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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아버지!]
가리온이 피를 토하듯 외쳤으나 벨라드는 돌아보지 않았다.
“초월자의 힘을 실어서 역린에 쏘아 보내면 되는 일이란다. 활은 네 또 다른 특기이지 않니.”
마치 벨라드는 윤에 대해 모든 걸 아는 듯 보였다. 그의 말대로 윤은 십팔반병기(十八般兵器) 모두에 능통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잘 쓰는 건 검과 활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이었다. 비록 제법 유망주라 불렸던 검도 소년이라 하나, 윤은 자신이 천재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좋게 평가해봤자 수재 정도다. 그러나 남들은 수십 년을 부딪쳐도 넘을 수 없는 벽을 윤은 간단하게 넘었다.
월스턴이나 안즈마네가 희대의 천재라고 불릴 정도였음에도 초월자의 벽을 깨는 데 윤 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두 가리온의 육체를 입었기 때문이 분명했다.
“초월자가 운용하는 기운은 순수한 힘의 결정체란다. 내가 직접 처리하면 좋으련만, 아직 이 몸은 그 경지에 닿지 못 했구나…. 신위로 처리하자니, 가리온을 억누르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나로선 무리란다. 미안하구나.”
“좋아요. 제가 할게요.”
윤은 흔쾌히 승낙하며 손을 내밀었다. 벨라드가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좀 더 생각해보라는 듯 이어 말했다.
“하지만 이는 간단한 일이 아니란다. 신을 살해한 업보는 어떻게 돌아올지 모른단다.”
윤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다시 생각해보아도 결심은 바뀌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가도 몸이 멀쩡할지는 모를 일이었다.
앞으로 요정족 장로로서 몇 백 년을 살아가야할 율리히나, 황제로서 앞길이 창창한 아스탄에게 무거운 짐을 얹어줄 순 없었다.
“저도 저쪽에 빚이 있으니 상관 없…….”
윤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윤을 붙잡아 자신의 뒤로 빼낸 아스탄이 벨라드와 대치하듯 섰다. 윤은 아스탄의 너른 등만 볼 수 있었다. 또다시 자신을 지키려는 듯 막아선다. 누군가에게 보호받는 기분은 생소했다.
“아니, 가리온을 죽이는 건, 이쪽에게 맡겨 주시지요.”
아스탄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시야가 어지러웠다. 게다가 몸을 움직이자 임시로 봉합해두었던 상처가 도로 터졌다. 흘러내리는 피를 대강 닦아낸 그가 벨라드의 손에서 활을 뺏어들었다.
“적어도 스스로 저지른 짓을 감당하지 못하는 신께서 주실 업보가 기대됩니다.”
벨라드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아스탄의 정체 또한 꿰뚫어보았다. 아스탄 역시 영혼의상처가 깊어 가여웠다. 모두 자신이 저지른 죄였다.
“……한 발, 단 한발만 쏘아 보내면 된단다.”
[아버지!]
겁에 질린 가리온이 마구 몸부림쳤다. 덕분에 역린이 드러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살려주세요! 아버지!]
아스탄은 활을 들어 시위를 당겼다. 흐르는 피가 눈가로 고여 들었다. 한쪽 눈이 거의 보이지 않음에도 아스탄은 개의치 않았다. 사냥은 그의 특기였다. 눈 앞의 거대한 존재는 누구도 잡지 못할 짐승이다. 개인적인 복수심은 차지하고도 사냥꾼의 피가 끓어올랐다.
활에 기운을 밀어 넣자, 천천히 금빛으로 빛나는 화살이 생겨났다. 시위를 조금 더 세게 당기는데, 뒤에서부터 자신을 끌어안아오는 체온을 느꼈다.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피비린내 사이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특유 냄새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비 오고난 후의 바람과도 같은 냄새. 언제나 잡으려고 했지만, 잡을 수 없었던 이.
“윤. 이건 네가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뭐, 어차피 인생은 한 방이야. 이미 온갖 일을 다 겪었는데, 저주 좀 받는다고 달라지겠어.”
