이 없는 권기영이었지만 그 남자는 궁금할 만도 했다. 몇 마디 들은 바로만 따지자면 그 남자는 도무지 아버지의 눈에 찰 만한 조건이 아니었다. 듣기로는 몇 년 전에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도 몸이 안 좋아 요양원에 들어가 있어 상견례 자리에도 그 남자 본인만 나왔다고 했다. 집은 썩 잘 살았었다고 하지만 부친을 여읜 뒤로는 퍽 쇠락해, 그것만으로도 남자는 세속적이고 세간 평판을 중시하는 권기영의 아버지가 흡족해할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남자는 누이보다, 심지어 권기영보다도 나이가 적다고 했다. 그러한 제반 조건들은 도저히 아버지가 사윗감으로 흔쾌히 맞이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이에게 아버지가 먼저 그 선 자리를 내밀었다. 필히 크게 될 사내라고 감탄하며, 저런 조건임에도 사위로 욕심을 내는 걸 보니 어지간히 유능한 사람이리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래서 권기영도 그 남자에게 크지는 않으나마 호기심이 일기는 했었는데――.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김건준이라고 합니다.”
한 손을 내밀며 웃음 짓는 그 남자를 권기영은 짧은 순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한 박자 늦게야 남자의 손을 맞잡으며 “처음 뵙겠습니다. 권기영입니다.”라고 인사를 하면서도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뭐랄까.
생각과 달랐다.
아버지에게 스쳐 가며 들었던 말로는, 야심이 있고 무서울 만큼 똑똑한 사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권기영이 머릿속에 떠올린 것은 보다 철두철미하고 확고한 인상이었다. 혹은 권기영 자신이 종종 주위 사람들에게 듣는 것처럼, 냉정하고 날카로운 인상이거나.
그러나 눈앞에서는 부드럽게 굽어진 눈초리에 담담하게 올라간 입매를 가진, 소위 선뜻 호감이 갈 만한 다정한 얼굴이 웃음 짓고 있었다.
“…….”
권기영은 자리에 앉으며 자신의 건너편에 누이와 나란히 앉는 남자를 다시 살폈다. 무난한 은테안경에 수수하지만 질 좋은 양복, 인상 좋고 유순해 보이는――평범한 남자다.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권기영이 처음으로 느끼는 낯선 기분이었다. 그것은 2, 3할쯤의 실망감과 나머지 7, 8할쯤의 이상한 기시감이다.
실망감은, 조금 더 이야기를 해 봐야 알겠지만, 남자에게서 처음 받은 인상에 대한 기분이었다. 권기영은 이곳에 나와 막상 남자를 마주치기 전까지, 자신이 머릿속에 마음대로 떠올린 그 ‘야심차고 무섭도록 똑똑한 사내’에 대해 어떠한 호승심을 품고 있었다. 어디 얼마나 잘난 놈인지 보자, 그런 류의.
그러나 눈앞에 앉은 남자는 권기영의 그런 기색에 거울처럼 맞서 호승심을 북돋우기는커녕, 처음 보는 사람들은 으레 불편해하는 권기영의 날카로운 시선에도 사람 좋은 웃음을 띠며 부드럽게 말을 걸고 있었다.
“전부터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보니까, 기윤 씨랑 많이 닮으셨네요.”
권기영은 남자의 옆에 앉은 누이를 흘끔 쳐다보았다. 언뜻 시선이 마주친 누이의 기색과 마찬가지로 권기영도 그 말이 별로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예, 그런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 하고 적당히 대꾸했다.
옆에서 누이가 “기영이랑 저는 외탁을 했거든요. 막냇동생만 아버지를 닮았어요.”라고 덧붙였다.
“막냇동생이라면 기철 씨요? 지금 보스턴에서 유학 중이라고 했었죠. 기철 씨도 만나 뵐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남자가 대답하는 말을 들으며 권기영은 속으로 코웃음 쳤다. 만나 본 적도 없는 사람의 이름까지 스스럼없이 부르다니, 넉살 하나는 좋은 모양이다.
