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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보고서-107화 (10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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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장, 나의 전생 보고서.

겨울이 끝난 초봄, 하늘은 유달리 화창한 날씨를 자랑했다. 눈이 부실정도로 청명한 햇살은 오늘 있을 축제를 축복하는 듯 보였다.

오늘은 모두가 손꼽아 기다리던 제6대 황제, 아스타시온의 즉위식이 이루어지는 날이었다.

거리마다 축제를 즐기기 위해 사람들이 거리로 뛰어나왔다. 황가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술과 음식을 아낌없이 즐겼다. 비록 맥주와 호밀빵, 고기 스튜에 불과했지만 백성들에겐 이보다 만족스러운 만찬이 없었다.

즉위식은 본궁,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때만 열리는 영광의 방에서 치러졌다. 모든 가문의 귀족들이 참석했다. 변경백들조차 제 영지를 비웠다. 그러나 참석지 않은 귀족도 있었다. 신흥 귀족인 클레먼스 변경백이다.

차 대륙인의 외양을 구경하려던 이들은 대리인 자격으로 참석한 솔라를 보며 실망했다. 건강상의 문제로 참석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필경 클레먼스 변경백과 황제의 사이가 틀어졌을 거라 지레짐작했다.

사소한 흥밋거리와 별개로, 영광의 방은 그 이름답게 아름답고 장엄했다. 3층 높이의 거대한 천장은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해서 햇살을 오색으로 투과시켰다. 높게 솟은 기둥은 황가의 권위를 상징했다. 오르간 파이프가 장엄한 음악을 연주하며 분위기를 고취시켰다.

방의 중심에 깔린 붉은 비로드가 그 길을 걸을 이가 누구인지 알려주었다. 그 끝에는 주신 벨라드의 교후(敎后)가 자리 잡았다. 아직 살아있는 선황이 그 자리에 앉아 왕홀을 물려주어야 하지만, 팔라티온은 와병 중으로 렉스 그랑드에 따라 교후가 대신하였다.

교후는 넉넉한 풍채로 인상 좋은 이웃집 아저씨처럼 보였으나 적당한 속물이었고, 대단한 신심을 가진 자였다. 약삭빠르게 왕홀의 인계자로 나선 교후를 보며 귀족들은 역시 틈을 놓치지 않았다며 쑥덕거렸다.

다이아몬드로 만든 묵주를 굴리며 교후, 기르지안은 속으로 신에게 기도했다. 사람들의 추측과 달리, 교후는 속물적인 목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즉위식이 열리기 전날 밤에 드렸던 기도에 벨라드가 응답했기 때문이다. 신이기에 인간의 언어로 계시를 받진 못했다. 그저 환희에 찬 빛이 그들을 쓰다듬었다. 현 황제를 축복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리하여 왕홀의 인계자가 되었다.

“노스트라드 공작이자, 황태자 아스타시온 전하 드십니다!”

호명관이 큰소리로 외쳤다.

거대한 문의 끝에 황태자 아스타시온이 서 있다. 백호의 털로 만든 망토를 걸치고, 흰색 예장을 입은 남자는 그야말로 지배자가 되기 위해 태어난 듯 보였다. 황가 특유의 금발, 수려한 외양, 건장한 체구는 황제라 믿을 수 없을 만큼 훌륭했다. 조금 냉담한 표정이 흠이었으나, 황제라는 지위를 생각하면 또 이야기는 달라진다.

“나를 바른길로 인도하시는 올바른 신이시여, 영원을 우리에게 약속하여 주시옵소서-.”

교후가 찬트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땅딸막한 사내에게서 나오는 목소리라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찬송가가 홀을 가득 메웠다.

아스탄은 찬가에 맞추어 붉은 비단 위를 걸었다. 수많은 귀족들이 동시에 허리를 숙여서 새로운 황제에 대한 경의를 표현했다. 거침없는 걸음은 교후의 앞에 도착해서야 멈추었다.

“……그란디아의 영광을 잇고자, 황태자 아스타시온을 황제 위에 올려 백성을 살피고자 하옵니다. 이 모든 영광은 주신에게 있으리.”

교후가 낭랑한 목소리로 축사를 읊었다. 모든 절차는 예에 맞추어서 진행되었다. 그 엄중함이 이루 말로 할 수 없어서, 모든 이들은 숨죽인 채 새로운 황제의 즉위식을 바라보았다.

“위대한 황태자는 황룡의 축복 대신 변치 않는 것을 가져왔으니, 이는 심장이라. 당신의 치세는 영원한 영광과 번영을 약속할 것입니다.”

이윽고 축사를 마친 교후가 황관을 아스탄의 머리에 씌웠다. 사제의 도움을 받아서 소중히 보관된 황룡 가리온의 심장으로 만든 왕홀을 꺼내 들었다. 통치권의 상징으로, 왕홀이 있어야만 신황의 정통성을 인정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왕홀에 모였다. 우아하게 세공된 봉의 중심에 금빛 보석이 반짝였다. 일주일도 남지 않은 즉위식에 맞추어 손재주가 좋은 장인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물건이다.

