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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장, 나의 전생 보고서.
종장, 나의 전생 보고서.
가리온은 죽었고 산적들은 도망갔지만, 그들이 처리해야 할 일은 산재해있었다.
우선 전투에 휘말리지 않게 보호하고 있던 사람들을 찾았다. 아공간과 이어지는 문을 열자 어둡고 축축한 땅속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오들오들 떠는 모습이 보였다. 비록 아공간으로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바깥과 이어진 탓에 전투의 충격이 그대로 전해진 탓에 모두 겁먹은 모습이었다.
“자, 이제 밖으로 나오라고.”
율리히가 그들에게 손짓했다. 사람들은 머뭇거리며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예!”
그중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예여경이었다. 여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자, 다른 이들도 따라서 몸을 움직였다. 밖으로 나오자 불에 탄 매캐한 공기가 그들을 반겼다.
“사, 살았다.”
누군가 중얼거렸다. 산적들에게 납치당할 당시엔 죽는 것만 못한 삶을 살게 될 거라 걱정했다. 그러나 운이 좋게 구명 받았다. 이는 천운이나 다름없었다. 사람들은 다리가 풀린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감격에 눈물을 쏟는 이들도 있었다.
사람들을 헤치고 아혼이 쏜살같이 여경을 향해 달려갔다.
“아가씨!”
“아혼!”
여경과 아혼은 서로를 끌어안고 꺼이꺼이 울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아혼의 얼굴은 참으로 한심했다. 위대한 주신 벨라드라고 믿을 수 없었다. 어차피 그가 죽을 때까지 벨라드가 다시 튀어나올 일은 없으리라.
한참 동안 눈물의 해후를 만끽하던 여경은 율리히를 발견했다. 여경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아혼이 그에 대해 설명했다.
“아가씨. 저분이 요정족 장로이신데, 우리를 구해주셨습니다.”
“……정말이야, 아혼? 우, 우리가 찾던 요정족. 그것도 장로라고?”
여경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이내 그녀는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눈물을 야무지게 닦아낸 후 재빠르게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예화 상단의 차기 상단주 예여경입니다. 위대하고 현명하며 아름다운 요정족 장로시여.”
율리히의 앞에 선 여경은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래, 내가 좀 위대하고 현명하며 아름답지.”
여경의 찬양에 율리히의 표정이 흐뭇해졌다. 그래, 역시 난 대단한 몸이야. 하고 고개까지 끄덕끄덕했다. 가리온에게 아부로 마음을 풀어놓고 뒤통수를 쳤던 주제에, 저 역시 다르지 않았다. 윤과 아스탄은 한심한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부디 청컨대, 장로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맞아, 나에게 용건이 있어?”
평소였다면 율리히는 단칼에 잘랐을 터였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겁먹지 않고 꿋꿋한 여경의 태도에 율리히는 너그러워졌다. 결코 여경의 입바른 아부 때문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야기를 꺼내는 무례함을 용서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위대한 요정족과 저희 예화 상단이 정식으로 거래하고 싶습니다.”
“…흠.”
“지금 당장 거래를 하자는 게 아닙니다.”
여경의 필사적인 설득이 이어졌다.
“일단 차근차근 대화의 물꼬를 튼 후에 거래의 조건이 만족스러우시다면…….”
율리히가 턱을 문질렀다. 확실히 이 상황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나쁘지 않은 요청이었다. 요정족 젊은이들 사이에서 폐쇄된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었다. 그 선두에 율리히가 있다.
물론 율리히는 윤을 제외한 인간들을 믿지 않았다. 믿지 못할 자들과 거래하는 것 보단……. 율리히의 차가운 시선이 아혼을 훑어보았다.
아혼은 얼빵한 얼굴로 “역시 우리 아가씨. 너무 대단하고 멋지십니다.”하고 제 손을 부여잡은 채 여경만 쳐다보고 있었다. 참으로 어벙한 작자였다. 후일 두 사람이 연을 맺는다면, 아혼은 제대로 공처가가 될 게 틀림없을 것이다. 역시 주신이 몸담고 있던 몸이라 믿기 힘들지만, 악한 자가 아닐 거라 믿었다. 영혼을 꿰뚫어보는 자신의 위대함이 아니었더라면 이루어지지 못했을 거래다.
“좋아! 거래하지.”
율리히의 대답은 윤과 친구답게 호쾌했다.