“아직 과정이 많이 남아서 몇 년은 못 들어오겠지만, 누나가 결혼을 하면 식에 참석하러 잠시 들어오긴 할 겁니다. 그때 보시면 되죠. 그런데, ××년생이라고 하셨던가요?”
권기영은 거침없이 물었다. 누이의 얼굴에서 살짝 웃음이 사라지는 게 시야 끝으로 보였다. 아무리 남자가 마음에 든다 한들 세간의 눈이나 체면을 아버지만큼이나 중시하는 누이에게는 따끔한 물음일 터였다. 차갑게 권기영을 노려보는 그녀의 시선에서 권기영은 얼핏 유쾌감마저 느꼈지만, 남자는 전혀 아랑곳 않고 순순히 웃으며 “예, 맞습니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권기영은 잠시 침묵했다.
그렇다면 동생과 같은 나이다.
자신보다 어린 매형이라. 나이 어린 손윗사람이 생길 줄은 몰랐는데.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스럽게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건설 쪽으로 사업을 하신다고요.”
“예. 정확하게 말하자면 철강 쪽 일이지만 대체적으로 같이 일하는 쪽이 건설업계이긴 합니다.”
남자는 웃으며 안경테를 약간 밀어 올렸다. 권기영은 그가 말을 잇기를 잠시 기다렸지만 남자는 “기영 씨는 아버님 일을 돕고 계시다면서요.”라며 화제를 권기영에게 돌렸다. 바로 얼마 전에 규모는 작으나 기반이 튼튼한 중소 물류유통업체까지 인수하는 등, 사업을 빈틈없이 키워나가고 있다는 말을 아버지에게 들었었지만, 이 남자는 자신의 업적을 자랑처럼 흘릴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예, 맞습니다.”
권기영이 짤막하게 대답을 했을 때 문을 열고 종업원이 들어왔다. 손 닦을 수건을 내려놓고 나가는 동안 잠시 침묵이 흐른다.
동갑이라도 기철이보다는 훨씬 어른스럽군. 하긴 그놈이 터무니없이 어리게 구는 편이긴 하다. 텅 빈 머리에 뭘 채워 넣는 법이라고는 모르는 놈이니.
권기영은 이미 오래 전에 해외로 나가 가끔 명절 같은 때에나 보곤 하는 동생을 떠올리며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같은 나이인데도 한 사람은 제 손으로 사업을 불길처럼 일궈내고 있음에 반해 또 한 사람은 부모를 잘 둔 덕에 돈을 물 쓰듯 낭비하며 시간을 버리고 있다.
그래, 나이로만 사람을 판단할 건 아니지.
권기영은 따뜻한 김이 오르는 수건으로 천천히 손을 닦는 남자를 가만히 살폈다.
그리 특이할 것 없이 인상 좋고 부드러워 보이는 평범한 남자다. 그것뿐이다. 자신에게 비굴한 호의도 비뚤어진 적의도 비치지 않는 그에게 딱히 특기할 만한 점은 없었다.
그런데도.
권기영은 남자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뭘까. 이 느낌은.
아까부터 이상한 기시감이 들고 있었다. 무어라 딱 꼬집어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하게 마음속을 갉작거리는 듯한 느낌이다.
“김건준 씨.”
음절 하나하나를 천천히 발음해 남자의 이름을 입에 담아 본다.
수건을 깔끔하게 접어 다시 내려놓던 남자가 권기영에게로 시선을 들었다.
“어디서 뵌 적이 있었던가요?”