아스탄이 뒤돌아섰다. 서늘한 미소가 그의 수려한 입가에 떠올랐다. 사람들을 제압하듯 매서운 기운이 영광의 방 안으로 터져 나왔다.

“황제 폐하, 만세!”

모든 귀족들이 고두할 듯 허리를 숙였다. 정중한 인사를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다.

“본공은, 아니 짐은 신의 대리자로서 그대들을 공정히 다스리겠다.”

아스탄의 연설은 짧았다. 귀족들은 순간 당황하였으나, 이내 그 표정을 감추었다.

언제나 황제가 되는 황태자들의 축사는 길고 장황했다. 황룡 가리온의 힘을 빌었으니 그 권력은 자신에게 있다는 말을 돌리고 돌려서 표현했다. 그러나 현 황제는 그리 할 필요 없었다. 축복보다 더 대단한 걸 가져오지 않았는가. 누구도 왕홀을 장식하는 보석이 황룡의 심장이 아니라 부정하지 못했다.

“모든 귀족의 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맹세를 표하시오.”

충성 맹세가 시작되었다. 모든 가문의 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의 손등에 입 맞추며 충성을 약속하는 대관식의 꽃이다. 4대 공가부터 시작하여 오등작 순서대로 진행되었는데, 클레먼스 변경백만이 빠지자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그는 충성 맹세가 끝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클레먼스 변경백은 짐에게 충성맹세를 하지 않는 유일한 귀족이다.”

아스탄은 웅성거림을 차갑게 일축했다.

클레먼스 변경백과 그 사이가 틀어지기라도 한 것일까. 현 황제를 제위에 올리는 데 가장 늦게 합류했으나, 큰 공헌을 한 이가 클레먼스 변경백이었다. 그를 빼놓는다는 건 말도 되지 않았다. 노스트라드 공가를 그에게 주며 붙잡을 거로 예상했는데 전혀 생각 외였다.

“……클레먼스 변경백이 들기를 청합니다.”

호명관이 망설이다가 외쳤다.

“들라 하라.”

아스탄이 드러나지 않게 미간을 찌푸린 채 허했다.

대관식에 부르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윤의 몸 상태가 최악이었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열이 심하게 올랐다. 열꽃이 피어 발갛게 달아오른 본인은 부득불 참석하겠다고 했지만, 아스탄이 그를 진정 시켰다. 무리해가며 참석할 필요 없었다. 대관식의 진정한 목적은 충성 서약이다. 그러나 아스탄은 윤에게 맹세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문이 열리고 윤이 들어섰다. 조금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미리 윤을 위해 준비된 예장을 입었다. 아스탄과 대비하듯 짙은 남색 기사복은 윤의 옅은 피부색을 돋보이게 했다.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숨을 들이켰다. 소드 마스터라하여 험상궂은 무사를 상상하였는데, 실제 클레먼스 변경백은 무척 앳되고 아름다운 기사였다.

점점 아스탄과 윤이 가까워졌다. 두 사람은 오로지 서로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윤이 검대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힘을 불어넣자 검이 팟-! 소리와 함께 타올랐다. 바람이 불어오지도 않건만 가지런하게 쓸어 넘긴 검은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마나가 점점 제련되며 뚜렷한 검의 형태를 취한다.

“소드 마스터-.”

누군가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윤은 아스탄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검을 내밀었다.

“그대는 나의 주공이자 나의 친우, 그리고 영혼의 동반자입니다. 내 검은 그대의 적을 위해 싸울 것이고, 나의 방패는 그대의 적을 막습니다. 나의 뜻은 그대의 뜻과 함께합니다. 그대는 왕관의 무게를 아는 자, 나는 기사의 도리로서 그대의 뒤를 따르며 같은 길을 걷겠습니다. 그대의 광영이 영원하기를.”

윤은 천천히 아스탄의 손등에 입 맞추며, 검공이 시황제에게 약조하여 유명해진 기사의 맹세를 읊었다.

갑자기 오색찬란한 빛이 그들에게 쏟아졌다. 젊은 황제의 머리 위로, 아름다운 기사의 등으로 온화한 빛이 흘러내렸다. 마치 그들에게 신의 축복이 내린 듯 보였다. 마치 전설의 재림과도 같아서, 감성이 풍부한 귀족들은 신성이 주는 감격에 눈물까지 글썽였다.

새로운 황제가 등극한 밤, 화려한 연회가 열렸다. 이제껏 열렸던 그 어떤 연회보다도 호화로웠으며, 다채로운 볼거리로 가득했다.