“저, 정말이십니까?”
여경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지금 자신이 들은 게 유보가 아닌 승낙이 맞는가? 아혼의 표정을 보니 착각이 아니었다. 아혼은 감격하여 눈물 콧물을 또다시 줄줄 흘릴 기세였다. 여경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그, 그럼 이후의 대화는 어떻게…….”
지금 상황에선 확실히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긴 힘들다. 약속을 잡은 뒤 후일을 도모하는 게 맞았다.
“일단 나중에 얘기하고. 요정의 숲으로 찾아오도록 해. 물론 제대로 대화할 채비를 갖춰서. 좌표는 알려줄 테니까.”
“예, 그리하겠습니다!”
씩씩한 여장부는 납치를 당하는 수난을 겪었으나 이게 다 액땜이라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오히려 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끌려갔기에 이루어진 거래나 마찬가지였다.
아공간에서 스태프를 꺼낸 율리히가 땅을 내려쳤다.
“열려라 똥개!”
여전히 괴상한 주문과 함께 문이 생겨났다. 사람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윤은 부끄러움에 이마를 짚었다. 일을 저지르는 건 율리히인데, 항상 수치심은 자신의 몫이다.
“이 문을 넘어가면 네 동료가 있을 거야. 그리고 납치당한 이들을 알아서 잘 돌려보낼 것. 그게 내 첫 번째 과제다.”
“예? 예!”
여경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자자, 우리 모두 돌아가요. 집으로.”
여경이 큰소리로 외쳤다. 불안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던 여자들이 여경의 뒤를 따랐다. 산적을 떠올리게 하는 남자들보단 같은 성별인 여경의 말이 여자들에게 잘 먹히는 듯 보였다. 한줄로 서서 졸졸 따라가는 모습이 마치 어미 새를 뒤쫓는 병아리 떼 같았다. 남자들 또한 여경의 뒤를 망설임 없이 따랐다.
호쾌한 여장부는 사람을 이끄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병아리 떼 속에 아혼도 포함되어 있다.
“가, 감사했습니다. 이 은혜는 반드시 잊지 않겠습니다.”
게이트를 넘어가기 직전, 아혼이 큰소리로 외치며 허리를 꾸벅 숙였다. 주신이 은혜를 잊지 않으면 얼마나 큰 보은을 받게 된다는 거지? 윤은 피식 웃고 말았다.
윤과 일행들 역시 게이트를 통해 요정의 숲으로 돌아왔다. 문을 박박 긁으며 그들을 기다리던 목도리가 캬웅캬웅 슬픈 목소리로 울었다. 윤은 달래듯 새끼 여우를 끌어안아 주었다.
목도리는 커다란 눈에서 방울 같은 눈물을 흘리며 자기가 겪은 수난을 토로했다. 육식을 삼가는 요정들은 새끼 여우에게 나무 열매나 주었다. 물론 잡식이라 먹어도 굶어 죽진 않지만, 목도리는 고기가 너무 그리웠다.
“목도리 잘 지냈어?”
윤의 품에서 폴짝 뛰어내린 목도리가 잎사귀 그릇에 담긴 나무 열매를 가져왔다. 그리고 한입 먹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우울한 표정으로 바닥에 축 늘어진 체하며 그동안 자신이 겪었던 배고픔을 일러바쳤다. 윤은 인간인지라 여우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오히려 엉뚱하게 이해했다.
“요정들이 잘해줘서 계속 먹고 자고 했다고?”
-캬악!
내 말을 발로 알아들었냐? 속상한 목도리가 윤을 솜방망이로 마구 때렸다. 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그럼 나무 열매를 하나 먹고, 배불러서 숨을 내쉬고, 누워있는 게 잘 지냈다는 말이 아니고 또 무어란 말인가.
“요정 족 음식이 네게 잘 맞나 보다. 고새 무거워졌다.”
모든 걸 포기한 새끼 여우는 눈물만 뚝뚝 흘렸다. 아스탄에게 목도리를 넘겨준 윤이 율리히를 돌아보았다.
“율리히. 내 머리를 좀 잘라주지 않겠어?”
“왜? 잘 어울리는데.”
율리히가 고개를 갸웃했다. 머리의 움직임에 따라 긴 머리채가 샴푸 모델처럼 찰랑거렸다.
“넌 안 불편해?”