스스로에게도 그 물음을 던져 보며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권기영을, 남자는 습관인 것처럼 연한 웃음이 떠오른 표정을 아주 약간 기울이며 말없이 마주 보았다. 어디서 본 적이 있었던가 기억을 되짚는지, 부담스러울 정도로 정면에서 쏟아지는 시선이 권기영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기분 탓인가. 혹은 설령 만났던 적이 있다 한들 피차 기억을 못할 만큼 사소한 스침이었더라면 구태여 기억해 낼 필요까지는 없다.
‘아니, 됐습니다.’라고 권기영이 가볍게 손을 저으려고 하던 때였다. 남자의 입매가 아주 희미하게 올라간 듯했다. 정말로 올라간 건지 아니면 그것이야말로 기분 탓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얼핏. 그리고 딱 그만큼 눈가에 실린 웃음도 짙어진 듯했다.
순간, 이유도 없이 가슴이 서늘하게 식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삼킨 싸늘한 것이 뒤늦게 가슴속을 타고 미끄러지는 것 같았다.
“글쎄요. 어디서 뵈었던가요?”
이윽고 남자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듯 난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을 때 권기영은 “아니요, 제가 착각했나 봅니다.”라고 단정 지었다.
생경하고 낯선 기분이었다. 신경에 어렴풋이 날이 서는 묵직한 느낌. 그래. 기분 탓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느낌이 드는 사람은 만났던 적이 없다.
권기영은 물잔을 들어 마른 입안을 적시며 말없이 남자를 보았다. 누이와 다정하게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듯 간간이 낮은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는 남자의 그 모습에는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권기영에게 역시 지나치게 잦지도, 뜸하지도 않게 말을 거는 남자는 본디 상냥하고 넉넉한 사람인 듯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기영은 이 남자가 별로 좋아지지 않을 것 같았다.
무딘 날이 느리게 신경을 누르며 갉작거리는 느낌이 이어지고 있었다. 슬쩍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뭔가 묵직하게 얹힌 느낌이다.
“저 잠시 화장실에 좀.”
권기영은 짤막하게 양해를 구하고 일어섰다. 흘끔 권기영을 쳐다보는 누이의 눈매가 샐쭉하다. 권기영이 이 자리를 내켜 하지 않는다는 걸 금방 알아챈 탓이다. 곁눈으로 흘긋 싸늘한 시선을 주는 누이를 그 눈길 그대로 똑바로 마주 봐 준 권기영은, 누이가 소리 없는 코웃음을 치며 눈을 돌린 다음에야 돌아섰다.
갑자기 짜증이 솟았다.
이런 자리에 오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 하지만 이걸로 됐다. 어차피 결혼 전에 한 번쯤 얼굴을 마주하긴 했어야 한다. 의무는 채웠으니 결혼 전에 다시 볼 일은 없겠지.
신경질적으로 화장실에 들어간 권기영은 벽에 붙어 있는 금연이라는 글자를 무시하고 담배를 피워 물며 빈칸으로 들어갔다. 두세 모금쯤 빨고 나자 그제야 가벼운 멀미처럼 울렁거리던 속이 좀 가라앉았다.
“…….”
분명 낯이 익었다. 어쩌면 어디선가 이야기 한마디쯤 나누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권기영을 아는 사람은 수없이 많았지만 권기영이 아는 사람은 그 중 거의 비율을 차지하지 않았다. 권기영의 얼굴과 이름을 알며 한 번이라도 말을 붙여 보고 싶어 다가왔던 그 무수한 사람들을 그가 일일이 기억할 도리는 없었다.
권기영은 담배 한 대가 다 타 버릴 때까지 천장을 노려보면서 기억을 더듬었지만 결국 짚이는 데가 없어, 변기 안에 꽁초를 버리며 혀를 찼다.
그만두자. 어디서 봤다 한들 기억도 못할 정도라면, 다시 만나 봐야 처음 보는 것과 진배없다.