가장 상석에 앉은 황제는 덤덤한 낯이었다. 소드 마스터에게 다시없을 충성 맹세를 얻었음에도 그리 기뻐 보이지 않는다. 일부러 그런 척하는 건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클레먼스 변경백, 윤은 흥청거리는 사람들 속에 적당히 섞여들었다. 술을 마시며 한담을 나누기도 했고, 적당히 춤을 추었다. 윤에게 쏟아지는 시선은 호의와 적의가 혼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사교적인 미소를 짓는 윤에게 아스탄이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물러났다. 그들의 주변으로 둥근 원이 생겨났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그대에게 청하지. 레이디 윤, 짐과 함께 춤추어주지 않겠소?”

아스탄이 손을 내밀었다.

“그리 다짜고짜 청하시면 어떤 여인도 거부할 겁니다. 그러나 저는 남자이니 허락하지요.”

윤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아스탄의 손을 맞잡았다. 느릿한 춤곡에 맞추어 몸을 움직였다. 남자들끼리 춤을 추는 게 드물었지만,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었다. 그러나 귀족들은 황제의 기행이 정적(政敵)에게 보여주는 도발이라고 생각했다. 초월자가 둘이나 있으니 함부로 굴지 말라는 경고로 받아들였다.

아스탄이 윤의 허리를 끌어안고 빙글 돌았다. 예전처럼 낭랑한 웃음이 터져 나오지 않았으나 온화한 분위기였다. 춤곡이 끝난 후 그들은 발코니로 나왔다. 멀쩡한 체하느라 많은 기력을 소진한 윤은 의자에 주저앉았다.

“윤, 괜찮은 건가?”

“멀쩡해. 나는.”

윤이 손을 내저었다. 아스탄이 울컥했다. 몸을 가누는 것도 힘들어하는 주제에 늘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아스탄은 손을 뻗어 윤의 이마를 짚었다. 마치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차라리 자신이 아프기를 바랐다. 아스탄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 고통스러우면서도, 울컥 화가 치솟아 올랐다.

“그래, 이 이야기는 그만두도록 하지. 충성 맹세라니. 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나도 모르겠어. 그냥 같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영생을 각오하면 이곳에 남을 수 있다. 가리온도 해낸 방법을 다른 용이 해내지 못할 리 없다. 그들이 심장을 쪼갤 필요도 없었다. 이미 재료는 충분했으니까. 다만 남은 시간이 문제였다.

벨라드는 자신이 돌아가면 더 이상 몸이 나빠질 일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서울로 돌아가서 또다시 혼자가 되면 견딜 수 있을까? 윤은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더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이제 때가 된 것 같군.”

아스탄이 가라앉은 얼굴로 말했다. 빛을 등진 남자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윤은 그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었다. 웃는데, 어쩐지 우는 듯 보였다.

“-그러니 기다려라.”

윤의 검은 눈동자가 떨렸다. 아스탄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윤의 목에 걸었다. 무엇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아스탄이 강하게 어깨를 붙잡아서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눈빛은 마치 기억 속에 새기듯 절박했다.

“오픈게이트. 서울.”

본디 가지고 있던 윤의 목걸이를 쥔 아스탄이 속삭이듯 말했다. 익숙한 지명에 윤이 눈을 크게 떴다. 그는 결코 몰라야 할 이름이다.

문스톤은 어쨌든 시전자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윤의 바로 뒤편에서 문이 생겨났다.

“아스탄?”

“기다려다오.”

“아스! 이봐! 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기다리고, 기다려라. 그리하면 그가 머나먼 시간과 공간을 건너올 것이다.”

아스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리온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윤은 결국 이곳으로 왔다. 그저 레나드가 죽고, 자신이 태어나고, 자랄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을 뿐이다. 과연 악독한 자다. 언제 올 거라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저 윤이 이곳에 올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지독한 희망 고문만 주었다는 점에서 잔인한 심성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은 윤을 그리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번엔 네가 기다려라. ……짐은, 나는, 꼭 그대를 찾아갈 것이다.”

“이봐! 아스! 이렇게 갑작스럽게!”

아스탄이 직접 문을 열었다. 그리고 윤을 밀어 넣었다.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남자의 힘을 뿌리치는 건 쉽지 않았다. 아스탄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다. 제가 본 표정이 맞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윤은 그를 볼 수 없었다. 우는지, 아니면 웃는지.

시간과 공간을 넘었다. 만화경처럼 무수히 많은 색채가 그의 눈을 어지럽혔다. 부신 눈을 깜빡일 때마다 시야가 변했다. 토할 것 같은 기분에 윤은 결국 눈을 꾹 감았다. 수초쯤 지났을까. 윤은 자신의 집에서 정신을 차렸다.

탁한 공기가, 희박한 마나가 윤을 반겼다. 그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란디아에서 입고 있던 옷 그대로였다. 변한 건 없었다.

-빠아앙-!

트럭 한 대가 요란한 경적을 울리며 도로를 달려간다. 화려한 밤의 네온사인이 그의 시야를 사로잡았다.

돌아왔다. 한국으로.

윤은 입술을 꾹 깨문 채,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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