윤은 아무렇지 않은 척 호기롭게 말했지만, 그 속에 담긴 진심을 아스탄은 깨달았다.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모두 불살라버리려는 것이다. 그러나 아스탄은 윤이 불 속에 홀로 뛰어들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래. 함께 한다면, 이 저주도 그리 괴롭진 않겠지.”
아스탄은 시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적어도 나에겐 지옥도 천국이 될 거다.”
남자는 언제나 그를 붙잡고 싶었고, 함께하길 원했다. 과거의 기억이 물밀 듯 떠올랐다. 거대한 금빛용의 모습에서, 한 남자가 겹쳐졌다. 또 다시 그 남자의 기억이다. 하필이면 지금에 와서. 아스탄은 꽉 다문 어금니에 힘을 주며 흔들리는 시야를 바로잡았다.
윤은 어렸던 자신을 데리고 직접 황룡 가리온에게 방문했다. 수십의 병사를 이끌고 떠난 길이었지만, 언제나 자신의 옆엔 윤이 있었다. 윤의 품에 안겨서 말을 탔고, 밤에는 한 침상에서 잠에 들었다. 레나드는 자신의 대부가 너무도 좋았다.
[네 대부는 이곳의 사람이 아니란다. 언젠가 너를 떠나버리고 말겠지. 하지만 윤이 영원히 널 잊지 못할 방법이 있어. 네 생각에만 사로잡힐 수 있는 묘약을 줄게.]
황룡의 축복을 받을 때는 윤도 함께할 수 없었다. 겁에 질려 홀로 두리번거리는 자신에게 금빛 악마가 속삭였다.
[……언젠가 이곳에 돌아오게 될 거야. 너만을 생각하면서.]
긴 손가락이 이마를 짚었다.
[자신이 늙지 않는 존재라고 착각을 하게 되면, 그 해답을 찾아 이곳으로 돌아오겠지.]
축성을 마친 악마는 레나드에게 작은 약병을 내밀었다. 윤에게 알리면, 그가 너를 미워하게 될 거라 협박하는 걸 잊지 않았다.
아이는 윤이 자신을 미워하는 게 무서워서, 황룡 가리온과 나눈 이야기를 꼭꼭 숨겼다. 후에 극독이라는 걸 알게 된 후에도 버리지 않았다.
그때는 순수한 마음이 비틀린 후였다. 사랑에 빠진 어리석은 남자는 제대로 된 사리판단을 하지 못했다. 차라리 모든 걸 털어놓았으면 파국을 맞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린 치기에 사랑하는 사람을 최악으로 떠나보내는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윤이 죽은 후, 레나드는 그를 기다렸다. 자신이 죽은 후에도 언젠가 그를 만날 수 있기를.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미쳐버렸다.
레나드 역시 천재였다. 그리하여 자신의 모든 생을 걸어 주술을 걸었다. 율리히가 장로의 기억을 받아들인 것처럼, 황족을 제 숙주로 삼았다. 윤이 돌아왔을 때, 그를 만났을 때 자신이 깨어날 수 있도록.
남자는 몰랐다. 생명체는 끊임없이 환생을 했기에 혼백은 이세상에 남아있을 수 없었고, 저주는 완성되지 못했다. 혼과 백이 찢어져 불완전한 상태로 남아 황가의 광증을 불러왔다. 기억만이 남은 저주는 끊임없이 황가의 사람들을 괴롭혔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것이 있었다. 자신이 황족으로 환생할 거라 가정하지 못한 부분이다.
아스탄이 악몽을 꾸면서도 유일하게 광증에 미치지 않은 이유였다. 참으로 우스웠다. 자신이 환생을 한 탓에 불완전하게 기억만이 남아서 황제의 몸을 빌어 윤을 괴롭혔다. 제 계획이 이렇게 비틀릴 거라 예상하였을까.
아스탄은 쓰디쓴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그리도 궁금하던 비밀이 풀렸는데 유쾌하지 않았다. 결국 한 남자의 처절한 마음이 원흉 아닌가.
[내가 이대로 죽어버릴 것 같습니까? 고작 그 몸으로 나를 억제하는 게 전부이지 않습니까? 보십시오! 내가 당신의 힘을 이겨냈습니다!]
벨라드의 신위를 떨쳐낸 가리온이 몸을 일으키며 광소를 터뜨렸다. 벨라드가 크게 비틀거리다가 붉은 피를 왈칵 토해냈다.