권기영은 변기 물을 내리며, 그 물과 함께 미심쩍은 기분도 같이 흘려버리기로 했다.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하지만 기억도 나지 않는 머릿속을 더듬길 그만두어도 어딘지 모르게 개운찮은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문에 붙어 있는 거울에 비친 사람과 지그시 눈싸움을 하던 권기영은, 이런 기분을 털어 버리려 할 때 으레 그러듯 전화를 꺼내어 들었다.
손목시계를 들어 시각을 확인하는 사이에 상대가 전화를 받는다.
「응. 웬일이야?」
“오늘 뭐 해? 밤에 보자.”
밝게 대답하는 목소리 뒤로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들렸다. 짤막하게 용건을 말하는 권기영의 말소리가 잘 안 들렸는지 「뭐?」 하고 되물은 목소리는, 「오늘 저녁에 매형감 만나서 같이 식사한다고 했었잖아? 안 만났어?」라고 다시 묻는다.
“지금 만나고 있지만 오래 안 걸릴 거야. 한 시간쯤. 하얏트에서 보자.”
슬쩍 다시 짜증이 일렁인 권기영은 잘라 말했다. 그 짜증이 전화 너머까지 전해졌는지 잠시 침묵하던 목소리는 곤란한 듯 「오늘 기영 씨 저녁에 예정 있다 그래서 다른 약속 잡아 놨단 말이야.」 하고 투덜거렸다.
“그래서. 싫어?”
「……아냐. 한 시간 뒤에 하얏트, 알았어.」
권기영이 차갑게 말끝을 올리자 목소리는 금세 포기한 듯, 볼멘소리긴 했지만 선선히 응낙했다. 곧 전화가 끊어진다. 권기영은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그를 만나 뒹굴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이런 자리 따위 적당히 인사치레 정도나 하고 얼른 일어서야겠다. 어차피 저쪽도 좋아서 나온 자리는 아닐 터였다.
권기영은 화장실 칸 문을 열고 나가 세면대 쪽으로 걸음을 내딛다가 멈칫하고 말았다.
전화를 하느라 미처 소리를 못 들었던 모양이다. 어느 사이에 들어왔는지 남자, 김건준이 막 소변기를 앞에 두고 서는 참이었다. 사람의 기척에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
“낯빛이 별로 안 좋아 보이던데, 괜찮으십니까?”
눈인사를 하며 말을 붙이는 그에게, 권기영은 잠시 사이를 두고 예, 하고 대답했다.
권기영이 서 있는 위치에서는 김건준의 옆모습이 정면으로 보였다. 김건준은 거리낌 없이 퍼스너를 내리며 “이번 주 내도록 바쁘셨다면서요. 피곤하시겠어요.”라고 말을 잇고 있었다. 예, 조금, 하고 대답하면서도 권기영의 시선은 어느 결에 아래로 떨어졌다.
열린 앞춤 사이로 김건준이 꺼낸 물건이 시야에 들어왔다. 옷자락 사이로 불툭 고개를 내민 거뭇한 살덩이가 그의 큼직한 손아귀에 빠듯하게 잡혀 있었다. 묵직하게 늘어진 성기의 굵직한 줄기에 언뜻 떠오른 핏줄이며 완전히 벗겨져 머리를 내밀고 있는 귀두 따위가 눈에 들어온다.
“어제는 창원 쪽으로 다녀오셨다는 것 같던데, 당일치기로 다녀오시기엔 좀 먼 거리였죠?”
“……예. 그래도 대진고속도로가 새로 개통된 뒤로는 오가는 시간이 줄어서 좀 낫더군요.”
권기영은 김건준의 뒤를 스쳐 세면대 앞에 섰다. 손 위로 쏟아지는 물줄기의 소리에 곧 투두둑, 소변기를 두드리는 커다란 물소리가 섞였다.
아아, 대진고속도로요, 그러고 보니 거기 휴게소의 가락국수가 맛있던데요, 하고 이야기를 이어가는 그의 말에 권기영은 그런가요, 그렇군요, 하고 짤막짤막하게 대꾸했다.