“나야 뭐, 늘 길었으니까.”
율리히의 머리카락은 무척 길어서 종아리까지 왔다. 저렇게 긴 머리를 하고 있으니, 자신이 불편한 이유를 이해할 수 없을 터였다. 윤은 허리까지 오는 제 머리채를 붙들고 투덜거렸다.
“나는 불편해. 싸울 때도 엄청 거치적거렸다고.”
덕분에 머리채를 잡히는 신선한 경험도 겪었다. 역시 가리온의 거시기를 발로 더 차줬어야 하는데. 윤이 이를 갈았다. 두 사람끼리 할 얘기가 있어서라는 걸 눈치를 챈 아스탄은 조용히 방을 나섰다. 언제나 말없이 배려해주는 그가 너무도 고마웠다.
윤은 등을 돌리고 의자에 앉았다. 율리히는 머리카락을 잘라내기에 적당한 가위를 가지고 돌아왔다. 우선 빗질을 했다. 머리를 자르기에 앞서 촘촘한 나무 빗으로 머리를 빗어 내리자 온몸이 노곤노곤 해졌다.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두 사람 사이엔 어떤 대화도 없었지만, 오랜 시간이 빈자리를 메웠다.
“이제 자른다. 진짜 후회 안 하는 거지?”
“그럴 일 없네요.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또 자라나라 머리 머리나 해주던가.”
율리히가 킬킬 웃었다.
“그럼 진짜 자른다.”
먼저 머리를 한 다발로 묶은 후 가위로 단숨에 잘라냈다. 가발로 만들어도 좋을 만큼 길고 아름다운 머리채를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두었다. 그리고 엉망으로 뻗친 머리카락을 정리해나가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여전히 대화는 없었고, 가위질하는 소리만 방안을 가득 메웠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침묵을 깬 건 윤이었다.
“율리히. 가리온에게 이야기를 들었어. …너희들이, 내 비밀을 알고 있었다고.”
율리히는 고개를 푹 숙였다. 윤이 보지 못하는 아름다운 요정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월스턴과 안즈마네, 율리히는 말할 수 없는 사실을 공유했다. 숨기는 게 없던 그들의 사이에 처음으로 생겨난 비밀이었다.
가장 먼저 비밀을 알게 된 건 월스턴이다. 황룡을 만난 월스턴은 영생을,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을 묻는 대신 친우가 돌아갈 방법을 물었다. 그렇게 황룡이 알려준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가게 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데, 친우는 집을 그리워한다. 사실을 알려주었을 때 윤이 느낄 절망이 두려웠다. 혼자 숨겨오던 비밀은 레나드가 태어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안즈마네와 율리히도 알게 되었다. 우연히 술을 마시다가 말실수를 했기 때문이다.
진실을 알게 된 그들이 느낀 절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윤이 알게 되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먹먹한 아픔이 심장을 후벼 팠다. 차라리 헛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원동력으로 품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그들은 공범이 되었다.
“네게 거짓말한 건 정말로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후회하지 않아. 반대로 생각해봐. 월스턴이 다른 세상의 사람인데,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가면 죽을 거래. 그럼 넌 우릴 돌려보낼 거야?”
“……아니.”
윤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요정족 장로는 모른다고 했는데, 그것도 네가 한 일이야?”
“아니. 할아범도 그건 정말 몰랐어.”
윤은 벨라드에게 하듯 주먹을 날리지 않았다. 다만 몸을 돌려 친우를 꼭 끌어안았다.
“한 대 정도는 맞아줄게.”
“됐어. 조금 원망스럽긴 하지만, 너희들에게 고마워. ……정말 잊지 못할 거야.”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응.”
“만나자마자 이별이네.”
율리히 역시 윤을 마주 안았다. 윤에게 미안한 일이 참 많았다. 비록 본심이 아니라고 하나, 월스턴과 안즈마네가 죽은 후 냉정하게 윤을 내친 행동은 두고두고 율리히를 괴롭혔다. 그런 짓도 윤은 용서해주었다.
가여울 정도로 착한 친구에게 왜 이런 시련만 찾아오는 건지. 벨라드에게 파이어볼 한방이라도 먹여주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아혼이 오면 괴롭혀야지. 율리히가 그리 심술궂게 마음먹은 순간, 아혼은 원인 모를 오한에 몸을 떨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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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까지 연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