벨라드는 완전히 이 땅에 강림한 게 아니다. 그 역시 윤회의 수레바퀴를 돌고 있었고, 위기의 순간에서 잠시 깨어난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가리온을 죽이기 위해 활에 힘을 불어넣은 탓에 더욱 약해져 있었다.
가리온이 고개를 완전히 치켜든 순간 역린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아스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아스탄! 쏴!”
아스탄이 활시위를 놓았다. 무형의 화살은 정확히 가리온의 역린에 틀어박혔다. 가리온이 몸부림쳤다. 마치 비가 내리듯 붉은 피가 쏟아져 내렸다. 신도 붉은 피가 흘렀다. 틈을 놓치지 않고 연거푸 살을 쏘아 보냈다. 벨라드는 단 한 대라고 했지만 그를 믿을 수 없어 확인사살을 하듯 완전히 역린을 깨부쉈다.
[사, 살려주…….]
“미안하구나.”
가리온의 거체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굉음과 함께 불어 닥친 바람을 아스탄이 몸으로 막아내었다. 그의 품에 안긴 채 윤은 가리온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복수의 끝은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그저 허무한 감정만을 남겼다.
가리온은 환한 빛에 휩싸이더니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오른쪽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윤은 그제야 놈이 죽지 않는 이유를 깨달았다. 인간의 심장이 위치한 곳을 공격했으니 당연한 거였다. 검기를 터뜨려 내장을 박살냈다고 하지만, 심장을 직접 공격한 게 아니다. 마나로 보호했으니 별 타격이 없을 터였다.
청룡 이트라는 인간의 몸으로 죽었다고 하였으니, 오른쪽 가슴을 공격했으면 승산 있는 싸움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다 끝난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미안하다. 네가 이리 변한 것은 모두 내 책임이로구나.”
벨라드는 그의 곁에 가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가리온이 피가래가 끓는 목소리로 띄엄띄엄 말했다.
“아, 아버지… 주, 죽기 싫…….”
“함께 윤회의 길을 걷자구나. 외롭게 두지 않으마.”
벨라드가 천천히 가리온의 눈을 감겼다. 본디 아혼의 생이 마지막 윤회였으나, 강제로 깨어난 탓에 다시 힘을 회복하기 위해서 오랜 세월을 꿈꾸어야할 것이다. 외롭지는 않을 터였다. 제 아들이 곁에 있을 테니. 처음으로 가리온의 얼굴에 악의가 섞이지 않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내 가냘픈 숨이 끊어졌다.
“……끝났다.”
율리히가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윤은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가리온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이제껏 자신이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만든 원흉이 죽었다. 제가 겪은 아픔을 생각하면 너무도 허무한 죽음이다. 아직 분노는 완전히 씻겨나가지 않았다.
“부디 용서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이 녀석은 다시 윤회의 길에 들어서 자신의 죄를 씻겠지. 비록 네 원수라 하나 그저 제 모습을 유지한 채 이 땅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줄 수 있겠니?”
“그럴 생각도 없었어요. 진짜예요.”
윤이 고개를 저으며 대꾸하는데 울컥 목이 메었다. 그는 최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떠올렸다. 어쨌든 이곳에 와서 부모님의 죽음을 떨쳤고, 다시없을 친구들을 만났으며, 소설 속에서나 보던 모험을 겪었다. 가리온을 은인이라 칭할 수는 없었지만, 증오하는 마음을 점점 비워나가기로 결심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도 힘들만큼, 윤은 지쳐있었다.
“그냥, 쉬고 싶네요.”
윤의 말이 끝나자마자 가리온의 몸이 천천히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황룡은 빛의 가루가 되어 바람에 날렸다.
황금색 나비가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 작품 후기 ============================
류웰님 및 이 소설을 읽고 추천과 코멘트를 달아주신 모든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소장본 기념 이벤트를 할까 하는데... 감상 이벤트 어떠세요? 이 시점부터 완결 이후 일주일까지. 서평란도 괜찮고, 이메일을 통한 개인적인 감상도 좋습니다! 소장본 한 분, 이북 한 분을 뽑을 예정이예요 >ㅁ