가라앉아 가는 듯하던 초조한 느낌이 다시 날을 세우기 시작하고 있었다. 신경이 곤두선다.
손을 씻고 물을 잠가도 김건준에게서 들려오는 물소리는 멎지 않았다. 무겁게 쏟아지며 계속되는 물소리에, 권기영은 흘끗 그를 곁눈으로 본다. 그제야 겨우 잦아들던 소리가 이윽고 그치고, 김건준은 아래를 가볍게 털어 내었다. 성기가 묵직하게 꺼덕거렸다. 느릿하게 흔들리는 성기에서 얼른 시선을 거둔 권기영은 티슈페이퍼를 뽑아 젖은 손을 닦았다. 조금씩 더 속이 초조하게 울렁거리고 있었다.
“……보다는 하행선 방향으로 있는 휴게소가 더 나아요. 일 마치고 느긋하게 올라오는 길에 들러서 먹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죠.”
김건준은 다시 퍼스너를 올리고 바지춤을 정돈했다. 그런 뒤에야 천천히 고개를 돌려 권기영을 보았다. 신경질적으로 손을 닦으며 시선을 떨어뜨리고 있던 권기영은 한 뜸 뒤늦게 그를 마주 보며 예, 하고 냉정하게 대꾸했다.
“먼저 가 있겠습니다.”
권기영은 세면대로 다가오는 그에게 그 말만 하곤 화장실에서 나왔다.
뭐지. 뭔가. 자꾸 날이 곤두선다. 심지어는, 김건준은 별반 권기영을 보고 있지 않았는데도 어쩐지 권기영은 그가 자신의 모습을 처음부터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보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자리로 돌아오자 이미 식사가 나와 있었다. 상 가득 올라 있는 한정식을 앞두고 누이는 홀로 앉아 그들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권기영을 흘끔 올려다본 그녀는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걸지 않았다. 그 냉담한 무시를 마찬가지로 냉담하게 무시하며 권기영은 말했다.
“식사만 마치고 바로 일어서야겠어. 약속이 생겼어.”
누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권기영을 노려보았지만 이내 “좋을 대로 하렴.” 하고 대꾸하곤 입을 다물었다.
다시 대화가 끊인다. 기분이 상하기도 했을 테지만 그들 둘만 있으면서 나눌 만한 이야기라곤 하나도 없었다.
서로 속속들이 아는 가족이란 이럴 때 시간을 때우기 위해 쓸데없는 이야기나 바보같이 지껄여 댈 필요가 없다는 점만큼은 편하다.
권기영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김건준이 자리로 돌아왔다.
“벌써 식사가 나왔군요. 아, 저 기다리시느라 아직 안 드셨던 겁니까? 먼저 드셨어도 되는데요.”
고맙습니다, 하고 김건준이 권기영과 누이에게 눈인사를 하고 앉은 뒤에야 식사가 시작되었다.
적당히 식사를 마쳐 갈 즈음 그만 자리를 떠야 한다고 이야기를 해야겠다, 권기영은 적절한 시기를 가늠하며 조용히 식사를 했다. 가끔 김건준이 말을 걸 때에나 대꾸를 하며, 주로 그와 누이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듣기만 했다.
이렇게 보고 있으면 특이하게 거슬리는 부분은 없는 남자였다. 무난하게 인상 좋고 말투도 부드럽다. 별달리 기억에 남길 일 없이 평이하게 스쳐 갈 수는 있을지언정, 굳이 머릿속에서 까끌거리는 감각이 일 이유는 없었다.
그래, 그냥 오늘은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과민해졌을 뿐이야.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가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약속 있으시다는 것 같던데, 시간은 괜찮으십니까?”
권기영이 막 젓가락을 내려놓고 숭늉 그릇을 집어 들었을 때, 김건준이 말했다. 권기영은 손을 멈칫했지만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잖아도 곧 일어나 봐야 합니다. 모처럼 뵙게 되었는데 아쉽지만요.”
화장실에서 들었었나.
권기영의 통화를 반이나마 들었다면 ‘아쉽다’는 게 빈말이라는 건 알았을 텐데도 김건준은 “그렇군요.”라며 정말로 아쉬운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토요일 밤의 약속이라니, 연인 되시는 분과 만나시나 보죠.”
“……, 비슷합니다.”
권기영이 흘끗 김건준을 보고 대꾸하자, 별로 자세히 말하고 싶지 않다는 숨은 뜻을 알아차렸는지 혹은 처음부터 크게 관심은 없었는지 김건준은 더 캐묻진 않았다. “다음에 기회 있을 때 만나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라고 인사치레처럼 말하며 빙긋이 웃을 뿐.
어쩐지 속이 불편해졌다. 인사치레의 답도 나오지 않아 권기영은 떨떠름하게 예, 하고 애매한 대꾸만 했을 뿐이다.
“그럼 다음에 느긋하게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반가웠습니다.”
후식까지 다 먹은 권기영이 시계를 보며 선뜻 일어나자 김건준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야말로 뵙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하고 내미는 그의 커다란 손을 마주 쥐고 악수를 나눈다.
김건준은 권기영을 마주 보며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조금 짙어지는가 싶었다. 맞잡고 있던 손에 희미하게 힘이 들어갔다.
순간.
권기영은 저도 모르게 그의 손을 떨치듯이 놓았다. 이유 모를 뜨끔한 기분이 든 탓이다. 동시에, 그렇게 떨친 순간 아차 싶었다. 실례라는 사실보다도 자신이 동요한 모습을 드러낸 데에 낭패한 심경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건준의 손은 떨려 나지 않았다. 권기영이 뿌리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커다란 손아귀는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
권기영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김건준 역시 권기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천천히 웃었다.
“사랑스런 연인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나직한 말이 끝남과 함께 손도 떨어져 나갔다.
권기영은 표정 없는 얼굴로 김건준을 쳐다보았다.
여상하게 ‘그럼 우리는 차라도 마시러 갈까요. 이대로 헤어지기에는 아쉬운 시간인데.’라고 누이와 말을 나누던 김건준은 뒤늦게 그 시선을 알아차린 듯 권기영에게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고, 그런 그를 잠시 더 바라보던 권기영은 설핏 눈살을 찌푸렸지만, 결국 별말 없이 인사를 맺었다.
불뱀에 물린 듯 손이 뜨거웠다.
*
대부분의 야생에서 수컷 사이의 상하 구분이 엄격한 것과 같이 인간도 마찬가지다. 눈앞의 수컷이 나보다 위인지 아래인지, 그들은 본능적으로 구별한다. 구분하기 미묘한 판세에서는 얼마간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보이지 않는 호승심을 견주기도 하나 결국은 암암리에 위아래가 결정되는 것이다.
권기영은 타인에게 뒤진다는 기분을 맛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태어나서부터 줄곧, 이 상대에게만은 당해 낼 수 없다는 생각을 한 적이라곤 어릴 적에 부친에 대해서뿐이었다. 그는 언제나, 그를 받쳐 주는 배경으로든 그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든 남보다 뛰어났다. 그런 자신감이야말로 자신감을 더욱 키워 나가는 밑거름이 되어 순환했다.
그가 가장 유쾌해지는 순간은, 그와 마찬가지로 여태 다른 수컷들의 머리 위에서 자신만만하게 그들을 내려다보아 온 빼어난 수컷이 그의 앞에서 꼬리를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희열과도 같았다. 날고 긴다 하며 꼿꼿이 치켜세운 머리 위로 자존심을 이고 있던 놈들을 발밑에 밟는, 그 유쾌한 환희.
권기영은 최고의 수컷이었다.
언제나. 어디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